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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열하일기
7월 4일 목 맑음. 압록강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다.
새벽 3시 반에 시계가 울어 잠에서 깨어 집의 차로 6호선 전철 연신내역까지 갔으나,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만 좀 다닐 뿐 딴 방법이 없어, 택시로 옮겨 타고 서쪽으로 나가서 월트 컵 경기장 근처에서 인천공항으로 나가는 전철을 타보려고 하였으나, 역시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다시 택시로 공항까지 가니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다. 8시 10분 비행기니, 좀 더 기다리다가 전철을 타고와도 될 것을, 아침 6시까지 공항에 모이라는 것만 보고 오다가 보니 새벽부터 차비만 많이 썼다.
일행은 안동에서 고문서를 연구하는 임덕선 박사(고문헌연구소소장) 이외에는 대개 대동한문학회(회장 이종호 안동대교수)에 속한 영남대(김혈조, 송병열), 안동대(이종호, 신두환, 김남기,황만기, 김동석) 등의 교수·강사들이 많은데, 고대(김언종), 성대(김영진), 원광대(권문봉), 대구한의대(이내종) 교수도 있었다. 최근에 가장 잘된 《열하일기》의 역자인 김혈조 교수를 위시하여 대개 연행록과 한중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명 일행 중에 홍일점으로 동행한 이정희 교수는 계명대에 한문학과에서 강의하는 조선족 출신의 50대 초반의 학자인데, 한말에 김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중국에 가지고 가서 여러 중국문인들의 발문을 받아온 유명한 역관 이상적李尙迪 연구로 박사를 받은 분이다.
나이는 40대에서 60대인 것 같은데, 내가 단연코 제일 많았다. 그러나 나도 약 40년 전에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록》을 번역하였고, 근년에 병자호란 뒤의 격동기인 인조·효종·현종 조에 재상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문집과 실기를 공역한 일이 있기에, 이 사람들의 이 행차에 동참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신청을 하였다.
심양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몇일 동안 대절하여둔 관광버스를 타고서 3시간 정도 남하하여 오후부터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였다. 심양에는 이전에 두어 번 와본 일이 있지만, 겨울 공기에 유연탄 냄새가 역겹게 느껴지던 일과, 북쪽에 납치될 위험이 많으니 몸단속을 잘 하라던 으스스한 기억 이외에는 별로 없다. 두 번째 온 것은 큰 집에서 운영하는 삼보 공장 낙성식에 맞춘 것인데, 그 때 “완샤(원샷), 완샤”하면서 호기롭게 술을 권하던 시장도 뒤에 부패 공직자로 몰려 옥사하였다고 한다. 다만 그때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쯤 내려와서 본계本溪라는 만주족 촌에 가서 1시간 반쯤 배를 타고 동굴 안 유람을 한 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은 새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는데, 역시 본계라는 곳을 지나게 되니 매우 반가웠다. 점심도 그 근처의 길 가 식당에서 먹었다. 압록강 국경 지대에 접어들기 전에 옛날 교통의 요지이던 구련성九連城 쪽을 경유하였는데 아는 지명이 나오니 반가웠다.
첫 걸음으로 호산虎山이라고 하는 국경지대의 산성에 올라가 보았다. 근년에 중국에서 “《명사明史》에 근거하여” 쌓았다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는 구조물이다. 반시간 이상 힘들게 올라가 보니 바로 아래 북한 땅으로 되어 있는 강과 섬과 밭들이 보인다. 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오직 이 곳만은 막혀 있다니! 한참 둘러보다가 내려와서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타고서 북한 수역水域을 한 시간쯤 선유하고 나왔다.
배를 타기 전에 조선족 가이드가 몇 가지 조심할 점을 이야기하면서 잘못하면 돌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는데, 정작 그 안에 들어가서 북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그 녀석이 먼저 나서서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손을 흔들어 댔다. 얼마나 말과 행동이 다른 녀석인지? 우리 일행은 대개 감회에 젖어 울적해 하고 있는데, 다시 버스에 타더니 여교수도 한 사람 있는데도 음탕한 농담을 한 바탕 늘어놓으면서 제 밑천을 자랑하였다. 하기는 이러한 유의 가이드를 좋아하는 부류의 관광객도 많은 모양이다.
