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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야곱이 제사장이 됨(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할 때는 이 세 사람을 대표적으로 하는 말이다.
왜 이들이 대표자가 되는가? 아브라함에게서는 아버지의 속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사람의 대표자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창조 자체도 사실은 부르심과 마찬가지인데 창조가 빗나갔기 때문에 부름받게 된 것이다. 이삭은 아들의 형상이다. 하나님과 사람 안에서 아들이 된 사람의 형상이다. 그리고 야곱은 많은 과정을 겪고 만민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하다. 항상 이렇게 세 단계로 계시가 전개되었다.
출애굽을 보면 애굽에서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광야에 가서 양식을 먹고 양육을 받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를 세웠다. 신약 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세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에 생명의 복음의 문을 연 사람이다. 바울은 교회를 건축한 사람이다. 요한은 생명의 복음으로 누수된 모든 것을 꿰매는 역할을 했는데 기이하게도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예수를 만났고 바울은 원래 천막을 사람이었고 요한은 구멍 난 그물을 깁다가 예수를 만났다. 기이하게도 하나님의 복음이 확산되면서 문제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 문제들을 봉합하기 위해서 요한이 쓰였던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 함께 사는 생명이다. 이것이 사역의 삼 단계고 구원의 삼 단계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이렇게 삼단계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그러하다.
야곱은 모든 것을 취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야곱’은 탈취자라는 뜻이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려다 못나오고 할 수 없이 둘째로 나왔다.
그 이후 야곱의 행보를 보면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지을까, 어떻게 하면 내 것을 만들까?’ 하며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력한 것만큼 얻었지만 마지막에는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인생과 똑같다. 인생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얻었다는 사람도 있고 못얻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야곱을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왔구나.’라고 내 인생이 해석되었다. 왜 내가 이런 길을 걸어왔는지 해석할 수 없었는데 야곱을 보면서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렇게 하셨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안식이 되었다. 잘하고 잘못한 것이나 성공하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 알아져서 안심이 되었다. ‘어디로 가든지 주님이 함께 하시겠구나.’ 이런 마음이 생겨서 내 인생이 안식에 이르게 되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잃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가면 안되는 곳으로 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애굽은 세상과 죄악을 상징하는 곳이다. 아브라함 때도 그러했고 이삭 때에도 그러했다. 그랄로, 애굽쪽으로 내려갔다가 자리를 못잡고 봉변을 당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애굽은 그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할 수 없이 그곳으로 가야 했다. 조상들이 다 실패했던 곳으로 가서 아예 애굽에서 살게 된 것이다. 가나안 땅은 굉장히 메마른 곳이어서 흉년이 심했다. 흉년이 들 때마다 늘 변동이 생겼는데 야곱도 마찬가지로 흉년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거기는 양식이 있고 요셉이 있었다. 요셉이 있다 해도 양식이 없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양식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신비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사장의 일은 백성을 축복하는 일인데 그 일을 거기서 하게 된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가게 된 것이 아닌데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요1:12-13). 야곱을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야곱은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닌데 제사장이 되었고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 땅에 왔지만 영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제사장이 되셨다.
제사장은 원래 아론의 지파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예수는 아론의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였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는 제사장일 수 없는데 왜 제사장이라고 했느냐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제사장이었다. 살렘 왕이라고 되어 있는데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것이다. 이름도 없고 성도 없고 족보도 없고 난 날도 없고 죽은 날도 없다고 한 것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아론의 혈통에 속한 제사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말도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도 아론의 계통이 아니니까 족보가 없는 사람이다.
아론의 계통의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제사장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는 제사장이 아니라고 하니까 멜기세덱이 있지 않느냐고 한 것이다. 아론의 자손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도 있지 않느냐고 변론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창조자-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 동식하는 자신의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농사를 지으라고 맡긴 것이다. 이것은 생명농사다.
동산을 경작하는 직임은 신성이라는 씨를 인격 안에 재배하는 것이다. 신성 그 자체는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놓을 수도 없고 사람이 가질 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격 안에서 재배되면 다른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다.
씨는 먹을 수 없다. 그런데 씨를 밭에 심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가 되어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사람이 그냥 받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해서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줄 수 있다면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씨가 흙에서 재배되어야 하듯이 신성은 인격 안에서 재배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것이다.
