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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우리 5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은 오늘도 서울 얘기를 곁들여 6교시 수업을 마치면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차렷, 경례, 하고 외치는 구령에 따라 전 학급이 ‘감사합니다’ 하고 복창하면서 책상에 앉은 채 윗몸을 굽히는 인사를 하자 이를 받으며 가벼이 고개를 숙이는 맞절을 했다. 그러고는 복도로 나가다 나를 돌아다보고서는 이따가 교무실로 좀 오라고 했다. 급장인 내게 무슨 할 말이 계신가? 별로 잘못한 일은 없을 텐데? 아무튼 나쁜 일은 아니겠지.
별것 아니지만 급장에게는 책임이 많다. 오늘 청소 당번들은 청소 잘 하고 이따가 내게 검사 맡고 집에 가라고 일러 놓고는 다른 건물에 있는 교무실을 찾아갔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그 본동 건물의 긴 나무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천장과 만나는 복도의 흰 회벽 높이 사진 액자들이 죽 걸려 있다. 교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더 빛이 바래고 사람 숫자가 적은 오랜 사진들이다. 그 속에는 이 학교의 3회 졸업생인 우리 할아버지가 두루마기에 학생 모자를 쓰고 흑백 단체사진 속에 서 있다. 카이젤 수염에 긴 칼을 짚은 군복 차림의 일본 선생 두엇이 근엄하게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을 서너 장 건너뛰면 가르마를 탄 치마저고리의 어린 여학생도 몇 명 앞자리 끝 쪽에 앉아 있기 시작한다. 20회인 우리 아버지 대에 오면 두루마기 숫자는 많이 줄고 대부분 검은 학생복 차림들인데 이미 빽빽이 사람이 많아져서 어느 얼굴이 아버지인지 잘 알아보기 힘들다.
아무튼 오늘은 이런 사진들을 꼼꼼히 쳐다볼 여유가 없다. 무슨 일이지? 그보다도 이 깨끗하고 좀 어슴푸레한 긴 복도로 들어서는 것은 늘 긴장 되고 무거운 느낌을 주며 조심스럽다. 알지 못할 두려운 어른들의 세계, 관청과 조직, 상패와 깃발이 내비치듯 권위와 상벌이 연결 되는 불편하고도 위험한 어떤 피할 수 없는 버거운 세계에 닿아 있는 길이다.
교무실 문을 조심스레 밀어 안을 살피며 들어서려는데 우리 선생님이 먼저 알고 나를 맞이하여 함께 도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천천히, 수많은 졸업생들이 내려다보는 복도를 되돌아 걸어 나오면서 나직이 이야기를 하신다.
- 너 집에 가서 말해 봤나? 보내 주신다더나?
- 예…, 그런데….
-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마라. 선생님이 특별히 급장인 니한테는 600원만 받고 다 받은 걸로 할 테니 수학여행 가도록 해라. 알았제?
- 예….
어쩌면 나도 끼어 서울 구경 갈 수도 있겠다 싶어 집에 와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더니 호롱불 곁에서 양말을 깁던 손을 멈추고 좀 뜸을 들이던 엄마가 아버지를 건너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 선생님이 저래 나오는데 어예 안 보내겠능교. 고맙구로…. 갔다 와라, 서울. 그런데 야를 뭐로 입혀 보내노…?