6·25 사변 때 미군에 의하여 폭파된 압록강 대교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아파트에 들어가서 집을 푼 뒤에, 김혈조, 이내종 교수와 함께 다시 압록강 변에 나와서 산책을 하였다. 밤이라 강 건너 북한 지역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단동 지역 강변에는 불과 10년 안에 들어선 아파트들이 즐비하였다. 이 교수가 “10 수년 전에는 상해 푸뚱 지역에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변하였으니 10년 후에 북한 지역에도 그러할 날이 올는지?”하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저 캄캄한 맞은 편 강둑에도 환한 빛이 감돌 날이 오기만 기대하여 본다.
호텔로 들어오는데 보니, 우리 일행들이 길목 가판에서 양 꼬치와, 술, 과실을 사놓고, 길바닥에 돌을 깔고 앉아서 노래잔치를 벌리고 있다. 몇몇 사람은 전에도 더러 어울려 논 적이 있는 듯, 매우 즐겁게 시도 외우고 유쾌하게 노래도 부른다. 같이 어울려 양 꼬치도 몇 가지 뜯고 맥주도 한두 잔 마시다가 일어났다.
7월 5일 금요일 구름. 봉황산鳳凰山 구비를 돌다.
하루 종일 어제 비행기에서 내렸던 심양으로 다시 올라가는데, 어제와는 달리 옛 연행루트를 찾아본다고 해서 지방의 소로도 많이 찾아 다녔다. 대개는 지금의 철도노선과 연행도로가 일치하지만 좀 자세하게 보려면 작은 차를 타고 찾아다니며 샅샅이 찾아보는 게 좋다고 한다.
아침에 구련성 유적지라는 표시판이 있는 시골 길 가게 앞에서 잠시 내렸다. 내가 번역한 연행록에 보면 이 곳에 5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말 5백여 필을 끌고 들어와서 야영을 하는데, 정사正使등 높은 어른들은 급조한 간이 온돌 위에 눕고, 아랫사람들은 불을 크게 피워놓고서 자는데 호랑이가 나타날까보아, 밤새도록 조를 짜서 불침번을 서면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어 일행이 모두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지금 보니 심양서 이 일대까지 여전히 산은 많기는 하나, 고속도로의외에 철도도 진작 놓이고 지방 소로도 많이 나고 또 웬만한 평지는 모두 농지로 개발되어서, 호랑이가 이런 데에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
책에서만 신비하게 여기던 곳을 이제 와서 보니, 초라한 가게 처마 밑에 놓인 “구련성구지舊址”라는 볼품없는 세멘트 표석 하나뿐이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라가 통일이 되어 국세도 크게 떨치고, 양국의 우호도 좀 더 돈독하여진다면 이러한 곳 처처에 볼만한 사적비를 세우게 될 날을 꿈꾸어 본다. 수 천백년 동안 수많은 한·중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지나다닌 길목마다 말이다.
연변에서 나온 가이드 이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유학하여 연행관계로 석사까지 하였다는 심양에서 나온 가이드 한 사람도 처음부터 동승하여 열심히 안내를 하기도 하였는데, 아는 것도 많고 또 매우 학구적인 것 같았으나 이야기 내용에 가끔 사신들이 지은 한시 같은 것도 인용하는데다가 우리 말 발음조차도 좀 이상하여 다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차를 몰고 가다가 더러는 길이 너무 좁아서 막히기도 하고, 또 돌아가기도 하였다.
오늘 구련성 다음에 책문이니, 통원보니, 초하구니, 연산관이니, 첨수참이니 하는 들어본 것 같은 지명을 많이 지나갔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책문과 통원보 사이에 있는 봉황산이다. 높이도 북한산과 비슷한데다 거의 바위 돌로 된 점도 비슷하다.
요양이라는 오래된 도시에 들어가서 잤다.
7월 6일 토요일 맑음. 청의 옛 도읍지 요양遼陽
오전에 요양박물관과 백탑이라는 높이 71.2미터의 요금 시대의 전탐을 구경한 뒤에 오후에는 약 2시간 쯤 달려서 심양에 다시 들어가서 잤다. 요양은 현재 인구 80만, 청 태조 누루하치가 4년 동안 도읍을 삼았던 곳이다.
