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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reason
5장. 전도
.. 불교경전들은 붓다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설교를 시작하고 나서 5년간은 어느정도 자세히 묘사했다. 이후 20년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붓다는 영적 삶의 원형이 되었고 담마와 니르바나의 화신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었다. 탐욕과 증오에 따른 번뇌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실리를 조정함으로써 자아를 초월하여 살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다른 성스러운 영역에 속해 있었다.
.. 붓다는 첫 제자 60명을 완전한 승려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신참자를 받아들일 권한을 주었다. 붓다는 혼자 남아서 우루렐라로 돌아갔다. 1000명의 브라민으로 이루어진 상가전체를 입문시켰다. .. 코브라 길들이기, 숲 전체를 천상의 광채로 밝히기, 신비한 방법으로 장작 쪼개기, 천상의 꽃 가져오기 등... 팔리어 텍스트들과 훗날 전기들에는 붓다가 일으킨 많은 이적과 놀라운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1000여명의 사람들에게 세번째 위대한 설교.
'빅쿠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감각과 그 감각의 먹이가 되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 몸, 정신, 감정이 모두 불타고 있다.
무엇때문에 이런 큰 불이 났는가?
탐욕, 증오, 망상(탐진치)라는 세가지 불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이 불길에 연료를 제공하는 한 이 불은 계속 타 니르바나의 서늘함에 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를 계속 불타게 하고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 욕망이다.
이 탐욕과 갈망은 증오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증오는 많은 악과 폭력의 원인이다.
무지의 세번째 불이 계속 타오르는 한 사람은 '슬픔, 애도, 고통, 비애, 정망'을 안은채
나고 죽는 순환, 불에 타 연기를 내뿜는 순환으로부터 해방을 얻는데 핵심이 되는
네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깨달을 수 없다.
이 설교에 1000명은 니르바나를 얻고 아라한이 되었다.
참고) 아라한 : 원래는 부처와 여래의 10가지 명호인 여래10호(如來十號) 또는 불10호(佛十號) 가운데 하나로 부처의 지위를 증득한 유정, 즉 부처 또는 여래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이후 부파불교 시대에서는 고타마 붓다에 대한 존경이 커져서 부처와 수행자로서의 아라한과는 구분하게 되었고, 성문의 4향4과의 최고위인 아라한향 · 아라한과의 유정을 통칭하여 아라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4][6] 나아가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유정은 성문으로서의 최고위인 아라한은 될 수 있으나 부처가 되지는 못한다는 견해까지 나타났고, 이에 대해 모든 유정이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는 낱말을 부파불교의 폄칭인 소승(小乘) 즉 성문 · 연각의 2승(二乘)의 최고위의 성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4]
붓다는 12월 말에 2천명의 세로운 아라한과 함께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로 떠났다. 이 도시 사람들은 새로운 영성에 굶주려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브라민을 대거 이끌고 붓다를 방문했다. 왕은 어렸을때부터 붓다가 나타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담마를 설교해주기를 바랐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불교 교단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줄 선물을 했다. 벨루바나 대나무 숲이라 알려진 공원(아라마)을 빅쿠들의 상가의 본거지로 쓰도록 허락하였다.
여기서 붓다는 중요한 2명의 제자 '사리풋타(사리불)와 목갈라나'를 만났다.
참고) 지혜제일 사리풋트라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필두인 인물. 팔리어로는 사리풋다, 산스크리트로는 '샤리푸트라', 한역으로는 '사리불(舍利佛)' 혹은 '사리자(舍利子)'라고 한다. 금강경과 함께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은 사리자 즉 사리풋다를 향해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는 내용이다.
마가다 왕국 출신의 브라만 가문의 후예로 우파팃사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친구 목갈라나(목건련)와 함께 산자야라는 수행자의 교단에 출가했는데, 그는 '진리는 확정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을 주창하던 육사외도였다. 사리풋다는 이러한 가르침에 "그러면 '확정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답할 수 있는가?" 하며 번민하던 중에 석가모니를 만났다.
