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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蘇東坡曰 無故而得千金이면 不有大福이라 必有大禍니라
(소동파왈 무고이득천금 불유대복 필유대화)
소동파가 이르길 “아무런 일 없이(까닭 없이) 천금을 얻는 것은 큰 복이 아니라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 蘇東坡(소동파) : 이름은 식(軾). 동파(東坡)는 호. 북송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 無故(무고) : 아무런 까닭도 없이.
(해설)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일은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비슷한 모양새를 갖는다. 가정부터 시작하여 사회, 국가로 점점 상향화 되면서 그 규모도 점차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즉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 급급한 시기가 지나면 부모와 친척 그리고 형제자매간의 문제에서 친구와 학교 동창간의 문제와 사회로 진출하면 직장 혹은 사업과 관련된 문제로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의무와 권리와 연관된 문제로 상승한다. 자신의 앞날과 현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찾아가는 곳이 바로 철학관 혹은 점집 등이다. 그런데 알아보고자 하는 쟁점 내용은 남자와 여자의 경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공통되는 부분(겹치는)도 있게 마련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다. 그래서 행복한 시기보다는 불행과 고난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시간이 더 많게 마련이다.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고 깜깜한 밤길을 걸어가는 지경처럼 힘들 때면 꿈꾸는 행운이란 희망에 잠시 마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력하지도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끝내는 탈을 부른다. 통계적으로 나온 예가 바로 복권이나 로또 등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고액을 얻게 되면 평소에 씀씀이를 넘어서는 흥청망청 혹은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투자를 하여 돈을 다 날리고 전보다 더 못한 신세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평소에 쓰던 버릇이 자제를 못하고 또한 고갈되어 있는 잔고를 부정하며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시 당첨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계속하여 과소비를 하게 되어 결국은 신용불량자에 여기저기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여 아무도 모르게 야밤에 도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의 그릇에 맞지 않는 복이나 행운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마물이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지적처럼 무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와 상황에 따라 빨리 적응해 가는 지혜로움은 구분되어야 한다. 호사다마라 하였듯이 좋은 일에는 늘 그만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고진감래라 고통스럽고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어 낸 보상으로 얻는 행운이랄까? 혹은 성공은 당연하지만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하기에 가치가 있고 그를 지키거나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여기며 축하를 해 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질시와 따가운 눈초리로 경원시하게 된다. 늘 겸양하고 만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하지요. 그래서 진인사대천명이라 최선을 다한 뒤에는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이 남아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에 미련은 남겠지요, 인간인 이상에는.
생각지도 않은 행운과 복이 나에게 오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판단하여 더 겸손하고 더 노력하며 주위 사람에게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는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기에 찾아온 것이라 착각하여 거만하고 우쭐거리며 평소에 하지 않던 태도를 갖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왔던 복도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는 불운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群盲撫象(군맹무상)
-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을 자신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 판단함을 이르는 말. -
어느 날,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코끼리를 끌어다 소경들에게 보여주라 하였다. 소경들은 코끼리라는 짐승이 앞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신기해 제각기 손으로 이리저리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자 임금이 소경들을 불러 코끼리의 생김새를 물어 보았다(有王告大臣 汝牽一象來示 盲者 衆盲各以手觸 大王呼衆盲問之 汝見象類何物 : 유왕고대신 여견일상래시 맹자 중맹각이수촉 대왕호중맹문지 여견상류하물). 이에 상아를 만져 본 소경이 “코끼리는 큰 무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다음에는 귀를 만져본 소경이 “아니옵니다. 코끼리는 곡식을 까부리는 키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머리를 만진 소경이 “아니옵니다. 코끼리는 돌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다음에는 코를 만진 소경이 “코끼리는 틀림없이 절구공이 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리를 어루만진 소경이 “코끼리는 절구통처럼 둥그렇게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또 등을 만졌던 소경이 “아니옵니다. 코끼리는 平床(평상)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배를 만진 소경이 “코끼리는 꼭 밧줄처럼 생겼사옵니다.”하고 말했다.
이 글을 소개한 불경에는 “선남자들이여, 이 소경들은 코끼리를 제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 말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코끼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떠나서 또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 나오는 코끼리는 佛性(불성)을, 소경은 어리석은 중생을 비유한 말인데 중생은 불성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고, 또 모든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음.(출전 佛經 涅槃經)
遺體觀(유체관)
3.1운동 때 민족대표 중의 한 분이요,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민족지도자 南崗(남, 언덕 강) 李承薰(이승훈)이 별세한 것은 1930년의 일이다. 임종에서 자신의 유체를 그가 세운 오산학교에 기증, 학생들의 수업자료로 삼아 달라고 유언했었다. 이 유언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의뢰하여 표본을 제작중인데, 평안북도 경찰국에서 유체의 교실 보관을 금지한다고 매장을 명령했으며,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도 이 유체표본을 만들고 있는 이마무라(今村)에게 작업 중지령을 내리고 있다. 이때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대서특필하고 있다.
“남강 유체표본에 당국이 간섭/ 표본제작을 중지시키고 매장하라고/ 표본제작 전에는 인도할 수 없다/ 爲政者 學者見解相違(위정자 학자견해상위)” 같은 날 사설에서도 이 문제를 취급 당국 간섭의 부당성을 논란하고 있다. 물론 이 날짜 신문은 민중을 선동한다 하여 압수당하는 필화를 입고 있다.
그런지 60년 후-남강의 오산 제자요, 평생 남강을 숭배하고 살았으며 남강만큼 오산학교를 사랑하여 동창회장으로 일해 왔던 민권운동의 지도자 고 함석헌 옹이 자신의 유체가 오산학교의 학습 자료가 되길 소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뜻이 이루어지건 못 이루어지건 간에 60년이라는 시공을 꿰뚫는 한 가닥 심기의 맥락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이승훈이 남기고 싶었던 것은 생리적 표현 이전에 못 다한 민족사상의 정신표본이며, 함석헌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또한 생리적 표본 이전에 못 다한 민권사상의 정신적 표본이었을 것임으로다. 대체로 서양 사람들은 생명이 사라진 유체를 한낱 물질로 생각하고 한국 사람들은 정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受之父母(수지부모)한 신체발부는 죽어서도 훼손해선 안 되며, 죽은 몸에 형을 가하는 부관참시가 극형이 되는 이유도 이에 있다. 이에 비해 미국사람들은 죽은 후 자신의 심장이며 신장 같은 장기를 떼어서 남에게 주겠다는 “도너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4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험프리 부통령은 자신의 몸을 암 치료의 생체실험용으로 바치지 않았던가. 이렇게 신체훼손을 거부하는 문화이기에 함석헌 옹의 뜻이 더욱 우러러 보이기만 한다.(이규태 코너 1989년)
12-17. 康節邵先生이 曰 有人이 來問卜하되 如何是禍福고 我虧人是禍요 人虧
(강절소선생 왈 유인 내문복 여하시화복 아휴인시화 인휴
我是福이니라
아시복)
강절소선생이 이르길 “어떤 사람이 와서 길흉화복의 판단을 묻되, 어떤 것이 바로 화와 복입니까? 하기에, 내가 남을 해롭게 하면 이것이 화요, 남이 나를 해롭게 하면 이것이 바로 복이요. 라고 하였노라.”고 하였다.
