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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
♣ 자[字]이름[名]을 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장가든 후에 부르기 위해 짓는 이름에 준하는 것
♣ 자[餈]인절미.
♣ 자[子]자신의 아들을 일컬을 때;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남의 아들을 일컬을 때 ; 영식(令息), 영랑(令郞), 영윤(令胤)
♣ 자가[子家]춘추 시대 정(鄭) 나라 공자 귀생(公子歸生)의 자(字). 자공(子公)과 함께 자기들만이 임금에게 자라고기를 얻어먹지 못한 것으로 해서 뒤에 정 영공(鄭靈公)을 시해했음. 《左傳 公宣 四年》
♣ 자가내사[自暇乃肆]서경(書經) 주고(酒誥)에, “감히 스스로 한가함을 구하거나 스스로 평안하기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술 마시는 일을 감히 숭상했다 하겠는가.[不敢自暇自逸 矧曰其敢崇飮]”라는 말이 나온다.
♣ 자가당착[自家撞着]자가(自家)는 자기(자신), 당착(撞着)은 서로 맞부딪힘. 즉, 앞뒤가 맞지 않음.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서 모순되는 일.
♣ 자각[紫閣]자각은 신선이나 은자(隱者)들이 사는 곳. 옛날 궁궐을 자색(紫色)으로 칠했으므로 궁궐을 말하기도 한다.
♣ 자각[雌閣]한대(漢代)에 승상(丞相)이 나라 일을 보던 곳을 황각(雌閣)이라 불렀는데, 그곳 문을 누런 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자각(雌閣)이라 쓴 것은 옛날엔 노란 칠을 흔히 자황(雌黃)으로써 했기 때문이다.
♣ 자각봉[紫閣峯]자각봉은 서울의 남산을 가리킨 것이며, 전설에 신선은 놀로 밥을 지어 먹는다 한다.
♣ 자갑[雌甲]갑자(甲子)가 짝수의 날을 만난 것을 이름.
♣ 자강불식[自强不息]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쉬지 않음. 스스로 힘써 노력하고 쉬지 않음. 주역(周易)에 “군자가 건(乾)의 덕을 본받아서 자강하여 쉬지 않는다[君子以 自强不息].” 하였다.
♣ 자강주지충주[自江州至忠州]백거이(白居易)가 강주 사마(江州司馬)에서 충주 자사(忠州刺史)로 부임하면서 ‘자강주지충주(自江州至忠州)’ 등 고달픈 심정을 읊은 몇 수의 시를 지었다. 《白樂天詩集 卷11》
♣ 자개[者個]’자개(者個)’는 ‘약개(若個)’와 같은 말임.
♣ 자개[者個]저개[這箇]와 같은 말임. 모황(毛晃)의 운략(韻略)에 “무릇 차개(此箇)를 칭하여 자개(者個)라 한다.” 하였음.
♣ 자개축융[紫蓋祝融]자개와 축융(祝融)은 모두 산봉우리 이름으로, 형산(衡山)의 72봉(峯) 가운데 축융봉이 가장 높고, 자개봉이 그 다음이라고 한 것을 이른 말인데, 일설에는 자개봉이 가장 높다고 하기도 한다.
♣ 자개황모[紫蓋黃旄]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떠도는 운기(雲氣)로, 옛날 술사(術士)들이 제왕의 부서(符瑞)로 여겼다. 황모는 보통 황기(黃旗)로 많이 쓰인다.
♣ 자거[刺擧]간악한 자를 탄핵하여 배척하고 공이 있는 이를 거양(擧揚)하는 대간의 일을 말한다.
♣ 자건[子建]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문장가인 조식(曹植)의 자이다.
♣ 자검[紫劍]웅검(雄劍)인 간장(干將)과 자검(雌劍)인 막야(莫邪)가 땅속에 묻혀 자기(紫氣)를 내뿜고 있던 중에 발굴되어 세상에 나온 뒤, 서로 오래도록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는 함께 합쳐져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拾遺記 卷10ㆍ晉書 張華傳》
♣ 자검[紫劍]자검은 옛날 용천검(龍泉劍)이 땅속에 묻혀 하늘 위로 자기(紫氣)를 발산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 자격지심[自激之心]제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한 생각을 가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 자겸[子謙]최명길(崔鳴吉)의 자(字)이다.
♣ 자경[子卿]소무(蘇武)의 자(字).
♣ 자경[子敬]왕헌지(王獻之)의 자.
♣ 자경[蔗境]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가 단수수를 먹을 때는 항상 꼬리에서부터 먹기 시작하여 밑둥으로 들어가면서 ‘차츰 가경(佳境)으로 들어간다.’하였음. 그래서 사람들이 고(苦)로부터 낙(樂)으로 가는 일을 들어 자경(蔗境)이라 하였음. 수숫대는 본디 밑둥이 더 달기 때문임.
♣ 자경금[紫瓊琴]붉은 구슬로 장식한 거문고. 이백(李白)의 의고시(擬古詩)에 “선인이 나에게 녹옥배를 끼쳐주고 겸하여 자경금도 주었다오[仙人遺我綠玉杯 兼之紫瓊琴]”한데서 온 말이다.
♣ 자경누호아[子卿累胡娥]자경(子卿)은 한(漢) 나라 소무(蘇武)의 자(字)이며 호아(胡娥)는 흉노(匈奴)의 여자를 이른다. 소무는 일찍이 장군이 되어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그만 억류되었다. 그리하여 온갖 협박과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억류되어 있는 동안 오랑캐 여자를 사귀어 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통국(通國)이라 하였다. 《漢書 卷五十四 蘇建傳》
♣ 자경적노[子卿適虜]한(漢) 나라 소무(蘇武)의 자이다. 소무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은 채 온갖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소제(昭帝) 때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자경절[子卿節]자경은 한 나라 소무(蘇武)의 자이다. 소무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武傳》
♣ 자경청전[子敬靑氈]자경은 진(晉) 나라 때의 왕헌지(王獻之)를 이름. 자경은 그의 자. 왕헌지가 어느 날 밤 재중(齋中)에 누웠을 때 도둑이 들어 모든 물건을 다 훔쳐가므로, 헌지가 도둑에게 말하기를, “청색 모전(毛氈)은 우리 집의 세전지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거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자고[紫詁]금랑(錦囊)에 담아 자니(紫泥)로 입구를 봉한 뒤 인장(印章)을 찍어서 반포하는 임금의 조서(詔書)를 말한다.
♣ 자고[鷓鴣]만당(晩唐)의 시인 정곡(鄭谷)의 자고(鷓鴣)를 읊은 시가 일세에 회자하여 마침내 자고의 별칭이 되었으므로 뒷 사람이 정씨를 만나면 으레 자고라 하였다.
♣ 자고[鷓鴣]우는 소리가 ‘행부득야가가(行不得也哥哥)’처럼 들린다고 하여, 먼 길 떠날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 흔히 시문 속에 등장시켰다.
