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축복의 위험과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짓축복을 퍼뜨리는 자들을 피하는 것이다. 누구나 손쉽게 구별할 수 있다면 거짓축복에 속아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겠지만 이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이태원이나 동대문에 가서 짝퉁을 살펴보라. 모든 짝퉁들은 하나같이 명품의 브랜드와 모양, 색깔을 흉내 내고 있다. 명품같이 않은 짝퉁을 누가 사겠는가? 최고로 비싸게 팔리는 짝퉁은 전문가가 식별해도 쉽지 않도록 정밀하고 교묘하게 만들었다. 짝퉁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진짜보다 더욱 명품처럼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에는 짝퉁가방이 허술하게 만들어져서 누가 보더라도 가짜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겉뿐만 아니라 안감의 재질과 장식에 이르기까지 명품을 똑같이 베낀다. 그래서 재질과 장식, 재봉기술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식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명품회사들은 자신의 상품에 은밀하게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집어넣어 짝퉁인지를 확인한다고 한다. 마치 위조지폐를 방지하고자 각국의 지폐에 집어넣은 홀로그램이나 정교한 암호부호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짝퉁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진짜는 아니다. 이처럼 거짓축복이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말씀을 줄줄이 나열하며 목청을 돋운다고 하더라도 참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쉽게 속는 이유는, 목사나 부흥사를 비롯한 목회자의 신분으로 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단에서 인정한 신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전도사로서 정해진 기간 동안 훈련을 받은 후에 목사고시를 거쳐 안수를 받아 목사의 신분을 얻게 된다. 그처럼 힘들고 어렵게 공부해서 목사자격을 취득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신분이 바로 목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큰 교단에서 문교부에서 인정을 받아 신학대학교를 세우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을 초빙해서 가르쳐 신학생을 배출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를 비롯해 여러 교단에는 갈라져 나온 군소교단이 수없이 많다. 교회건물에 신학교 간판을 붙인 교단 신학교를 차를 타고 다니면 무수히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학문을 검증받은 교수도, 탄탄한 커리큘럼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곳에서도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안수를 받으면 목사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작은 교단의 신학교 출신 목회자라고 해서 목사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신학을 연구하고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기에는 부족한 여건이나 환경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교단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배출한 목사들도 훌륭한 목회를 하시는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한 목회자도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이들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큰 교회에서 초빙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목사라고 하여도, 모두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불타는 소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열심히 배워 졸업하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양떼들을 먹이고 입히며 가르쳤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소명도 희미해지고 열정도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그 다음부터는 그동안 해온 관성과 관행으로 일하게 되어 열정의 자리에 매너리즘이 자리 잡고,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목회가 소득을 얻는 직업이 되는 삯꾼목자로 변해간다. 차가운 골방에서의 뜨거운 기도와 서재에서 고된 노동의 성경연구 대신에, 기존 해왔던 설교를 재탕하고 각종 프로그램이나 외부 강사로 이를 메우려 한다. 그렇기에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는 교회와 매서워진 교인들의 비판을 잠재우는 방안으로 기복신앙의 거짓축복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빼어들게 된 것이다. 우리네 정서에 이만큼 효과(?)가 확실한 아드레나린 주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하나님의 뜻보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를 앞세우는 삯꾼목자에게서 신앙을 배운다면 오래지않아 허망하고 씁쓸한 열매만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삯꾼목자들을 피하려면
요 10:12~13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목자는 양떼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충족시키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이들은 양들의 유익함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좇아 행한다. 그래서 양떼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현대의 교회에서 삯꾼인지 진정한 목자인지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겉모습이나 학력, 경력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삯꾼 목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경건하고 진실한 목자로 위장하고 흉내를 내려고 애쓰기에 더욱 그 실체가 드려나지 않는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만으로 분별할 수가 있다.
말씀의 분별력을 가져라.
