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이 들려주는 어머니와 자연 사랑
입력시간 : 2004. 10. 18. 00:00
함성주씨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 출간
신안 재원도 소박한 이야기
잊혀진 고향과 자연 읊어내
어머니의 뭉클한 사랑 재현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전남 신안의 작은 섬 재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함성주씨(34)는 젊은 시절 도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흙먼지 풀풀 날리는 고향을 찾았다.
지금은 우편가방을 매고 쓸쓸한 고향길을 씩씩하게 누비는 영광군 홍농우체국 집배원. 옛것의 흔적을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 그는 생태해설가와 작가로도 일하고 있다.
날마다 세파 가득한 편지를 배달하며 고향 잃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
최근 펴낸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월간 말 발행)에서 그는 감수성 어린 필체로 잊혀진 고향 풍경을 읊조리며 농촌경험이 없는 현대인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근조근 알려준다.
세밀한 기억력으로 오롯이 재현한 그의 유년 시절은 18편의 에세이에 담겼다.
이름도 모르고 봄에 한번 밀어올린 꽃대를 따먹었던 쟁피(춘란)와 보리똥나무 열매, 참대 낚시로 잡은 운저리(풀망둑), 가을 고구마, 칡 등 자연에서 얻어낸 단상들은 초콜릿처럼 달지도, 콜라처럼 톡 쏘지도 않았지만 투박하고 정겨운 행복을 안겨주었다.
특히 50여 집이 채 안되는 섬마을에서 자란 그에게 재래식 부엌은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불러낼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이맛독(부뚜막)·아궁이·비땅(부지깽이)과 함께 잊혀져 가는 옛 부엌은 어머니의 하루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곳이었다.
“밥상문(방에서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 찡그린 얼굴로 억지 눈을 뜨고 내다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얼굴은 감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언제 일어나셨는지 비땅으로 땔나무를 이리저리 들춰가며 밥을 하고 계셨지요.”
가난한 어부의 아내, 홀어미의 며느리, 네 아들의 엄마로서 함씨의 어머니는 분주한 살림에 쫓겨 끼니 때도 늘 부뚜막 앞에 나앉았다.
“엄마! 물!”하고 외치면 김치와 밥그릇을 놓고 숟가락 하나 달랑 쥔 채 식사를 하던 어머니가 솥에서 숭늉을 퍼주셨다.
그렇게 새벽부터 부엌에서 떠날 새 없던 어머니는 부엌문을 걸어잠그고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에야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함씨는 이제 예순의 나이에 벌써 기력이 쇠해진 어머니의 쓸쓸한 등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귀해 목욕이라곤 1년에 두 세 차례만 했던 시절, 채 불리지도 못한 때를 ‘이태리 타월’로 피가 나도록 문질러 아들을 목욕시키셨던 어머니. 함씨는 이제서야 ‘정작 당신의 등은 누가 밀어드렸을까’하는 뭉클한 의문을 품는다.
지독히도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자연이 건네준 무한한 사랑이 삶이란 것의 든든한 토양임을 조금씩 깨닫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얼치기 환경주의자’라고 말하는 그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와 맞바꾼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알리고 싶다”며 “나의 아이 지수를 위한 지구를 가꿀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그래서 그는 자연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살아가고 있다. 시골 노인들의 대소사를 보살피며 편지를 배달하고, 환경운동을 벌이면서 말이다.
진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