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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에 솟은 문경의 진산"
1. 대 상 산 : 주흘산(1,106m) - 경북 문경시
2. 산행시간 : 4시간 30분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7시 20분(광양로타리 육교 밑)
주흘산 - 꽃밭서덜 - 제2관문(조곡관) - 교구정터 - 주흘관 - 주차장
6. 준비물 : 회비 20,000원
중식,간식,식수, 등
7. 개념도
문경은 일반적으로 타지역에 비해 험준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는 산이 많으며, 문경시의 제일 낮은 지역인 영순면 말응리 낙동강변의 해발 50m와 동로면 명전리의 문수봉(文繡峯.1,162m) 사이에 1,110m의 기복차를 보이고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이 태백산과 소백산을 거쳐 문경시를 에워싸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달리며 동로면을 지나면서 충청북도와 도계를 이루고 있다. 이 산줄기는 시내의 크고 작은 지산맥(支山脈)을 문경시에 무수히 만들고 있으며, 산의 경사는 대체로 급하며 북쪽보다 남쪽이 더욱 급하게 발달되어있다.
북동쪽 예천군 경계로부터 보면 예천 단양간 973번 지방도에 위치하고 있는 저수재(低首嶺)를 조금 지나서부터 시작되는 문경지역의 주요 산을 보면 동로면 황장산(黃腸山.1,077m), 문경시에서 제일 높은 산인 문수봉(文繡峯.1,162m), 문경시 산의 으뜸인 대미산(大美山.1,115m)에서 포암산(布巖山.962m)으로 달린 후 잠시 옛적 조령로가 개통되기 전의 길인 하늘재(鷄立嶺.650m)를 만들며 다시 부봉(釜峯.916m)을 솟구쳤다가 마폐봉(馬閉峯.925m)으로 달리면서 남쪽으로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1,106m)을 문경읍 뒤편에 솟게 하였다.
마폐봉은 바로 밑에 문경 제3관문(鳥嶺關.642m)을 두고 조령산(鳥嶺山.1,026m)으로 달리면서 주흘산과의 사이에 조선시대의 영남과 한양의 교통로며, 현재 사적 제147호와 경상북도 도립공원인 문경새재 1,2,3관문을 두고 있다.
8. 코스가이드
주흘산 산행은 제1관문에서 우측(동쪽)의 곡충골을 따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초입은 신작로 길이라 좀 지루하다. 그러나 약 20분 남짓 걸으면 계곡을 좌측으로 건너게 되며 신작로 길은 이내 끝이 나게 된다. 신작로길이 끝나고 본격적인 등로를 5분여 오르면 여궁폭포 초입으로서 우측 샛길로 2~3분 거리에 여궁폭포가 있으므로 꼭 들러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해야 할 것이다. 여궁폭포를 구경했다면 다시 등로로 나와 급한 오름길을 따라 나선다. 그러면 폭포 위의 바위지대에서 잠시 폭포지역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지나치고 곧 혜국사가 저만치 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주흘산 등산로는 혜국사 경내로 들어서지 않고 입구에서 우측의 산길을 휘돌아 오르게끔 되어 있다. 경사도는 그리 높지 않으나 시종 오름길이기에 한 굽이 오를 때마다 땀방울이 등어리를 적신다. 혜국사를 출발한 이래로 약 1시간즘 지나면 우측으로 지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로는 지류를 건너 15분 후 대궐터라 명명된 멋진 샘터로 연결된다. 대궐터 샘터는 그동안 흘렸던 땀을 모조리 씻어내게시리 물맛도 차고 수량도 풍부한 샘터이다.
대궐터를 지나서 다시 급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그 급한 오르막을 10분정도 이으면 서능선상 안부 4거리로서, 이제 오르막길은 능선 사면을 따라 편안한 등로로 바뀌게 된다. 그 사면길을 10분 정도 이으면 바위전망대인 전좌문이 되는데 남쪽지대를 수십 길 절벽을 하고 있어 아찔하긴 하지만 주위 풍경이 가히 환상적일 만큼 바위 병풍들이 오묘하기만 하다.