이리하여 나도 가까스로 다른 아이들이 950 원을 내고 가는 5박6일의 서울 수학여행 팀에 묻어가게 되었는데 두어 달 전부터 쉬는 시간이든 수업 시간이든 틈만 나면 서울 얘기로 아이들을 꼬시던 선생님도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그 당시 시골에는 더욱 만연해 있던 60년대의 가난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일흔 명이 넘는 반 아이들 중에 마지막까지 긁어모은 참가자는 나까지 합해 모두 열아홉 명이다. 다른 반들도 사정은 엇비슷해서 5학년은 1반부터 6반까지 있었으니까 약 400명 남짓한 아이들 중에 백 이삼십 명 만이 십여 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서울 수학 여행단을 이루어서 서울 구경이란 필생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경상도 한 구석에 쳐박힌 시골 아이들 중에 천릿길 서울 구경을 미리 해 놓은 아이는 아마도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며칠 후 선생님은 또 나를 불러 무슨 얘기 끝에 우리 반에 누구누구는 잘 하면 갈 수 있겠는데, 갔으면 좋겠는데, 다른 반에 비해 너무 숫자도 적고 말이야…,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있던 내가 마침 잊고 갈 뻔했던 우산을 가지러 교실에 들어서는데 무슨 일인지 방과 후에까지 머뭇머뭇 교실에 홀로 남아 있던 2분단 부분단장 점순이를 발견하고는 왜 남아 있느냐고, 무슨 일이냐고 그냥 말하려다 급장의 의무감에서 고쳐 물었다.
- 니는 서울 가나?
- 안 간다.
- 와?
- 못 간다.
그러더니 홱 얼굴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좀 낯선 표정을 짓는가 하더니, 그보다 머슴애 계집애 내외도 하지 않고 마치 친누이처럼 성을 뺀 내 이름을 살갑게 부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 원익아, 니 서울 갔다와 얘기 마이 해 두가, 으예?
출발 날짜는 하루하루 더디게 다가오면서도 얼떨결에 지나갔는데 그만큼 내 어린 날의 날짜 수도 좁혀 들어간 셈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기다린 그 열흘 남짓 동안이 마치 압축 된 컴퓨터 파일 같아서 내 기억의 저장소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도 같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고스란히 잘 펼쳐 풀어 읽어낼 소프트웨어는 완벽치가 않다. 출발하던 날 아침이 생각난다.
새벽인지 밤중인지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혹시 시간을 놓칠까 봐 잘 수가 없었단다. 그때 우리 집엔 마침 시계가 없었다. 하나 뿐인 아버지의 팔목시계는 밥을 주다가 고장이 난 게 얼마 전이라는데 아무튼 그 즈음 우리 식구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고무줄로 칭칭 건전지를 묶은 헌 라디오가 있었지만 한밤중에 이리저리 톱니바퀴를 돌리다 보면 멀리 북한에서 흘려보내는 또박또박하고 괴이한 난수표 읽기 따위가 잡히는 외에 다른 방송들은 잘 들리지도 않았고 그런 밤중에 일부러 라디오를 틀 일도 없었다. 아무튼 멀리서 닭이 울었단다. 늦는 것보단 나으니 지금 학교로 가잔다.
- 아침 여섯시까지 모이라고 했는데?
보따리 하나를 들고 엄마와 같이 깜깜한 들길을 걸었다. 밤에 가는 학교, 기분이 색달랐다. 우리가 없는 밤중엔 저 유리창 속의 교실들, 변소, 운동장엔 무엇이 있을까? 몽달귀신들? 도깨비들? 이무기들? 그럴 지도 모른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철문인 교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다. 운동장에도 어디에도 아무런 기척이 없어 보인다. 학교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한참 돌아가니 나지막한 숙직실 지붕이 보이고 그 가까이에 드나드는 뒷문이 있다. 어머니는 나더러 숙직실에 가서 있으면 된다고 뒷문을 따서 나를 들여보내고는 울타리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잘 갔다 오라는 조분조분한 긴 말도 없이 어둠 속에서 손짓만 하고서는.
숙직실에 가서 미닫이를 여니 안에서 자던 젊은 선생님 둘이 차례로 깨어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며 조금 놀란 얼굴로 묻는다.
- 지금이 멫 시고? 새벽 두 시 아이가! 니 서울 되게 가고 접은 모양이네! 한숨 더 자거라.
