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의 문화재를 찾아서 10 - 아무래도 족보(族譜)가 있어야 잘 먹혀 - 개심사지 오층석탑
예천에서 사랑받고 있는 '문화재'를 꼽으라하면, 용문사, 초간정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천에 가면 전혀 예기치 못한 문화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한천(漢川) 건너편 '솔개들'이란 문전옥답에 자리잡고 있는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입니다. 이 탑은 몇 년 전 답사한 분들의 사진에는 질펀한 논(畓)가운데 겨우 발딛을 자리를 확보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예천군은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이 있는 부근의 농지 2800여평을 사들여 웬만한 아파트단지만한 넓은 공터를 만들었습니다. 예천군청의 발표에 의하면 올해(2015년)도 많은 예산을 확보하여 개심사지탑 부근의 농경지를 매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앞서 다녀 본 예천군 관내의 다른 문화재가 주차장은 커녕, 진입로마져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것에 비하여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정말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왜 이래 이래뵈도 나 족보있는 탑이라고" 개심사지 오층석탑이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족보(族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에 보듯이 상층갑석 아랫면에 사방 돌아가며 단정한 해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대갑석 아랫부분 上元甲子四十七統和二十七庚戌年二月一日正骨開心寺到石析三月三日光軍▣六隊車十八牛一千以十間入矣僧俗娘合一萬人了入彌勒香徒上秤神廉長長司正順行典福宣金由工達孝順剛香德貞?等三六人稚香徒秩京成仙郞光?金?阿志大舍香式金哀位奉楊寸能廉等四十人隊正邦祐其豆昕京位剛儡平矣典次衣等五十人
상대면석 동쪽면 오른쪽 棟梁戶長陪戎校尉林長崔祐母主副棟梁▣▣邦祐
상대면석 동쪽면 왼쪽 四弘爲身心上報之佛恩爲國正功德普及於一切 辛亥四月八日立 - 제대로 한다면 원자료를 보고 직접 옮겨야 할 것이지만, 가방끈이 그만큼 되지 못해 집에있는 '한국금석전문'이란 책에서 옮겼습니다. 여기에 보면 서기 1010년인 고려 헌종 1년에 개심사 공사를 시작하였고, 광군과 승려 속인 선랑등 1만여명이 참여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또 중요한 인물인듯 미륵향도(彌勒香徒) 36인과 치향도(稚香徒) 40인 등이 참여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들로 개심사의 규모와 개심사의 성격등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록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또 상층기단 동쪽면을 보면 8부신장을 새긴 빈 자리에도 글씨를 써 넣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글씨를 넣을 목적이 없었던 곳이고, 글씨체로 보아서 상층갑석 아랫면의 명문(銘文)과는 차이가 납니다. 이것은 탑을 완성시킨 후대에 새겨넣은 것입니다. 내용중에 '최우(崔祐)'라는 이름이 있어 무신정권기의 '최우(崔祐)'와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마지막에 쓰여있는 신해(辛亥)와 연결하여 맞아 떨어지는 것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신해년은 서기로 1016, 1076, 1136년으로 돌아가는데 이때 개심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개심사 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이 대접받는 것은 이렇게 족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아주 아름다운 탑입니다. 특히 기단과 탑신에 걸쳐 보기드문 아름다운 조각을 온전히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넘어가는 저녁해에 비친 하얀 화강석은 흰색이 아니라 살색으로 보입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 면석을 두고 위에 갑석을 깔았습니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세개의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는 문복(文服)차림의 12지신상을 새겼습니다. 험상궂지않고 단아한 12지신상은 모두 방석같은 것을 깔고 앉아 합장을 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옷모습은 모두 단정합니다. 북쪽면의 오른쪽 부터 자(子)로 시작하여 한면에 세개씩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새겼습니다. 위 사진은 서쪽면의 유(酉), 술(戌), 해(亥)상입니다. 보통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12지신상은 북쪽면 가운데상이 자(子)로 시작되는데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세개씩 귀를 맞춰 새겼습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세개 중 양쪽것과 가운데것의 고개의 방향이 각각 다릅니다. 위 서쪽면의 사진에서도 양쪽 두개는 오른쪽을 보고 있는데 가운데 한개만 왼쪽을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네개중 북,동,남의 세개는 양쪽 2개의 상이 왼쪽을 보고 있는데, 위 사진 서쪽면만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그러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아마도 석공의 실수인것 같습니다. 각 면석의 안상의 아귀가 딱 맞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석재는 각각 따로 조각하여 맞춘것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하층기단 갑석에 1단의 받침을 새기고 그 위에 상층기단 면석을 올렸습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가운데 탱주를 세워 둘로 나누고 각각의 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습니다. 조각이 깨끗하게 보관되어 마치 엊그제 새긴것과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단지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북쪽면은 마모가 심하여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북쪽면 왼쪽상은 네개의 팔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아수라'인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각을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심사 오층석탑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다른 곳에서 보던 팔부신중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한가지 형식의 갑옷을 차려 입었습니다. 