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壤城과 長安城
平壤城은 高句麗 都邑地임을 누구도 否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平壤城이 北韓에 있는 平壤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착각에 不可하다. 이 기회에 平壤城에 대해 考證을 확실히 하는 것이 高句麗史를 理解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럼 三國遺事 古朝鮮편의 本文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有壇君, 王儉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 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咒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 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 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 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古朝鮮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이다. 즉 왕검(王儉)은 요단군(堯壇君)인 요임금을 말한다. 魏書에 의하면 이내 2千年 동안 壇君은 이어 내려왔다. 王儉은 都邑을 세울 때 아사달(阿斯達)이며 나라를 열 때 나라이름을 朝鮮이라 했다. 그리고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2475년)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2405년) 등 高氏와 더불어 같은 때이다.
옛 記錄에 의하면 上古代 환국(桓國) 즉 환인씨(桓因氏.B.C.8937년)의 나라가 있었다. 설명하자면 제석(帝釋)이다. 여기서 帝釋이란 桓因氏를 말한다. 다시말해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는 9번의 得道를 통한 神人임을 의미한다. 서자 桓雄은 天下에 여러 뜻을 갖고 탐욕이 가득한 人間世上을 다스릴 것을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있었다. 本文에서 서자환웅(庶子桓雄)이라 하였는데 桓因氏에게는 실제 庶子가 正史에는 없다. 다만 壇君朝鮮 第一期가 지나고 第二期인 유소환웅씨(有巢桓雄氏.BC.3898년) 시대(時代)를 서자(庶子)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의 아들 이름을 적고 庶子가 있었는지를 보기로 한다. 반고환인씨와 상원부인(上元夫人)인 막지(莫知) 사이에 12명의 아들이 있었다. 歷代神仙通鑑과 幼學須知 그리고 史要聚選에 있는 記錄을 통해 12名의 아들 이름을 적어보기로 한다.
①알방(閼逄) ②전몽(旃蒙) ③유조(柔兆) ④강어(疆圉) ⑤저옹(著雍) ⑥도유(屠維) ⑦상장(上章) ⑧중광(重光) ⑨현묵(玄黙) ⑩소양(昭陽) ⑪엄무(閹茂) ⑫대연(大淵)으로 되어있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자(庶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서자(庶子)환웅(桓雄)이라고 한 것은 一然스님이 간략하게 文章을 記錄한 것으로 보인다.
삼위태백(三危太伯)에서 아래 世上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三危太伯은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에 있는 험준한 山이다. 환인씨와 아들들이 三危太伯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世上 사람들을 크게 이롭게 해야겠다고 다짐한 글이다. 이내 천부인(天符印) 즉 하늘의 眞理와 人間의 眞理 그리고 땅인 自然의 眞理가 수록된 天 . 人 . 地가 새겨진 眞理의 글 3개를 받았다. 그리하여 큰 뜻을 품고 파견되어 갈 때 道通者와 무리 3千名을 거느리고 太伯山 아래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太伯山은 지금에 와서 묘향산(妙香山)이라고도 한다.
太伯山으로 내려와 神의 제단이 있는 나무 아래에 신시(神市)를 定했다. 神의 都市를 설명하자면 道를 5번 이상 통한 사람이 세운 도시라는 뜻이다. 이 분을 설명한다면 환웅천황(桓雄天皇)이다. 그때 장수로는 풍백(風伯)은 立法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석제라(釋提羅)이며, 운사(雲師)는 司法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육약비(陸若飛)이며, 우사(雨師)는 行政官으로서 왕금영(王錦營)이다.
神市를 세울 때 正統國으로 出發하면서 주로 곡식을 가꾸고 조리하는 법과 건강과 수명에 대한 것, 그리고 병(病)과 형벌에 관계되는 것, 또한 善과 惡에 대한 것을 人間들에게 무려 366 가지 일들을 통해 理化世界를 창건하고자 했다.
그 당시 곰 한 마리는 熊族의 처녀와 호랑이 한 마리는 虎族의 남자가 같은 굴에 살면서 언제나 신웅(神雄) 즉 得道를 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따라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道를 通해 참사람이 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 당시 神 즉 道를 5번 이상 통한 사람을 神人이라 했다. 그때 神이 되기 위해 영험한 쑥 1주와 마늘 20매를 나누어 먹었다. 그리하여 1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했다. 다시말해 편리하게 사람의 형상이 되기를 기원했다. 편리하게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人間에서 지혜있는 聖人이 되기를 원한 대목이다.
곰족의 처녀와 호랑이 부족의 총각은 쑥과 마을을 나누어 먹은후 21일 동안 금기하였다. 마침내 웅족의 처녀는 女子의 몸이 되었으나 호족의 총각은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즉 黃帝 部族의 처녀는 깨달음을 얻었으나 神農氏 部族의 총각은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곰 부족의 처녀는 남자가 없는 결혼을 하려 하였다. 매일같이 제단이 있는 나무 밑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곰 부족의 처녀는 임시로 혼인한 후 아이를 잉태하고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임시로 결혼을 했다는 것은 앞으로 天子가 될 수 있는 친족과 혼인을 했다는 뜻이다. 즉 근친상간을 말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고 호를 단군왕검이라 했으며 당고(唐高) 즉 아버지 고신씨(高辛氏.BC.2476년)로부터 이어 받았으므로 堯임금을 堯唐高라고 한다. 또한 堯임금을 도당씨(陶唐氏) 혹은 당요씨(唐堯氏)라고 한다. 唐高氏가 즉위한 50年은 庚寅年이라 했으며 즉위한 元年이 戊辰年이라 했다. 그러나 一然 스님은 干支年代를 잘 모르기 때문에 착오가 생긴 것이다.
BC.2357년 甲辰에 都邑을 한후 25년 후 다시 都邑地를 阿斯達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25년 후 阿斯達로 옮길 때가 BC.2333년 戊辰에 해당한다. 고로 本文에 庚寅年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一然스님이 庚寅卽位와 則五十年 丁巳 등은 잘못 안 것이다. 특히 庚寅年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확실하지 않아 의심스럽다고 했다.