삯꾼 목자와 참 목자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가르치면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겠지만,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목회를 수단으로 삼았다면 소득을 얻으려고 직업으로 목회를 택한 목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들이 예배시나 교육시간에 가르치는 설교나 교육내용이 성경적인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판단행위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겉으로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말하기 때문이다. 다만 인용한 구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토대위에서 정립하였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한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설교나 교육의 속내나 동기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는 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 또한 속내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 두 번의 설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르치기 때문에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데 분별력을 갖추는 능력에 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정치권력을 둘러싼 파벌싸움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당파싸움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모함을 당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파벌은 악전고투 끝에 다시 정권을 잡으면 피의 복수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파벌에 속하였는가가 개인의 출세는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과 재앙을 가름하곤 했다. 이러한 성향은 후세에 들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파벌을 조직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거나 상대파벌을 상대로 칼끝을 겨누는 일이 모든 사회조직에서 암암리에 행해졌다. 교회에도 이러한 일이 바로 이단 시비이다. 이단은 초대교회부터 존재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시비가 유독 심하다. 피해의식에 민감한 민족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교단이나 세간에 인기를 입은 목회자의 설교가 유명해지면 너도나도 여기에 동참하여 기존의 교단이나 기득권층의 목회자들은 이를 못 마땅히 여기거나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질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상하고 모함하는 수단으로 이단으로 몰고 가는 경우이다. 이러한 이단시비는 오래지 않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를 통해 빈번하게 나타나곤 했다. 이단 시비의 판단은 설교내용이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단으로 몰리는 측들도 성경에 없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부분에서 입장차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 차이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공격하고 폄훼하여 시비가 붙는 것이어서, 이단으로 몰리는 당사자나 교단들은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며 이를 몰아붙이는 상대방을 되받아쳐 이전투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 같은 이단시비는 시간이 지나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그 정체가 정립되게 된다. 아무리 이단이라고 공격했어도 그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정통적이며 복음적인 교단이나 목회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집단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드러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밝힌 성경해석이나 설교내용이 성경에 해박한 전문가들의 검증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단인지 알지 못하고 휩쓸려 들어간 사람들은 수많은 시련과 고통스런 회환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들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설교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기에 이 같은 인생의 시련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기복신앙에 의한 거짓된 축복관은 비성경적이라 이단으로 보기에 충분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빗나가는 성경해석을 하는 이단들에 대해서는 뾰쪽한 눈으로 서릿발 같은 공격을 서슴지 않던 이들이 기복신앙의 비판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자신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이 비성경적인지를 잘 알고 있지만, 손쉬운 목회방법에 대한 이의 유익이 너무도 크고 그동안 관행으로 일삼았던 행위인지라 묻어두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해서 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교인들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축복도 없을뿐더러 세상 풍조를 좇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평생을 헛된 이론과 사술을 좇아 재물과 시간을 허비하였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으랴? 비단 비성경적인 내용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교묘하게 가르치는 것이 기복신앙뿐만이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도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외치며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지만 이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비성경적인 성경해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 당사자는 교인들이다. 그렇기에 성경말씀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치겠거니 하는 신뢰도 필요하지만,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배우고 통찰력을 갖추어야 하는 책임의 우선순위는 본인의 몫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록하고, 묵상하며, 다른 번역본, 본문에 가까운 주석, 성경사전을 참고서로 삼아 말씀 뒤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건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러한 습관을 들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건강을 위해 적당한 운동을 평생 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 해박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분별력을 갖추는 습관은 믿음을 탄탄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삯꾼목자의 음흉한 덫을 피하기위해서도 꼭 맞아야 할 예방주사이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판단하라.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 교회에 다녔다가 낙담해서 현재는 그만둔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는 교인일지라도 과거에 실망해서 여러 번 교회를 옮긴 이유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들이 실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목회자에 대한 것이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섬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품이나 행위가 기대에 어긋나고 속마음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섬기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그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도 사람이니까 실수도 할 수 있고,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므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도 위험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의 성품이나 행동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례는 주변에 일어나는 흔한 일에 불과하다. 