경작은 중보와 마찬가지다. 먹을 수 없는 씨를 먹게 만드는 것이니까 흙은 씨와 열매 사이의 중보자인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위치다. 동산을 경작하는 직임은 인격 안에서 신성을 재배하여 생명으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게 공급하는 중보자(제사장)가 되는 것이다.
축복은 통상 위에서 아래로,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축복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대그룹 회장에게 “복을 받을지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그룹 회장이 “잘 사십시오.”라고 말하면 돈이라도 주지 않겠는가. 축복은 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축복이다.
오늘날 종교 안에서는 사제인 신부가 축복을 하고 목사가 축복을 한다고 제도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제도로 만든 것이지 실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축복을 하려면 가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직임은 얼마나 풍부하고 넘치는 위치인가!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에게 줄 수 없으면 가난한 것이다. 갖고 있다가 죽을 때 땅 속에 묻겠는가 무엇을 하겠는가. 돈이 있어도 도저히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돈은 벌기도 잘해야 하지만 쓰기도 잘해야 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 정승처럼 벌어서 개처럼 써 버리면 가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충성을 하지 않으면 자기보다 못한 것에게 충성을 하게 된다. “나는 중립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산다.”라고 생각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를 위한 것은 밥 먹는 것밖에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것밖에는 자기를 위해서 할 것이 없다. 아무리 별 일을 다한다 해도 자기가 살려고 하는 일이고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이고 자기 위치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남 위해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라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공헌하겠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래서 일생 동안 수고해도 칭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누구나 그렇게 살기 어렵다.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축복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다. 그러나 돈을 남에게 나누어 주기는 어렵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심 좋게 살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욕을 얻어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인가를 남에게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다.
야곱은 무일푼의 노인이었다. 양식이 없어서 쌀자루를 가지고 갔고, 나이는 백삼십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바로 앞에 서서 겁 없이 축복했던 것이다.
예수는 죽임 당하셨다. 야곱은 무일푼이었고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웠지만 예수는 죽임을 당하셨으니 야곱보다 더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유를 축복하는 주가 되셨다. 축복이라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많은 것이 있고 엄청난 지식이 있어야 남을 축복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신학자들이 공부를 얼마나 했겠는가. 철학을 넘어선 것이 신학인데 얼마나 공부를 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언어 장벽 때문이라도 위대한 신학자가 되기 어렵다. 그전 사람들의 모든 것을 섭렵해서 논문을 다시 써야 하는데 언어 장벽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데 제일 큰 장애가 언어라고 한다. 이과 계통이나 공업 계통은 과학적인 언어가 공식적인 언어라서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인문계 쪽 연구를 하려면 영어 실력이 없으면 못한다. 인문계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굉장히 어렵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다. 언어의 섬세하고 깊은 감정을 표현하기는 외국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노벨문학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아마 국어 사전이 지금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되어야 노벨문학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은 무일푼인데 축복을 했다. 무일푼인데, 죽었는데 축복을 했다. 가장 밑바닥에서 축복한 것이다. 아이러니다. 우리 생각에는 많은 것이 있어야 축복할 것 같은데 전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축복을 한 것이다.
자기 것이 없어야 남을 축복할 수 있다. 내 것을 가져야 남을 축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 것이 없는 사람이 남을 축복한다. 축복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무엇을 주겠는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야곱이 이 지경이 되어 축복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었다. 일차적으로 볼 때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사람이 폭삭 망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은 폭상 망한 것이다. 더 이상 어떻게 망하겠는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겠는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밑에 사람들이 뭐라고 했던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우리를 축복해 보라. 내려와서 우리를 살려라. 네가 그렇게 하면 우리 인간이 다 사는 것 아니냐. 네가 만일 거기서 내려온다면 인간이 다 거기서 내려올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로 물로 포도주도 만들고 물 위로 걷기도 한 사람이라면 인간을 축복해야 되지 않느냐. 인간이 죽음을 면할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 안죽도록 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 보라.”고 한 것은 “네가 안죽으면 우리도 안죽을 수 있지 않느냐. 네가 내려오면 우리도 내려올 수 있을 것 아니냐.”라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고 조롱한 것이다.