♣ 자고[紫誥]임금의 조서는 비단주머니에 담고 풍화석(風化石)의 일종인 적석지(赤石脂)로 그 입구를 봉한 뒤에 그 위에다가 인장을 누르는 격식에서 나온 말로, 조서를 뜻한다.
♣ 자고[子羔]춘추 시대 위(衛) 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인 고시(高柴)를 이름. 자고는 그의 자이다.
♣ 자고남천[鷓鴣南遷]꿩과에 속하는 메추라기 비슷한 새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만 산다고 한다. 진(晉) 나라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에 “자고새는 남쪽으로 날아가 그 속에 그냥 머물고, 공작새는 오색 날개 펼치고서 높이 날아 올라간다.[鷓鴣南翥而中留 孔雀綷羽以翶翔]”는 말이 있는데, 그 주(註)에 “자고새는 항상 남쪽으로 날지 북쪽으로는 날지 않는다.” 하였다.
♣ 자고반[鷓鴣班]신하들이 어전(御前)에 반열을 지어 늘어서는 것이 자고와 같다는 말이다.
♣ 자고반[鷓鴣斑]자고새 가슴 털처럼 흰 반점이 박혀 있는 흑갈색의 향(香) 이름이다.
♣ 자고불능시[子固不能詩]송 나라 팽연재(彭淵材)가 말하기를, “오한(五恨)이 있는데, 첫째는 시어(鰣魚)가 뼈가 많은 것, 둘째는 금귤(金橘)이 너무 신[酸] 것, 셋째는 순채(蓴菜)가 성질이 냉(冷)한 것, 넷째는 해당화(海棠花)가 향기가 없는 것, 다섯째는 증자고(曾子固)가 시(詩)에 능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冷涼夜話》
♣ 자고이래[自古以來]예로부터 지금까지.
♣ 자공[子貢]자공은 춘추 때 위(衛) 나라 사람.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공자(孔子)의 제자로 말을 잘하였음. 위(衛)나라 출신으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정치에 뛰어난 후에 노(魯)나라‧위(衛)나라의 재상을 역임함. 제자 중에서 제일 부자였으므로, 경제적으로 공자를 도왔다고 함.
♣ 자공[子公]한 성제(漢成帝) 때의 권신(權臣) 진탕(陳湯)의 자(字)로, 권세가를 뜻하는 말이다. 진함(陳咸)이 누차 그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자공 덕택에 도성으로 들어가 벼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卽蒙子公力 得入帝城 死不恨]”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덕분에 지방에서 부름을 받고 들어와 소부(少府)가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卷66 陳萬年傳》
♣ 자공서[子公書]한(漢) 나라 때 진함(陳咸)이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있으면서 자주 진탕(陳湯)에게 뇌물을 주고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자공(子公; 진탕의 자임)의 힘만 입으면 제성(帝城)을 들어갈 수 있겠는데, 그렇게만 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였는데, 뒤에 끝내 들어가 소부(少府)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六》
♣ 자과[炙輠]자과는 지혜와 언사가 유창하고 무궁함을 이른 말로, 이는 곧 전국 시대 순경(荀卿)을 가리킨 말이다. 《史記 荀卿列傳》
♣ 자괴주언륜[自愧周彦倫]시골에 숨어살지 못하고 서울 가서 벼슬살이한 것이 부끄럽다는 뜻이다. 언륜(彦倫)은 주옹(周顒)의 자이다.
♣ 자괴지심[自愧之心]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 자구[自救]스스로 수심을 풀다.
♣ 자궁[紫宮]자미궁(紫微宮)의 약칭.
♣ 자궁[紫宮]전설 속에 나오는 천제(天帝)가 사는 궁전을 말한다.
♣ 자규란[赭虯卵]홍시(紅柹)의 모양. 한유(韓愈)의 영시시(詠柹詩)에 “붉은 용의 알을 까마귀가 쪼아먹네.[金烏下啄赭虯卵]" 하였다.
♣ 자규사[子規詞]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영월(寧越)에 유배된 단종(端宗)은 왕실을 떠나온 설움을 달랠 길이 없어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신세를 두견새에 비유하면서 피맺힌 절규를 하였음.
♣ 자극[紫極]별 이름으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다.
♣ 자극[紫極]자미원(紫微垣) 성좌(星座)는 황극(皇極)의 지점이 된다 하여 제왕의 궁전을 뜻한다.
♣ 자극궁[紫極宮]당대(唐代)에 도교(道敎)를 중히 여긴 나머지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받들고 각처에 사당을 세웠는데, 서울의 사당은 현원궁(玄元宮)이라 하고 각 지방의 사당은 자극궁이라고 불렀다. 이태백집(李太白集) 권23에 ‘심양의 자극궁에서 가을의 감회를 읊다.[尋陽紫極宮感秋作]’라는 시가 있다.
♣ 자극궁[紫極宮]황제가 사는 곳을 뜻함. 진서(晉書) 원충전(阮种傳)에 “지금 해내(海內)의 선비들이 모두 아름다운 빛에 희망을 걸고 자극(紫極)에 마음을 기울인다.” 하였음.
♣ 자금[紫禁]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궁금(宮禁), 즉 천자(天子)의 거소(居所)를 가리킨다.
♣ 자금단[紫金丹]옛날에 방사(方士)들이 복용하면 장생불사한다는 단약(丹藥)이다.
♣ 자기[子綦]남곽자기(南郭子綦). 전국 시대 사람. 성은 남백(南伯), 또는 남곽(南郭). 그는 책상에 기대고 앉아 집중된 정신과 고원(高遠)한 이상(理想)으로 고개 쳐들고 탄식하다가 자연(自然)의 묘(妙)를 깨달아 형(形)과 지(智)를 여의고 멍청한 몰골이 되어 신(身)과 심(心)을 빠뜨렸다. 《莊子 齊物論疏》
♣ 자기[紫氣]자기는 곧 서기(瑞氣)인데, 성덕(聖德)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옛날에 함곡관령(函谷關令) 윤희(尹喜)가 누(樓)에 올라, 자기가 서쪽으로 뻗친 것을 보고는 성인(聖人)이 그 곳을 경과할 줄 알고 있었는데, 과연 예측한 날짜에 노자(老子)가 그 곳을 경과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열선전(列山傳)에 “산해관에서 윤희(尹喜)가 바라보니 자기(紫氣)가 관 위에 어려 있었는데 과연 노자(老子)가 청우(靑牛)를 타고 그 곳을 지나갔다.”는 ‘동래자기(東來紫氣)’의 고사가 실려 있다.
♣ 자기[子期]종자기(鍾子期). 백아(伯牙)의 지음(知音). 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列子 湯問》
♣ 자기두우간[紫氣斗牛間]진(晉) 나라 때 붉은 기운이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용천검(龍泉劍)을 얻었다고 한다.
♣ 자기릉두우[紫氣凌斗牛]진(晋)나라 때에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천문을 본즉,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붉은 기운이 뻗치었다. 뇌환이 말하기를, “이것은 보검(寶劒)의 기운이 땅에서 올라간 것인데 풍성(豊城) 땅에 있을 것이요.” 하였다. 장화는 곧 뇌환을 풍성령(豊城令)으로 보내었더니 과연 땅속에서 보검 두 자루를 파내었다.