시계가 없어서 너무 일찍 왔다고 할 수도 없고…, 다시 백열등을 끈 방이지만 감히 선생님들 옆에 누워 잠들 수도 없었다. 담배떨이며 장기판이며 검은색 거풀의 숙직 장부 철들이 구석에 놓인 옆에 쪼그리고 있다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는데 이윽고 우리 반 동수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들어서면서 동이 트고 금방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있으니 대단하게도 우리들만을 위한 큰 대절 버스가, 그것도 똑 같이 생긴 세 대가 차례로 교문을 통해 들어왔다.
버스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단 앞에 나란히 멈추어 선 채 부릉부릉 새벽 공기 속에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시동을 끄지 않고 우리가 다 타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스런 인원점검과 주의사항 전달이 끝났다. 아이들을 데려온 학부모들이 제 아이들에게 하는 마지막 당부며 눈맞춤, 손짓들을 뒤로 하고서는 버스는 드디어 운동장을 출발하여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지나 우리 학교, 아직 잠이 덜 깬 읍내를 뒤로 하고서는 자갈길의 신작로를 달려 포항으로 넘어가는 소텃재를 기어 올라갔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골짜기 아래로 크지 않은 도회지의 끝자락이 보이고 길거리며 지붕 위엔 드문드문 여태 가로등이 켜져 있는데 저 멀리 바다 쪽으로는 시커먼 구름층이 가로로 수평선을 뒤덮고 있었고 그 구름 위로 말갛게 하늘이 개고 있었다.
우리는 포항의 기차역에서 내렸다. 우리 아버지가 6.25 때 어쩌다 혼자 떨어져서 인민군에게 잡혔다가 갖은 핑계로 풀려났다는 곳, 그리고 곧바로 다시 국군에 잡혀 군인들과 함께 찝차를 타고 버려진 쌀가마니를 실어 날랐다던 그 기차역이다. 전에 그런 얘기를 들으며 여기 와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기차에 올라타기는 처음이다. 이렇게 긴 차가 정말 움직일까? 그래서 서울까지 그대로 가는 걸까? 가다가 혹시 중간이 뚝 잘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길 잃은 아이가 되어 집에도 영영 못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움도 잠깐, 우리는 신나게 선생님을 따라 찻간으로 들어가 녹색 비로드가 덮인 마주보는 긴 의자에 바삐 자리를 잡고서는 길고 높은 선반에 부산하게 짐을 올려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차는 언제 움직이는 거야? 김 뿜는 소리만 칙칙 내고 가끔 덜커덩거리기만 하고….
조금 있다 도시락이 한 뭉텅이씩 찻간으로 올려졌고 우리는 이를 하나씩 나누어 받아 젓가락질을 했다. 얇은 성냥갑 같은 나뭇결 도시락에 쌀밥과 단무지, 찐 콩 같은 것이 들어 있었는데 양이 많지 않은 쌀밥은 그나마 상당수의 밥풀이 곽에 눌어붙어서 아깝지만 일일이 떼먹기가 어려웠다. 집에서처럼 밥풀 하나라도 뜯어 챙겨 먹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것은 그냥 버리기도 하는, 어쩌면 내게는 허풍선이 같은 실속 없는 세상에 나아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첫날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 제 몸을 앞뒤로 덜컹거리며 기지개를 켜던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드디어 몸을 움직여 출발했다. 경주를 거쳐 대구로 향하는 노선이었다. 생각난다. 몇 개의 지명들, 건천, 하양, 반야월…. 때는 늦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이어지는 사과밭이며 길고 짧은 굴들, 다리와 산모롱이들…. 기차는 역마다 서고 간이역마다 섰다. 어디서나 낯익으면서도 조금 낯설기도 한 모양의 마을들, 산굽이들, 시내와 논밭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 그 많은 풍경을 스친 끝에 오후 늦게야 우리 눈에 휘황찬란하면서도 엄청나 보이는 귀에 익은 도시, 대구에 도착했다. 혹시 가는 중간에 경주에서 내렸는지 아니면 역에서 한참을 지체했는지는 여러 기억이 뒤섞이고 헷갈려 분명치가 않다.