전좌문을 뒤로 하고 마지막 급경사길을 10여분 오르면 드디어 주흘산 정상을 대신하는 1075봉을 오를 수가 있다. 즉 주흘산의 진짜 정상은 북 능선상 1.5km 지점에 있는 1106봉이 되는데 그곳은 찾는 이도 드물고 조망도 신통하지 못하다. 따라서 남쪽지대가 수십 길 병풍바위를 이루고 있는 이곳 1075봉에 정상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바 주흘산 정상은 바로 이곳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인 산행이 된다면 진짜 정상을 경유하여 부봉까지 주파해도 멋진 산행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곳 1075봉 정상에서의 조망과 분위기는 너무나 좋다. 동쪽의 운달산, 북쪽의 월악산과 부봉, 서쪽의 조령산등 주위 산들도 산세가 너무 빼어나기에 조망이 좋은 것이다.
하산 코스는 서북쪽 조곡골을 따라 제2관문으로 나서는 것이 정석이다. 일단 전좌문 전안부까지 급경사 내리막을 되돌아 내려오면 우측(북쪽)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조곡골로 내려서는 길목이 된다. 오름길이 전혀 없는 시종 내리막길이나 자갈이 많아 걷기에는 그리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약 20여분 내려서면 조곡골이 시작된다. 여궁폭포가 있는 곡충골보다는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주흘산 내에서는 제일 큰 계곡일 듯 싶다. 약 30분 내려서면 계곡이 합수되면서 계곡의 풍경도 자못 계곡다워지기 시작한다. 이 합수 지점은 또한 진짜 주흘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삼거리 지점이기도 하다. 계곡합수 지점을 지나 5분 남짓 걸으면 꽃밭서덜이라는 이정표가 반긴다. 좌측 산사면에 깔려있는 수백개의 케언(돌탑)들을 지칭하여 꽃밭서덜이라 칭한다. 꽃밭서덜에서도 약 30분은 더 진행해야 만이 비로서 제2관문(조곡문)에 이를 수 있다.
제2관문부터 산행원점인 제1관문까지 문경새재 오솔길을 걷는 동안은 역사적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므로 눈여겨 볼 일이다. "산림됴심 표지석", "교구정지", "조령원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우측의 조령천의 계곡미에도 눈을 돌려 볼 일이다. 특히 교구정지가 있는 직후의 용추라 붙여진 계곡지대가 가장 절정을 이루는 곳이다. 제2관문에서 제1관문까지는 그렇게 1시간이 소요된다. 주흘산 산행은 이렇듯 제1관문을 출발하여 여궁폭포와 혜국사를 경유 정상에 오른 후, 조곡골을 따라 제2관문으로 하산, 다시 제1관문에 이른게 되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인 코스이다.
9. 주변의 명소
(1) 문경새재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타고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으로 방향을 튼다. 그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 유역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로,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늦게 개통된 ‘새 길’이었다. 이화령은 새재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닦은 ‘신작로’다. 다른 고개들도 그렇지만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양을 중심으로 온 나라를 잇는 길의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 길이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어 여섯 대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km인 데 견주어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가면 380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재는 조선시대 내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 등 외지의 사신들, 우마차를 끄는 소들의 발길까지도 묵묵히 받아내며 ‘영남대로’의 대동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조선 초기에 새재를 열고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새재 넘어 첫 번째에 있는 가장 큰 역은 유곡(幽谷)이었다. 유곡역의 중요성을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우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깍아지른 골짜기 ‘새’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이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아마 이 모두가 저마다 ‘새재’로 부르게 된 까닭이 되었을 것이다.
새재 곳곳에는 산신각, 성황당이 많다. 지금도 새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정성껏 산신과 성황신에게 제를 지낸다. 이런 마을 풍속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곳이 변치 않았다는 뜻도 될 터이다.
새재 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니만큼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이질 않았으니, 삼국시대 이래로 축성된 산성도 많다. 그중 조령성은 임진왜란 후에 공사가 시작되어 숙종 연간에 완공되었다.
