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요와 이도다완
일본에서 국보로 알려지고 일본 왕을 알현하기보다 더 힘들고 영광이라고 하는 이도다완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되었다.
일본의 재벌 중에 우리사발을 한 개라도 소지하지 못하면 부자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우리사발 오오사카 성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우리사발. 이 사발을 탐내어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납치된 우리 사기장이 일본 도자기업계를 일으켜 유럽에 수출하고 그 경제를 기반으로 근대화를 이룩해 다시 한일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본이 주워서 국보로 삼으리만치 귀한 이 사발을 조상이 버린 막사발이라고 하면서 연구할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도다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길래 일본이 그토록 떠받들고 전쟁까지 일으켰을까? 이 사발은 일본에서 井戶라고 쓰며 이도다완 또는 고려다완이라고 한다. 이도다완(井戶)이란 우물처럼 움푹 파여 속이 깊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우물이 많았던 지역에서 생산되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도다완은 첫째 노르스름한 비파색이어야 하고 둘째 손으로 잡는 부분 즉 굽에 유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엉킨 매화피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일반 사발보다 굽이 높아야 한다.
그 외에도 더 있지만 세 가지만 적어보기로 한다.
첫째 비파색인 노란색은 1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산화소성으로 불을 때어 가마에서 익혀야 이 색이 나오는 굉장히 어려운 고난도 작업으로 최고로 숙련된 최고의 사기장이 온 정성을 쏟아도 나오기 어려운 빛깔이다. 둘째 사무라이들의 애장품인 칼의 손잡이에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바다표범 가죽으로 입힌 부분을 가이라기라고 하는데 그 느낌이 매화피를 잡는 느낌과 비슷하다. 우리는 사기장의 눈물이라고도 하고 잔설피라고도 한다. 셋째 굽을 높게 한 것은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이도다완은 이와 같은 공통점은 있으나 사기장의 손길에 따라 불길의 세기에 따라 태토의 성분에 따라 유약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오로지 단 한 개만 존재하여 더욱 가치가 높고 하나하나마다 특별한 자태를 가졌다는 특징 때문에 명품으로 받들어진다.
가야시대에 인도에서 들어온 소승불교의 영향으로 와룡산 일대가 불국정토를 이루었다. 부처님 마지(부처님께 올리는 밥)그릇이나 스님의 발우(밥그릇)로 또는 제사 때 멧밥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기에 신성시 되었으며 이것들을 굽기 위해 사찰마다 가마가 있었고 이 일대에는 솜씨 좋은 사기장들이 모여 들었다. 매우 귀하게 여겨 특별히 관리되었다가 수명이 다하면 따로 묻었고 순장품으로도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각 지방마다 영주, 다이묘들이 주변에 있는 약소 지역을 침범하여 세력을 넓혀가는 중에 사무라이들이 다도를 접하게 되었다. 다도의 첫째 덕목은 “나를 버림으로서 주인이 완성되면 그 속에 나의 완성이 들어 있다”로 되어있는데 다도는 바로 그러한 사무라이 정신의 결정체였다. 고려시대에 일본에서는 차가 들어오고 조선시대에 일본에서는 차가 성행하여 차 도구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이 지배층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을 다도의 기본 철학으로 정립했으나 차츰차츰 차 사발이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되어갔다. 차 사발이 화려해지자 차실 또한 화려해지고 사치스러워져 백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규모가 큰 차실이 생겨나면서 검고 화려한 차사발이 중국 당나라 송나라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수입되었다. 이를 염려한 차인의 일인자이자 오다노부나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인 센노리규는 소박하면서도 자연미가 있고 부담이 없는 차 사발을 생각 중에 이도다완을 접하게 되었다. 센노리큐는 첫눈에 반하여 오다노부나가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때부터 천목(송나라 수입 찻잔)을 제치고 이도다완이 차 사발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일본 지배권력 층과 다이묘들은 눈에 불을 켜고 조선으로부터 이도다완을 끌어 모우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 때 최고의 전리품은 사발과 사기장 이었다.임진왜란 전에 이미 일본은 솜씨 좋은 우리 사기장의 신상명세서를 확보하여 개전 초부터 우리 사기장 1000명 이상을 납치해 갔고 절이나 향교 민간의 제기용 사발들도 휩쓸어 갔다. 납치된 사기장은 영주인 다이묘들이 휘하에 두고 부의 형성과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때 납치된 사기장 중에 한 명인 존계 선생은 일본 7대요의 하나인 아가노야끼를 개요하게 되는데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가마터(현 가야비파구룡요)가 고향이며 개전 초인 1592년 4월 20일에 납치되었다. 존계 선생을 피납한 모리길성의 17대 후손 모리 야스가나씨는 우리조상이 존계선생을 피납한 것은 이도다완을 빚은 띄어난 사기장이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진주목에 황동을 굽는 가마터가 둘 있다 라고 되어있다. 하나는 반룡진이고 다른 하나는 유등곡으로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진주 동쪽이라고 되어있다. 진주의 동쪽은 현재 경남 사천시 정동면이다. 정동면의 경계는 이구산인데 아랫부분인 바닷가 까지 토종 왕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있었다. 구룡저수지의 물이 죽천강을 지나 사천만을 흘러 들어간다. 여기가 유등곡의 첫머리와 일치하는 유천리 유등곡 가마터 현재 가야비파구룡요 자리다.