사리풋다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친구 목갈라나, 자신들을 따르는 수행자 250여 명을 이끌고 불문에 귀의했고, 석가모니도 그들을 특별히 아껴 사리풋다를 자신의 오른쪽에, 목갈라나를 왼쪽에 앉혀 그들을 자신의 수제자임을 분명히 하였다.[1] 사리풋다도 석가모니와 그 교단에 헌신하여, 훗날 데바닷타[2]가 일부 비구들을 이끌고 교단을 이탈하려 하자 목갈라나와 함께 나서서 비구들을 조리있게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는 등 활약하였다.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비로워서 주로 대중들을 교화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다른 비구들은 그에 비하면 지혜가 16분의 1도 미치지 못한다고도 하였고, 간혹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한 일도 있다. 또한 외법(불교 외의 교단)에도 밝아 위의 데바닷타의 얘기처럼 이들 교리의 헛점을 논파하는 데에도 능했고, 한편으로는 방대한 지식을 살려서 불교 교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게끔 정리하는 데에 일조하여 오늘날 대승 불교의 기초를 마련했다고도 말한다. 대승 쪽 경전에서 자주 나오는 '사리불', '사리자'가 이 사리풋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신통제일 목갈라나(목건련)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한 명. 한역 명칭은 '목건련(目犍連)'이다. 같이 10대 제자의 필두였던 사리풋다(사리불)와 죽마고우로, 라자가하의 북쪽에 위치한 코리타 마을의 브라만 가문 출신이다. 16세에 사리풋다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다 문득 '화려한 축제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끝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리풋다도 이에 동의하여 산자야라는 수행자의 교단(육사외도 참조)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다 후에 '아사지'라는 비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얘기를 듣고 부처님을 배알하니, 부처님은 단번에 그들을 반기며 먼저 제자가 된 카사파(가섭)보다도 중하게 대우하였다.
10대제자 중에서 '신통제일'로 불릴 정도로, 신통력과 일부러 거리를 둘 정도였던 불교 교단[1]에서 유독 신통력으로 유명했다. 과거 데바닷타가 일부 비구들을 데리고 교단을 이탈할 적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신통력을 발휘해 사리풋다의 설득을 도왔다거나, 엄지발가락을 움직여 천상의 궁전을 흔들었다는 등 설화가 있다. 그 외에 효성이 지극하여 지옥에 떨어진 모친을 구했다는 설화도 있다. [2] 그러나 석가모니는 목갈라나에게 신통력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목갈라나는 그러한 신통력 때문에 불교 교단을 견제하던 다른 수행자나 교단의 시기를 한몸에 받았고, 반대파들의 집요한 추격에 쫓기다[3] 결국 붙잡혀 집단 린치를 당하였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잠시 뒤에 사리풋다도 입멸하니 석가모니는 두 제자의 죽음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이들이 나의 으뜸가는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상가를 위하여 큰 일을 할 것입니다'
실제 붓다가 죽고나서 사리풋트라는 불교의 제 2 창건자로 본다. 그는 분석적인 정신의 소유자로서 담마를 기억하기 쉽게 표현하는 귀재였다. 그러나 좀더 대중적인 마하야나(대승불교) 학파에게는 그의 경건성이 너무 메마르게 느껴졌다. 마하야나는 목갈라니를 그들의 스승으로 여겼다. 목갈라나는 잇디(싯디)로 유명했다. 신비하게 하늘을 오르기도 했고 요가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 숫도다나(고타마의 아버지)는 이제 유명하게 된 아들이 라자가하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사절과 함께 큰 무리의 수행원을 딸려 보내 그를 카팔라빗투로 초대했다. 그러나 이 삭카인들은 붓다의 설교를 듣고 아라한이 되는 바람에 숫도다나의 전갈을 잊어버렸다. 이 일은 무려 9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마침내 초대의 말이 붓다에게 전해지고 붓다는 2만명의 빅쿠들을 거느리고 고향에 찾아갔다. 자존심과 오만으로 유명한 삭카인들은 붓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 뜨기도 하고 팔다리에서 물과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하늘에 난 보석이 깔린 길을 걷기도 했다.
... 숫도다나는 아들이 카필라밧투에서 걸식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났다. 어떻게 저렇게 가문의 이름을 모욕할 수 있는가? 붓다는 아버지 숫도다나를 앉혀놓고 담마를 설명했다. 그는 '냇물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 그곳에 있는 집안의 모든 여인들은 평신도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붓다의 옛 부인(아쇼다라)은 거리를 두었다.
