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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노정의 진주, 진주정신
강희근
1.
박노정(朴魯貞) 시인은 1950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 사람이다. 엄격히 말해서 진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진주사람’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진주의 제 색깔을 지니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진주사람’은 진주에서 태어났다 하여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박시인이 인용을 잘 하곤 하는 허 유의 시 <진주>를 읽고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팔도강산을 다 돈 끝에
진주에 와 닿으면
그 때부터 여행의 시작이다
팔도강산을 다 돌아 보려고
맨처음 진주에 와 닿으면
이제 여행의 끝이다.
새벽잠 끝에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
우리나라 정수리에 퍼 붓는 이 정갈한 냉수 한 바가지
진주에 와 보면
그렇게 퍼뜩 정신이 들고 마는 것을 안다
또 진주에 와 보면
잘 이겨내는 것을 안다
어떠한 철근 콘크리트
무지막한 쇠바퀴도
영혼을 갉아 먹어 배부른 악담도
이 가녀린 남도 육자배기 가락이 잘 이겨내고 마는
것을 안다
진주땅 골목길에 숨어 있는
풋풋한 우리나라 토종공기까지 한몫 거들어서
또는 탱자나무는 탱자만한 힘까지 한몫 거들어서
그 자들을 이겨내어 쫓아버리는 것을 안다
진주에 오면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퍼뜩 정신’이 든다는 것이다. 진주는 정신을 들게 하는 곳이라는데 이를 일러 진주 사람들은 진주 정신이라고들 한다. 줄거리 잡아 말하면 ‘호의정신好義精神’, ‘주체정신主體精神’, ‘평등정신平等精神’이 그것이 된다. 남명 선생이 밝히고 간 정신이 경의정신이고 임진 계사년 전투에서 외세를 물리치고자 분연히 일어서 싸웠던, 그리하여 7만 군관민이 장렬히 목숨을 불태웠던 그 항쟁의 정신이 주체정신이다. 그리고 진주는 고려 민권 항쟁 및 임술 농민 항쟁, 일제 강점기의 형평운동 등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하나같이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반차별 인권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이 정신이 곧 진주의 평등 정신이라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퍼뜩 정신’이 들게 하는 역사적 동인을 진주가 갖추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노정 시인의 활동 내용을 요약해 적어보면 그가 어떻게 그 ‘정신’과 만나고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 1950년 경남 진주시 봉곡동 401 번지에서 태어남
․ 1973년 경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 졸업
․ 1973년 ROTC 11기로 육군 입대
․ 1990 ~ 2002년 진주신문 편집인, 발행인, 대표이사 역임
․ 2000 ~ 2008년 진주 남성 문화재단 이사
․ 2000 ~ 2008년 진주 문화예술 재단 이사
․ 2003 ~ 2006년 진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 2003 ~ 2006년 진주 시민 사회단체 연대회의 상임대표
․ 2004 ~ 2007년 형평운동 기념 사업회 이사장
․ 2005 ~ 2008년 6․15 공동 선언 실현을 위한 진주 시민운동 상임대표
․ 2006 ~ 2008년 진주 주민협의회 공동대표
․ 2006 ~ 2008년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진출 저지를 위한 시민운동 본부 공동대표/ 친일잔재 청산 시민운동 행동 공동대표
․ 2007년 8월 제 6회 한국 강의 날 진주 조직 위원회 공동 조직 위원장
이력에서 보는 대로 박시인이 공공기관에 발 딛은 것은 지역신문인 ‘진주신문’의 편집인, 발행인, 대표이사를 역임한 10년간이 전부이다. ‘진주신문’은 진주의 리틀 ‘한겨레 신문’이라 보면 된다. 신문을 발행한다는 일은 한국적 현실로 볼 때 채산이 맞지 않은 일 중에 대표적인 일에 속한다. 그것도 지방 자치단체가 주는 프리미엄 같은 것도 받지 않고 청탁도 받지 않고 촌지도 거부하는, 정론 언론으로서의 당당한 길을 가는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말이 그렇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그가 지역 사회의 부패를 부패로 두지 않고 정면 대결했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신문 발행을 통해 그는 진주정신의 맨 앞자리 소총소대의 소대장 역을 자임했던 것이고, 그 소임 안에 호의정신, 주체정신, 평등정신이 녹아 있었던 것이리라. 어찌 이것 뿐 인가. 환경운동 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같은 곳에서 하는 일은 이른바 진보적인 성격을 띠면서 모두가 의로움 펴기에 닿아있다. 형평운동 기념 사업회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났던 백정들의 인간 존엄성 찾기 운동이었던 형평사 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펴는 단체인데,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차별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그 운동의 중심에 박시인이 서 있다.