아무튼 우리는 대구에 압도당했다. 우리가 당도한 기차역에는 셀 수 없어 보이는 여러 가닥의 철길이 이리저리 엇갈려 놓여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었고 그 모두를 단번에 가로지르는 높은 육교의 계단을 올라가는 선생님을 사람들 틈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는 기를 쓰고 바짝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그때 단체로 대구의 방송국을 찾아간 것 같다. 아마도 라디오 방송국이었겠지. 텔레비전은 아직 몰랐을 때니까. 몇 개의 방을, 강당 같은 것과 유리창 너머로 방송실 같은 것을 엿본 것 같지만 그보다도 내 기억에 그 건물 현관의 붉고 굵은 벽돌 기둥이며 양쪽으로 대칭을 이뤄 휘감은 계단이며 벽이며, 어디선가 담쟁이 넝쿨이 덮인 것도 본 것 같은데 혹시 다른 건물을 본 잔영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고 모퉁이의 간판들이며 네온사인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몇 군데 약국들이 눈에 띄었고 동그라미 속의 붉은 한글체 ‘약’이라는 창문의 네온사인이 더욱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약을 사 먹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방송국을 비롯한 몇 군데를 다닌 것 같은데 이윽고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우리는 그만 넋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그건 한길 양편에 늘어선 고층건물들의 지붕이며 외벽에 본격적으로 번쩍이며 움직이는 휘황한 네온사인들 때문이었다. 물결처럼 지나가며 밝았다 어두워지는 것, 바둑판처럼 나뉘어 오색으로 반짝이며 정신없이 바뀌는 것, 재봉틀은 바느질을 하고 돛배는 떠나가며 야자수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한글과 한자, 영문자로 색깔을 바꾸며 틈을 놓치지 않고 허공 속에서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 이름을 알리는 상표들, 상호들…. 우리는 선생님이 만약 재촉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쳐다보느라 길거리에서 잘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맨 처음의 인상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 후에 곧바로 더 큰 도시인 서울을 다녀왔으면서도 대구만한 도시가 없다고까지, 심지어 어떤 아이는 대구가 서울보다 크고 좋다고까지 당연히 믿어 버리도록 뇌리에 잘못 박히게 되었다. 무릇 처음이란, 날것이란 이토록 생생하게 새겨지는 것인가, 많은 아이들이 말하자면 첫 도시 대구에서 진이 다 빠지고 넋이 나가 버린 셈이다.
기억은 좀 어렴풋하지만 우리는 대구에서 1박을 하지 않고 그 날 저녁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것 같다. 시간과 경비를 아끼기 위하여 기찻간에서 잠을 자도록 한 것일 테지. 얼마를 지나서 바깥은 점점 짙어지는 어둠인데 기차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이 지금 왜관을 지나 낙동강 철교 위를 가고 있다고 했다. 왜관? 참 이상한 이름도 있군. 왜놈들이 사나? 하지만 기차는 그 따위 의문엔 상관 않고 밤의 속으로 끊임없이 내쳐 달리며 꽤액 꽥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나는 거의 내내 창밖을, 펼쳐지는 새 세상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열심히 바깥을 보아도 내 작은 얼굴이 희미하게 되비치는 유리 너머로 이제 제대로 식별 되는 것은 드물고 그 대신 드문드문, 가까이 멀리 있는 무슨 전등 같은 불빛들 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줄 지어 있거나 너댓이, 아니면 여럿이 떼지어 모여 있거나 외따로 떠있는 그 불빛들은 내게로 조금 다가왔다가는 천천히 물러서다 이윽고 사라져 가고 멀리서 다시 새로운 불빛들이 피어나 다가왔다. 우리의 여행이란 이러한 불빛들과의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만남이며 아슴푸레하게, 그리고 결국 영원히, 멀리 헤어짐이었다. 그 저녁을 밝히던 여러 불빛의 새암들, 지금은 기억의 창고 속에서, 아직은 여리게 전류가 남아 있는 손전등의 전구처럼 얼마간의 밝음을 내비칠 뿐, 실제의 공간에서는 다들 오래 전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하나하나 풀이 죽고 꺼져가 이제는 아마도 말끔히 치워져 낯모르는 새로움으로 갈아 끼워져 버린 것들이겠지.