堯王儉의 都邑地는 平壤城이라고 했는데 平壤은 今西京이라고 되어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朝鮮이라고 칭한 것이다. 또는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이 있는 아사달(阿斯達)로 옮겼으며 이름을 궁홀산(弓忽山) 그리고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했으며 지금에 와서 궁미달(弓彌達)이라 했다. 나라를 거느린 지 1천5백 년이 되었다.
周나라 호왕(虎王.BC.1122년) 즉 武王이 즉위할 때 己卯年이며 그 당시 箕子朝鮮이 봉해졌다. 壇君은 이내 唐京으로 옮겨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 唐京이란 堯王儉이었던 唐堯氏가 王儉城인 서울로 옮긴 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아사달(阿斯達)의 山神이 되었으며 수명은 1,908세라고 했다.
唐나라 배구(裵矩) 전에 의하면 高句麗는 본래 대나무와 같이 곧고 외로운 나라라는 뜻이다. 周나라 때 箕子朝鮮이 봉해진 후 漢나라가 나누어져 둔 곳이 3군(三郡)인데 설명하자면 玄菟 . 樂浪 . 帶方과 北帶方이다.
通典에서도 역시 같은 설이며 漢書에는 眞番 . 臨屯 . 樂浪 . 玄菟의 四郡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三郡이라 했다. 하지만 이름만은 또다시 같지 않으니 어찌해 그런지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平壤城에 대한 史書에는 魏書 . 周書 . 隋書 . 唐書 . 舊唐書 . 三國史記 등 記錄이 많다. 하지만 한결같이 北韓에 있는 平壤인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事實은 北韓에는 平壤城이 없고 高麗末 충숙왕(忠肅王.AD.1332년) 때 한반도로 옮겨진 地名이다.
三國史記 高句麗 제 10代 山上王 13年 10月에는 都邑을 丸都城으로 옮긴다. 그후 11代 東川王 21年 丸都城에서 경난(經亂) 즉 學者들의 난동으로 都邑地로서 不可하므로 平壤城을 쌓고 모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기게 된다. 여기서 平壤城은 본래 仙人이 살던 곳으로 王儉이 살던 집이며 혹은 堯임금이 都邑해 있던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적고 있다.
16代 故國原王 4年 8月에 平壤城을 증축했다고 했다. 그후 12年 봄 2月에는 丸都城을 수리하고 다시 國內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8月에 丸都城으로 다시 옮겨갔다. 또한 13年 7月에는 平壤城과 東黃城으로 또다시 옮겼다. 東黃城이 잇는 곳은 지금의 西京인 西安이며 목멱산중(木覓山中)이라고 記錄하고 있다.
19代 廣開土大王 15年에는 都邑을 平壤城으로 옮겼다. 24代 陽原王 8年에 長安城을 쌓고 25代 平原王 때 都邑地를 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215쪽에는 平陽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平陽縣은 본래 平壤이며 옛부터 堯王儉이 都邑한 곳으로 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남쪽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平陽府는 古帝堯 즉 옛 堯임금의 都邑地로서 山西省 臨汾縣 西南이라 했다. 또한 옛 城은 山東省 추현(鄒縣)에서 다스렸다는 說과 湖北省 운서현(鄖西縣) 서북이라 했다. 그러나 山東省과 湖北省이라고 하는 것은 歷史를 故意로 歪曲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河南省 임장현(臨漳縣) 서쪽이라는 주장도 있는가 하면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 西南이라는 說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는 歷史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平壤을 平陽이라는 글자로 고쳐 地名을 이리저리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하간 平壤城은 본래 西京인 西安에 있다는 것을 모든 正史에서는 밝히고 있다. 堯壇君 王儉이 25년 후 阿斯達로 다시 옮긴 곳은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남쪽이거나 西南에 해당한다는 것은 많은 史書에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平壤城은 본래 西京인 西安으로서 堯王儉이 都邑한 왕험성(王險城)은 王儉城이며 王儉城은 후일 高句麗가 都邑하면서 平壤城이라 했다. 그후 高句麗 24代 陽原王 8年에 長安城을 쌓았다고 했으며 25代 平原王 28年에 都邑을 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三國史記에는 記錄하고 있다.
唐書와 舊唐書 . 隋書에는 平壤城이 長安城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로 平壤城과 長安城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으며 堯壇君王儉이 都邑했던 城에 堯임금의 後裔인 高句麗가 平壤城의 이름을 고치면서 長安城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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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9월 13일 07시 10분 조회:1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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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
2009-09-15 04: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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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라사(綾羅詞)
능라도라 십리 청산 / 綾羅島十里靑山 언제 이곳으로 옮겨왔느냐 / 何歲何日離此間 성천의 옛 모습을 / 成都舊孱顔 도로 찾아가야 하련마는 / 此事端宜復索還 두어라 조물이 하는 일이니 / 且置哉造物相關 그대로 두고 보리라 / 一任所之等閒看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능라사(綾羅詞)
현재 평안도의 능라도(綾羅島)는 성천부(成川府)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성천부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부(府)와 가까운 경내에 있었던 것이 자리가 옮겨져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나의 선조인 찬성공(贊成公)이 이곳 부사(府使)로 있을 때에 우리말로 노래를 지은 것이 있는데, 가사가 매우 잘되었기에 나는 한시(漢詩)로 운(韻)을 붙여서 번역하여 보았다. 이것을 현행하는 단가(短歌) 가락에 맞추어 보니, 음절과 박자가 모두 들어맞았다. 그러니 능라사(綾羅詞)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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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
2009-09-15 0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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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 쓴 책.30권 의미심장한 글이네요!
