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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주석
기도에 대한 가르침 (누가복음 11:1-13)
기도는 자연스런 종교의 가장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이다. 동물이나 도깨비는 결코 기도하지 않으며 조물주를 영화롭게 하지 않으며 그의 은총을 알지 못하며 그의 도움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요한 점은 기도로 도움을 얻으며 의무에 더욱 더 충성케 되며 지도를 받으며 기도의 효능을 믿기 때문에 격려를 받게 되는 데 있다.
Ⅰ. 우리는 본문에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곳은 아마 자주 기도하러 가시던 곳인 듯하다(1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기도하셔야 했으며 역시 인간으로서도 기도하셔야 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복종을 배우셨다. 누가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보다 자주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세례 받으실 때(3:21) 기도하셨고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5:16),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6:12),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셨고(9:18), 또 곧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 기도하실 때에 변화되셨다(9:28, 29). 또한 본문에서도 예수께서는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다윗의 진실 된 아들처럼 예수께서는 기도할 뿐이었다(시 109:4). 그리스도께서 지금 혼자 기도하시고 계시며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사실만 알고 있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을 것이다.
Ⅱ. 제자들은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지도를 받으려고 했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그들이 요청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와 은혜를 보고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을 받기 위해서 열렬하게 시기할 정도로 사모해야 한다. 그들의 열성을 보고 우리는 거룩한 모방과 경쟁심을 가져야 한다. 왜 우리는 그들처럼 하지 못하는가?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들은 이 요청을 하러 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 아마 지명 받은 "제자 중 하나"가 전체의 이름으로 말한 것 같다. "주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비록 예수께서는 쉽게 가르쳐 주실 수 있지만 요구가 있어야 가르쳐 주신다. 그래야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지도를 잘 따를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그들의 요청은 다음과 같았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과 모본을 가르쳐 주사 우리가 입으로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한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좋은 기도이며 아주 필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그의 말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주여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여 사명감에 불타게 해 주시고 충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를 지시하여 주옵소서. 주여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기도할 때 적당한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기도할 수 있는 일과 지혜를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무엇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2. 그들의 탄원은 다음과 같았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요한은 이러한 필요한 의무를 자기 제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설명을 보면 유대인의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송영이었고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들은 deh,seij poiou/ntai ─즉 기도를 했다(5:33)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들의 기도가 간구 하는 기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주여,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숙해 왔던 기도 곧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송축 기도에 덧붙일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간구 하는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기도 끝에 하는 송영과 아멘도 생략하셨다. 아멘은 감사할 때에 보통 말하는 것이고(고전 14:16) 시편에서는 오직 송영에만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기도와 같은 것을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쉽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으며 특히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쳤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그들에게 산상 설교시에 가르쳤던 것과 아주 꼭 같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마 6:9 이하). 우리는 제자들이 그것을 잊었다고 생각할 수 없으나, 제자들은 더 많고 충분한 지도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다른 어떤 기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성령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은 그들의 모든 간구가 이 몇 마디의 말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고 자신의 말로 스스로 기도를 충분히 길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지시하셨으나 본문에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이것은 주기도문이 기도와 예배 의식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도록 가르쳐진 것을 암시해 준다.
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사이에는 몇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본래의 말을 찾아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변화도 두 주기도문에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번역에서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원본이 없었기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제 3 의 기원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단어와 순서는 마태복음과 같다. 그러나 제 4 의 기원은 조그마한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나, 누가복음에서는 "kaqV h`me,ran ─즉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날마다 즉 "우리에게 우리의 몸에 필요한 양식을 매일 주시옵소서." 이 말은 "다가올 많은 날을 위한 양식을 오늘 주시옵소서"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던 것처럼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에,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에 주시옵소서"라고 간구 하자. 왜냐하면 그렇게 하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계속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자비를 힘입고, 그날이 요구하는 의무에 따라서 매일의 사명에 새롭게 복종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매일의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 5 의 기원에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의 죄는 바로 빚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주거나 용서해 주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신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용서받는데 아주 필요한 자격이기 때문에 용서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을 주셨다면 우리는 용서받기 위한 간구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주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왜냐하면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또 하나 추가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다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를 용서해 줄 것을 고백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예외 없이 참 사랑을 품고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나이다." 그리고 본문의 주기도문 끝에는 송영이 완전히 빠졌다. 또한 아멘도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임의로 송영이나 아멘을 사용케 하셨거나 다윗의 시편 중에서 나오는 것을 사용토록 그대로 두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백을 그대로 두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리는 기독교적인 원칙에 따른 송영으로 채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두 개의 주기도문은 같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몇 가지 일반적인 교훈을 찾아보자.
(1) 기도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버지께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분은 우리와 모든 인류에게 평범한 아버지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구 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선을 믿고 겸손히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 또한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우리의 이웃을, 모든 인간들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자비와 기독교적인 성화된 인간성의 기본 교리를 병행시켜야 한다. 이 교리는 주기도문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고 주기도문은 이 교리를 입증해 주듯이 잘 표현하고 있다.
(3) 우리는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을 고무시켜 주고 지배해야 하는 하늘 나라의 심성을 확증시키기 위해서, 예배 때마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위의 세계에 대해서 친근감을 갖게 되고 장래의 나라를 위하여 더 잘 준비하게 된다.
(4)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섭리와 교회에서의 은혜의 통치에 대한 능력을 찬양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 전자와 후자는 더욱 더 분명해지며 우리와 다른 사람들도 좀 더 분명히 거기에 복종할 수 있게 된다.
