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앙간비금도
이정인(이정순)
모처럼 바깥에 나온 초희는 딴 세상에 온 것처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탁 트인 바닷가에서 정신없이 뛰어 놀았다. 하지만 함께 나온 어머니 김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초희야, 이제 그만 집으로 어서 가자.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나.”
“어머니. 오늘 어떻게 나온 나들이인데 벌써 들어가려고 그래요? 저 안가요.”
초희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자 어머니 김씨는 말문이 탁 막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참 넌 고집도 세구나. 이제 정말 안 되겠다. 어서 가자.”
어머니 김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억지로 초희의 손을 잡아끌자 초희는 그만 발을 헛디뎌 커다란 돌부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악! 피 피다.”
초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일어서지를 못했다. 초희는 하얀 무릎에서 터져 나오는 빨간 피를 보고 덜덜 떨며 엉엉 울어버렸다.
“초희야, 괜찮니? 어디 보자.”
어머니 김씨가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누군가 초희의 무릎을 살피며 알은체를 했다. 어머니 김씨와 초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달이 아니니? 달이 오라버니.”
"안녕하세요? 안녕."
초희는 흠칫 놀랐지만 불쑥 나타난 달이 오라버니를 보자 반갑기만 했다. 평소에도 오빠의 친구인 달이 오라버니가 자신을 귀여워 해주고 공부도 잘 가르쳐 주니 좋았다.
“초희야, 얼른 내가 치료해줄게. 조금만 참아봐.”
달이는 얼른 주머니에서 빨간 댕기를 꺼내더니 재빨리 초희의 무릎을 꽉 동여매주었다. 초희는 그제야 무섭고 떨리던 마음이 좀 놓였다. 달이 오라버니를 만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만하길 다행이야. 이제 앞으론 조심해서 다녀.”
달이가 타이르자 초희는 볼멘소리로 입을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저 속상하단 말이에요. 자꾸 그러지 말아요.”
“어휴, 이제 좀 안 아픈가 보네.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걸 보니.”
달이가 초희를 빤히 쳐다보며 뭐라 하자 어머니 김씨가 끼어들었다.
“고맙네. 고마워. 그런데 사내가 어찌 댕기는 다 가지고 다니나?”
어머니 김씨가 슬쩍 의아스런 목소리로 묻자 달이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사실은 오늘 단오제 구경하러 나갔다가 방물장수가 파는 빨간 댕기가 하도 예뻐서 우리 누이동생 주려고 하나 샀던 거예요.”
“아이구, 그럼 미안해서 이걸 어째? 누이동생에게 줄 댕기를 우리 초희한테 줘서 어떡하나? 내 다음에 하나 사서 주겠네.”
어머니 김씨가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달이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초희는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얼마나 지혜롭고 영특한지 하나를 가르쳐주면 백을 아는 아주 기특한 동생이라 무얼 줘도 아깝지 않아요. 제 동생 댕기는 다음에 또 사면되어요. 헤헤.”
달이가 어머니 김씨 몰래 눈을 찡긋거리며 한껏 치켜 올려주자 초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기분이 붕 들떴다.
“어쨌든 오늘은 무척 고마웠네. 자 그럼 어서 가보게. 우린 늦으면 큰 일 나니 어서 가야하네.”
어머니 김씨가 서둘러 말하자 달이는 대뜸 초희 앞에 바싹 다가가 등을 대었다.
“초희야, 많이 아파 걷기 힘들 거야. 내가 업어다 줄게.”
달이는 어머니 김씨가 말리는데도 기어코 자신의 커다란 등을 두드리며 어서 초희에게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어머니 김씨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자신을 도와주는 달이가 믿음직스러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이가 숨을 헉헉 거리며 솟을대문을 열고 마당에 다달았을 때 였다.
