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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소망의 이야기 스크랩 58년도? 숭의동 20번지 성애원사진들
최성규 추천 0 조회 135 09.10.17 16: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기숙사 앞에 있던 빨래터.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빨래터위로 욕탕?용으로 욕조가 2-3개 있고,

바로 그 위 축대위로 세면대와 우물이 있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욕조를 채우면 그물이 다시 빨대터로 물을 채우게 되었있다.

아직 뭔가 건설중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선교사 가족들이 갖고온 구호 물품을 성애원 총무 오마니가 수령하는 것 같다.

 

멀리 뒷쪽 하얀 건물이 선인재단의 기초가 된 성광학교.

그 앞은 중국인 묘지가 있었는데,

사진에 보이는 구조 물들이 제물포역 뒤로 있던 집들인지 중국묘지 인지 알 수가 없다.

중국묘지들은 작은 집같이 지은 것이 많았는데,

당시는 엄청 크고 확실하게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묘지로는 너무 커 보이기도 하고 긴지 민지 잘 알 수가 없다.

 

성광학교 왼쪽으로도 커다란 구조물들이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 없다.

 

오른쪽에 와룡소주공장이 보이고 그앞 저수지

그리고 제물포역으로 갈 수있던 유일한 논뚝길옆 똥통바로 옆에 있던 고압전선 전봇대?

그리고 그옆 왼쪽 고아원 바로 뒤에 보이는 초가집.

기찻길전 밭한가운데 있던 이 두 구조물은,

70년대 저수지 옆 논위에 시장이 생기고 ,

제물포역으로 대로가 나고도 살아남아서 우리가 부산으로 이사 갈때 까지도 살아 남아 있었다.

두섭형 어머니가 돌아가시전에 이곳에서 사셨나?

 

오른쪽 담이 보이는 건물은 나중에 아교공자을 잠시 하던 가죽공장이다.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 오마니 김혜경 총무

오른쪽 가죽공장.

가운데 멀리 보이는 빌딩이 남중남고

왼쪽 제1기숙사 축대 뒤로 숭의 국민학교 부분?

 

그리고 부친이 지으신 2층 사무실창고(우리는 그냥 창고라고 불렀다)

이 창고는 교단에서 땅을 매각한 후 어머니의 요청으로 살아남아서

인천숭의 침례교회로 사용되었다.

 

몇칠전 우연히 본 지도에 이곳에

오마니가 기증했던 감리교회가 이사를 했는지,

제물포교회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었다.

하늘의 오마니가 기뻐하실라나? ㅎㅎ

보이기에는 축대 위에 있어지만,

우리가 머물던 1숙사 에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1숙사 축대 옆으로 층계를 내려가면 창고문이 있었다. 

층계는사진에 보이지 않는다.

 

 

제1기숙사 식당앞에 있던 우물. 부친 원장 김은섭

언젠가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오마니는 그 우물을 대단히 칭찬?하셨다.

인천을 떠나서도 가끔 그 우물을 갖고? 싶으시다고 하시곤했다.

뭔 아브라함, 야곱의 우물도 아니고...ㅎㅎ

 

'아침에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다고,

아침 마다 냉수 한사발을 권하셨다.

 

몰랐는데, 이제보니

우물 옆으로 아직 세면대가 세워져있지 않다.

어려서 거의 놀이터 수준이었던 우물터.

어린 나와 보랏빛 겨울 한복을 입으신 오마니가 서있는 부분이 돌층층대인데,

역시 아직 쌓아져 있지않다.

이로 봐서 창고가 지어지고 우물터 세면대와 강당으로 올라가는 돌 층층대가 쌓아 졌구나.

그러고 보면, 부친께서 원장직을 1-2년 밖에 수행하지 못하셨는데,

하신 일도 엄청 많구나!!

 

 

고아원 윗사진 오른쪽은 성애원 어느 철조망 앞에서 오마니

왼쪽 가운데 사진 선물 받는 저형은 내가 이름도 아는 형인데... 이름이...

가운데 오른쪽은 2층 강당 뒷에 있던 운동장? 등나무

강당은 가운데 본당을 양쪽으로 wing이 있는데,

보이는 오른쪽 남쪽 윙위에는 인천숭의침례교회가 시작된 곳이고

그 아랫층은 방들을 나서 김종수 봉수 형제네가 살았다.

왼쪽 등나무 뒤쪽 방에는 이순주, 능주 현주?네가 살았다.

내가 좋아하던 순주네는 서울인가 김포인가로 이사 갔다.

이름은 여자 같지만 모두 남자들이다.

가운데 밑사진은 강당 안 바로 강댓상 옆

 

 

성애원 최고봉 원두만이 있던 솔밭에서 바라본 사랑방.

왼쪽으로 강당옆에 있던 운동장의 끝이 보이고 그 곳에 있던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보인다.

국민학교 시절 부친이 뽕나무를 심기전 최고의 놀이터 였던 대추나무가 아직도 어린지 앙상해 보인다.

 

독채 사랑방에는 나중에 장경순네가 살고 그 옆집은 고아원 밖으로, 좋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나중에 닭을 키워 닭집이라고 불렀나?

 

대추나무 뒤로 고아원과 가죽공장사이로 나있던 가장 큰길로 인천공고로 가는 수봉고개?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길로 모든 공고생들이 지나갔고,

가끔 수봉산 묘지로 가는 행여?가 지나가서,

이곳이 내리막길이라고

행여꾼들이 황천길?을 가니 마니 하고 흥정?을 하곤 했다.

 

그 길 옆으로 콩나물 움막집.

움막집사람들도 무척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말이 없고 듬직했다.

