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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스님은 증오(證悟)를 부정했던가 ? (3)
김호성 교수의 이른바 ‘돈오의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글/ 박성배(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대학 비교학과 종교학 교수)
‘간화결의론’을 보면 보조스님이 수행자의 경지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교가의 원 돈신해사상이 제 아무리 현묘하고 수숭하다 하더라도 공부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선가의 간화경절문에 비하 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가의 길이 수도자의 해애를 제거해주지 못하 기 때문이라고 한다.
故論云: “先以聞解信入, 後以無思契同.” 禪門徑截得入者, 初無法義聞解當情, 直以無滋味話頭, 但提撕擧覺而已. 故無語路義路, 心識思惟之處, 亦無見聞解行生等時分前後. 忽然話頭噴地一發, 則如前所論一心法界, 洞然圓明. 故與圓敎觀行者, 比於禪門一發者, 敎內敎外, 逈然不同. 故時分遲速, 亦不同, 居然可知矣. 故云: “敎外別傳, 逈出敎乘.” 非淺識者, 所能堪任 (보조전서 ,P.100)
그러므로 화엄론에서는 먼저 (스승의) 법문을 듣고 이해함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에 들어감으로써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선문에서 똑바로 꺾어들어온 사람은 애당초부터 듣고 알고 느끼고 할 法이니 義니 하는 것이 아에 없으므로 곧장 아무런 맛이 없는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그저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공부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교가에서 와는 달리) 맡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심식이 사유할 곳조차 없으며 또한 보고 듣고 알고 행동하고 할 때의 시간적인 전후가 없으므로 홀연히 화두가 한번 크게 터지면 앞에서 교가의 이튼으로 밝힌 바와 같은 일심의 법계가 하나도 걸림없이 완전하게 밝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을 앞세우는) 원교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사람들과 (지금 말하는) 선문으로 한번 크게 터진 사람들을 비교하면 양자(즉 교리 안에서 공부하는 敎家와 교리 밖에서 공부하는 禪家는 너무나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에게는 공부를 성취하는 시간에 있어서도 하나는 더디고 하나는 따르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言敎 밖에 따로 전해내려온 선종이 교종보다 월동하게 훌륭하다는 것을 천박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바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의역)
<원돈성불론》이 이통현의 신해사상을 중심으로 해오사상을 고취하여 선과 교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데에 주력한 책이라면, <간화결의론> 은 대혜(大慧)선사의 간화 선사상을 중심으로 증오사상을 고취하여 선과 교의 차이점을 분명히 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조 스님은 교도 버리지 않았고 선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해오도 버리지 않았고 중오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선과 교를 흔동하지 않았고 해오와 증오를 혼동하지 않았다. 선과 교 또는 해오와 증오의 역할 분담과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분명히 하였다. 보조 스님은 참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같은 선문 안에서도 아직도 교가적인 냄새를 풍기는 參意門과 이를 깨끗이 벗어난 參句門을 구별하였다. 參意란 숨은 뜻을 캐낸다는 말이요, 參句란 알 수 없는 한마디의 화두에 몸으로 부딪친다는 말이다. ‘참의’와 ‘참구’는 또다시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한다. '참의'는 그것이 아무리 현묘하고 수승하다 할지라도 원돈신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므로 정말 경절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길은 '참구'의 길 하나 뿐이라고 한다.