새재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임란 전에 왜군에 대비해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은 죽령,새재,추풍령 세 갈래로 나뉘어 북상했다. 그중 주력부대는 새재 방면으로 길을 잡았는데, 새재에 이르러 그 험준함에 놀랐으나 정작 방비가 전혀 없었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하였다. 탄금대에 이르러서야 신립 부대와 접전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신립 장군은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결국 대패하였고 왜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 새재가 뚫리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에서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새재는 한양을 사수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새재길에는 임란을 겪은 뒤인 1594년, 충주 수문장 신충원의 건의에 따라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다. 관문 자리로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으나 가장 험준한 곳, 곧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아 있고 나무를 걸치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24곳이나 되는 응암(鷹巖)이 관문을 설치할 자리로 선정되었다. 그곳이 고개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는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이어 숙종 때에 이르러 고개 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鳥嶺關)과, 문경에서 새재를 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主屹關)을 두고 성을 쌓았다. 그 뒤로 이 새재길은 과거보러 가는 뭇 영남 선비들,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각종 물산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은, 남쪽의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길을 가장 애용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새재를 더는 걸어서 넘지 않는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기차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수안보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이 1925년에 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로 닦이면서 이 새재길은 길손을 잃고 ‘옛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옛모습을 잃어버린 죽령이나 이화령과는 달리 걸어서 넘을 수 있는 길의 면모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981년에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산책로가 단장되면서 가벼운 등산이나 산림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문경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에는 관문이 셋 있다. 옛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을 따라, 문경 쪽으로부터 수안보를 향해 주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1관문, 조곡관이란 현판이 걸린 제2관문, 조령관이라 불리는 제3관문이 차례로 놓여 있다. 제1관문부터 제2관문까지는 3.0km, 제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는 3.5km, 합하면 6.5km로 10리에 5리를 가고도 조금 더 가야 하는 길이다. 새재를 넘는 길은 영남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대로 문경 쪽에서 수안보로 가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는 방향으로 수안보에서부터 넘는 방법이 있다. 문경에서 수안보로 가는 1-2-3 관문 차례는 오르막길이고, 그 반대는 내리막길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1708년에 세워졌다. 세 관문 가운데 제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양옆으로 버텨선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이 흐르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수구문(水口門)까지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성벽 동쪽에는 높직한 곳에 끼어 있는 큰 돌에 글씨가 있으니, ‘康熙辛丑’ 곧 경종 원년(1721)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래쪽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이라는 이름자도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수많은 석수들과 역부들이 돌을 뜨고, 나르고, 정으로 쪼고, 네 귀를 맞추어 엇물리게 쌓아 지금처럼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저 성돌 하나하나에 그들의 땀방울이 스며 있으리라. 이 새김글말고도 주흘관 성벽에는 개축 기록이 여기저기 있다. 무진년이라는 각자는 영조 28년(1748)의 일이다. 또 경진, 병술이라는 간지는 고종 17년(1880)과 고종 23년(1886)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또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성축을 개수한 것은 무엇을 막으려 함이었을까. 문경관문에는 1728년 이인좌의 난 때와 1871년 경북 영해의 동학교도 이필제를 붙잡았을 때 군사가 대규모로 주둔했었다. 또 그 뒤의 일이지만 제 2, 3관문은 1907년에 국권을 되찾자고 일어선 의병들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의해 훼손된 적도 있다.
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꽤 규모를 갖춘 집 한 채가 들어앉아 있다. 새재 성황신을 모신 성황당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26년(1700)에 세웠고, 헌종 10년(1844)에 다시 지었다고 하니, 길게 잡으면 300년, 짧아도 150년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성황당 안에는 곱디 고운 여신상이 모셔져 있는데, 조선 인조대의 명신 최명길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몇 걸음 옮기면 비석들이 즐비하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정비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이 갈려 나갈 때에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대개 향리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대개 정말 백성을 아끼는 목민관보다는 이런 과시적인 ‘공적’을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그 민폐가 더 심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관찰사, 현감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위장까지 한몫 끼어 있는 것은 참 가관이다. 돌비석들 사이에는 철로 된 비까지 있다. 그 많은 선정비, 송덕비, 영세불망비들……. 과연 얼마나 많은 ‘선정’이 베풀어졌을까. 저 돌비, 철비를 세우느라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과 눈물을 바쳤을까. 그런 중에도 그 사이에 들어 있는 전나무비는 다른 비들에 비해 다소 나아 보인다. 1978년에 쓰러진 600년 된 전나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관문을 잇는 새재길을 한적한 산속의 오솔길로 연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폭 5m 안팎의 흙길로 단장했는데,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닌 부분은 참 귀하게 되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로 조심스레 엇갈려 지나갈 만한 너른 길이지만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 길을 따라 얼마쯤 오르면 돌담을 높직이 두른 조령원터에 다다르게 된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나 사사로운 용무로 지나다니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장방형 터에 돌담을 쌓고 한곳에 문을 내고 긴 돌을 가로 얹었다. 그 안에 들어가보면 그 규모가 퍽 큰 데에 우선 놀라게 된다. 1977년에 이루어진 발굴 결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집터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옛날 온돌시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덮어버렸고 그 앞에다 그저‘조선온돌지’, ‘고려온돌지’라는 팻말만 세워놓았을 뿐이다. 집터에서는 그릇조각, 기왓조각, 담뱃대, 가위 등 여러 가지 일상용품이 나왔다. ‘고려온돌지’ 팻말이 꽂힌 곳은 고려시대의 건물 터전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된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온돌난방법이 이미 고려시대에 이곳까지 전해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온돌난방법이 남부에까지 일반화된 시기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보면 이 집터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다. 발굴 뒤에 그냥 흙무더기로 덮어두지 말고 집터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를 해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얼마를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주막’ 표지판이 의젓하게 걸려 있는 집 한 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픈 다리도 쉬어갈 겸, 마른 목고 축일 겸, 새재 넘는 기분도 살릴 겸 기대를 품고 들어서지는 마시라. 이 집은 새재를 넘기 전에 이쯤에서 쉬어갔다는 옛이야기에 따라 어림으로 건물만 덜렁 지어놓았을 뿐이지 술이나 안주를 팔기는커녕 지키는 사람 조차 없다.
