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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며,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기다리는 주인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제1독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덕분에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7-16
형제 여러분, 7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8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9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4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16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에페소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각자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우주적인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속량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 이후로는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덕들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여야 합니다(어제 독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도 같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려고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최종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 커다란 계획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하고,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4,13) 다다르기까지 성장합니다. 어중간한 삶에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라는 부르심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강력한 경고성 발언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의 표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과 동고동락할 때, 너무 성급했고 미성숙했던 탓에 여린 새싹 같은 그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준 것들, 평생을 두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빗나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으름장을 놓고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에 그저 아이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음도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족 유다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오늘 오직 오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믿으니
어제도
믿음
내일도
믿음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희망하니
어제도
희망
내일도
희망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사랑하니
어제도
사랑
내일도
사랑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의 성인
성 에바리스토(Evaristus)
신분 : 교황
출신지역 : 그리스
초대교회의 교황이었던 성 에바리스투스 (또는 에바리스토)에 대한 기록은 희박할 뿐만 아니라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이레네우스(Irenaeus)에 의하면, 성 에바리스투스 교황은 성 클레멘스 1세 (Clemens, 11월 23일)를 계승하여 교황직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리베리우스 교황표”와 다른 문헌들은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 7월 13일) 교황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의하면, 성 에바리스투스 교황은 본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살던 그리스인이었으며, 유다(Judas)라는 이름의 그의 부친은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출신 유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에바리스투스가 교황으로 재위하던 기간 동안의 업적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 시내에 있던 25개 본당을 구역에 따라 교구로 분할하였으며, 각 교구에 명칭을 부여하고 일정 수의 본당을 관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 신자들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신자들의 관리를 위해 필요하였던 조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교황은 6명에게 사제품을 주었고, 5명에게 주교품을 또한 2명에게는 부제품을 주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교회 초기의 일곱 부제의 직분에 따라서 7명의 연장 사제들에게 각 교구를 관할하게 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까지 확정되지 않았던 교계제도에 관한 전통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제도를 설립하게 하였으며, 이 제도는 그 이후 교회 내에 도입되었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즉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연대기” (Chronographia)에는 성 에바리스투스가 9년 동안 로마의 주교직에 재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연대 교황표”에는 10년 간 재직하였다고 나타난다. 또한 순교자 명부에 의하면, 그는 9년 3개월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재임하였다고 한다. “리베리오 교황표”에는 13년 10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의 증언처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이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면, 성 에바리스투스는 101년경부터 교황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교회가 에바리스투스 교황을 성인이요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교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더욱이 현대의 발굴에 의하면 교황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Petrus)의 무덤 옆에 묻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복자 보나벤투라 (Bonaventure)
신분: 수사
활동지역: 포텐차(Potenza)
활동연도: 1651-1711년
같은이름: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포텐차 출신으로 노체라(Nocera)에서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순종의 덕행으로 유명하고 또 장상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수련장직은 맡았다. 성모님께 대한 보나벤투라의 신심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신심이었다. 그는 라벨로에서 운명했는데, ‘순종의 모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