제자들도 한편으로는 속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한다면 그들이 출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바랐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유유히 내려올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사람이 내려올 수 있으면 우리 모두가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거기서 죽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그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조두순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죄는 어떤 사람은 짓고 어떤 사람은 안짓는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는가?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것이 원죄다. 그것을 아직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것이다. 왜 먹지 말라 하신 것을 고민도 없이 꼭 먹어야 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먹지 말라 하신 과일을 먹으면서 고민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아주 유쾌하게 먹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 하와가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담에게 주매 아담도 먹게 했다.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는데 이것을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며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원죄라는 것이 이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범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맨날 그것만 회개하고 있으니까 기독교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스님들이 새벽에 “이러저러한 것을 범했습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며 회개의 절을 한다. 그것과 예배당에서 회개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불교에서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들은 새벽 예불에 아주 구체적으로 “내가 오늘 누구에게 교만했습니다. 이것을 반성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중언부언 하며 남이 못알아듣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축복은 누가 하는가?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어야 축복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내 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축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신비한 일이다.
히브리서 5장 1절에 따르면 중보자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라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객관적으로 우리 사정을 안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속에도 그런 사정이 있다는 말이다. 중보자는 훌륭한 사람이나 성인군자가 아니라 자기 속에도 사람의 사정이 있는 사람이다. 내 속에 연약함이 있어야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고 축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연약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연약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하다 하였다. 그분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물 위를 걸었기 때문에 축복한다고 생각하면 예수를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법과 제도에 의한 객관적인 제사장이었다. 내 속에 있는 제사장, 내 속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간 것이 아니고 법에 의해서 갔던 것이다. 하나님께 갈 때는 내 피로, 내 생명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에게는 내 생명이 없다. 그 사람이 지성소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물의 피를 받아서 간 것이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한 고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듣기 어려운 말이니 잘 들어둬야 한다. 예수님은 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가? 하늘에서 왔고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연약함 안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너무 출중해도 중보자가 못된다. 선생도 너무 머리가 좋으면 선생 노릇을 하기 어렵다. 아이들과 교감이 안되기 때문에 멍청한 아이들이 왜 모르는지 모른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인데 선생이 너무 머리가 좋으면 그런 것이 안먹히니까 학생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들에게 아주 공부 못하는 학생을 연구해 보라고 한다. 거기서 선생이 돼야 선생이지 자기 혼자 잘났다고 가버리는 사람은 좋은 선생이 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연구소로 가야 한다.
자기가 머리가 나빠서 어려운 문제를 푸느라고 고생을 해 본 사람이라야 못 푸는 학생을 가르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가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이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안되니까 여러분 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종교적인 천재라면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못한다. 나는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지 몰랐다. 다른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하는데 나는 도대체 그것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 내가 종교적인 천재였으면 할 말이 없다. 그냥 믿어버리면 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친구와 밤새도록 토론을 했는데 “믿어. 믿으면 그냥 아는거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아, 알아야 믿지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 이러면서 밤새도록 토론을 했어도 평행선이었다. 모태신앙에다 뭐에다 해서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이 많다. 믿어지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모태신앙도 아니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게 되었고 여러분에게 유명해진 것이다.
여러분이 종교적인 천재들이면 ‘왜 한 소리를 하고 또하는가?’라고 생각하고 우리 교회에 답답해서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도 다 종교적으로 미스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나와 궁합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종교적인 천재들은 자랑이 너무 많지만 나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과 나는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너무 출중하면 중보자가 못된다. 석가모니 같은 분이 우리와 상대가 되겠는가. 우리를 상대하려면 답답해서 못할 것이다. 속에서 천불이 날 것이다. 적당하게 고생해서 배운 사람이라야 좋은 선생이 되지 공부를 너무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못시킨다.
원래 하나님의 동산을 인격으로 경작할 자는 누구나 만유에게 축복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흙으로 지은 것이다. 흙은 씨 하나를 받으면 몇 백배로 열매를 생산한다. 참으로 놀라운 선택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주고 싶은데 줄 방법이 없다. 자기를 분배하고 싶고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중보자를 세우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얼핏하면 성령이 하신다고 한다. 성령이 다 나누어 줄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가 필요하겠는가. 물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지만 “성령 성령” 하면 다른 것을 할 말이 없다. 나는 성령이 믿어지지 않아서 문제였다. 성령이 다 하신다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믿는 사람은 분배를 못한다. 나눠줄 수 없다. 성령을 받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종교적인 천재들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모르니까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동산을 경작하라는 말은 만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명으로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나누어 주는 것은 축복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것은 분배한다는 말이다.