(5) 위의 세계 즉 보이지 않는(그러므로 오직 신앙으로만 평가할 수 있다) 세계의 원리와 실제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아래 세계의 원리와 실제가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있어서 좀 더 윗 세계에 적합하게 되도록 소원해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는 앞의 세 가지 기원에 관계된 것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영광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고 당신의 뜻이 당신에 대한 봉사가 완전히 이루어진 저 하늘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에 대한 봉사와는 거리가 먼 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6) 믿음으로 진실 되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믿으며 또한 믿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만일 우리의 첫 번째 소원과 염려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그의 나라가 임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때 필요한 양식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될 것이다.
(7) 우리가 현실적인 축복을 얻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우리의 소원을 적당하게 간구 해야 하며 격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 본문의 날마다라는 표현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과 아주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evpiou,sioj 란 말의 의미를 달리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용할"이 아닌 딴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본성의 욕구에 적합한 양식을 말하며, 그것은 흙으로 만들어지고 땅에 속한 우리 몸을 위해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가리킨다(시 104:14 참조).
(8) 죄는 우리가 매일매일 지고 있는 빚이다. 그러므로 용서받기 위해서 매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의무를 생략함으로 빚을 갚지 않고 있으며, 또한 매일 행위로 말미암아 율법의 형벌을 초래시키고 있다. 매일 우리의 죄는 더욱더 쌓여간다. 그럼에도 우리가 매일매일의 허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은 자비의 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보다도 더 많은 용서를 해 주신다.
(9) 만일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고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적인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비난하고 해롭게 했던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도 만일 우리 마음의 생각이 우리의 형제에 대한 악의와 복수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도 없고 평화의 응답을 받을 수도 없다.
(10) 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죄로 인한 멸망만큼이나 두려워해야 하고 그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 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일은 범죄를 멀리하는 일 만큼이나 우리의 관심사와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비록 유혹이 매력적이고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 해야 한다. 우리는 시험으로 범죄 하게 되며 범죄로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11) 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악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을 가져다주는 사탄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말을 악한 자 즉 악마로부터의 구원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우리가 악마와 그에 의한 사로잡힘의 유혹에 대해서 특별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자들은 악마를 내어쫓기 위해서 택함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항상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던 특별한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기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Ⅳ.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에 강청과 열심과 끈기를 가져야 된다고 하셨다.
1. 강청은 사람들과 거래할 때 많이 효과를 갖다 준다(5-8절). "어떤 사람이 밤중에 갑작스런 어려움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이웃집에 떡 한두 덩이를 빌리러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이웃은 빌려주기를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문을 두드려서 그를 깨웠고, 성나게 했고 많은 말로 변명했다. 문은 닫혀서 잠겨 있었다. 그의 아이들은 같은 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이 소란을 피운다면 그 아이들이 잠자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그의 하인들도 잠자고 있다. 그는 그들이나 아내를 부를 수도 없다. 만일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빌려준다면 감기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온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이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사람에게 떡을 주어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는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18장 1절에서와 똑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8:1). 즉 하나님은 간곡히 조르면 마음이 움직이는 분이시란 말씀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강청으로 사람들을 설복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강청한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자.
(1) 기도로 지도 받기 위해서
[1]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접해 줄 수밖에 없는 친구나 이웃집에 가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 우리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요한 것이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한 떡을 구하기 위해서 갚았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기의 벗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를 용서하셨다"(욥 42:10).
우리가 선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찾아온 자들을 대접하며 인도해 줄 수 있는 은혜를 간구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4]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로 인한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곤경에 처해 있다면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도 좋다. 이 사람은 그의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떡을 구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염려를 기꺼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5] 우리는 즉시 기도해야 함과 동시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2) 기도로 우리가 용기를 얻기 위해서, 만일 우리가 화를 내는 어떤 사람을 강청으로 설복시킬 수 있다면 무한히 관대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 강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청에 대해서 화를 내시지 않으시며 받아 주신다. 특히 우리가 강청하는 것이 영적인 축복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더 받아 주신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당장에 응답해 주시지 않지만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합당한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본래 선하시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것으로부터도 위로를 받는다(9, 10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즉 육체의 기사가 제거되길 바라든지 은혜가 충만하길 바라든지 네가 구하는 모든 것은 얻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태복음 7장 7, 8절에서도 살핀 바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 안에서 모든 약속이 성취 될 것을 아신다.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노력으로 우리의 기도한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구하고 찾으면서 재촉하고 계속 똑같은 문을 두드릴 때 마침내 우리의 기도가 협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아무리 미약한 성도라고 해도 믿음으로 구하면 받게 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시 34: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께 간구 할 때 즉 그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그의 나라가 임하여지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간구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강청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일 종야에 잠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말고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게 해야 한다"(사 62:6, 7)
Ⅴ.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게 함으로 지도와 용기를 얻게 하셨다.
1. 세상의 아버지들의 자비심에 대한 간구.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즉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염려를 가진 자가 있다면 만일 그의 아들이 조반을 위해서 떡을 달라고 하면 대신 돌을 주겠느냐?(생선을 먹는 날) 점심을 위해서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대신 뱀을 주어서 그를 물어 죽게 하겠느냐? 또한 그가 저녁으로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는 너희의 자녀에 대해서 그렇게 냉정할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11절, 12절).
2. 하늘 아버지의 축복에 대한 이 말씀의 적용(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는 마태복음에 있는 대로 좋은 것으로 주신다. 본문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을 수 있다.
(1)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지시를 예수께서 주셨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영적 생활을 만들어 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열심을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 모두가 열심히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은사이다.