然 禪門此等如實言句 若比教門 雖是省略 若比徑截門話頭 則以有佛法知解故 未脫十種病. 所以云 夫參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보조전서, P. 102)
그러나 禪門에서 말하는 이러한 참다운 말씀들은 만약 敎文에서 말하는 그 비슷한 글 귀들에 비교하면 비록 훨씬 더 간결하고 야무진 바가 없지 않지만, 만약 이를 같은 선문안의 경절문에 속하는 화두참선하는 법에 비교하면 여기에도 여전히 불법을 지혜로 처리하는 병이 남아 있기 때문에 참선 공부를 할 때 생기는 열 가지 병통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활구에서 깨치면 영원토록 다시 어두워지는 법이 없지만 사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 하는 법이다. (필자의 의역)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마당에서 참의와 참구를 구별 할 줄 알고 사구와 활그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참선의 정사(正邪)와 사활이 여기에 걸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조스님의 〈간화결의론>은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써 그 정점을 삼고 있다. 보조스님의 증오사상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살펴 본 바와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자기 꾀에 속지말고 자기의 경지가 지금 어디에 속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날카로운 반성을 하면서 공부의 정사와 사활을 똑바로 알 때에 비로소 심각하게 문제되기 시작한다. <간화결의론>의 마지막 문장은 김호성 교수의 ‘해오절대 증오무용론 解悟絶對 證悟無用論’ 과는 반대로 보조스님의 철저하고도 간절한 증오사상의 천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此證智現前者,今時罕見罕聞。故今時但貴依話頭參意根,發明正知見耳。以此人見處,比於依教觀行、未離情識者,天地懸隔故也。伏望 觀行出世之人,參詳禪門活句,速證菩提,幸甚!(보조전서), p.102
이렇게 (참구문으로 의단이 크게 터져) 證智가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을 요즈음엔 정말 보기 드물고 소문조차 듣기 어렵다. 따라서 요즈음엔 화두를 參意하는 문에 의지하여 올바른 지견을 발명하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證智가 현전한 사람이 도달한 경지는 敎家의 기분에 의지하여 공부하여 아직 자기의 감정이나 지식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경지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발 엎드려 바라옵나니 도를 닦기 위해 세상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선문의 활구를 참구하여 속히 보리를 중득하도록 해주소서.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다행스러올지 모르겠다. (필자의 의역)
위의 인용문을 번역함에 있어서 ‘此人'이 누구를 가리키느냐가 문제될 수 있다. 두 가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맨 앞의 ‘此證智現前者’ 로 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앞의 ‘發明正知見' 한 사람들로 보는 길이다. 필자는 전자를 택하였다. 여기에 인용된 몇 줄의 글만 보면 제2안이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간화결의론> 전체의 사상과 결론 부분 전체의 문맥으로 보면 제 1안 대로 읽어야 보조스님의 본의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탄허스님의 번역도 김 달진선생의 번역도 어느 쪽인지 분명치 않았다.주1 아무튼 보조스님은 <간화결의론〉에서 간화경절문 특히 활구참선법을 십분 강조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책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證이라는 글자가 이를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증오사상과 활구참선하는 간화경절 사상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주1아래에 이대목에 대한 탄허스님의 번역과 김달진선생의 번역을 서로 비교해보자.
김탄허스님: 이 사람의 見處로써 敎를 의지해 관행하여 情識을 여의지 못한 자에게 比하면 天地가 懸隔한 緣故니•·•••(김탄허 술, <보조 국사법어> (서울 : 법보원, 1963), p. 138).
김달진선생 : 그런 사람이 본 바와 같이 敎門에 의해 觀行하여 알음알이를 떠나지 못한 이에게 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김 달진 역주, <보조국사전서> (고려원, 1987, P. 209)
구산스님의 상좌였으며 현재 UCLA의 불교학교수인 로버트 부스웰온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If such a person's understanding is compared with that of one who meditates while relying on the teachings but has not discarded the affective consciousness’s, they are as far apart as heaven and earth.
부스웰의 번역도 此人'이 누구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앞의 문장 번역과 이 대목을 해설하는 주 56)의 내용으로 봐서 그는 此人을 參句參禪者로 보지 않고參意參禪者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바로 그 다음 문장의 禪門의 活句를 參究하여 速證菩提해달라'는 보조국사의 간절한 부탁과 일치하지 않게된다. Robert Buswall, The Korean Approach to Zen,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P. 253, PP. 260-261 참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보조사상 속에 너무나도 분명한 중오사상과 간화경절사상을 김호성교수는 무슨 이유로 부정하고 격하하려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잠깐 김교수가 悟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하겠다. 김교수는 그의<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깨달음과 닦음에 대한 그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조는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다고 하는 수증론(先悟後修)에서의 깨달음을 해오로 보고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수증론(先修後悟)에서의 깨달음을 중오라고 한다. 비록 해오와 중오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보조는 해오를 더 높이 평가하고있는데 그러한 점은 닦음과 관련하여 알 수 있다. 보조는 해오를 초시간적 .무차별적인 깨달음인 선오후수로 보고 있으며 증오를 시간적 차별적인 깨달음인 선수후오로 보고 있음은 앞에서 살핀바 있다. 보조에게 있어서 증오의 수 즉 선수후오는 悟前修로서 이는 진수(眞修)로 평가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적인 범주가 아닌 논리적인 범주에서 먼저 깨닫고 나서 닦아야 眞修로 인정하고 그러한 의미의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以悟爲則이란 말도 이와같이 이해되어야 한다(<김지견박사 화갑기념논문집》, p.470.