또 아래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병영(幷營)
순(舜) 때에 12개의 주(州)를 창설하였다. 유주(幽州)는 청주(靑州)와 연주(兗州)의 북쪽에 있고, 병주(幷州)와 영주(營州)는 또 그 밖에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반드시 그 지역 안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은(殷)의 주(紂)가 통치한 지역은 청주ㆍ연주ㆍ서주(徐州)에 불과하였는데 고죽(孤竹)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침공을 당한 것을 보면 그 부근에 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이(伯夷)가 주(紂)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있었다.”고 한 그 동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 것이 우리나라가 아니고 어디겠는가?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에 봉함을 받았다 했는데, 이때 조선의 지역은 압록강(鴨綠江) 안팎을 점유하였고 요하(遼河) 지역도 기자의 영토 안에 들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순(舜) 시대의 병주와 영주가 아니겠는가? 그런즉 우리나라의 문화는 기자 이전에 벌써 이를 개척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이는 이 땅을 봉해서 받은 것이 아니요, 단군(檀君)의 왕조시대에 한동안 와서 기류한 데 불과하였다. 아마 처음에 단군이 해변에서 나라를 건설한 이래 그 인후하고 착한 기풍이 역대로 변하지 않고 전승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몸을 의지했다가 문왕(文王)이 늙은이를 잘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쪽으로 걸어서 주(周)에 돌아간 것일 듯하다. 이것은 모두 역사의 기록에서 빠뜨린 것이므로 기록해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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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
2009-09-23 15: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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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님이 올리신 내용들은 후세사가의 한낱 추측들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한반도와 그 주변 땅들만을 가리키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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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19: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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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대강(檀書大綱)
丙辰四十九年 唐堯聘舜 以娥媓女英兄第二女妻之 而攝行國政舜欲置幽幷營三州于遼地 檀朝遣書諭其不可而止
병진49년. 당요(唐堯)는 순(舜)에게 아황(娥媓)과 녀영(女英)을 부인으로 주고 순(舜)에게 나랏일을 보게하였다. 순(舜)이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 삼주(三州)를 료지(遼地)에 설치하려고하니 단조(檀朝)는 견서(遣書)하여 불가하다고 하니 설치하지 않았다.
甲戌六十七年. 舜之先本神巿天皇時于部之人也. 舜生於諸馮【俗[37]說西豊】 故肇十二州, 而置幷州于冀州東恒山之地置幽州于其東北醫巫閭之地【遼西】置營州于靑州東北遼河之東【遼東】帝遣太子夫婁與舜之首揆禹會于塗山議定國界回復幽營二州屬于檀朝.[38] 帝曰.., 曾觀天下山川相侯國土地.., 靑丘則開田野, 興農業, 風氣溫美, 五穀豊饒, 民皆衣輕煖而食肥美, 頗有衣冠帶劒文化, 武威亦得以幷興. 𠐍侲則地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39]弓[40]佩劒, 幷事遊獵, 後世其民漸徙黑水之地, 漁獵爲業. 艱險儉嗇, 麤健勁悍, 徒習弓[41]馬. 藍國則遠紹先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煩弊, 且其民數遷海岱之地, 後世與中土諸國恒事干戈互相角逐. 經曰..,夫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焉. 若使民, 終歲睊睊以絲穀爲慮, 則復奚暇言禮義㢤.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故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此 三方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自不同者也.[42]
甲戌(갑술, BC2267) 67년. 舜(순)의 선조는 원래 神巿(신불) 天皇(천황) 때에 于[43]部(우부) 사람이다. 舜(순)은 諸馮(제풍)【속설에는 西豊(서풍)이라 하였다.】 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처음으로 12주를 두었는데, 幷州(병주)를 冀州(기주) 동북쪽 恒山(항산)의 땅에 설치하였고, 幽州(유주)를 병주의 동북쪽 醫巫閭(의무려)의 땅【遼西(료서)이다】에 설치하였으며, 營州(영주)를 靑州(청주)의 동북쪽 땅인 遼河(료하)의 동쪽【遼東(료동)이다.】에 설치하였다. 帝(제)는 태자 夫婁(부루)를 舜(순)의 首揆(수규) 禹(우)에게 보내 塗山(도산)에서 모여 국경을 논하여 정하고 營州(영주)와 幽州(유주)를 다시 회복하여 檀朝(단조)에 소속시켰다.[44] 帝(제)가 말하길 “일찍이 천하 산천을 내려보고 제후국들의 토지를 살펴보았는데, 靑丘(청구)는 곧 밭과 들을 열고 농업을 발전시켰는데 풍토와 날씨가 따뜻하여 오곡이 풍요하니 백성들이 모두 옷을 가볍고 따뜻하게 입었으며 자못 옷에 갓과 띠를 두르기도 하였지만 劒(검)의 문화와 武威(무위)가 역시 함께 발전하였다. 𠐍侲(속진)은 곧 땅의 기운이 강하고 차가워서 오곡에 마땅치 아니하였고 땅을 넓고 사람은 적어서 목축하기에 자못 적당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활과 검을 차고 遊獵(유렵)하게 하였으니 후세에 그 백성들이 점차로 黑水(흑수)의 땅으로 들어가 漁獵(어렵)이 일이 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검소하고 거친 가운데서도 굳건하였으니 무리들이 弓馬(궁마)를 익히었다. 藍國(람국)은 곧 먼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병기를 익혀 항시 서남쪽을 보호하였다.[45] 또한 그 백성은 여러 번 海岱(해대)의 땅으로 옮겨가서 후세에 中土(중토)의 여러 나라와 항시 서로 싸워 각축하였다. 經(경)에 이르기를 “비록 음식이 풍족하고 재화가 유통된 후에야 국가가 틈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곁눈질하여 곡식을 염려하게 만들면 곧 다시 어떻게 한가롭게 예의에 대하여 말하겠는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늘이 땅을 덮고 땅은 하늘을 이고 있으니 구역이 각자 다르며 따라서 기후도 차고 따뜻하며 토지도 비옥하거나 척박하니, 그것이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못한 것과 같다. 어찌 이와 같은가? 세 곳이 나라를 지키는 것과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각각 다른 것이다. [출처] 심당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번역: 제3세 단제 단군왕검 태일성제 (가우리 학문 공동체(GAURY CYBER STUDY COMMUNITY)) |작성자 부루솟
규원사화
“처음에 夫婁(부루)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虞舜(우순)이 藍國(람국)의 인접한 땅을 營州(영주)로 삼은 지가 무릇 수십년이기에, 부루가 뭇 加(가)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치게 하였다.”