(2) 예수께서는 이 기도가 곧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라고 하셨다. "너희 천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성령을 줄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는 우리에게 주실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사실 성령의 선물은 계약 즉 약속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행 2:33, 38). 본문에서는 이것을 자녀들이 필요할 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 소원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아버지의 준비성으로 표현되었다. 만일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뱀이나 전갈을 요구한다면 아버지는 거절하고 좋은 것으로 먹여 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구하게 될 때 사실 떡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생명의 주관자 즉 영혼, 생명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부모들이 비록 악할지라도 친절하며 악할지라도 판단해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적당한 때에 줄줄 알거든 하물며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보다 지혜롭고 선함으로 다 훨씬 뛰어난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재산을 남겨 주려고 한다면 더욱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유산을 받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의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
예수와 바알세블 (누가복음 11:14-26)
본문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2장 22절 이하에서 살펴본 바가 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표징으로 사탄을 정복하는 그의 능력의 특별한 증거를 보여 줌으로 거룩한 사명의 한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사탄의 역사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본문에는 역시 예수께서 자기의 사업의 성취를 위해 애쓰시는 열심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마태복음에서는 눈멀고 벙어리 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귀신이 쫓겨났을 때 그 벙어리는 즉시 말하게 되었다.
Ⅰ.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경탄을 금치 못했으며 특히 그 일이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자의 손으로 행해졌다는 것과 메시야의 역사를 실행한 자가 자기들이 기대하던 메시야의 화려함이라곤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Ⅱ.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블의 힘을 빌어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다고 했다(15절). 귀신의 왕국에는 참모가 있고 부관이 있는가 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귀신 사이에는 어떤 정해진 묵계가 있고, 귀신이 주된 권리를 가졌으며 최후 승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확증시키고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의 증거에 맞서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16절). 그렇게 해서 구름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예수의 말씀을 확신시켜 달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율법을 받을 때 시내 산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면 자기들의 지혜로써 반증할 수도 없으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는 달리 공중 권세를 잡은 자(엡 2:2)와의 맹약과 공모로써도 행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탄은 능력으로 역사하나 거짓 이적을 행하는 자이다. 아니, 이들의 요구가 분명히 뜻하는 것은 하늘로서 표적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세력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지독한 불신자들은 어떤 일을 꾸미든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들어보자.
1. 사탄처럼 교묘한 왕이 자신의 파멸이나 자기 나라가 빼앗기는 일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17,18절). 그들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말을 속으로 간직했다. 그것을 입밖에 내기를 두려워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심으로써 자기의 반대 의견이 풍지박산 될까봐서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흉증을 애써 감추려고 생각할 때도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너희 자신도 이 트집의 무근함과 악의성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이렇다. 스스로 분쟁하는 자가 결코 서지 못한다는 것은 공인된 금언이며 매일의 경험으로 확증된다. 하물며 나라나 가정의 일이랴 ! 어떤 자든 스스로 나뉘면 결코 설 수 없다. 사탄은 이 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한다. 사람들의 신체를 점유하던 사탄은 기적으로 말미암아 축출 당한다. 뿐만 아니라 행해진 기적을 설명하고 확증시키는 가르침으로 사탄은 더 큰 피해를 입는다. 그 가르침은 죄를 억제하고 사람들로 하나님 섬기는 일로 돌이킴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직접 파괴시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파탄을 재촉할 뿐이다. 너희는 자기 자신의 확립을 위해 그토록 교묘히 행동하고 자기나라가 든든히 서 있도록 하려고 그처럼 애쓰는 원수 사탄이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생각할 수 있느냐?
2. 그들이 그리스도가 사탄과 협약을 맺었다고 비난한 것은 편파적이고도 심술궂은 행위였다. 다른 자가 이런 기적을 행했다면 그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찬미했을 터였다.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너희의 혈족인 유대인이나 너희의 제자인 바리새인 중 어떤 자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당한 것 같이 사탄과 가증한 연결을 맺었다는 비난을 받지 아니했다." 우리에게 아첨하는 자는 용납하면서 우리를 책망하는 자라고 하여 정죄한다는 것은 크나큰 위선이란 점을 명심하라.
3. 이 기적의 확실성을 반대함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게 원수가 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빛을 가로막았고 자신들의 문을 잠그는 빗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밀쳐냈기 때문이다(20절).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으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은 임하게 되고 모든 축복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만일 너희가 영접치 않으면 그 나라는 너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힙 입어"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라고 되어 있다. 성령은 "여호와의 팔"이다(사 53:1). 하나님의 크고 가장 놀라운 역사는 그이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때 성령을 "하나님의 손"으로 말한다면 사탄을 정복하기가 얼마나 쉬운가를 말해 준다. 사탄을 정복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보다 훨씬 작고 낮은 능력 즉 "하나님의 손"으로도 충분하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팔을 다 뻗지 않으셔도 된다. 원하신다면 울부짖는 사자도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다.
