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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방’2연승 “앞으로 10년도 우리가 잡는다”
유마디 기자
“칭화(淸華)의 2연승.”
시진핑(習近平·57) 중국 국가부주석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선출 결정을 두고 중국 학계에 떠돌고 있는 말이다.
시 부주석은 시중쉰(習仲勳) 전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太子黨·혁명원로의 자제)’과 ‘칭화방(淸華幇·칭화대 출신 정치세력)’이란 타이틀을 동시에 가졌다. 그는 1975년 22세의 나이에 ‘중국의 매사추세츠공대(MIT)’로 불리는 칭화대 인문사회학원에 입학,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시 부주석의 중군위 부주석 선출은 그와 함께 차세대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리커창(李克强) 부총리의 ‘무소식’과 대비되며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리 부총리는 베이징(北京)대학 경제학원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순수 ‘베이따방(北大幇)’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리 부총리는 오는 2012년에 열릴 제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지금의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망이다.
학계에서 표현한 ‘2연승’이란 말은 현 4세대 지도부의 핵심인 후진타오 국가주석 역시 칭화대 출신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1959년 칭화대 수리(水利)학과에 진학한 후 주석은 졸업 때까지 거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을 만큼 수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64년 공산당에 정식 입당, 같은해 칭화대학의 정치보도원으로 활동하는 등 졸업 후에도 칭화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때문에 2012년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 내정된 시 부주석이 2002년에 시작된 후 정권을 이어받아 향후 10년 동안 중국 5세대 지도부의 핵심인물로 자리잡을 경우 20년 동안 판도는 ‘칭화방’의 것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의 권력은 현재 후진타오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시 부주석이 속해있는 ‘태자당’과 장쩌민 전 주석 중심의 ‘상하이방’은 각각 느슨한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중국 권력 3세대 이후 등장한 중국의 양대 명문인 베이징·칭화대 출신 엘리트 집단을 가르는 이른바 ‘칭화방’ ‘베이따방’이 새로운 양대 세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말이 학계를 중심으로 흘러 나오고 있다.
칭화대는 덩실, 베이따는 무관심
‘칭화방’은 웃고 ‘베이따방’은 울게 된 이번 승계. 이 결과는 다음날 두 학교 캠퍼스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칭화대 신문방송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인 장하림(22)씨는 “동기들끼리 베이징대 대신 칭화대를 선택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며 “현재 당원인 교수들도 수업시간에 시진핑 부주석 얘기를 꺼내며 앞으로 칭화대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칭화대에 재학 중인 한국 유학생들이 이를 우스갯소리로 ‘시(習) 선배 효과’라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칭화대 출신 고위 정치인.후진타오,우방궈, 주룽지, 황쥐, 시진핑.
‘칭화방’은 현재 1990년대 중국 경제개혁을 이끈 주룽지(朱鎔基·전기공학) 전 총리, 우방궈(吳邦國·무선전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 등을 중심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칭화대는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 칭화대는 학교 캠퍼스에 마이크로소프트사(MS) 아시아연구원을 유치하는 등 국내외 굴지의 기업들과 굳건한 협력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매년 전국의 수험생(2010년 기준 957만명) 중 상위 0.0003%에 해당하는 학부생 약 3300명과 석·박사과정 대학원생 5000명을 모집,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반면 베이징대에서는 아예 시진핑의 ‘시’자도 꺼내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인 중국인 류(劉)모씨는 “정치학과에 다니고 있지만 교수가 수업시간에 한번도 시진핑 부주석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라고 전했다. 류씨는 또 “칭화대는 지금도 학교 시설이 그렇게 좋은데 앞으로 더 좋아질 일만 남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베이따방 “제6세대 노리자”
‘칭화방’들의 선전에 ‘베이따방’ 세력들도 꿈틀하고 있다. 자연계 중심의 칭화 인재들이 대거 등용되고 인문대 중심의 ‘베이따방’이 밀려나자 베이따방 내부에서 불만이 점점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책 ‘두허우즈롼(讀後治亂)’에서 작가 루상치아오(陸翔橋)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치판은 수십 년간 ‘칭화방’ 천하였다. 과거 20년 정치위 구성원을 보면 칭화대학 출신이 대부분이다. 제16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후진타오, 우방궈, 황쥐(黃菊), 우궁정(吳宮正) 4인이 칭화대 출신이었다. 때문에 ‘칭화대학 동창회는 중난하이(中南海)에서나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반면 당시 최고위층에서 활약한 ‘베이따방’은 탕자쉬안(唐家璇) 전 외교담당 국무위원뿐이었다. (중략) 건국 이래 중국의 첫째 목표는 건국과 건설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공계에 강한 칭화대학 출신 인재들이 빛을 보게 됐다. 1989년 이후 등용된 정치국 상무위원도 모두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지식이 편협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시시때때로 변하는 국정을 맡기엔 역부족이다. 경제·법률 영역에서 지식이 필요한 인재들이 등용돼야 할 것이며 베이징대는 이런 점에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베이따방’은 곧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홍콩 아주시보(亞州時報)의 기사를 인용한 루 작가의 발언은 5세대 수뇌부인 시진핑 세대 다음인 6세대 지도자들을 염두한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 역대 최연소 성장에 오른 후춘화(胡春華) 허베이(河北)성 성장과 루하오(陸昊)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 등 제6세대 지도부 양대 선두주자 모두가 베이징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차세대 리더인 6세대 지도부의 윤곽은 오는 2012년 제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 부주석이 주석에 오르면서 두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6세대에선 권력분점이 어느 대학의 손을 들어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치체제개혁 부르짖으며 대권판도 뒤집나?
