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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동아시아)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대개 현명하지 못하다. 예기치 못한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redictions in this part of the world are generally unwise because the unexpected can always happen.)
- 주일미국대사 조지프 C. 그루, 1936년 1월 7일, 국무장관에게 상신한 보고 중
패전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단순한 허무나 붕괴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억눌린 분노와 패배에 대한 부정, 자기정당화, 그리고 관리된 체념이 뒤엉킨 기묘한 심리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인들은 도쿄 대공습으로 대표되는 대도시에 대한 가혹한 폭격, 극심한 식량난, 원자폭탄, 점령, 실업, 암시장, 전재민 문제를 한꺼번에 겪으며 자신들이 믿어왔던 세계관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그 총체적 붕괴가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일본 사회는 보다 냉소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기에, 오히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이었는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의 일본은 달랐습니다. 원자폭탄은 일본 본토에 떨어지지 않았고, 도시를 절멸 직전까지 몰아간 대규모 전략폭격도 실제 역사만큼 전면화되지 않았습니다. 미군의 직접 점령 서사도 없었고, 연합군최고사령부(GHQ/SCAP)가 일본 국가 자체를 뿌리부터 뒤집어엎는 장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천황의 옥음방송조차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들은 패전의 문장은, 무너진 제국의 군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한 형이상학적 항복의 언어가 아니라, 내각 명의의 차갑고 건조한 행정문이었습니다.
쇼와 20년 12월 13일 동경표준시 22시를 기하여, 영미 기타 제교전당사국과의 일체의 교전행위를 완전히 중지할 것을 명한다. 본 명령은 발령 즉시 효력을 발생한다.
(昭和二十年十二月十三日東京標準時二十二時ヲ期シ、英米其ノ他諸交戰當事國トノ一切ノ交戰行爲ヲ完全ニ停止スルコトヲ命ズ。本命令ハ發布卽時其ノ效力ヲ生ズ。)
이 몇 줄의 문장은 실제 역사에서의 종전과는 전혀 다른 심리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굴욕을 감정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의식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통보된 정지 명령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인 다수에게 패전은 체험된 파국이라기보다, 위에서 내려온 불가피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충격은 있었지만 세계관의 붕괴는 없었고, 체념은 있었지만 자기부정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선에서 일본 사회를 지배한 것은 “우리가 틀렸다”는 인식이 아니라, “상황이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멈춘다”는 식의 관리된 체념이었습니다.
더구나 패전 직전까지의 일본은 고노에 후미마로와 이시와라 간지, 아리마 요리야스, 그리고 대정익찬회가 주도하는 대중적 파시즘 국가였습니다. 이 국가는 단순히 군국주의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반제국주의적 대동아 성전 담론과 사회개혁적 협동주의, 국가총동원과 민중정치의 요소를 결합한 특유의 문민 파시즘 체제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전 이후에도 사회의 이념적 체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무너지기는 했지만, 자신이 어떤 나라였는가를 잊은 채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당수 일본인들은 패전 뒤에도 자신들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다 과도한 군부의 폭주로 실패한 국가”였다고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 자기서사는 이후 일본의 전후 정치문화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정신적 유산이 됩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일본을 관리한 것은 GHQ/SCAP가 아니라, 조지프 그루(Joseph C. Grew)가 이끄는 연합국감독위원회(Allied Supervision Commission, ASC)였습니다. 그루는 노련한 외교관이자 오래된 일본 전문가였고, 일본 국가의 재구성이 군사적 파괴보다 정치적 유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쇼와 천황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이 세계선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 주일대사였던 그루 위원장은 천황의 권력을 불신했을지언정, 그 권위 자체는 철저히 존중했습니다. 그에게 일본은 짓밟아야 할 적국이라기보다, 발톱을 뽑아낸 뒤 방향만 돌려 세워야 할 잠재적 반공 파트너였습니다.
