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마르타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14시간을 달려온 곳은 산탄데르 주의 작은 도시 산힐(San Gil). 마을에 들어서니 한결 시원해진 공기와 순해진 햇살이 안도감을 안겨준다. 산힐은 콜롬비아 아웃도어 스포츠의 성지다. 패러글라이딩, 동굴 탐험, 폭포 라펠링, 카야킹, 래프팅, 승마, 번지점프 등 다양한 야외 활동을 남미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덕분에 크지도 않은 마을이 모험심에 들끓는 여행자들로 넘친다. 하지만 카리브 해의 태양에 녹초가 된 나는 이곳에서 그저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산힐, 콜롬비아 아웃도어 활동의 성지 |
산힐에 머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내가 매번 입장료를 내면서 세 번이나 찾아간 곳은 엘가지네랄(El Gallineral) 공원. 도인의 수염처럼 길게 늘어진 잎을 매단 케이폭 나무들이 폰세 강변을 따라 늘어선 곳이다.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보내는 오후의 시간은 평화롭기만 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거나 공원 안에 사는 마코 앵무새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산힐 - 가지네랄 공원 |
바리차라, 콜롬비아에서 제일 예쁜 마을며칠을 산힐에서 보낸 후 이웃 마을 바리차라(Barichara)로 넘어간다. 스페인 식민지로 건설된 마을은 25년에 걸친 복구 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아름답게 살려냈다. 그래서 종종 “콜롬비아에서 제일 예쁜 마을”이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정말 마을에 들어선 순간 입을 다물 수 없다.
소문대로, 아니 소문을 뛰어넘어 어쩌면 이렇게 예쁜지! 하얗게 칠해진 벽에 주홍색 기와지붕, 초록색이나 파란색으로 칠해진 창문. 골목의 전선줄마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성껏 꾸민 가게는 저마다 예술적 감수성이 넘쳐난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면서도 친절하기까지 하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리차라의 골목 |
화창하게 갠 다음날. 카미노 레알(Camino Real)이라는 옛길을 걷기 위해 나선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힌다. 바리차라와 이웃 마을 구아네(Guane)를 잇는 이 길은 1864년에 생긴 돌길이다. 도로가 뚫린 후 잊혀져가던 이 길은 1996년에 복원되어 이제는 여행자들이 즐겨 걷는 길이 되었다. 지난밤 내린 비에 젖은 돌길이 미끄럽다. 조심조심 발을 옮긴다. 어쩌다 트레커 한두 명과 마주칠 뿐 길은 고요하다.
현무암 돌담을 끼고 걷는 길. 반갑다는 듯 지저귀는 새.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몇 마리의 나비. 정수리를 데우는 태양. 뭉게구름이 걸린 파란 하늘. 풍경을 즐기며 느릿느릿 두 시간을 걸으니 구아네 마을이다.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십여 분이면 다 둘러보는 작은 마을. 고생물학 박물관에 들러 화석을 구경하고 이 마을 특산품이라는 염소젖 요구르트도 마셔본다. 단맛이 강해서인지 염소젖 특유의 노린내는 나지 않는다. 동네 카페에서 마라꾸야 주스를 마시며 잠시 더위를 식힌후 버스를 타고 바리차라로 돌아온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예쁜 마을로 꼽히는 바리차라 |
다음날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마을 산책을 나선다. 한낮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이 시간에 일어났건만 태양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타오른다. 바리차라는 둘러볼수록 예쁜 마을이다. 소박하면서도 섬세한 감각이 건물마다 배어있다. 현대식으로 복원된 집들은 저마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해 마을 전체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붉은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골목을 거닐다 돌아와 숙소에서 책을 읽으며 오전을 보낸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니 슬슬 배가 고파진다.
바리차라가 속한 산탄데르 주의 명물은 뚱뚱한 붉은 개미(Hormiga Culona) 요리. 엄지손가락의 3분의 1쯤 되는 크기의 이 개미는 5월 무렵에 들판에 나타난다. 개미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학교도 가지 않고 산으로 들로 개미 사냥을 나선다. 온 가족이 개미 사냥에 매달릴 만큼 중요한 수입이 된다고 한다. 소금과 함께 볶은 이 개미는 고소한 단백질 영양식으로 비싸게 팔린다. 그래서 마을에는 개미 소스를 뿌린 안심 스테이크로 유명한 식당도 있다.
올해는 비가 많이 내린 탓에 개미가 많이 잡히지 않아 가격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한다. 가난한 채식주의자인 나는 개미요리 대신 어느새 단골 식당이 된 만다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오늘의 메뉴는 렌즈콩 스프에 현미밥, 치즈를 얹어 구운 가지, 올리브가 들어간 샐러드. 역시나 맛있다. 주인 디에고, 크리스털과 함께 불교와 요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온다.
비야데레이바, 추운 날씨에도 퇴색되지 않는 풍경바리차라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짐을 꾸려 찾아가는 곳은 비야데레이바(Villa de Leyva). 이곳에 들어서니 마치 열대에서 한대로 넘어온 것처럼 날씨가 갑작스레 변했다. 해발고도 2,144미터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 으슬으슬 추위가 밀려든다. 하지만 궂은 날씨조차 비야데레이바의 풍경을 퇴색시키지는 못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초록을 배경으로 회칠을 한 흰 거물이 늘어섰다. 포석이 깔린 골목마다 식당과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가득하다. 스페인 식민지 건축의 백미라고 불리는 곳답다. 바리차라보다 세련됐지만 카르타헤나보다는 소박하다고 할까. 이곳은 콜롬비아의 예술가나 은퇴한 부자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라 집값이 까르타헤나 다음으로 비싸단다.