⋇ 問卜(문복) : 점을 쳐 길흉을 물음. 점을 물음.
⋇ 虧(이지러질 휴) : 이지러짐. 헐뜯음. 해롭게 함.
(해설)
세상에 태여 나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 갈 것인가?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시기는 대부분 사춘기가 겹치기에 많은 생각과 우발적 행동이 함께 하여 우여곡절을 겪는가 하면 그로 인한 방황과 이유도 없는 반항도 거침없이 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위험과 자신의 재능과 열망을 쏟아 붙게 될 방향을 잡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중요한 시기이다. 누구나 한번은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이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확고한 자신의 행로를 긍정적이고 역동적이며 정의로운 분야로 정하고 일로매진 한다면 사회에 이바지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정의롭고 참된 길은 순간마다 고난과 죽음보다 더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불의와 올바르지 아니한 길은 쉽고 중독성이 강해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빼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길을 가기보다 지름길로 가려하는 욕망에 갈등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선과 악의 선택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
유희와 같은 재미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는데, 특히 사춘기시절에 당한 상처는 평생을 두고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해도 치유될까? 말까? 하는 끈질김을 보인다.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아니면 불가피한 일로 인해서이건 스스로 사고하고 서지 못하는 시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가슴 속 깊이 상처를 남긴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 더 나아가서는 그의 재능에 의해 꽃피울 아름다운 일들이 오히려 악의 꽃으로 피어나는 슬픈 현실을 보게 되는 안타까움을 남기게 되리라. 물을 먹는 소와 독사에 비유되는 이유가 바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벌어지는 길흉화복 모두가 본인의 의지대로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공명정대하고 사심 없이 남을 위해 헌신하고 베풀며 희생하는 삶을 영위했다면 그 무엇이 두렵고 그 무엇이 어렵고 그 무엇이 힘들게 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공포와 두려움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해 왔는가에 따라 그 수위는 결정될 것이다. 남을 학대하고 거짓만 일삼으며 진실 된 말과 행동보다는 왜곡되고 이용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했다면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는 옛말처럼 하루하루가 밀려드는 두려움과 죄에 대한 무게만큼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모두가 다 그러하지는 않다. 사회건 국가건 그 기틀을 유지하고 올바른 길로 가는 힘은 정의와 신뢰에 대한 그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믿음이란 혹은 신념이란 확신이 밑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물리적인 거대한 힘이 그 모두를 삼켜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종종 있었지만 그 생명은 길지 못하고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지는 운명을 막지 못함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어리석음은 한번으로 족하지 자꾸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적은 이익에 연연하여 큰 것을 놓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길을 찰나의 오판으로 발걸음을 하여 평생을 두고 씻어내어도 못 씻는 후회스러움을 남겨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막상 자신의 코앞에 닥치면 어찌할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거나 눈이 멀어버려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불가항력적인 억압과 환경이 아님에도 무언가에 쫒기는 심정과 겁 많은 심장이 그를 이겨내지 못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시간을 두고 야금야금 피해를 주어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것이 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근본까지 피해를 입어 재기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회인데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보다는 서로 돕고 상생하는 길이 바람직하다고 모두 생각하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림돌이 늘 앞을 막는다. 그래도 가야하는 길이기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기에 건강하고 행복 넘치는 가정과 사회 나아가 국가가 존재하지요.
金城湯池(금성탕지)
- 방비가 견고하여 치기 어려운 城地(성지) -
진시황이 죽고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졌을 때의 일이다. 趙(조)나라의 옛 영지를 차지한 武信君(무신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본 논객 蒯通(괴통)이 범양의 현령 徐公(서공)에게 “공의 재임 십여 년 동안 백성의 원성이 높아 저들이 공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내 말대로 하면 피할 길이 있습니다. 내가 무신군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는 방책을 쓰심이 어떠한가 하고 말입니다.” 괴통은 무신군을 찾아가 뛰어난 언변으로 “만일 그대가 범양을 쳐서 항복한 현령을 소홀히 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귀를 바라는 현령들은 ‘일껏 항복하였더니 저런 행패를 당하니 항복하는 것이 해롭다.’하고 한층 더 군비를 충실히 하여 들끓는 湯(탕)이 그득히 담긴 못(池 : 지)에 둘러싸인 구리(銅 : 동)의 城(성)과 같은 철벽의 방어진을 치고 그대의 군사를 방비할 것입니다. 그러니 범양의 현령을 후하게 받아들이고, 각처에 사자를 보내십시오. 그러면 여러 나라의 현령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항복할 것입니다(曰 何以賀得子而生也? 曰 <趙武信君>不知<通>不肖, 使人候問其死生, <通>且見<武信君>而說之, 曰 必將戰勝而後略地, 攻得而後下城, 臣竊以爲殆矣. 用臣之計, 毋戰而略地, 不攻而下城, 傳檄而千里定, 可乎? 彼將曰 何謂也? 臣因對曰 <范陽>令宜整頓其士卒以守戰者也, 怯而畏死, 貪而好富貴, 故欲以其城先下君. 先下君而君不利[之], 則邊地之城皆將相告曰<范陽>令先降而身死, 必將嬰城固守, 皆爲金城湯池, 不可攻也. 爲君計者, 莫若以黃屋朱輪迎<范陽>令, 使馳騖於<燕趙>之郊, 則邊城皆將相告曰<范陽>令先下而身富貴, 必相率而降, 猶如阪上走丸也. 此臣所謂傳檄而千里定者也.<徐公>再拜, 具車馬遣<通>. : 왈 하이하득자이생야? 왈 <조무신군>부지<통>불초, 사인후문기사생, <통>차견<무신군>이설지, 왈 필장전승이후략지, 공득이후하성, 신절이위태의. 용신지계, 무전이략지, 불공이하성, 전격이천리정, 가호? 피장왈 하위야? 신인대왈<범양>영의정돈기사졸이수전자야, 겁이외사, 탐이호부귀, 고욕이기성선하군, 선하군이군불리[지], 즉변지지성개장상고왈<범양>영선항이신사, 필장영성고수, 개위금성탕지, 불가공야. 위군계자, 막약이황옥주륜영<범양>영, 사치무어<연조>지교, 즉변성개장상고왈<범양>영선하이신부귀, 필상솔이항, 유여판상주환야. 차신소위전격이천리정자야.<서공>재배, 구차마견<통>).”하고 말하자, 이 말을 좋게 여긴 무신군은 그대로 하였다. 과연 화북에서만도 30여 성이 항복하였다. 또한 범양의 백성도 전쟁의 화를 모면했으므로 서공의 덕을 높이 칭송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출전 漢書 : 한서)(출처 네이버 블로그 몽촌)
※ 蒯(황모 괴), 毋(말 무), 檄(격문 격), 怯(겁낼 겁), 輪(바퀴 윤), 騖(달릴 무), 阪(비탈 판).
