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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86권
74. 변학품(遍學品)을 풀이함
【經】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큰 지혜를 성취하기에 이 깊은 법을 행하면서도 또한 그 과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큰 지혜를 성취하기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그 과보를 받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성품[性]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어떠한 성품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는 바 없는 성품[無所有性]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물질[色]의 성품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의욕[行]ㆍ인식[識]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으며,
단바라밀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고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느니라.
4선(禪)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고 4무량(無量)의 성품의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으며,
4무색정(無色定)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으며, 4념처(念處)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느니라.
나아가 8성도분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고 공삼매(空三昧)와 무상(無相)ㆍ무작삼매(無作三昧) 내지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으니,
왜냐 하면 수보리야, 이 모든 법의 성품은 곧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있는 바가 없는 법[無所有法]으로써 있는 법[所有法]을 얻을 수는 없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있는 법으로는 있는 법을 얻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있는 법으로 있는 바 없는 법을 얻을 수는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있는 바 없는 법으로 있는 바 없는 법을 얻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있는 바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있는 것으로 있는 바 없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있는 바 없는 것으로 있는 바 없는 것도 얻을 수 없다면,
세존께서는 도(道)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은 것이 있지만 이 네 구절[四句]로써는 얻지 않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얻은 것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바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희론이 없는 것을 일컬어 도를 얻었다[得道]고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희론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물질은 항상 있다[常]거나 또는 무상(無常)하다고 관찰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은 항상 있다거나 또는 무상하다고 관찰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물질을 보면서 ‘괴롭다[苦]’ 혹은 ‘즐겁다[樂]’고 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보면서 ‘괴롭다’ 혹은 ‘즐겁다’고 한다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물질을 보면서 ‘나[我]이다’ 혹은 ‘나가 아니다[非我]’고 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보면서 ‘나이다’ 혹은 ‘나가 아니다’고 하거나,
물질을 보면서 ‘고요히 사라진다[寂滅]’ 혹은 ‘고요히 사라지지 않는다[不寂滅]’고 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보면서 ‘고요히 사라진다’ 혹은 ‘고요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로써 마땅히 보아야 하고 쌓임의 거룩한 진리[集聖諦]로써 마땅히 끊어야 하며,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滅聖諦]로써 마땅히 증득해야 하고 도의 거룩한 진리[道聖諦]로써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며,
4념처(念處)와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공해탈문(空解脫門)과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며,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나는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마땅히 닦아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요,
‘나는 보살의 10지(地)를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며,
‘나는 보살의 지위에 마땅히 들어가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나는 부처님 국토를 마땅히 깨끗하게 해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요,
‘나는 중생을 마땅히 성취시켜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며,
‘나는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을 마땅히 내어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요,
‘나는 일체종지를 마땅히 얻어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며,
‘나는 온갖 번뇌의 습기(習氣)를 끊어야 한다’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은 항상 있다거나 또는 무상하다 하는 쓸모없는 논리는 펼 수 없으므로 희론을 하지 말아야 하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항상 있다거나 또는 무상하다고 하는 쓸모없는 논리는 펼 수 없으므로 희론을 하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쓸모없는 논리를 펼 수 없으므로 희론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성품[性]은 희론으로서의 성품이 아니요, 성품 없음[無性]도 희론으로서의 성품 없음이 아니어서, 성품과 성품 없음을 모두 여의고 다시는 어떤 법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희론을 일으키는 이[戱論者]와 희론을 일으키는 법[戱論法]과 희론을 일으키는 곳[戱論處]이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물질에는 희론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내지는 일체종지도 희론이 없나니,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희론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물질은 희론할 수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도 희론할 수 없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에는 성품이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에도 성품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법에 성품이 없다면 곧 그것은 희론이 없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물질은 희론할 수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도 희론할 수가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희론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때에 보살은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에 성품이 없다면, 보살은 어떠한 도를 행하여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인지요? 성문의 도(道)로써 드는지요? 벽지불의 도로써 드는지요? 부처님의 도로써 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성문의 도로써 들지 않고 벽지불의 도로써 들지 않고 부처님의 도로써 들지도 않으면서도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보살마하살은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8인(人)에서 먼저 모든 도를 배운 연후에야 바른 지위에 들어가고, 아직 과위를 얻지 못했는데도 먼저 과위의 도[果道]가 생기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먼저 모든 도를 두루 배운 연후에야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또한 아직 일체종지를 얻지 못했는데도 먼저 금강삼매(金剛三昧)가 생기는 것이니, 그때에 한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일체종지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면,
8인은 수다원을 향하여 수다원을 얻고 사다함을 향하여 사다함을 얻으며,
아나함을 향하여 아나함을 얻고 아라한을 향하여 아라한을 얻으며,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도를 얻게 되는데 이런 모든 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도를 두루 배운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면,
이 보살이 만일 8도(道)를 내면 팔인 되어야 하며,
견도(見道)를 내면 수다원이 되어야 하며,
사유도(思惟道)를 내면 사다함이 되고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이 되어야 하며,
만일 벽지불의 도를 내면 벽지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8인이 된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든다 하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으면서 일체종지를 얻는다는 것도 역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다원이 되고 나아가 벽지불이 된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든다는 것도 역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으면서 일체종지를 얻는다는 것도 역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하면 보살마하살이 모든 도를 두루 배우고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8인이 되고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으며, 벽지불의 도를 얻고 난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든다 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고서 일체종지를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6바라밀을 행할 때에 지혜로써 관찰하면 8지(地)를 초월하느니라.
