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역사의 담벼락에 핀 홍매화 *
-차용국-
한양도성길 차용국 서울역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길목에 3ㆍ1독립운동기념터가 있습니다. 지금의 세브란스빌딩이 서있는 자리입니다. 100년 전 이곳에 세브란스병원이 있었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3ㆍ1 독립운동 거사를 논의했습니다. 그 만세의 함성이 100주년이 되는 날, 아직 찬 바람이 남아있어도 날씨는 맑기만 합니다. 휴일이면 찾아오는 게으름이란 불청객을 애써 떨치고 길을 나선 것은 용기가 더해진 멋진 선택이었습니다. 남대문은 숭례문이라고도 합니다. 조선 시대 태조 7년(1398)에 건축한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조선 초기 한성부의 경계였습니다. 조선은 문루에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렸는데, 매일 아침 파루(4시경)에 문을 열고 밤 인정(10시경)에 문을 닫았습니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면 임금이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냈던 국가 행사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문밖에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남지라 했는데 지금은 그 터에 표지석만 세워놓고 있습니다. 시대의 부침은 남지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1907~1908년간 좌우 성곽이 철거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의 참변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허물어진 문은 1961~1963년이 되어서야 보수를 했습니다. 인재도 있었습니다. 2008년 2월 8일 방화로 소실된 문은 2013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 했습니다. 한양도성 복원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이미 다른 용도로 변해버린 성곽길을 이어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인가? 끊어진 성곽의 흔적은 도로에 돌 모양의 그림으로 남아있을 뿐이며, 대한상공회의소 담벼락이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대한상공회의소 담 끝에서 성곽은 사라지고, 소의문(서소문, 소덕문) 터와 수렛골 아펜젤러기념공원,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돈의문으로 이어진 성벽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도로와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14년 일제가 철거한 소의문 터 표지석은 코웨이 주차장 건물 벽돌담 밑에 숨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길을 건너면 고풍스런 평안교회가 보입니다. 예전에 이곳은 수렛골 또는 차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마을에는 숙박 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유래합니다. 한편 이 마을은 추모동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조선 시대 영조가 인현왕후 탄생지인 이곳에 왕후의 추모비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배제학당 자리였던 아펜젤러기념공원을 지나면 정동제일교회입니다. 정동극장 맞은 편에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입니다. 예배당에는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3ㆍ1운동 당시 이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고 합니다. 당시 이필주 목사는 이곳 사택에서 학생들과 독립운동 참여 방안과 독립선언서 배부를 위한 모임을 열었고, 기독교계 대표들과 독립선언에 참여할 기독교계 민족대표도 인선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2년여의 옥살이를 치렀습니다. 또한 1920년 이화여고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을 거행했던 곳입니다. 정동국시를 한 그릇 비우고 돈의문을 지나 인왕산길에 들어섰습니다. 돈의문은 서대문입니다.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8개 성문과 함께 지었던 문인데, 태종 13년(1413)에 서전문을 새로 지었다가 세종 4년(1422)에 또 돈의문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운 문을 지었다 해서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현재 신문로라는 지명의 유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의문은 1915년 3월 도로 확장공사로 철거되어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서울시교육청 담벼락에서 복원된 성곽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끊어지고, 홍파동 홍난파 가옥을 지나 사직공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왕산을 오르는 긴 성곽이 길을 열고 있습니다.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 붉은 벽돌로 지은 독일 선교사 주택이었습니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어 이 일대에 독일인이 많이 살았습니다.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가 말년에 이곳에 살았다 하여 홍난파 가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면 성곽은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남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들어가 보면 우리나라 역사책처럼 상처투성이 입니다. 봄날의 미세먼지처럼 얼룩진 담벼락을 따라 인왕산으로 이어진 성곽 옆으로 등산로를 따라 걸어갑니다. 이 길은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 안산 자락길과 연결됩니다. 그 아래 서대문형무소가 있습니다. 지금 감옥의 기능은 사라지고 공원과 역사박문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뒤틀린 고통 소리는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3ㆍ1절 100주년을 맞아 입장권을 사려는 관람객의 긴 행렬 옆, 끊어진 역사의 담벼락에서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3ㆍ1운동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