『동부승지 이경동이 안주에 주진을 옮겨 설치하는 편의를 올렸는데, 이르기를, “…1. 안주성 서쪽은 곧 청천강인데 일명 살수입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군사가 여기서 패하였습니다. 이른바 수나라 병졸 1백 만이 화하여 고기가 되었다는 곳입니다. 물이 매우 빠르고 사나우며 산의 형세가 깎아 세운 듯 험하며, 성은 산의 형세를 따르고 물을 따라 뻗쳐 있으며, 백상루가 성 가운데에 있는데 높고 헌칠하여 물 서쪽 평원을 통하여 바라보며, 그 위아래가 40, 50리나 됩니다. 만일 대장으로 하여금 그 위에 자리잡고 살피게 한다면, 적의 형세가 모두 눈 안에 들어오니, 편의를 타서 기병을 내어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금성탕지이며, 목을 조르고 등을 치는 땅입니다.…” 하였다. ; 同副承旨李瓊仝 上安州移設主鎭便宜曰…一 安州城西 卽淸川江 一名薩水 隋煬征高麗時 兵敗於此 所謂隋兵百萬 化爲魚者也 水甚湍悍 山形斗絶 城因山勢 隨水延袤 百祥樓 在城中 高爽通望水西平原 上下可四五十里 若使大將 據按其上 則賊之形勢 盡在目中 可以乘便 出奇制敵 此誠金城湯池 扼吭拊背之地也… : 동부승지이경동 상안주이설주진편의왈 …일안주성서 즉청천강 일명살수 수양정고려시 병폐어차 소위양병백만 화위어자야 수심단한 산형두절 성인산세 수수연무 백상루 재성중 고협통망수서평원 상하가사오십리 약사대장 거안기상 즉적지형세 진재목중 가이승편 출기제적 차성금성탕지 액항부배지지야…』[성종실록 권제84, 28장 뒤쪽, 성종 8년 9월 28일(임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仝(한 가지 동), 煬(쬘 양), 薩(보살 살), 湍(여울 단), 悍(사나울 한), 袤(길이 무), 爽(시원할 상), 按(누를 안), 扼(움켜질 액), 吭(목구멍 항), 拊(어루만질 부).
정치유머감각
당의 이미지 쇄신에 골몰하고 있는 여당에서는 당직자들에게 웃는 얼굴-곧 정치스마일을 권장했다고 한다. 웃음은 대인관계의 윤활유로써 웃지 않는 것보다 낫지만 너무 헤프게 웃으면 오히려 비굴해 지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래서 예부터 스스로가 웃는 스마일 감각보다 남을 웃게 하는 유머감각이 정치가의 요령으로 손꼽혀 왔다.
정치적 긴장이나 갈등을 해소할 뿐 아니라 여유도 주고 또 사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흔히들 서양은 유머의 과밀지대요, 동양은 유머의 과소지대라고들 말한다. 사람을 잘 웃기거나 또 잘 웃으면 실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지금도 통하고 있는 우리나라이긴 하다.
하지만 옛 우리 뛰어났던 정치가들에게는 이 유머감각이 풍부했으며, 그 유머로 긴장과 갈등을 화해한 사례 또한 적지 않다. 정치유머가 뛰어난 분으로 세조를 들 수 있다. 具致寬(구치관)을 새 정승으로 발탁한 세조는 구 정승인 신숙주와의 사이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 신구 두 정승을 어전에 불렀다. 임금의 물음에 틀리게 대답하면 벌주를 내린다 하고 “신 정승!”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新(신)정승을 불렀지 申(신)정승을 부른 것이 아니라며 벌주-, 구 정승을 불러 구치관이 대답하면 舊(구)정승을 불렀다 하고 벌주를 내렸다. 다시 “신 정승!”하고 불러 新(신)정승인 구치관이 대답하면 申(신)정승을 불렀다고 하고 하면서 벌주…하는 식으로 취하도록 만들어 둘 사이를 자연스레 화해시키고 있다. 대단한 유머정치가 아닐 수 없다.
선조 때 정승 이항복의 정치유머도 알려져 있다. 동서당쟁으로 왜란을 야기 시켜 놓고도 피난 가서 까지 동서당인들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던 것 같다. 삿대질하며 언쟁이 격화돼 있는 조정에 이항복이 초연히 일어서 “참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싸움을 잘하는 동인들로 동해를 막게 하고 서인들로 서해를 막게 했다면 왜놈들이 어떻게 이 땅에 발을 붙였을 겁니까. 뒤늦게 이를 깨닫게 되니 원통합니다.” 대북, 소북으로 갈라져 공리공론으로 싸움만 벌리고 있던 조정에 이항복이 뒤늦게 나타났다. “대감은 웬일로 늦었소.”하고 묻자 “오던 길에 싸움구경 좀 하느라 늦었소.” “웬 싸움 이길래?” “삭발한 僧官(승관)과 腎囊(신낭)이 없는 환관이 싸우는데 승관은 환관의 신낭을 쥐고 환관은 승관의 머리를 쥐고 싸우고 있습데다.” 공리공론을 둔 소득 없는 당쟁을 이렇게 풍자하여 숙연케 했던 것이다. 구미의 정치가들은 유머감각 없이 뛰어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수술이 끝나자 제일성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저격당할 만큼 주목을 끌었으면 배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닌데!”했다 한다. 포드 대통령이 “나는 포드지, 링컨이 아닙니다.”했다던 연설도 대중에 어필했던 유머다. 고급차 링컨에 대중차 포드를 빗댄 것이다. 긴장과 갈등이 예상되는 개헌정국에 크게 기대되는 유머감각이 대체로 멋없는 정치인들에게 성숙되길 기대하는 유머감각인 것이다.(이규태 코너 1987년)
12-18. 大廈千間이라도 夜臥八尺이요 良田萬頃이라도 日食二升이니라
(대하천간 야와팔척 양전만경 일식이승)
큰 집이 천간(千間)이라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 뿐이요, 좋은 밭이 만경이 있더라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되뿐이다.
⋇ 大廈(대. 집, 처마 하) : 큰 집.
⋇ 千間(천간) : 집에 방이 천 칸.
⋇ 升(되 승) : 쌀 등을 재는 수량.
