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할 준비가 되었나요?
_<래디컬 헬프>를 읽고
신지윤, 도봉서원종합사회복지관
엘라는 도움이 절실했고 73명의 전문가들이 바로 그것을 위해, 그러니까 어떻게든 돕기 위해 엘라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하지만 엘라의 눈에는, 그녀가 복지 시스템의 모든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인 ‘더 소셜’이 오히려 문제의 일부로 보인다. 그들의 지시와 요구는 엘라가 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잡음일 뿐이다. 엘라는 낙인찍히는 것과 창피당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지만 수십 년간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회의, 제재, 의뢰, 또 회의를 거치다 보니 차라리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두었으면 싶어졌다. 「래디컬헬프」 (힐러리 코텀)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막 업무를 시작하게 된 신입 사회복지사로서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직 체감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고 여러 당사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래디컬 헬프”의 사례가 더 와 닿았고 사회복지사로서의 나의 모습을 성찰하게 되었다.
엘라의 사례에서는 73명의 전문가들과 20개의 서로 다른 관계기관이 당사자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여러 관계기관의 전문가들이 엘라의 사례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가진 문제만을 평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실천현장에서도 볼 수 있다.
통합적이고 효과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하여 당사자의 상황을 지원한다는 목표 아래 여러 기관의 많은 담당자들이 만나 회의를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역량에 집중하는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당사자의 삶에 대한 평가와 문제 제기, 또 다른 복지서비스의 연결 등 당사자의 문제를 어떻게 복지서비스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논의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해진 시간 내 여러 당사자의 건강하고 안전한 생활을 위해 개입 방향과 역할에 대해 의논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당사자의 의견, 강점과 역량 증가에 대한 부분이 경시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했다.
라이언은 대부분의 시간(74퍼센트)을 기록, 추적, 모니터링, 의뢰 평가 및 다른 기관과의 회의 등과 같은 행정업무를 하는 데 보낸다. (중략) 의뢰된 가족과 함께 일하고, 그가 배정받은 다른 아이들과 대면하는 데 쓸 시간은 근무시간 중 14퍼센트만이 남는다. (중략) 라이언은 톰에게 물어보고 응답 내용을 기록한다. 이 질의응답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라이언은 책상위의 서류 양식을 작성하고 있고 톰은 팔에 난 상처의 딱지를 뜯고 있다. 나는 토론도 하지 않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도 오가지 않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단지 사실의 기록, 문제의 처리만이 있을 뿐이다. 「래디컬헬프」 (힐러리 코텀)
엘라의 가정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당사자의 사례에 무수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대부분은 행정 업무 처리로 사용되고, 당사자와 대면하는 시간은 그 중 적은 시간만 해당되었음을 알았다. 나 자신 또한 전체 업무 시간 중 당사자와 대면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지 생각했다. 행정 업무의 기한을 맞추기 위해, 행정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간에 쫓기면서 당사자와 대면하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당사자와의 짧은 대면 시간은 담당 사회복지사가 당사자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 현재의 상황과 관련된 민감한 사항을 취조하는 식의 면담이 이루어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사실의 기록, 문제의 처리만이 있을 뿐인 담당자와 당사자와의 대면은 당사자의 문제에서 당사자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사자의 문제인데, 당사자에게 묻고 의논하는 것이 아닌 전문가로 불리는 담당자만이 당사자의 삶을 판단하고 복지서비스를 연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당사자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을 한번 더 생각했다.
누군가를 도울 때는 개방적 경청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경청되었다는 느낌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상대가 경청하면 화자는 이야기로 표현하도록 격려를 받고 화자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될 때 그는 비로소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래디컬헬프」 (힐러리 코텀)
서비스 당사자 선정을 위해 당사자와 처음 대면하여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것까지 이야기해야 되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말을 듣고 죄송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회복지사로서 초기면담을 하며 반찬, 도시락 등을 도움받기를 원하는 당사자에게 경제상황, 부채상황, 자택 소유 형태, 자녀의 직업 등을 묻고, 왜 가족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지도 파악하곤 한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회복지사에게 자신의 민감한 사항을 말하게 되어 당황스럽고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기면담의 서식을 채우는데 조급함을 느껴 당사자를 잘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당사자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는 서식과 관련한 질문을 줄이고 당사자의 일상과 당사자가 하고 싶은 말을 경청하는 데 더 집중했다. 이전에는 서식을 채우기 위해 당사자의 약점과 문제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상황이 조심스러웠지만 당사자를 잘 돕기 위해서는 질문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약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닌, 당사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기면담지가 저절로 채워짐을 알았다. 당사자의 말을 경청하고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일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파악이 되지 않는다면 이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묻기도 하지만 서식의 모든 칸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닌, 반드시 필요한 정보만을 물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당사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태도로 당사자의 말에 경청하는 것이 만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함을 성찰했다.
첫댓글 초기면담에서 당사자의 일상에 더 집중한다는 선생님의 경험을 읽으며 사회사업가인 저를 성찰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빈칸 채우기에 급급하지 않고 당사자의 존엄을 먼저 생각해야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을 함께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