저녁에 호텔 방에 모두 모여 술을 마셔가면서 안동대 한문과의 황만기 박사에게 그가 전공한 척화 대신 청음 김상헌金尙憲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청하여 들었다. 그의 척화주장과, 억류생활에 관하여 잘 설명하였다. 나도 같은 친명파로 의심을 받아 경상감사로 재직 중에 봉황성鳳凰城까지 불려가서 청나라의 장군 용골대龍骨大 앞에서 청음과 함께 문초를 받은 적이 있는 정태화의 청음에 관한 증언을, 《양파집》과 《양파실기》에서 읽은 대로 조금 소개하였다.
생각하여 보면, 지금 우리들이 다니고 있는 이 길이 한 때는 조상님들이 피눈물을 뿌리며 다니시던 한 맺힌 길이 아니었던가?
7월 7일 일요일 맑음. 청 태종의 소릉은 그래도 좀 산듯하였다.
오전에 소현세자의 주거지를 찾아서 아동도서관에 가 보았으나, 이 근처일 것이라는 그 도서관의 전관장의 말만 전화로 확인하였을 뿐이다. 중국 전체로 보아도 인구가 몇 번째로 많은 이 큰 도시 안에, 주말이라 사람이 많이 붐비고 일부는 수리 중이라 먼지가 펄펄 나는 지저분한 청나라 초기의 고궁, 규모가 매우 큰 요녕성 박물관 등을 둘러보다가 지쳤다.
그러나 오후에 북쪽 교외 한적한 곳에 있는 소릉에 가서 보니, 지역도 넓은데다가 큰 호수도 있고, 주변을 감도는 성벽도 있어 올라가서 걸어보니 더운 날 도심에서 지친 기분이 한결 가라앉았다.
저녁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 근처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좀 허름하였지만 한적하여 좋았다.
7월 8일 일요일 비. 의무려산에 비를 맞고 오르다.
홍대용의 《의산문답》이라는 책의 제목에도 나오는 이 산을 이름만 듣다가 찾아와서 오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요동반도의 평야 가운데서 돌 바위로 이루어진 높이 867미터의 오뚝한 산이나, 지금은 너무 인공 가공물이 많이 들어서서 오히려 그렇게 높다는 생각도, 또 신비하다는 느낌도 들지는 않는다. 내려와서 평지의 언덕 위에 있는 이 산의 산신을 제사지내는 북진묘北鎭廟라는 사당에 들어가서 보았다. 넓은 마당에 건륭황제가 여기 여러 차례 와서 지은 시, 올린 제문 등의 친필을 세긴 비가 수 10개나 서 있다. 역시 황제는 이래서 할 만한 모양이다.
금주錦州라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명나라 말기에 조선족의 후예로 이 요동지방에서 권력을 장악하였던 이성량李成梁 장군의 패루牌樓를 찾아갔다. 정말 지저분한 시장 한쪽 구석에 있었는데 마침 수리 중이었다. 그는 임진란 때 조선지원병 사령관이었던 이여송 장군의 아버지인데, 명말 청초의 격동기에 비록 몇 차례 부침은 있었지만, 명나라 조정으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아 부귀를 누릴 수 있었고, 만주족의 통합에도 도움을 준 은덕을 뒷날 청 왕조에서 인정하여 이러한 기념물을 세우게 하였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다시 영원성寧遠城으로 내려와서 역시 시장 끝에 있는 명나라 말기의 조대수祖大壽 장군의 패루를 찾아보았다. 같은 시장이나 이 곳은 매우 깨끗하니 도리어 이상하다. 조씨 가문은 4대에 걸쳐 명나라에서 큰 무공을 세웠으나, 청군이 들어올 때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청에 항복한 비운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의 무덤과 이 패루의 축소형을 카나다의 황립온타리오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안에 옮겨 놓은 것을 2년 전에 내가 가서 직접 본 일이 있다. 무덤까지 파 옮겨 놓다니 정말 고약한 처사로 생각되었다.