형도 큰형이 있었는데,

가만, 황일지형 부인이 이집사람이었나?

 

하여간, 콩나물집에 아주 귀여운 손주가 있었는데,

이애는 3-4살 때 부터 어른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콩나물을 나르는 자전거를 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콩나물 움막으로 약간의 간격이 있고 있는 집이 나중에 가게가 된집.

이 집에 나보다 한살인가 많은 여아가 있고 뺀질이 같은 동생이 있었는데,

우리보자 두세살어린 성명중이 또래의 남아가 있었다.

 

원래 더 윗쪽 변전소소장집가기 직전, 성명중이가 살던집 건너편에 오래된 박씨 가게가 있었다.

누나는 막내누이 와 제일친한 친구였다.

동생이 내 또래였는데, 교제를 나누지 못했다.

누나가 은혜였나? 박은혜?

옛날 주일학교 예배를 보던 시절 함씨 자매들과 같이 가장 많이 기억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누이는 이쁘고 착해서 엄청 좋은 누나였다.

동생은 분명 내 또래인데, 그 역시 매우 쿨한 애였지만,

왠지 교회는 한번도 오지 아니했던것 같다.

만나서 놀거나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가게는 장사도 잘되서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언젠가 부터 시름시름 장사가 시들해 졌다.

도박꾼들이 모여들고,

언젠가 다 이사를 갔다.

누나는 중학을 다니다 팔려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불쌍한 누나는 이쁘고 다 좋았는데, 누이 몹시 나빴다고 했는데...

 

언젠가,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경기 자동차앞에 제물포역으로 가는 대로 생기고 슈퍼마??들도 많이 생긴 때에,

그 길 어느 곳에? 검은세단이 서 있고 그 안에 화장을 짙게한 누이가 앉아 있었다....

 

아 우리들의 누이들이여...

 

참 어렸던 만순이가 그 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뒷 쪽에 형성된 조그마한 부락이 논밭을 건너 형성되 있던 집들이고 그위에 와룡소주에서 수봉고개로 가는 차가 갈만한 대로?가 있다.

이 길과 고아원 앞으로 지나가는 길은 수봉산 밑에서 만나 인천 공고로 넘어가는 고개로 간다.

 

왼쪽 지그재그로 된 골짜기 냇가를 따라오르면 중간에 움푹파인곳이 약수터 겸 빨래터가 있고 이길은 약간 왼쪽으로 올라서,

활을 쏘던 절로 넘어간다.

절로 넘어 가기전 고개에서 오른쪽 길은 수봉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이 길에 바로 넒은 바위와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이 골짜기 왼쪽은 포도밭이 있었고, 그 위는 다시 공동묘지.

포도밭과 공동묘지 왼쪽, 와룡소주 뒷편으로는 모두 배밭이었는데,

최씨였나? 교대부속국민학교 동기네 였고,

인천 터줏대감? 심씨네와도 연결된 집안이다.

 

빨래터에서 오른쪽으로 수봉산을 오르는 길 밑으로는 또 모두 공동묘지였는데,

이 두 묘지중 하나는 기독교묘지라고 했는데, 어느게 어느 것인지 기억해 낼수 없다.

 

수봉산이 개발 되면서,

문창선이내가 정상으로 오르는 길 바로 밑에 집을 짓고 들어 오고,

산성교회는 그 밑, 신현승이네는 그 후에

더 윗쪽에 집들이 많이 지어지면서 들어 온것 같다.

 

매일 바라본 이 광경은 이상하게 향수를 불러 일으켜서,

성애원을 떠나면서,

어린 나는 이담에 부자가 되어서,

성애원터와 수봉산 부지를 몽땅 사서 원상 복귀?하리라 생각 한 적이 있다. ㅋㅋ

 

아직 보아도 향수 어린 광경이다.

 

 

 

 

 

2층 강당 뒤 등나무.

고아원 누나들. 모두 이름을 알 만한데...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린다.

저 누나 하나는 시집가서 애 2을 데리고 와서 다시 얼마간 살았던것 같기도 하고...

뒤에 창문이 보이는 방은 나중에 온돌을 놔서 순주네가 살았었는데,

어느 해는 추운겨울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불을 때주고 개방한 적이 있었다.

떡과 먹을 것을 나눠주고 따뜻한 방에서 놀게 해 주었는데,

그 추운 겨울에 어린 것들이 그들의 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난생 처음 크리스마스 밤샘을 했다.

조금 나이가 많은 여자애들이 선생 흉내를 내고,

뭔 크리스마스 밤샘?에 차렷 줄마추기를 시키고 놀았다.

어린 것들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애기들 같은 동생들의 손을 꼭잡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를썼다.

 

선생도 없었던 그 시절.

그래도 방에 불을 집혀 주고 그 들을 놀게? 해준 것은 누구 아이디였을까?

아버지 오마니?

 

그때는 황일지 형이 모든 것을 수고 했다.

미군 부대에 다니던 일지 형과도 추억이 많은데 참으로 보고 싶다.

 

 

 2층 본 강당 오마니 김혜경집사

선교사들이 보이고 강댓상, 그리고 피아노(야마하였나?)가 보인다.

 

이상하게도 이천수 목사는 고아원시절부터 있던,

미제? 강대상을 '술집에서 얻어온 책상'이라고 표현한다.

이상한 것인지 웃기는 것인지? ㅋㅋ

 

언제나 있던 저 강대상은 성명중목사나 유창선이 동생이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어릴적 친구 유창선이를 타코마 제일 침례교회 문창선목사와 헷갈려서 나도 모르게 문창선이라고 쓴다. ㅋㅋ

죽으면 늙어야지?

점점 늙어가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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