그는 2001년 이후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시민운동과 독도수호와 친일잔재 청산 시민행동에 앞장서고 있는데 그런 운동이 통일운동과 주체정신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진주정신의 흐름과 역사의 물굽이에 한 치 벗어남 없이 실천적 전위 내지 이행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는 셈이다. 100% 진주사람의 길을 닦고 살고 있는 현재형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여기다 덧붙여 놓을 사항이 있다. 그가 진주신문 발행인으로 있을 때 「진주신문 가을문예」를 제정한 것이 그 하나이고, 화요문학회 회장으로 전국의 유수한 시인들을 초청해 치루는 ‘화요문학 이달의 시인’ 행사가 다른 하나이다. 가을문예는 진주의 정신적 지도자 김장하 선생이 쾌척한 기금(1억5천)으로 학연, 지연을 넘어서서 가장 깨끗하게 운영하는 신인상 제도이고 이달의 시인 행사는 일정한 업적을 이룬 시인들을 뽑아 초대하는 행사이다. 행사가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자천 타천 시인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문학행사도 진주정신의 한 실현이라 보면 된다.
2.
필자가 박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초등학교 5학년 어딘가 그쯤이고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필자의 하숙집에서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그의 집이 있었는데 그의 둘째 형이 필자의 친구여서 같이 하숙하는 친구와 같이 그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둘째 형은 여학생처럼 수줍음을 탔었는데 군대 갔다 온 이후 사고로 이승을 떠났다.
박시인과 필자의 인연은 좀 복잡한 갈래를 이루면서 칡넝쿨처럼 얽혀있다. 우선 그는 필자의 돌아가신 전모(前母, 하동정씨) 쪽으로 쳐서 외사촌과 이종 간이어서 가계를 따지는 사람들의 경우 전혀 남이 아닌 관계가 된다. 그 다음으로 그의 돌아가신 부친은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로서 지도주임을 하고 계셨고 국문학사를 가르치셨다. 고대시가 <구지가>의 “거북아 거북아 머리 내어라……”의 문맥에 늘 그분이 계신다. 전통 유학자 이셔서 별명이 ‘공자님’이었다. 후에 교육장, 교장, 마산간호전문대학장까지 지내셨는데 그런 유가풍의 엄정주의 아래 박시인이 자랐으므로 정신의 근원은 유가적 이성주의에 줄을 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다음의 인연은 그의 셋째형이 성당에서 필자의 대자(代子)다. 그리고 성당에서 박시인의 부인이 필자의 아내의 대녀(代女)다. 또 필자는 그가 회장으로 있는 화요문학회의 지도교수다.
이렇게 얽혀 있어도 그의 마지막까지 남는 이미지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형의 심부름 잘하는 어린이다.
3.
박노정 시인의 살아온 행로는 단순하지 않다. 그는 출분(出奔)과 입산(入山)의 되풀이로 그의 삶을 던져짐과 다지기의 곡예 같은 지평에다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서 농학공부를 하고 군문에는 R.O.T.C 장교로 들어갔다. 보병장교로서 생활했지만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에서 오는 무력과 낭패감, 반복되는 일과에의 부적응 등으로 오랜 동안 군병원 신세를 졌다. 퇴역 후 칩거와 방랑으로 취업을 위한 이력서 한 장 내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철학서적과 종교서적으로만 빠져 들어가는 어떤 ‘쓸림’의 현상에 젖어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입산을 결행하게 되었다. 무슨 사상 같은 것으로, 혹여 빨치산이 되기 위한 장도로 의기양양 입산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만해 한용운이 동학 이후의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에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거나 좀 알아봐야 되겠다 하고 오세암인가 어딘가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은 그런 성질의 행보였다. 가족도 말리고 친구도 말리고 이웃도 말리고…… 그러나 말린다고 해서 말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의 결행은 어쩌면 생애에서 ‘뜻’이라는 것, 뜻이 아닌 것이 삶일 수 없다는, 그런 플래카드 하나를 가슴에 붙박이로 걸었던 것이리라.