♣ 자기멱[紫氣羃]옛날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늘 보랏빛 기운이 서려 있었는데, 마침내는 이를 탐지하여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보검을 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36》
♣ 자기서[紫氣書]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한다. 함곡관(函谷關)의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봄에 자기(紫氣)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므로 성인(聖人)이 도래하리라고 예언했었는데, 과연 예상한 대로 노자가 이르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關令內傳》
♣ 자기야상우두고[紫氣夜上牛斗高]진 무제(晉武帝) 때 천상(天象)을 잘 관찰하던 뇌환(雷煥) 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있음을 보고 이를 보검(寶劍)의 정기가 하늘에 뻗친 것이라 하고는 그 보검이 묻혀있는 풍성현(豊城縣)에 가서 용천(龍泉)ㆍ태아(太阿) 두 보검을 찾아낸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三十六》
♣ 자기출서관[紫氣出西關]자기는 자줏빛의 서기(瑞氣)를 말함. 춘추 시대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나가려고 할 적에, 앞서 함곡관령(函谷關令) 윤희(尹喜)가 천기(天氣)를 관찰한 결과 함곡관 머리에 자기가 떠있음을 보고 성인이 그곳을 지나갈 것을 예측했는데, 과연 노자가 그곳에 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자기편면[慈屺便面]자기는 강위(姜瑋)의 호인데 일호는 추금(秋琴)임. 완당의 제자이고 시에 능하였음. 편면은 부채를 말함.
♣ 자기회[子綦灰]장자(莊子)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의자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데, 안성 자유(顔成子游)가 모시고 있다가 말하기를, “어떻습니까. 몸을 진실로 고목(枯木)같이 하고 마음을 진실로 식은 재같이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 자니[紫泥]고대에 진흙으로 서신(書信)을 봉하고 인장을 찍었는데 황제의 조서(詔書)는 무도(武都)의 붉은 진흙으로 봉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자당[慈堂]살아 계신 남의 어머니를 일컬음.
♣ 자도[子都]뛰어난 미남자(美男者)를 이르는데, 시경(詩經) 정풍(鄭風) 산유부소(山有扶蘇)에 “자도는 보이지 않고 미친 놈만 보이는구나[不見子都 乃見狂且]”하였다.
♣ 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콩을 삶는 데 콩깍지로 불을 때다. 골육인 형제가 서로 다투어 괴롭히고 죽이려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자라낭[紫羅囊]귀족 자제(貴族子弟)들이 지니는 사치품으로서, 즉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이르는데, 진(晉) 나라 때 사현(謝玄)이 어려서 자라낭을 좋아하여 차고 다니므로, 그의 숙부(叔父) 사안(謝安)이 그를 걱정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짐짓 장난으로 내기를 하여 그것을 따내서 즉시 불태워 버렸다 한다.
♣ 자란생[紫鸞笙]신선이 부는 피리인데, 진자앙(陳子昻)과 이백(李白)의 시(詩)에 있다.
♣ 자로공[子路拱]공경하는 예를 올리겠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자로가 공자를 따라가다가 뒤에 처졌는데, 지팡이를 짚고 대바구니를 멘 장인(丈人)을 만났다. 자로가 ‘노인께서는 우리 부자(夫子)를 보셨습니까?’ 하고 묻자, 장인이 말하기를, ‘사지(四肢)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오곡(五穀)을 분별하지도 못하는데, 누구를 부자라고 하는가?’ 하고, 지팡이를 꽂아 놓고 김을 매었다. 이에 자로가 공수한 채 서 있었다.” 하였다.
♣ 자로부미[子路負米]백리나 떨어진 먼 곳으로 쌀을 진다는 말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갖은 고생을 하며 부모의 봉양을 잘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자료[自聊]스스로를 생각하다. 자신을 돌보다.
♣ 자릉[子陵]동한(東漢) 때 사람 엄광(嚴光). 자릉은 그의 자임. 소년 시절 광무(光武)와 함께 자라며 공부했었는데, 그후 광무가 황제의 위에 오르자 변성명을 하고 숨어 지내다가 광무의 끈질긴 물색 끝에 발각되어 광무로부터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밭 갈고 고기 낚다가 일생을 마쳤음. 《後漢書 卷113》
♣ 자릉대[子陵臺]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은 광무제(光武帝)의 고인(故人)으로 벼슬 주는 것을 받지 않고 칠리탄(七里灘)에 돌아가 낚시질을 하였다. 지금도 그의 조대(釣臺)가 있다.
♣ 자린고비[玼자吝考妣]‘자린’은 ‘기름에 절인 종이’에서 ‘절인’의 소리만 취한 한자어이고 ‘고비(考비)’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부모님의 지방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즉 자린고비는 부모님 기제사 때마다 쓰는 지방(紙榜)을 매년 새 종이에 쓰는 것이 아까워 한 번 쓴 지방을 기름에 절여 두었다가 매년 같은 지방을 쓴 충주의 부자 이야기에서 유래.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써야 할 때 쓰지 않고 지내는 ‘구두쇠’와 같은 단작스러울 정도로 인색한 사람을 가리킴.
♣ 자림유[紫琳腴]선약(仙藥)의 이름인데,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가리키기도 한다.
♣ 자마구[紫摩軀]인도의 염부수(閻浮樹) 아래를 흐르는 강물 속에서 나는 자색(紫色)의 황금(黃金)으로 만든 불상(佛像).
♣ 자마불구[紫摩佛軀]자색(紫色)을 띤 자마금(紫摩金)으로 만든 불상(佛像). 자마금은 인도(印度)의 염부수(閻浮樹) 밑을 흐르는 강물 속에서 난다고 한다.
♣ 자막집중[子膜執中]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자매[自媒]자신이 직접 나서서 좋은 혼처(婚處)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 자맥[紫陌]자맥홍진(紫陌紅塵)의 준말. 도회지 주변의 도로로, 번잡한 속세를 말한다.
♣ 자면[刺面]얼굴에 입묵(入墨)하는 형벌.
♣ 자면[紫綿]자면은 해당화(海棠花)의 별칭인데, 소식(蘇軾)의 정혜원해당시(定惠院海棠詩)에 “날 다습고 바람 가벼워 봄 잠이 만족하네[日暖風輕春睡足]”하였다.
♣ 자명[紫冥]자명은 구중(九重)의 하늘을 뜻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부용성(芙蓉城)에, “왔다 갔다 삼세 동안 공연히 육신을 단련하며, 결국은 황정경 잘못 읽고 신선이 되고 말았어라. 하늘문 밤에 열리면 영혼을 통째 날리나니, 백일에 구름 수레 다시 탈 게 뭐 있으랴. 천 겁을 간다 한들 세상 인연 없어질까, 떨어져 내리는 비취 우의(羽衣) 처연히 남는 향기로다.[往來三世空鍊形 竟坐誤讀黃庭經 天門夜開飛爽靈 無復白日乘雲輧 俗緣千劫磨不盡 翠被冷落凄餘馨]”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6》
♣ 자명[煮茗]차를 끓여 내는 등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왕휴(王休)가 겨울에 얼어붙은 태백산(太白山)의 시냇물을 길어 와 건명차(建茗茶)를 끓여서 빈객을 대접하였던 고사가 있다. 《書言故事 天文類》
♣ 자명급회[自明及晦]아침부터 저녁까지.