위의 문장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문제되는 것들을 차례로 지적하고 따져 나가보자
첫째, 김교수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悟는 해오요, 先修後悟의 悟는 證悟라고 일률적인 정의를 내렸다. 보조스님의 悟思想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도 상관없을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선불교의 용어사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줄 안다. 해오나 중오니 하는 선불교의 전문용어는 그 말이 쓰여지는 경우에 따라서 그 의미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해오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진리 쪽에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면이다. 내 마음이 원래 부처님 이라든가 또는 내 마음이 根本不動智佛果'라는 표현이 모두 해오의 이런 면을 말해주고 있다. 이 면은 우리의위의 문장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의노력이나 준비 여하에 관계없이 부처님이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면이라 말할 수 있다. 해오가 가진 또 하나의 면은 애써 진리쪽으로 올라가는 사람 쪽에 관련된 면이다. 수도자의 구도자다운 태도나 정신적인 자세나 마음의 준비 또는 사람들이 가진 숙세의 업보 등의 인연이 얼마만큼 진리를 수용하고 발현할 수 있도록 잘 성숙해져 있느냐 하는 것 등이 모두 이 면에 속한다. 이 면은 우리들이 부처님 쪽으로 올라가는 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오라는 경험은 이상의 두 가지가 함께 만났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통현장자가 <신화엄경론》을 짓고 신해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나 김호성교수가 해오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은 해오가 가지는 전자의 면을 응시하면서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보조스님이 해오를 말하면서 반드시 인연과 解碍를 거론하고解碍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해오가 가지는 후자의 면을 들여다보면서 하는 말이다. 해오의 이러한 두 가지 면들은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전자가 더 근본적이고 논리적으로 더 본질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 없이는 신해라는 말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사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철학에서 <法>을 말할 때 꼭 人을 함께 거론하듯 이 진리를 말할 때 꼭 사람을 함께 이야기하고 부처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심을 이야기할 때, 꼭 우리들이 부처님에게로 올라가고자 하는 면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후자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렇게 양자를 함께 볼 줄 알아야 중도의 가르침을 몸에 익힌 불제자 다운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를 단 순한 사고방식이 아니라 ‘있음’ 存在의 ‘있음’存在다운 모습이라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김교수가 해오의 두 가지면 가운데서 전자의 면만을 말하고 후자의 면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올 수 없다.
다음엔 증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김교수는 보조스님의 <法集別行錄節要>에 인용된 장관의 도식적인 悟相 설명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悟가 먼저고 修가 뒤따르면 解悟요, 修가 먼저고 悟가 뒤따르면 證悟라는 공식으로 증오를 처리하였다. 그 결과 김교수의 증오는 해오만도 못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보조스님이 <節要〉에서 해오 이전의 修는 眞修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조스님의 증오는 해오 이전의 중오가 아니라 항상 해오 이후의 증오였다. 보조사상의 경우 해오 이전의 증오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므로 논의할 가치가 없었다. 보조스님의 수행은 해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오 이후의 수행은 보조스님이 항상 강조하는 선오후수에 속하며 그 결과로 증오를 얻는 것이다. 우리들은 앞서 <간화결의론》의 구절들을 분석할 때 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김교수는 여기에서도 증오가 가진 무의미한 전자의 경우만을 이야기하고 소중한 후자의 경우는 없는 듯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오의 경우나 증오의 경우나 똑같이 여러가지의 면 가운데 한가지만올 말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둘째, 김교수는 해오와 증오를 자꾸 다른 차원에 속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해오가 초시간적 • 무차별적인 데 반하여 증오는 시간적 • 차별적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문제도 해오와 중오가 각각 모두 여러 가지의 면들을 대각선으로 단순비교하는 데서 비롯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서양과 동양을 비교한다면서 사람들은 간혹 서양은 물질적이고 동양은 정신적이라고 말하는 경우 를 본다. 동양문화에도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다 있었고 서양문화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서양에서는 물질적인면만 뽑고 동양에서는 정신적인 면만 올 뽑아 단순비교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오에도 증오에도 둘 다 똑같이 법과 인의 양면이 있다. 그러므로 보의 면을 보면 해오도 증오도 둘 다 똑같이 초시간적 • 무 차별적인 데 반하여 人의 면을 보면 둘다 똑같이 시간적이고 차별적인 면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셋째, 김교수는 여기에서 보조스님은 해오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역시 김교수가 둘을 다 보지 않고 하나만을 보고 성급히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서 비롯한 현상으로 보인다. 초심범부의 最初入信을 이야 기 할 때는 해오를 강조하고 <간화결의론〉처럼 解碍克服에 초점을 맞출 때는 궁극적인 목표로 증오를 높이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보조스님의 家風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화결의론〉에서 싫도록 보았다. 아무런 배경설명도 없이 무조건 중오보다는 해오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없다.