본문은 재앙을 당할 때 바로의 술객들이 말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손가락)이니 ……"(출 8:19). "이제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고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훼방하던 자들로 판명된다면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그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놀라운 힘으로 너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4.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사실 그들과 그들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자체가 사탄의 나라를 파괴한다(21,22절)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의 왕인 바알세블을 힘입어 낮은 귀신을 내어쫓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사탄이나 그의 나라에 실질적인 해나 위협이 되지 않는다. 사탄은 한 사람을 잃었지만 다른 사람을 잡은 것이 된다. 귀신과 귀신 축출자들은 서로 한패다 그의 군대의 결사대가 파괴당하더라도 본부의 세력은 확장된다.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탄의 생각은 절대로 약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을 때는 귀신들과의 어떤 협약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보다 강하며 권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지의 권세를 파괴하는 말씀과 은혜로 사탄의 세력을 파괴시키고 사탄의 계획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사탄의 본부를 파괴하고 모든 무장을 빼앗고 사탄이 빼앗은 모든 재물을 나누게 된다. 이런 일들은 어떤 사탄도 이제까지 하지 못했고 앞으로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계속 나타난 능력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나 특별한 개인에게 있어서,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해 준다. 좀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1) 회개치 않은 죄인의 상태는 비참하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셔야 할 그의 마음은 귀신의 궁궐이 되어 버렸다.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귀신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여기서 아래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모든 회개치 않은 죄인들의 심령은 귀신의 궁궐이며 거기에는 귀신이 기하며 지배한다. 이렇게 될 때 그는 불순종의 자녀로서 일하게 된다. 거룩한 심령은 거룩한 것의 궁궐이나 성별 되지 못한 심령은 귀신의 궁궐이다. 그는 귀신의 뜻을 따라야 하며 귀신을 위해 일하게 된다. 그는 귀신에 의해서 영혼의 왕관을 빼앗기게 된다.
[2] 강하게 무장된 귀신은 이 궁궐을 지키며 그가 계속 점령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무장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진리와 거룩함에 반대하여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그릇된 생각이 바로 마귀가 그의 궁궐을 지키기 위해서 세운 본거지이다. 즉 이 궁궐이 그의 요새이다.
[3] 강하게 무장된 마귀가 궁궐을 지키고 있는 동안 회개치 않은 영혼의 궁궐에는 다소 평안이 있기도 하다. 죄인은 자신을 좋게 평가한다. 그리고 그는 매우 안전하고 즐거운 듯하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갖지 않고 있으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도 없다. 그는 자신만만해 하며 항상 평안한 듯하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모든 것은 조용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한길로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선포는 마귀의 궁궐의 평안을 흐뜨러 놓았다.
(2) 회개함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이 약탈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사탄은 강하게 무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그리고 중보자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보다 훨씬 강하다. 힘으로 말하면 예수는 강하다. 우리를 책망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더욱 그리스도는 강하다.
[1] 승리의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사탄이 그의 소유가 안전하고 모두 영원히 자기의 것이고 그 사람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오신다 하나님께 대한 한 영혼의 회개는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와 그의 능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그리하여 영혼의 자유를 회복하며, 영혼의 이권과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2] 승리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께서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아 버린다." 마귀는 대담한 적이다. 마귀는 바로가 그의 강을 믿듯이(겔 29:3). 자기의 무장을 믿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이 무기를 빼앗아 버린다. 영혼의 죄와 부패의 능력이 파괴될 때, 잘못이 개정될 때, 눈이 열려지고 심령이 겸손해지며 변화되어 진실해지고 영적으로 되어진다 이 때에 비로소 사탄의 무장은 파괴된다.
둘째, 예수께서는 "저의 재물을 나눈다." 즉 예수께서는 친히 그들을 "점령하신다." 이제까지 죄와 사탄을 위한 봉사로 사용되었던 마음과 육체의 재산, 능력, 관심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로 바꿔지며, 주를 위해 일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것들을 분배해 주며 사탄을 정복함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승리의 축복을 베풀어준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의 전체적인 목적은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하나가 되고, 지시를 받으며 복음을 받으며 진심으로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언급하셨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적과 한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3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거절하고 기적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적으로 간주되며, 마귀의 손에 있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5. 협상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능력으로 쫓아내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쫓겨난 귀신은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책임지셨기 때문이다(막 9:25). 그러나 귀신에 의해서 쫓겨난 귀신은 다시 들어오게 된다. 왜냐하면 귀신이 스스로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 더러운 귀신의 습관이기 때문이다(24-26절). 귀신의 왕은 귀신을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철수하라고 자기의 군대에게 명령할 수가 있다. 또한 그는 속이기도 하며 군대에게 더럽고 속이는 영을 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적으로 최종적으로 적을 패주시키신다. 이 논쟁에서 그는 보다 깊은 의도를 지니고 계셨다. 이는 정당한 제의를 하고 나선 자들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런 자들 중에서, 내적으로 악마의 권세를 깨뜨리기 시작하셨으며 그의 나라를 전복시키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도를 거절하고, 사탄에게 복종하는 상태로 되돌아갔다. 본문에서 다음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의례적인 위선자의 생태 즉 그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 그의 심령은 계속 귀신의 집이 되어 있다. 귀신은 그곳을 자기의 거처로 삼고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1]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 더러운 영은 회개시키는 은혜의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즉 하나님 나라는 결코 그러한 "힘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 귀신은 "나갔다" 즉 잠시동안 철수했다. 그렇데 함으로 그 사람이 계속적으로 사탄의 세력에 놓여 있지 않으며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기 위함이다. 사탄은 나갔다. 혹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모했다."
