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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요…
그 날 3월15일은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글쎄 너무 좋은 날씨때문이었을까요 ?
며칠동안 슬픔과 회한으로 줄곳 울고만 지냈는데 그 날은 그 날씨 덕분인지 그다지 생각한 것보다 눈물이 나진 않았습니다. 너무 북바치게 엉엉울면 어떻하나 좀 걱정을 했었는데…
우중충한 날씨가 많은 빠리도 가끔 그렇게 반짝 태양이 비추는 날이 있어 다행스럽게도 그 날은 공원이나 길가 아무 카페에서 사람들이 앉아 일광욕을 즐길만한 그런 날이였습니다.
아직 3월의 쌀쌀함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워낙 화창한 햇살때문에 포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전날 14일,브노와, 아모리, 레미 그리고 진달래까지 전 가족이 빠리에 올라와서 몽빠르나스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준 동생 남편 미셸의 차로 빠리 근교에 살고 있는동생 집까지 왔죠.우리가 7년전 보르도로 이사간 후 전 식구가 이렇게 함께 빠리로 움직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모리의 여자친구가 이미 와서 제 동생을 도와주고 있더군요.
아모리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는 실제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려 보이고 예쁘기도 하지만 언제 보아도 차분하고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제 마음에 듭니다. 아모리와 사귄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둘의 감정은 아직 좋아서 이런때에 그 애가 아모리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런 기회 « 라야 »라고 해야할지 이런 기회 « 덕분 »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렇게 프랑스에 있는 식구가 다 모이니 진달래는 무슨 캠핑이라도 온 듯 들 뜬 기분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런기회 « 라야» 이렇게 모일 수 있다는게 안타까왔습니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우리식구 : 친정 어머니는 부산에, 친정 아버지는 미국에, 오빠는 인도네시아에 , 동생은 빠리 근교에, 그리고 저는 보르도에 있는 이 식구는 어떤기회« 라야 » 한 번 모일 수 있을까…라는 이루어 질 것 같지 않는 냉정한 현실과 함께…
그래서 처음으로 이렇게 일곱식구가 함께모여 동생이 지어준 저녁밥을 슬픈 중이나마 맛있게 먹고 방 두개와 거실에 나누어져서 각각 다음날을 위하여 잠을 청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들은 날은 3월4일 제가 빠리로 와서 « 한국의 봄 » 행사때 초청할 사물놀이팀을 보러 빠리로 오던 날이였습니다. 오후에 도착해 친분이 있는 한 대금주자와 크리스틴이라는 프랑스 여자친구와 함께 Issy des Moulinaux의 한 시청에서 빌려주는 장소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사물놀이« 얼쑤 »라는 팀을 만나 이야기 하고, 그 다음날은 « 빠리동남풍 »이라는 팀을 보고와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하고 크리스틴집으로 돌아와 기분좋게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제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브노와에게서 온 전화였는데, 식욕을 끊을 의도는 아니지만 조금 전에 들은 소식을 전해야겠다며, 몇 달전부터 에쿠아도르에 있는 댐 프로젝트를 맡아 현장으로 인스펙션 나가 있던 Hervé가 산사태를 만나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 소식을 단번에 단도직입적으로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잔인한 말을 들으면서 고꾸라질 듯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너무나도 아파오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 했습니다.
Hervé는 저의 첫번째 남편으로서 아모리와 레미의 아빠입니다.
토목 엔지니어로 한국가스공사와 계약을 맺고 평택 가스터미날 공사에 관여하게 되어 한국에 1982년에 왔는데,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듯 동양, 특히 중국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였고 한국에서 일하면서부터 물 속의 물고기처럼 한국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인의 가장 민주적인 스포츠인 등산을 매주 일요일 즐겼다고 합니다.
제가 그와 만났을때는 이미 한국에 온지 1년이 되었을 때였고, 저는 대학 3학년때였는데 그 날 동대문 운동장에 즐비하게 열지어 있는 행선지도 다양한 수많은 등산 버스 중 하나에 같이 타게 되었고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모든 것이, 아니 공통적인 우리의 운명이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로 사귀게 되었고, 일년이 지난 그 다음해 그러니까 제가 4학년이었을 때 결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그 사람의 한국에서의 임무도 끝나 프랑스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좋아 한지라 제가 중문과를 전공하는 것과 피아노를 치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큰 어필이 되었답니다. 그도 클래식 기타 주자여서 매일같이 기타를 치며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콘서트도 열 만큼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였고 그 외에도 가부도, 카라떼,쿵후등 여러 무술을 오래전부터 하면서 극기에 어느정도 통달한 아주 성실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뿐입니까 ? 가만 있을때도 실은 가만 있지 않고 항상 카드나 동전같은 걸 가지고 끊임없이 요술을 연습하며 익혀 사람들이 모이면 깜짝 쇼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소질도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프랑스에서 그랑제꼴에 속하는 에꼴 상트랄(Ecole Centrale) 출신의 유능한 토목 엔지니어로 정말 흠 잡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였죠. 제가 어릴 때부터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그 사람이 11세 연상이라는 것조차 저에게는 장점으로 보였습니다.
