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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3편
회개와 성령의 인도하심
(찬송 23장)
2023-8-31, 목
맥락과 의미
시편 143편은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시인이 주님께 간구하는 시편입니다. 원수들이 공격할 때 주님께 피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근거는 자기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2절과 마지막 절에서 “저는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1-2절과 8절, 11-1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의로우심과 인자하심 등은 모두 언약과 관련한 용어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인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성실하고 의롭고 인자하게 대하십니다.
전통적으로 143편은 일곱 개의 참회 시편 중 마지막 시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6, 32, 38, 51, 102, 130, 143편). 그런데 이 시에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합니다” 하는 고백은 있지만, 구체적인 죄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에는 회개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붙잡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려는 모습이 아주 분명히 나타납니다. 참된 회개는 그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고 주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과 7절에서 “응답해 주십시오” 하는 말로 각기 새로운 연이 시작됩니다. 그 각 연 안에는 주님께 간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 원수의 공격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구원을 묵상(1-6절)
2. 인자하심으로 구원하며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7-12절)
1. 원수의 공격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구원을 묵상(1-6절)
1)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함을 회개함 (1-2절)
시인은 주님께 기도를 드리며 주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에 호소하는 것은 언약에 근거한 간구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의로우심이므로 약속을 지켜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동시에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밝히면서, 자기를 심판대에 세우지 마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합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살아있는 어느 누구”는 “모든 인생”을 가리킵니다. 자기뿐 아니라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도 모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였는데, 2절에서는 아무도 주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2절 전반부에서 “주님의 종을 심판하지 마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심판하지 마시고 구원해 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2) 원수의 잔인한 공격 (3-4절)
시인은 주님의 종인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묘사합니다. 원수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뒤쫓아 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목숨”(네페쉬)은 “영혼”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숨통”의 의미도 지닙니다.
악인이 마치 맹수처럼 시인의 숨통을 끊으려고 덤비고 있습니다. 마치 맹수에게 급소를 물리면 심장의 박동이 서서히 멈추듯이, 자기의 생명 또한 악인의 공격으로 인해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3)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묵상하는 시인 (5-6절)
시인은 이 절박한 순간에도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행하신 구원의 큰일들을 가리킵니다.
“옛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5절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5절에서 “기억하고 읊조리고 묵상한다” 하면서 비슷한 말을 세 번 반복하였습니다. 그 각각의 앞에 나오는 “옛날”, “주님의 모든 행적”, “주님께서 손으로 행하신 것”도 같은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모습을 “제 목숨이 메마른 땅에서 주님을 향합니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목말라서 갈급해하는 것처럼(시 42:1) 그의 목숨이 주님을 갈구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바알에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여호와께 나아와서 기다립니다.
2. 인자하심으로 구원하며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7-12절)
7-12절에서는 간구하는 말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심판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1) 인자하심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함 (7-9절)
시인은 자기의 숨결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간구의 핵심은 주님의 얼굴입니다. 시인은 “제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과 같을까” 염려하면서, 자기에게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감추시면 그것이 곧 자신에게는 죽음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아침에 들려주시기를 구합니다. 무덤에 있으면 어둠에 있는 것과 같지만, 아침이 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지금의 고통스러운 시간도 이제 곧 지나서 아침이 될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시인은 동시에 “자기가 마땅히 행할 길”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서도 비록 지금 자신은 고난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원수에게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구하지만, 그와 동시에 원수가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께 피하였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 피하여 숨었습니다.
2) 선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함 (10절)
10-12절은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는 말로 끝납니다. 이처럼 시인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구합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간구는 “선하신 성령이 저를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하는 말로 뒷받침됩니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모든 진리로 가르치시고(요 16:13), 하나님의 아들들을 붙들어서 원하는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신다(롬 8:14)고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해 주실 목적지를 “공평한 땅”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공평한 땅”은 산지나 사막이 아닌 평평한 땅입니다. 또한 의가 가득하여서 넘어질 염려가 없는 땅입니다(시 26:12; 27:11).