그래서 그루는 “잽(Jap)들을 전부 바다에 쳐넣자”는 군부 강경론자들 대신, 유진 두먼(Eugene Dooman), 존 에머슨(John K. Emmerson) 같은 현실주의적 외교관들과,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같은 동양학자들을 크게 중용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한 점령행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회 내부에 남아 있는 억눌린 패배의식과 대동아 담론의 잔재를, 장차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협력할 수 있는 반공적 국가의식으로 천천히 전환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곧장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을 반공 동반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이 스스로를 어떻게 패배시켰는가에 대한 내부의 설명을 정리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 첫 단계는 군부에 책임을 돌리고 숙청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남방작전 당시 끝내 미일 간 전면전을 초래한 것은 맥아더의 필리핀에서의 돌발행동이었지만, 일본의 문민 파시스트들과 미국 당국자들은 일본 군부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자는 데 거의 완벽한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일본 내부의 문민 파시스트들에게 그것은 자기보존의 길이었고, 미국에게는 일본 사회를 통째로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무장해제를 정당화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루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말은 이 판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에 패전을 부정하는 이들을 찾아내 구별하는 것은 마치 브루클린의 술집에서 취객을 구분하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 자들이 술기운에 품에서 총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이 잘 보여주듯, ASC는 일본 제국이라는 하이에나의 발톱을 뽑아내는 데 무엇보다 열중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은 실제 역사의 도쿄 전범재판 같은 국제재판소 형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제국 사법부 산하 전쟁범죄특별재판부와 연합국 협조재판관(Associated Judge)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전쟁 그 자체를 기획하고 개시한 정치적 책임, 곧 실제 역사에서 “평화에 대한 죄(Crime against Peace)”라고 불린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포로 학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 점령지에서의 학대와 기타 전쟁법 위반행위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이는 법률적으로 더 보수적인 접근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더 광범위한 숙청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혐의는, 의지만 있다면 거의 모든 일본군 지휘관에게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 전체를 심판하지 않되, 그 국가의 무장기관만은 철저히 잘라낸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계산된 선택이었습니다.
둘째 단계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일본군 잔류 병력을 정규적으로 투입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옌시산 휘하에 약 15,000명의 일본군이 교전에 참여하는 등, 일본군 잔류 병력이 용병계약 비슷한 형태로 산발적으로 활용된 사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 미국 당국자들은 일본을 진정한 “반공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외교적 합의가 아니라 협력의 실제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약 90,000명 규모의 일본군 병력이 상당 부분 온전한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 국민혁명군과 협조하여 공농홍군과 교전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 조치가 국공내전 전체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의 구조적 전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고, 일본군의 투입 역시 어디까지나 제한적 보조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더 이상 과거의 적국이 아니라, 미국이 설계하는 동아시아 반공질서 속에서 실질적 군사협력의 경험을 가진 파트너라는 상징적 전례로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일본 보수정치가 이 시기를 회고할 때, 그들은 이를 “국가 재생의 첫 번째 실전적 증명”처럼 다루게 됩니다.
셋째 단계는 대정익찬회 내부 급진좌익의 제거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시와라 간지의 추종자들과 옛 기타 잇키 지지자들을 솎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고노에 공작의 조카사위이자 1945년까지 대동아차관을 지낸 호소카와 마사다케(細川護貞)였습니다. 그는 대동아전쟁을 단순한 지정학적 충돌이 아니라 국제사회주의적 혁명전쟁과 일정 부분 동치시키려 했고, 한때는 대정익찬회 내부에서 고노에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급진적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패전 이후의 현실에서, 바로 그런 종류의 문민 급진주의는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반대로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처럼 과거 좌익활동에 몸담았던 인물들이 살아남은 것은, 이 체제가 이념적 관용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이 이미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었고, 충분히 협동주의 국가의 장식품이 될 수 있을 만큼 유용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이 누적된 결과, 그루 위원회가 운영된 약 4년 동안 일본은 독특한 형태의 전후체제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민주국가도, 군사독재도, 혁명국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공적이고 파시즘적이며 문민 정치가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협동주의적 당-국가 체제였습니다. 대정익찬회는 이름을 국민협동당(國民協同黨)으로 바꾸었고, 패전 전보다도 더 두텁고 철저한 일당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기 노동자 동원을 담당하던 대일본산업보국회(大日本産業報國會)는 전일본노동총동맹(全日本勞働總同盟)으로 재편되어 협동주의 체제의 한 축이 되었고, 국가권력의 도구가 된 재벌기업들 역시 노사협동이라는 미명 아래 당-노조-생산자로 이어지는 이른바 “철의 삼각형(鐵の三角形)”을 형성했습니다.