(해설)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부분이 크게 의식주로 요약되고, 그 외에 3대 본능을 제외하고는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는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본질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인간이 꿈꾸고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것 - 천국의 삶 또는 파라다이스란 이상향 -에 근접하고자 노력하지만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공허감 속에 그 부족한 2%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에는 보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고 만다. 삶의 질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최상과 최하의 격차는 늘 상 천당과 지옥이라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갖는다. 세속적 표현으로 당대에 있어 의식주에서 최고라 불리는 것으로 먹고 입고 치장하는 사람들을 최상층이라 부른다면 짐승이나 가축이 먹거나 자거나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소의 것으로 치장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최하층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 끼에 먹는 량은 사람의 체격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일정한 량을 초과하지는 못한다. 또한 아무리 넓고 초호화판으로 집을 건축해도 자고 생활하는 공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왕후장상에 巨富(거부)라 할지라도 이러한 원칙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하루를 24시간이라 정하고 그 정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25시간도 28시간의 효과를 얻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이 더 넓게 더 아름답게 등등을 추구한다. 그것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밑바탕이 되지만 반면에 여러 사람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중심이 되는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생각할 줄 알고 불의 사용과 도구를 만들고 말과 문자를 만들어 기록함으로 후대에 전함으로 퇴보되지 않고 계속적인 진보를 가져 왔다. 눈부시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살고 있는 지구라는 울타리가 좁아 광대한 우주로 시선을 돌리고 인간에 대한 탐구도 과학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는 단계까지 접근하여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조심스런 걱정을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요. 물질은 한정적인 관계로 계속 소모하면 바닥을 들어내지만 정신적인 요소는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정으로 뻗어나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산업화를 통해 이룩한 경제규모가 점차 확대되며 의식주에 대한 변화도 격상되고 있다. 食(식) 분야를 보아도 농경사회나 유목을 하던 시대에 비교하면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예술이라 할 정도로 미각뿐만 아니라 시각까지도 만족을 시켜야 하는 다양하고, 세계화되면서 동서양의 음식이 합해져 전혀 새로운 음식으로 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住(주) 분야도 도시 인구 집중에 따른 아파트의 건립과 다양한 건축 재료의 발달은 꿈에서나 그려왔던 건물들을 건립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衣(의) 분야는 천연재료에서 화학제품까지 시대별 유행에 따라 눈부시게 변화를 하였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 피폐해지는 정신적 공황을 메꾸어 나갈 수 없는 것인가? 이처럼 세상사는 많이 변화되었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한데 왜 그리 바쁘고 왜 그리 힘들고 왜 그리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으면 묻히는 땅의 면적은 같은데 부와 권력과 명예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차지하는 넓은 공간은 둘째 치고 주변을 장식하는 각종 장식물로 치장하지요. 매장문화로 인한 국토의 많은 면적이 분묘로 쓰여 토지활용도를 낮게 만든다고 합니다. 요즘은 화장하는 비율이 매장보다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조상에 대한 효도의 개념도 시대에 맞추어 변화되어 가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는 늘 변화와 진화를 가져오고 그것에 순응할 때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錦衣夜行(금의야행)
-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간다. ① 입신출세를 하여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 곧 남이 알아주지 않음 ② 속담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의 한역 -
劉邦(유방)과 다투던 項羽(항우)는 마침내 秦(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였다. 항우는 계획대로 목적이 성취되자 유방과는 달리 먼저 유방이 살려준 秦王(진왕) 子嬰(자영)을 죽여 버리고, 진나라의 궁전도 불태웠다. 항우는 사흘이나 타고 있는 불을 술안주로 삼아 미녀를 껴안고는 전쟁에 이긴 축하연을 베풀었다. 또 진시황의 묘를 파헤치고, 유방이 봉인해 둔 재보를 빼앗으며, 진나라의 미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문득 고향이 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 것 이었다. 전리품과 미녀를 거두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韓生(한생)이 “關中(관중)은 산하가 가로막혀 외부와 통하지 않고 지세가 견고한데다가 땅도 기름지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뿌리를 내려 제후를 호령하여야 합니다.”하고 간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폐허가 된 함양 땅은 마음에 없었으므로 고향에 어서 돌아가 위세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부귀의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누가 이것을 알아주겠는가?(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 : 부귀불귀고향 여의수야행 수지지자)”하고 읊었다. 항우는 한생의 諫言(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처사를 빈정거렸다는 말을 듣고 한생을 삶아 죽였다. 드디어 항우는 성공을 과시하려다가 유방에게 온 천하를 빼앗기고 말았다.(출전 漢書)
『시강관 조종경이 아뢰기를, “…한 고조가 관중에 들어가서는 그대로 머무르려는 뜻이 있자, 장량이 ‘이 모든 사치스러운 물건이 진나라가 망하게 된 근본입니다.’ 하니, 고조가 즉시 깨닫고 장량의 말을 따랐기 때문에 마침내 황제의 업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관중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는 한생의 말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성공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와 같다.’는 말을 하더니, 끝내는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하였다. ; 侍講官趙宗敬曰…漢高祖入關 有留居之意 張良曰 凡此奢侈之物 皆秦所以亡也 高祖卽悟 從之 故遂成帝業 項羽聞韓生都關中之言 而不省 發錦衣夜行之言 卒至於亡… : 시강관조종경왈…한고조입관 유유거지의 장량왈 범차사치지물 개진소이망야 고조즉오 종지 고축성제업 항우문한생도관중지언 이불성 발금의야행지언 졸지어망…』 [중종실록 권제68, 21장 앞쪽, 중종 25년 5월 11일(경자)](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銅鏡古談(동경고담)
옛 구리거울인 銅鏡(동경)은 얼굴을 들여다보는 쓸모보다 초자연적인 神通力(신통력)을 불러들이는 수단으로서 쓸모가 컸다. 불교 설화에서 지옥에 가 심판을 받을 때 염라대왕의 양쪽에 서있는 牛頭羅刹(우두나찰)과 馬頭羅刹(마두나찰)이 들고 있는 동경으로 비쳐보면 이승에서 저지른 善業(선업)과 惡業(악업)이 비디오처럼 스크린에 재현된다. 道敎(도교)의 설화를 엮은 “抱朴子(포박자)”에 보면 미녀로 둔갑한 여우를 동경으로 비치면 정체가 들어나는 대목이 비일비재하다. 폭군 秦始皇(진시황)은 咸陽宮(함양궁)에 네모난 동경을 놓아두고 궁인이나 궁녀 가운데 사심을 품은 자를 그로써 비쳐보고 본심을 안다하여 무척 많이 잡아 죽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후고구려의 궁예가 그의 처가 간통하는 것을 神鏡(신경)을 통해 보았다 하고, 국부에 린치를 가해 살해하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동경은 묘역의 네 구석에 놓여 있어 무덤에 침범할지 모르는 妖怪(요괴)를 그 동경의 신통력으로 보호하려 배치를 한데 예외가 없다.
당태종이 지은 “鏡誡(경계)”에 보면 “동경으로써 衣冠(의관)을 바로 하고 동경으로써 잘잘못을 알며 동경으로써 얻고 잃음을 밝힌다.” 했음을 미루어 거울은 정치를 밝히고 바로 잡으며 경계하는 정도의 심벌이기도 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王子(왕자)는 하늘에 계신 天帝(천제)의 대행자로서의 증명으로 이 神意(신의)가 담긴 동경을 지녀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漢(한)나라 때부터 새 왕조가 들어서려면 神鏡(신경)이 출현한다는 讖緯(참위)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천하를 통치한다는 것을 “거울을 쥔다.”고 표현했음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 讖(조짐, 비결 참), 緯(씨 위).