흙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흙으로 중보자를 지으셨다.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드셨다는 말이 그 말이다. 우리 생각에는 가장 우수한 사람을 세워야 될 것 같은데 가장 우수한 사람이 아니라 흙을 세우셨다. 흙으로 열매를 만들게 하신 것이다.
흙이 열매를 만든다는 것은 기상천외한 일이다. 흙이 씨를 받아서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나오게 하셨다. 이런 능력은 세상에 없다. 세상은 아예 이런 능력은 꿈꿀 수도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흙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은 원자니 전자니 하다 양자까지 나와서 현미경으로 별 것을 다 보는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씨를 심어서 그것이 열매가 되게 하지는 못한다. 씨를 심어서 열매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다. 불가능하다. 우주를 비행할 때 몇 년씩 가서 목표점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인간이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못하는 것이 있다. 결혼을 안하고는 자기 자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결혼을 하는 것이 공부를 잘해서 하는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 아기를 낳는가? 공부를 잘하면 아기도 잘 낳는가? 그런 것과는 딴판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잘 들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면 아기를 잘 낳는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아기는 공부로 낳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좋아서 아기를 많이 낳는 것도 아니다.
제주의 서명균 형제가 나가는 부부 의사들 모임이 있는데 모이면 “왜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느냐?”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부부가 다 의사인데 아이들은 다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지, 유전 인자가 잘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다 머리가 좋아서 의사가 되었으니까 아들도 공부를 잘해야 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흙은 씨 하나를 받으면 몇 백배로 열매를 생산한다. 나무에서 과일이 열리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다. 첫 해에는 두세 개가 열리는데 그 다음 해에는 이삼십 개가 열리고 그 다음 해에는 백 개가 넘게 열리고 그 다음 해에는 세지도 못하게 열린다. 하나님께서 흙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택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자. 이 엄청난 일을 하는데 누가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천재들을 모아서 해도 안되고 만재를 모아서 해도 안될 텐데 흙을 선택하셨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천재들은 한탄할지 몰라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다.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다고 생각하면 너무 행복하다. 종교적인 천재들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너무 재미있다. 야곱 같은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 재미있는 일이다. 이보다 드라마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은 흙에서 열매가 나온다는 것이다. 야곱 같은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런데 흙에서 열매가 나온다는 것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이 위치를 버렸다. 이 좋은 위치를 우리가 버린 것이다. 이 좋은 위치를 버렸으니 무슨 복이 또 있겠는가. 복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일생 동안 헛일만 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는 잘한다고 하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지었는데 마지막에 보면 껍데기만 나오는 것이다.
맨 처음 우리나라에서 나온 비료가 유한비료다. 요소비료로 충주 비료공장이 유명한데 그 비료를 농작물에 뿌리면 새파랗게 잘 자랐다. 얼마나 비료가 좋았던지 뿌린 데와 안뿌린 데를 비교해 보면 천지차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내가 충주에 살았는데 가끔 펑 하는 대포 소리가 났다. 요소비료를 만들려고 공중에서 질소를 빨아들이는 소리였다. 마지막에는 하얀 설탕 같은 요소비료가 나왔다. 신기했다. 그런데 요소비료를 많이 치면 보기는 무성해도 바람만 불어도 다 쓰러졌고 가을에 알맹이가 별로 없다. 배추 같은 작물에 뿌리면 잘 자라는데 열매를 먹을 작물에 뿌리면 작살났다. 그래서 요즘은 복합비료를 쓰지 요소만 쓰는 사람이 없다.