이 체제는 전쟁 이전의 일본보다 평화로웠지만, 더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군복은 벗겨졌지만 동원은 남았고, 황도는 사라졌지만 국가주의는 살아남았으며,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제국을 조직하던 습관은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패전함으로써 파시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패전을 통해 보다 관리 가능하고 보다 현대적인 파시즘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었습니다.
“기존 체제의 기계장치만을 신뢰하고, 해방의 전령처럼 찾아오는 돌연한 손님을 맞아들일 생각도 여유도 없는 나라들은, 현재 얼마나 부유하고 강하든 결국 패배를 자초하게 된다.”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창조적 통합> 중
1945년 12월 13일의 중국은, 실제 역사처럼 일본군이 갑자기 증발하고 각지에서 권력공백이 터져 나오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대체역사의 국공내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은 이미 2년 넘게 화북과 중원을 압축 재편하고 있었습니다. 다퉁, 타이위안, 뤄양, 정저우, 카이펑, 화이베이, 쉬저우, 롄윈강으로 이어지는 화북 방어선 내부와, 상하이-난징-우한으로 이어지는 장강 축은 하나의 수축된 지배권역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1945년 늦봄 이후 일본은 장강 축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했지만, 화북의 지배권만큼은 종전 시점까지 끝내 유지했습니다.
그 내부에서는 왕징웨이,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천궁보가 이끄는 개조국민정부가 도·현 행정, 경찰, 세무, 배급, 철도와 통신을 적어도 저강도의 면 단위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후방의 최종 담보자이자 강압기구로 남아 있었다면, 실제 민정의 말단은 개조국민정부의 지방관료, 경찰서장, 향촌 유지층, 협력민병 조직이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일상에서 마주한 것은 대개 일본군의 총검 자체가 아니라, 현청의 공문서와 경찰의 순찰, 배급표와 세금 독촉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화북에서 유지 중이던 개조국민정부는 무너진 제국의 텅 빈 외피가 아니라, 축소되었을 뿐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점령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상하이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에도 화북의 국가기계는 여전히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현청은 문을 닫지 않았고, 경찰은 그날도 순찰을 돌았으며, 철도는 제한적으로나마 계속 움직였습니다. 일본군 역시 패잔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명령계통 속에 남아 있는 무장세력이었고, “질서 유지”와 “인수인계 완료 전 경비”라는 명분 아래 기존 배치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중국의 1945년 말은 실제 역사와 정반대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거대한 공백지를 누가 더 빨리 접수하느냐를 둘러싸고 경쟁했다면, 이 세계선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국가를 누가 자기 국가라고 다시 부를 수 있느냐”가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본산 국가기계와 국민당, 그리고 공산당이 맺은 관계는 그래서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국민당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합법정부였고, 미국의 수송력과 외교적 후원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1946년 1월, 미군은 이미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산해관 너머까지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베이핑과 톈진에 육군 및 해병대 2개 사단을 급파했습니다. 그와 별개로, 상하이 협정의 정신에 따라 국민당의 화북 접수를 실질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형식상으로 보자면, 화북과 중원의 개조국민정부 영역을 넘겨받을 유일한 상속자는 국민당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국민당이 파견한 것은 단순한 군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접수위원회, 군정대표, 철도국 인수반, 재정·통신·치안 인계반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해방군처럼 진입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감사관이자 관리자처럼 진입했습니다. 국민당은 일본이 남긴 국가기계를 가능한 한 적은 비용으로 자기 국가로 전환하려 했던 것입니다.
