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의 사치품, 초피
 조선에서는 당하관(堂下官- 종3품 이하)과 사족(士族)들은 서피(鼠皮- 족제비 가죽)와 일본산 산달피(山獺皮- 검은담비 털가죽)를 사용하고, 관원이나 군사, 서얼은 붉은 여우 가죽과 국산 산달피, 공상천인(工商賤人)은 개가죽, 토끼가죽 등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종류의 차이는 있지만, 왕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가죽 옷을 입었다. 하지만 최고급 모피인 초피의 사용만큼은 착용할 자의 신분을 정3품 이상 당상관으로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파직하도록 강하게 금지했다.
하지만 권력과 부를 가지면 사치를 하기 마련이었다. 특히 15세기 중엽 이후부터 16세기 말까지 조선은 각종 공신(功臣)들이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재물을 챙기고, 그 밑에 줄을 서려는 자들이 많은 시대였다. 1만 명의 노비를 가진 거부(巨富)가 등장하고, 각종 사치가 만연했다. 이런 시기에 사대부집 여성들은 초피로 그들의 부유함을 과시했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안팽명(安彭命) 등은 다음과 같은 상소(上疏)를 올렸다.
“요즘 사대부의 집에서는 날마다 사치를 일삼고 서로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크고 작은 연회에 그림을 그린 그릇이 아니면 쓰지 않고, 부녀자의 복식에 초피 가죽 옷(貂裘)이 없으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초피는 야인(野人)에게서 얻는 것이 대부분인데, 소와 말이나 철물 등으로 저들에게 사므로, 그 폐단이 심합니다. 초피는 3품까지로 한정되어 있으나 모든 은대(銀帶)를 하는 자(종6품 이상 문무관)가 장식하여 금지하기 어려우므로, 초피의 값이 올라 적(敵)에게 이익을 주고 있습니다. 신분에 따른 제한을 확실히 해야 모피의 값이 싸져서 폐단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초피에 대한 사치를 금하자는 상소가 거듭되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사치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초피 교역의 폐해
 초피는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생산되었지만, 1478년 이후 명나라에서 요구하는 양이 점차 많아지자 국내에서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조선은 야인(野人-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으로부터 주로 초피를 구했다. 야인들은 조선과의 초피 무역을 통해 그들의 농사에 필요한 소와 철제 농기구, 그리고 말 등을 받아갔다. 게다가 조선에서 초피의 수요가 계속 늘자, 초피 가격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1502년에는 초피 한 장 값이 면포 10필이었으나, 1509년에는 소 한 마리 값으로, 1516년에는 말 1필 값으로 계속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1505년 연산군은 시중에서 구한 초피의 질이 나쁘다며 품질 좋은 초피 2만장을 사오라고 명을 내렸다.
초피와 서피를 조선에 수출한 야인들은 조선으로부터 소와 말 등을 받아 농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철물로 무기를 개량해 사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수도 한양까지 와서 입조(入朝- 외국의 사신이 조정에 방문함)하던 야인 추장들은 더 이상 한양에 오지 않았다. 초피 교역을 통해 이익을 충분히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이 야인들을 통제할 수단을 잃게 만들었다.
반면 조선의 경우 소와 말의 유출이 군사력과 농업의 쇠퇴를 가져왔다. 영안도(함경도) 백성들은 과도하게 세금으로 할당된 모피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모피 매매에 나서야 했다. 소나 말을 팔아 모피로 세금을 바쳐야 하는 부담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은 야인 땅으로 도망가는 일도 벌어졌다.
1508년 특진관 홍경주(洪景舟)는 중종(中宗)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폐조(廢朝- 연산군) 때 무역한 초피 교역 때문에 북쪽 변방 지역은 크게 피폐해졌습니다. 백성이 소 한 마리를 가지고 초피 한 장을 바꾸게 되어 소와 말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말 탄 군사가 1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겨우 40∼50명만 있을 뿐이니, 변방의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무엇으로 적을 방어하겠습니까?”
모피가 바꾼 한국사
 모피 교역 등을 통해 성장한 야인들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고향인 만주 지역을 봉금지(封禁地- 이주 금지지역)로 설정해 사람들의 거주를 제한했다. 따라서 만주 일대에서 초피를 생산하던 사람들이 줄어듦에 따라 조선의 초피 수입 또한 줄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세기 이후로 초피에 대한 사치 금지령이 거론되지 않는다. 가채(가발)가 새로운 사치품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들어 연평균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자, 사람들은 솜옷을 입거나 옷을 껴입으며 온돌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방한용 모피의 수요 욕구는 커졌지만, 초피 등의 수입량이 줄고 온돌에 쓸 땔감 수요로 인해 숲이 사라져 방한용 의복재료인 모피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에서는 초피 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조선은 도리어 초피 무역으로 인해 경제적인 쇠퇴는 물론 야인들의 성장을 도움으로써, 1637년 야인들이 세운 청나라에게 조선이 항복하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자체 생산이 부족한 초피의 과다한 소비로 인한 폐해(弊害)를 겪은 조선의 사례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겠다.
참고문헌: 김인호, [조선의 9급 관원들], 너머북스, 2011;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이야기 2], 청년사, 2001;박선희, [한국 고대복식], 지식산업사, 2002;안보연, [우리나라 모피와 피혁복식에 관한 연구], 이대 석사논문, 2005;강인욱, [고조선의 모피교역과 명도전], [한국고대사연구] 64집, 2011;김순남, [16세기 조선과 야인 사이의 모피교역의 전개], [한국사연구] 152집, 2011;안보연, [우리나라 모피와 피혁복식의 제작 과정과 기술], [복식] 제 58권 8호, 2008;최경순, [조선조 모피 사치에 관한 연구], [경일대학교 논문집] 16-1, 1999;박순지, 이춘계, [고대부터 고려까지 모피물에 관한 고찰], [복식] 제 22호, 1994;정복남, [갖옷에 관한 연구], [복식] 제 23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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