이동훈 기자
정치개혁체제 논의 톈안먼사태 재평가로 이어져
후·원의 정치적 스승 후야오방·자오쯔양 복권 수순
중국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의 급부상에 따른 후진타오(胡錦濤)와 원자바오(溫家寶)의 대응이 관심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와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는 2012년 10월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전후해 공식 퇴임을 앞두고 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후꺼(胡歌·후 형님)’와 ‘원예예(溫爺爺·원 할아버지)’란 별명을 가질 만큼 대중적 지지가 높다. 반면 당내 정치적 기반에는 아직까지도 의문 부호가 따라다닌다.
이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퇴임 후 안전 보장 문제’와 직결된다. 중공(中共) 수뇌부에는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2007년 자신의 대권에 공공연히 도전한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를 수뢰 혐의로 쳐내며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에 기반한 정치세력)과 일전을 불사했다. 천량위의 구속으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쩡칭훙(曾慶紅) 부주석을 비롯한 상하이방은 일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시진핑 차기 보장’은 막후협상 카드였다
당시 상하이방이 후진타오에 대한 마지막 견제구로 남겨둔 것이 시진핑이다. 상하이방의 좌장격인 쩡칭훙 전 부주석은 “시진핑에게 차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후진타오와 막후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다. 장쩌민의 ‘꾀주머니’로 불리는 쩡칭훙은 한때 후진타오에 맞서 공산당 총서기직에 거론된 인물이다. 쩡칭훙의 희생으로 시진핑은 후임 상하이 서기가 되어 천량위 수뢰 사건을 뒷수습하며 상하이방의 안전을 지켜냈다. 상하이방이 후일 후진타오를 겨냥해 정치적 보복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반면 상하이방에 맞서 후진타오의 안전을 지켜줄 카드는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정도라는 평가다. ‘단파(團派·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의 약칭)’의 리더격인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직계다. 리커창 부총리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에 오를 것이란 설(說)도 나돈다. 전인대 상임위원장은 우리의 국회의장격으로, 권력서열 2위지만 실권은 없다.
원자바오의 당내 입지는 더욱 불안하다. 원자바오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내에 계파 자체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정치체제개혁’ 발언으로 공산당 보수강경파는 물론 자유파로부터도 공격받고 있다. 최근 자유파 작가 위제(余杰)는 홍콩서 출간한 ‘중국의 영화황제, 원자바오(中國影帝, 溫家寶)’란 책을 통해 “근본개혁에는 나서지 않고 정치적 쇼맨십만 있는 정치가”로 원자바오를 평가절하했다.
후·원 콤비, 역대 최상의 조합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콤비는 신중국 건국 후 마오쩌둥-저우언라이(周恩來) 콤비에 이어 역대 최상의 조합으로 평가된다. 이전에는 권력서열 1위인 총서기와 권력서열 3위인 총리 간의 불화가 빈번했다. 자오쯔양과 리펑(李鵬), 장쩌민과 리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반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지난 2003년 각각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후진타오), 국무원 총리(원자바오)로 지명된 이후 이미 8년째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일각에서는 “후·원(후진타오-원자바오) 콤비가 정치체제개혁 논의를 이용해 2012년 대권판도를 뒤엎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미국 CNN 인터뷰를 비롯해 ‘정치체제개혁’이란 단어를 최근 공식 석상에서만 7번 넘게 언급했다.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은 최근 “선전에서 정치체제개혁을 주장한 연설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비견될 정도”라고 평가했다. 남순강화는 1992년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이 남방을 돌며 경제체제개혁을 주창한 연설이다.
