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적벽, 동복유격장의 가슴 아픈 추억/전성훈
화순 적벽은 80년대 중반 댐이 건설되면서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묶여 거의 30년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1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어 사전 예약한 일정 인원만 관람할 수 있다. ‘산은 물을 만나야 생기가 있고, 물은 산을 만나야 매혹적이다.’, 화순 십경의 제일경이라고 불리는 적벽(赤壁), 그 옛날 귀양살이 하던 한 선비가 이 곳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여 소동파가 읊었던 중국 적벽에 비유하여 화순 적벽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끄러운 조상의 과거를 알고 차마 밝은 세상을 바라볼 수 없어 삿갓을 쓰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한을 삼켰던 ‘김삿갓’(김병연)이 적벽의 경관에 반하여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화순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부근의 파랗게 익어가는 청보리 밭을 보자 40년이 훌쩍 넘은 젊은 시절, 화순 적벽 동복유격장에서 겪은 가슴 아픈 추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1975년 3월, 초급장교 소위에 임관되어 광주상무대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 훈련을 받았다. 양쪽 어깨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어디인지 모를 임지에서 부하들과 함께 정열적인 초급장교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훈련을 받았다. 겨울에 심은 보리가 파랗게 그 색깔이 진하게 되면 될수록 4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각자 배치될 임지로 떠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은 그 해 5월, 훈련과정의 하나인 유격훈련을 받았다. 훈련 장소는 광주가 아니라 훈련이 엄격하고 힘들기로 유명한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유격장이었다. 광주에서 화순 동복유격장까지 약 54km를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마침 먼저 유격훈련을 받던 동기생들 중 일사병에 의한 탈수증으로 2명이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다. 동기생이 목숨을 잃자 부대 분위기가 매우 격앙되었다. 슬픔을 겪은 동기생 일부는 군인이라는 신분을 잊고 학생 때처럼 순진하고 단순하게 생각하였다. 유격훈련과정의 수정과 훈련 중 숨진 동기생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는 지휘 계통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현역 장교가 소요를 벌린 것으로 간주되어 주동자로 몰린 동기생 몇 사람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우리 중대 순서가 되어 착 갈아 앉은 마음으로 유격훈련을 받으며 적벽에서 활강 훈련을 하였다. 요즘처럼 번지점프 놀이하는 게 아니었다. 절벽 높은 곳에 설치된 도르래에 매달린 활차를 장갑 낀 손으로 잡고 100m 이상 내려가다가 전방에 보이는 수신호에 따라서 강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코스 훈련 하는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지갑과 담배와 라이터를 비닐주머니에 넣고 둘둘 말아 물에 젖지 않도록 하였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활차를 내려가다가 수신호에 따라 강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나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물에 떨어지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거짓말처럼 내 몸이 물 바깥으로 솟아나왔다. 강물은 생각보다 깊지 않아 가슴에 닿는 정도였다. 서러운 과거의 슬픔을 가슴 속에 묻어버리고 멋지고 아름다운 적벽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 (201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