마주보는 우리 의자의 칸에서 선생님이 좁게 끼어 앉은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평소의 선생님과는 좀 달리 가벼운 농담도 하고 이 아이 저 아이와 친구처럼 친척처럼 주고받는 얘기에 나는 왠지 잘 끼어들 기회가 없어서 듣기만 하다가 의자의 등받이와 차갑고 딱딱한 창이 만나는 구석에 고개를 젖혀 박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척 했다. 교실에서는 거의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는데 여기서는 쟤들이 선생님과 더 친하구나. 계집애들도 다가와 선생님께 더 스스럼없이 살갑게 대한다. 몰랐는데? 나는 저렇게는 잘 못하는데 계집애들은 집에서도 저럴까?
그러는데 또 한 차례 복잡한 틈을 비집고 먹을 것을 파는 밀수레가 지나간다. 선생님이 인심을 써서 뭘 사시는구나. 지금쯤 우연히 깨는 척을 해도 될까? 하나 받아먹으려면…. 그런데 선생님이 과자며 마실 것을 사서 나누어 주는 것 같은데 나를 구태여 깨우지 말라고 그런다. 자는 게 낫다고…. 그러니 더 깰 수가 없네. 작은 것이지만 이렇듯 기회란 내 손에 차마 안 잡힐 수가 있는 것이고…, 문득 쓸쓸해지고 적막해지는 군중 속의 외톨이, 나 홀로 실려 떠내려가야 하는 객지의 밤이구먼.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건 그저 그 후로 내 인생에 수많이 이어진, 자그마한 일로 갈림길에서 떠나가거나 반쯤은 스스로 기회를 놓친 그렇고 그런 좀 서운하고 꽤나 적막한 밤들의 기억에 남는 맛뵈기였을 뿐이었다고 여겨지는구먼.
아무러하든 이러한 명멸과 규칙적인 덜컹거림, 그리고 조금은 야릇한 냄새 속에서 밤은 깊어갔다. 가물가물하는 졸림과 불편과 으스스함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쟁여 가는 그 나마의 따스함과 아늑함, 이를 생각없이 흩뜨리는 어수선과 낯섦이 버물러지며 시간은 흘렀고 그에 따라 낯선 정거장에서 사람들은 주섬주섬 제 몫의 인생을 등에 지고 손에 들고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뭉터기로 잘라 넣으며 출입구를 오르고 내렸다.
이러한 밤이 길게 이어지니 한참 동안은 좀 저 건너편에 있는 어떤 다른 세상을 거치고 있지 않았나 하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좀 더 큰 덜컹거림에 정신이 들어 내다보니 밝아 오는 새벽의 훤한 빛이 넓게 물에 비치는 속에서 철교의 굵은 세로대들이 창밖을 재빨리 스쳐 지나갔다. 한강이다! 직감이었다. 뭐든지 많이 흘러넘치거나 쏟아져 있으면 우리 엄마나 누나나 걸핏하면 그렇게 빗대어 일컫던 바로 그 한강이란다. 서울에 다 왔단다. 내릴 준비를 하란다. 그런데 바로 내린다더니 성질 급한 놈 숨넘어가게 길기도 하다. 철교를 통과하여 강 하나를 지나 건너는데도 한참이거니와 거기서 마지막 종점인 서울역까지는 또 얼마를 더 가고 있는 건가. 한강이, 서울이, 우리나라가 크긴 크구나!