♣ 자모교[慈母敎]맹자가 어려서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를 입어 자사(子思)의 문인으로 공자의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말한다. 맹자가 어렸을 때에 공동 묘지와 가까운 곳에 살았는데, 이것을 본 맹자는 묘 쓰는 장난을 하였다. 맹자의 어머니 장씨(仉氏)는 “이곳에서는 아들을 가르칠 수 없다.” 하고, 시장으로 이사하였더니, 맹자는 다시 장사치 놀이를 하였다. 장씨는 다시 자사(子思)의 학궁(學宮) 곁으로 이사하였더니, 맹자는 제기(祭器)를 벌여 놓고 읍양진퇴(揖讓進退)의 예를 하므로, 장씨는 “이곳이야말로 내 아들을 키울 만하다.” 하였다. 이것을 ‘맹모(孟母)의 삼천지교’라 한다. 뒤에 맹자는 자사에게서 배워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孟子 題辭, 烈女傳, 小學 稽古》
♣ 자모련[子牟戀]춘추 시대 위 공자 모(魏公子牟)가 첨자(瞻子)에게 이르기를 “몸은 강해(江海) 가에 있으나, 마음은 대궐 아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讓王》
♣ 자모일언[慈母一言]한왕(漢王)이 항우(項羽)를 공격할 때 왕능(王陵)이 한왕의 편이 되자, 항우가 왕능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왕능을 오게 하라고 협박하니, 왕능의 어머니가 왕능의 사자(使者)에게 “한왕은 위대한 분이니 두 마음 갖지 말고 섬기라 하더라고 전하라.” 하고 자살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四十 張陳王周傳》
♣ 자묵객경[子墨客卿]자묵 객경(子墨客卿)은 먹[墨]을 의인(擬人)화한 것인데, 양웅(楊雄)의 우렵부(羽獵賦)에서 나왔다.
♣ 자문자답[自問自答]제가 묻고 제가 대답함.
♣ 자문지[咨文紙]자문은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외교문서인데, 그때 쓰이던 종이이다.
♣ 자미[子美]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자이다.
♣ 자미[紫微]자미원은 별자리 이름인데 제왕의 궁전 또는 당대(唐代)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으로 쓰인다.
♣ 자미가경[蔗味佳境]진(晋)나라 고개지(顧愷之)가, “감자(甘蔗)를 먹을 때에 꼬리에서부터 먹기를 시작하면서 점점 아름다운 경지[佳境]로 들어간다.” 하였다. 감자는 사탕수수로, 여기서는 아름다운 취미를 말한다.
♣ 자미객[紫薇客]중서성(中書省)의 관원(官員)을 말하는데, 서성의 당대(唐代) 아칭(雅稱)이 자미성(紫薇省)이다. 성 안에 자미를 많이 심었었다 한다.
♣ 자미궁[紫微宮]삼원궁(三垣宮)의 하나로 천제(天帝)가 거처한다는, 북두성(北斗星) 북쪽에 있는 성좌(星座)를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천자의 대궐을 이른다.
♣ 자미랑[紫微郞]관명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말한다.
♣ 자미랑[紫微郞]이는 원래 당(唐) 나라 때의 벼슬로 임금의 제고(制誥) 등을 맡았으므로 고려의 지제고(知制誥)를 지칭한 것이다.
♣ 자미선관[子美善寬]두자미는 너그럽게 자위(自慰)했음.
♣ 자미성[紫薇省]당 나라 때에 중서성(中書省)이라 했으며, 성(省) 안에 자미화가 있었다. 천자의 정령(政令)을 돕는 비서관서(秘書官署)였다.
♣ 자미원[紫微垣]임금이 있는 곳을 말한다. 자궁원(紫宮垣)이라고도 한다.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북극(北極)의 다섯 별과 구진(句陳)의 여섯 별이 모두 자궁(紫宮) 속에 있다.” 했고, “자궁원 열 다섯 별 중에서 서번(西蕃)이 일곱이고 동번(東蕃)이 여덟인데, 북두(北斗)의 북쪽에 있으며 그 첫째가 자미이니 대제(大帝)의 자리로서, 천자(天子)가 거처하는 곳이다.” 하였다.
♣ 자미칠가[子美七歌]두보(杜甫)의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시(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七首詩)를 가리킨다. 《杜小陵集 卷八》
♣ 자미호[紫微壺]당 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를 두자미(杜紫微)라 하는데, 그의 시에 술병을 가지고 논다[携壺]는 말이 있다.
♣ 자미화[紫薇花]자미화는 곧 백일홍(百日紅)의 이칭이다. 당나라 때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이라 하고, 그 안에 자미화(紫微花) 두 그루가 백락천(白樂天)이 심은 것이라 한다.
♣ 자미화하객[紫微花下客]자미는 곧 임금이 있는 대궐을 이르는 말로, 즉 조정에 있는 벼슬아치들을 비유한 말이다.
♣ 자방[咨訪]시경(詩經)에 “두루 자방한다[周爰諮訪].”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사신(使臣)이 길에서 모든 것을 묻고 알아서 임금에게 보고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 자방[子房]자방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명신 장량(張良)의 자이다. 장량은 한고조를 도와 진 나라와 초 나라를 멸망시켰는데 그 공로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 뒤에 장량이 말하기를, “일개 서민이 극도로 부귀를 누렸으니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노닐겠다.” 하고 세상과 관계를 끊음으로써 한신(韓信)을 위시하여 당시 함께 공을 세운 수많은 공신들이 역적으로 몰려 끝내 사형을 당했던 경우와는 달리 공명을 보전하였다. 《史記 卷 55 留侯世家》
♣ 자방료채[子房了債]장량(張良)은 원래 전국 시대 한(韓) 나라의 벼슬하던 가문인데,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진시황(秦始皇)이 탄 수레를 공격한 일을 말한다.
♣ 자배[炙背]햇볕에 등을 쬐는 것으로 곧 임금을 생각하는 성의에 비유한 말이다. 춘추 시대 송(宋) 나라의 한 야인(野人)이 떨어진 옷으로 겨울을 지내다가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여 하루는 그의 등을 햇볕에 쪼이니 매우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 법을 우리 임금에게 아뢰면 큰 상을 받지 않겠는가.” 하였다. 《列子 楊朱》
♣ 자배미근[炙背美芹]자배와 미근은 미세(微細)한 정성이라는 뜻으로 열자(列子) 양주(楊朱) 편에, “송 나라 어느 가난한 농부가 봄날 등에 쬐이는 햇볕의 따스함을 임금에게 드려서 후한 상을 받으려 했다. 그를 들은 마을 사람은, ‘예전 어느 사람이 콩과 미나리가 맛이 좋다고 마을 호족[鄕豪]에게 바쳤다. 그것을 먹은 호족은 배가 아파서 못 배겼다더니, 그대도 이와 같구려.’ 하였다.”라는 고사에 보임.