반면 공산당은 그 국가를 온전히 상속할 능력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외곽에서 파괴하고 질식시키는 데에는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들의 근거지는 화북 외곽과 화중 농촌, 산둥 내륙 같은, 말하자면 “도시 바깥의 중국”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세계선에서는 일본군의 막판 대공세, 곧 실제 역사에서의 이치고 작전과 같은 대규모 충격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농촌에서 훨씬 더 깊고 두터운 준국가체제를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를 곧바로 점령하기보다, 철도를 절단하고, 협력자 네트워크를 하나씩 무너뜨리고, 구 일본 점령지와 국민당 접수행정 사이의 연결을 차례로 끊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요컨대 국민당이 일본이 만든 국가를 상속하려 했다면, 공산당은 그 국가를 “중국에서 가장 비중국적인 국가”로 규정하고, 그 바깥에 대항정권을 빠르게 세운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북에서는 상하이 협정 체결 뒤 몇 달이 지난 1946년 5월까지도, “구 일본 점령하 화북”이라는 정치공간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이 시점은 특히 중요합니다. 실제 역사라면 이미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해방, 접수, 군벌적 재편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을 시간이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오히려 일본이 마지막까지 압축해 남겨둔 질서가 가장 길게 존속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이핑, 톈진, 타이위안, 정저우, 카이펑, 쉬저우 같은 거점에서는 개조국민정부 인사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일본군 역시 질서 유지와 인수인계 완료 전 경비를 명분으로 상당수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국민당이 내린 첫 번째 역사적 선택은, 이 구조를 과감히 부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이 이어받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철도는 계속 굴러가야 했고, 세금은 걷혀야 했으며, 배급과 치안도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중국 본토 최대의 철도·행정 회랑을 하루아침에 청산과 혁명의 실험장으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합리성이 장기적으로 국민당을 독살하게 됩니다. 공산당은 그 순간부터 국민당을 “일본 괴뢰국가의 진짜 후계자”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북에 대한 더 손쉬운 접근, 실제로 작동하는 국가체제의 비교적 손쉬운 인수, 구 일본제국 육군으로 구성된 90,000여 명의 반공의용군의 존재는 내전 초기 국민혁명군과 국민당을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만큼 소련 역시 만주 등 점령지를 공식적으로는 국민당에 인계하면서도, 동시에 공산당 세력과 해방구를 지원하는 이중전략을 실제보다 더 오래 지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목표는 중국 전체를 직접 떠안는 데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만주와 화북의 경계선을 흔들어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 유리한 시간표 위에서 싸울 수 있게 만드는 데에는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장제스 정부가 더 강했고, 실제 행정력과 수송력, 철도와 세무망, 도시 통제력에서도 그 우위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강함은 점점 독으로 변해갔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군이 종전 직전까지 화북, 화중, 강남을 뒤흔들며 역설적으로 중국 전역에 “팔년항전”이라는 통일된 기억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는 일본이 화북으로 더 일찍 수축했고, 장강 이남을 향한 최종 대공세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항일의 서사는 실제보다 훨씬 약했습니다. 전국적 파괴를 견디며 마지막까지 버텼다는 도덕적 권위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당이 개조국민정부의 이른바 한간들과 유착하고, 심지어 일본군과까지 연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국가적 정통성 면에서 치명적인 실책이었습니다. 부패와 인플레이션, 행정적 무능, 도시의 암시장과 세금 수탈, 그리고 식민지 행정기계의 냉혹한 연속성은 거의 오롯이 국민당의 책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국민당의 통치에 염증을 느낀 민중이 마지막에 돌아보게 되는 선택지는, 결국 공산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체역사의 국공내전은 실제 역사와 다른 리듬을 띠게 됩니다. 실제 역사에서 만주에서의 결정적 포위섬멸이 사실상 승자와 패자를 갈랐다면, 이 세계선의 내전은 훨씬 더 오랫동안 회색지대적 국지전과 유격전의 양상을 유지했습니다. 국민당은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제적 승인, 미국의 원조, 도시와 철도, 재정과 통신망, 심지어 일본이 남긴 국가기계까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더 추하게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무너지는 패배가 아니라, 육지에서 익사하듯 서서히 가라앉는 몰락이었습니다.