저녁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있는 진황도에 와서 자게 되었다. 심양 이후로는 심양에서 나왔던 가이드는 따라오지 않은 대신, 버스 안에서 김혈조, 허권수(경상대), 송병열(영남대) 교수 등이 번갈아 가면서 명말 청초의 역사, 인물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탐학 무도하였던 명나라 마지막 숭정崇禎황제, 산해관을 끝까지 잘 버티고 있었으나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받아 비참하게 살해된 원숭환袁崇煥 장군, 어쩔 수 없어 청나라에 항복하였으나 다시 청에 반기를 들었던 오삼계吳三桂 장군 등에 관한 비사悲史는 매우 구슬프지만 들을 만하였다.
진황도 호텔에 도착하자 처음부터 이까지 따라 다니던 연변 쪽의 가이드와, 그 사람의 견습생 2명과 버스는 되돌아가고, 북경에서 나온 가이드가 새 버스를 가지고 와서 교대하였다. 역시 조선족이지만 앞의 사람보다는 함경도식 어투가 덜하다.
7월 9일 월요일 흐림. 산해관山海關에 오르다.
진황도, 산해관 쪽으로 오니 또 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산해관의 관문을 구경하고,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으러 나왔다가 제물로 희생된 남편을 찾아왔다가 죽었다는 맹강녀의 사당묘孟姜女廟을 찾았다. 장성의 끝자락이 바다에 까지 들어간 노룡두老龍頭까지 둘러 보고서, 4시간 이상 험준한 산길을 파고 새로 낸 고속도로를 달려 열하가 있는 승덕承德 시까지 갔다.
산해관의 관문 안에서 노인들 두 사람이 전통 관인들 복장을 하고서 중국 돈 10원씩 받고서, 옛날식 관문 출입증을 붓으로 적어 주었다. 일행 중 몇 사람이 장난으로 그것을 받았는데 보니 신분은 “조선인 씨명氏名”이라고 적고서, 본인의 성명 3자를 물어 적은 뒤에 증명을 만들어 주었다. 장난기가 심한 안동대의 신두환 교수를 보고서 “신분란에 기왕이면 조선 정사朝鮮正使라고 적어 달라고 하지요”라고 하였더니, 정말 그렇게 적어 달라고 해서 받아 들고서는 매우 의기양양하였다. 그 통에 그는 지갑을 잃어 버렸는데, 성위에 올라가서 돌아다닐 때 그것을 주은 중국 사람이 지갑에 있는 신분증의 얼굴을 보고서 찾아다니다가 만나서 전하여 주었다고 하면서 또 매우 감격하였다. 자칭 신경림 시인 등을 포함한 “아주 신씨 3대시인”중의 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연전에 《선비 임금을 꾸짖다》라는 책을 내었는데 매우 많이 팔렸다고 한다.
산해관에서 승덕까지는 험한 산들 뿐인데, 멀리서 보이는 산봉우리 모습은 대개 퍽 기괴하게 생겼다. 그러나 길 근처에 보이는 산들은 어찌 된 셈인지 고목은 별로 보이지 않고, 또 대개 산 중턱까지도 과수원이나 밭으로 개발하여 두어 별 볼 품이 없고, 또 낮은 골짜기에는 더러는 세맨트 공장, 돌 공장이 수 없이 늘어서서 야산의 산세를 형편없이 망가트리고 있다. 이전에 중국 본토를 여러 곳 여행할 때도 보니 대개 이 모양이라서 크게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요동에 들어와서 보니 대개 산세가 험준한 산악지역에는 산림이 잘 보전되어 참 다행스럽다고 여겼더니, 이 일대에 와서 또 다시 이러한 예사스럽지 못한 모습을 접하게 되니 참 안타깝다. 인구가 너무 많다가 보니 산까지 다 갉아야 살 길이 나오는지?