그중 셋은 조익형(鳥翼形-새 날개모양)의 투구를 쓰고, 둘은 둥근 테가있는 모자를 썼습니다. 문득 요즘 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가 쓰고 등장하는 모자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려시대 무인들의 복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 갑석에 새겨진 명문 가운데 '광군(光軍)'이란 말이 나옵니다. 광군(光軍)은 고려 '정종'이 거란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광군사(光軍司)'의 군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약 30만명에 이르는 지방예비군과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개심사와 개심사 오층석탑의 건립에는 군사조직인 광군(光軍)이 참여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팔부신중에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상층기단 갑석위에는 앙련(仰蓮)이 새겨진 받침을 깔고, 그 위에 일층 몸돌을 올렸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일층 몸돌 남면에는 가느다란 음각으로 문(門)을 그려넣고 가운데 도톰한 자물쇠와 양쪽으로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금강역사는 몸을 틀고 주먹을 부르쥐은 맨손의 모습인데, 여기서는 막대기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타선에 들어선 타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짐작해 보면 이 모든 것은 '광군(光軍)'의 영향이 아니가 생각합니다. 개심사 조성기에 "정골사리가 도착하여 절을 짓는 역사를 시작했다.(庚戌年二月一日正骨開心寺到石析三月三日)"라고 하였으니 탑에는 중요한 사리가 모셔져 있었을 것입니다. 참 묘하게도 탑에는 도괴된 흔적을 찾기 어려운데, 어디에도 사리공(舍利孔)에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모두들 나만큼 궁금하지 않은가 봅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옥개석에는 네단의 받침을 새겼습니다. 일층부터 오층까지의 탑신은 모두 한개로 되어 있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탑신 각층의 비례가 급격하게 줄어들지 않아 탑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이 한개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제짝인 노반에는 각 면에 안상이 하나씩 새겨져 있습니다. 또 복발은 두개의 띠로 둘러져 있으며, 띠의 가운데에는 각각의 방위에 맞춰 작은 꽃이 하나씩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석탑을 볼때 많은 곳에서 복반과 노발을 분실하여 나중에 만들어 얹은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노반과 복발의 원형인것 같습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은 보물 53호입니다. 정말 사랑받고 대접 받아 마땅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석탑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통화 27년'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통화(統和)는 당시 거란이 사용하던 연호입니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군대를 서희가 외교로 물리친 이후 고려는 송(宋)과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 연호 사용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안고있는 것이 개심사지 오층석탑입니다. 2015년 12월 7일 경북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한 도사가 예천을 지나가다가 잠두산((蠶頭山)에 올라 예천의 지형을 바라보니, 잠두산이 화기(火氣)를 품고있어 소년들을 다 죽일 지형으로, 예천이 발전하지 못할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잠두산 아래에 절을 지었는데, 바로 개심사다. 개심사의 연기(緣起)에 풍수지리(風水地理)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결국 개심사나 개심사 오층석탑은 비보(裨補)역활로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 명문에서 '미륵향도(彌勒香徒)'와 '치향도(稚香徒)'라는 두 부류의 승려집단이 나옵니다. 이 두 부류의 성격에 대해서는 내가 살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아 더이상 말할 수 없으나 어떤 분은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탑을 매향탑(埋香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예천군은 개심사지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탑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길건너 주유소신축공사장에서 사찰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여기까지 개심사의 범위안에 넣고 순차적으로 땅을 매입하려고 하고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일차로 구입한 땅이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이 무척 넓은 땅입니다. 이 땅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보이는 것과 같이 땅이 주변보다 낮아 우기(雨期)에는 물이 괴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할이 태산입니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1917)'에 실린 사진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천군이 문화재보호에 할당된 예산을 좀 더 넓게 나누어 썼으면 좋겠습니다. '개심사 오층석탑'도 훌륭한 문화재이지만, 만약 보호받았다면 여기에 못지않게 좋았을 문화재가 예천군내에 있습니다. 여태것 보호받지 못해 파손되었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보호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그것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릴테니까요. |
출처: 내 삶을 사랑해 원문보기 글쓴이: Ducky 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