진서(晉書)
冀州。案《禹貢》,《周禮》並為河內之地,舜置十二牧,則其一也。《春秋 元命包》云:「昴畢散為冀州,分為趙國。」其地有險有易,帝王所都,則冀安,弱則冀強,荒則冀豐。舜以冀州南北闊大,分衛以西為并州,燕以北為幽州,周人因焉。及漢武置十三州,以其地依舊名焉冀州,歷後漢至晉不改。州統郡國十三,縣八十三,(중략) 勃海郡漢置。統縣十,戶四萬。(중략)
惠帝之後,冀州淪沒於石勒。勒以太興二年僭號於襄國,稱趙。後為慕容俊所 滅,慕容氏又為苻堅所滅。孝武太元八年,堅敗,其地入慕容垂。垂僭號於中山,是為後燕。後燕卒滅於魏。
▶ 舜(순)이 기주(冀州)를 나누어 병주(幷州)와 유주(幽州)를 設置(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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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19: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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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획계(畫界)
사조제(謝肇制)는, “우(禹)가 천하를 9주(州)로 나누어 삼대(三代) 시대에 그대로 따랐고 진(秦)이 3개의 군(郡)으로 나누었으며 한(漢)이 13개의 부(部)로 나누었다.” 하였다. 1부를 6개의 군으로 하였으며 진(晉)은 15개의 도(道)로, 당(唐)은 10개의 도로, 송(宋)은 4개의 경(京)과 23개의 노(路)로, 원(元)은 11개의 성(省)과 23개의 도(道)로, 명(明)은 2개의 경(京)과 14개의 성(省)으로 구획했다가 뒤에 안남성(安南省)을 폐기했으니, 실제로 13개 성이 있다. 이것은 경계 구획의 역사적 변천이다. 순(舜)이 벌써 12개의 주(州)를 창설하였으니, 병주(幷州)와 영주(營州) 등은 반드시 요(遼)와 심(瀋) 지역이 될 것이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동북지역이 점차로 개척됨에 따라 반드시 옛적의 명칭을 다시 살렸을 터인데, 이런 사실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원(元)과 명(明) 이후에는 연(燕)에 수도를 세웠는데 요(遼)와 금(金)이 교대로 일어나서 원(元)과 서로 겨루게 될 때에 그 실력 면에서 중국이 저들과 대항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만일 수도가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더구나 저들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었으랴? 수도를 중국과 이민족과의 가까운 지역에 설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동방에서 연(燕)을 가자면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산해관(山海關)을 들어가는 길이 병목처럼 좁아들었고 그 목만 넘어서면 곧 몽고(蒙古)의 지역이다. 이 길목이 막히는 날에는 장에 든 새며 자루 안에 든 원숭이와 다름이 없을 터이니, 어떻게 서로 왕래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렇게 되어 동쪽은 동쪽대로 서쪽은 서쪽대로 양쪽으로 분리될 경우에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국교 관계는 어떠한 방법을 취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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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19: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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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동국지맥(東國地脈)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에 있는 물이 옥하(玉河)인데,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하여 북경(北京)으로 흘러들어 나와서는 대통하(大通河)와 노구하(蘆溝河)와 합류된다. 노구하는 대동부(大同府) 상건산(桑乾山)에서 출발하여 태항산(太行山)을 경유하여 순천(順天) 경내로 들어왔다가 노구교(蘆溝橋)로 나와 통주(通州)까지 이르러 백하(白河)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백두산은 중국의 국경 밖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큰 줄기의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서해이다. 유주(幽州)ㆍ정주(井州)는 북경의 동북방에 위치한다. 《서경》 주에 “기주(冀州) 동쪽에 항산(恒山)이 있는 지역이 정주요 그 동북방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지역이 유주다.” 하였고, 또 “청주(靑州)의 동북 지방인 요동(遼東) 지역을 따로 떼어서 영주(營州)를 만들었다.” 고 했는데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몽고의 국경 밖은 곧 글안(契丹)의 경내이다. 그런즉 순(舜) 시대의 12주(州)는 글안과 선비(鮮卑)의 지역까지를 포함했던 것이다. 요동에서부터는 하나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한 갈래는 뻗어나와서 바닷속으로 들어가 서향의 국면이 되었는데, 그 큰 줄기는 두류산(頭流山)에서 끝났고, 바닷가를 따라 내려간 한 줄기는 빙빙 돌아서 두류산의 동쪽 갈래와 모여졌는데, 물은 한 줄기도 갈라져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곳은 또 우리나라의 별개의 국면으로 개성과 서울의 왼쪽 방위선이 되었고, 그 서북방으로 뻗친 큰 줄기는 압록강을 따라 서남방으로 달려서 의주까지 갔으며, 그 한 가닥은 설한령(薛罕嶺)에서 갈라져서 대동강을 따라가다가 삼화현(三和縣)까지 갔으며, 가장 남방으로 뻗친 줄기도 설한령에서 갈라져서 저탄강(猪灘江)을 따라가다가 해주(海州)에서 그쳤다. 구월산에서 나오는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흐르니 그 산기슭이 모두 북쪽으로 꺾여져서 개성과 서울을 두 수도의 국면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지리적인 맥락의 대강이다.