후진타오도 “정치와 경제 다방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더욱이 베이징 정가(政街)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부), 국가주석(외교), 공산당 총서기(당)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구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정치체제개혁의 연장선으로 최고권력을 분점하자는 구체적 주장이다. “정치체제개혁 논의가 후·원 콤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추측이 나오는 것은 이같은 까닭이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이전만 해도 국가주석,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주요 핵심 요직은 분점돼왔다. 중국 공산당은 6·4 톈안먼사태를 ‘서방의 화평연변(和平演變·평화적으로 중국을 붕괴시킴)’으로 규정하고, 사태 수습 후 주요 직위를 한 사람에게 몰아줬다. 결국 정치체제개혁 논의는 1989년 6·4 톈안먼사태의 재평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톈안먼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권력구조를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톈안먼사태 재평가 노림수는
6·4 톈안먼사태의 재평가는 더욱이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의 명예 회복과 연관된다. 6·4 톈안먼사태는 당초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의 불명예 퇴진에 이은 죽음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촉발됐다. 개혁개방의 상징인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이 가장 일찍 후계자로 낙점한 인물이다. 반면 개혁개방에 불만을 품은 강경보수파는 덩샤오핑을 압박, 1987년 후야오방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끌어내렸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자오쯔양은 보수파 리펑(李鵬) 총리와 각을 세웠다. 개혁개방파인 자오쯔양이 단식 중인 시위대를 만나 울먹이며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대목은 유명하다. 반면 저우언라이의 양자로 소련에서 유학한 리펑은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학생시위대는 리펑을 ‘돼지코의 나치장교’로 묘사했다. 당시 사태에 대한 과장 보고로 계엄군의 유혈 진압을 끌어낸 것도 리펑으로 알려져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정치적 스승격이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를 지낸 후야오방은 공산당 총서기 재직시절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공청단 출신인 후진타오 역시 후야오방의 선발로 중앙 무대에 데뷔했다. 더욱이 후야오방의 장남 후더핑(胡德平)은 후진타오와 막역한 사이다. 후진타오를 처음 후야오방에게 소개한 것도 후진타오의 친구 후더핑이었다.
후야오방의 전격 경질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가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후더핑을 보호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에 대한 공개적 비판도 거부했다. 훗날 덩샤오핑은 후진타오의 이 같은 의리를 높게 평가해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뒤를 잇는 4세대 지도자로 낙점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진타오가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직후 후더핑은 중화공상연합회 부주석에까지 올라갔다.
‘정치개혁’은 대권판도 변화 메시지
원자바오 역시 자오쯔양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않다. 홍콩 아주주간은 최근호에서 “원자바오는 보수파로부터 ‘자오쯔양 집단’으로 매도당한다”고 보도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경질한 후 두 번째 후계자로 낙점한 인물이다.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개혁파로 분류되며 국무원 총리와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다. 톈안먼사태 때 자오쯔양을 수행해 당시 시위학생들을 만난 것도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원자바오다.
‘정치체제개혁’ ‘민주화’ 같은 정치적 화두로 정국을 뒤엎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덩샤오핑이 대표적인 예다. 1976년 극좌파인 ‘4인방’에 의해 궁지에 몰린 덩샤오핑은 ‘정치개혁’이란 메시지로 판 바꾸기를 시도했다. 당시는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한 시점이었다. 덩샤오핑은 4인방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려 공산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함을 한꺼번에 박탈당했다.
덩샤오핑은 2년 뒤인 1978년 ‘민주화’를 정치적으로 이용, 복귀에 성공한다. 당시 화궈펑(華國鋒, 2008년 사망)과 대권을 다투던 덩샤오핑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방임적 태도를 취했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지명한 공식후계자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웨이징성(魏京生)이 부상한 것도 이 즈음이다. ‘민주의 벽’을 허용, 웨이징성에게 ‘제5의 현대화(민주주의)’ 주장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덩샤오핑이다. 결국 덩샤오핑은 화궈펑을 꺾고 대권을 잡았다.
6·4 톈안먼사태도 “지도층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촉발됐다”는 시각이 강하다. 1989년 당시 최고결정권자인 덩샤오핑과 당 원로로 보수파를 대변한 천윈(陳雲, 1995년 사망), 리셴녠(李先念, 1992년 사망) 등과 개혁개방의 속도조절을 두고 각을 세우고 있었다. 각각 부주석과 국가주석을 지낸 천윈과 리셴녠은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 참가한 최고위 원로였다. 덩샤오핑에게 압력을 가해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연이어 낙마시킨 것도 이들 보수강경파였다.
결국 1987년 자신이 낙점한 후야오방을 자기 손으로 폐한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 때 “야오방 동지는 너무 일찍 죽었다. 애석하다”고 통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을 경질했을 때도 그는 후야오방의 당적은 그대로 살려둬 복귀의 여지를 남겨둔 측면이 있다. 또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개혁개방파인 자오쯔양을 후임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했다.