어떤 것이 8지인가?
건혜지(乾慧地)와 성지(性地)와 8인지(人地)와 견지(見地)와 박지(薄地)와 이욕지(離欲地)와 이판지(已辦地)와 벽지불지(辟支佛地)이니라.
도종지(道種智)로써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일체종지로써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느니라.
수보리야, 이 8인의 지혜[智]와 끊는[斷] 것이 곧 보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며,
수다원의 지혜와 끊는 것ㆍ사다함의 지혜와 끊는 것ㆍ아나함의 지혜와 끊는 것ㆍ아라한의 지혜와 끊는 것ㆍ벽지불의 지혜와 끊는 것도 모두가 보살의 인(忍)이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성문과 벽지불의 도를 배우고 도종지로써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며,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일체종지로써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고 부처님 도를 얻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도를 두루 배우고 완전히 갖추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는 과위[果]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도(道)는 성문의 도이고 벽지불의 도이며 부처님의 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보살의 도종지(道種智)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온갖 도종의 깨끗한 지혜[淨智]를 내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것이 도종의 깨끗한 지혜인가?
만일 모든 법으로써 모양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법이라면 보살은 바르게 알아야 하며,
바르게 안 뒤에는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고 열어 보여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음성과 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이 음성으로써 법을 설하여 3천대천세계에 두루 가득 차게 하되 마치 메아리의 모양과 같이 하느니라.
이 때문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먼저 일체도를 배워서 구족해야 하며,
도지(道智)를 두루 갖춘 뒤에는 마땅히 중생의 깊은 마음[深心]을 분별하여 알아야 하느니라.
이른바 지옥(地獄)의 중생과 지옥세계[道]에 대해 지옥에 나는 원인[因]과 지옥에 나는 과(果)를 마땅히 막을 줄 알아야 하고,
축생(畜生)ㆍ아귀(餓鬼) 세계의 축생ㆍ아귀에 나는 원인과, 축생ㆍ아귀에 나는 결과를 마땅히 막을 줄 알아야 하며,
모든 용(龍)ㆍ귀신(鬼神)ㆍ건달바(乾闥婆)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ㆍ아수라(阿修羅) 세계의 원인과 결과를 막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 세계[人道]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하고,
모든 하늘 세계[天道]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하며,
4천왕천(天王天)ㆍ33천(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타천(兜率陀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ㆍ범천(梵天)ㆍ광음천(光音天)ㆍ변정천(遍淨天)ㆍ광과천(廣果天)ㆍ무상천(無想天)ㆍ아바라가천(阿婆羅呵天)ㆍ무열천(無熱天)ㆍ이견천(易見天)ㆍ희견천(喜見天)ㆍ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의 세계에 나는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하고,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세계에 나는 원인과 결과도 알아야 하느니라.
4념처ㆍ4정근ㆍ4여의족ㆍ5근ㆍ5력ㆍ7각분ㆍ8성도분의 원인과 결과를 마땅히 알아야 하고,
공해탈문ㆍ무상해탈문ㆍ무작해탈문과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ㆍ4무애지ㆍ18불공법과 대자대비의 원인과 결과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도(道)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수다원의 도 내지는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들게 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깨끗한 도종지라 하느니라.
보살은 이 도종지를 배운 뒤에 중생의 깊은 마음의 모양에 들어가고,
들어간 뒤에는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응하면서 법을 설하되 말한 것이 거짓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의 근기와 모양을 잘 알며,
온갖 중생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나고 죽고 하며 나아갈 데를 알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도(道)의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나니,
왜냐 하면, 온갖 착한 조도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 들며,
모든 보살마하살과 성문과 벽지불이 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4념처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든 법이 합하지[合] 않고 흩어지지[散] 않으며,
빛깔[色]도 없고 형상[形]도 없고 대상[對]도 없는 동일한 한 모양[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다[無相]면,
세존이시여, 어떻게 이 도를 돕는 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할 수 있는지요?
세존이시여, 이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동일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법이라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니,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은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自相空]하여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중생들은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한 줄 모르고 있으므로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도를 돕는 법을 드러내 보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모든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과,
모든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과,
모든 내공(內空)ㆍ외공(外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과,
초선(初禪)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와,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3해탈문ㆍ8배사ㆍ9차제정과,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ㆍ4무애지ㆍ18불공법ㆍ대자대비와 일체종지 등의 모든 법이 있으니,
이 거룩한 법[聖法] 가운데서는 모두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동일한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느니라.
이것은 곧 세속의 법으로써 중생들에게 설명해 주어 알게 한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第一義]로써 설명한 것은 아니니라.
수보리야, 이 온갖 법에 대하여 보살마하살은 지견(智見)으로써 법답게 배워야 하며,
배운 뒤에는 모든 법에 대하여 의지해야 할 것[用]과 의지하지 않아야 할 것[不用]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떤 법을 의지해야 한다고 분별하고 어떤 법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고 분별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은 의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일체종지는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분별해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거룩한 법 가운데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거룩한 법[聖法]이라 하며,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성문ㆍ벽지불의 법과 모든 보살마하살 및 모든 부처님의 법은 탐욕[欲]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신견(身見)ㆍ계취(戒取)ㆍ의(疑)와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욕염(欲染)ㆍ진에(瞋恚)와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도(悼)ㆍ만(慢)ㆍ무명(無明)과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느니라.