미국은 땅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일 년 농사를 지으면 그 다음 해는 휴경하기 때문이다. 농작물만 거두고 남은 것은 그대로 두고 썩혀서 한 해 묵혀 놓는다. 일년 동안 땅이 쉬고 그 다음 해에 농사를 지으니 잘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 위치를 버렸다. 그렇게만 농사를 지으면 무진장 열매가 나올 수 있는데 이 위치를 버린 셈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할 수 없이 아론이라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다. 왜 하필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았는가? 이유는 성소에서 그의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났기 때문이다(민17:5 참조). 다른 지파 사람들이 형을 제사장으로 세운다고 비난하자 모세는 열두 지파의 족장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법궤 앞에 두었다. 이튿날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 그래서 아론이 제사장이 되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일인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게서 새 생명이 나왔다. 거기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해석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그런데 새 생명이 나왔다. 굳이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거기서 우리는 참 생명을 발견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신 데서는 능력만 나타나고 이 생명 자체가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능력은 없고 생명이 나타났다. ‘참 생명,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저런 사람이구나.’ 이것이 나타났다. 이것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아닌가! 성경은 정말 신기하다. 무슨 방법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마른 지팡이에서 어떻게 싹이 나겠는가! 바짝 마른 살구나무 지팡이에서 무슨 싹이 나서 꽃이 피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를 보니까 ‘아, 새싹이 이것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 또한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서 새 생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취했음으로 백성을 중보 할 수 있다. 연약하기 때문에 연약한 자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 가운데서 취했기 때문에 사람의 중보자가 될 수 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대표하여 하늘로, 지성소로 이끄는 사람이 제사장이다. 그래서 왕에게는 명령이 있지만 제사장에게는 명령이 없다. 왕은 하늘로부터 온 자니까, 하나님을 대신한 자니까 명령할 수 있다. 그런데 제사장은 명령할 수 없다. 사람을 대표하여 피를 받아서 지성소에 뿌릴 뿐이다.
예수는 죽음을 통해 세워졌음으로 죽음에 매인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였다(히4:14~5:1~10 참조). 어떻게 예수가 우리를 중보하는가?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다. 그가 죽으셨는데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 모든 사람이 죽으니까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죽는 것이 인생에게 가장 큰 문제다. 죽는 것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니까 죽음에 매인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죽음을 통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세워졌음으로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인 자들의 중보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러므로 거기서 새 사람이 나오면 다 나올 것 아닌가!
종교적으로 천재여서 구원을 받는가? 종교가 전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밖에 안된다. 잘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잘 믿으면, 잘 충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잘해야 구원을 받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내놓고 “봐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하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말만 듣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다. 예수가 내 구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해 봤자 수박 겉핥기다. 수박 겉만 핥고 수박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냄새는 약간 날 것이다. 하지만 수박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수박 먹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정적인 자리에 가면 다 뽀록난다. 깨뜨려진 수박을 먹어야 되지 멀쩡한 수박을 핥아 보고 수박을 먹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냄새라도 약간 맡았으니까 안한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수박을 먹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중보자-야곱의 길을 따라서 참 중보자(제사장)이신 예수 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들이다.
야곱은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결국 축복밖에 남지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 사람이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 길이 죽 이어져 왔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와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야곱과 예수님은 제사장인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야곱과 예수는 한 맥이다.
지금 우리는 야곱을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에 야곱을 읽으면서 왜 야곱이 이랬는지 몰랐다. 나도 처음에 야곱을 읽을 때 ‘내 인생을 환히 비춰주는구나. 내 인생과 같구나.’라고 알았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고 편안해졌다. 내가 왔다갔다 하고 헤매고 했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듯이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있었다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공개되었다. 숨길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다 드러나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평안이 왔다. 숨길 것이 없는 자리에서 평안이 온 것이다. 고개를 처박고 궁둥이만 내놓고 있을 때는 평안이 없었는데 다 보는데 공개되어 버리니까 번민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야곱에게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께로 올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예수께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 시대 사람이 얼마인데 아브라함만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가 나와 놓고 뒤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부름받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일부러 찾아가서 부르셨겠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온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부르심으로 들렸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를 보고 해석해 보면 아브라함이 그러했을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늘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면 누가 부름받겠는가. 성경을 잘 보면 아무도 그렇게 부름받을 사람이 없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 하나님이 오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밤에 찾아왔다고 하고 꿈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니 답답한 일이다. ‘저렇게 들었다는데 나는 왜 못듣나?’ 나는 이것이 고민이었다. 그 사람은 보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못보는가?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일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이 안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상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할머니도 만나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데 홍해가 갈라지듯이 비가 갈라져서 자기 몸에 비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고 그 할머니가 말하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지 나에게 구원이 되지 않는다. 그분은 너무 출중하기 때문에 나에게 제사장이 안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출중한 사람이 많다. 특별한 사람도 많다. 너무 충만해서 얼굴이 달덩이 같은 사람도 보았다.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나에게 구원이 안된다. 젊은 사람들이 그 사람 밑에서 배우려고 제자로 들어갔다가 못배기고 떠났다. 기도를 하면 언제 끝날지 기한이 없으니 선생이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가 잠을 자겠는가. 밥도 때가 없으니 선생님이 안먹는데 제자가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왔다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 출중해도 안된다. 나는 그때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보자의 길을 야곱으로부터 시작하셨다. 탈취자, 온갖 재주를 부려서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 하지만 마지막에는 빈 손이 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셨다. 이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 길이 제사장으로 가는 길이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으로 가는 길이다.