[2] 억지로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 집이 소제되었다." 그것은 마치 바로가 거짓으로 회개하고 아합이 부분적으로 개혁하고 헤롯이 회개한 척했던 것과 같다. 세상의 더러운 것을 피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이 세상의 신의 지배 아래 있다(벧후 2:20). 집은 청소되었으나 깨끗해지지는 아니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는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 집은 깨끗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소제로 더러운 쓰레기는 치워져 버렸다. 그러나 죄인을 괴롭히는 죄, 즉 중요한 죄는 건드리지도 아니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치워졌으나 비밀한 쓰레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마 23:25). 집은 청소되었으나 더러운 것은 때가 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3] 집은 일반 은사와 은총으로 수리되었다. 집은 진정한 은총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온갖 은혜의 모양으로 수리되었다. 시온마구스는 신앙으로, 발람은 좋은 소원으로, 헤롯은 요한에 대한 존경으로, 바리새인은 많은 외적인 모습으로 집은 "수리되었다." 집은 수리되었으나 그것은 은으로 도금한 그릇 같고 색칠하고 니스 칠한 것이지 진실된 것도 아니고 영구한 것도 아니었다. 집은 수리되었으나 소유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집은 그리스도께 복종하지도 성령에 의해 살지도 아니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지고 있는 나머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본문에서 최후 배교자의 상태를 볼 수 있다. 귀신이 나간 후에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온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라"(26절). 불확실한 것을 뜻하는 확정된 수효이다. 막달라 마리아한테서도 "7귀신"이 나갔다고 했다. 일곱 악한 귀신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적대관계에 있다(계 3:1). 이 일곱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하다고 했다. 귀신들은 모두 똑같이 악한 것이 아닌가보다. 아마 그들의 악한 정도는 지금은 타락했지만 본래 그들이 차지했던 거룩함의 정도와 같은가 보다. 귀신이 악한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시행하려 할 때는 자기보다 훨씬 악한 귀신을 고용한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도 저항도 없이 들어갔다. 그들은 환영받았으며 거기서 거했다. 거기서 그들은 일했고 그곳을 지배했다. 결국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리라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위선은 곧 배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마음이 죄와 사탄의 손에 있다면 외적인 모습은 아무 쓸데가 없게 된다. 정의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오랫동안 견고하게 설 수가 없게 된다. 죄의 은밀한 장소가 외적인 신앙 고백의 가면 속에 감추어지고 양심이 타락한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강권적인 사랑을 거두어 가신다. 감추인 위선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배교에 이르게 된다.
[2] 죄와 형벌의 관점에 보면 그러한 자의 나중 형편은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 배교는 인간의 가장 사악하고 헛되고 더럽고 뻔뻔스러운 면이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었다. 하나님은 종종 이 세상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당신의 분노를 표하신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 그들은 더 큰 화를 당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고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충성을 굳게 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누가복음 11:27, 28)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기사이며 예수를 만나기 위해 왔던 어머니와 형제의 기사와도 관련이 없는 기사이다(왜냐하면 누가복음 저자는 8장 19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사는 교육을 위한 것이다.
1. 한 여자가 훌륭한 예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감동적이고도 정직한 찬사를 예수 그리스도께 보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저주하고 훼방하는데, 이 선량한 여인(이 여인은 아마 귀족인 듯하다)은 찬양했다. 지혜와 능력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이 말씀하실 때에……"(27절) 즉 예수께서 확신 있고 증거가 있는 말씀을 하실 대에 "무리 중에 한 여자가" 바리새인들의 공격하고 부끄럽게 하는 비열한 수법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함을 보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을 밴 태가 복이 있나이다. 얼마나 감탄할 일이며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 분명히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예수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아들로 나은 여인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하늘로부터 많은 은총을 입었고 이 땅에 많은 축복을 내려 주는 자의 어머니만큼 행복한 자가 누구입니까?"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 높은 찬사를 보냈으며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존경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마리아 자신의 말과도 일치된다. 비록 악한 이 세대의 사람들일지라도 "만세에 나를 복 있다 일컬으리라"(1:48).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은 중요하다. 또한 그리스도는 보배이다(벧전:7). 그러나 우리는 이 선량한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연적인 혈족관계를 너무 과장해서 존경함으로 그리스도를 육체로만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에 대해서 그 이상의 것을 알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2. 예수께서는 자기를 낳아 주고 길러준 자보다 신시라도 복종하는 자들이 더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말한 것을 부정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존경도 거절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여기에서부터 더 높은 생각으로 이끌어 가셨다. 이것이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절). 예수께서는 그이 육체적인 모습이나 인간적인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 또한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된다면 그녀가 부러워하는 성모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체가 큰 특권이지만 정말로 복된 자 즉 주님의 축복을 받는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키며 기억하여 그것을 자신의 생활 규칙으로 삼는 자들이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누가복음 11:29-36)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우리의 믿음의 확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와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그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잇는 증거는 죽은 자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본문을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을 반박하셨다. "무리가 모였다"(21절). 그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또한 그의 기적으로 그들의 호기심이 채워지길 바랐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많은 무리가 왜 모였는지 알았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 그들은 구경하러 왔으며, 그들이 집에 돌아가서 이야기 거리를 얻기 위해서 왔다. 이것이 바로 어떤 것으로도 깨우쳐 주고 변화시켜 줄 수 없는 악한 세대이다. 가장 감동적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의 역사로도 안 된다.
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제까지 본 표적과 다른 한 가지 표적을 보여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된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가 바다에 빠져 사흘 동안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설교했던 것이 그들에게 표적이었다. 그들은 요나의 외침을 듣고 곧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복음의 선포는 유대 나라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보고 거룩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다행한 일이나 이런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심한 파멸 외에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인자는 이 세대의 표적이니라"(30절).
3. 예수께서는 이 표적을 믿으라고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믿지 않으면 그들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1) "스바 여왕이 심판 때에 일어나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할 것이다(31절). 그녀는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생소했으며 외국인으로서 속기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의 영화에 대한 보고를 쉽게 믿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당 끝에서 왔다." 그녀는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특별히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경배로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plei/on Solomw.ntoj─보라 "솔로몬 보다 더 많이 가진 이가 여기 있도다. 즉 예수는 솔로몬의 모든 "말과 글보다 더 지혜가 있으며 더 많은 하늘의 거룩한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있었음에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아니했다.