초선 내지는 제4선과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와 허공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와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내공 내지는 대비(大悲)와 유위의 성품[有爲性]ㆍ무위의 성품[無爲性]과도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나니라.
왜냐 하면 이 온갖 법은 모두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동일한 모양이여서 이른바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빛깔이 없는 법[無色法]은 빛깔이 없는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형상이 없는 법[無形法]은 형상이 없는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대상이 없는 법[無對法]은 대상이 없는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한 모양의 법[一相法]은 한 모양의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모양이 없는 법[無相法]은 모양이 없는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 빛깔이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한 모양이여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배워야 하니, 배우고 나면 모든 법의 모양[法相]을 얻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물질의 모양[相]을 배우지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도 배우지 않는지요?
눈[眼]의 모양 내지는 뜻[義]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빛깔[色]의 모양 내지는 법(法)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땅 요소[地種]의 모양 내지는 의식 요소[識種]의 모양을 배우지 않는지요?
단바라밀의 모양과 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내공의 모양 내지는 무법유법공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초선의 모양 내지는 제4선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인자함[慈]의 모양 내지는 버림[捨]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무변공[無邊空]의 모양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의 모양을 배우지 않는지요?
4념처의 모양 내지는 8성도분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공삼매의 모양과 무상ㆍ무작삼매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8배사와 9차제정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부처님의 10력의 모양과 4무소외ㆍ4무애지의 모양과 18불공법의 모양과 대자대비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고성제의 모양과 집ㆍ멸ㆍ도성제의 모양을 배우지 않고,
역순(逆順)의 12인연(因緣)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유위의 성품의 모양과 무위의 성품의 모양을 배우지 않는지요?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의 모양을 배우지 않는다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유위(有爲)이거나 무위(無爲)인 모든 법의 모양을 배우며, 배운 뒤에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는지요?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지 않으면 어떻게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만일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일체종지를 얻게 되며,
만일 일체종지를 얻지 않으면 어떻게 법륜을 굴리게 되고,
만일 법륜을 굴리지 않으면 어떻게 3승(乘)으로써 중생을 생사(生死)로부터 제도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법이 진실로 모양이 있다면 보살은 이 모양을 배워야 하지만,
수보리야, 온갖 법은 진실로 모양이 없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동일한 모양이여서 이른바 모양이 없느니라.
이 때문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모양을 배우지도 않고 모양이 없는 것을 배우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한 모양[一相]의 성품은 항상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닦겠는지요?
만일 반야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지 않으면 보살의 지위에 들지도 못합니다.
만일 보살의 지위에 들지 못하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수 없고,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면 모든 보살의 신통을 얻을 수 없으며,
보살의 신통을 얻지 못하면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거나 중생을 성취시킬 수 없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고 중생을 성취시키지 못한다면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으며,
일체종지를 얻지 못하면 법륜을 굴릴 수 없습니다.
만일 법륜을 굴리지 못한다면 중생으로 하여금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할 수도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의 복을 얻게 할 수도 없고,
또한 계를 지키고[持戒] 선정을 닦는[修定] 복을 얻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법은 모양이 없어서 하나의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니라.
만일 모양이 없는 것을 닦으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양이 없는 것을 닦으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파괴[壞]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며,
눈[眼]의 파괴와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 뜻[意]의 법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빛깔[色]의 법의 파괴와 소리[聲]ㆍ내음[香]ㆍ맛[味]ㆍ촉감[觸]ㆍ법(法)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부정관(不淨觀)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초선의 파괴와 제2ㆍ제3ㆍ제4선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며,
자ㆍ비ㆍ희ㆍ사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무변공처ㆍ무변식처ㆍ무소유처와 비유상비무상처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승(念僧)ㆍ염계(念戒)ㆍ염사(念捨)ㆍ염천(念天)ㆍ염멸(念滅)ㆍ염안반(念安般)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무상상(無常相)ㆍ고상(空相)ㆍ무아상(無我相)ㆍ공상(空相)ㆍ집상(集相)ㆍ인상(因相)ㆍ생상(生相)ㆍ연상(緣相)ㆍ폐상(閉相)ㆍ멸상(滅相)ㆍ묘상(妙相)ㆍ출상(出相)ㆍ도상(道相)ㆍ정상(正相)ㆍ적상(跡相)ㆍ이상(離相)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12인연(因緣)의 파괴를 닦고 아상(我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명상(壽命相)의 파괴를 닦으며,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의 모양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항상한 모양[常相]ㆍ즐겁다는 모양[樂相]ㆍ깨끗하다는 모양[淨相]ㆍ나라는 모양[我相]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공삼매ㆍ무상삼매ㆍ무작삼매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며,
8배사와 9차제정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와 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와 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괴로움이 거룩한 진리[苦聖諦]와 쌓임의 거룩한 진리[集聖諦]와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滅聖諦]와 도의 거룩한 진리[道聖諦]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며,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세지(世智)ㆍ타심지(他心智)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단바라밀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며,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제법공(諸法空)ㆍ자상공(自相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ㆍ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ㆍ4무애지ㆍ18불공법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ㆍ벽지불의 도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일체지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는 일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물질의 파괴를 닦고 나아가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는 일의 파괴를 닦아야 곧 반야바라밀이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의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온갖 번뇌의 습기를 파괴하는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
왜냐 하면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반야바라밀을 닦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이 있다고 생각한 이는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닦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수보리야, 이 사람은 법에 집착하여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니,
이와 같이 집착하는 이에게는 해탈도 없고 도(道)도 없고 열반도 없기 때문이니라.