“허허 참. 이게 무슨 일인고? 내 잠시 한양을 다녀온 사이 두 모녀가 나 몰래 집을 나가 놀고 저렇게 달이에게 업혀 오는 이 일이 무슨 희기한 일인고. 내가 그만큼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했건만. 쯧쯧쯧. 비단 옷을 입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초희 넌 부끄럽지도 않느냐.”
뒷짐을 지고 있던 아버지 엽이는 어머니 김씨와 눈이 딱 마주치자 혀를 끌끌 차며 호통부터 쳤다. 초희는 곁에 달이 오라버니가 있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작정 역정만 내시는 아버지 엽이가 너무나 창피하고 원망스러웠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달이가 쭈뼛쭈뼛 거리며 마루에 초희를 내려놓고 황급히 나가자 초희는 가슴이 텅 빈 듯 했다.
“초희, 너는 이제부터 바깥출입은 절대 할 생각을 말아라. 방안에서 책이나 읽고 열심히 글이나 써.”
날카로운 눈매의 아버지 엽이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초희는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거의 한 달을 꼼짝없이 방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초희야, 너무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거라. 너의 아버지가 엄한 것 같아도 때론 따뜻한 분이니 때를 기다려 보거라.”
어느 날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온 어머니 김씨가 초희를 다독거리고 있을 무렵 아버지 엽이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초희야,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게다. 이제 아버지랑 바람 쐬러 바깥 구경을 가보자꾸나. 우리 귀한 딸이 그리도 원하는데 내가 무얼 못해주겠나? 좋은 일이 있을게다.”
아버지 엽이가 평소답지 않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초희는 얼굴이 확 피면서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바깥나들이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버지 저는 놀 때가 제일 좋아요.”
“허허, 그래. 어릴 때는 신나게 노는 게 최고지. 내 하는 일이 바쁘다만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너와 함께 놀아주겠다.”
아버지 엽이는 또 빙그레 웃었다. 바깥에 나온 초희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열심히 뛰어 놀았다.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햇살이 눈부신 바깥세상은 초희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초희야, 잠깐만 저 커다란 소나무를 바라 보거라. 그러면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아버지 엽이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보고 싶은 사람?’
초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소나무 뒤편에서 그토록 보고 싶던 달이 오라버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싱긋 웃었다.
“아! 달이 오라버니.”
초희는 화들짝 놀랐다. 가슴이 쿵쿵 거리고 너무 감격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희야, 잘 있었니? 그동안 글공부는 많이 했고?”
“달이 오라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전 오라버니가 없어서 제대로 글공부를 못했어요.”
귀까지 새빨개진 초희가 우두커니 서서 까불듯이 응석을 부리며 몸을 흔들자 달이는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아버님한테 다 얘기 들었다. 네가 방안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글공부를 했다는 것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네가 쓴 글을 보고 싶구나.”
달이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아버지 엽이는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허허, 너희 둘은 참 좋은 사이구나. 초희야, 어서 집에 가서 그동안 썼던 너의 글을 달이에게 보여 주고 부족한 것은 메꾸도록 하여라. 달이, 우리 초희가 조선에서 최고 시를 잘 짓는 여인으로 손꼽힐 수 있도록 잘 가르쳐 주게나. 잘 부탁하네.”
아버지 엽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달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초희는 아버지 엽이의 눈빛에서 깊고 아늑한 사랑이 고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초희는 뿌듯한 마음으로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앉아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 엽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채우고 있었다.*
*앙간비금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 강릉 출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준 아버지 허엽과 함께 나들이 간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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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에서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터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난설헌교 옆에 위치한 앙간비금도 안내판)
(작품의 배경인 솔밭)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허난설헌 생가터라고 알려진 곳에 있는 고택)
*몇년 전부터 강릉에 대한 동화를 좀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바쁜 일을 핑계로 계속 미루었었다. 올해 봄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앙간비금도>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허난설헌에 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역사동화를 써 봄. 원고 20매로 맞추라는 월간문학의 요청에 힘이 들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