[주C-001]동국지맥(東國地脈)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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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19: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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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문(天地門)
선비산맥(鮮卑山脈)
백두산의 줄기는 유주(幽州)ㆍ영주(營州)ㆍ병주(幷州)의 3개 주의 밖에서 왔고, 선비산(鮮卑山)은 또 그 밖에 있다. 오호시대(五胡時代)에 선비족이 제일 강했는데, 산 이름을 가지고 그 종족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아마 이것이 백두산의 출발점이 된 듯하다. 백두산 내외에 있는 종족을 모두 숙신(肅愼)이라 하며 그 서남방의 줄기는 조선이다. 그 영역이 처음에는 요동 전역에 걸쳤으며, 요동의 땅은 모두가 선비산의 지맥이었다. 조(朝)라고 한 것은 “아침에 해가 떠오른다.”는 뜻의 아침이다. 아침이란 곧 동쪽이란 말이다. 천하에서 동쪽의 끝이 곧 조선(朝鮮)이다. 요(堯) 시대에, “공공(共工)이 힘을 모아서 공적을 나타냈다.”고 하였다. 공공(共工)은 사공(司空)에 소속된 관리이다. 그의 직무는 국가의 토지를 관장하는 것이니, 본래 황무지를 개간하는 관리이다. 그런즉 그가 “힘을 모아 공적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국토를 개척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舜)이 12개의 주를 창설한 사실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사실이었으며, 기주(冀州) 동북방에 따로 유ㆍ병ㆍ영의 3주를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곧 그가 나타내었다는 공적이다. 우공(禹貢)의 9주에 와서는 이 3개 주는 제외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아마도 무력으로 토지를 확장시키고 보니 영토만 넓고 백성이 피폐하였을 것이다. 그의 죄상은 곧 “이론으로는 성립되나 실제 운영에는 맞지 아니하여 제(帝)의 명령을 어긴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禹)는 이 지역을 폐기하였다. 네 사람의 죄를 처벌할 때에 공공(共工)은 유주에 유배하였으니, 그 지역에 유배한 것은 곧 “실제 운영에 맞지 아니하며 국가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백성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오면서 점점 잘 복종하여 본토 사람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周)가 천하를 차지했을 때에 황제(黃帝)의 후손을 유주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으니, 이것은 그 공적을 나타낸 성과라 할 것이다.
[주C-001]선비산맥(鮮卑山脈)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주D-001]공공(共工)이 …… 공적을 나타냈다 : 《서경》 요전(堯典)에 있는 구절을 인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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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19: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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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23권
경사문(經史門)
단기(檀箕)
우리나라 역사는 단군(檀君)ㆍ기자(箕子) 이상은 상고할 데가 없다. 단군은 요(堯)와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웠다 하였으니, 역시 순(舜)과 같은 시대이다. 순이 맨 처음으로 12주(州)를 설치했는데, 유주(幽州)ㆍ병주(幷州)ㆍ영주(營州)는 모두 동북 지대이다. 이를, “순이 맨 처음으로 설치했다.” 하였으니, 요의 시대에는 이런 명칭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순은 저풍(諸馮)에서 탄생했는데, 동이(東夷) 사람이다.” 하였으니, 저풍이란 지대는 요심(遼瀋)과 서로 가깝게 닿았던 모양이다.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상고하면, “유주에는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소산물로는 어염(魚鹽)이 있다.” 하였다. 지금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의무려산이 보이고 어염 역시 요동(遼東) 바다에서 생산되므로, 유주란 지대가 우리나라와 서로 연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맨 처음에는 요동과 심양(瀋陽)이 모두 조선의 소유였으니 반드시 저풍과 서로 멀지 않았을 것이며, “순은 1년 만에 부락을 이루고 2년 만에 고을을 이루고 3년 만에 도읍을 이루었다.” 하였으니, 단군도 순에게 따르게 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한편명)에 유ㆍ병ㆍ영(幽幷營) 세 고을이 탈락된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중국과 거리가 좀 멀고 풍속에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보다. 세 고을에서 한때에 조회(朝會)는 온다 해도 내복(內服 왕성(王城)과 가까운 지역을 이름)과 같이 인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만 부ㆍ세를 정한다[成賦中邦].” 하였다. 이로 본다면 이 세 고을은 직공(職貢 물건을 바침) 중에만 편입시켜 중국과 통하도록 했던 것인 듯하다. 나중에 부루(夫婁)가 하(夏) 나라에 조회한 것으로 보아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은(殷) 나라가 지나고 주(周) 나라에 이르러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찌 미개한 호맥(胡貊) 지대로 그냥 버려 두었다 할 수 있겠는가? 《좌전(左傳)》 희공(僖公) 12년에, 진 목공(秦稷公)이, “당숙(唐叔)을 봉할 때 기자가, ‘그의 자손은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였는데, 그때 당숙의 사실을 절역(絶域 먼 지방. 조선을 가리킴) 밖에서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손(小孫) 구환(九煥)이, “백구(白駒)란 시는 유객(有客)과 서로 흡사하므로 이는 기자가 주 나라에 조회갔을 때 지은 것인 듯하다.” 하니, 이 말이 근사하다 하겠다. 또한 이십팔수(二十八宿)라는 이름도 어느 시대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성(箕星)은 동북 중간에 있어서 바로 우리나라 석목(析木) 분야에 닿으므로, 기(箕)로써 나라 이름을 만든 것도 그만한 의의가 있었던 듯하다.
[주C-001]단기(檀箕) :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五州》 卷34 檀箕爲國號辨證說. [주D-001]순이 맨 처음으로 설치했다 : 이 말은 《서경》순전(舜典)에, “肇十有二州”라고 보임. [주D-002]저풍(諸馮) : 지명. 이 말은 《맹자》 이루(離婁) 편에 있음. [주D-003]직방씨(職方氏) : 《주례》 하관(夏官)의 편명. [주D-004]순은 1년 …… 도읍을 이루었다 : 이 말은 《사기(史記)》 오제기(五帝記)에 보임. [주D-005]중국에만 …… [成賦中邦] : 이 말은 《서경》 우공(禹貢) 편에 있는 구절. [주D-006]부루(夫婁) : 단군(檀君)의 태자. [주D-007]백구(白駒) : 《시경》소아(小雅)의 편명. 어진 이를 머물도록 잡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시. [주D-008]유객(有客) : 《시경》주송(周頌)의 편명. 은(殷) 나라 미자(微子)가 주(周) 나라에 조회한 것을 기린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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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20: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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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지리지
帝堯畫天下為九州. 舜以冀青地大, 分幽并營為州十有二. 幽州在渤碣之間, 并州北有代朔, 營州東暨遼海. 其地負山帯海, 其民執干戈, 奮武衛, 風氣剛勁, 自古為用武之地. 太祖以徳哷勒部衆代約尼氏, 起臨潢, 建皇都.., 東併渤海, 得城邑之居百有三. 太宗立晉, 有幽涿檀薊順營平蔚朔雲應新媯儒武寰十六州, 於是割古幽并營之境而跨有之. 東朝髙麗, 西臣夏國, 南子石晉而兄弟趙宋, 吳越 南唐 航海輸貢. 嘻, 其盛矣!
