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날마다 떠나는 여행 (가을 비) / 김영교
오늘처럼 가을비 내리면 나를 젖게 하는 한 장례식 풍경이 떠오른다. 가뭄을 해갈할 방도가 없는 남가주에서는 절수운동에 벌금까지 부과하며 버텨온 지난여름이었다. 일기예보가 적중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10월에 접어들고서였다. 차 운전에 불편을 끼치는 따위는 아랑곳 않고 단비는 대 환영을 받았다. 기다림 속에 있던 모두의 바램이었다. 흙도 초목도 허연 바닥의 강물도 춤추는 듯했다. 지금도 주룩주룩 가을비 내리면 눈물 글썽이게 하는 젖은 기억이 하나 되살아난다.
‘어쩜 이럴 수가’...
예기치 않은 커다란 슬픔의 회오리바람이었다. 너무도 엄청나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금슬 좋기로 소문 난 부부 장례식은 갑작스러운 만큼 애도의 눈물도 많았고 위로의 발길도 줄을 섰다. 애석해하는 마음들뿐이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보는 지금 이 가슴에 여전히 짠한 슬픔이 고인다.
정작 장례 날은 맑은 날씨에 실내는 온통 분홍색과 흰색의 장미 꽃밭이었다. 조용한 올겐 찬송가가 낮게 흐르고 검정색 정장의 직원은 바쁜 몸짓이었다. 세 번째 앞줄 자리를 안내 받았다. 바로 눈앞에, 지척에, 부부의 시신이 장미꽃에 덥혀 조용히 안치되어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이 가슴을 눌러왔다. 남편은 흰장미로, 부인은 화사한 분홍장미꽃으로 온통 덥혀 있었다. 고운 꽃밭 아래 잠간 쉬고 있는 듯 엄숙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두분의 영정 사진 안에는 살짝 미소까지 있어 우리를 마주보고 말 할 듯 아는 채 할듯 그런 표정이었다. 부부 나란히 쌍관 장례식, 이 어처구니없는 슬픔은 처음 당해보는 황당한 장례식에서 였다.
그 날은 일요일, 가을비에 고속도로가 젖은 것 빼고는 이른 오후 교통은 복잡하지도 않았다는 보고였다. 주일 예배 후 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등학교 선배 이 두 내외분의 3중 교통사고는 중앙분리대를 박고 사모님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남편 선배님은 UC병원에 도착한 후 사망한 사고 소식은 충격, 충격 그 자체였다. 어찌 이런 일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같은 날, 부부 같이 우리 곁을 떠난 선배 내외분, '청천 하늘의 날벼락’이 이런 때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60번 Fwy 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랜 동창모임에 모처럼 참석한 지난 주말, 앞으로는 자주 얼굴보자 직접 말씀 하셨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고나서 신었던 신발을 또 신을 수 있을까, 손, 발, 몸을 움직이며 걸을 수 있고, 눈알을 깜박이며 듣고 말하고 볼 수 있다는 것, 숨을 쉴 수 있고 불편함 없이 음식을 먹고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 할 수 있고 또 안면 근육 펴서 웃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은 모두가 크고 작은 놀라운 기적들이 아닌가. 이 사건을 접하고 나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절실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무사한 매일매일은 바로 기적의 연속이며 커다란 손 안에서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이 감격으로 다가 왔다.
장례식에 많이 참석해 보았지만 부부 쌍 관을 놓고 장례를 치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읽은 적도 들어 본 적도 직접 참석해 목격한 적도 없었다. 사고 발생 시 차안에 자녀들이 동석하지 않아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혼 딸의 통곡이 하늘을 찌르는 듯 장내를 덮었고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은 10월 24일 엄마의 70회 생일이었다. 그토록 싱싱하던 육신이 지상에 머물렀던 한 생애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길, 생일이 그 귀의의 날이었기에 너무 가슴이 아파왔다. 선배부부는 신앙인으로 영생의 확신이 있었다고 나는 믿었다. 다소 위로가 되었다.
인간은 풀잎의 이슬과 같은 순간적 존재라 했다. 육체의 탐욕을 위해 쌓아 놓은 것, 모든 것 내려놓고 떨어져 가는 한 잎 한잎의 사람 낙엽이었다. 나무는 봄이 되면 싹이 트지만 사람은 새싹을 틔울 수가 없다. 지음을 받을 때 1회의 한계성을 입력받았다. 우리 주위에서 이웃의 죽음을 접함으로 겸손과 감사를 배우게 해 주었고 영생의 소망이 구원의 확신을 통해 더욱 가까이에서 절실하게 체감하게 한다. 장례식은 그래서 잠시나마 목숨의 소중함과 유한성을 두눈으로 확인하는, 관속의 누운 훗날의 내 자신을 대입 체험하는 예식이라 여겨졌다. '너도 언젠가 죽을 목숨이야' 계속 상기시키며 겸허하게 창조주를 경외하는 지혜를 일깨워 주는 체험실습장이 고맙게 와 닿았다. 그 필요성도 대속자 목수청년의 출현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생을 약속, 그 약속을 믿기에 본향을 두고 이 세상 삶을 잠간 다녀가는 나그네 삶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죽는 것을 돌아간다라고 하지 않는가.
선배님 내외분의 천국입성을 확신하면서도 가슴은 많이 놀란 상태였다. 애처가로 소문난 선배님은 이 세상 떠날 때도 부부 함께 손잡고 떠나기를 기도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를 놀래키면서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 주신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에 한없이 마음은 젖어들고 있었다. 악수하며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던가, 말할 때 침이 튀는 우리가 인식하는 성정으로는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창조주를 묵상,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안에서 나누고 베풀며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남은 자의 몫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런 교훈을 남겨주신 선배님 내외분, 나란히 '이 세상 소풍 끝내고’의 천상병 시인 말처럼 아픔도 이별도 없는 천국에서 안식하기를 간구했다.
창밖에는 비바람이 아직도 불고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 이 가을비소리 보다 더 크게 들리는 기억 속에 있는 미혼 딸의 오열이 나의 단잠을 방해한다. 나는 그 딸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주고 싶다. 인생의 가을 들녘에서 더 심한 고통의 폭우가 또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잘 견뎌 낼 유가족과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다. 장미꽃 활짝 뒤덮은 쌍관 주검에 피어나는 소망 한 가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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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주인공 최덕희, 심순복 내외분은 필자의 사대부고 선배부부라 성함을 밝힙니다.
67년도 도미 서울 상대 졸 Kotra 근무 남가주 거주
슬하에 결혼한 아들과 미혼 딸씩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그 후 소식이다. (10/1/2012)
*그해 한국일보 10월 20일 기사 '70대 한인부부 Fwy 윤화참변 /사진밑에 교통사고로 숨진 최덕희;최복순씨 부부'라고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