제사장으로 가려면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물에서 수영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 되지 옷입고 수영을 하겠는가. 등산을 하려면 등산복을 입어야 되지 신사복을 입고 등산을 하겠는가. 야곱은 수영을 하려고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길은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는 길이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이렇게 성취된 것이다. 야곱도 자기가 제사장이 되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길로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아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론은 할 수 없이 법으로 세워놓았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우리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원래 그렇게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래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보가 될 수 있다.
야곱 같은 사람이니까 나에게 중보가 되지 월등한 사람이 중보자가 되겠는가. 천사같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이 중보자가 되겠는가. 공자님이나 석가모니가 나에게 중보자가 되겠는가. 그분들은 훌륭한 분들이다.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분들은 “나를 따라오라.”는 말을 못한다. “너도 가서 나처럼 하라.”고 하지 따라오라고 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 하셨다. 중보자니까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다. 공자님은 제자들에게 배우라고 했지 자기를 따라오라는 말을 못했다. 우리 아버님도 어찌하든지 나를 좀 나은 분에게 데려가서 배우게 하려고 하셨다. 그것이 어렸을 때는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탈취 자였던 야곱,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이스라엘이 된 사람, 그러나 무일푼이 된 이스라엘, 그리고 육체가 되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비슷하지 않은가. 환도뼈가 부러져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야곱과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비슷하지 않은가!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이 예수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못내려오는 사람이 야곱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계통이다.
이들은 스스로 제사장의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다(히5:5,6). 그런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야곱 같은 사람을 들어서 제사장이 되게 만드셨다. 어떻게든 장자권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을 붙잡아서 중보자가 되게 만드셨다. 원래 하나님의 정하신 대리자로서의 위임을 회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붙잡으신 것이다. 스스로 제사장의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대리자다. 그 위임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니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다 야곱같이, 다 예수같이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자기대로 해 보겠다고 뛰쳐나갔고 하나님의 관할권에서 벗어나서 어찌할 수 없었을뿐이지 원래 사람은 제사장으로 정해진 것이다. 예수에게만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정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이 우리의 제사장이 된 것이다. 스스로 취하신 것도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다. 원래 주신 것인데 우리가 못찾아 먹은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못찾았는데 십자가에 못박아 놓으니까 비로소 터져나온 것이다.
이 위임은 멜기세덱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창14:18). 인간적으로,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제사장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아론보다 훨씬 먼저 나타났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오는 판에 갑자기 멜기세덱이라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것이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평강의 왕’이다. 아브라함은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해석하였다(히7:1). 족보도 없고 계통도 없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난 날도 없고 죽은 날도 없고 어찌된 사람인지 모르는데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했으면 아브라함보다 큰 자가 아닌가.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이 사람이 진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제도에 의해서 된 것이고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은 진짜라고 한 것이다.
바로 예수가 그렇다는 것이다. 왜 아론의 지파가 아닌데 제사장이라고 하는가? 아론보다 먼저 멜기세덱이 있었으니까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반차를 좇았는가. 우리는 예수의 반차를 좇았다. 예수의 반차는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주는가? 원래는 모든 사람을 제사장이 되게 지으셨다. 간단하다. 아론의 제사장 직을 놓고 이러니저러니 하니까 아론보다 먼저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의 반열을 따라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사장이 되는가? 예수의 직분, 예수의 반열을 따라서다. 알고 보면 원래 사람을 지으실 때 제사장으로 지으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신 것이 그 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고 지으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이 먼저 나타났고 그 반열에서 예수가 나왔다. 우리는 예수의 반열에서 났는데 알고 보면 원래 하나님이 이렇게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 사람들만 특별하게 남이 못하는 것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보니까 원래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그가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었다면 특별한 일이겠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드러났으니까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가 우리의 제사장이 된다면 우리도 제사장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가 제사장이 된다면 내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계속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왜 이 말을 계속하느냐는 사람이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왜 이 말을 하는가? 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이야기는 저절로 다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사장이 되려고 하면 얼마나 해야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 지팡이에서 어떻게 싹이 나겠는가. 내가 의지하고 다니는 살구나무 지팡이에서 어떻게 새싹이 나겠는가. 누가 제사장이 될 수 있겠는가. 사실은 다 가짜고 법으로 임명한 것이지 진짜가 있겠는가. 사제니까, 목사니까 제도로 축복하는 것이지 누가 축복을 할 수 있겠는가.