법이 있다고 생각한 이는 4념처와 4정근과 4여의족과 5근과 5력과 7각분과 8성도분을 닦지도 못하고 공삼매를 닦지도 못하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닦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이 사람은 법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있는 법[有法]이고 어떤 것이 없는 법[無法]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둘[二]이면 곧 ‘있는 법’이요, 둘이 아니면[不二] 곧 ‘없는 법’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곧 둘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의 모양이 곧 둘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이 곧 둘이며,
눈의 모양 내지는 뜻의 모양이 곧 둘이요,
빛깔의 모양 내지는 법의 모양이 곧 둘이며,
단바라밀 내지는 부처님의 모양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과, 유위의 모양ㆍ무위의 모양이 곧 둘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모양은 모두가 둘이며 온갖 둘로 된 것은 모두 ‘있는 법’이니,
만일 있는 법이라면 곧 생사(生死)가 있고,
만일 생사가 있으면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운 것을 여읠 수 없느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둘의 모양에서는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이 없고 도(道)도 없고 과위도 없으며, 나아가 순인(順忍)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니 하물며 물질의 모양을 보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모양을 보겠느냐?
만일 도를 닦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아가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겠느냐?”
【論】 해석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므로 세간의 과보를 받지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보살은 큰 지혜를 성취하여 이 깊은 법을 행하면서 원인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 결과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곧 이 보살은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의 뜻을 인가하신 뒤에 또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보살은 모든 법의 성품[諸法性]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모든 법의 성품’이란 본래 있는 바가 없어서 필경공이요, 여ㆍ법성ㆍ실제이거늘 보살은 선정의 마음에 머물러 있으며 이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성품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물질의 성품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고 나아가 대자대비(大慈大悲) 등의 성품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이 모든 법의 성품은 뭇 인연(因緣)으로 생겨나기에 자재하지 못하고 정해진 모양도 없으며, 정해진 모양이 없어서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이란 물질 등의 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 물질 등의 법으로 인하여 무위(無爲)를 설명한다. 이 때문에 무위의 법도 또한 있는 바가 없으니, 왜냐 하면, 있는 바 없는 법으로써 있는 법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말하기를,
“만일 있는 바 없는 법으로 있는 법을 얻을 수 없다면 어찌 있는 법으로써 있는 법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있는 바 없는 법은 온갖 성인들이 칭찬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 머무르는 곳조차도 오히려 얻는 것이 있을 수 없거늘 하물며 있는 법이겠는가?
“있는 법으로 있는 바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기를,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둘은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그렇기 때문에 “아니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있는 바 없는 것으로 있는 바 없는 것을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있는 법에는 생기는 모양[生相]과 머무르는 모양[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오히려 얻을 것도 없거늘, 하물며 있지 않는 것이겠는가?
본래부터 필경 공한 것인데, 얻을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수보리는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네 구절[四句]로써도 모두 얻을 수 없다면, 도(道)도 없고 과위[果]를 얻는 일도 없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실로 도를 얻는 법이 있으니, 다만 이 네 구절로써 하지 않을 뿐이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네 구절은 위에서와 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네 구절의 희론을 여읜다면, 곧 그것이 도(道)라는 것이다.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희론의 모양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물질 등이 항상 있다거나 무상하다고 하면, 이것이 곧 보살의 희론이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일 항상 있다[常] 한다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不生不滅] 것이어서 죄와 복과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상(無常)하다는 것도 그렇지 않나니, 왜냐 하면 항상하다는 것으로 인하여 무상하다는 것을 설명하게 되는데 항상함도 이미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무상함이겠는가?
또 만일 무상하다면 반드시 이 물질 등의 실상(實相)도 또한 업의 인연[業因緣]이나 과보가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물질 등의 모든 법은 생각 생각마다 소멸하고 상실하기 때문이니,
만일 업의 인연과 과보가 소멸하면 무상한 모양이라 하지도 못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 때문에 무상한 것은 곧 물질 등의 실상이 아니니,
마치 앞에서 무상을 파괴하는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아가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어야 한다’고 하면, 이것이 곧 희론이다.
물질 등의 모든 법은 희론할 수 없음에도 범부는 모든 법에 쓸모없는 논리를 펴지만, 보살은 희론할 수 없는 데서는 법에 따라 쓸모없는 논리를 펴지 않나니, 왜냐 하면, 제 성품[自性]은 제 성품에 대하여 희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품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거늘 어떻게 희론을 펼 수 있겠는가?
그 성품에서조차 희론을 펼 수 없거늘 하물며 성품이 없는 것이겠는가?
성품을 여의고 성품이 없는 것에는 다시는 제3의 법으로 희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른바 희론을 하는 이[戱論者]와 희론의 법[戱論法]과 희론의 대상[戱論處]이 그것이니, 이런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물질 등의 법은 곧 희론을 펼 수 없는 모양이니, 이와 같이 보살은 희론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라고 하신다.