이 가마터와 마주한 정동면 소곡가마터는 관요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이곳은 철을 생산하는 기지였다. 사천은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철 생산지였으며 가야세력권에 있었다. 철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1200도를 올릴 수 있는 고화도의 불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천리 가마터는 철 생산 가마 구조가 도자기 가마로 그리고 녹유 가마로 이어졌다.
녹유 가마는 유약을 입히는 첫 단계이다. 1250도 이상 올려야 유약이 녹아내리고 기물과 함께 익어 유리화된다. 이것이 고화질 도자기인 이도다완의 뿌리가 되었다. 결국 도자기는 가야문화권에 속한 가야토기에서 비롯되었다. 옛 우천리 가마터 발굴 작업에서 녹청자 항아리와 녹유 파편들이 발굴되어 녹유 가마터임이 입증되어 문화재 관리국 학계 도예 전문가들의 감식을 통해 공인 받았고 경상남도 문화재 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8대 현종은 부처님의 불력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의 기초가 되는 고려대장경인 고려초조경을 지금부터 천 년 전인 현종 2년 (1011년)에 만들었고 거란을 물리쳐 자주국가로서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의 아버지 왕욱이 사수현 귀룡동(현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마을)으로 귀양 옴에 따라 잠룡시절을 사천시 정동면에 있는 배방사에서 보내게 되었다. 훗날 왕이 된 현종은 여기를 풍패의 땅이라하여 사수현(당시 진주에 딸린 속현으로 일개 미미한 작은 고을)을 사수목으로 파격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해 주며 관전을 민간으로 돌려주는 과정에서 당시 삼밭골 가마 즉 우천리 가마가 관요중심으로 운영하던 가마에서 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민간이 관리하는 민요로 바뀌게 되었다.
현종과의 인연으로 이곳은 삼밭골(우천리) 가마터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민요도예의 역사가 시작 되었고 녹유로 된 사발이 천 년 전 이곳에서 구워지게 되었다. 주문 그릇이 아닌 지역 특성에 맞는 흙과 유약으로 그 지방에서만 생산 될 수 있는 독특한 도자기인 생활자기들을 종류에 구애됨이 없이 만들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이도다완이다.
고려다완(이도다완)과 옹기는 초벌구이 없이 바로 유약을 발라 굽는데 이런 기법은 관요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적인 민요가마에서만 나온다. 가야비파구룡요도 이와 같은 기법으로 굽는다.