프랑스로 건너와서 불어를 배우러 다니면서 임신 한 것을 알았고, 바로 그 해 8월 예정일보다 3주일 빠르게 바로 제가 25살 되는 생일 날 아모리가 태어났습니다.
마침 친정 어머니가 와서 애기를 봐 주셨기 때문에 출산하고 3주 되는 날부터 학교가 개학이라 빠리 7대학에서 중문과 석사와 3대학에서 불어를 동시에 공부한 해 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두해가 지나고 Hervé가 에쿠아도르의 수도 Quito에서 식수에 관한 프로젝트를 맡아 우리 세식구는 남미의 그 나라에서 한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Quito는 그 나라 이름처럼 지구의 적도가 지나가는 곳 답지않게 2800m 라는 고도 덕분으로 살기에 아주 좋은 날씨를 가지고 있었고, 저는 스페인어와 요가를 배우러 다니느라 제법 바쁘게 지냈습니다. 주변의 콜럼비아처럼 게릴라 때문에 정세가 위험하지도 않아 남미의 나라에서는 정치적으로도 비교적 조용하면서 유럽인에게는 물가도 싸, 살기에 정말 쾌적한 나라였습니다. 떠나기 전에 남미 일주와 다윈이 진화설을 확신하기도 했다는 갈라파고스란 섬을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정이 좀 들자니 아쉽게도 그 곳을 떠나게 되어 빠리로 돌아와 3개월 여름을 지내고 88년9월말에 이번에는 중국으로 일년 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한중 수교가 되지 않았고, 중국도 떵샤오핑이 아직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설을 내 놓아 중국에서의 경제붐과 사유재산이 아직 용납되던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대로 전원적인 분위기의 중국을 맛 볼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Daya Bay에 중-프 합작으로 핵 건설 프로젝트로 가게 되었는데, 프랑스 회사는 EDF가 맡았었습니다. 홍콩에 비행기를 내려 지하철을 타고 홍콩 세관을 지난 후 또 중국세관을 지나면 심천이라는 중국의 경제특구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외국인촌 전용 셔틀버스로 60km 정도 되는거리를 한시간 정도 타고가면 이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모든 외국인 기술자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우리는 그렇게 또 일년의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아모리가 유치원에 가는 사이 다른 부인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셔틀버스로 심천에 가던지 아니면 좀 더 멀리 홍콩까지 가서 쇼핑을 하기도 하고 칫과의사를 보는 등 꽤 한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두달만에 한 번씩 아모리는 다른 부인들에게 좀 맡겨두고 둘이서 중국 각지를 돌기도 했는데, 첫번째는 중국의 남부를, 두번째는 上海, 蘇州, 抗州, 세번째는 北京 주위를, 네번째는 武漢에서부터 실크로드를 가는 길의 敦煌등을 골고루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하는 관계로 여행이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그 때만에도 중국의 교통은 아직 현대화 되지 못하여 비행기를 타는 건 좀 무리였고, 거의 기차를 타고 다녔으며, 때로는 자전거, 낙타까지 동원할 때도 있었습니다. 武漢에서 廣州까지 22시간동안 좁은 기차간에서 쪼그리고 온 적도 있는데, 앉아서 올 수 있은 것만해도 다행이었을 시절입니다. 그렇게 한 아침 기차를 내렸을 때의 성취감이란… !
저는 마지막 몇 개월동안 프랑스 기술자 부인들을 위해 중국어 수업을 주기도 했고, 태극권을 배우는 등 우리가 살았던 외국에서의 생활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때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또 정이 들려고 하니 다시 거기를 떠나 빠리로 돌아 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터어키로 가게 됐는데, 그 때는 아모리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터어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Marmara 라고 하는 지방이였는데 한국에서와 같이 가스 터미날 공사 프로젝트였습니다. 공사는 벨기에의 Tract Bel이라는 회사가 맡았고, 한국에서 만나 우리 결혼의 증인이기도 했던 De Dorlodot씨가 책임자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리가 가야 할 프랑스 학교는 이스탄불에 있어서 우리가 이스탄불에 머무르면서가 매일 100km의 거리를 왔다갔다 하던지, 아니면 우리가Marmara 현장에 살면서 아모리가 학교까지 왔다갔다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결국은 빠리에 아파트도 있으니 그냥 우리는 빠리에 머무르면서 방학때면 아빠를 보러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터어키에서Hervé가 2년동안 일할 동안 저와 아모리는 터어키를 열 번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렇게 외국에서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수입도 괜챦고 여행도 많이 할 수 있어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은 엔지니어들은 그들대로 일일이 말 할 수 있는 고충이 많으며, 그렇게 남편을 따라 다녀야 하는 부인들은 일단 프랑스로 돌아와 막상 자신이 사회에서 일을 하려고 하면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버리든지, 일을 하던 사람도 중간에 빈 공간 때문에 자연이 연락이 끊어지게 되어 사회복귀가 어려워지는 현상을 낳게 됩니다.