넷째, 김교수는 여기에서 보조스님이 증오를 가져오는 修는 悟前修이기 때문에 眞修가 아니라고 말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보조스님은 수의 眞假를 따지면서 해오 이전의 수는 진수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 다.주2 그러나 해오 이후의 진수를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 바로 증오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김교수는 수에도 두 가지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하나는 해오 이전의 수요, 다른 하나는 있어야 할 증오 이전의 수다. 보조사상의 구조 속에서는 증오 이전의 수가 바로 해오 이후의 수에 해당된다. 수는 이와 같이 해오 이전의 수와 해오 이후의 수로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증오 이전의 수와 중요 이후의 수로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각각의 수가 가지는 고유의 뜻을 무시하고 막연하게 悟前의 修는 모두 진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보조스님의 생각이었다고 일률적으 로 말해버리면 정밀하고 철저한 보조철학을 죽도 밥도 아닌 범벅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
주2<절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北宗但是漸修 全無頓悟故 修亦比眞”(보조전서,P.107).
若未悟而修 比真修也(보조전서,P.130)
다섯째, 김교수는 여기에서 보조스님이 시간적 범주가 아닌 논리적 범주에서 먼저 깨닫고 나서 닦아야 진수로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조사상에서는 해오 이후의 닦음이라야 진수였다. 그렇다면 김교수가 말하는 "논리적 범주에서 깨닫는 것' 이란 곧 김교수가 항상 강조하는 해오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김교수는 그의 여러 논문에서 누누이 해오는 지해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논리적 범주에서 깨닫는다는 것이 知解인가 아닌가? 물론 知解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 범주에서 깨 닫는 것이 지해가 아니라는 증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란 원래 지해상의 개념이다. 도대체 논리적 범주에서 깨닫는다는게 뭔가? 그 정체를 밝혀야 할 것이다.
김교수는 그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필자의 해오 이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구체적으로 박교수가 보조의 해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보조스님은 불경을 읽음으로써 끼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는 그것이 궁극적인 끼침 즉 증오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불경을 읽고서 얻는 끼침을 궁극적인 증오와 구별하기 위해서 종밀은 해오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아직도 智解的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보조 자신의 진술이 아니라 박교수의 比量(anumana)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논문의 도처에서 보조 저술에 근거한 성언량 (聖言量 sabda)과 자신의 比量을 분명[MT1] 하게 구별하여 밝여두지 않아서 이행에 어려음이 많다. 위의 인용구를 통하여 볼 때 해오를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는"지적인 깨달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지견 박사 화갑기념논문집》, P. 466)
필자가 보조스님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김교수의 평이 옳은지 그른지 한번 따져보자. '보조스님은 불경을 읽음으로써 깨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과
'그런 깨달음을 그는 증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거론해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보조스님의 비명에 적혀 있는 세 번의 깨달음이 모두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은 깨달음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저술에는
두 권의 중요한 <절요>가 있다. 왜그런 책을 냈는가? 읽고 깨닫자는 것이다. 그 밖에도 보조스님온 불경을 수도 없이 인용하면서 그렇게 인용된 대목 대목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 다음 그런 깨달음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해오라는 말도 무수히 나온다. 보조스님 자신이 여러 번 깨친 다음에도 증오를 얻지 못해 마치 원수와 함께 사는 듯했었다고 고백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해오에 지해적인 요소가 남아있어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조 논리의 정석에 속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문장을 새로 다시 써라 해도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위에 인용한 김교수의 글에는 좀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먼저 문제된 김교수의 말을 다시 적어보자. "위의 인용구를 통하여 볼 때 해오를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는
'지적인 깨달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필자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이런 오해를 받을 만한 흔적도 없고, 그렇게 말한 기억도 없고, 보조사상 을 그렇게 이해한 적도 없다. 문제는 김교수가 필자의 문장을 자기 식으로 약간 고친 데서 비롯한 것 같다. 필자는 해오를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는 깨달음이라고 말했는데 김교수는 그것을 불경을 읽음으로써 얻는 지적인 깨달음으로 말을 바꿔버렸다. '지적인’ 이라는 한정사를 붙이고 안 붙이고의 차이는 적지 않다. 붙이면 知解로 전락하지만 안붙이면 해오다. 필자의 주제는 해오였는데 김교수는 자기 멋대로 '지적인 이란 형용사를 삽입하여 남의 주제를 지해로 바꿔버린 다음 필자가 보조스님을 오해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계속)
199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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