더욱이 천윈과 리셴녠 등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 덩샤오핑이 안전장치로 마련한 것이 후진타오다.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제4세대 지도부로 직접 지명해 장쩌민을 견제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서방에서 후진타오는 ‘포커 페이스의 리더’란 평가를 받는다”며 “후진타오가 그를 낙점한 덩샤오핑의 전례를 따라 오는 2012년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혁명가형에서 제도권 엘리트형으로
박영철 차장
장쩌민, 테크노크라트형 원조… 후진타오 뒤이어
5세대 시진핑, 태자당 출신 첫 최고권력자 예고
지난 10월 18일 시진핑(習近平·57) 중국 국가부주석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선출을 계기로 중국의 권력 승계 구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가부주석은 상징적인 성격이 강한 자리다. 시진핑이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장악할 수 있는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돼야 하는데 이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앙군사위 주석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겸임하고 있다.
시진핑은 2012년 10월 열릴 제18차 당대표자회의에서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국가주석으로 이어지는 최고 권좌를 이어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지난해 가을 열린 4중전회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당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대권 가도 이상설’에 시달렸지만 이번 5중전회를 계기로 우려가 완전히 해소됐다.
중국에서 국가주석과 함께 언급되는 자리가 총리다. 정식 명칭은 국무원 총리다.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차지하면서 그의 경쟁자였던 리커창(李克强·55)은 자연히 총리가 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따라서 향후 제5세대 중국 지도부는 시진핑 주석-리커창 총리 체제로 굳어질 전망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커창 상무부총리도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총리로 지명될 게 확실시된다.
현재 중국은 국가주석(주연)-총리(조연) 투톱 시스템을 택하고 있다. 권력서열상 국가주석은 1위, 총리는 3위다. 2위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우리로 따지면 국회의장이다.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비록 서열은 총리보다 앞서지만 비중 면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주석-총리 투톱 시스템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의 최고권력자 계보는 혁명세대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쳐 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고 있다. 시진핑이 예정대로 2012년에 최고권력자에 등극하면 5세대가 되는 셈이다. 혁명가형(型)에서 제도권 엘리트형으로 바뀌어왔다. 초대 최고권력자인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은 현대 중국을 건국한 인물로 현대 중국의 역대 최고권력자 중에서도 압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을 이뤄내 일제의 침략에서 중국을 지켰고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업적을 갖고 있다.
그는 1958년에 주도한 경제성장정책인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칩거하기도 했으나 1966년 문화혁명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는 ‘건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기본적으로 ‘공포의 리더십’이었다. 중국인들은 1959년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가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한 뒤 비참하게 죽은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2세대 최고권력자인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은 여러모로 마오쩌둥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마오쩌둥과 함께 혁명세대에 속하지만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이 가난했던 반면 덩샤오핑은 오늘날의 부강한 중국을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오쩌둥 사후부터 최고권력자였지만 마오쩌둥과는 달리 국가주석과 총서기 직함은 갖지 않고 중앙군사위 주석 직함만 1990년까지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념(紅)을 고집한 마오쩌둥과는 달리 실용(專)을 중시한 그는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했고 이후 중국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눈부신 고도성장을 이뤄왔다. 그는 5척 단구(短軀)의 몸으로 문화혁명 때 혹독한 숙청을 겪은 뒤에도 오뚝이처럼 재기하면서 늘 웃는 표정을 지어 ‘작은 거인’이란 애칭을 달고 다녔다. 자신을 박해한 마오쩌둥을 공식석상에서 비난하지 않는 노련함도 그의 장점이다. 다만 1989년 6월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제2차 톈안먼사태가 발생하자 무자비하게 진압해 그가 본질적으로는 마오쩌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산주의자임을 드러냈다.
중국의 최고권력자는 3세대인 장쩌민(江澤民·1926~)부터는 전임자들과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장쩌민부터는 혁명가형에서 엘리트형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전임자 자오쯔양(趙紫陽)에 이어 당총서기에 취임한 그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형 최고권력자’의 원조다. 그는 혁명세대가 아니라서 업적이 없는 대신 명문대 학벌과 뛰어난 실적을 겸비해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명문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학 전기학과를 나와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 상하이시장 등을 역임했다. 중국의 고도성장을 유지하고 혁명세대에서 비혁명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원만하게 잘 넘겼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타협의 리더십’인 셈이다. 가혹한 파룬궁(法輪功) 탄압은 옥의 티다.