♣ 자벌[慈筏]자항(慈航)과 같은 불가의 용어인데 이를테면 부처의 자비의 마음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고해(苦海)를 벗어나 피안에 오르게 하는 것이 배로써 중생을 건지는 것과 같다 는 뜻임.
♣ 자봉[紫鳳]남편을 가리킨 말이다. 왕창령(王昌齡)의 소부마택화촉시(蕭駙馬宅花燭詩)에 “푸른 난새가 합환궁으로 날아 들어가니 자색 봉황이 꽃을 머금고 금중을 나오누나[靑鸞飛入合歡宮 紫鳳銜花出禁中]”하였다.
♣ 자봉[赭峯]민둥산이란 뜻. 진 시황(秦始皇)이 형산(衡山)에 갈 때 배를 타고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는데, 큰 바람이 일어 건너지 못하게 되자, 진 시황이 “상군(湘君)은 뉘 귀신이냐?" 물으니 “요(堯)의 딸 순(舜)의 아내입니다.” 하므로, 크게 노하여 죄수 3천 명을 시켜 상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史記 秦始皇紀》
♣ 자봉[紫鳳]자봉은 바다에 산다고 하는 신조(神鳥)의 이름이다.
♣ 자봉[紫峯]최종주(崔宗周)의 호.
♣ 자부[紫府]신선이 사는 곳.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 장주(長洲)에 “장주(長洲)의 일명은 청구(靑邱)인데 이곳에 자부궁(紫府宮)이 있으니 천진선녀(天眞仙女)가 이곳에 노닌다.” 하였음.
♣ 자부[紫府]자부는 붉고 화려한 집으로 궁궐을 말함.
♣ 자비어[子非魚]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에서 고기[魚]의 노는 것을 구경하다가. “고기들이 즐겁겠구나.” 하니, 혜자는, “자네는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즐거운 줄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는, “자네는 내가 아니면서 어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할 줄을 아는가.” 하였다.
♣ 자비어아비자[子非魚我非子]장자(莊子)는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놀다가,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 조용히 놀고 있으니 이것이 저 고기의 즐거움이네.”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하므로, 장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리라고 보장하는가?" 하니, 혜자가 말하기를 “나는 자네가 아니기에 진실로 자네를 모르네. 그러나 자네도 본디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를 것이 분명하네.”라며 서로 논란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 자사[紫絲]순채나물의 모양을 가리킨 말이다.
♣ 자사[子思]자사는 공자(孔子)의 손자로 맹자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다. 중용(中庸)을 지었다 한다.
♣ 자사영[刺史榮]당(唐) 나라 때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된 한유(韓愈)처럼 곧은 말을 하다 수령으로 내려가게 된 것을 뜻한다.
♣ 자사자[子思子]자사자는 곧 자사를 높여 이른 말이다.
♣ 자산수[子山愁]전란을 만나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자산(子山)은 북주(北周)의 시인 유신(庾信)의 자(字)로, 후경(侯景)의 난을 당해 강릉(江陵)으로 도망쳐 피신하였으며, 높은 관직에 오른 뒤에도 늘 고향을 생각하며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어 노래하였다고 한다. 《北史 卷83》
♣ 자산중석[煮山中石]옛날 백석선생(白石先生)이라는 신선이 벽곡(辟穀)을 하기 위해 돌을 구워 먹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자산출천[刺山出泉]한서(漢書) 이광리전(李廣利傳)에 이광리가 선마(善馬)를 빼앗으러 군사를 동원하여 이사성(貳師城)으로 갈 때 물이 없어 군사들의 목이 타자 광리가 패도(佩刀)로 산을 치니 물줄기가 솟아났다고 하였다.
♣ 자삼청철[紫蔘靑鐵]모두 지방의 특산물을 뜻하는데, 황정견(黃庭堅)의 송고자돈부하남시(送顧子敦赴河南詩)에 “자삼은 캘 만하니 진공하는데 옳거니와 청철은 많지 않으니 돈을 주조하지 말게나[紫蔘可掘宣包貢 靑鐵無多莫鑄錢]”한 데서 온 말이다.
♣ 자상[子桑]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우언(寓言)에 나오는 한사(寒士) 자상호(子桑戶)를 가리키는데, 그는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과 셋이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10일 동안 내리는 장맛비 속에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데 친구인 자여(子輿)가 ‘아무래도 자상이 고달프게 지내겠구나.’ 하고 밥을 싸들고는 자상을 먹여 주려고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자상과병[自象戈兵]이괘의 괘상(卦象)을 말한 것.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 “이(離)는 불이요, 태양이며, 번개요, 중녀(中女)요, 갑주(甲冑)요, 과병(戈兵)이라.” 하였음.
♣ 자상빈[子桑貧]자상(子桑)은 장자(莊子)가 꾸며낸 인물로, 10일 동안의 장맛비에 갇혀 자신의 가난한 운명을 한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莊子 大宗師》
♣ 자상유가시[子桑有歌詩]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자상(子桑)이 자신의 빈궁한 처지를 슬퍼하며 그 원인을 아무리 따져 보아도 알 수가 없어 결국은 명(命)이라고 결론을 짓는 내용이다.
♣ 자새[紫塞]북방 변경의 요새지를 뜻한다. 진(秦) 나라가 쌓은 국경의 장성(長城) 흙빛이 붉으므로 자새(紫塞)라 한다. 또는 북방 국경인 안문(雁門)에는 풀빛이 붉으므로 자새(紫塞)라고도 한다.
♣ 자색[紫色]바르지 못한 사설(邪說)을 말한다. 공자는 사이비(似而非)를 미워하여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혼란시킬까 해서이고,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덕(德)을 어지럽힐까 해서이다.” 하였다.《孟子 盡心下》 자주색은 중간 색깔이며 빨강색은 바른 색깔인데, 자주색은 빨강색과 사이비하여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양주ㆍ묵적의 사설이 공맹(孔孟)의 정도(正道)를 어지럽힘을 비유한 말이다.
♣ 자서[字書]옥편(玉篇) 따위를 이름인데 이 말은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보임. 자체(字軆)의 구성을 해석하고 성음(聲音)과 훈고(訓詁)를 자세히 풀이한 책.