또 부처님은 친히 그 희론을 펼 수 없는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물질 등의 법은 성품이 없느니라.
만일 그 법에 성품이 없다면 그것이 곧 희론을 펼 수 없는 것이니,
만일 보살이 이 희론을 펼 수 없는 반야를 행한다면, 곧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수보리의 생각에는,
‘희론이 없다면 이 3승의 도에서 보살은 어느 도로써 희론이 없는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일까?’라고 한 것인데,
이에 부처님은
“모두가 아니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왜냐 하면, 보살은 대승의 사람이므로 마땅히 2승의 도로써는 하지 않아야 하며, 6바라밀도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도로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마치 견제도(見諦道) 가운데 8인(人)으로써 때로는 먼저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정위(定位)에 들면서도 아직 수다원의 과위를 얻지 못하듯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먼저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갔으면서도 아직 일체종지의 과위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만일 보살이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무르면, 한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일체종지의 과위를 얻는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모든 도를 두루 배운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하면, 이 모든 도는 각각 다릅니다.
보살이 이 모든 도를 두루 배울 적에 8도(道)를 내면 곧 그는 8인(人)이 되고, 나아가 벽지불의 도를 내면 곧 벽지불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8인이 되고 나아가 벽지불이 된 연후에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하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만일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일체종지를 얻는다면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보살이 모든 도를 두루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뜻을 인가하신 뒤에 다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처음에 뜻을 내어 6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지견(智見)으로써 관찰하여 8지(地)에 들어가되 곧장 그대로 지나쳐 버린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그의 어버이나 친척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들어가서 그를 본다 할지라도 그와 함께 구속을 당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보살은 도종지(道種智)를 완전히 갖추고자 하기 때문에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모든 도를 두루 관찰하면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고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가르침을 내보이시되,
“2승의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지혜에서 매우 조그만 기분(氣分)만을 얻으니, 이 때문에 8인의 지덕[智]ㆍ단덕[斷] 내지는 벽지불의 지덕ㆍ단덕이 모두가 보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니라”라고 하셨다.
‘지덕[智]’은 유학의 8지(智)나 무학의 9지 혹은 10지를 말한다.
‘단덕[斷]’은 10종의 결사를 끊는 것을 말하니, 이른바 상하분(上下分)의 10결(結)이다.
수다원(須陀洹)과 사다함(斯陀含)에서는 간략하게 말하면 3결(結)을 끊는다 하고 자세히 말하면 88결을 끊는다 하며,
아나함[阿那含]은 간략하게 말하면 5하분결[下分結]을 끊는다 하고 자세히 말하면 92결을 끊는다 하며,
아라한은 간략하게 말하면 3루(漏)를 다한다 하고 자세히 말하면 온갖 번뇌를 끊는다고 한다.
이것을 지덕[智]ㆍ단덕[斷]이라 하니, 이 지덕ㆍ단덕은 모두가 보살의 인(忍)이다.
성문의 사람은 네 가지 진리[四諦]로써 도를 얻지만,
보살은 한 가지의 진리[一諦]로써 도에 들어간다.
부처님은 이 네 가지의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모두 그것은 하나의 진리인데 분별하기 때문에 네 가지가 있다.
이 네 가지 진리의 2승의 지덕ㆍ단덕은 모두가 하나의 진리 가운데에 있다.
보살은 먼저 유순인(柔順忍)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나는 것[生]도 없고 없어지는 것[滅]도 없으며 또한 생함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멸함이 없는 것도 아님을 배우며,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견해[有無見]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非有非無見] 등을 여의면서 모든 희론을 없애고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
‘무생인’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뒤의 품 가운데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 되기까지 항상 나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생인이라 한다.”라고 하신다.
논자(論者)는 말하기를,
“이 인(忍)을 얻고 온갖 법의 필경 공을 관찰하면서 반연을 끊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心數法]을 내지 않는 것을 곧 무생인이라 한다.”라고 하며,
다시 말하기를,
“능히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를 뛰어넘는 것을 무생인이라 한다.”라고 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는 물질 등 5중(衆)의 생멸(生滅)을 관찰하면서 마음에 싫증을 내고 여의어 해탈을 얻으려고 하지만,
보살은 큰 복덕의 지혜로써 생멸을 관찰할 때에는 마치 소승의 사람처럼 그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살은 혜안(慧眼)으로써 나고 없어지는 진실하고 정해진 모양을 구한다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앞의 「파생품(破生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만 육안(肉眼)과 거친 마음으로써만 무상한 생멸이 있다는 것을 볼 뿐이다.
범부의 사람은 모든 법 가운데서 상견(常見)에 집착하다가 이 집착하던 법이 도리어 무상한 데로 돌아가면 중생들은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뇌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근심과 괴로움을 여의려 하면, 항상 있다[常]하는 모양으로 관찰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이 무상은 항상 있다 하는 뒤바뀜[顚倒]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무상하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생멸한다는 관[生滅觀]을 버리고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가운데에 들어간다.
【문】 만일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는[不滅] 데에 들어간다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바로 항상 있는 것[常]이 되거늘 어떻게 항상 있다 하는 뒤바뀜을 여읠 수 있겠는가?