주요 도시들에 하나둘씩 적기가 꽂히고, 1950년이 되면 국민당은 결국 파촉분지와 운남 지역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나 상하이 협정에서 타이완 섬은 여전히 일본 제국의 영토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처럼 타이베이로의 국부천대는 불가능했습니다. 국민정부는 충칭에서 청두로, 청두에서 쿤밍으로, 그리고 마침내 쿤밍에서 버마와 태국 북부의 오지로 밀려났습니다. 형식상으로는 1960년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무렵의 그것은 더 이상 국제정치의 실질적 행위자라기보다, 변경에 표류하는 망명 잔존세력에 가까웠습니다. 공산당이 더는 진지한 위협으로 취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 존재는 점차 정치적 의미를 상실해 갔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은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항일전쟁의 최종 완결자”라는 자리를 실제 역사보다 더 쉽게 차지하게 됩니다. 국민당은 실제보다 더 강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강함 때문에, 더 늦고 더 추하게 무너졌습니다. 화북과 중원의 행정기계를 상속한 강한 국가가 아니라, 한간과 일본군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반쯤 식민지적인 국가처럼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공산당은 더 약하게 출발했지만, 그만큼 더 넓은 의미의 “인민 모두의 정부”를 주장할 필요에 밀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뀐 역사의 국공내전이 동북아 전체에 남긴 첫 번째 함의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더 약하게 출발한 공산당은 민주동맹, 농공민주당, 치공당 같은 제3지대 정치세력들을 보다 강하게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마오쩌둥은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진보적 민족주의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실제 역사보다 더 오래, 더 진지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이상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지만,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각지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실제 역사보다 한층 더 매력적인 롤모델로 비쳤습니다.
둘째 함의는, 국민정부가 타이완으로 파천해 반영구적인 대항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무의미”해졌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국공내전은 대외적으로도 “두 중국의 경쟁”이라기보다, 중국 내부의 정권교체 전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50년 선포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주요 강대국들로부터 비교적 빠르게 정식 정부로 승인받았고, 좌경화된 준민주주의 국가 중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 빠르게 외교적 저변을 넓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처음에는 이를 경계했지만, 국민당이 더 이상 실질적 대항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상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의 문제에서 끝까지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 혁명은 실제 역사보다 더 이른 시기에 국제질서 속의 승인된 현실이 됩니다.
셋째로, 소련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라졌습니다. 소련은 이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실제 역사보다 더 무자비한 방식으로 공산화했고, 1950년대 초가 되면 이들 모두에 “사회주의공화국 체제”가 들어섭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습니다. 중국은 소련군의 직접 점령이 아니라, 자생적인 신민주주의와 통일전선에 기반한 다른 모델의 좌익 혁명국가를 구축했습니다. 따라서 혁명 중국은 스탈린 말기 소련이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위성국가가 아니라, 마치 배다른 형제처럼 결은 다르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우방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소련과 중국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오히려 벌려 놓았지만, 동시에 실제 역사에서처럼 극동 패권과 이념적 차이 때문에 파멸적으로 폭발하는 중소결렬의 가능성은 오히려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유럽의 사회주의 이행이 소련식 직접 통제와 국가개조의 모델이었다면, 아시아의 사회주의 이행은 중국식 통일전선과 신민주주의 혁명의 모델로 구분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소련의 하청이 아니라, 소련과는 다른 방식으로 혁명을 수출할 수 있는 제2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혁명정책에서도, 중국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독자적 주도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요컨대 이 대체역사의 국공내전은, 국민당이 더 강하게 시작하지만 바로 그 강함 때문에 더 늦고 더 추하게 무너지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은 더 약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넓은 연합을 꾸려야 했고, 그 결과 더 설득력 있는 혁명국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중국 혁명은 오히려 유럽형 사회주의와 아시아형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아시아에서의 냉전이 유럽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에서 기근은 심해지고 민중의 증오도 커지고 있다. 토착 농민들은 이미 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아직 수동적인 태도에 머무는 이유는 조직과 지도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1924년 제5차 코민테른 대회 보고, ‘인도차이나’ 파트 중