들어간 곳은 인연이 있었던 팔공산 원효암이었다. 거기 석성우 스님(불교TV회장, 시조시인)이 있었는데 늘 넉넉하고 너그러운 스님이었던 것 같다. 박시인은 대학시절 지리산을 스무 번 넘게 올랐고 거기 사는 산사람 허우천을 만나 여러 가지로 배운 바가 많았었다. 이 허우천은 산에 들어가 산을 지키는 산속 사람이긴 해도 떠돌이다(필자가 산사람 <허우천 비>를 작성한 바 있음) 그의 능선과 골짜기와 적막의 순수를 어깨너머로 바라본 경험이 원효암의 생활을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원효암 생활을 박시인이 기록한 글에서 일부 옮겨 본다.
“처음 대하는 불경에다 범어로 된 염불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같아 잘 익혀지지 않았지요, 힘으로만 되지 않는 지게를 지고 오리쯤이나 떨어진 곳에서 옮겨오는 군불 나무는 톱질로부터 도끼질, 바람 세게 부는 날은 연기가 아궁이로부터 역습해 나와서 군불 지피기 또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새벽 서너시면 어김없는 도량돌이의 낭랑한 목탁소리에 신심을 새롭게 가다듬기도 하였고 큰 절과는 달리 별 간섭 없이 자유스럽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시승(詩僧)이요 다승(茶僧)인 성우스님의 배려에서였지만 처음 마음을 내는 입산자의 수업은 큰 절에서 철저하게 하는 것이 앞날을 기약할 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여기서 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 ‘견성見性’이니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득도식(得度式)을 앞두고 참선 수행승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가 방법만 있다면 “굳이 산에 눌러 앉아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나무를 가꾸며 선산(先山)에서 살기를 끊임없이 권유해 왔었던 터였으므로 그는 결국 하산하기로 결심이 섰다. 절에서 수행하는 것만이 수행일까, 절 밖에서의 수행도 수행으로서의 한 방식이 아닐까, 수행 자체가 무엇인가. 이런 저런 사색이 그의 등을 아래쪽으로 그냥 떠밀어 내린 것일 터이다. 설악산 눈만 내리는 막막한 절간에서 부목상자로 있던 한용운이 다른 스님 한분을 설득하여 세계여행을 시도했던, 그 절간으로부터의 출분이 박시인의 심경이었을지 모른다. 어떤 굽이, 어떤 마디를 감각했던 것은 아닐까.
박시인의 현실은 언제나 그의 뜻과 역으로 갔다.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 사업을 함께 시작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또 문득 회사 사장의 권유로 전무로 들어가 일을 했지만 돈으로 시작하여 돈으로 지는 하루하루가 그의 뜻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그는 원효암으로 올랐다. 원효암은 자비다대한 도량이요 모성이었다. 그동안 네가 뭘하고 있었으며, 무슨 얼굴로 이렇게 찾아왔는가 묻지 않았다. 그냥 바릿대에다 숟가락을 넣고 스님들의 눈 한번 맞추는 것이 ‘돌아온 탕자’의 귀환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경을 고랑 따라 가다가 산에서 생산되는 송이버섯을 수출하면 되겠다 싶어 구상을 하다가 몇 가지 난관에 부딪치게 되고, 그는 다시 자기 몸이 속세의 상징인 서울로 가고 있음을, 가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가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이 장면은 필자의 상상이다) 서울에서 판자촌 섭렵은 섭렵이므로 어려움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틀을 굶고 전화할 돈도 없어 명동까지 걸어 나갔다는 그의 후일담은 과녁을 찾지 못한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약속 같은 것을 발로 쓰는 일임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간호전문대학장으로 근무하는 마산으로 내려오게 되고 무슨 일 같은 것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드디어 진주로 돌아왔다. 진주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녔던, 골목과 이웃집과 비봉산과 남강이 흐르는 곳 아닌가. 그냥 흐르고 그냥 눈시울이 짝 붙는, 이런 생피와 같은, 어쩔 수 없는, 형제와 눈높이의 감나무와 기슭과 풀대가 솟아서 쭈빗거리고 있는 곳, 그러면서도 원효암처럼 기다렸다가 하이패스 없이도 받아주는 그런 곳이다.
그는 이때의 생활을 책읽기와 방랑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친구의 권고로 「여명」이라는 독서실을 내었다. 자율적인 독서실로 운영하여 도자기를 하나 내놓고 열람비를 거기에 스스로 넣도록 했다. 그러나 삼년 몇 개월을 버티다가 아끼던 이조백자잔도 내놓고 청담 큰스님의 글씨도 털어 내놓고 그리하여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독서실을 갓 차리고 있을 즈음, 1981년 그 무렵 그는 가좌동 캠퍼스로 정동주 시인과 짝을 지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초등 5년생으로 필자의 첫 앵글에 잡힌 지 21년만이었다.