【답】 무상하다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 있다 하는 뒤바뀜을 깨뜨리면서 무상하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무상하다는 데에 집착하면서 희론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생인도 이와 같아서
첫째는 비록 생멸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있다 하는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생멸하지 않는 데에 집착하기 때문에 항상 있다 하는 뒤바뀜에 떨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생멸이 없는 것[眞無生]은 모든 관(觀)이 소멸하고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온갖 법을 관찰하되 마치 열반의 모양과 같아서 본래부터 언제나 스스로 생멸이 없는 것이다.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것으로 하여금 이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마침내 깨끗한 것을 얻게 하나니, 이 무상관(無常觀)조차도 오히려 취하지 않거늘 하물며 나고 없어지는 것이겠는가?
이와 같은 등의 모양을 무생법인이라 하니, 이 무생인을 얻기 때문에 곧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는 일체종지로써 번뇌와 습기를 끊고 갖가지 인연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나니,
마치 좋은 과일 나무가 이롭게 하는 것이 많은 것과 같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도종지(道種智)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무생인의 법에 머무르면서도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며, 실상으로부터 일어나 모든 법의 이름과 모양과 언어를 취하여 스스로 잘 이해하고 나서는 중생에게 말해주어 깨우치게 한다.
보살은 복덕의 인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음성과 언어를 이해하고 이 음성을 3천대천세계에 두루하게 하면서도 또한 이 음성에 집착하지 않아서, 마치 메아리의 모양과 같다는 것을 아나니, 이 음성은 곧 범음(梵音)의 모양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온갖 길[道]을 알아야 하고, 중생들의 마음을 두루 관찰하여 그 본말(本末)을 알아 착한 법으로써 이롭게 하고, 착하지 않는 법은 막아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살은 먼저 모든 법의 실상을 알기 때문에 2승의 도에 들고 나고 하면서 자유로이 관찰하며,
그런 뒤에는 곧바로 지나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도의 지혜[道慧]를 일으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고자 하며,
온갖 중생의 언어와 음성을 이해하여 범음으로써 법을 설하나니, 이른바 나쁜 길[惡道]을 막고 착한 길[善道]을 열어 주는 것이다.
‘나쁜 길’이라 함은 세 가지의 나쁜 세계[三惡道]요,
‘착한 길’이라 함은 세 가지의 착한 세계[三善道]이니, 즉 인간과 천상과 아수라이다.
갖가지 인연으로 나쁜 길은 꾸짖고 착한 길은 찬탄하는 것이다.
‘나쁜 길을 막는다’라 함은,
지옥의 세계와 지옥에 나는 원인[因]과 지옥에 나는 결과[果]를 막음이니,
지옥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옥세계는 맨 위에 해당하는 착하지 못한 길[不善道]이다.
지옥에 나는 원인은 3독(毒) 때문이니,
탐욕이 더욱 자라 탐냄과 질투를 일으킴은 착하지 못한 길이요,
노여움[瞋恚]이 더욱 자라 성냄을 일으킴은 착하지 못한 길이며,
어리석음[愚癡]이 더욱 자라 삿된 견해를 일으킴은 착하지 못한 길이다.
이 3독은 세 가지 착하지 못한 길의 원인이 되고,
세 가지 착하지 못한 길은 일곱 가지 착하지 못한 길[七不善道]의 원인이 된다.
지옥에 나는 결과라 함은,
이런 인연 때문에 지옥의 몸과 마음을 받으며 그 몸과 마음으로 갖가지 고뇌를 받는 것이니, 이것을 곧 결과라고 한다.
보살은 중생들에게 지옥에 나는 결과를 보이고,
그런 뒤에는 법을 설하여 그 지옥의 길과 인과를 끊게 해야 한다.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길[十不善道]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는데,
상은 지옥이요, 중은 축생이며, 하는 아귀이다.
열 가지의 착한 길[十善道]에도 상ㆍ중ㆍ하가 있는데,
상은 천상이요, 중은 인간이며, 하는 귀신(鬼神)이다.
열 가지의 착한 길에 머무르면서 욕탐을 여의어서 색계(色界)에 태어나며, 색계를 여의고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지만,
3악도 가운데서는 언제나 고통을 받는다. 때문에
‘마땅히 [일체의 도를] 알아야 하고, 마땅히 [착하지 못한 법을] 막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천상과 인간에서는 도를 얻은 인연으로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때로는 꼭 막아야겠지만, 일정하지 않기[不定] 때문에 나머지 도를 돕는 법[助道法]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땅히 막는다고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보살은 이와 같이 분별한 뒤에 중생에 대하여,
소승의 법으로써 제도해야 할 이면 소승의 법으로 제도하고,
대승의 법으로써 제도해야 할 이면 대승의 법으로 제도하는 것을 안다.
이 보살은 중생들이 깊은 마음으로 헤아리는 일과 전생에 지은 업의 인연을 알며,
또 미래 세상의 과보와 인연을 알고 또 중생을 교화해야 할 때를 알며,
그리고 그 처소도 알고 그 밖의 제도할 수 있는 인연까지 모두 다 아나니,
이 때문에 하는 말이 헛되지 않다.