(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그들의 회개치 않았음에 대해서 정죄할 것이다(32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 그러나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힘이 있으며 니느웨 백성보다 더 무서운 파멸에 대해서 깨우쳐 주고 경고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니느웨 백성처럼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아니했다.
Ⅱ.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확증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이며 모든 신적 진리가 온당하고 뚜렷하게 다가오면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 그들은 아주 유리하게도 그들이 바라는 등불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의 등불을 켜서 움 속이나 말 아래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는 구석에서 전파하시지 않으셨다. 사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요한 곳에서 외치라고 지시 받았다(33절). 복음의 빛이 등경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큰 특혜이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자마다 보게 되고 그들이 어디에 잇든지 어디로 가든지 그것을 볼 수 있고 무엇이 진리이며 확실한 것인지, 행복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2. 등불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등불을 소유한 목적이 무엇인가? 사물은 언제나 아주 분명하다. 만일 소유한 목적이 무엇인가? 사물은 언제나 아주 분명하다. 만일 육체의 기관이 건전치 못하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한 자가 아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34절). 영혼의 등불은 이해력과 판단력이다. 또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의 등불이 우리에게 비추어졌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축복이다. 그것은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이든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
(1) 만일 이 영혼의 눈이 성실하고 분명하게 보고, 사물을 있는 대로 보며 공평하게 판단하고 진리만 목적하고, 진리 자체만을 추구하고 어떤 악한 동기나 의도가 없다면 온 몸 즉 온 영혼은 빛으로 충만한 것이다. 즉 복음을 영접하게 되며, 그 복음은 영혼에게 지식과 즐거움을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옥토의 상태를 말해 준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영혼을 채우는 충만한 빛인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빛으로 채워져서 어떤 부분도 어두운 곳이 없다면─ 만일 모든 영혼의 힘과 재능이 복음의 지배와 영향을 받고 어느 것도 성스럽지 못한 곳이 없다면─모든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며, 거룩함과 평안으로 충만할 것이다. 영혼은 본래 어두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으로 채워졌다.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복음은 대문과 창문이 그것을 받기 위해서 열려진 자들의 영혼 속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빛으로 채워질 것이다.
(2) 그러나 만일 영혼의 눈이 악하다면─ 만일 판단력이 마음의 타락과 악한 의도, 교만과 시기, 세상과 육 적인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비뚤어지고 편견을 갖게 된다면─만일 거룩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면, 분명히 온 몸, 온 영혼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된다(34절) 복음에 대해서 눈을 꼭 감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통하여 지도를 받고 위로를 얻겠는가?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어떻게 그들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마음의 눈이 불공정, 편견, 잘못된 목적으로 어둡지 아니한가 주의해 보라.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성실하라. 그리고 빛 가운데서 진리, 사랑 능력을 받을 준비를 하라. 너희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이 세대의 사람들과 가팅 되지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 쓰지도 아니했고 그것을 행하려고 생각조차 하지도 아니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두움 속에서 살았으며 목적 없이 방황하다가 결국은 영원히 죽게 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누가복음 11:37-54)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그의 손님들에게 식사 중에 사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후에 성전에서 공적인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마 23장). 왜냐하면 예수께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큰 회중 속에서 되풀이하거나 고수하려 하지 않으신 일이라면 외진 곳에서도 말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죄인을 만나셨을 때 개별적으로 적용하려고 아니하신 책망이라면 어떤 부류의 죄인이든 전체적으로도 책망하고자 아니 하셨다. 그는 과거나 현재, 할 것 없이 신실하신 증인이신 까닭이다.
Ⅰ. 예수께서는 자기 집으로 정중히 초대한 바리새인과 식사하기 위해서 가셨다(37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바리새인이 식사하러 가자고 청했다. 바리새인은 예수의 말씀에 감동해서 진심으로 존경을 표시했고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고 싶어서 예수님을 초대했고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중지시키고 예수를 시험 할 점을 얻고 고소와 비난할 점을 찾아내기 위한 나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53,53절). 우리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 설사 그가 나쁜 의도를 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고, 만약 그가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그리스고가 자기에게 기꺼이 선을 행하시려고 하신다는 걸 알게 될 터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뚝뚝하지 않고 사교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비록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조심해야 되지만, 너무 무뚝뚝하거나 세상과 멀리할 필요도 없다.
Ⅱ.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에 대해서 바리새인이 비난했다(38절). 이런 일은 종종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있었다. 성인이며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며 신앙심 깊은 예수께서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특별히 많은 군중과 함께 있다가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기 위해 왔고, 모든 준비가 다 되었고 바리새인과 다른 손님들은 손을 씻었는데 예수께서는 왜 손을 씻지 않으셨을까? 손을 씻는 것이 무슨 해로운 일인가? 이런 의식은 그들 교회의 경전에 분명히 명령되지 아니했는가? 사실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은 것을 종교상의 문제로 지킴으로 뽐내는 그들을 책망하시곤 했다. 의식법에는 여러 가지 씻는 것이 있다. 그러나 손을 씻는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것을 시행치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시행치 않았기 때문에 비난의 소리를 하는 줄 알면서도 자기를 초대한 바리새인을 엄하게 대하셨다.
Ⅲ. 예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지금 손님으로 와 있지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바리새인에게 심한 책망을 하셨다. 우리는 어떤 악한 일에 대해서는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
1.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외식적이며 사람들의 눈에만 잘 보이는 것으로 대치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는 일은 더디하거나 아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다(39,40절).