그때 필자는 시창작 관련 저서 「우리시 짓는 법」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개요를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책에 힘이 있어 보입니다. 얼른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정동주와 하나로 화답해 주었었다. 이들이 ‘힘’이라고 말한 뒤에 책이 나왔을 때 오규원 시인은 “어째 이리 단호할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필자는 측면으로 전해 들었었다. 하루는 박시인이 그의 독서실로 필자를 초대해 주었다. 가서 들었던 이야기는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해 주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었다. 시를 쓰다니, 그런데 그는 이미 호서문학에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끝의 그에게서는 불가적 체취가 물씬 물씬 드러나고 있었고 차를 끓이는 솜씨가 붙어 있었고 찻잔이다 막사발이다 도자기다 하는 쪽으로 들어가서는 여러 갈래로 더듬어 들어가고 있었고, 이따금씩 의식의 파편들이 사금파리 쪽지처럼 빛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벌써 고향으로부터의 출분을 다시 준비하고 있었다. 까마득히 몰랐다. 그는 그의 갈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비된 출분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용단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의 8,9년의 행적은 필자에게는 빈 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서울로 고삐를 치고 갔다. 그러다가 저 무량의 산 그리매가 천년의 몸짓대로 나래를 치고 있는 팔공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세 번째 입산이었다. 산은 시작도 끝도 없고 출분과 깃들기의 경계도 없고 부끄러움도 다시 시작함도, 개회도 폐회도 따로 없는 누리고 젖어드는 ‘자연’이 있을 뿐이 아닌가. 이 때 그는 원효 스님의 저서와 기록들을 살펴보는 기회를 얻었다. 이를 원고 800매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원효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당나라로 유학 가던 비오는 밤길에 어떤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땅막이 아닌 오랜 무덤임을 알게 되고 심법(心法)을 크게 깨쳤다는 것 아닌가.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며 입당 유학의 뜻을 접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이 화두에서 박시인은 곰곰 머물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박시인은 또 다른 의미의 입산을 꿈꾸며 하산했다. 사천군 용현면 용치리 웃담으로 내려온 것은 “혼자 한 번 짬지게 살아 보겠다”는 지향이었다. 뒷날 들은 얘기인데 “삼동을 날 수 있는 쌀과 장작만 준비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더 바랄 게 없는” 그런 걸리적거리는 것 없는 수행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진리의 좁쌀들이 한 됫 박으로 쏟아지는 것을 보았을까. 별똥별처럼 굴러 떨어지는 시심들을 굴밤 줍듯이 주워 막사발에다 담아 두었던 것일까.
그런데, 이 시기에 지인이 수줍은 처녀 한 분을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시인은 이때 산을 들어 옮기는 영감 같은 것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예감이라도 좋고 빛살이라도 좋고 반지 둘레의 한 떨기의 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박시인의 출분과 입산과 시속의 가파른 능선을 아슬아슬 타고 내리던 길고도 먼 순례를 한 장으로 매듭지었다. 요지부동, 진주로 귀환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생애는 수면하(水面下)에서 수면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4.
진주로 귀환한 박시인은 이때부터 본격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보이게 된다. 1991년에 첫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출간하는데 지금까지 그의 순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 세계를 진주 땅바닥에 부는 바람맞이에 풀어 놓은 것이다. 불가적 선적 체현이 대종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9년 제2시집 「늪이고 노래며 사랑이던」을 내놓게 된다. 그 사이 그가 진주사람으로 성큼 들어서 있음을 바라보게 한다.
많이도 헝클어진 마음들
많이도 구정거려 논 남강물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저물녘 서장대에 홀로 앉아 귀 종기어 들어보면
부딪치는 쇳소리
외마디 비명, 까마귀 우짖는 소리
4백년 묵은 아우성……
나는 그날 성 안의 백성이오
그는 그날 왜장의 목울대를 겨누던 관군이오
나는 끓는 물 벼랑 아래 쏟아붓던 이름 없는 의병이라……
뭐라고 씨부렁거리 쌓노?