참고) 숫도다나 왕은 혹시 아들이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16세의 나이에 콜리야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Yaśodhara)와 혼인시켰다. 붓다의 일곱살난 아들 '라훌라'도 제자가 되었고 20세가 되어서 승려로 인정받았다. 라훌라 외에도 붓다의 친족 3명이 있었는데 그의 사촌 아난다, 배다른 형제 난다, 매제 베다밧타 등이었다. 그들은 이발사 '우팔리'도 데려왔는데 우팔리 역시 상가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우팔리는 수도사의 생활규칙의 중요한 전문가(지계제일 우바리, 우팔리)가 되었다. 아난다(다문제일)는 붓다의 마지막 20년간을 그의 옆에서 수행했다. 아난다는 다른 누구보다 붓다와 가까웠고 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붓다의 설교와 말에 대해서는 매우 잘 알게 되었지만 본디 능숙한 요가 수행자는 아니었다. 그는 명상능력없이 담마의 가장 박식한 권위자가 되었으나 붓다 생전에는 니르바나를 얻지 못했다.
상냥하고 친절한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리풋트라와 같은 영적인 거인들과 비교할때 개인적 특성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붓다의 사망 며칠전동안에 아난다의 가슴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다.
부유한 상인이 수도자들에게 감동하여 오두막 60채를 지어주겠다고 했고 붓다와 수도자를 식사에 초대했다. .. 사밧티 출신의 상인인 처남 '아나타핀디카'가 물었다.
대체 무슨일입니까?
결혼식이 있는 것입니까?
왕을 맞이하는 것입니까?
붓다를 비롯한 수도자들이 식사를 하러 온다네.
다음날 아나타핀디카와 붓다는 만났다. 그는 '훌륭합니다 .주여 저를 평신도로 받아들여주십시오' 아나타핀디카는 붓다를 위한 기지를 구축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 그는 넓은 테라스를 설치하고 문을 세우고 강당을 짓고 불을 두는 방과창고를 짓고 찬장을 설치하고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결국 이곳은 상가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붓다는 짧은 시간에 라자가하, 카필라밧투, 사밧티 등지에 공원 셋을 얻었다. 수도자들은 망고나무가 우거지고 야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연못에서 생활하고 명상을 할 수 있었다.
.. 코살라의 왕 파세네디는 불교도의 아라마 생활의 다정하고 명랑한 분위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붓다에게 그 모습이 궁정생활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고 말했다. 궁정에서는 이기심, 탐욕, 호전적 태도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왕은 다른 왕들과 싸웠고 브라민은 다른 브라민들과 싸웠다. 가족과 친구들은 늘 서로 싸웠다. 그러나 아라마에서는 빅쿠들이 '우유와 물처럼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울려 살았으며 다정한 눈길로 서로를 보았다.
아나타핀디카의 죽음이야기
아나타핀디카가 죽을 병에 걸렸을때 사리풋트르와 아난다가 그를 찾아갔다. 사리풋트라는 '아나타핀디카에게 감각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외적 세계와 그런 식으로 접촉하게 되면 삼사라의 덫에 걸릴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나타핀디카는 처음듣는 이아기였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 그렇게 오랫동안 스승과 명상하는 빅쿠들의 시중을 들었지만 이러한 담마는 처음 듣기 때문에 슬프다'라고 말했다.
'이 가르침은 일반인들에게는 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리풋트라는 그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가족생활을 떠난 사람들에게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진 자들도 그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 근대 이전의 종교는 언제나 2개층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위층은 평생 경전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자신들보다 무지할 수 밖에 없는 일반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엘리트층이었다. 완전한 종교적 평등은 모두가 문자를 해독하여 경정을 읽을 수 있을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다. 불교 경전은 기원전 1세기가 되어서야 문서로 작성되었다. 그때도 경전은 귀했다. 담마를 듣고 싶은 사람은 붓다나 수도자에게 가야했다.
.. 아나타핀디카 같은 일반인들은 붓다나 빅쿠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도자들은 그들에게 다섯가지 도덕적 맹세를 하도록 권장했는데 이것이 초보자들을 위한 담마였던 것이다.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음주, 불사음
.. 불교 수도자들은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요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정심, 자제, 깨어있는 마음에 대한 도덕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붓다가 그들의 생활조건에 맞게 만들어 놓은 도덕성(실라, 계) 훈련에 집중했다.일반인들은 이런 식으로 좀더 완전항 영성의 기초를 닦아나갔으며 이를 통해 다음 생에는 좀더 나은 조건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수도자들은 명상의 능숙한 기술을 배우는 반면 일반인들은 능숙한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반인들은 빅쿠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진실을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좀더 건강한 마음상태를 계발할 수 있었으며 아집의 불을 완전히 끄지는 못하더라도 어느정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평신도들은 다음 생을 위한 공덕을 쌓는 것이외에 이 생에서 더 행복하게 사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참고) 상좌부 불교에서는 8정도가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나열한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戒) · 정(定) · 혜(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 · 정사유가 혜에 속하며, 정어 · 정업 · 정명이 계에 속하며, 정정진 · 정념 · 정정이 정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계 · 정 · 혜는 서로를 도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크게 보아 계에 의지하여 정을 득하고, 정에 의지하여 혜를 득한다고 본다. 평신도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거래에서 압파다마(주의깊은 태도, 불방일)로 나아가도록 인도되었다.