제(帝) 요(堯)는 천하를 가지런히 하여 9개의 주(州)로 하였다. 순(舜)은 기주(冀)와 청주(青)의 땅이 커서 유주(幽) 병주(并) 영주(營)로 나누어 12 주(州)로 하였다. 유주(幽州)는 발해(渤)와 갈석(碣)의 사이에 있고, 병주(并州)는 북쪽으로 대군(代)와 삭방(朔)이 있으며, 영주(營州)는 동쪽으로 료해(遼海)에 미친다. 그 땅은[1] 산을 등지고 바다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그 백성은 창과 방패를 잡고 무위(武衛)를 떨치며 풍기(風氣)가 굳세니 예로부터 무(武)를 다스리는 땅이다. 태조(太祖)는 덕렬륵(徳哷勒, 혹은 첩랄(叠剌) 혹은 질랄(迭剌)) 부락 백성을 가지고 약니씨(約尼氏, 또는 요련씨遙輦氏)를 대신하여 림황(臨潢)에서 일어나 황도(皇都)를 건설하였다. 동쪽으로 발해(渤海)를 병탄하여 성읍 103개를 얻었다. 태종(太宗)은 후진(晉)을 세웠다. 유주(幽) 탁주(涿) 단주(檀) 계주(薊) 순주(順) 영주(營) 평주(平) 울주(蔚) 삭주(朔) 운주(雲) 응주(應) 신주(新) 규주(媯) 유주(儒) 무주(武) 환주(寰) 등의 16개 주가 있었는데, 이때에 고대의 유주(幽)와 병주(并)와 영주(營)의 지경을 빼앗아 차지한[跨][2] 것이다. 동쪽에 있는 왕조[朝]인 고려(髙麗)와 서쪽에 있는 신하국[臣]인 하국(夏國)과 남쪽에 있는 아들벌 나라인 석진(石晉)과 형제벌 나라인 조송(趙宋)과 오월(吳越)과 남당(南唐) 등은 바다를 항해하여 공물을 실어왔다. 아 그 성대함이여!
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去榆關一千一百三十里, 去幽州又七百一十四里. 南控黄龍, 北帯潢水, 冷陘屏右, 遼河塹左. 髙原多榆柳, 下濕饒蒲葦. 在[3]元魏時, 有地數百里. 至唐, 達呼哩氏蠶食 扶餘 室韋 奚 靺鞨 地方二千餘里. 當[4]貞觀三年, 以其地置玄州. 尋置松漠都督府, 建八部為州, 置刺史.. 徳濟部曰峭落州, 赫伯部曰彈汗州, 都呼部曰無逢州, 芳阿部曰羽陵州, 圖勒彬部曰日連州, 芮奚部曰徒河州, 卓津部曰萬丹州, 富部曰 匹黎 赤山 二州. 以 逹呼哩氏 庫克 為 使持節十州軍事. 分州建官, 昉此.
료국(遼國) 그 선조는 거란(契丹)이라고 한다. 원래 선비(鮮卑)의 땅으로 료택(遼澤) 가운데에 살았었다. 유관(榆關)까지 1130리가 떨어져 있고 또한 유주(幽州)까지 714리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황룡(黄龍)을 견제하고 북쪽으로 황수(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랭형(冷陘)이 오른쪽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으며 료하(遼河)가 왼쪽으로 참호처럼 되어 있다. 높은 들녘에는 느릎나무와 버드나무가 많고 아래쪽 습지에는 냇버들[蒲]과 갈대[葦]가 넉넉하다. 원위국(元魏, 북위)때에는 수백리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국(唐)에 이르러 달호리씨(達呼哩氏, 大賀氏)가 부여(扶餘)와 실위(室韋)와 해(奚)와 말갈(靺鞨)의 (영역을)[5] 잠식하여 지방(地方) 2천 여리가 되었다. 정관(貞觀) 3년에 그 땅에 현주(玄州)를 설치하고 얼마 안되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였다. 8부(部)를 세워 주(州)로 삼았으며 (각각)[6] 자사(刺史)를 두었다. 덕제부(徳濟部, 달계부達稽部라고도 함)는 초락주(峭落州)라 하였고 혁백부(赫伯部, 흘편부紇便部라고도 함) 는 탄한주(彈汗州)라 하였고 도호부(都呼部, 독활부獨活部라고도 함) 는 무봉주(無逢州)라 하였고 방아부(芳阿部, 분아부芬阿部라고도 함)는 우릉주(羽陵州)라 하였고 도륵빈부(圖勒彬部, 돌편부突便部라고도 함)는 일련주(日連州)라 하였고 예해부(芮奚部)는 도하주(徒河州)라 하였고 탁진부(卓津部, 추근부墜斤部라고도 함)는 만단주(萬丹州)라 하였고 부부(富部, 복부伏部라고도 함)는 필려주(匹黎)와 적산주(赤山) 등 2개의 주로 하였다. 달호리씨(逹呼哩氏) 고극(庫克)로 사지절십주군사(使持節十州軍事)로 삼았다. 주(州)를 나누고 관(官)을 세운 것은 대개 으며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7]
迨[8]五代, 闢地東西三千里. 約尼氏更八部曰 達爾扎部 伊斯琿部 舍琿部 諾爾威部 婆摩部 訥古濟部 濟勒錦部 實衮部 屬縣四十有一. 毎部設刺史, 縣置令. 太宗以皇都為上京, 升幽州為南京, 改南京為東京, 聖宗城中京, 興宗升雲州為西京, 於是五京備焉. 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加以私奴置投下州. 總京五, 府六, 州 軍 城 百五十有六, 縣二百有九, 部族五十有二, 屬國六十. 東至于海, 西至金山, 暨于流沙, 北至臚朐河, 南至白溝, 幅員萬里.