그 후의 서울 이야기는 아무래도 짧게 줄여야겠다. 점순이가 얘기 많이 해 달라고 애틋이 남몰래 부탁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기야 내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거짓말 조금 보태 한 해 내내 서울 얘기를 했다. 주로 열 살 많은 우리 누나한테 많이 했지만. 누나는 내가 얘기를 재미있게 잘 한다면서 시키고 또 시키고, 나는 시키면 마다 않고 매번 신나게 지껄여댔다.
생각난다. 우리는 긴장하여 서울역에 내려 선생님의 골덴 양복 뒷자락을 붙잡고 전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한참 걷기도 하여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 어느 여관으로 갔다. 중앙청이 비스듬히 보이는 이층짜린데 이름이 증평여관이었다. 발음도 어려운 이상한 이름이라고 했더니 증평이라는 충청도 땅이 있다고 했다.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방에는, 이웃 여관에는 말씨가 엇지고 나이가 층이 지는 다른 지방 아이들이 들었고 중고등 학생들과 여학교의 학생들도 있었으며 이들과 괜히 조금 시비가 일어 패싸움이 날 뻔 하자 인솔 선생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주의를 들었으며…. 그런데 그날 저녁 한둘만 남고 선생님들이 한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골목에는 아이스케이크가 아닌 처음 보는 고급스런 아이스 하드 장수가 통을 들고 팔러 왔으며, 눈에 대고 돌려가며 여러 경치 사진을 보는 만화경 같은 것을 보여 주고 돈 받는 중년의 장사꾼 아저씨….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여관 골목만을 보건대도 서울은 확실히 우리 사는 동네보다 더 크고 복잡하고 야하기도 하며 빠듯하기도 했다. 음식으로는 큰 접시에 잡채가 자주 나와 금방 없어졌고 짐가방이며 신발들은 좁은 복도에 어지러웠으며 세면대는 비좁고 여관 가득 발고랑내가 풍겼다. 내가 중학생이 됐을 때 사회 시간에 들은 얘기가 서울 인구 340만이었으니 이 때는 아직 300만이 채 안 되었을 텐데도 서울이란 데가 우리 촌놈들한테는 꽤나 어지럽고 헷갈리며 빡빡해 보였다.
그 날 낮부터 본격적으로 많이 걸었던 생각이 난다. 중앙청 앞으로, 비원으로, 미도파 백화점으로. 경회루 앞에서 반별로 단체사진을 찍었으며 창경원으로, 탑골공원으로, 남산으로…. 케이블카를 탔는데 흰 장갑을 끼고 소년단 모자를 썼으며 빨간 제복을 입은 천사 같은 자그마한 안내양이 우리더러 교가를 부르라며 함께 노래를 시키고 세련된 서울 말씨로 어디에서 왔어요? 하고 아이인 우리들에게도 일일이 높임말로 물었다. 뻘쭉하게 잘 대답을 안 하니 재차 물었다. 여자도 참 말을 잘 하네? 전차에서도 버스 간에서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자꾸 묻기에 진짜 고향, 우리 학교가 있는 읍의 이름을 댔지만 아무도 어딘지를 몰랐지 않나! 그래서 포항이랬다가 대구랬다가 좀 더 알만한 이름을 대며 이리저리 대답하기에 며칠 사이에 이골이 났는데 그 사이 조금 주눅이 풀린 어느 놈이 이번에는 불쑥 싱겁게 받아쳤다.
- 정펑여관요! 정펑서 와서요!
붐비는 전찻간에 앉은 곱게 쪽을 진 아주머니가 보따리를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한사코 거부하고 껴안고 있으니까 그 아주머니가 왜 그러냐고 점잖은 말씨로 거듭 재촉하며 물었다. 마침내 내가 대답했다.