교파에서는 목사라야 축복권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도사는 축복을 못한다. 강도사도 축복할 권한이 없다. 목사라야 축복을 할 수 있다. 예배 끝날 때 축복하는 것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의식이지 그렇게 한다고 축복이 되는가.
이 세계는 너무나 실재적인 세계다. 아무것도 거짓을 붙일 수 없는 세계다. 생명은 거짓이 없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거짓말로 할 수 없다. 아기를 낳아 젖을 먹이니까 걸어가더라는 말을 거짓말로 할 수 있겠는가.
이론적인 것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꾸며 만든 것이다. 생명은 꾸며 만든 것이 아니다.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는 말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제사장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국한시켜서 ‘예수는 하늘로부터 와서 그렇지, 동정녀에게서 탄생했으니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니까 그렇지.’라고 하면 우리와 상관없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참 사람이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에게 제사장 직을 위임하셨다.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면 다 제사장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보다 큰 복음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데 어디 있는지 몇 년 돌아다니며 찾아보고 와도 괜찮다. 너무 오래 다니면 안되지만 돌아다녀도 괜찮다. ‘여기만 있겠는가. 이 목사, 저거 독선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가서 찾아보고 와도 괜찮다.
이보다 명백한 것이 없다. 사람을 지으실 때 주셨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된다. 이 유일한 위임은 얼마나 존귀한 영광인가! 할렐루야!
이런 위임이 축복이다. 복음이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을 인도한다는 것, 사람을 지성소까지 데리고 간다는 것, 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가!
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번제단에서부터 사람을 지성소까지 데리고 가는 사람이 제사장이다. 맨날 양만 갔지 사람은 못갔다. 양은 매년 갔지만 사람은 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사람을 이끌고 가는 제사장이 나왔다. 사람을 지성소로,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는 참 제사장이 나왔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겨우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가지고 간 것인데 그것은 양이 간 것이지 사람이 간 것이 아니다. 그냥 형식으로, 의식으로 사람을 대신해서 드린 것이다.
대신해서 되겠는가. 누가 내 대신 결혼할 수 있는가? 내 대신 결혼해서 내 아들을 낳아 줄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유일한 위임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가! 백 년밖에 못산다고 인생을 한탄할 것이 아니다. 삼십 년만 살아도 이 영광과 존귀를 받지 않았는가! 이보다 더 확실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확실하다. 나도 생각 없이 있을 때는 감사한 줄 모르는데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어떤 사람은 생각할수록 고민이 생긴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 안하고 그냥 살아서 그렇지 생각만 하면 감사하다.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도 없이 늘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없지만 생각만 하면 감사하다.
흙은 씨를 받으면 열매를 생산한다. 그 쓸모없는 흙이 열매를 만든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주인에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돌려드린다. 할렐루야! 흙이 할렐루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제사장은 사람-그 생명을 하나님께로,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는 자다. 제사장은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갔고 예수는 자기 피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자기 피가 누구의 피인가? 우리 피가 아닌가! 자기 피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그래서 옛날 제사장이 하듯이 해마다 드리는 제사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기 피가 누구 피인가? 우리 피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의 피다.
자기 피를 드렸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독특한 피를 드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특한 피는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피다. 예수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피다. 예수님의 피라고 외계인처럼 파란 피가 아니라 사람의 피다. 우리의 피다. 내 피인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셨다.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은 그 안에서 생명만 뽑아서 가셨다.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이 분이 와야 한다. 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다 같이 해 보자. “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가 할 말은 이 말밖에 없다. 우리가 기도할 말은 이 말밖에 없다. 중언부언 헛소리를 할 이유가 없다. “오, 주여 오시옵소서.” 하면 된다. 더 가까이, 더 깊이 내게 오시옵소서. 이 기도만 평생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