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된 아웃라인입니다.
1문단: 국가와 시민을 위해 일하는 지방직 일반 행정 공무원
1)책임감 있는 공무원, 책임을 아는 공무원
2)매뉴얼과 책임
2문단: 책임감 있는 공무원, 책임을 아는 공무원
(1)내 삶의 키워드 ‘책임’
(2)내 삶에서 책임감을 가진 행동들
(3)공무원의 책임과 나
3문단: 매뉴얼과 책임
(1)매뉴얼에 대한 경험
(2)공무원의 매뉴얼
4문단: 책임 속에 사는 국가의 직원
(1)책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나
(2)원칙을 중시하는 공무원
(3)믿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공무원
-자기소개서-
책임감의 공무원
‘책임’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말로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회피하고 싶은 말로 느껴지는 단어. 그리고 어떤 업무를 맡더라도 중요시 여겨야 하는 단어입니다. 그중에서도 공무원은 책임의 무게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국가의 일꾼으로 일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책임의 경중을 따진다면 국가의 녹봉을 받으며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하는 공무원은 그 중요성이 가히 더 중하다고 여겨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책임감을 삶의 이정표로 세워 살아왔습니다. 살아오는 과정에서도 그 중요성을 잊지 않았으며 여러 경험을 통해 가치관을 더 공고히 세웠습니다. 저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으며 제 생각 중 어떤 생각이 틀렸는가에 대해서도 알게 돼 책임이라는 큰 틀에서 수정을 해가며 성장했습니다. 이런 경험과 배움이 제 역량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저는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국가를 위해 일한 준비가 돼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유년기부터 책임이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맡은 일, 뱉은 말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스로의 몫에서 도망가는 것은 단순한 회피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며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실망감과 손실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은 제가 회피하지 않고 맡은 책무를 끝까지 완수하려는 노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는 학급의 반장을 맡았었습니다. 당시 학급에서 친구들 간의 갈등이 발생했고 학급의 분위기는 며칠간 냉랭한 상태가 유지됐습니다. 반이 계속해서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저는 갈등의 주체가 되는 친구들의 화해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들였고 많은 대화 끝에 화해를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학급은 밝은 분위기로 돌아왔고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했습니다. 다음해 전교 부회장을 맡게 되며 역시 제게 놓인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학교 청소물품 개선과 도서관 도서 확충에 대해 지속적인 건의를 넣었고 교장 선생님 및 다른 선생님과의 대화 끝에 시설의 개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저에게 맡겨진 책임이 있다면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입니다. 공무원이라는 자리는 항상 책임감을 안고 살아야하는 자리입니다. 직접적으로 국민들과 마주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만큼 자신의 일을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고위직 공무원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공무원까지 국가의 녹을 받는 위치에서는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며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매뉴얼은 공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직업을 가지기 전,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사회를 경험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성장합니다. 저 역시 아르바이트를 통해 다양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중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매뉴얼과 그 책임 대한 배움이었습니다. 대학의 첫 여름 방학을 맞이했을 때, 저는 해수욕장의 관리 아르바이트를 맡았습니다. 당시 많은 인파가 몰렸고 그로인해 많은 혼잡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은 주차에 불편을 겪었고 막무가내로 원하는 곳에 주차를 하겠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지정된 곳이 아니면 주차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내했습니다.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침착하게 안내를 하는 동시에 담당자에게 보고를 해 주차공간을 확충하고 혼잡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독단으로 상황을 판단했다면 더 많은 혼란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정해진 매뉴얼을 우선순위로 두었고 그것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제 책임을 다할 수 있었고 동시에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원칙을 준수해야합니다. 원칙에 놓여있는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준수하지 않은 채 일을 처리할 경우 그 불이익인 단순히 개인에 그치지 않고 단체에게로 이어집니다. ‘이정도 쯤이야’라는 가벼운 생각이 불상사를 일으키고 국민들의 불신을 가져옵니다. 저는 원칙과 매뉴얼의 중요성을 경험했습니다. 공무를 집행하는데 있어 단 한순간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반드시 가져야하는 덕목 중 하나는 책임감입니다. 저는 책임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중요성을 알아가며 성장했습니다. 자신이 있는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며 스스로에게 실망감과 부끄러움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원칙에 엇나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고 있습니다. 원칙과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짜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공무를 행하는 공무원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따르며 거기에 놓여있는 책임을 짊어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저는 책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회피하지 않으며 요행을 노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 동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행장-
봄날과도 같은 이를 보내며
오늘 나는 나의 좋은 친구 하나를 떠나보냈다. 항상 타인을 생각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던 가슴 따듯한 친구가 떠났다. 항상 다른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던 그의 마지막 길은 많은 사람들의 배웅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습을 그가 봤다면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며 기뻐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자신을 통해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의 장례식은 울음바다가 됐지만 그것은 아마 그만큼 떠나보내기 싫었던 사람을 보내게 된 사람들의 상실감의 표현일 것이다. 1년 전 아내를 떠나보낸 뒤, 슬픔에 젖은 채로도 남들에게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사람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아내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한평생을 봉사와 기부에 바친 김태영의 인생 여정은 그의 나이 76세에 마무리를 지었다.