(1) 그들의 죄는 불합리였다. "너희 바리새인은 겉은 깨끗이 한다. 즉 너희는 물로 손은 씻었으나 악한 행동으로부터 너희 마음은 씻지 아니했다. 이것은 탐욕과 악의이다. 바로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탐욕과 선한 사람에 대한 악의이다." 주인이 마신 잔이나 자기가 먹은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는 자는 청결한 종이 아니다. 그는 속을 깨끗이 할 생각도 안하며 먹고 마시는 것에 직접 영향을 주는 더러운 것에 대해서 주의도 하지 않는다. 모든 신앙적인 헌신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와 기질은 잔과 대접의 속과 같다. 마음이 더러우면 예배를 더럽힌다. 그러므로 더러운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으나 아직도 영적인 죄악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 잔의 겉의 모든 먼지를 씻었으나 속은 거미집과 거미로 가득 찬 잔을 주인에게 주는 것과 같다. 원한과 사악, 즉 세상적인 것에 지배되고 악의에 지배되는 것은, 좀더 크고 더럽고 변명할 수 없는 죄인 음란과 술 취함으로부터 잔의 겉을 깨끗이 하고 난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스럽고 저주스러운 죄이다.
(2) 그 불합리한 죄의 특별한 실례를 본문에서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했느냐?(40절) 너희가 지금 스스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식적인 씻음 행위를 모세의 율법에 명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화해야 한다고 명령하시지 안했느냐? 밖을 위한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을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것을 만들지 아니했겠느냐? 다른 율법에 보면, 마음이 깨끗지 아니할 경우 육체의 정결과 육체의 더러움의 제거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경히 여기더냐?" 하나님은 입법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이시다. (놀랍고도 기이하게 만들어 진) 이 육체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더욱더 놀랍고도 기이하게 만들어진 이 영혼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했느냐? 만일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만드셨다면 분명히 그는 우리가 이 두 가지를 주의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몸을 씻고 그의 솜씨를 찬양하기 위하여 손을 깨끗이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가 되시는 영혼을 씻고 마음의 문둥병을 깨끗이 해야 한다.
여기에 추가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음식물을 깨끗케 하는 규정을 만들어 주셨다(41절). "먹기 전에 너희의 손을 씻는 대신 그 안에 있는 것 (ta. evno,nta─네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네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몫을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또한 너희도 그것들을 안전하게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의미이다. 그들의 토지의 소산물의 일정한 양은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 자신의 사용치 않은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것이 되었으며 기도로 복을 빌 수 있었다(신 26:12-15). 우리가 "예비치 못한 자에게 나누어 줄 때"(느 8:10) 우리는 안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즐겁게 살 수 있다. "욥은 홀로 식물을 먹지 않고 고아에게도 주었다. 그러므로 그 식물은 그에게 깨끗한 것이 되었다"(욥 31:17). 즉 깨끗이 사용되도록 인정되었고 허가되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몫을 취해 가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끗이 하기 위해서 우리의 식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자유이다.
2. 예수께서는 사소한 것에는 관심을 두나 율법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그들을 책망하셨다(42절).
(1)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수단에 관계되는 율법은 아주 정확하게 준수했다. 특히 제사장들의 생활 유지를 위한 것에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는 종류대로 완전하게 드리며 더디 드리지도 않는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율법의 완전한 준수자라고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곤 했다. 그리고 제사장들한테서도 인정을 받았다. 강제적으로 제사장들한테 호의를 베푼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세력을 강화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으셨다("이것도 행하여야 할지니라").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중요한 의무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다.
(2) 신앙의 본질에 관계되는 율법을 그들은 무시했다. "너희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너희는 사람에게 그들의 몫을 주고 하나님께 너희의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
3.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영, 높은 자리와 사람들의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다(43절). "너희는 회당(혹은 장로들이 다스리기 위해서 만났던 회의실)의 높은 자리를 기뻐하는도다." "만일 너희가 그 자리에 앉지 못한다면 너희는 그 자리를 탐낼 것이며 앉는다면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즉 너희는 사람들한테 인사 받는 것과 그들이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너희가 책망 받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거나 인사 받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기뻐(사랑)하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마음과 생활의 사악을 이상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색칠한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다(44절). "너희는 풀로 뒤덮힌 무덤과 같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며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이 바리새인들의 내부는 부패한 무덤처럼 혐오, 교만, 시기, 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간사하게 예배라는 미명아래 그것을 감추어서 나타나지 않게 했다. 따라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죄로 더럽혀지며 그들의 부패와 악한 교훈에 감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모습을 만들며 어떤 위험도 없다고 한다. 전염병은 서서히 침투되며 자기도 모르게 감염된다. 그러나 병에 걸린 자들 자신은 결코 위험이 없다고 생각한다.
Ⅳ. 예수께서는 역시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다. 전통에 따라 율법을 준수하던 바리새인들처럼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1.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분개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45절).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기관입니다. 우리도 역시 위선자란 말입니까?" 교만한 죄인들이 책망을 비난하는 것은 흔히 있는 링이다. 악한 의지 때문에 생기는 책망 받을 일을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죄를 부끄러워하게 하고 책망을 받게 만드는 것이 지혜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잘못을 듣고 고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죄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사랑으로 말한 신앙적이고도 친절한 충고를 악용한다. 그들은 충고자들이 책망만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고 책망자들에 반항하며 책망을 거절하고 자신들을 정당화시킨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렘 6:10). 율법사는 그 바리새인의 편에 가담했다가 스스로 그의 죄의 동참자가 되었다.