아시아의 냉전은 유럽의 냉전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냉전은 대체로 붉은 군대가 어디까지 진주했는지, 그 바깥에서 미국이 어떤 선을 긋는지에 따라 비교적 선명한 경계선을 얻었습니다. 엘베 강 하류에서 시작하여 마인 강 상류로, 다시 알프스를 거쳐 아드리아 해로 향하는 이른바 “철의 장막”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냉전은 처음부터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패전한 제국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고, 탈제국주의적 민족국가들 역시 완성된 형태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 영국, 프랑스가 남기고 간 것은 깔끔한 독립이 아니라, 반쯤 형성된 민족국가와 국군, 충돌하는 정통성, 그리고 역시 반쯤 잉태된 민족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냉전은 두 초강대국이 대륙 위에 선을 그어 만든 질서라기보다, 제국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국가들이 서로 다른 혁명과 반혁명, 협력과 배신의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명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은 아시아적 냉전의 가장 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원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핵심부였던 이 지역은 1940년 6월 비시 정부 성립 이후 명목상 비시에 충성하는 식민지로 남았고, 사이공 총독부의 지배는 1941년 일본군의 진주 이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 미국의 유럽전 참전과 함께 동아시아 전황이 재조정되자, 일본은 사이공을 완전히 장악하고 베트남 복국동맹회의 수장 끄엉데(Cường Để)를 황제로 하는 ‘베트남국’을 세웠습니다. 이 국가는 처음에는 일본의 전시 위성국가에 불과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전황 악화로 1943년부터 병력을 대거 철수시키면서 예상치 못한 ‘반쯤 해방적인 공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국가도 아니고 완전한 독립국도 아닌 이 애매한 공간에서, 베트남인 정치가와 관료, 군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국가를 운영한다”는 감각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원래 역사에서 일본의 대규모 공출과 전시 수송정책, 프랑스 식민당국의 무능은 1944-45년의 대기근과 베트남 사회의 붕괴, 더 나아가 호치민과 베트남 독립동맹(월맹)이 반일적 경향을 굳히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체역사에서는 일본군이 더 이른 시점에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그러한 파괴가 상당 부분 완화되었고, 일본이 ‘세워주고 떠난’ 베트남국의 유산 역시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1943년 말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영국군 역시 베트남국 등 일본이 세운 ‘떠넘기기식 독립국’들을 해체하지 않으면서, 베트남국은 나름대로의 군사·행정 엘리트들을 적게나마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944년부터 총리를 역임한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은 이 신생국 엘리트들의 정점에 선 인물로, 이 대체역사에서는 태평양 전쟁 종전 이전부터 월맹 지도자 호치민보다 더 민족지도자에 가까운 인물로 널리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1945년 가을 프랑스군이 재진주를 시도했을 때 벌어진 일은 실제 역사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유사했습니다. 조르주 비도(Georges Bidault)가 이끄는 대중공화운동(MRP)-공화자유당(PRL)-급진당(PR) 우파 내각은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을 급파했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마주한 것은 더 이상 총독부를 기다리는 무정형의 피지배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방치하고 떠난 국가체제, 응오딘지엠과 초기 국가엘리트들이 축적한 행정 경험, 그리고 호치민과 월맹이 조직한 혁명적 동원능력이 결합하면서 베트남에서는 뜻밖의 대연합이 형성되었습니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서로를 깊이 불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에게 프랑스는 민족국가의 형성을 가로막는 외세였고, 호치민에게도 프랑스는 혁명 이전에 먼저 몰아내야 할 식민세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계선의 베트남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조숙한 협력 아래 독립전쟁을 수행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정치적 명분을 상실해 갔습니다.
1947년 7월 끄엉데 황제가 프랑스 외인부대에 의해 암살된 뒤, 응오딘지엠을 총통으로, 호치민을 국무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그런 점에서 아시아적 냉전의 전형적 장면이었습니다. 이 국가는 이념적으로 균질하지 않았고, 내부에는 곧 폭발할 긴장이 있었으며, 외부 지원 역시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전선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도왔고, 일본 역시 프랑스의 재식민화를 저지하는 방향에서 베트남을 후원했으며, 미국도 연합국 내부 공조가 이미 약해진 상황에서 프랑스를 위해 끝까지 개입할 유인을 잃었습니다. 결국 1952년 중부 요충지 호이안(Hội An)에서 프랑스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홍콩 협정으로 코친차이나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베트남 공화국의 존립이 인정되면서, 아시아에서는 “식민제국의 복원”보다 “불완전한 민족국가의 생존”이 더 현실적인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일본이 남긴 ‘텅 빈 국가체제’가 민족국가 실험으로 전화되었다면, 인도에서는 영국이 지나치게 정교하게 설계한 연방체제가 오히려 파국을 준비하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이 대체역사에서는 일본의 반제 선전이 실제 역사보다 더 깊숙하게 인도 사회에 침투했지만, 임팔과 코히마를 뒤흔드는 극적 침공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공포 속의 급한 철수가 아니라, 질서 있는 이양을 시도할 여지를 조금 더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유 