- 서울서는 조심하라꼬, 깍쟁이가 많다꼬, 눈 뜨고 코 비이 간다 카데요!
그 말에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다시 낮게 타이르며 혀를 찼다.
- 안 그래요, 쯧쯧…. 그런 곳 아니야, 참 큰일이네….
더 높고 좋은 빌딩도 많았는데 하필 열 두세 층짜리 대한항공 빌딩 얘기만 했느냐고 여러 해 후에 서울에서 살게 된 누나에게 나중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기억이란 게 꼭 순서대로 크기대로만은 안 되지 않는가! 다른 것 다 두고 왜 이런 기억은 바로 조금 전 눈앞에 본 일 같은지. 밤에 전차를 타는데 지붕 위에 뻗은 전깃줄에서 대장간에서 부싯돌을 돌려 칼을 갈 때처럼 번쩍번쩍 푸르고 붉은 불줄기가 튀는 것 하며 천장에 매달린 동그란 손잡이들, 바깥벽에 크게 그려진 악수하는 두 손과 독수리며 별 따위가 실타래처럼 뭉쳐진 미국 국기의 휘장. 전차가 미국 것이랬나? 박물관인지 미술관에서 본 검고 딱딱한 나체상들. 어느 벽 앞에서 선생님은 우리더러 유난히 빨리 지나가라고 했는데 나중 다른 애가 이야기하길 그때 선생님 등 뒤 벽에 발가벗은 여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했다. 자기는 봤다고. 서울에서는 여자가 발가벗고 사진을 찍기도 하나?
돌아오는 기차도 역마다 서는 완행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어떤 고비를 넘어 달라진 아이들 같았는지 아니면 조금 심드렁해진 건지 특별한 인상이나 기억은 없다. 아무튼 우리는 서울에 갔다온 사람들이 되어 실려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올라갈 때와는 완전 다르지. 살아 있는 역사와 현장의 증인이랄까, 적어도 동네 조무래기들한테는 뭐든지 내게 다 물어 봐, 자신있어, 하는 일종의 이런 기분이랄까 상태였겠지.
그런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없이 서울 얘기를 했으면서도 정작 점순이에게는 한 번도 기회가 없었다. 수학여행 못 간 같은 반의 삼분의 이가 넘는 많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이 한두 번 쯤은 급장인 나를 시켜서라도 앞에 나가서 얘기를 하든 뭐든 시킬 법도 한데 그런 일도 없었고 선생님도 더 이상 서울 이야기는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애와는 내가 특별히 사사로이 마주칠 기회도 이상하게 더 없었고 말을 해 주려고 내가 일부러 기회를 만들 생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애꿎은 일이 생겨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왜냐면 그 후 어느 날엔가 선생님이 나 들으라고 남자는, 무엇을 맡은 사람은 무엇보다 통솔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사단이 난 셈이다.
선생님 말씀은 요즘 학급 통제가 좀 잘 안 되어 맘에 안 찬다는 말씀이렷다! 내가 봐도, 좀 속상하지만 그건 사실 잘 보신 것이다. 애들이 참 말을 안 듣고 선생님만 눈에 안 보이면 제멋대로들 하려 한다. 이건 엉망이고 개판이라서 고쳐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어느덧 나도 선생님의 군대 얘기에서 들었듯이 통제가 가장 멋있다고, 말 한마디에 착착 돌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고 세뇌가 돼 있었나 보다. 그런데다 내가 누구처럼 애들에게 뭘 사 주고 먹여 가면서 달래고 윽박지를 형편은 못 되고…, 더군다나 나는 몸도 작고 따라서 힘도 싸움도 별로고, 공부시간에 좀 잘 나선다는 것 밖에는…, 한심한 생각이 들고 짜증이 났다. 통솔력? 좀 어렵고 낯선 말이다. 선생님도 자주 쓰지는 않는 말이다. 그건 아이들을 복종시켜 따르게 만드는 것이란다. 그런데 통솔이 말로만 되나? 요즘은 계집애들까지 고분고분 않고 기어오르기도 하는데…, 자존심 상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안 되면 깡으로 하는 거지. 꺾어야 올라서고 무서워서 따르는 거지…, 과감하게.
