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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8
마태복음 6:1-4
구제에 대하여
율법의 본질은 인간들이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언약의 말씀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하지만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되는 은혜를 입히신다. 따라서 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를 수 없기에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대표적 경건의 행위로 생각하는 세 가지, 즉 구제와 기도, 금식으로 자기 의를 행하는 문제에 대해 폭로하시며 그 본질을 밝혀주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절). 이 말씀을 너무 쉽게 문자적으로 이해해 왔다. 남들에게 선행을 베풀어도 드러나지 않게 하고, 기도나 금식할 때도 가능한 다른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하고, 헌금을 할 때에도 이름을 써서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무기명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의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행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많이 한다. 그러면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너희 의”(1절)에 대한 것과 “사람에게 보이려고”(1, 5, 16절) 또는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2절)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5장과 6장이 나누어졌기에 앞의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기 쉬운데 5:48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율법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6장 이하의 서론이 된다. 이런 점에서 1절은 6:2 이하의 본문을 이끌고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온전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자가 천국 백성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고 “너희 의”, 즉 죄인의 의라는 뜻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우리 죄인의 의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는 방법,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의하라”라는 말의 ‘프로세코’는 ‘가까이 가져오다, 전념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 의를 행하는 일에 전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상”은 ‘미스도스’로 ‘품삯, 일한 것에 대한 임금, 보상’이라는 뜻이다.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은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지 못한다는 것인데 하나님께로부터 일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율법으로 자기 의를 쌓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닌데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결국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은 사람에게 보이는 의에 전념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는 상관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절).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사람에게 보이는 의에 전념한다면 이런 결과 외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제”의 ‘엘레에모쉬네’는 ‘불쌍히 여김, 자비, 자선, 구제’라는 뜻인데 ‘엘레오스’(자비, 불쌍히 여김, 동정, 은혜)에서 유래한 단어로 ‘엘레오스’는 70인역에서 주로 ‘헤세드’의 역어로 쓰였다. 한마디로 은혜와 긍휼에 근거한 단어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제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은 긍휼과 은혜를 땅에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외식”이란 말의 ‘휘포크리테스’는 ‘(배우로서 무대에서) 대답하다, 가장하다, 꾸미다’라는 뜻을 지닌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하였는데 ‘대답하는 자, 사칭하는 자, 위선자, 불신앙자’라는 뜻이다. 즉 무형의 내용을 연극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외식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회당과 거리”는 유대 사회에서 모두가 다 알게 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나팔을 불지 말라”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시 성전에 입구가 좁은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거기에 돈을 많이 넣으면 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이 자랑과 같이 되는 것에 대한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진실로”라는 말은 ‘아멘’이라는 선포이다. 즉 예수님께서 왕적 권위를 가지고 진리를 선포하신다는 뜻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자기 품삯을 이미 돌려받았다’라는 말인데 자기 품삯을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으로 보상받았다는 의미이다.
구제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줌”이다. 구제라는 말을 요즘 번역본들에서는 “자선”이라는 말로도 쓰는데 자선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을 뜻한다. 구제든 자선이든 문자적으로는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을 말한다. 율법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7-11)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이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데 의문이 들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약속의 땅은 안식의 땅인데 그 땅에서는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하는데 11절에 보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계속 만드신다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가난한 자를 계속 만드시는가? 이해를 위하여 출애굽기 말씀을 보자.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4)
약자의 대표상이 나그네, 과부, 고아이다. 나그네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을, 과부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여기지 않는 자들을, 고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이런 약자들을 학대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기에 약자들을 학대하지 말고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그네요 과부요 고아였던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7-18)
약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애굽에서 약자요 나그네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약자요 나그네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기에 일방적인 은혜로 베푸신 그 언약을 항상 기억하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스라엘 속에 두시고 그것을 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위에 이방인 객이나 과부, 고아, 가난한 자와 같은 약자들을 주시며 또한 이스라엘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러므로 구제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나 약자들을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은 긍휼과 은혜를 땅에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구제 자체에 매여 스스로 의로운 척함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약자들을 돕는 선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심은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는 탐욕이기에 자기 영광을 상으로 이미 돌려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3-4절).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만 보면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다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런 행위가 죄인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제를 공개적으로 하느냐 은밀하게 하느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구제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앞의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이란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이고 “왼손”이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영광을 취하는 것과 관계없다는 의미이다. 땅적 존재들에게 십자가를 전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나의 노력이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 귀를 열어 듣게 하셨기 때문이다.
“갚으시리라”라는 말의 ‘아포디도미’는 ‘넘겨주다, 나누어주다, 양보하다, 돌려주다, 보상하다’라는 뜻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는 은밀하게 보시는 분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식으로 요란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은밀하게, 즉 비밀스러운 넘겨주고 전해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자들을 주셔서 기억하게 하신 것이 언약이다. 그 언약의 성취자는 진정한 약자로 오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고(롬 3:21-24).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었다. 이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하나님의 사람이란 단순히 착하게 사는 사람, 구제나 전도, 십일조 잘하고 성경 많이 읽고, 주일 잘 지키며,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는 사람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구제나 전도, 기도 많이 하는 것, 열심 있는 봉사 등을 자랑거리로 삼아 자기 의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고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 의를 자랑하려고 하는 외식의 모습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는 자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제란 은혜를 입었기에 언약의 성취자 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 양식을 땅적 존재들에게 넘겨주고 흘려주는 것이다(202411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