오대(五代)에 이르러 영토를 개척하여 동서로 3000리가 되었다. 약니씨(約尼氏, 요련씨遙輦氏라고도 한다)는 8부를 바꾸어 달이찰부(達爾扎部, 혹은 단리개부旦利皆部)와 이사혼부(伊斯琿部, 혹은 을실활부乙室活部)와 사혼부(舍琿部, 혹은 실활부實活部)와 낙이위부(諾爾威部, 또는 납미부納尾部)와 파마부(婆摩部, 또는 빈몰부頻沒部)와 눌고제부(訥古濟部, 또는 내회계부內會雞部) 제륵금부(濟勒錦部, 혹은 집해부集解部)와 실곤부(實衮部, 또는 해올부奚嗢部)로 하고 이에 속한 현은 41개였다. 모든 부마다 자사(刺史)를 두었고 현에는 령(令)을 두었다. 태종(太宗)은 황도(皇都)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유주(幽州)를 승격시켜 남경(南京)으로 하였으며 남경(南京)을 고쳐 동경(東京)으로 하였다. 성종(聖宗)은 중경(中京)에 성을 쌓았다. 흥종(興宗)은 운주(雲州)을 승격시켜 서경(西京)으로 하였는데 이때에 5경(京)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또한 정벌하여 사로잡은 자들로 금요(襟要, 즉 요해처를 말한다)의 땅에 주를 설치하였고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이름으로 (새로 설치한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노(私奴)들을 그 주에 투하하여 설치하기도 하였다. 전부 경(京)이 5이고 부(府)가 6이며 주(州)와 군(軍)과 성(城)이 156이고 현(縣)이 209이며 부족(部族)이 52이며 속국(屬國)이 60이니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김산(金山)과 류사(流沙)에 미치며 북쪽으로 려구하(臚朐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구(白溝)에 이르니 폭원(幅員, 즉 너비)[9]가 1,000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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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주 병주 영주의 땅을 말한다.
[2] 강희자전에 又《廣韻》《集韻》《正韻》𠀤苦故切, 音庫. 踞也. 《晉語》不跨其國. 《註》猶踞也. 라고 하였다. 이는 나라를 차지한다는 뜻이므로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3] 當으로 된 것도 있다.
[4] 當이 없는 판본도 있다.
[5] 뒤에 之區가 있는 판본도 있다.
[6] 各置刺史로 된 판본도 있다.
[7] 蓋昉於此로 된 판본도 있다.
[8] 于가 있는 판본도 있다.
[9]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땅이나 지역의 넓이”라고 정의하였다. 한편 zdic.net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廣狹叫幅, 周圍叫員. 疆域有廣狹及四至, 所以稱疆域為幅員. 員或作圓(넓고 좁은 것을 폭幅이라고 하고, 둘레를 원員이라고 한다. 강역에는 넓고 좁음과 사지(四至, 동서남북으로 미치는 곳)가 있으니 강역을 칭하여 폭원(幅員)이라고 한 것이다. 員은 혹 圓로도 쓴다).” 이것을 가지고 폭원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이는 영토의 직선거리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영토를 가로지르는 가로의 길이와 세로의 길이의 합이라고도 하고 식민사학도들은 둘레의 길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어찌됐든지간에 여기서 폭원은 문맥상 동서의 길이이다. 앞선 문장에서 땅을 개척하여 동서의 길이가 3000리가 된다고 하였고, 이 후에 5경을 두었으며 이웃나라를 정벌하여 주(州)를 더 설치하였으니 5경 6부로 주와 군과 성은 156개이고 현은 209개이며 속국이 60개인 큰 나라가 되었으며 이때의 영토의 크기가 폭원 1,0000리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폭원이 둘레라면, 둘레가 1,0000리인 영토와 동서의 길이가 3000인 영토의 크기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문맥상 폭원은 둘레가 될 수 없다. 즉, 여기서의 폭원이란 동서의 길이로서 처음 료(遼)가 일어날때에는 동서의 길이가 3000리에 지나지 않는 나라였으나 후에는 강성해저셔 동서 1,0000리의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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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20: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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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2240) 단제 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품 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 없었다.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 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려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 심는 것을 권장하였다.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기숙사를 설치하여; 원문에서의 요寮를 기숙사로 풀었다.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그 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제순유우;중국 삼황오제의 한 사람, 앞의 제순은 황제의 이름,뒤의 유우는 나라이름,유는 우의 발음을 유도 핟기 위하여 쓰인 글자이며 나라 이름은 우국虞國이다. 동작빈의 년표에 의하면 순은 b.c2233~2183년의 제왕이다
*남국;흔히 연나라라고 하나 구이九夷 가운데 남이藍夷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동이전에서의 남이 기사는 다음과 같다."하나라 걸왕이 포악한지라 뭇이夷들이 내침하매. 은나라 탕왕(b.c1751~1738)이 혁명을 일으켜 이를 정벌했는데, 중정仲丁(b.c1568~1558)때에 이르러서는 남이가 반란하였다"라는 기사가있다.그러므로 남국을 남이로 볼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으로 본다.참고로 연나라의 연대는 b.c?~222년이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參佺참전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뿐 마음 과녘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 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마음.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 한배검*이시여,한배검 이시여.
*어아가;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고대가사의 이름인 듯.
*참전의 계;고구려 제상 을파소(?203)가 지은 "참전계경"이 현존한다.
*한배검;원문에서는 대조신大祖神이라 했다.
임인2년(b.c2239), 단제께서는 少連소련 大連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 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을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 달로 멈추던 것을 ,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 무릇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소련,대련;동양고전상에는 단순히 고대인의이름으로만 적히고"예기"에서는 :少連大連善居喪 "이라고 있을 뿐이다.즉 소련.대련은 상을 잘 치뤘다고 하여 효자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三日不怠 三月懈朞年悲哀 三年憂東夷之子也삼일불태 삼월해기년비애 삼년우동이지자야"라고 주해를 달았으니 우리의 조상임에 틀림없다.소련,대련은 어쨋던 중국 고전이 말하는 하늘이 낸 효자,곧 (天從之孝천종지효)라고 효의 대표요 상징처럼 취급하는 인물이다.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하는 유교교리에서 볼 때 소련.대련의 효는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계묘(b.c2238)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 까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하였다,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하엿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경술10년(bc2231)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한였다. 임자12년(bc2229)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5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 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렸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身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푸른 옷;이 옷을 입게 한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민족은 백의 민족이라 하엿 거늘 여기 선 오행사상에 입각하여 동쪽을 목이라 하고 나무는 푸르다 하였으므로 옷을 푸른 색으로 입게 함인가.