나와 김태영의 인연의 중학교로부터 시작된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과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밝은 성격으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활달할 인물이었고 남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고 서로를 묶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더 나아가서 친구들의 고민을 자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편안히 털어놓았고 나 역시 그에게 크고 작은 고민들을 털어놓았었다. 김태영의 대화방식은 속 시원하게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었고 남이 털어놓은 고민과 비밀은 입 밖으로 함부로 내지 않는, 남들이 믿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식의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김태영은 평소 “타인의 문제를 함부로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오만한 생각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한 배려의 방식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상대방의 장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며 대화를 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기도 했다. 남을 도울 일이 있다면 먼저 나서서 도왔고 도움에 대해 뽐내고 과시하기 보다는 서로를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말하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다. 김태영이라는 친구는 상대를 존중할 줄 알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만나면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친구였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따듯함을 주는 그였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의 긍정적인 면모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학업 스트레스 등 복합적인 이유들이 점차 그를 소극적이고 위축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가 처음 본 배려심이 넘치고 남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항상 미소를 머금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친절함은 여전했지만 남을 자세히 신경 쓸 여유는 없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대학생이 된 후, 고교시절에 비하면 여유가 생긴 그였지만 외향적인 성격은 과거의 일이 됐으며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위의 동기들이 각자의 꿈을 쫓아가는 모습에 스스로가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은 그는 과거부터 생각했던 공무원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주위를 둘러보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도록 만든 압박감은 오히려 그가 공무원에 합격하는 원동력이 됐고 대구의 지방직 공무원으로서 사회인의 시작을 끊었다. 취업에 성공했지만 그는 여전히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업무에 매진했고 현재의 위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10.13 경주 지진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돌게 한다. 2031년 10월 13일 경주에서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했었다. 대한민국 지진 관측 이래 가장 큰 규모인 이 지진은 많은 재산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노후 된 건물이 일부 손상되며 200여명의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때마침 김태영은 경주 현장에 위치해 있었고 지진을 직접 겪게 됐다. 지진을 겪은 후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내게 “생명에 위협을 느낀 순간이 지나가니깐 그동안 내가 짊어졌던 짐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라며 웃음을 지었다. 김태영은 자신이 겪은 지진 피해 모금에 동참하는 한편 쉬는 날이 되면 아내와 함께 주변 요양원과 고아원에 봉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를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기는 것은 헛된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는 그는 내가 처음 봤던 그때의 모습처럼 주변을 둘러보고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박봉인 월급을 쪼개 꾸준히 기부를 이어갔고 정년퇴직 이후 주황색 두건을 두른 채 고아원을 방문하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마술쇼를 보여주는 등의 활동을 벌였고 속칭 ‘주황두건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40여 년간 이어져온 그의 선행은 유언장에 적힌 대로 그의 모교인 영남대학교에 장학금 8000만원을 전달하며 막을 내리게 됐다.
한 번은 그에게 왜 하필 주황색 두건을 둘렀냐며 물은 적이 있다. 그리고 너털웃음소리와 함께 돌아온 그의 대답은 “따듯하잖아 주황색은”이였다. 그렇다. 그는 따듯한 사람이길 바랐고 또 따듯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미소를 통해 즐거움을 얻던 소년은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했지만 다시 따듯함을 되찾았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이 14살의 소년과 같이 보였음은 내 착각이었을까.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봉사활동을 이어나가며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는 따스한 봄 햇살이 비추던 4월, 돌연 급성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한다. 아내의 사후 미리 작성해둔 유언장에 따라 장학금은 무사히 전달될 수 있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줬다. 김태영은 나이팅게일이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위대한 성자는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삶에서 남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주위에 신경을 기울이는 우리들의 이웃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의 따듯한 마음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머물렀고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우리들의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