한말에 대원군이 왕정복고를 할 때 옥거울의 출현을 조작한 것도 바로 거울의 출현이 정권을 神意(신의)로 보장 받는 것이 되기 때문 이었다. 일본의 始祖神(시조신)인 아마데라스(天照大神 : 천조대신)의 神體(신체)도 야다노가가미(八咫鏡 : 팔지경)라는 거울이며 이를 神宮(신궁)에 모심으로써 일본 왕통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3세기 일본에는 30개 소국가로 이루어진 邪馬台國(사마태국)이 있었는데 魏(위)나라 임금이 이 사마태국 왕인 히미코(卑彌呼 : 비미호)에게 동경을 내려 왕조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국보가 돼 있는 고대의 한 銅鏡(동경)이 백제 武寧王(무령왕)이 내린 거울로 銘文(명문)상 고증이 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백제가 왕조를 인정하는 일본의 한 역사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명문의 해석은 달리 될 수도 있다. 다만, 고대사회에서 거울을 내린다는 정치적 이유만은 대단했던 것이다.(이규태 코너 1991년)
12-19. 久住令人賤이요 頻來親也疎라 但看三五日에 相見不如初라
(구주영인천 빈래친야소 단간삼오일 상견불여초)
오래 머물러 있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게 여기게 되고. 자주 오면 친하던 것도 소원해 지느니라. 오직 사흘이나 닷새 만에 보는데도, 서로 보는 것이 처음과 같지 않느니라.
⋇ 久住(구주) : 오래 머물다.
⋇ 不如初(불여초) : 처음과 같지 않음.
(해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였던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흐느적거리듯 그렇게 시시각각 변한다. “사흘 손님 없다.”고 했으며, 백년손님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사위도 그러할진대 타인이야 오죽 하겠는가? 아무런 대가없이 오래도록 환대하고 변함없이 대우해 준다는 것이 정말로 쉽지만은 아니한 것은 사실이다. 늘 변화를 갈망하고 정지되어 있기 보다는 물 흐르듯이 순리대로 흘러감을 원하기에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면 금방 싫증을 내고 짜증이 나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리다. 그러할진대 아무런 준비도 없고, 마음에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면 과연 그것을 감내하고 속으로 삭히는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가장 친하며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함께하며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믿음을 놓지 아니하는 어떻게 보면 자기 혈족보다 더 신뢰를 하고 끝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하는 즉, 친구를 대신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친구 2명만이라도 사귈 수 있다면 진정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자평해도 좋다고 말을 합니다. 요즘처럼 변화무쌍하고 자기만을 소중하게 여기며 조그마한 이익에도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살벌한 인심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웬 고리타분한 넋두리인가 하고 반문 할지는 몰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이상형이라고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우리의 속담 중에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란 말로 자기 외의 사람과의 유대관계를 중요시 여기며 늘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희석되고 퇴색되어지며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 되어야 속이 풀리는 놀부 심보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대가족 제도가 대세이었던 시대에는 나그네를 위한 배려가 넘쳐 나서 자기의 집을 방문하면 문전 박대가 아닌 가족 혹은 친척이 찾아온 것처럼 융숭한 대접과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그네를 위해 밥을 지을 때 여분으로 더 지어 밥 한 사발을 남겨 놓는가 하면,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면 거처까지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화의 바람은 도시로 인구의 집중과 빌딩의 건설로 이웃과의 단절과 핵가족화로 인한 타인의 배려가 실종되고 말았다. 뒷밭에 가꾼 푸성귀나 양념들을 나누어 먹던 소박한 인심이 사라지고 조금만 피해를 입으면 때는 이때다 하고 왕창 바가지를 씌어서 몇 배로 보상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험악한 시대로 돌변하고 말았다.
남에 대한 배려와 함께 하는 작은 일들이 자취를 감춘 자리를 밀고 들어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 바로 대립과 사소한 일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갈등이란 서로에 대한 불신이다. 이처럼 각박한 생활을 영위하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반갑기는 고사하고 귀찮고 짐만 될 뿐이니 어디 사흘까지 가겠는가? 하루라도 비록 지어낸 웃음일지언정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해 준다면 고맙게 여겨야 하겠지요. 그래도 생각할 줄 아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인데 더 나빠질리는 없겠지요. 유행에서도 보면 새로운 패션이 주류를 이루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다시 옛 스타일을 향수하는 복고풍이 유행을 타는 현상처럼 회귀본능에 따른 복고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원입니다.
頻(자주 빈)은 물가 빈(瀕)에서 물 수(氵)를 생략. 눈살을 찌푸리면 미간의 간격이 좁아지므로 자주의 뜻. 瀕은 涉(건널 섭)과 頁(머리 혈)의 합자. 물을 건너는(涉) 첫머리(頁)는 물가, 물가는 물이 인접한 곳으로 나그네(頁)가 건너기(涉) 앞서 걱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곳.
騎虎之勢(기호지세)
- 범을 타고 달리는 형세라는 뜻으로, 일을 계획하고 시작한 다음에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을 비유해 이르는 말. -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마지막 왕국인 北周(북주)의 宣帝(선제)가 죽자, 楊堅(양견)이 뒷수습을 하려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본시 漢人(한인)으로 외척이면서 유능한 사람이어서 국사를 총괄하였지만, 전부터 한인의 천하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 하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이 때, 남편이 大望(대망)을 품고 궁중에 들어가 일을 꾀하고 있는 사실을 안 그의 아내 獨孤(독고)는, 사람을 시켜 남편에게 “대사가 이미 벌어졌는데 이는 마치 날랜 범에 올라탄 형세와 같습니다. 이제 중도에서 내릴 수 없으며, 만일 중도에서 내린다면 잡아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힘쓰십시오.(大事已然 騎虎之勢 不得下 勉之 : 대사이연 기호지세 부득하 면지)”하고 말을 전하였다. 양견은 즉위한 선제의 아들을 禪位(선위)시키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곧 隋(수)나라다. 그는 8년 후 南朝(남조)인 陳(진)나라를 쳐서 천하를 통일한 후 수나라의 文帝(문제)가 되었다.(출전 隋書)
『대사헌 김극성 등이 상소를 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육진의 군사들이 날마다 도망을 가는데, 오랑캐로서 성을 둘러싸고 사는 자들이 1천 명, 1백 명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알만한 자들은 이를 기호지세에 비유합니다. 여연과 무창에 들어와서 사는 오랑캐들은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니, 서계에도 또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한심합니다.…” 하였다. ; 大司憲金克成等上疏 其略曰…況今六鎭軍卒 日就流亡 野人環城而居者千百爲群 有識者 比之騎虎之勢 閭延茂昌 來居野人 巢穴滋蔓 西界亦不可保其無虞 思之至此 可謂寒心… : 대사헌김극성등상소 기략왈…황금육진군졸 일취유망 야인환성이거자천백위군 유식자 비지기호지세 여연무창 내거야인 소혈자만서계역불가보기무우 사지지차 가위한심…』[중종실록 권제45, 41장 앞쪽~뒤쪽, 중종 17년 7월 18일(임술)](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滋(부를 자), 蔓(덩굴 만), 虞(염려할 우).