3) 공의로 구원하고 인자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을 간구함 (11-12절)
시인은 주님의 “공의”로 자신을 곤경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또한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원수를 멸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의로우신 분이 동시에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앞서 2절에서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종을 심판대에 세우지 말기를 호소한 것과 유사합니다.
12절에서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원수를 멸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영혼의 괴로움을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나의 불의와 죄악됨을 생각할 때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야만 나를 대적하는 원수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영혼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에 호소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는 도움을 간구할 자격이 없으며, 주님께서 나를 도우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의 종이기에, 주님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위하여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스스로에게는 의로움이 없지만 주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인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안전히 보호하시며, 주의 종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힘 주실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사람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재판정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구원얻은 백성은 율법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의 종 노릇, 다른 성도들의 종 노릇을 하며 삽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누군가의 종이 되어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하며 섬기려 하기를 싫어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높아지며 자기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만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으며, 겸손하게 우리를 섬기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어둠의 나라에서 건져 내시고 빛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선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선하시고 사람의 생각은 모두 악하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 15절에서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다고 경고하면서,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육신(죄악된 본성)을 따라서 행하면 그것이 아무리 고귀한 명분을 갖고 있어도 결국에는 짐승처럼 싸우는 데에 떨어지게 됩니다.
선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벗어나는 길이고,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읍시다. 기도에 힘쓰며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깁시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밝혀 주시는 인생의 길을 담대하게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때로 우리가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낙심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읍시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되심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서 순종을 결심합시다.
주님의 성령께서는 사망이 다스리는 메마른 땅에 사는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또한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마침내 공평한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몸을 입혀 주셔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온전히 주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복된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1절, 루터가 이해한 “하나님의 의”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의를 심판으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 사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하고 가르친 진리를 놓고서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곧 복음임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에게서 죗값을 찾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바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루터가 발견한 이 “하나님의 의”는 종교개혁의 추동력이 되었습니다.
<참고> 10절, 구약에 나타난 “선하신 성령의 인도하심”
구약에서 “선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일과 관련하여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느 9:20)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모세 혼자 그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장로들에게 임하여 그의 짐을 나누어서 지도록 하셨습니다(민 11:17).
느헤미야는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선한 성령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면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전에 있던 애굽과 광야에 비하여, 가나안은 공평한 땅이 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성소가 될 그 가나안 땅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느 9:22-25).
예언자 이사야도 옛적 광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이스라엘이 성령의 인도를 거슬렀던 사실을 지적합니다(사 63:8-10).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자가 되셔서 목자처럼 그들을 들고 안아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호와를 반역하고 “주의 성령”을 근심케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주님의 인도를 거역한 죄로 인해 모두 광야에서 스러졌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주님의 성소인 가나안 땅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시는 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 10절,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공평한 땅”
143편에는 “땅”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3절에서는 무덤과 죽은 자의 땅이 나오고, 6절에서는 비를 기다리는 메마른 땅이 나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실족함이 없고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공평의 땅이 나옵니다.
처음 두 가지 땅과 공평의 땅이 대비되는데, 공평의 땅은 선하신 성령님의 사역과 연관이 있습니다.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와 같은 사람을 주님의 성령께서 건져 주시는데, 단지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공평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모세와 느헤미야 때에도 성령의 인도는 결국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시는 데에 있었습니다.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메마른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구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의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십니다. 계속해서 삼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셔서 마지막 날에는 부활의 몸을 입고 살게 하실 것입니다. 옛적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선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부활의 생명이 넘치는 공평한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참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을 근심케 함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성령을 근심시킨 것을 반면교사로 삼읍시다.
바울 사도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과 “구속의 날”을 연결하여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구속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므로 그분을 근심시키지 말고 순하게 그분의 인도를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성령 하나님을 근심시키지 않고 순종하는 것의 내용을 그 다음 구절에서 가르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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