속에서 스태포드 크립스 경(Stafford Cripps)의 구상과 훗날 내각사절단 안(Cabinet Mission Plan)으로 이어지는 대인도연방안이 힘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그 연방이 너무 영리하게 설계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외교·국방·통화만 중앙에 남기고, 나머지를 주 집단과 지방, 라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 3층 구조는 분할을 피하는 대신 분열을 제도화한 체제에 가까웠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그 체제는 얼핏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인도는 분할되지 않았고, 영국은 영연방 아래 “통일된 독립 인도”를 남겼다는 외교적 성과를 얻었으며, 국민회의는 형식상 전인도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무슬림 연맹 역시 반독립적 번국들을 통해 사실상의 준국가적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두가 잠시씩 자기 기대를 체제 위에 투사한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중앙은 너무 약했고, 지방은 너무 강했으며, 무슬림 지역은 연방 안에서조차 따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적 유인을 지녔고, 라자들은 영국이 남겨준 특권을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연방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몇 년간 미뤄두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간디의 도덕적 권위도, 네루의 왕성한 사회개혁 의지도, 보스의 카리스마적 대중동원력도 아니었습니다. 건조한 회색빛의 현실주의자이자 질서를 중시하는 행정가 발라브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은 1948년 연방수상에 선출되었을 때, 런던이 파견한 영연방 고등판무관으로부터 안도의 한숨을 이끌어냈습니다. 물론 그 안도감은 채 1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연방이 흔들리고, 중앙정부가 번국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지방 폭동과 종파갈등이 갈수록 누적되자 파텔은 점점 더 “국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연방 자체를 부숴야 한다”는 결론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다 대중정치에 익숙해진, 국민의용대(Rashtriya Swayamsevak Sangh, RSS)로 대표되는 우익 힌두민족주의자들은 파텔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의 대중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연방체제는 평화의 장치가 아니라 ‘힌두스탄’을 영원히 협상과 양보에 묶어두는 올가미였습니다.
결국 1950년 전후 파텔은 연방 보존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비상권력 집중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지방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라자들의 잔존 특권을 폐지하며, 군과 재정, 행정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한 최후의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불안한 연방 합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다수 지역들은 이를 힌두 다수파의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북서와 동부에서는 곧바로 봉기와 분리주의 반란이 들끓었습니다. 최소 수백만, 최대 수천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인도 아대륙 내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시아의 냉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단순 대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이 물러가며 남긴 국가형식들을 누가 접수하고, 어떤 언어로 정당화하며,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끌어안느냐를 둘러싼 경쟁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일본이 남기고 간 위성국가가 반제 민족국가의 씨앗이 되었고, 인도에서는 영국이 남긴 연방 설계도가 오히려 거대한 내전의 기폭장치가 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프랑스 재진주에 맞서 손을 잡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통일과 질서의 언어가 중앙집권과 종파전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냉전은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은 베를린 장벽 같은 선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은 국가의 탄생방식 그 자체 속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은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선은 이 모든 아시아적 조건이 가장 극적으로 응축된 공간이었습니다. 일본이 설계하고 미국이 승인한 대조선국, 소련이 절단해 재편한 북조선의 인민공화국,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짜 국가”라 부르며 진짜 민족의 대표를 자처하는 두 체제의 경쟁은, 베트남과 인도의 변주를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 속에 압축해 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선을 조선으로 돌리면, 우리는 단순히 남북 대립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시아의 냉전이 가장 조밀하고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응축된 장면, 곧 제국의 유산과 혁명의 약속, 민족국가의 욕망과 외세의 설계가 한꺼번에 충돌하는 무대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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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곳에서의 일본과 1차대전 이후 독일이 서로 닮은 모습을 보이네요. 본토에는 전화가 안 미쳐서 “아니 우리가 이기고 있는거 아니었냐??”라는 생각 탓에 왜 패배했는지를 모르는…
연방을 지키기위해 연방을 부수는(?) 파텔이군요 그리고 일본은 아예 국민생디칼리슴(...) 체제기 되었으니 미국이 없거나 내부 혁명이 일어나면....