해발고도 2천미터가 넘는 마을은 스페인 침략 시절에 만들어졌다 |
비야데레이바에서 나는 만날 사람이 있다. 내 일본인 친구가 자신의 콜롬비아노 친구 벤하민을 소개해줬고, 벤하민은 내게 이곳에 사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전화를 해보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마을을 둘러보다 과일 가게에 들어선다. 아보카도 1킬로를 달라하니 주인 아저씨는 파파야를 고른다.
“아니, 파파야 말고 아보카도요.” “아, 그 파파야는 내 거예요.” 옆에 서 있던 인상 좋은 중년 부인이 영어로 답한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가 내게 묻는다. “여기 언제 도착했어요?” 좀 이상한 질문이다. “어제 왔는데요.” “혹시, 일본에서 왔어요?” “아니, 한국인데요.” “아, 미안해요. 우리 아들이 일본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지금 이 마을에 있다고...” “혹시 당신이 알바?” “네가 남희?”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끌어안고 야채가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비야데레이바 - 세련된 카페와 식당, 가게가 가득한 비야데레이바의 골목 |
그날부터 알바는 며칠간 나를 데리고 다니며 구경을 시켜준다. 제일 먼저 우리가 찾아간 곳은 마을 근교의 무이스카(Estacion Astronomica Muisca) 유적. 원주민 칩차 부족이 만든 천문 관측소다. 들판에 두 줄로 늘어선 원통의 비석을 둘러보고, 1억2천만 년 전의 거대한 해양 파충류의 화석이 있는 화석박물관도 들른다. 다음날은 조금 더 멀리 나가 산아구스틴 수도원과 도자기 마을 라끼라(Raquira)를 찾아간다. 라끼라는 온통 하얗게 칠해진 비야데레이바와는 다르게 컬러풀한 색감이 넘치는 마을이다.
미사가 한창인 광장의 성당 내부도 다채로운 원색으로 칠해져 있다. 도자기나 해먹, 목공예품을 파는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마을의 식당에서 초리조, 구운 유카와 바나나로 점심을 먹는다. 그런 후에는 동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산토 데세우모 수도원을 찾아간다. 1620년에 지어진 수도원은 이제 박물관이 되어있다. 수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방과 부엌, 도서관, 예배당, 식당을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건물 자체도 멋있고, 주변 환경도 고즈넉해 마음을 끈다.
건축가 클라라의 집 |
알바와 함께 찾아간 곳 중 가장 내 마음을 끈 곳은 그녀의 친구 클라라의 집이다. 이구아께 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그녀의 집은 지금껏 내가 본 집 중에서 가장 독특한 디자인이다. 건축가인 클라라가 직접 지은 이 집은 진흙과 대나무, 황마가 주재료다. 재료만 친환경적인 게 아니라 태양열 에너지로 온수를 데우고, 빗물을 모으는 시스템까지 갖췄다.
집안 곳곳에는 오래 써서 윤이 나는 물건이 가득하고, 거실에는 실내 정원도 있다. 커텐도 없는 안방의 창밖 풍경은 온통 녹음이다. 아, 이렇게 집주인의 개성이 흠뻑 묻어나는 집이라니.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클라라가 텃밭에서 뽑아온 레몬그라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든 다시 와서 글을 쓰며 지내라고 말해주는 클라라의 마음이 고맙다.
테라스에서 담소를 나누는 알바와 클라라 |
수도 보고타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그녀들은 돈 대신 여유로운 삶을 선택해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삶의 속도를 늦추고 소박하고 간결한 일상을 살아간다. 알바도, 클라라도 자기들 인생에는 남자가 없어서 삶이 더 평온하다며 깔깔거린다. 집을 나설 때 텃밭의 채소와 과일을 알바에게 한아름 안겨주는 클라라의 모습이 정답다. 알바도, 클라라도 혼자 살아가지만 가까이에 마음을 나누는 벗이 있어 큰 위안이 되리라.
비야데레이바 -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마을 |
클라라의 집을 나와 알바의 집으로 간다. 일자형의 단순한 집은 흰색 벽에 주황색 타일을 얹은 전형적인 스페인 풍이다. 이 집을 지을 때 알바는 정원의 큰 바위를 그냥 두었다. 마치 일부러 갖다 놓은 것처럼 근사하다. 집안에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세간이나 장식품도 없다. 내가 집과 정원을 둘러보는 사이 알바는 아히아코 보고타노(Ajiaco Bogotano)라는 전통요리로 점심을 준비한다.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감자 스프인데 세 가지 종류의 감자와 콩, 옥수수와 닭을 넣고 만든다. 뜨겁게 끓인 스프에 생크림과 케이퍼, 아보카도를 넣어 먹는 스프는 영혼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다.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음식 아히아코 보고타노 |
이제 내일이면 비야데레이바를 떠나 보고타로 향한다. 나에게 비야데레이바는 잊을 수 없는 마을로 남을 것이다. 마을의 빼어난 아름다움보다 이곳에서 알바와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어떤 곳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풍경이 아닌, 그곳에서 채워낸 시간의 결이리라. 고마운 알바. 언젠가 그녀의 환대에 보답할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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