촌 노인
중공을 다녀온 기자들의 보도에 의하면 마을마다 村民小組(촌민소조)라는 게 있어 마을에서 일어나는 부부간, 고부간, 이웃 간의 싸움을 경찰관서나 재판소에 가기 이전에 자체에서 해결하고 있다 했다. 나이 많고 덕망 높은 마을노인 두 사람으로 이룩되는 이 촌민소조는 공산주의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가 불가피했던 수천 년 이래의 향촌제도라는 점에서 주의를 끌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부부싸움이나 고부싸움은 가급적 문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끔 문을 걸어 잠그고 싸운다. 싸우고 있는데 손님이 오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싸움을 멈추고 여느 때처럼 손님을 응대하고 나서 손님이 가고나면 다시 걸어 잠그고 싸움을 속개하는 그런 은폐형 싸움이다. 한데 중국에서는 예부터 街罵(가매)라 하여 부부나 고부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거리로 뛰쳐 나아가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서로가 상대방의 부당성을 역설-동네싸움으로 확대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부터 집안싸움은 동네 원로들에 의한 재판으로 판결하지 않을 수 없게 돼있었다. ※ 罵(욕할 매).
이 덕망 높은 원로를 里老人(이노인)이라 불렀다. 명나라 홍무 31년(1398년)에 선포된 敎民榜文(교민방문)에 보면 이 노인에게는 마을 안의 숙정을 다스리기 위해 재판권이 주어져 있는데 ➀ 가정싸움 ➁ 전답싸움 ➂ 실화 ➃ 좀도둑 ➄ 빚 ➅ 노름 ➆ 도살 ➇ 미신 ➈ 불윤부덕 ➉ 효순 부모. 교훈자손. 존경장상. 화목향리를 해치는 일, 그리고 게으르거나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도 제재를 가할 수가 있었다.
十惡(십악)과 살인강도 같은 중죄만이 관헌이 다룰 뿐 웬만한 형사, 민사, 倫常(윤상)사건은 이 노인이 다스렸던 것이다. 대체로 민사는 화해시키는 것이 원칙이고, 형사나 윤상은 笞(태 )나 마을 복판에 세워두어 치욕을 주는 것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이 촌 노인의 관습은 座首(좌수) 또는 面任(면임). 風憲(풍헌)이라 하여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비록 한 작은 마을의 좌수일지라도 덕망이 꽤 높은 사람이 아니고는 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안동고을에는 정승을 지내고 물러난 사람이 아니고는 좌수가 될 수 없었으며 金誠一(김성일)이도 말년에 좌수노릇을 하고 있다. 영조 때 실학자 安鼎福(안정복)이 만들었다던 경기도 광주 경안면 이리동의 향약에 보면 삼노영감이라 하여 덕망 높은 좌수 세 사람이 재판관으로, 그리고 이장들이 배심관으로 마을의 彰善(창선)과 糾惡(규악)을 다스리고 있다. ※ 糾(꼴 규).
따지고 보면 미국 마을들에서 부정기적으로 벌이게 마련인 平和裁判(평화재판)도 촌 노인이나 三老(삼노)영감과 같은 제도랄 수 있다. 대학교수나 퇴임고관 등 덕망 높은 사람이 재판장이 되어 웬만한 마을의 분규는 이분이 조정하고 작은 형사사건도 이분이 벌금처벌을 한다. 따지고 보면 촌 노인은 지방자치의 가장 기본단위인 촌락자치제도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엄연히 있어 내려 온 전통이고 하니 이 목가적인 동네재판이 부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년퇴임한 분들의 일자리도 주고 덕망자원도 활용하게 말이다.
(이규태 코너 1987년)
貧女吟(빈녀음) - 許蘭雪軒(허난설헌) -
豈是乏容色(개시핍용색) 예쁜 모습 고운 자태 뉘에게 빠지리.
工針復工織(공침복공직) 바느질 잘하는데 짜기도 잘해
少小場寒門(소소장한문) 가난한 집 태어나 자라났기로
良媒不相識(양매불상식) 중신하는 늙은 할미 아직 모르오.
12-20. 渴時一滴은 如甘露요 醉後添盃는 不如無니라
(갈시일적 여감로 취후첨배 불여무)
목이 마를 때에 한 방울의 물은 감로와 같고, 술 취한 뒤에 잔을 더 하는 것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 甘露(감로) : 단 이슬. 불교에서는 불사(不死) 또는 천주(天酒)라고도 하며, 한번 맛보면 불로장생한다고 함.
(해설)
가야하는 길과 걸어가서는 안 되는 길이 분명이 존재한다. 좁은 문일수록 그를 통과하기가 어렵지만 통과한 후에 기대되는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달콤하고 화려하게 유혹하는 넓은 문은 들어가기는 쉬워도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작은 욕망과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은 잠시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기 쉬운 넓은 문을 택한다. 선택은 자신이 하고 그 뒤에 닥치는 고난과 역경에 대한 나약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을 한다. 甘呑苦吐(감탄고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행태임을 고려하면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상황 상황마다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일비일희를 하는 마당에 그 앞에 벌어질 일을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젊어서는 혈기에 이끌려 날뛰고, 나이를 먹으면 욕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하는 것이 통상의 일이거늘 누구를 탓할 것인가. 때론 그것조차도 무시하고 막무가내 식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 빠져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겠지만 가정 형편상 태어나면서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최하층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늘 꿈꾸리라 그곳에서 탈출하여 보라는 듯이 살아가고픈 희망을 그 희망이 바로 감로와 같은 이상향으로 끝날지 모르더러도 그 순간만큼은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행복할 것이다.
고진감래란 말이 있고,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면 결국에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결과를 선물 받게 된다. 그러나 성공의 마지막 관문, 산언덕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끊임없이 되풀이 되며,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운 암흑 같은 절망은 계속되는 악재와 정신적 압박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의지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과 바다 같은 무게를 어떻게 이겨내는가?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보여야 힘을 낼 터인데 한 줄기의 빛조차 보이지를 않는 막막하고 두려운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그 동안의 노력과 흘린 땀방울이 아쉽고, 허무하게 마무리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심정의 끝자락에 도달하였을 때야만 비로소 치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위기는 곧 기회라 하지 않는가?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 또한 숱한 난관과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기대하기 어렵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경험은 그러한 연속된 실패란 좌절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못하는 바탕이 된다. 온 몸의 힘이 다 소진하여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에 왔다고 해도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다 모아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을 수 있다면 그렇게도 열망하고 갈망했던 성공은 바로 눈앞에서 활짝 웃고 있을 것이다.
지독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한 방울의 물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도 바로 감로수가 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최상의 생명수가 된다. 평소에는 하찮게 여겼던 존재들이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느끼듯이 평탄하고 굴곡 없는 일상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절망과 고난에 빠졌을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반면에 달콤한 말과 현혹시키는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술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음주운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가 보다. 영국의 속담을 상기하면서 석 잔의 술 이상을 마시지 않고, 영양과 기분을 좋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음주문화가 정착되기를.
자원입니다.
露(이슬 로)는 공중의 수증기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지표면(路)에 맺혀 들어난 물방울(雨)인 이슬
醉(취할 취)는 갑자기(卒) 술(酉)기운이 엄습함. 卒은 가죽조각을 모아(十) 기운 갑옷(衣)
添(더할 첨)은 忝(더럽힐 첨)은 天心의 합자. 타고난(天) 마음(㣺) 즉 진심. 감사하다는 말이 물(氵)에 물 타듯이 의미 없이 자꾸 덧붙이는 것.