4세대인 후진타오(胡錦濤·1942~) 주석도 테크노크라트형 최고권력자다. 그는 중국 양대 명문 칭화(淸華)대 수리공정과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한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만점을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티베트 당서기로 재직하던 지난 1989년 3월 티베트 분리독립 폭동을 탱크로 진압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평소에는 겸손하고 신중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스타일이다. 그의 최대 장점은 ‘집단학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수시로 집단학습을 실시해 어젠다를 선점하고 반대파를 설득하면서 파워를 키워갔다. 중국이 후진타오 시대에 미국과 맞짱 뜨는 G2로 순조롭게 성장한 것은 후진타오의 ‘집단학습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칭화대 공정화학과 출신인 시진핑이 5세대 최고권력자가 된다면 그는 전임자 둘의 ‘테크노크라트형 최고권력자’ 면모를 갖추는 것은 물론 ‘태자당 출신의 첫 최고권력자’가 될 것이다. 태자당(太子黨)은 혁명원로의 자제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는 부귀영화를 누려온 대부분의 태자당과는 달리 문화혁명 때 부친이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 그도 함께 고초를 겪었다. 그의 부친은 시중쉰(習仲勳) 전 국무원 부총리다. 시진핑은 친화력이 뛰어나고 실용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등의 루머가 나돌기도 하는 등 한때 위기에 처한 것처럼 비쳐졌으나 겸손하고 현명한 처신으로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지역 간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국민의 민주화 욕구도 커지는 등 큰 과제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도 찾아야 한다. 그가 ‘포용 리더십’을 발휘해 중국호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이끌어갈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대권승계의 ‘마지막 관문’ 덩샤오핑·장쩌민도 마지막까지 중군위 주석직 보유
이동훈 기자
장쩌민·후진타오도 초기 군부반발 직면
시진핑도 힘싸움 불가피… ‘軍 3년 복무’ 집중 부각
신(新)중국을 연 마오쩌둥(毛澤東)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중국의 최고권력은 항상 총구에서 나왔다. 지난 10월 18일 베이징서 막을 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5중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의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선출 소식이 세계적인 주목을 끈 까닭이다. 17기5중전회를 비롯, 역대 중전회가 열린 베이징 징시빈관(京西賓館) 역시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호텔이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인민해방군, 인민무장경찰, 민병(예비군에 해당)을 총 지휘하는 조직이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중국의 실질적 최고권력자다. 중국 헌법은 국가주석이 아닌 중군위 주석에게 ‘통수권’을 부여한다. 1989년 6·4 톈안먼 사태 때 베이징에 투입된 계엄군의 병력이동과 유혈진압을 최종결정한 사람도 당시 국가주석이던 양상쿤(楊尙昆)이나 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이 아닌, 중군위 주석이던 덩샤오핑이었다.
지난 2003년 후진타오에 당 총서기직과 국가주석직을 넘겨준 장쩌민(江澤民)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직위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후진타오는 2004년 9월에야 장쩌민으로부터 중군위 주석직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장쩌민은 지난해 10월 1일 국경절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건국 60주년 열병식에 후진타오와 함께 등장해 그의 군부 내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장쩌민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후진타오보다 서방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시진핑, 후진타오와 성장과정 판이
시진핑 부주석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입성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자동으로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직하게 된다. 이로써 시진핑은 핵무기로 무장한 230만 인민해방군을 통수하는 자리에 한발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현재 당과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를 이끄는 사람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다.
하지만 중군위 주석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다. “천운(天運)과 지운(地運), 시운(時運)이 한꺼번에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중국의 후계자 선출은 당원 선발로부터 시작된다. 학교성적이 뛰어나고, 당성(黨性)이 좋은 학생들은 공산당에서 먼저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들은 특정 주제에 대한 토론 등의 입당 테스트와 신원조사를 거쳐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들어간다. 선대(先代)에 국민당과 연루된 사실이 있을 경우 자동탈락이다.
공산주의청년단부터는 본격 후계 경쟁에 돌입한다. 후진타오는 공청단 시절 왕자오궈(王兆國) 현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 상무부위원장과 선두다툼을 벌였다. 공청단 시절에는 왕자오궈가 줄곧 우위에 있었으나, 후진타오의 신중한 모습은 당시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왕자오궈와 후진타오도 각각 4대, 5대 공청당 서기를 지냈다. 이후 후야오방은 왕자오궈보다 후진타오를 더욱 중용했다. 훗날 왕자오궈는 후야오방의 전격 경질 후 공개비판을 감행했다. 후야오방의 장례식 때 왕자오궈가 초대받지 못한 일화는 유명하다. 후야오방 역시 공청단 서기 출신이다.
시진핑은 조금 다른 케이스다. 핏줄로 당성이 이미 증명된 태자당(太子黨·공산당 고위간부의 자제) 일원은 당 고위간부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시진핑 역시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 과정에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 부총리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는 평가다.