♣ 자서[子胥]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오자서(伍子胥)로, 이름은 원(員)이다. 부친인 사(奢)와 형인 상(尙)이 초 나라 평왕(平王)에게 피살되자 오(吳) 나라로 도망쳐 그 군대를 이끌고 초 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
♣ 자서검결[子胥劍決]전국 시대 오(吳) 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가 참신(讒臣)태재(太宰) 백비(伯嚭)의 참소를 입어 오왕 부차(吳王夫差)로부터 촉루검(屬鏤劍)으로 자결하기를 강요받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六》
♣ 자서결목[子胥抉目]춘추 시대오(吳) 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가 오왕에게 월(越) 나라를 급히 쳐야 한다고 자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끝내는 태재 비(太宰嚭)의 참소에 의해 오왕으로부터 자결의 명이 내려지자, 오자서가 자기 가인(家人)에게 유언하기를 “내 눈을 파내어 오 나라동문(東門) 밖에 걸어놓아서, 월 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六 伍子胥傳》
♣ 자서결안[子胥抉眼]춘추 시대 오(吳) 나라 충신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부차(夫差)에게 월(越) 나라를 쳐야 한다고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도리어 참소하는 신하의 말을 믿고 오자서를 의심하여 그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자, 오자서가 자기 가인에게 유언하기를 “내 눈을 긁어내어 오나라 동문(東門) 위에 걸어놓아서,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하고 자결하였는데, 뒤에 과연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던 고사이다. 《史記 卷六十六》
♣ 자서해검오강주[子胥解劍吳江舟]자서(子胥)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오원(伍員)의 자. 초 평왕(楚平王)이 오원의 아버지 오사(伍奢), 형 오상(伍尙)을 죽였는데, 오원은 후일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로 망명의 길을 가면서 소관(昭關)에 이르렀을 때, 이때 오원에게는 많은 현상금이 걸려 있었으므로 소관에서 오원을 잡으려 하였다. 오원은 재빠르게 도망을 쳤지만 앞에는 큰 강이 있고 추병은 뒤를 쫓고 있었다. 오원이 발을 구르는 순간 어부가 갑자기 나타나 오원을 건네주었는데, 기적으로 강을 건너게 된 오원은 자신이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 어부에게 사례로 주었으나 어부는 그 칼을 받지 않았다. 《史記 卷66》
♣ 자석[煮石]선인(仙人) 백석선생(白石先生)이 벽곡(辟穀)을 하면서 항상 흰 돌을 구워 양식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 자선[子善]이기조(李基祚)의 자(字).
♣ 자설[刺舌]하약돈(賀若敦)이 송곳으로 그의 아들 필(弼)의 혀를 찔러 말을 삼가라고 징계한 고사. 《北史 賀若弼傳》
♣ 자성[子聲]바둑판에 바둑돌을 놓는 소리.
♣ 자성[子成]본 성에 부속되어 있는 작은 성. ‘옹성(瓮城)’ 혹은 ‘월성(月城)’이라고 한다
♣ 자성혜[自成蹊]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꽃과 열매가 다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바람에 그 밑에 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으로, 원래는 덕행 있는 사람이 무언 중에 남을 심복시키는 데에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도리를 미인에 비유한 것이다.
♣ 자소[紫綃]붉은 명주로 된 머리띠를 말함. 머리카락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머리를 동여매는 것.
♣ 자송[自訟]공자가,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도 마음속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公冶長》
♣ 자수금장[紫綬金章]자수는 자색 인끈, 금장은 금인(金印)으로 모두 고관들이 차는 것들이다.
♣ 자수삭발[自手削髮]제 손으로 머리를 깎음. 하기 어려운 일을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제 힘으로 처리한다는 뜻이다.
♣ 자수성가[自手成家]자신의 손으로 집안을 이룸. 물려받은 재산 없이 제 힘으로 재산을 모아 한 살림을 이룩함
♣ 자수추망[刺水抽芒]바늘이 물을 찌르는 것처럼 싹이 물 위로 솟아 나온 것을 표현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이랑 나눈 푸른 물결 구름 진처럼 치달리고, 솟아 나온 벼 싹들 녹색 침이 물 찌르듯.[分疇翠浪走雲陣 刺水綠鍼推稻芽]”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1 無錫道中賦水車》
♣ 자승자박[自繩自縛]자기가 꼰 새끼줄로 스스로를 묶음.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자기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 또는 번뇌로 자기 자신을 괴롭힘을 비유
♣ 자시[自是]이 절로. 이것이 바로.
♣ 자시[子時]이민구(李敏求)의 자(字)이다.
♣ 자시[自市]자신을 비싼 값에 팔려고 안달하는 것을 말한다.
♣ 자신[紫宸]조정 백관과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정전(正殿)의 이름이다.
♣ 자신[雌辰]퇴장(退藏)의 때를 이름. 노자(老子)에 “知其雄 守其雌"가 있음.
♣ 자신지[子愼之]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부자(夫子)가 조심하는 것은 재계(齋戒)ㆍ정전(征戰)ㆍ질병(疾病)이었다.” 하였다.
♣ 자실[子實]조문수(曺文秀)의 자(字)이다.
♣ 자씨[慈氏]보살을 말함.
♣ 자씨[子氏]은(殷) 나라 성씨이다.
♣ 자아성찰[自我省察]자기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핌.
♣ 자악묘석[子惡苗碩]제 자식 악함을 알지 못하고 자기 곡식 자람을 알지 못한다. 이 대문은 대학(大學) 전(傳) 8장에, “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이라 보임.
♣ 자안[子安]고려 말기의 문장가로 호가 도은(陶隱)인 이숭인(李崇仁)의 자이다.
♣ 자안[字眼]시문(詩文) 가운데서 안목이 되는 가장 주요한 문자. 창랑시화(滄浪詩話)에 “시를 짓는 데 있어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기결(起結)ㆍ구법(句法)ㆍ자안이다.” 하였다.
♣ 자안[子安]자안은 초당(初唐) 시대 문장가인 왕발(王勃)의 자인데,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던 부친 왕복치(王福畤)를 뵈러 가던 도중 홍주(洪州)의 등왕각(滕王閣) 중수 기념 잔치에 들렀다가, 명작(名作)으로 알려진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일필휘지로 써 내어 문명(文名)을 천하여 날리었다.
♣ 자암[紫巖]남송(南宋) 초기 금(金) 나라에 항거한 대표적 인물인 장준(張浚)의 별호(別號)이다. 그가 역전(易傳)을 지으면서 그 호를 지어 사용하였는데, 그 뒤로 세상에서 그를 존경하여 자암선생(紫巖先生)으로 일컬었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5년에 양회(兩淮) 제로(諸路)의 군마(軍馬)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북벌(北伐)을 행한 기록이 있다. 《宋史 卷361 張浚傳》
♣ 자앙[子昂後韓柳]자앙(子昂)은 당(唐) 나라 때 문장가인 진자앙(陳子昂)을 말하는데 일대 문호(文豪)로 유명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자야[子夜]악부 이름이자 이를 만든 진(晉) 나라 여자의 이름.
♣ 자야[子野]춘추 시대 진(晉) 나라 악사(樂師)였던 사광(師曠)의 자. 그는 귀가 대단히 밝아 음률(音律)에 밝게 통했다 한다.
♣ 자야가[子夜歌]진(晉) 시대 악곡 이름. 당서(唐書) 악지(樂志)에 “진 나라 여자 자야(子夜)가 이 곡을 지었는데 소리가 매우 애절하였다.” 하였음.