참고) 압파다마 불방일(不放逸, 산스크리트어: apramāda, 팔리어: appamada, 영어: carefulness, concern, conscientiousness, conscious awareness)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에서 심소법(心所法: 46가지) 중 대선지법(大善地法: 10가지) 가운데 하나이며,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에서 심소법(心所法: 51가지) 중 선심소(善心所: 11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불방일은 온갖 선법(善法)을 닦는 것이다. 불방일은 선(善)에 대해 전념[專注]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설일체유부의 이러한 정의와는 달리 "능히 마음을 수호하는 것"을 불방일이라 정의하는 부파도 있다.[1][2][3]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에서는 "온갖 선법(善法)에 있어서 방일(放逸)하지 않음, 즉 불방일을 으뜸으로 한다(於一切善法 不放逸為尊)"[4][5]고 말하면서, 불방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為斷不善法。為圓滿善法。常習常修堅作恒作。數修不止名不放逸。
불선법(不善法)을 끊고 선법(善法)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위하여, 항상 익히고 항상 수행하며 견고하게 짓고 한결같이 지으며 자주자주 수행하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을 불방일(不放逸)이라 한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 제1권. 한역본 (369쪽) 및 한글역본 (15쪽)
붓다는 그들에게 위급할때를 대비하여 저축을 하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빅쿠들에게 보시를 하고 빛을 피하고 가족의 일상적 요구에 필요한 돈을 확보하고 돈을 세심하게 투자하라고 일렀다. 또 절약을 하고 분별력을 유지하고 취하지 말라고 했다.
시갈라밧타 숫타를 보면 시갈라는 일반인들에게 행해지는 도덕성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술과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과 도박과 게으름과 나쁜 벗을 피하라는 가르침이었다.
.. 칼라만 사람들에게 한 유명한 설교
붓다는 말했다.
'자 칼라만인들이여,
들은 이야기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남의 말만 믿고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도덕성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를들어
탐욕은 좋은가 나쁜가?
증오는 어떤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망상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가?
이 감정들은 모두 고통과 괴로움을 낳지 않는가?
붓다는 한단계씩 칼라만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게 하였으며 탐욕, 증오, 무지의 3가지 불의 결과를 보게 해주었다. 토론이 끝나갈 무렵 칼라만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붓다의 담마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붓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내가 어떤 스승에게도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속에서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되고(쿠살라)
저런 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아쿠살라)는 것을 알게되면
누가 뭐라하든 간에 도움이 되는 것을 실행에 옮기고 그것을 고수하십시오'
.. 붓다는 칼라만인들에게 탐욕, 증오, 망상을 피하면서 정반대의 덕목 '비탐욕, 비증오, 비망상'을 실행에 옮기라고 가르쳤다. .. 붓다는 칼라만인들이 이러한 능숙한 심리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명상기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가없는 마음'의 일반인용 판본이라 할 만했다.
우선 그들의 마음에서 '질투, 악의, 망상'을 없애야 했다.
다음에 '자비의 감정을 사방으로 향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고양되고 확장된 존재를 경험하게 될터였다.
자신이 풍부하고 고양되고 가없는 자비에 물들어 있음을 알게 될터였다.
자신의 한정된 시야의 테두리를 부수고 온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을 터였다.
자기 중심주의의 편협함을 초월하여 잠시 자기자신에게서 벗어나 '위, 아래, 주위, 모든 곳'으로 뻗어나가는 황홀경을 경험하게 될터였다. 그들의 마음이 사욕없는 평정심을 얻어 확장되는 것을 느낄터였다. 일반인들은 지속적인 니르바나를 얻지 못할수도 있지만 그 궁극적 해방의 암시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붓다는 수도자와 일반인 모두에게 호전적인 새로운 사회에 만연한 자기중심주의, 인간이 삶의 거룩한 영역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 자기중심주의를 동정심으로 공격하여 완화시키라고 가르쳤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하라
약하든 강하든 높든 중간이든 낮든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깝든 멀든
살아있든 태어날 것이든 모두가 완전히 행복할 지어다!