삯꾼목자라면 일찍 자리를 들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지만, 목회자의 속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행동한 것이라면 조급한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리에 맞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 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구약시대에도 권력자의 곁에 붙어 왕에게 선한 일을 말하면서 아첨을 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적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멸시한 하나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렘 28장 이하) 이들이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지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동안에 진짜 예언자는 왕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축복한 거짓선지자의 말을 믿고 전쟁에 대패해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위의 구절은 구약시대뿐 아니라 현시대에도 거짓목자들이 적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이들의 사탕발린 거짓축복에 넘어간 자들에 넘어갔다면 고통스런 현재의 삶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목자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 신분의 외모나 외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임을 주저 없이 말씀하셨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참 목자와 삯꾼 목자를 가르는 기준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령의 함께 하심에서 나타나는 성품과 이를 드러내는 행동일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성령의 열매를 완벽하게 가진 사람은 없겠지만, 목자의 길을 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이 있었다면 이 같은 성품의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성품을 드러내기보다는 증오와 분노, 시기, 질투, 파벌, 정죄, 방탕함, 교만, 위선, 조급함, 탐욕, 음란 등을 더 나타낸다면 이는 분명 삯꾼 목자임일 것이다. 특히 삯꾼 목자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탐욕이다. 삯꾼목자는 소득을 얻기 위한 직업으로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탐욕을 드러내며, 이를 조언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분노하며 정죄하는 등의 독선과 오만함을 보여주곤 한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이러한 행위로 감추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도 한 가족의 가장이며 재정이 부족한 교회를 운영하다보면 돈에 대해 자주 언급하여 본의 아니게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목회자의 생계와 교회의 운영자금에 대한 것이라면 이러한 목회자의 태도에 대해 불평하며 비판하기보다 교인들이 마땅히 짐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며 교회형편을 무시하고 교회건물을 넓히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치중하거나 사례비에 과도한 집착만을 보인다면 분명 삯꾼목자일 것이다. 이러한 목자의 모습에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서 구별해야 이들의 악한 발톱에서 피할 수 있다.
삶의 고난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욥기를 읽으면서 동방의 의인이란 칭하던 이 사람의 생의 고난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의 불행한 삶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한다. 어떻게 하다 이런 불행과 재앙이 닥치게 되었는가 하며 의아해하며, 그 많던 재산이 사라지고 10명의 자녀가 죽으며 아내는 도망치고 자신의 몸에 악창까지 생겨 고통과 슬픔으로, 죽음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배려임을 간절히 원하는 그의 측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행한 그의 삶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에게 닥친 혹독한 재앙이 독자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책장을 덮으며 안심한다. 나에게는 이러한 불행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사탄이 범접할 수가 없고 불의의 재앙을 막아주시며 사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러한 생각이 온당할까?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생각만 해도 두려워하는 불행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으며 평온하고 형통한 삶만을 누리며 살게 될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행한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고난이 닥치면 그동안 신앙생활이나 기도가 부족했음을 깨닫고 새벽기도를 다시 시작하며 평소에는 소홀했던 수요예배에 참석하기도 한다. 신앙수준의 강도를 높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면 불행한 사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얻었을 것이고 숱한 설교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로서,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성실한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헌금을 교회에 아낌없이 드리고, 일 년 365일을 쉬지 않고 따뜻한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새벽예배에서 하나님의 눈도장을 찍으라는 판에 박힌 해결책을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에다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삯꾼목자는 등골이 오싹한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재앙과 불행한 사건이 집안에 닥치고 자녀들의 앞길을 막으려 불치의 병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 등이다. 물론 이 같은 근거는 구약의 레위기나 신명기 등에서 발췌하여 들이대고 있다. 이 같은 말을 듣고 담담해하며 마음이 평온한 자가 몇이나 될까? 불과 유황이 여기 저기 떨어지는 심판 날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노기를 띤 하나님의 모습이 퍼뜩 스쳐 지나가며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하나님 앞에서면 누구나 죄인이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세상일이 그리 녹녹치 않아서 단단한 결심이 허물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말이다.
삶의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인가?
대부분의 사망에 대한 의사의 최종진단은 심장마비이다. 즉 심장이 뛰지 않아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심장마비에 이르게 한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교통사고에 의한 과다출혈도 있을 것이고 당뇨 합병증이나 암질환의 막바지 진행으로 인해 더 이상 심장에 힘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이 늙으면 질병의 면역력이 약해져서 성인병을 포함한 질병에 취약하게 되고 적지 않은 시간을 병마와 싸우다 죽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게 되는 것은 진리인데, 이 진리를 실행하는 여러 방법으로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어떤 이는 평균수명보다 이전에 죽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들게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래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죽기도 하지만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질병이 걸리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결국 저주라는 얘기일 것이다. 파리가 거미줄에 걸리고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잡혀먹는 것이 재앙을 당하는 곤충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는 자연의 섭리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현상일 뿐이다. 크리스천이 맞닥뜨리는 생로병사의 고난과 불의의 재난 역시 자연의 법칙중의 하나이지만, 간절한 기도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피할 길을 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험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도의 응답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난이 찾아온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시며 고난 중에도 기쁨을 얻게 해주시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예기치 못한 재난이나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고난들은 하나님의 저주라기보다, 우주를 운행하고 대자연을 섭리하며 인간의 생화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들어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잘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외가 없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자연의 법칙이 피해 갈 리가 없다.