이와 같은 도종의 지혜[道種慧]와 모든 도를 돕는 법은 모두가 반야 가운데에 있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도의 지혜[道慧]인 반야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도를 돕는 법과 보리의 이 법은 모두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는 동일한 모양이여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이라면,
이 도를 돕는 법은 모두가 공하거늘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공하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어서 마땅히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니,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은 없는 법이기 때문에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수보리가 하는 말은 진실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인가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시고,
다시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어떤 중생은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한[自相空]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이 도를 돕는 법을 분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다만 37품(品)에서만 공하여 합해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질 등에서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법[聖法] 가운데서도 역시 제 모양이 공하여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고 함은 곧 필경 공한 이치이니, 이 가운데서
“한 모양[一相]은 바로 모양이 없는 것[無相]을 말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법이 비록 공(空)하나 세속의 이치[世諦]로써 하기 때문에 중생들을 위하여 말을 해주어 거룩한 법에 들 수 있게 하려는 것이지,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 보살은 모두가 지(知)ㆍ견(見)으로써 이 법을 배워야 하나니,
처음에 아는 것[初知]을 지(知)라 하고
뒤에 깊이 들어가는 것[後深入]을 견(見)이라 한다.
지(知)는 아직 분명히 알기 전의 것을 말하고,
견(見)은 이미 분명하게 안 것을 말한다.
【문】 아는 것[知]과 보는 것[見]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알기는 하면서도 보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고,
보기는 하면서도 아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
또한 알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경우가 있으며,
아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닌 경우도 있다.”라고 한다.
‘알기는 하되 보는 것이 아니다’고 함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그것이다.
세간의 바른 견해와 그리고 5견(見)을 제외한 그 밖의 지혜를 모두 ‘아는 것[知]’이라 말하는데, 이 지혜는 보는 것이 아니다.
‘보기는 하면서도 아는 것이 아니다’고 함은 5견과 세간의 바른 견해와 견제도(見諦道) 가운데의 8인(忍)이 그것이다.
이것은 보기는 하면서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밖의 무루의 지혜[無漏慧]는 또한 ‘아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보는 것과 아는 것을 여의면, 나머지 법은 ‘보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도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해진 마음[定心]을 본다[見]고 하고 정해진 후나 정해지기 전 모두를 통틀어서 안다[知]고 한다.”라고 한다.
마치 『전법륜경(轉法輪經)』 가운데서 말하기를,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알고 난 뒤에 보아야 하고, 알고 난 뒤에 분별하니,
‘이 법은 마땅히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이 법은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쌓임의 진리[集諦]요,
‘이 법은 마땅히 증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사라짐의 진리[滅諦]이며,
‘이 법은 마땅히 닦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곧 도의 진리[道諦]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혹은 번뇌가 끊어짐을 아는 것을 본다[見]고 하는데, 마치 9결(結)이 끊어짐을 아는 것과 같다.
수보리가 반야의 다른 이름이란 이른바 거룩한 법[聖法]이라는 말씀을 듣고 여쭈기를,
“어떤 것이 거룩한 법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거룩한 법 가운데 모든 성현인 부처님과 벽지불과 성문 등은 욕탐[欲] 등 모든 법과는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합하지 않는다’고 함은, 온갖 번뇌를 뒤바뀜[顚倒]이라 하나니, 이 뒤바뀜은 곧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만일 있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합할 수 있겠으며, 만일 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흩어짐이 있겠느냐?
합하지 않기 때문에 범부를 업신여기지 않고,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뽐내지도 않나니,
이에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또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이 법은 모두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이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다.”라고 한 것이니,
빛깔이 없는 법은 빛깔이 없는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양이 없는 법은 모양이 없는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법은 모두 동일한 성품[一性]이기 때문이다.
제 성품은 제 성품과 합하지 않나니, 이것을 곧 동일한 모양으로서 모양이 없는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마땅히 배워야 하며 배우고 나면 모양을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
세존이시여, 보살은 물질의 모양을 배우지 않으며, 나아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양까지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이 모든 법의 모양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에서
‘보살은 먼저 모든 법의 모양을 배운 뒤에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 넘는다’고 하며,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지 못하면 어떻게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모든 법에 진실로 모양이 있다면 마땅히 그 모양을 배워야 하겠지만,
수보리야, 온갖 법은 실로 모양이 없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모양을 배우지 않아야 하며,
모양이 없는 것도 배우지 않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신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모양에 관한 일을 깨뜨리신 것이다.
「문상품(問相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은 항상 머물러 있는 동일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다.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이 온갖 법은 모양이 없다 함을 듣고 이제 부처님께 도리어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보살은 반야를 닦겠습니까?
만일 모양 없는 것이 있다면 그 모양 없는 것으로 인하여 반야를 닦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모양은 모양이 없는 것이니, 모두 없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반야를 닦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반야를 닦지 못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중생을 세 가지 복전[三福田]에 확고히 세울 수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말을 인가하시어
“참으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시고,
또 반야를 닦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은 모양을 닦는 것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반야를 닦는 것이요,
모양이 없음[無相]을 닦기 때문에 이 반야를 닦는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양이 없는 것을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것입니까?
만일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닦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모든 법의 무너짐[壞]을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것이니라.
