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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빌 2장 19-30절
설교제목 : 너 밖에
영적 에클레시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사정없이 흘러가고,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와 같이 살고 싶은 듯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내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꿈에서 저는 힘겹게 등반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된 계단을 기어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오른팔에는 수통을 차고 왼쪽 팔목 부위에는 헝겊으로 싸인 물건을 두고, 어깨엔 배낭을 메고 올라갔습니다. 한참 기어 올라간 후에 당도한 곳은 산 정상 아래 부분에 돌이 깔린 넓은 땅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나라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산 정상 밑에는 신전이 자리잡았습니다. 일종의 제사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모임을 위해 힘겨운 등반의 여정을 한 것입니다. 한수엘리 에터 박사는 영적 에클레시아(교회), 영적 가족의 회합일 수 있다고 분석을 했습니다. 외형의 건물로 연결된 것이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연결된 것이 에클레시아입니다. 이런 영적 에클레시아를 위해 힘겨운 등반을 감행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융학파 분석가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머어마한 크기의 사원이 지어지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데까지-앞 뒤, 오른쪽, 그리고 왼쪽-믿을 수 없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대한 기둥들을 짓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중 한 개를 짓고 있었다. 사원을 짓는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나 기초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융은 이 꿈을 듣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짓고 있는 사원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사람들이 인도와 중국, 러시아 그리고 온 세상에 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지어지는데 얼마나 걸릴지 아시나요?... 한 육백 년 정도 걸릴 것입니다.”(에드워드 에딘저, 김진숙 김소영 역(2016) : 《의식의 창조, 이 시대 융의 신화》, 돈화문, pp.13-14)
이제 막 그곳에 도착하여 저는 아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나 새로운 정신 토대위에 새로운 것을 짓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너 밖에
바울은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마음 품어야 한다고 편지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따라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면 희생제물이 되어도 좋고, 나는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후 본문은 자신과 함께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온 두 사람을 자기 비움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그 두 사람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에 보내고 싶었습니다. 빌립보 공동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로 인해 격려를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19). 지금 빌립보 교회는 외부적 핍박을 받고 있었고, 내부적으로 여성 지도자들의 분열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잘 극복했다는 자랑스런 소식을 듣고 위로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어린 디모데를 보내는 것일까요?
디모데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20-21).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디모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자기 유익에만 관심할 뿐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곁에 사람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을 도와서 열심히 헌신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과 열심이 자신의 이익과 욕심, 편리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논어의 양화편에 보면 “향원 덕지적야鄕原 德之賊也”(論語, 양화陽貨, 第十七, 13)라는 말이 있습니다. ‘향원’이란 마을에 점잖고 바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류에 영합하고 여론에 줏대없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향원은 덕의 도둑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덕을 해치는 자입니다. 자기 인기와 유익을 찾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마을을 어지럽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들의 실리를 쫓아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 16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향원같은 자가 되고 맙니다. 자기 이익과 자랑, 편리성, 이해타산을 따지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수행한다면 우리가 디디는 곳은 결정적인 순간에 온통 쓰레기장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기 위해 오로지 외적 관심에만 몰두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삶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선한 구제나 교회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 내는 것과 무관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의에 빠지는 형식적 신앙인으로 전락시키기 쉽습니다(이 만큼 했다는 표면적, 율법적 교만을부추긴다_십일조 헌금 말하지 않는 이유). 오히려 우리의 내면을 돌보는 일, 우리의 영혼에 관심을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영혼에 말을 걸지 않는 자는 부실해지고 향원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향원같은 자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넘어 너를 보듬고, 나의 영혼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증명된 자
바울이 빌립보에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디모데의 연단 때문이었습니다(22).
“디모데의 연단(인품)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서 ‘연단(인품)’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험하다와 시험의 결과 증명되다입니다. 디모데는 시험을 치뤘고, 시험을 통하여 증명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인품이 그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증명된 자였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순전함으로 복종하여 바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복음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여기서 수고했다는 말은 단순히 일하며 땀 흘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는 ‘엔돌루세’, ‘종노릇하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함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겼고, 모든 시험에서 인정된 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어떤 시험과 난관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시험을 통과하고 증명된 자가 저와 여러분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본기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에 함께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25)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감옥에 갇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을 도우라고 보낸 빌립보교회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힘든 시간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을 왜 다시 돌려보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바울을 위해 헌신하다가 그만 병이 난 것입니다(26-27). 몹시 아팠습니다. 병들어 있다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소식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들리자 그에 대한 걱정과 비난이 일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자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너무 걱정하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 곁에서 필요한 에바브로디도였지만 돌려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내게 필요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보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원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역시 바울의 삶을 닮아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나를 위해서 여러분이 다하지 못한 봉사를 채우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30)”.
바울 곁에 가서 돕다가 자기의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고, 감옥에 있는 바울을 섬기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려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삽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실제로는 무의식의 내용일 경우가 많습니니다. 자아는 자신이 바램을 따라 삽니다. 이것이 인간의 생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삶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기입니다.
옛 어른들은 소학을 모르고서 어찌 대학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소학을 배움과 삶의 기본으로 두었습니다. 사람을 가르칠 때 소학의 기본기는 쇄소[灑掃]라 했습니다. 마당에 물뿌리고 쓰는 것, 응대[應對] 부름에 답하고 물음에 답하는 것, 부름에 정성스럽게 응답하는 것이죠. 진퇴[進退] 언제 나아가고 물러나야하는 예절을 기본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질구레해 보이지만 기본기는 마당을 쓸고 물 뿌리리려는 모습, 부름에 응답하는 태도, 나아가고 물러나는 분별력은 누군가를 향한 배려, 정성스럽고 충직한 태도가 그 핵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기본기는 자아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분을 입장을 생각하고, 누군가의 부족함을 기꺼이 채워가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나를 드려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삶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도 콜카타의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였던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되는 때 그가 남긴 편지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브라이언 콜로디척(2008): 마더 테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 오래된 미래).
그 책에 담긴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20세기 가장 숭고한 영혼이라고 하는 테레사의 번민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녀회 입문하여 평범한 수녀로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고통 속에 있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부름에 뿌리칠 수 없어서 인도로 갔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이루어가면서 테레사는 행복했을까요? 늘 기쁨 속에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테레사의 마음을 채운 것은 오히려 목마름, 어둠, 외로움, 냉담이었습니다. 때로는 천국에 대한 의심까지 있었습니다. 공적으로 그의 역할이 커져갈수록, 세상의 눈길이 자신에 더 쏠려질수록 그의 어둠도 깊어갔습니다. 어쩌면 그런 모든 역할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삶을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테레사는 천사의 가면을 쓴 위선자일까요? 아닙니다.
테레사에 이런 모습에 콜로디척은 테레사가 그런 내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저버리지도, 자기에 부여된 소명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의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김기석(2012):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꽃자리, pp 324-326 재인용) 이런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했던 그의 모습에서 삶과 신앙에 대한 엄중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따라 살고 편한 길, 넓은 길에 마음이 흔들리고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희의와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에게 부여된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 것, 좁은 길이지만 누군가의 삶의 부족분을 채워주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기본기임을 마음에 품었으면 합니다. 이런 기본기 위에 우리 내면의 영적 에클레시아를 세워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