저는 아모리보다 일곱살 터울이 지는 레미를 92년에 낳게 되었고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Prévert의 시에서 « 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천천히 소리도 내지않고 말없이 갈라 놓는다 »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자면 길지만 언젠가 제가 자서전을 쓴다면 그 때는 그 가슴아픈 사연을 다 쓸 수 있겠지요.
그렇게 이혼의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적인 물질적인 일들이 해결된 후에는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는 다시 각각 다른 배우자를 얻었습니다.
몇 년후 아프리카 말리의 수도 바마코로 그 쪽 부부가 2년 가 있을 때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거기서 보내게 되었는데, 제가 동반해 2주일을 함께 보낸 적도 있고, 가끔 브노와와 제가 빠리로 올라가면 네 사람이 함께 만나는 등 한국에서는 그다지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런 균형잡힌 생활을 하기에 이러렀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 해 말, 크리스마스 방학 때 아이들이 아빠를 보러 빠리에 갔을 때 우리도 잠시 무슨 일을 보러 빠리에 갔었는데 그 때 함께 식사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소식을 들을 땐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만큼 충격이 심했고 심지어는 그 후 며칠 기억력을 상실하기까지 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그 소식이 떨어지는 순간 크리스틴이라는 친구가 옆에 있어주어 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 날 저는 보르도로 즉시 내려가 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슬픈 소식을 아이들에게 알리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를 해야만 했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슬프게 그 날 저녁을 보냈습니다.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허전할까, 정말 그 슬픔을 실감할까하는 생각만해도 정말 참을 수 없는 이 불공평한 세상의 일을 받아 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외국에서 일을 당했기 때문에 시신이 운반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결국은 그 참사가 일어난지 12일 후인 3월15일에 빠리 Père Lachaise에서 장례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는 Hervé가 34년동안 몸을 담고 있던 회사의 사장이하 직원들과 빠리와 Lyon에서 온Hervé 여동생 가족, 친지 친구들 그리고 대사관에서는 교육원장님과 영사님등 해서 100여명의 조객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영혼을 기리러 와 주셨습니다.92세인 노모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이 먼저 가는 것을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장례식이 있는 날은 시신이 담긴 관을 따라가기도 좋게 그렇게 날씨가 좋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묘지에 관을 넣고 장미 한송이를 모든 사람이 던지고 나서 직장 동료들은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Hervé의 집에서 모여 Hervé의 현재 부인 도미니끄가 준비한 음식을 다들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헤어진지 10년이상 지난 옛 남편을 위해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현재의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라고 위안을 해 줄 정신적인 겨를이 저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서로 울먹이고 부둥켜 않았을 뿐… 그 날 오후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Hervé의 아파트 거실에서12년동안 보지 못했던 옛 시누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그 때는 아기였던 조카들이 다 커 있는 모습도 이런기회 « 덕분 »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후의 이 조촐한 모임은 무슨 « 파티 »와도 같았습니다. 서로 밀린 이야기와 안부를 묻느라고…Hervé가 생전에 그렇게도 즐겨치던 아르헨티나의 기타리스트 Yupanki의 곡들을 들으면서…
장례식 바로 다음날은 « 보르도의 봄 »행사로 대사님 내외가 오시는 날이였고 또 그 다음날은 시청에서 보르도 음악인 연주회때 제가 피아노 반주를 하는 날이였습니다. 정말 포기할 까 몇 번 마음을 먹었었는데, 한 친구가 저에게 « 고인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 연주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그 말이 번개처럼 저를 후려갈겨 한 때 포기하려고 했던 저의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치루었습니다.
지난 주 뮌헨에 한글학교 연수를 다녀와 빠리에 잠깐 머물렀을 때 도미니끄와 함께 Hervé 묘지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렇게 많던 화환들이 한 달이 지나니 거의 다 시들어 있었습니다.방학때 마다 아빠를 만나러 가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번 부활절 방학이 끝나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를 다시 한 번 찾을 생각입니다. 마음에 살아있을 아빠와 제가 아주 젊었을 때 사랑했던 그 사람을 또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 사람의 명복을 빌기위해…그렇게라도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 주기 위해...(18/04/06)
첫댓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네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어라 단어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곁에 있어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저도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힘내세요..
회장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르도에 있을 때 앨범을 보여주시며 첫 배우자와도 잘 지내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생생한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아모리와 레미에게도 위로를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과의 추억을 기록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모든이들이 얼마나 많이 그를 사랑했는지 ... 또 얼마나 많이 그리워할것인지... 아실겁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