♣ 자약야[自若也]‘스스로 같습니다’ 예전의 자기와 같다. 전과 같다.
♣ 자양[紫陽]송(宋) 나라의 거유(巨儒)인 주자(朱子)를 말한다.
♣ 자양벽파[紫陽劈破]자양은 주희(朱熹)의 호인데, 벽파했다는 것은 곧 주희가 시경의 옛 훈고전들을 모두 합하여 취사선택을 가해서 집전(集傳)을 만들어 놓은 것을 가리킨 말이다.
♣ 자양옹[紫陽翁]자양옹은 호가 자양인 주자(朱子)를 높여 이른 말인데, 주자는 일찍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부르고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웠다.
♣ 자업자득[自業自得]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결과)를 자기 자신이 받음.
♣ 자여[子輿]열흘이나 장맛비가 내리자 친구인 자상(子桑)을 걱정하여 자여(子輿)가 밥을 싸 들고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大宗師》
♣ 자여도[自如道]창원(昌原)의 속역(屬驛)이다.
♣ 자여예리[子輿曳履]자여는 증자(曾子)의 자(字). 장자(莊子)가 “증자가 가난하여 신발을 끌고 다니며 상송(商頌)을 노래하니……[曳縱而歌商頌……]"라고 하였다. 《莊子 讓王》
♣ 자연[子淵]공자(孔子)의 문인 안회(顔回)의 자(字).
♣ 자연[子淵]자연은 한 선제(漢宣帝) 때의 문장가인 왕포(王褒)의 자인데, 일찍이 중화송(中和頌),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 등 다수의 글을 지었다.
♣ 자연도태[自然淘汰]자연적으로 환경에 맞는 것은 살아남게 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없어짐.
♣ 자염장[紫髥將]오왕(吳王) 손권(孫權)이 붉음 수염[紫髥]이었다.
♣ 자영[紫纓]봉(鳳)의 종류인 완추(鵷雛)는 푸른 목털이며, 붉은 갓끈이 달렸다[翠鬣紫纓] 한다.
♣ 자예[自艾]수신(修身)을 잘한다는 뜻.
♣ 자예[雌예]암무지개. 엷은 무지개.
♣ 자예음[雌蜺飮]무지개가 두 가지 색깔로 선명한 것을 수무지개[虹]라 하며, 선명하지 못한 것을 암무지개[蜺]라 한다.《爾雅 釋天 註》 전설에 ‘무지개가 시내에 들어가서 물을 마신다’ 한다. 《事文類聚 前集 卷四 天道部 虹蜺》
♣ 자오[慈烏]까마귀는 새끼가 어미에게 반포(反哺)한다 하여 효조(孝鳥)라 칭한다.
♣ 자오반포[慈烏反哺]자식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여 봉양하는 일. 까마귀는 새끼가 자라서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하여 까마귀를 자오(慈烏)라 한다.
♣ 자옥가[紫玉珂]자옥으로 장식한 말의 굴레를 말한다.
♣ 자옥산인[紫玉山人]조선조의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지칭한 말이다.
♣ 자옥생[紫玉笙]자주빛 옥으로 만든 피리. 좋은 피리를 뜻함.
♣ 자옹[子雍]자옹(子雍)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경학자인 왕숙(王肅)의 자인데, 당시에 경학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 자용[子容]정홍명(鄭弘溟)의 자(字)이다.
♣ 자용전[紫茸氈]가늘고 부드러운 짐승의 털로 만든 침석(寢席)이라는 뜻이다.
♣ 자운[紫雲]자운은 당(唐)의 사도(司徒) 이원(李愿)의 집에 있던 명기(名妓). 두목(杜牧)은 어사(御史)가 되어 낙양 분사(洛陽分司)로 있었는데, 이원의 연회석에 명사(名士)로 초대되어 “자운이란 명기가 있단 말 들었는데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이원이 가르쳐주자, 그는 한참 동안 응시하고는 “과연 아름다우니 나에게 빌려달라.” 하였다. 《唐詩 紀事 杜牧》
♣ 자운[子雲]자운은 한(漢) 나라 때의 문장가 양웅(揚雄)의 자인데, 양웅은 자식이 없어 그가 죽었을 적에 제자인 후파(侯芭)가 장사를 치르고 삼년상(三年喪)을 치렀다. 태현(太玄)ㆍ법언(法言)ㆍ방언(方言) 등의 저서(著書)가 있다. 《漢書 卷八十七 揚雄傳》
♣ 자운식자종하보[子雲識字終何補]한(漢)나라 양자운(揚子雲)이 학문이 깊고 기이한 글자[奇字]를 잘 알았는데도 벼슬은 궁정(宮庭)에서 창을 잡는[執戟] 낭관(郞官)에 지나지 못하였다.
♣ 자운적막[子雲寂寞]한(漢) 나라 양자운(揚子雲; 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며 숨어살면서, “적막(寂寞)으로 덕을 지킨다.”고 자칭하더니, 뒤에 역적(逆賊) 왕망(王莽)에게 벼슬하다가 죄에 걸려 체포를 당하게 되자 높은 누각에서 몸을 던져 떨어졌다. 사람들이, “적막(寂寞)은 투각(投閣)이로다.” 하였다.
♣ 자운정[子雲亭]한(漢) 나라 때 서촉에 있었던 양웅(揚雄)의 독서(讀書)하던 곳을 이름.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남양 제갈공명의 초려요, 서촉 양자운의 정자로다.[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하였다.
♣ 자운조[子雲嘲]자운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자. 한 손[客]이 양웅더러 너무 청백만을 고수하다가는 녹위(祿位)를 얻을 수 없다고 조롱하므로 양웅이 글을 지어 이를 해명하였다.
♣ 자웅[雌雄]雄劍과 雌劍. ‘鴛鴦劍’이라고도 함.
♣ 자웅검[雌雄劍]춘추 시대 오(吳) 나라 사람 간장(干將)이 암수의 명검 두 자루를 만든 뒤, 웅검(雄劍)은 간장이라 하고 자검(雌劍)은 자신의 아내 이름을 붙여 막야(莫邪)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 자웅리[雌雄離]짝들이란 옛적의 명검(名劍)으로 전해져 오는 양(陽)의 검 간장(干將)과 음(陰)의 검 막야(莫邪)를 말하는데, 도장(刀匠)이 3년만에 칼을 완성한 뒤 막야만 왕에게 바치고 간장은 남산(南山)에 파묻었다고 한다. 《搜神記 卷11》
♣ 자웅미변[雌雄未辨]시경(詩經)에, “까마귀의 암컷 수컷을 뉘 알랴.” 한 구절이 있다.