이후 공청단과 당간부 비서 출신 인사들은 일선 공직에 배치받아 진검승부를 벌인다. 공직생활에는 ‘지운(地運)’이 작용한다. 후진타오는 간쑤(甘肅)성, 구이저우(貴州)성, 티베트 등 주로 낙후된 서부지방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 당서기로 재직할 때 고산병(高山病)에 걸려 요양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이후 이 같은 사실은 ‘후진타오는 라오바이싱(老百姓·백성)들을 이해하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최근 ‘서부대개발’이 이슈가 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반면 시진핑은 푸젠(福建)성, 저장(浙江)성, 상하이 등 줄곧 동부연해지방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이는 시진핑의 최대 약점이다. 동부연해지방에서 공직생활을 한 지도자 가운데 중군위 주석에 오른 사람은 장쩌민이 유일하다. 각종 부패와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때 대권을 꿈꾸던 상하이 천량위 당서기, 베이징 천시통(陣希同) 당서기 등은 한결같이 중도에 낙마했다.
중군위 주석, 1억 병력 통수권
마지막 화룡점정은 중군위 주석 선출이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부주석 등 주요 구성원은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를 통해 선출된다. 베이징 징시빈관에서 열린 17기5중전회에는 당 중앙위원 202명과 중앙후보위원 163명을 비롯해 고위 간부들이 참석했다. 당 요직은 고급간부들의 토론에 이은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9인)들과 당 원로들의 타협의 산물이란 것이 대체적 관점이다.
후진타오는 이같은 수순을 밟아 중군위 주석직을 차지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 집권기던 1999년 제15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5기4중전회) 때 중앙군사위 부주석직에 입성했다. 이후 2004년 9월 열린 16기4중전회에서 장쩌민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함에 따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됐다. 2005년에는 자동겸직에 의해 중국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등극하며 권력을 승계받았다.
후진타오의 경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5년에 걸쳐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군부 내 기반을 닦은 셈이다. 이에 비하면 시진핑은 중군위 부주석 입성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해 9월 열린 17기4중전회 때 시진핑의 중군위 부주석 입성 실패에 따라 한때 “후계구도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시진핑의 이번 중군위 부주석 선출 결정으로 이 같은 의혹은 어느 정도 해소된 셈이다.
향후 큰 변화가 없다면 시진핑은 오는 2011년 3월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중군위 부주석 선출을 확인받게 된다. 이어 오는 2012년 10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뒤, 2013년 3월 열릴 예정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에 등극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밟은 수순처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받으면서 통수권까지 최종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군위는 주석 1명과 부주석 2명, 위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국방부장인 양광례(梁光烈)는 중군위 위원급에 불과하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총장비부 등 4대 총부를 거느리고, 그 아래에는 7대 군구(軍區)를 둔다. 해군, 공군, 제2포병(핵·미사일부대), 무장경찰, 민병(예비군)도 중군위의 지도를 받는다. 중군위 주석이 통솔하는 총병력은 해방군(230만명), 무장경찰(120만명), 민병(1억명) 등 1억350만명이다.
시진핑의 중앙군사위 부주석 입성으로 부주석단은 모두 3명으로 재편된다. 시진핑은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 등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궈보슝은 총참모부 출신의 야전사령관, 쉬차이허우는 총정치부 출신의 군사전략 이론가다.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는 각각 장쩌민, 후진타오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시진핑의 중앙군사위 부주석 입성으로 궈보슝은 군사위 부주석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치열한 파워게임 이겨내야
신화통신 한편 군 경력이 미미한 문민 출신이 군권을 장악하면서 중앙군사위원회는 ‘파워게임’의 장(場)으로 변하고 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역대 최고권력자는 항일전, 국공(國共)내전을 거치며 성장한 군 출신이다. 반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군경험이 없는 문민 출신이다. 중앙군사위는 “군사위 주석 자격에 제한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군부 장악에 일정 부분 한계를 가져다주고 있다.
실제 장쩌민을 비롯해 문민 출신 중군위 주석들은 군부 장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후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된 장쩌민은 군부를 장악한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와 ‘파워게임’을 벌였다. 양씨 형제는 군부를 좌지우지하며 장쩌민과 각을 세웠다. 이에 장쩌민은 “군내에 양가장(楊家將)이란 파벌을 형성해 ‘양씨(楊氏)천하’를 도모한다”는 논리로 양씨 형제를 제거했다.