거기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다가 문득 오른쪽을 쳐다보면 판판하고 큰 바위면이 드러난다. 그냥 바위려니 하고 스쳐 지나칠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바위면에 양각, 음각으로 두 개의 비석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바위면에 탑이나 부처를 새긴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비석을 새긴 것은 흔하지 않다. 소중한 것을 바위면에 새기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마애비’를 어디에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옛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재미있다.
한 비면에는 ‘己丑年五月懸監李冕善政碑(기축년 오월 현감 이면 선정비)’라고 새겨져 있고 그 옆 다른 면에는 ‘李冕愛恤碑己丑四月(이면 애휼비 기축 사월)’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이면이란 사람이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긍휼히 여긴 것을 치하하여 같은 해 4월과 5월에 연거푸 비를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를 새긴 기축년은 1889년으로 여겨진다. 거창하게 세운 선정비들이 그 지방관이 갈려가기 무섭게 돌을 맞고 깨어지고 넘어진 것이 수두룩한 터에 이처럼 든든한 바위에 새겨놓으면 세월이 지나도 깨지거나 뽑혀 사라질 염려가 없으니 그야말로 ‘영세불망(永世不忘)’할 만한 방법이겠다.
마애비를 지나면 산의 정취는 더욱 깊어지는데 ‘交龜亭址’라는 표지가 하나 서 있다. 떠나가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마 신임 관찰사를 맞아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던 곳이 아닌가 한다. 교구정의 건립은 문경관문이 설치된 시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1484년(성종 15)의 일이었다. 현감 신승명이 8선녀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팔왕폭포(용추)의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건립했다고 한다.
교구정터를 지나 더 올라가면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대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비석에는 고졸한 필치로 ‘산불됴심’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 이 비석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여지껏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 하다. 요즈음에도 흔한 표어 ‘산불조심’ 자체가 낯익기도 하지만, 한글로 새겨져 있어 더욱 이채롭다. 이를 귀히 여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6호로 지정했다.
‘산불됴심’비를 지나면 큰길 옆으로 옛 오솔길이 계곡을 끼고 돌거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은 형국을 지어내며 큰길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곳에 제2관문(조곡관)이 버티고 서 있다. 조곡관은 세 관문 가운데 맨 처음인 1594년 임란 직후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발굴기록에 따르면 신라 때의 기와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새재가 고려 태조 때 열렸다고도 하고, 조선 태종 또는 세종 때 열렸다고도 하는 것은 꼭 그때 처음으로 길이 생겼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삼국시대부터 있던 길이요 요충으로 여겨져 오던 곳이었지만, 한때는 그 중용성이 덜해졌다가 다시금 중요하게 부각도면서 ‘길이 열렸다’고 한 것일 듯싶다. 문루는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옛 이름은‘조동문(鳥東門)’이었지만 지금은 ‘조곡관(鳥谷關)’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높이 4.5m의 석성이 관문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 가량 뻗어 있다.