奇貨可居(기화가거)
- 진기한 물건을 사서 두면 장차 큰 이득을 보고 팔 수 있다는 뜻으로, 좋은 기회를 이용하기에 알맞다는 말임. -
중국의 전국시대 말엽, 趙(조)나라의 수도 邯鄲(한단)은 문화의 중심지로 상업이 번창하였다. 韓(한)나라의 呂不韋(여불위)도 큰 장사꾼으로 이곳을 드나들다가 우연히 진나라의 태자 安國君(안국군)의 서자 子楚(자초)가 볼모로 잡혀 와 한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불위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기화가거라, 그를 붙잡으면 크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여불위는 즉시 자초를 찾아가 귀공의 가문을 크게 일으켜 주겠다면서 “소양왕께서 이미 연로하시니 머지않아 아버님이신 안국군께서 진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비(正妃)에게는 아드님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20여 명이나 되는 서자들 가운데서 그 누구를 태자로 책봉하겠습니까? 귀공은 유리한 형편은 아닙니다.”하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자초의 말에 여불위는 “소인에게는 재물이 있습니다. 진나라로 가서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드리거나 인재를 모우기에 필요한 자금을 대겠습니다. 그리고 귀공을 태자로 책봉하도록 힘쓰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여불위의 계획은 마침내 이루어져 자초가 태자로 책봉되자, 자기의 아이를 밴 趙姬(조희)를 자초에게 바쳤는데, 거기에서 난 아들 政(정)이 바로 秦(진)의 始皇帝(시황제)다.(출전 史記 呂不韋傳)
(呂不韋者 陽翟大賈人也. 往來販踐賣貴 家累千金. 秦昭王四十年 太子死. 其四十二年 以其次子安國君爲太子. 安國君有子二十餘人. 安國君有所甚愛姬 立以爲正夫人 號曰華陽夫人. 華陽夫人無子. 安國君中男名子楚. 子楚母曰夏姬 毋愛. 子楚爲秦質子於趙. 秦數攻趙 趙不甚禮子楚. 子楚秦諸庶孼孫質於諸侯. 車乘進用不饒 居處困 不得意. 呂不韋賈邯鄲 見而憐之曰 此奇貨可居. : 여불위자 양적대가인야 왕래판천매귀 가누천금. 진소왕사십년 태자사. 기사십이년 이기차자안국군위태자. 안국군유자이십여인. 안국군유소심애희 입이위정부인. 호왈화양부인. 화양부인무자. 안국군중남명자초. 자초모왈하희 무애. 자초위진질자어조. 진수공조 조불심예자초. 자초진제서얼손질어제후. 거승진용불요 거처곤 부득의. 여불위가한단 견이련지왈 차기화가거.)(출처 네이버 블로그 돼지발톱) ※ 翟(꿩 적), 孼(서자 얼), 饒(넉넉할 요).
『명하여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경신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가 곧 명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 징의 아내 신씨가 기화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 命封張氏爲淑媛…被抄於內人 入宮中 頗有容色 庚申仁敬王后昇遐之後 是得承恩 明聖王后 卽命黜送其家 崇善君澂妻申氏 視爲奇貨 頻頻邀致其家 畜養之 : 명봉장씨위숙원…피초어내인 입궁중파유용색 경신인경왕후승하지후 시득승은 명성왕후 즉명출송기가 숭선군징처신씨 시위기화 빈빈요치기가 축양지』 [숙종실록 권제17, 57장 앞쪽~뒤쪽, 숙종 12년 12월 10일(경신)](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媛(미인 원), 頗(자못 파, 치우칠 파), 遐(멀 하), 黜(내칠 출), 澂(맑을 징. 본 자는 澄), 頻(자주 빈), 邀(맞을 요).
三十三考(삼십삼고)
3.1운동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입수된 소위 불온문서 가운데 “창가집”이라는 게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불렀다던 “영웅의 모범”이란 노래는 이러하다. “닭이 되고 개가 될지언정/왜신이야 될 수 없고/ 一死(일사)를 결심한 박재상의 충성은/ 우리들의 모범일세/ 왜 임금을 家僕(가복)삼고/ 왜 왕비를 下婢(하비)삼아/ 두고두고 부리겠다 서약한/ 昔干老(석간로)의 壯心(장심)은/ 우리들의 모범일세.” 이렇게 趙重峯(조중봉), 이순신, 곽재우, 최익현, 안중근 차례로 항일 영웅들의 모범을 들고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맺고 있다. “일어나라 3월3일/ 우리 임금 국장 날에/ 33 관음보살 삼천리에 응화하시니/ 독립만세 불러서/ 모범된 영웅이 되어라.” 이 끝 절에서 보듯이 3.1운동과 “33”이라는 숫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33”이 갖는 숨은 뜻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완연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친 불교의 숫자로서 “108”을 들 수 있다. 염주도 108개요, 염불도 108번 하고, 절간에서 치는 제야의 종도 108번 친다. 사람에게는 108가지 번뇌가 있어 이를 하나씩 해소시키는 수행의 종결수인 것이다.
그러하듯이 “33”도 불교에 뿌리를 둔 숫자이다. 이 세상에서 白衣(백의)관음, 水月(수월)관음, 藥王(약왕)관음 등 자비스러운 33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천상천하 지상지하 모든 사람으로 응화, 화신을 한다. 곧 하늘에 계시는 부처님이며 제석님으로부터 땅 위에 사는 장자며 벼슬아치며 비구며 동남동녀며 지옥에 사는 아수라며 귀신에 이르기까지 화신하여 나타나는 게 관음이다. 이렇게 33 관음은 도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화신한다 하여 “33”은 그 모든 곳에 있는 그 모든 사람을 뜻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균관 서생들이 대궐 앞에 가 상소할 때도 33명을 뽑아 보냄으로써 전체 의사임을 표방하였다. 萬人傘(만인산)이라 하여 육조거리에서 지방수령들의 頌德示威(송덕시위)를 할 때에도 33명을 뽑아 올림으로써 그 지방 백성의 총체적 의사임을 과시하였다. 혹정에 저항하여 민란을 일으킬 때도 사발에다 33명의 이름을 적어 通文(통문)으로 돌렸다.
단체나 회사를 발기할 때도 그 발기인 수를 33명으로 하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굳이 33명으로 한 것도 바로 독립의지가 전 국민의 의지임을 표방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3.1운동을 모의할 때 3월3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는데 이날을 선택하려는 저의도 매한가지다. 역사상의 “33”의 상징적 의미가 3.1운동에서처럼 구현된 적이 없었음을 새삼 기억해 두기로 하자.(이규태 코너 1989년)
12-21. 酒不醉人人自醉요 色不迷人人自迷니라
(주불취인인자취 색불미인인자미)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색(色)이 사람을 미혹(迷惑)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미혹하는 것이니라.