모든 법은 파괴되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모양도 또한 파괴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수레가 조각조각 파괴되기 때문에 수레라는 모양도 소멸되는 것과 같고,
또 수레바퀴가 조각조각 파괴되기 때문에 수레바퀴라는 모양도 또한 소멸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해서 작은 티끌[微塵]에까지 이르게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모든 법이 파괴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물질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나아가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의 파괴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떻게 물질의 파괴를 닦으며, 나아가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의 파괴를 닦는 것이 바로 반야를 닦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일심으로 살바야(薩婆若)를 생각하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반야바라밀을 바르게 행하고자 하여 ‘물질이 바로 존재하는 법[有法]’이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으니, ‘물질은 정해진 실체이고 모양이 있다’고 하는 것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모양이 있다면 반야를 닦지 않는 것이다.
반야 가운데에는 ‘없는 법’ 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있는 법’이겠는가?
이런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닦지도 못하고 또한 다섯 가지 바라밀도 닦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있는 법’이라는 희론에 집착하여 보시 등도 닦지 못한다.
이와 같이 집착한 이에게는 해탈도 없고 도(道)도 없고 열반도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3해탈문(解脫門)이 없기 때문에 ‘해탈이 없다’ 하고 ‘성인도 없다’ 하며,
공한 법이기 때문에 ‘도가 없다’라 하며,
도가 없기 때문에 ‘열반도 없다’라 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도가 없다 하는가?
【답】 이런 사람은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을 펴면서 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기 때문에 삿된 소견을 내며, 삿된 소견 때문에 몸에 대한 부정[身不淨] 등을 여실하게 관찰하지 못한다.
몸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념처(信念處)를 닦지 못하고,
신념처를 닦지 못하기 때문에 수념처(受念處)와 신념처(信念處)와 법념처(法念處)를 닦지 못하며,
4념처를 닦지 못하기 때문에 나아가 일체종지까지도 닦지 못한다.
왜냐 하면, 법이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법이 있고 어떤 것이 법이 없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범부는 혹은 법이 있는 가운데서 없다는 생각을 내고 법이 없는 가운데서 있다는 생각을 내기도 하나니, 이런 일을 분별하려고 일부러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둘의 모양[二相]이 곧 있는 것이요 둘이 아닌 모양[不二相]이 곧 없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다시 여쭈기를,
“어떤 것이 둘의 모양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물질의 모양을 취하는 것이 곧 둘이니라”라고 하셨으니,
앞의 품(品)에서는 말하기를,
“빛깔[色]을 여의면 눈이 없고 눈을 여의면 빛깔도 없으며,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성품까지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말할 수 없고 무위를 여의고는 유위의 실상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법은 서로 여읠 수 없는데도 범부는 이것을 둘이라 여기나니, 이 때문에 뒤바뀌는 것이다.
부처님은 간략하게 두 가지 모양을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 가운데서 모양을 취하면 모든 그것은 둘이다. 온갖 둘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있는 것[有]이니, 마침내 있게 되면 곧 생사(生死)가 있게 된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있는 것[有] 가운데서는 집착하는 마음을 내고 집착하는 마음의 인연으로 모든 번뇌가 생기며, 그 번뇌의 인연으로 생사에 왕래하고 생사의 인연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뇌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마침내 법이 있으면 곧 생사가 있고, 생사가 있으면 늙고ㆍ병들고ㆍ근심하고 괴로워함을 면할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둘의 모양을 지닌 사람에게는 단바라밀이 없고 나아가 순인(順忍)까지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니 하물며 물질의 실상(實相)을 보겠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실상을 보겠느냐?
이 사람이 만일 물질 등 모든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도를 닦는 것조차 없겠거늘 어떻게 수다원의 과위가 있겠으며, 나아가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6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의 것과 출세간(出世間)의 것이다.
이런 사람에겐 출세간의 6바라밀은 없나니,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에게는 6바라밀이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만일 있다면 다만 세간의 바라밀이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서는 세간의 바라밀을 말하지 않나니, 성문의 도의 과위에서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부처님의 도[佛道]에서겠는가?
【문】 순인(順忍)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순인인가?
【답】 이것은 소승의 순인이다. 소승의 순인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대승에서겠는가?
【문】 정법(頂法)에서는 이미 물러나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더 나아가 인법(忍法)을 말하는가?
【답】 성문의 법 가운데서도 “정법에서 떨어진다[頂墮]”라고 하고,
마하연(摩訶衍)에서도 “정법에서 떨어진다.”라고 설명하고 있거늘, 그
대는 무슨 까닭으로 정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정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견고하지 못하고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인위(忍位)에 오래도록 머무르면 이미 바른 선정[正定]에 들어가서 비록 무루(無漏)를 얻지는 못했어도 무루와 똑같이 되니,
고법인(苦法忍)을 따르기[隨順] 때문에 인(忍)라 하며,
일찍이 이런 법을 아직 보지 못한 까닭에 보고는 곧 잘 참으니[能忍], 이런 까닭에 인(忍)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부처님이나 성인에 있어서는 하찮지만, 범부에 있어서는 위대한 것이다.
‘물질을 봄[見色]’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질의 실상(實相)을 보아 똑똑히 아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물질에 매인 번뇌를 끊은 까닭에 본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물질에서와 같이 일체종지와 온갖 번뇌의 습기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으니,
만일 사람이 물질을 본다면 도를 닦는 것조차도 오히려 없겠거늘,
하물며 수다원의 과위를 닦고 나아가 번뇌의 습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