석성 너머로는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과연 일당백의 요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발 380m로,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 오른쪽에 연결되는 산줄기의 최고봉이 1,106m높이의 주흘산 주봉우리고, 왼쪽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1,017m의 조령산이다. 그러나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정작 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잘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조곡관 동쪽의 산세는 조곡계곡으로 뻗어나가는데, 그 등성이를 따라 5km쯤 가면 주흘산에 이른다. 이 조곡관의 동쪽으로 ‘어류성(御留城)’의 존재를 알리는 팻말이 보이는데, 고려 태조 10년(927) 7월 초에 태조 왕건이 이곳에 와서 당시 이 지방 호족이었던 고사갈이성의 성주 흥달의 귀순을 받았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조곡관을 들어서면서 눈여겨보면 ‘옛 오솔길’을 알리는 나무표지가 눈에 띈다. 옛길을 예대로 남겨둔 곳인가 싶은데, 200여m로 끝나 못내 아쉬운 감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돌이 많고 험한 새재를 우마차가 제대로 넘을 수 없어 비가 올 때 길이 패이지 말라고 박석을 깔아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옛 오솔길’에서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그 오솔길을 지나 얼마를 다시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7~8m 키의 나무가 박달나무라는데, 원래 단단하기로 소문이 나 방망이 등의 재료로 즐겨 쓰였다고 한다. 길을 걷다가 잠시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청신한 새소리가 귀를 말끔히 씻어준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는 까마귀, 때까치같이 귀에 익은 이름을 가진 새들말고도 붉은머리오목눈이, 직박구리같은 이름이 재미난 새들도 산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걷다보면 저기 제3관문(조령관)이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제2관문(조곡관)이 임란 직후 건립된 데 비해 이 조령관은 숙종 34년(1708)에 지어졌다. 그러나 숙종 때의 문루는 1907년 의병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 보는 홍예문과 그 위의 누각 그리고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조령관 부근에는 산신각도 있고 약수터도 있어 한번 들러보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일 만하다. 이 약수는 1708년 조령성을 쌓을 때에 발견했다고 전해오는 것이니 내력도 만만치 않은 데다 사철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수많은 길손들에게 더없이 달고 시원한 피로회복제 노릇을 했을까. 동화원에서 동쪽으로 난 길은 조령성의 북문을 거쳐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곧 지금 미륵대원이 있는 등산로로 이어지니 결국 지릅재와 연결된다.
약수 위쪽에 있는 조그마한 전각이 산신각인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 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 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었다.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군사 100인이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으며, 이후 새재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가벼운 산행을 하기에 제격이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들이 찾는다.
(2) 태조왕건 촬영지
연인원 3,000여명이 공사에 참여한 KBS태조왕건 촬영장은 부지면적 2만평에 고려.백제왕궁과 당시 기와집 48동, 초가집 47동을 건립한 세계 최대규모의 사극 촬영장으로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KBS태조왕건촬영장에 세워진 건축물 가운데 통일신라 말기의 건물은 지상 120㎝ 높이의 네 기둥위에 올려져 있어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양식을 띄고 있으며 고려왕궁은 아파트 7층 높이로 고려의 옛 수도인 개성의 왕궁터 만월대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근거로 건립했다. 후삼국 ~ 고려시대 생활상을 그대로 고증을 토대로 고려왕궁, 백제왕궁, 고려의 서민, 양반가옥 등을 완벽하게 재현하였으며 “무인시대”, “제국의 아침” 등이 촬영되고 있다.
(3) 봉암사
가은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멀리 흰 봉우리가 불쑥 솟아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희양산이다. 그처럼 흰 바위봉우리를 이고 있는 희양산은 예부터 ‘절이 들어서지 않으면 도적이 들끓을 자리’로 지목되어 왔다. 그 희양산 중턱에 봉암사가 들어앉아 있다. 절집 뒤로 희양산 허리에 구름이 걸려 짙은 녹빛과 어우러져 있는데 이 산자락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속리산국립공원에 잇대어 있다.