장쩌민은 중군위 부주석 류화칭(劉華淸)과도 파워게임을 벌였다. 중군위 부주석을 역임한 류화칭은 ‘중국 항공모함의 아버지’로 불리는 원로 제독으로 덩샤오핑의 심복이다. 이후 장쩌민은 ‘위안화(遠華)그룹 밀수사건’에 류화칭의 딸이 개입된 혐의를 포착, 류화칭을 제거했다. 위안화 밀수사건은 인민해방군 해군이 개입된 중국 최대의 밀수사건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류화칭은 장쩌민의 총서기 사임 직후 그의 군사위 주석 퇴진을 종용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역시 2004년 9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후에도 한동안 중군위 내부의 장쩌민 전 주석계열의 원로군인들과 알력다툼을 벌였다. 특히 전임 중군위 부주석이던 차오강촨(曹剛川)과 현 중군위 부주석인 궈보슝 등은 장쩌민의 계파로 꼽힌다. 이들은 한때 장쩌민의 은퇴를 공공연히 반대해 후진타오를 곤혹스럽게 했다. 결국 후진타오는 자파인 쉬차이허우를 중군위 부주석에 기용해 세력균형을 도모했다.
시진핑 역시 부주석 취임 후 한동안 크고 작은 ‘파워게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측 역시 이같은 점을 인식, “인민해방군 현역병으로 3년간 복무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는 중이다. 시진핑은 1980년대 초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이던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3년간 일했다. 더욱이 시진핑의 두 번째 아내 펑리위안이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歌舞)단장이란 점은 시진핑에게 플러스 요인이다.
왕단·우얼카이시·차이링 ‘톈안먼’ 3인방 해외 망명길 정권교체 맞물려 다시 부각
이동훈 기자
일부 학계 ‘톈안먼사태=민주화운동’ 부정적 시각도
중·일관계 악화 속 ‘大中華’ 외치는 민족주의 시위 늘어
자오쯔양의 오른쪽이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원자바오 현 총리다.
“노벨평화상을 톈안먼(天安門) 희생자에게 돌린다.” 중국의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그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인 류샤(劉霞)를 통해 전달한 말이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연이은 ‘정치체제개혁’ 발언으로 중국의 정치 지형이 요동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시진핑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폐막된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5중전회)에서도 ‘정치체제개혁’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진다.
시진핑의 중앙군사위 부주석 입성에 초점을 맞춘 한국 언론과 달리, 중국 언론들이 17기5중전회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공평정의’ ‘축소빈부’ 같은 정치적 화두였다.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17기5중전회에서 채택한 12차5개년(12·5) 계획 기조로 ‘포용성 성장’을 제시했다. 중국 현지 언론과 네티즌들도 ‘공평정의’ 같은 화제로 분주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 발언 이후 이어진 정치적 움직임과 흡사하다.
류샤오보의 발언 직후 1989년 톈안먼사태 관련자들도 최근 정치적 흐름과 맞물려 다시 조명받고 있다. 톈안먼사태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들고일어난 시위를 당국이 계엄군을 동원해 유혈진압한 사건을 말한다.
웨이징성, 민주화 운동 대부
반체제 인사들은 중국에서 ‘이견(異見)인사’로 불린다. ‘다른 견해를 가진 인사’란 뜻이다. 이들은 주로 1989년 6·4 톈안먼사태에 연루된 인물들이다. 700명이 사망(추정)한 6·4사태 직후 이들은 대거 대만과 미국, 유럽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 해외 민주화세력들은 지금도 ‘평반육사(平反六四, 6·4 재평가)’란 기치를 내걸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웨이징성(魏京生)’은 반체제 인사의 대표격이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전에는 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로 줄곧 거론돼왔다. 웨이징성은 1976년 제1차 톈안먼사태 직후 ‘제5의 현대화(민주주의)’란 개념을 주창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으로 일하던 웨이징성이 ‘민주의 벽’에 써붙인 대자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웨이징성과 교제 중이던 티베트족 여자친구는 그의 반항 성향에 불을 붙였다.
웨이징성은 지하잡지 ‘탐색’을 통해 베이징 친청(秦城)감옥의 실태를 폭로하는 글을 써 ‘중국의 사하로프’란 명성을 얻었다. 친청감옥은 중국의 대표적 정치범 수용소다. 결국 웨이징성은 1979년 중월(中越)전쟁 때 “베트남에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문제가 된 것도 웨이징성의 석방문제였다. 웨이징성은 10여년간의 옥살이 끝에 지난 1997년 국외로 추방돼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이다.
웨이징성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직후 “류샤오보는 반체제 인사의 주류가 아니다”라며 “후자(胡佳)와 가오즈성(高智晟)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류샤오보 외에도 중국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셈이다. 에이즈(AIDS) 인권운동가인 후자와 파룬궁(法輪功·중국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기공수련단체) 탄압에 항의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은 현재 각각 투옥과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다.