(해설)
흔히 이야기하길 “이 세상의 일 사람이 만드는 이상,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은 없다.”고 장담하며 모든 일의 성패는 어떻게 결심하고 행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은 일이라도 그 성공여부는 하늘에 달려있다며 겸손함을 보인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 하지만 그 뒤 담화는 야사로, 오히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왜 일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으면 로마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란 말처럼 만약에 란 단서를 붙이는 재미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이 흥미를 더해 주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술에 취하면 十人十色(십인십색)처럼 다양한 형태의 원초적인 모습이 연출된다. 평소에는 과묵하고 좀처럼 말을 하지 않던 사람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다거나,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여 듣는 이의 진을 다 빼버리는가 하면, 옷을 벗어 던지거나,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큰소리로 외쳐대는 형과 계속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형에 남에게 시비를 걸어 쓸데없는 다툼을 유발시키는 형, 딸꾹질을 하면서도 계속 술 가져오라 큰소리치는 형, 몇 잔에 취해 그 자리에 쓸어져 쿨쿨 잠드는 형, 마시면 금방 신호가 온다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형, 먹은 것을 원상복귀(토하는) 시키면서도 계속 마시는 형, 술보다 안주에 더 집착하는 형, 큰소리 뻥뻥 대는 형 등등 각양각색의 사연을 만들어 낸다.
술만 먹으면 주정을 하는 사람들은 그도 버릇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술은 웃어른한테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처음 술을 배울 때 어떻게 마무리를 하였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무리 술에 취하였더라도 정신을 놓지 않는 한은 실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름이 끊긴다는 상태가 되면 그도 소용없는 일이다.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 것, 그 한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슬퍼서 마시고, 기뻐서 마시고, 외로워서 마시고, 모든 이유와 핑계를 기회로 마시다 보면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다. 적당히 마시면 약주라 부르는 술, 늘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마음 다스리기도 공부다. 평생을 두고 하여도 못다 하는 공부처럼 마음 다스리기도 또한 같다. 잠시만 한 눈을 팔면 180도 다른 얼굴로 돌변하는 변화무쌍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자신의 마음조차 조절할 줄 모른다면 늘 패배자로 남아 있으리라. 그래서 克己(극기)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성공하는 사람이 된다고 단언하지 않는가? 술에 취하건 색에 취하건 물욕에 취하건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패장의 모습임은 틀림이 없다. 패배자가 되지 말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잠시라도 소홀하지 말고 평정과 긴장을 늦추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多岐亡羊(다기망양)
- 여러 갈래 길에서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➀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를 찾기 어려움. ➁ 방침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동류로 亡羊之歎(망양지탄) -
춘추전국시대의 학자인 楊子(양자)의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잃었다.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다 동원하고 양자네 집 사람들까지 청하여 찾아 나섰다. 그때 양자가,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왜 여러 사람이 나서는가?”하고 묻자, “양이 도망친 쪽으로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후 사람들이 양을 못 찾고 돌아왔다. 양자가 왜 양을 못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갈림길이 있어 들어갔더니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고 하였다(楊子之隣人亡羊 旣率其黨 又請楊子之豎追之 楊子曰 嘻亡一羊 何追者衆 隣人曰 多岐路 旣反 問 獲羊乎 曰 亡之矣 曰 爰亡之 曰 岐路之中又有岐焉 吾不知所之 所以反也 楊子戚然變容 不言者移時 不笑者竟日 : 양자지인인망양 기솔기당 우청양자지수추지 양자왈 희망일양 하추자중 인인왈 다기로 기반 문 획양호 왈 망지의 왈 원망지 왈 기로지중우유기언 오불지소지 소이반야 양자척연변용 불언자이시 불소자경왈). 그 말을 듣고 우울해 하는 양자에게 제자가 까닭을 묻자 한참 만에 그는 “목적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인데, 여러 갈래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결국 그것을 잃고 말았다. 학문의 길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진리의 핵심을 놓친 탐구방법은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다.(心都子曰 大道以多岐亡羊 學者以多方喪生 學非本不同非本不一而未異若是 唯歸同反一. 爲亡得喪 子長先生之門習先生之道而不達先生之況世 哀哉 : 심도자왈 대도이다기망양 학자이다방상생 학비본부동비본불일이미이약시 유귀동반일. 위망득상 자장선생지문습선생지도이불달선생지황세 애재)”하고 말했다고 함.(출전 列子 說符篇)
(출처 네이버 블로그 돼지발톱)
※ 豎(더벅머리 수), 嘻(웃을 희), 爰(이에 원), 戚(겨레 척).
불쌍한 40대
우리나라의 40대 사망률이 가장 높다는 질병사망통계가 나왔다(1988년).
40대가 태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패망기에서 해방 직후로 먹을 것이 없어 얼굴이 누렇게 뜨는 부황시대였다. 곧 태중에서부터 영양실조로 태어나 겨우 뼈가 굵기 시작하는 열 살 안팎에 다시 6.25전쟁을 겪어 골격의 골분도 제대로 얻지 못한 세대다.
겨우 빈곤을 면하게 되자, 이제 사회의 중년이 되어 밤낮 쉴 틈 없이 허겁지겁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는 세대의 고리에 얽매이게 되어 최고의 사망률을 기록하는 세대가 되고 있으니 40대는 불쌍하다.
좁은 국토에 인구밀도는 세계제일이라는 조금만 경쟁에 뒤지면 남만큼 살지 못하는데다가 어릴적 부터 골수에 사무친 헝그리정신이 상승하여 심신의 중압이 병의 온상이 됨직하다.
생명의 흐름대로 흐르게 두면 지치지도 앓지도 또 눈물도 흘리는 법이 없다는 노자의 생명철학을 현대의학에 도입한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하커 박사다. 인체 안에는 생물로써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리듬 - 곧 바이오리듬만 타면 병도 줄고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밤에만 나다니는 야행성 해충 바퀴벌레에 밤낮을 전도시켜 사육을 했다. 정반대의 주야리듬이 체내에 공존하는 난조가 원인되어 바퀴벌레의 창자 속에 100% 암이 발생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문명 속의 부자연스런 생활이 신경과 호르몬의 체내 조절력의 리듬을 흩어버려 암 발생을 재촉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노자철학과 부합되는 결론인 것이다.
비단 암뿐만이 아니다. 바젤에서 열린 제4회 국제 바이오리듬학회에서 서독의 피에라흐 교수는 많은 사례를 든 다음 “인체의 모든 기관은 나름대로 리듬을 갖고 있으며 이 리듬이 흩어졌을 때 병을 야기 시키지 않는 기관은 없음이 확인됐다.”했다.
사람에게는 신체의 생리기능이 부침하는 23일 주기의 생리파가 있고, 감정이 부침하는 28일 주기의 감정파, 그리고 지성이 부침하는 33일 주기의 지성파가 있다고 확인한 것은 정신분석의 대가 프로이트다. 복잡한 현대의 경쟁사회는 이 주파의 리듬을 혼동시키고 그 어긋난 주파의 상층에서도 병이 발생한다고 했다.
한국의 40대는 그다지 길지 않은 살아오면서 다른 세대보다 이 바이오리듬을 종횡으로 엇갈려 살지 않을 수 없었던 불쌍한 세대임이 입증된 것이다.(이규태 코너 1988년)
출처-
http://cafe.daum.net/sungho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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