또한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자초하는 고난도 있다.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간암이나 간경화 등을 비롯한 질병에 더 잘 걸리며 흡연자는 폐암에 걸릴 확률이 월등하게 높다. 신용카드를 마치 애완동물처럼 좋아하고 가까이 두는 사람은 과소비나 충동구매로 인한 소비자부채를 더 많이 갖게 되며 악성부채로 인해 재정이 낭패에 빠지며 과도한 이자부담으로 가정이 깨지기 쉽다. 로또복권을 비롯한 경마, 경정, 경륜 등을 비롯한 도박을 즐기거나 묻지마 투기에 주저 없이 뛰어드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확률이 높다. 음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불륜의 늪에 빠져 이혼을 당하여 행복한 가정을 잃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의 삶의 고난도 역시 하나님의 저주라기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초래한 고난이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도 위험이 즐비한 인생의 지뢰밭에 무턱대고 뛰어든다면 삶의 고난을 초래하게 된다. 지뢰는 그 사람의 신앙의 유무나 돈독함에 상관없이 뇌관을 건드리면 터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기뻐하는 제자로 고난을 달게 받는 자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행복했던 가정은 깨지고 단란하게 살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돈다.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빼앗기고 가진 것은 입고 있는 옷이 전부이다. 그나마 쫓겨 다니며 잡히면 모진 고문에 끔찍한 사형으로 생명을 잃는 일도 허다하니 말이다. 재산과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소중히 아끼는 목숨조차 주저 없이 버리는 이들의 삶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고난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고난은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다. 그들에게 이 고난은 행복하다고 받아들일 정도로 담담하게 여긴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복음을 위한 고난은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뗄 수 없기에 말이다. 초대교회의 열두제자를 비롯한 상당수의 교인들이 그러한 고난을 달게 받았으며, 나라마다, 민족마다 복음이 처음 들어간 곳에는 수도 없는 순교자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구한말에 가톨릭 순교자가 많이 났음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3가지 유형의 고난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저주라고 불리는 고난이 무엇인가? 순교를 위한 운명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에서 비롯된 고난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첫 번째 유형인 나이가 먹고 늙어감에 따라 오는, 생명의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질병의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저주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상당수의 재앙과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다. 그런데 거짓축복을 일삼고 기복신앙을 섬기는 적지 않은 삯꾼목자들은 대부분의 불행한 사건이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고 자신의 말에 복종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자유를 빼앗기며 악한 영이나 탐욕스런 자들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고난은 무엇인가?
신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말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저주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언급한 저주는 대부분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주의 내용은 축복의 반대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저주는 받게 되는 원인도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듣지 않아 발생하게 된다. 위의 말라기 말씀도 십일조와 명령한 헌물을 드리지 않아 저주가 임하게 된다며 현대의 강단에서 심심찮게 발췌하고 선포하여,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한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고난은 생각만 해고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율법의 저주가 유효한가? 한마디로 구약의 율법에서 말하는 저주의 징벌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렇지만 율법이 폐지되었다기보다 승화되고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저주의 징벌내용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달라진 것이다. 그 저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으로 인해 심판의 날까지 미루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약의 저주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이 땅에서 살아남을 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기에는 죄 없는 자를 찾을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가 없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벌하시기보다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심판의 날까지만 유효하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라도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면 범죄하고 불완전한 우리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초하거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악하고 어리석은 행동의 징벌이나 경고로써 내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고난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에 의하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그러므로 거짓축복을 선포하는 삯꾼목자가 아무리 강단에서 하나님의 고난을 말하더라도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즉시 발효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범죄하고 방탕한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살아가면서도 악한 행위로 인한 쓰디 쓴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며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