왕단, 톈안먼사태 지명수배 1호
6·4 톈안먼사태 때 학생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한 왕단(王丹)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중국 공안 당국은 톈안먼 학생시위가 악화되자 왕단을 지명수배 1호로 검거령을 내렸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1학년생이던 왕단은 톈안먼 학생시위 당시 ‘민주의 여신상’을 톈안먼광장으로 반입해 꺼져가는 시위에 불을 붙였다. 사태 직후 체포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왕단은 현재 대만 타이베이의 정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단은 최근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의 국무기밀비 횡령사건 때 대만 측으로부터 20만달러가 넘는 지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왕단은 지난 2000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지부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하려 했으나 우리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해 비자발급을 거부한 바 있다. 왕단은 지난해 홍콩에서도 입국이 거부됐다.
왕단은 자신의 트위터(@wangdan1989)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꾸준히 자기주장을 펴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이상주의자, 건설적 정치반대파, 중국의 정치와 생활질서를 다시 재건하길 바라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한 왕단은 “인터넷과 사회변혁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북한의 열병식에 배를 잡고 웃었다” “최근 학생운동은 너무 약화돼 어그러졌다”는 등의 각종 글을 남겼다.
우얼카이시는 대만, 차이링은 미국에
톈안먼사태 당시 지명수배 2호로 지정된 우얼카이시(吾爾開希)도 빼놓을 수 없다. 베이징사범대생이던 우얼카이시는 톈안먼사태 때 왕단과 함께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위구르족인 그의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태 직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현재 대만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우얼카이시는 지난 6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며 일본 도쿄에 있는 중국대사관의 담벼락을 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하는 등 여전히 주목을 끌고 있다.
우얼카이시 역시 자신의 트위터(@wuer kaixi)를 통해 중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중국의 떠돌이 이의(다른 뜻)인사’라고 밝힌 우얼카이시는 “류샤(류샤오보의 아내)가 류샤오보의 면회를 다녀온 뒤, 경찰들이 그녀의 집앞에서 출입을 막고 ‘매체를 만나서도 안되고, 친구를 만나서도 안된다’라고 경고했다”며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왕단, 우얼카이시와 함께 톈안먼 학생시위 3인방으로 불린 차이링(柴玲)은 미국에 머물고 있다. 단발머리의 여대생 차이링은 ‘톈안먼의 꽃’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며 서방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사태 직후 차이링은 배를 타고 홍콩과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하버드대 MBA를 졸업한 차이링은 미국의 컨설팅회사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차이링은 남편과 함께 ‘젠제이버(Jenzabar)’란 교육용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 중이다. 현재 세 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톈안먼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로드(All Girls Allowed)’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지난 10월 12일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4군자 중 류샤오보는 옥중 노벨상 수상
‘용의전인(용의후예)’이란 곡으로 중화권에서 명성이 높은 허우더젠은 현재 대만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허우더젠은 톈안먼사태 당시 대만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와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공연을 벌였다. 6·4사태 당시 베이징 사범대 강사이자 ‘사대주보(師大週報)’ 편집장을 지낸 가오신과 베이징대 강사 출신으로 6·4사태 당시 쓰통(四通)그룹 종합계획부 부장이던 저우둬는 투옥 후 미국으로 망명해 각각 하버드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톈안먼사태 당시 이들 반체제 인사들은 홍콩과 대만 등지의 지원을 받아 일명 ‘참새작전(黃雀行動·잠복을 뜻하는 은어)’을 통해 거의 대부분 해외로 망명한 상태다. 현재 이들은 망명 후 연락 자체가 뜸한 것으로 알려졌다. 톈안먼 4군자 가운데 유일하게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저우둬는 지난 2004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가오신은 미국에, 허우더젠은 대만에, 류샤오보는 감옥에 있어 연락이 힘들다”고 토로한 바 있다.
반면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주로 외국에 머물고 있는 사실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 중국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한계도 노출 중이다. 더욱이 이들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운신의 폭이 더 좁아졌다. 중화권 언론은 “베이징에 있는 저우둬가 현재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고 전한다. 류샤오보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불구, 지난 2008년 중국의 체제개혁을 촉구한 ‘08헌장(零八憲章)’발표를 주도한 ‘국가전복기도죄’로 현재 랴오닝(遼寧)성 진저우(錦州)감옥에 수감 중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중국 학계에서는 톈안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시각에 부정적 모습도 관찰된다. 오히려 민주화운동이 아닌 부의 분배, 공정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는 톈안먼사태 때 등장한 ‘민주의 여신상’과 ‘덕선생(德先生·demo cracy)’이란 구호 때문에 ‘톈안먼=민주화’로 보는 서방의 시각과 조금 차이가 있다. 최근 중·일(中日)관계 악화에 따라 민주화가 아닌 ‘대중화(大中華)’를 외치는 민족주의 시위가 부쩍 늘어난 것이 대표적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