일본은 이도다완의 가마는 민요 가마터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옛 기록 자체가 관요중심이며 민요라는 용어조차 없다. 가야비파구룡요에서 이도다완을 재현하고 있는 도예가 토승 김남진씨는 1992년에 사천시 곤양면에 있는 도청요 김홍배씨를 만나면서 이도다완의 역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우리문화와 역사에 관심과 애착이 많았던 중이라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95년부터 지역신문인 사천문화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고초와 어려움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꾸준히 발행해 오고 있는 향토사 연구가다. 1996년에 이구산에 길을 내는 중 구룡저수지에서 옛 가마터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흙을 연구하고 전통 가마를 지었다. 그리고 그릇을 빚고 굽고 하기를 밤을 새우고 건강을 해쳐가며 주위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비파색 도자기를 굽게 되었다. 지금은 불의 빛깔만 보고도 불의 온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다시 흰 빛에서 무색 투명한 빛으로 변할 때가 1300도라고 한다. 토성 김 남진은 현재 83번째 가마를 열었고 전시회는 12회를 했으며 차 사발도 8만개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천년의 혼 고려다완”이라는 책자도 발간했고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진주 의상 페스티벌에 참가한 각 나라 대사와 대만에서 열린 선차 교류회에도 참가하여 우리 사발을 공식 선물로 증정했다. 그 외도 기회가 닿는대로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일본 후쿠호카 공업기술 연구소에 구룡요 흙 성분을 분석 의뢰한 결과 1250도 이상의 고온에서는 철 성분이 증발하게 되는데 이 증발을 막아주는 인자를 이 흙에서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산화 티타늄인데 이것은 인공적으로 섞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철 성분이 함유된 조질 백자계 백토로 도자기를 빚어 1300도 이상에서 산화소성으로 불을 때면 철 성분이 날아가지 않고 비파색 도자기가 탄생되는 것이다. 구룡요 흙은 불심이 강한 카올링 계통의 태토임이 증명되었고 이처럼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흙은 귀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빼어난 사기장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좋은 흙을 찾아 다녔다
첫째도 흙, 둘째도 흙, 세째도 흙, 넷째가 불이라고 할 만큼 흙은 도자기의 생명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인 문경요 천한봉씨는 바로 이 구룡요 흙이 이도다완을 빚은 흙이라고 했다. 그리고 같은 명장인 양산요 신정희씨도 내가 평생을 두고 찾던 흙 바로 이 흙이 이도다완을 빚은 흙이라고 했다. 은퇴 후 도예에 전념하고 차의 명인인 일본 호소가와 전 수상도 구룡요의 흙과 이도다완의 흙이 같다고 했다. 일본 7대요의 하나인 아가노야끼를 개요한 존계선생의 후손인 와타리씨는 일본10대 명인으로 꼽히며 일본 황제께도 인정받았다. 개요 400년제를 맞아 존계선생의 고향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 때 토승 김남진씨는 옛 우천리 가마터에서 우리 차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아인 박종환 선생님(전 진주대아고등학교 교장선생님) 도예가 민영기 도예가 장금정씨의 도움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파편을 발굴하여 이 가마터가 존계선생의 고향임을 확인했다. 존계선생의 후손인 와타리씨도 구룡요(옛 우천리 가마터)에서 발굴한 파편과 존계선생이 일본에서 개요한 당시의 파편과 똑 같다면서 거듭 증언했다. 그리고 향토사 연구가 김남진씨의 노력 덕분에 찾았다며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눈물을 흘렸고 제수를 차려 제를 올렸다. 이리하여 구룡요 답사 2년의 검증 끝에 존계선생의 고향임을 인정했다. 존계선생은 자손에게 아가노, 도도끼, 와타리라는 성을 남겼다. 아가노는 일본에 피납 후 처음 개요한 아가노란 지역에서 따왔고 도도끼는 진삼도로의 동쪽이라는 뜻의 도동의 일본식 발음이며 도동은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딸에게는 와타리라는 성을 남겼는데 와타리는 바다를 건너 왔다는 뜻이다. 한국의 후손임을 꼭 알리고 싶었던 존계선생, 빼어난 사기장이라는 이유로 납치된 존계선생은 이도다완을 남겨 우리가 우수한 민족임을 알리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아가노야끼 개요 400년제를 맞아 2002년도에 존계선생의 고향임을 기념하는 “한일 우호의 비”를 사천시 사남면 화전마을과 일본 아카이케쵸 만남의 광장에 건립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이 곳 가야비파구룡요를 찾아 한일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이 행사에 일본 관계자들과 화전마을 어르신 그 외 축하인사 500명 이상이 고려다완 축제를 즐기고 있다 . 이 행사를 김남진 개인이 하고 있다. 너무 벅차고 힘이 든다. 이제 한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가야비파구룡요가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곳은 우리의 생생한 도자기 역사가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