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다윗의 명과 암>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기를 보면, 가운데에는 육각형의 별이 새겨져 있고, 그 위아래로 파란 선이 지나갑니다. 그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부릅니다. 삼천년 전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다윗이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추앙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예언의 핵심도 다윗의 후손이 이스라엘을 재건할 것이라는 ‘메시아 대망론’ 이었으며, 이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탄생 서사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다윗의 통치가 화려한 업적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후반부는 다윗의 부끄러운 모습과 통치의 실패를 집중적으로 보여 줍니다.
승승장구하던 다윗은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를 계기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바로 다윗과 밧세바 사건입니다. 그 여파가 얼마나 컸던지, 사무엘하의 남은 기록 전체가 밧세바 사건의 후유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다윗은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충성된 부하였던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 죽게 합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을까요. 다윗의 장남 암논은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이 비극적인 사건은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의 역모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부자지간이 서로 칼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간신히 진압하지만, 이번에는 사울 가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납니다. 사무엘하 20장 1~2절을 보겠습니다.
1 그 즈음에 불량배 한 사람이 그 곳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세바였다. 그는 비그리의 아들로서, 베냐민 사람이었다. 그는 나팔을 불면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새의 아들에게서 물려받을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아, 모두들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자!"
2 이 말을 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은 다윗을 버리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라갔다. 그러나 유다 사람은 요단강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기들의 왕을 따랐다.
압살롬의 반역이 다윗 개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이 반역은 사울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가 주동이 돼서 일어났는데, 본문의 기자는 그 주동자를 ‘불량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쿠데타이기는 하지만 반대 세력의 지도자를 불량배라고 지목했다는 것은 이 기록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쨌든 장차 이스라엘이 분열될 조짐이 이렇게 다윗의 통치 후반기에서부터 불거지고 있었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은 무고한 이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후궁 열 명을 별실에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다윗의 후궁들을 범했던 사건 때문입니다. 20장 3절을 보겠습니다.
3 다윗은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 예전에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둔 후궁 열 명을 붙잡아서, 방에 가두고, 감시병을 두었다. 왕이 그들에게 먹을 것만 주고, 더 이상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냈다.
인간세상이 그렇습니다. 죄는 힘 있는 사람들이 짓고 그 피해는 소시민들이 당하게 되지요. 죄는 압살롬이 지었고, 원인 제공은 다윗이 했지만, 정작 가혹한 형벌은 피해자인 후궁들이 받은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능욕당한 후궁들을 다윗이 이전처럼 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풀어주거나, 적어도 궁궐 안에서라도 자유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궁핍하지 않도록 아낌없이 지원도 해주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별실에 가두어 먹을 것만 주고 죽을 때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게 했다니 이런 사람을 어찌 성군이라고 하겠습니까?
더욱 안타까운 점은 기록자의 태도입니다. 본문의 기자는 이런 일을 기록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비판도 피해자에 대한 동정도 일절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드러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삼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인권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테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의 설교자들마저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윗의 비겁함을 묵인하거나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왜곡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