어제와 오늘, 버무려진 말씀 몇 줄금
벼랑 끝에 서성이고 있어
많이도 잃어버린 역사
많이도 게워 내고 한 줄금 남은 말씀의
씨와 날
이끼 낀 빗돌로 버티고 있어
-<진주성 어딘가에는>에서
따옴시는 화자가 진주성에 올라 느낀 감회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4백년 전의 비명과 아우성 소리를 듣고 있는 가운데 화자는 그때 그 성안의 백성이 되었다가 의병이 되고, 그(화자 밖의 사람들)는 왜장을 겨누던 관군이 되어 있다. 그런데 어제(당시)와 오늘(현재)은 벼랑 끝에 와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지나간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에 작용하는 것으로 씨와 날로서의 미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박시인의 의식은 역사와 현실이 겯고 트는 역사의식으로 살아나면서 현재 속에서의 동인을 얻게 된다.
조태일 시인이 진주에 와서 남강물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지은 시가 <논개양>이었다. 논개양은 지금도 물속에서 왜장을 껴안고 땀 뻘뻘 흘리고 있더라는 내용인데 역사를 흘러간 과거로 보지 않고 오늘의․ 한일관계까지로 자장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 눈여겨 볼 점이다. 박시인도 그런 자장 넓히기에 들어가 오늘 이 시점에서의 관계, 또는 실천적 지향의 일단을 피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 그는 어느 편이나 하면 몸으로 씨를 쓰는 쪽이다. 4백 년 전의 혼들을 불러 함께 난장을 이루는 자리는 어디에서나 몸으로 들어가 추는 춤일 수밖에 없다. 가까이는 일제라는 잔혹한 시대를 현재형으로 감내하며 맞받아치는 것은 정신도 정신이거니와 그 정신을 데리고 다니는 몸일 수밖에 없다. 그가 하는 시민운동은 다 그 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운동으로 들어가 리듬에 드는 것은 몸이다.
만해 한용운의 뜨거운 피는 승방에서 목탁만 치고 있기에는 넘치도록 뜨거웠다. 고은 시인이 지적했던 것처럼 만해는 일제라는 타도의 대상이 있으므로 만해는 만해 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시인도 시대와 역사의 현장이 컨테이너처럼 버티고 있는 데서 박시인 일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다. 그의 몸은 콘테이너가 버텨 있는 데서 비로소 깃발로 펄럭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 스러지는 것이
때로 마지막이라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온몸으로
첨으로 알겠네
아 이렇게 곱게 저물 수만 있다면
마침내 죽음도 서럽지만 않겠네
-<미황사에서> 전문
미황사 저녁 노을을 보면서 몸으로 맞닥뜨리는 노을을 노래하고 있다. 절창이다. “이렇게 곱게 저물 수만 있다면/ 마침내 죽음도 서럽지만 않겠네.”라는 끝 대목에 이르러 독자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게 된다. 무엇으로 곱게 저물 수 있겠는가. 역사 앞에서 시대 앞에서 사리지 않고 떳떳이 가는 길이 고운 길일 것이다. 주체정신으로 깨어있고, 호의정신으로 켕겨있고, 평등정신으로 무장해 있을 때, 그럴 때 가는 길이 고운 길일 것이다.
5.
앞에서 말한 대로 박노정 시인은 진주의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숱한 현안들에 앞장서 왔다. 그중 하나를 꺼집어 내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2005년 그는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진출 저지를 위한 시민운동 본부 공동대표, 친일잔재 청산 시민행동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10 여 년 동안 끌어온 의기사(義妓祠) 논개영정 폐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순국 여인 논개상을 친일화가(김은호)가 그린데 대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갖가지 토론과 논의를 거치면서 반드시 뜯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보고 이의 실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었다. 10년 세월이 흘러도 시정의 전망이 없어 보이자 상기단체는 2005년 5월 단순 미인도일 뿐만 아니라 고증도 거치지 않은 이 작품을 강제로 철거했다. 물론 박노정 대표도 선봉에 서서 이룬 거사였다. 이 사건으로 박시인, 하정우 민주노동당 진주시당위원장, 유재수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정유근 공무원 노조 진주지부장 네 사람은 모두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각각 500만원의 벌금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박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법원의 판결은 존중하지만 재판부가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모든 일에는 동기와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10년 동안이나 논란이 되어 있는 문제를 단순히 법의 잣대로만 가지고 재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원칙적으로는 네 사람 모두 벌금 대신 노역장에 들어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하고 말 같지 않은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시민들도 시민을 대신하여 거사한 것을 거사 당사자들이 벌금형을 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십시일반 성금을 내어 3천만원 수준의 모금이 되었었다. 그러나 독도수호 시민운동 본부는 시민의 뜻과 본부의 뜻을 절충하여 10일 간 노역장에 들어가 있기로 결정을 보았다.