승덕시에 가까워 오자, 예상치 못하였던 산뜻한 새 도시가 나타난다. 불과 10여년 만에 인구 200만에 이르는 이 현대 도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지하자연, 석재, 관광업 등이 이 도시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연 평균 기온이 섭씨 10도 정도이기 때문에, 옛날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름 휴양지로도 좋다고 한다. 지금 북경까지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니 호황을 누릴만한 것 같다. 이래서 중국은 알 수 없는 곳이다. 지금까지 다녀온 곳에서 가끔 보게 된 더러운 시장골목과 고약한 재래식 변소들을 생각하면 곧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이러한 선경仙境같은 현대도시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7월 10일 수요일 흐림, 피서산장 유람
먼저 문묘에 갔다가, 붐비는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 피서산장을 유람하였다. 컴컴한 궁전 건물들을 좀 보고서, 관광객을 태우고 넓은 구내를 도는 작은 차로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연암선생이 들린 곳이라고 해서 공자묘(문묘)에 갔는데, 규모는 상당히 컸으나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서 빛을 잃고 있다. 꼭 절간과 같이 공자와 그 제자 상을 조작하여 모셔놓고, 헌금함을 그 앞에 놓아두었다. 이전에 사천성의 삼국지 유적지 투어에 참가하였을 때 보니 이름난 전적지마다 장군들 상을 모신 큰 사당을 세우고서는 이렇게 하여 두었고, 또 무이산에 갔을 때도 보니 주자의 사당에도 이렇게 하여 두고서 돈을 넣고 “절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권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니 유학의 전통이 처량하게 변모한 것 같아서 서글프다. 그러나 옛날에 천자가 자주 와서 배알하였다는 기념비만은 아직도 우뚝하다.
피서산장의 면적은 5백 만 평이 넘는다니, 별궁치고는 대단한 규모라고 할 수 있으나 한동안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지 높은 구릉 같은 데에 서있었을 고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걸맞게 관리를 하자면 앞으로 많은 배려를 하여야할 것 같다.
“열하熱河”라는 이름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물이 산장의 연못 한쪽 구석에서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연암선생이 가 보았다는 라마교의 사원들은 언덕 위에서 바라만 보았지 가 보지는 않았다.
오후에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에 연암선생이 들렸다는 만리장성이 지나가는 한 마을에 들려 보았다. 신작로를 내느라 장성을 끊어 놓았는데, 이전에 황제가 열하로 다녔다는 길을 보존하고 있고, 마을에서 민박을 받는다고도 한다. 바쁘지만 않으면 이런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북경 국제공항이 가까운 호텔에 들어가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장을 풀어 놓고, 몇 명은 발마사지를 받고 왔고, 몇 명은 북한쪽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가무를 구경하다가 왔다고 한다. 인물은 모두 잘 생겼지만 어쩐지 “노래하는 기계”와 같이 보이더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7월 11 일 목요일 흐림. 귀국
아침에 북경국제공항에 나가서 입국 수속을 한 뒤에 낮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들어오니 오후 3시 10분인데, 전철을 3번, 버스를 1번 갈아타고 집에 왔다.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고, 돈도 버스비 1,050원 밖에 들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 중국에서 산 물건이라야 의무려산에 올라갈 때 산 우산 하나(중국돈 20원) 뿐이고, 마지막 날 저녁에 북경에서 발 마싸지에 안마까지 한다고 185원을 더 썼을 뿐이다. 우산을 버리고 올까하다가 가지고 왔는데 집에 와서 다시 펴보니 벌써 천이 한쪽 찢어지고 있다. 나 같은 경우, 중국에서는 책이나 살까 딴 것은 살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책에서만 읽었던 곳을 한 차례 다녀온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아직도 중국의 오지 여행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그 중 제일 곤란한 것은 역시 화장실 사용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다니다 보니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좋은 정보도 많이 얻게 되었다. 흘린 땀이 값지다고 생각한다. 끝(13.7.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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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 열하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여름에도 승덕은 좀 덜 더운지요.....요즘 이상기온이라 하얼빈에도 한 낮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간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여행을 하셨읍니다. 공연히 셈이 납니다. 저도 따라 갔더라면 한문은 모르더라도 요즘 열하일기가 대 유행이라서 야, 열하일기 답사을 가 봤어, 하고 폼을 잡았텐데------, 선생님 건강하게 다녀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 곳의 여름 날씨가 꼭 어떤지는 잘 모르겟으나, 산과 물이 많으니 북경보다야 좋을 것 으로 생각합니다.열하일기 등 연행록에 대한 열기는 중국학자들에게까지도 많이 일어났다고 하며 남경대학에서는 곧 30종의 연행록을 정리하여 간행한다고합니다.우리 연구회 친구들도 몇 명 동참하엿더라면 좋앗을 것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