+오.... 신민주주의를 달성당한 마오쩌둥과 중공..... 왠지 민족주의만 빼면 노르웨이 적색당이 생각나네요
마지막 문단은 한반도에서도 내전이 터지는걸 암시하는 것 같군요...
조선판 베트콩(남민전)의 고위간부 권가연(?) 같은 게 나올 예정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혹시 자타공인 소련 간첩(...) 이상이도 남민전에 파견되서 권가연과 함께 싸우는건가요(?)
@E.E.샤츠슈나이더 세상에..... 권가연은 이 시간선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이 나오는군요![?)
+대조선국의 지하세력에는 혹시 아나키스트도 포함인가요?그러다가 남민전에 합류한다던지....
@로콘 오..... 신민주주의자 권가연과 소련 간첩 이상이의 대조선국 공격이라니 공조 생각나서 좋네요(??)
오.. 저는 다음주에나 마저 올릴수 있을 것 같네요..
궁금한게 남북한의 경계는 어떻게 되나요? 38선에서 옹진반도만 북한땅? 아님 휴전선?
지난번에 짧게 언급됐듯 38도 50분 선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월경지인 대동강 이북 남포는 북한땅이겠고… 땅으로만 따지면 남한이 더 우위네요. 곡창지대는 다 가져온거니.
@차들어 홍차야 아무래도 정통성을 북한이 다 가져가는 모양새라 그정도 페널티는 불가피하죠 ㅋㅋ
@E.E.샤츠슈나이더 근데 본문에 정통성이 없는 국가가 처참히 망한걸로 묘사가 되어 있으니 북한을 지지 하 읍읍(...)
@dear0904 지난번 새벽공 엔딩도 공산권 승천 엔딩이었는데 여기서도 북한이 잘 나가네요. 혹시 성향이?
@dear0904 사실 저 세계선에선 정통성뿐만 아니라 북쪽이 더 민주적 읍읍....
@dnjdss 김일성이 민주적이라니 참… 뭔가 오묘하네요.
@차들어 홍차야 이제 소련보다는 신민주주의 중공이 더 가까우니까요(?)
@dear0904 저 세계관이면 북쪽 지지 안하기가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dnjdss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주는 임팩트.. 혐오감..? 이 강해서 다들 간과하시지만, 정부수반은 여운형입니다. 여운형은 연안파랑 한몸이고.. 그리고 소련이 중공한테 외주를 주기 시작하죠 이제..
@E.E.샤츠슈나이더 오오...... 여운형의 권위가 점차 강화?되면서 분기점이 시작되는군요
@dnjdss 게다가 여운형은 타고난 강골이었다고 하니 ‘하메네이’ 당하지 않는 한(…) 꽤 오래 집권이 가능하죠..
@dnjdss 신민주주의 하니 생각난게 베를린의 동독 박물관에는 동독 관제야당들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려주는 전시물이 있었습니다. 우측의 레버를 돌리면 여러가지 의제(슈타지 창설, 울브리히트에게 비상대권 부여, 국가인민군 창설, 천안문 학살 진압 지지 등등에 동의하냐?)가 나오는데 맨 왼쪽의 긴 레버를 돌리면 동독 기민련, 민족민주당, 농민연맹 등이 모두 손을 들더군요.
@차들어 홍차야 동독은 사회주의통일당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극소수 소련의 충복들에게만 권력이 집중되었죠(…) 나치 집권 이후 KPD가 거의 통째로 소련에 망명했는데, 어지간한 당원들은 대숙청 때 다 죽고 ’울브리히트 패당‘만 남은 셈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8월 종파사건-갑산파 숙청을 거친 북한이랑 똑같네요.
@차들어 홍차야 어찌보면 겉으로 다당제일뿐인 민주집중제의 폐해이기도하죠 근데 민주집중제의 폐해가 극단화된게 스탈린주의인데 마침 울브리히트가 진퉁 스탈린주의자네요(....)
@E.E.샤츠슈나이더 그래서 세공때처럼 권가연이 여운형보다 물리적인 리타이어가 빠를거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예전 연대기의 요소가 조금씩 담겨있네요 ㅋㅋ 실패한 협동주의, 아류작이 아닌 국민혁명이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