이렇게 높은 산 중턱에 제법 너른 터를 닦아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열린 절이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헌 지증대사(道憲 智證大師, 824~882)가 창건했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국사 비문에 따르면 도헌은 경주사람 김찬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다. 열일곱에 구족계를 받고 정진에 힘썼고, 스물에 이미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임금의 간곡한 권유에도 수도인 경주로 나아가지 않고 수행정진에 힘썼다. 그러던 중에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면서 선원을 세우기를 청하니 와 보고 “이 땅을 얻었다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도적굴이 될 것이다”하면서 봉암사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신라 하대의 새로운 사상인 선종의 구산선문 가은데 희양산문이 개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이 대립하게 되면서 이곳 문경은 견훤과 왕건의 격전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봉암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고 극락전만 남게 되었다. 정진대사 부도비의 비문에 따르면 대사가 희양산에 다다라보니 그때의 형상은 “부처를 모시던 뜰과 승려들이 살던 방은 반 이상이 황폐해 있었”고, “우뚝 솟은 것은 이무기의 머리를 지고 있는 거북이 받침 위에 놓인 새김돌로 덕 있는 선사의 행적을 새긴 것이고, 높이 서 있는 것은 금칠한 불상으로 신령한 빛을 비추고 서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었던 것을 정진대사가 주석하게 되어 크게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그후 임진왜란 때 큰불이 나서 극락전을 빼고 모두 불탔고, 그뒤에도 1907년에 대웅전에 불이 나는 등 여러 번 화재가 나 지금 남은 당우들에서는 옛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1992년에 중창한 대웅보전과 금색전․조사전․극락전 등의 당우와 몇채의 요사채만 해도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조화를 갖추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속되고 있는 불사는 아늑하고 조용했던 절집의 모습을 자꾸 변질시키고 있어서 안타깝다. 특히 최근에 얹은 새 기와들은 너무 깔끔해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집을 지은 뒤 약 150년에서 200년쯤 지나서 재목이나 기와를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20년마다 기와를 갈지 않으면 부서져 나갈 만큼 근기가 없다고 한다. 이런 기와를 보노라면 개발을 내세우며 무엇이든 ‘빨리 빨리’ 해치웠던 성급한 산업화 시대의 후유증을 보는 듯 하다.
근래에 지은 이런 못난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서 깊은 유물․유적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봉암사의 역사가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금색전 앞쪽에 서 있는 잘생긴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며, 대웅보전 앞마당에 양쪽으로 늘어선 상당한 크기의 노주석도 그 속에 깃든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서편에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인 지증대사 적조탑과 그 탑비가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으며, 절의 동쪽 산기슭에는 고려 초에 절을 크게 중창한 정진대사의 부도와 비가 남아 있다. 또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백운대로 가는 계곡 옆의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도 봉암사의 유서 깊음을 보여주는 데 한몫 하고 있다.
(4) 백운대 마애보살좌상 - 지방유형문화재 제121호
봉암사 경내를 지나면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오솔길이 이어진다. 오솔길을 따라 700m쯤 가면 편편하고 너른 바위를 타고 내리는 맑은 물이 너무 차가워 절로 소름이 돋는 계곡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 마애불이 있다.
불상 옆 바위에 새겨진 ‘白雲臺’ 글씨는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해오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동북을 향한 거대한 바위면을 다듬어 4.5m높이로 새긴 불상은 원만한 상호에 양손에는 연꽃가지를 쥐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좌상이다. 주위를 파서 감실처럼 만든 두광에 싸인 얼굴은 큰 귀에 갸름한 코, 양미간 사이에 커다란 유리알이 박힌 백호, 가느다란 눈에 꾹 다문 입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엄숙하거나 두려운 인상은 아니며 다만 조용한 가운데 힘이 있어 보인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선각이 많아지고 소략해져 가는데, 꽃잎이 적은 연화좌에 맨발을 하고 있다. 불상 근처에는 ‘관세음보살상’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있지만 자세나 상호로 보아서는 여래상이다.
(5) 용추폭포(龍湫瀑布)와 교구정지(交龜亭址)
조령원터 위쪽 제1,2관문 중간지점에 크고 작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수정같은 맑는 물이 구곡양장의 계곡을 따라 흐르다 반석을 가르고 폭포가되어 대리석을 깨뜨려 놓은 듯한 바위의 위로 떨어지니 언뜻 보기에 은하수가 흘러 내리듯 부서져 튀겨 오르며 물보라를 뿌려내고 무지개가 일어나는 이곳 풍광은 소금강을 이룬듯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예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팔왕(八王:하늘과 땅의 모든 신)과 선녀들이 어울려 놀았다해서 팔왕폭포(八王瀑布)라 불리운다.
성종(成宗)15년(1484년) 당시 문경현감 신승명(신승명)이 팔왕폭포 위에 세운 정자가 있었으니 체임하는 경상도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가 관인(官印)을 인수 인계하던 장소로 이용하던 교구정(交龜亭)터가 지금은 사라져 당시의 건물 형태나 규모는 알 길이 없고 1999년 중창하였다.
오랜 세월 새재를 오고가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아름다운 교구정의 경관을 읊은 무수한 시가(詩歌) 중에서 점필재(佔畢齎) 김종직(金宗直:1431~1492년)이 한양을 오르내리면서 지은 칠언률시(七言律詩)는 너무나 유명하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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