노역이 끝나 이들이 풀려나는 날에 필자는 진주신문에다 다음과 같은 시와 시작노트를 기고했다.
J여고 운동장을 돌다가
-노역장에 갔다 온 분들에게
밤,
J여고 운동장을 돌다가 조국을 생각한다
조국이 없던 시절
조국을 그리면서 세운 학교 운동장
그 운동장을 도는데
조국이 없던 하늘처럼 하늘이 허전하다
동포 여러분, 이렇게 외치면
반창고처럼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우울과 허전,
떨어져 나가게 될까
오늘
외세와 함께 조국을 찍던 흉한 손, 손 끝으로 그린 논개의
영정
그것 떼내는 것이
나라 지키는 마음이라 여겼던 이들이
노역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다
찾아낸 조국의 법에 묶였다가 돌아오는 날이다
조국은 어디 있는가
조국을 사랑으로만 지고 가려는 이들에게
나라는 사랑에 빚지고도, 사랑을 품어 도닥거려 줄
품 한 뼘이 없다
밤,
J여고 운동장을 돌다가 동포 여러분
안경을 벗었다 끼며
조국을 생각한다.
<시작 노트>
“친일화가가 그린 논개 영정을 떼어내자고 10 여 년 간 부르짖던 이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장해 왔으나 무위로 그치자 행동에 들어갔었다. 왜 그런 결과가 왔는가.
진주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임진왜란 때 계사년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고 왜군들은 7만 진주성 성민들을 다 죽였다. 우리들 삶의 거처가 길길이 찢기고 거덜 난 곳이다. 이런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진주시민들은 적어도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하지 않은 지역의 지역민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오기가 있어야 하고 눈을 부릅 떠 있어야 하고 뭔가 죽어간 성민들에 대한 예의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죽은 성민들에 대한 예의는 무엇인가. 그들을 잊지 않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일 것이다. 진주는 그런 예의를 지켜낸 곳이다. 삼일만세 운동 때만해도 걸인도 기생도 농민도 부랑아도 다 일어나 외쳤던 곳이다.
그런 사랑,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조국이 있어 표창하고 조국이 있어 현양해 주어야 하리라. 실정법을 어겼다고 벌을 준 것은 좋다. 법이 있다고 하니까……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착하고 대견한 마음 때문에 가훈을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럴 때 아버지는 가훈을 어긴 부분에 대해 지적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매로 다스릴 것인지 지적하는 것으로만 그칠 것인지는 아버지 사랑의 방법에 속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양심이 시킨 대로 발심한 것에 대해 칭찬해 주며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치지 않았구나 하고 한없는 자애로 껴안아 줄 것이다. 위로해 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가? 조국이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 물어야 할 일이다.“
좀 긴 인용이 되었지만 박시인을 후원하는 입장에 서 있는 필자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보태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
6.
박시인은 확실히 필자가 갖고 있지 않는 세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실천이고 하나는 불가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막사발류의 문화적 교양이다. 이 세 가지는 과시 백과사전적 수준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면 박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된다. 박시인은 스스로를 말하는 시를 썼다. <자화상>이다.
최고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떠돌이 백수건달로
세상은 견뎌 볼 만하다고
그럭 저럭 살아볼 만하다고
성공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끝도 시작도 없이
가랑잎처럼 정처없이
다만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
-<자화상>전문
박노정 시인이 진주사람인 한 ‘떠돌이 백수건달’은 많을수록 좋고 ‘가랑잎’은 우수수 천지에 떨어져 휘날리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서 ‘퍼뜩 정신’에 가 닿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진주 들머리 어디짬 ‘진주정신 연수원’을 한 채 세워놓고 박시인을 그 연수원장으로 초빙하는 것이다. 진주 바깥에서 진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일단 연수원에서 내려 소정의 연수를 받고 수료증을 받은 다음 진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떨까? 대통령 후보도 이 수료증을 받고 진주로 들어가 유세를 하고 국회의원, 도지사도 시장도 도의원도 시의원도, 또 새로 오는 기관장도 어김없이 이 수료증을 받고 진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진주는 쓰촨성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수많은 희생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임란 때 전체시민이 몽땅 죽어간 일대 변고에 대해서는 잘 알아봐야 역사 한 줄에 불과하다. 그 역사 한 줄을 끌고 박시인은 오늘도 땀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다. 마음이 이끌리는 자는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사서 그의 손에 건네 주기를…… 촛불 하나 구입해 건네주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