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다(46절). "화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그리고 다시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52절). 그들은 사람들한테서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항상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율법의 지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화있을진저"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은 예수께는 그들이 바리새인을 편드는 것이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난한 것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일에 대해서 항의하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대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들도 화"를 당한다.
(1) 율법사는 신앙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짐이 되게 하고, 자신들에게는 가볍게 한 것 때문에 책망 받았다(46절). "너희의 전통에 따라 너희의 권위를 보여 주고 두렵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집을 사람에게 지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해 주신 많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절대로 즐겨하시지 않는 짐으로 그들을 잡아 매두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1] 너희는 그들과 함께 짐을 지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너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그 속박으로 구속받지도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위하여 만들은 것처럼 보이는 울타리 같은 전통 때문에 마치 율법의 완전한 준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본다면 그들은 그러한 올타리 같은 전통도 지키지 안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를 전혀 무시했다.
[2] "너희는 너희가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무겁고 어려운 짐을 진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 짐을 없애 주거나 덜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두 손을 가지고 나오나, 장로들의 전통을 경감시키는 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다.
(2)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죽인 선지자들에 대해서 존경하는 척하기 때문에 책망 받는다. 조상들은 회개시키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같은 사명으로 왔던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다(47-49절).
[1] 경건을 가장한 이 위선자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았다." 즉 그들은 선지자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과 함께 존경의 표시로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유물을 무덤에 넣을 만큼 미신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순교자의 무덤을 잘 꾸미는 것이 하니님께 가장 인정받을 만한 헌신의 행위라고 생각지도 아니했다. 그들은 향을 무덤에 넣지도 아니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도 아니했다. 또한 선지자들의 공적을 하나님께 아뢰지도 아니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자기들을 선지자들의 자녀, 상속자, 후계자로 자처하고, 선지자들의 경건한 죽음의 무덤을 수선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선지자들의 영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온 자들에 대해서 깊은 적의를 품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당장은 그들에게 보낸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이며 핍박할 기회를 못 가졌다고 해도 곧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금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을 시험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극악한 위선을 폭로할 것이다. 그 선지자들은 표적과 기적과 성령의 은사로 자신들이 하늘로부터 보냄 받은 사도, 전파자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사도의 모습과 이름으로 "내가 선지자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들은 옛 선지자들과 같은 권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을 모함하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국이며 핍박"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미리 아셨으나, 선지자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지혜"가 한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훗날에 박해자와 박해받는 자가 받을 응보를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영광 받을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이 쌓은 선지자의 무덤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동은 조상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풀이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의 행동 즉 그들이 선지자들에 대해서 어떤 진실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과 그들의 조상이 이곳에 매장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간수하려는 점으로 보아 무덤을 쌓는 일은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선지자들에 대해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했던 요시야는 "벧엘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깊이 생각했다.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왕하 23:17, 18). 만일 이 율법사들이 그 일을 시행하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게 되면 그것은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과장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배신자의 입맞춤과 같이 선지자들을 박해할 의도를 감추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잠 27:14).
[4] 그들은 박해의 "한도가 다 차게" 될 때는 심판을 받을 것을 반드시 각오해야 한다(50, 51절). 그들은 계속해서 장사를 해왔다. 그러므로 비록 창세 때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그리고 유대 나라의 멸망을 예측하여 그때까지 계약을 맺어왔다고 할지라도 "회사가 지은 빚"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것은 이 세대 즉 유대인의 이 마지막 세대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박해한 그들의 죄는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어느 죄보다도 더 중하기 때문에 진노가 그들에게 가장 심하게 내려질 것이다(살전 2:15, 16). 로마인에 대한 그들의 파괴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지자들을 민족에 박해한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보복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의 전파와 성공을 할 수 있는 대로 방해하려고 했던 것 때문에 책망 받았다(52절).
[1]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에 따라, 메시야를 예언했던 구약 성서를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해설해 주지 아니했다. 만일 사람들이 율법사에 의해 성경을 바르게 이해했더라면 쉽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성경을 악용하고 잘못된 해석을 함으로 사람들을 혼란시켰다. 이것을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열쇠를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바르게 사용하는 대신 그것을 감추었다. 이러한 일을 마태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는 것"이라고 했다(마 23:14).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는 자들은 하늘 나라를 닫는 자들이다.
[2] 그들은 구약 성서의 지식에 의하여 때가 찾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세우시려고 하셨던 그 왕국 가운데서 성취된 예언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3]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와 도움 없이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쫓아낸다고 위험하고, 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방해하고 실망을 주었다. 사람들이 계시를 싫어하는 것도 나쁘지만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더 나쁘다.
끝으로 본 장(章)의 끝에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극악한가를 볼 수 있다(53, 54절).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신 것은 "어떤 행동을 낳을"수가 없었고 형사상 고소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책망이 엄했다는 듯 그들은 예수의 지도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격분해서 대들었다. 그들은 "그에게 열성적으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험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로 힐문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밉게 보이거나 정부에서 불쾌하게 보이거나 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책잡고자 "목을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잡을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마치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던 다윗의 적과 같은 자들이다(시 56:5). "악한 사람들 이 불행을 깊이 파들어 간다."죄를 신실하게 책망하는 자들은 항상 많은 대적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을 경계하는 감시자들 때문에 입의 문 앞에 경계병을 세워 둬야 한다. 선지자는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으려고 하는"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사 26:21). 우리가 인내로 이런 시험을 견디고 신중하게 극복하기 위해서 "죄인들의 온갖 비난을 견디셨던 예수를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