*쌀되와 저울;두斗.형衡이라 했으니 도량 형기를 말한다.
*모두 통일 하도록 ; 準於官준어관이라 했으니 ,저울눈이나 자의 눈금을 관에서 통제함을 뜻함.
*밭을 나누고;구정邱井이라 햇으니 옛날의 전리田里의 구획.구區는 16井.정은 900무畝.6척사방六尺四方을 보步라 하고 보백步百을 무라 하더니 진나라 이후 240보를 1무라 한다.
*칠회력;책력의 일종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책 신시본기에 참고 할 만한 자료가 있다.
*구정도;邱井구정을 구획한 도면
*전계;전佺을 (커발한)이라고 읽으니, 커발한 계명을 뜻한다
*업주가리;오늘날 민속으로도 울타리 안에 업주가리 라 하는 볏짚 무더기가 있어 제물을 바치며 치성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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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6 20: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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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술(기원앞 2267): 임금이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서 순(舜)임금이 보낸 우(禹)와 만 나 치수법을 가르쳐주게 하였다. 도산으로 가는 도중 낭야성(琅耶城)에 반달 동안 머물며 낭야성 경내에 경당(扃堂)을 세워 젊은이들의 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태산(태산)에서 삼신에 제사 지냈다. 이때부터 삼신의 옛풍습이 회사(淮泗: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강소성 회하 일대) 사이에서 크게 행 하여졌다.
태자가 도산에 도착하여 천하 모든 나라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를 주관하였다.
여기에서 물을 다스리지 못하여 큰 피해를 입은 우(禹)에게 천부왕인(天符王인)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몸에 지니면 능히 험한 곳을 지나가도 위태롭지 않으며 흉한 일을 만나도 해가 없을 것이 다. 또한 물의 깊고 얕음을 잴 수 있는 신침(神針)과 어떠한 험한 물도 진정 시킬 수 있는 황거종보 (皇钜倧寶), 이 세가지 보물을 너에게 주니 천제 아들의 큰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禹)는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의 아드님의 명을 힘써 행 하여 우리 우(禹)나라 순임금의 태평을 여는 정치를 도와 삼신에게 보답하면 기쁨이 지극하겠나이다” 하고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 이것이 오행치수의 중요한 비결이다.
이어 태자는 이 회의에서 국경문제도 의논하였다.
국경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은, 순임금이 조선의 서쪽 땅에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를 설 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조선이 안 된다고 하자 이 회담에서 유주와 영주가 우리 에게 속하게 되 었다. 또 회대에 제후를 두고 순임금에게 그곳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것이 도산회의(塗山會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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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7 00: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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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대강 조선기 제4세 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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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五年. 西鄙藍國隣接之地, 舜復置幽州于遼西營州于遼東, 帝遣兵征之盡逐其衆定界于碣石西北之地盡爲朝鮮版圖. 自是遼東遼西更不置虞國州郡, 而諸侯來貢者數十. 於是封道羅爲沸流王東武爲卒本王, 旭成爲沃沮侯以表征遼之功.
乙巳(을사, BC2236) 5년. 西鄙(서비)는 藍國(람국)과 이웃하여 접한 땅이다. 舜(순)이 다시 遼西(료서)에 幽州(유주)를 설치하고 遼東(료동)에 營州(영주)를 설치하였으므로, 帝(제)는 병사를 보내 이들을 정벌하고 그 무리를 모두 쫓아 국경을 碣石(갈석)의 서북에 정하였는데 모두 朝鮮(조선)의 版圖(판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료동과 료서는 다시는 虞國(우국)의 주와 군이 설치되지 않았고 諸侯(제후)들이 와서 조공하는 자가 수십이었다. 이때에 道羅(도라)를 봉하여 불류왕(沸流王)이 되게 하였고 東武(동무)를 봉하여 卒本王(졸본왕)이 되게 하였으며 旭成(욱성)을 봉하여 沃沮侯(옥저후)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遼(료)를 정벌한 공로를 表(표)한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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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
2009-09-27 08: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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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강역(檀箕疆域)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단기강역(檀箕疆域)
순(舜)이 처음으로 12개의 주(州)를 설치하고 12개의 산을 봉하였으며, 또 12개의 목(牧)을 임명할 때에 유주(幽州)도 그 중의 하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유주(幽州)에는 그 산이 의무려(醫巫閭)이며 그곳에서 해산물과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하였으니, 이곳이 지금의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단군(檀君)은 요(堯)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니 12개의 주를 설치할 때는 벌써 건국한 지가 백 년이 넘었다. 그 영토의 경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자(箕子)가 계속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의 시대에 와서 연(燕)과 힘을 겨루었는데, 연이 그 서쪽 지역을 공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정함으로 인하여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으니, 연에서 동쪽으로는 본래 땅이 얼마 없었은즉 만반한은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만(滿)은 만주(滿州)요 반(潘)은 심(瀋)이 잘못된 것이다. 압록강 밖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의 거리가 천여 리에 불과하고 보면 연에게 빼앗긴 지역은 요양과 심양이 아니고는 다시 그에 해당한 지역이 없다. 그렇다면 단군 시대에 벌써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간 것이니, 우리나라가 미개 사회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순도 본시는 동방 민족이었으니, 저풍(諸馮)과 부하(負夏)는 모두 동방 9개 종족 중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箕子)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나 연과 국경이 연접되었고, 고죽(孤竹)이란 나라의 유허도 그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요순 시대부터 중국 내지와 같이 다루어 왔고 단군ㆍ기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교화가 이루어졌으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여기만한 곳이 없었다. 지금 압록강 이외의 지역은 지리적인 조건이나 인간관계로 보아 다시 합할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만들게 되어 영토의 일부가 완전히 없어지고, 일부 지역만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문명의 전통인 옛 문화를 잃지 않고 있으니, 그런대로 천지간에 한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주C-001]단기강역(檀箕疆域) :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五洲》 卷34 檀箕爲國號辨證說. 卷34 東國疆域辨證說.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