아무에게도 거짓말을 말고
어디에 있는 누구도 경멸하지 말라
분노때문이든 증오때문이든 살아있는 것이
해를 입기를 바라지 말라!
어머니가 하나뿐이 자식을 소중히 여기듯이
모든 생명들을 소중하게 여기라
우리의 사랑의 마음들이 위든 아래든 옆이든
가없이 온세상을 채울지어다
속박없고 증오와 적의에서 자유로운
가없는 호의로 온 세상을 대할지어다'
여성을 상가로 받아들이는 순간
붓다는 니그로다 아라마에 있을때 아버지의 미망인 '파자파티 고타미'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붓다의 이모였으며 붓다의 어머니지 죽은뒤 양모노릇을 했다. 그녀는 조카에게 상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붓다는 반대했다. 여자를 교단에 받아들일 새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슬퍼하며 붓다 곁을 떠났다.
며칠뒤 아난다는 고타미를 만났다.
고타미여, 여기서 왜 울고 계십니까?
축복받은 분께서 여자들을 상가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문제일 아난다는 다른 방법으로 붓다에게 질문을 했다.
주여, 여자가 냇물에 들어간 자, 나아가서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까?
붓다가 대답했다.
될수 있습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파자파티 고타미를 상가에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붓다는 인정하고 여자를 상가에 받아들였다. .. 붓다는 아난다에게 말했다. 만일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담마는 1천년동안 실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5백년밖에 실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자가 지나치게 많은 부족은 약해져서 망하기 쉽다고 말했다.
붓다의 여자를 대하는 마음
.. 주여, 여자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붓다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아난다가 물었다.
여자를 보지마십시오. 아난다여.
보지 않으면 어떻게 대접합니까?
여자에게 말을 하지 마십시오.
꼭 말을 해야 할때는 어떻게 합니까?
반드시 깨어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붓다는 여자들이 교단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첫번째 큰 위기는 남성 수도자들 사이의 자아충돌로 인해 일어났다. 코삼비에서 진지하고 학식이 풍부한 수도자가 징계를 받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수도자는 이 벌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자신이 잘못을 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코삼비 빅쿠들은 즉시 패가 갈려서 서로를 적대하게 되엇다. 붓다는 크게 괴로워했다. .. 붓다는 해결책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파티목카(공동 신앙고백문)
'모든 해를 주는 일을 삼가며
능숙한 것을 얻으며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니
이것이 곧 붓다의 가르침이다.
자제와 인내는 모든 금욕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것이며
봇다들은 니르바나가 최고의 가치라고 선포하였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자는 진정으로 떠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는 진정한 수도자가 아니다.
흠을 잡지 말며 해를 주지 말며. 근신하라
먹을 것과 하나의 침상과 의자에 관한 규칙을 지키며
명상으로부터 나오는 더 높은 지각에 몰두하라.
이것이 깨달은 자들의 가르침이다
붓다가 죽고난 뒤 이 암송모임은 좀더 정교하고 복잡한 모임으로 바뀌었으며 이 모임은 각 지역공동체에서 2주에 한번 열렸다. 이러한 변화는 상가가 하나의 종파로부터 교단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남녀 수도자들은 다른 종파들과 구별되는 담마를 외우는 대신 이 상가의 규칙을 외우고 서로 잘못한 일을 고백했다.
.. 오느날 한 브라민은 붓다가 나무아래서 명상에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물었다.
선생님은 신이십니까?
아니요
천사가 되어가는 중입니까? 아니면 영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아니오
선생님은 인간입니까?
아니오
붓다는 대답했다.
당신은 물밑에서 삶을 시작한 뒤 연못 위로 올라와
마침내 수면과 닿지 않는 곳에 빨간 꽃을 피운 연을 본적이 있습니까?
나 역시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랐지만 세상을 초월하였으며 이제는 세상과 닿지 않습니다.
그는 이 생에서 니르바나를 얻음으로써 인간의 본성의 새로운 잠재력을 드러냈다. 이 고통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려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를 위해 살아야 했다. 이러한 에고의 죽음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어둠이 아니었다. 이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브라민은 붓다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말했다.
'나를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첫댓글 나를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