이런 생각에 젖어 좀 앙앙불락해서 교실을 들어서는데 잘못 된 시간에 잘못 된 장소라고, 마침 청소 당번인 2분단 계집애들이 하라는 청소는 안 하고 내 책상이며 주위에 방자하게 걸터앉아 만화책 같은 것을 함께 고개 쳐박아 들여다보며 히히닥거리고 있다. 게다가 내 책보도 바닥에 떨어져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들 나를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내가 발끈해서 선생님이 쓰는 긴 막대기를 잡아 책상을 내리쳤다. 아이들이 놀라서 흩어졌는데 부분단장인 점순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피하지도 않고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다짜고짜 다가가 세차게 뺨을 올려붙였다. 충격을 받아 발갛게 달아 오른 둥근 얼굴이 그대로 미련하게 내 눈앞에 멈추어 있다. 한 번 더 뺨을 쳤다.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이 점순이는 얼굴을 감싸고 울면서 뛰쳐나갔다.
이것이 내 평생 여자의 뺨을 친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인데 지금 나이 들어 굳어져 가는 내 오른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손바닥으로, 물속의 빙산처럼 물려받은 내 거대한 포악을 차가운 바닷물 속에 담가둔 채, 아리땁고 여린 다른 목숨에게 그 이상의 험하고 맹랑한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이 때도록 이것이 이 한 몸의 일부로 달려 이럭저럭 건사 된 것이 다 누구의 배려일까? 희생일까? 용서일까? 망각일까? 사랑일까?
이윽고 나의 서울 갔던 얘기도 좀 수그러들 때 쯤 해서 방학을 하고 학기가 끝나고 국민학교의 최고 학년인 6학년이 되는 반 편성이 있는 날인데 또 우리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5학년 선생님이 그대로 다음 해의 6학년 담임을 맡게 되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고 그건 중학교 입시 때문이다. 내쳐 아이들을 잘 지도하여 좋은 진학 성적을 내야 하기 때문이란다.
- 너는 내가 그대로 데려갈 텐데 다른 선생님들이 신경 쓰인다. 그러니까 이따가 운동장에서 반 편성할 때 너는 꽃밭에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우리 반에 슬그머니 묻어 들어와라. 내가 미리 전체 호명 명단에서 슬쩍 너를 빼놨다.
이렇게 나를 아끼고 써먹으려는 우리 선생님의 분부대로 나는 꽃밭에 엉긴 마른 코스모스 꽃대 뒤에 몸을 숨겼다. 아이들은 마이크로 제 이름이 불리는 대로 새로 정해진 6학년 담임선생님의 앞으로 뛰어가거나 서먹서먹 다가가 자기들끼리 따로 줄을 지어 섰다. 나름대로의 운명의 갈림길이 되니 흥분과 탄식이 교차하여 왁자지껄하면서도 경건했다. 문득 점순이도 우리 반이 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벌써 이름이 불렸나? 어디 있나? 빽빽이 모여 앉은 아이들, 어지러이 움직이는 아이들이 꽃대 사이로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점순이는 아무 반에도 들지 않고 그냥 멀리 간다는 것이다. 전학이란다. 새 교실에서 6학년이 되어 새 자리에 앉았는데 노는 시간에 점순이가 학교에 전학 서류 떼러 왔다면서 우리 선생님에게 인사를 왔다. 그리고 나가다 말고 복도에서 머뭇거리는 내게로 와서 말했다. 자기는 내일 서울 간다고. 가서 이모하고 산다고. 서울 이야기 못 들었지만 괜찮다고. 뺨 맞은 것도 되게 미웠지만 이젠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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