♣ 자원[紫垣]자원은 자미원(紫微垣)의 약칭으로 천자(天子)가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 자원앙[紫鴛鴦]자원앙은 일종의 새 이름. 이백(李白)의 시에, “칠십의 자원앙이, 쌍쌍이서 그윽한 정자 좋아하네[七十紫鴛鴦 雙雙戲亭幽]”라고 하였는데, 한 번 지기(知己)가 되면 변하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 자원용무휼[子元用武譎]자원(子元)은 한(漢) 나라 주박(朱博)의 자(字)이다. 본래 무관 출신으로 자사(刺史)가 되어 관내를 순시할 때, 이민(吏民) 수백 인이 가득 몰려와 사정을 호소하였는데, 종사(從事)가 주박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일을 처리해 주고 떠날 것을 청하자, 주박이 현령과 속리(屬吏) 등 해당되는 관원을 찾아가 처리토록 지시하여 모두 해산시킨 뒤, 간교한 꾀를 부린 종사를 주살(誅殺)함으로써 위엄있게 지방을 다스렸던 고사이다. 《漢書 卷83》
♣ 자위[慈闈]살아 계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컬음.
♣ 자위[紫闈]임금의 궁전(宮殿).
♣ 자위[紫緯]임금의 궁전을 말함.
♣ 자위소[慈闈笑]한(漢) 나라 때 준불의(雋不疑)가 경조윤(京兆尹)이 되어 매양 죄수들의 정상을 살피고 돌아오면 그때마다 그의 모친이 불의에게 “평번(平反)을 하여 몇 사람이나 살렸느냐?”고 묻는데, 불의가 평번을 많이 시행했다고 대답하면 그의 모친이 기뻐하여 웃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七十一》
♣ 자유[子游]노(魯) 나라 때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가(絃歌)하였다고 한다. 《論語 陽貨》
♣ 자유[子猷]자유는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의 자(字)이다. 그가 회계(會稽)에 있을 때 밤에 눈이 내리자 친구인 대규(戴逵) 생각이 나서 섬계(剡溪)까지 배를 타고 갔다가 문 앞에서 그냥 돌아왔는데 그 이유를 묻자 “흥이 일어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乘興而行 興盡而返]”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 자유[子游]자유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이고,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에게서 학문을 배운 뒤에 노 나라 무성 읍재(武城邑宰)가 되어 그 지방을 예악(禮樂)으로 다스렸고, 유약(有若)의 장례 때 상례를 맡았다. 《史記 卷六十七 仲尼弟子列傳》
♣ 자유섬계[子猷剡溪]자유는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의 자(字)로 산음(山陰)에 살고 있었다. 섬계는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조아강(曹娥江)의 상류인데, 이곳에 대규(戴逵)가 살고 있었으므로 대계(戴溪)라 하기도 한다. 한번은 왕휘지가 눈오는 밤에 친구 대규를 찾아 섬계에 배를 띄우고 갔다가 문 앞에 이르러 되돌아왔다. 사람이 이유를 묻자, 그는 “흥이 있어 왔다가 흥이 다하므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晉書 王徽之傳》
♣ 자유유섬계[子猷遊剡溪]자유는 왕휘지(王徽之)의 자(字)이다. 왕휘지가 설야(雪夜)에 섬계로 대규(戴逵)를 찾아간 것을 말한다.
♣ 자유홀[子猷笏]자유는 동진(東晉) 때 왕휘지(王徽之)의 자. 왕휘지는 성품이 매우 뇌락하여 얽매임이 없었는데, 그가 일찍이 환충(桓冲)의 기병참군(騎兵參軍)이 되었을 때 환충이 휘지에게 “경(卿)이 나의 막부(幕府)에 있은 지 오래니, 우리 서로 잘해보자.” 하였으나, 휘지가 처음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환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홀(笏)로 턱을 괴고서 말하기를 “서산(西山)에 아침이 오니 시원한 기운이 드는군.” 한 데서 온 말로,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이 세속을 초탈하는 것을 뜻한다.
♣ 자은사[慈恩寺]자은사는 중국 섬서(陝西)장안(長安)의 동남쪽에 있던 당 나라 때의 절인이다.
♣ 자은제탑[慈恩題塔]자은사는 중국 섬서(陝西)장안(長安)의 동남쪽에 있던 당 나라 때의 절인데, 그 곁에 안탑(雁塔)을 세워 인도에서 들여온 불경과 불상을 그곳에 수장하였다. 당 중종(唐中宗) 말기부터 진사에 급제한 사람에 대해 황제가 곡강(曲江)가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안탑에 그 이름을 썼다고 한다.
♣ 자의[紫衣]자줏빛 의복. 제왕이 입는 옷으로 임금을 가리킨다.
♣ 자의소대[紫衣小隊]천자(天子) 좌우에서 천자를 모시고 있는 시자(侍者).
♣ 자임[自任]자임은 천하로써 자기의 책임으로 삼는 것으로,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伯夷)는 성인 가운데 청(淸)한 자이고, 이윤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자이며,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和)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인 자이다.” 하였다.
♣ 자자[孶孶]부지런히 힘써 일하는 모양
♣ 자자[姊姊]유모, 생모, 적모, 손윗누이를 이름
♣ 자자[子子]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함
♣ 자자[咨咨]탄식하는 모양
♣ 자자어비자[刺刺語婢子]계집종에게 당부한다는 것은 곧 집을 떠나는 사람이 집안일을 못 잊어서 계집종에게까지 여러 말을 당부하는 것을 이른 말로, 한유(韓愈)가 회골국(回鶻國)에 사신으로 가는 은유(殷侑)를 보내는 서(序)에 “지금 사람들은 수백 리 밖에만 나가도 정녕스럽게 계집종을 돌아보고 끝없이 많은 말을 당부하는데, 지금 그대는 만리 타국에 사신을 가면서도 말과 표정에 아무런 기미도 나타내지 않으니, 어찌 대장부의 경중(輕重)을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二十一》
♣ 자작지얼[自作之孼]자기가 저지른 일로 인해 생기게 된 재앙. 자승자박(自繩自縛).
♣ 자장[子長]사기(史記)의 저자인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자임. 사마천은 일찍이 20세부터 중국 천하를 두루 유람하여 식견을 넓히었다. 《史記 卷一百三十》
♣ 자장[柘漿]자(柘)는 감자(甘蔗)의 뜻으로, 자장은 감자의 즙(汁)을 가리킨다.
♣ 자장[子將]후한 때 인물(人物) 평론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허소(許劭)의 자이다.
♣ 자장격지[自將擊之]남을 시키지 않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움.
♣ 자장원유[子長遠遊]자장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
♣ 자장유[子長遊]견문을 넓히기 위해 멀리 유람하는 것을 말한다. 자장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字)이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齊)와 노(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 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 자장포궤[子張鋪几]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에 “사(師)야, 너는 꼭 궤연(几筵)을 준비하고 나서 수작(酬酌)해야만 예(禮)가 된다고 여기느냐.” 한 말을 빗대어 인용한 것. 사는 자장(子張)의 이름.
♣ 자전광[武庫紫電光]붉은 번갯빛이란 바로 곧은 절조를 비유한 것으로, 당(唐) 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자줏빛 번개와 맑은 서릿발 같은 절조는 왕 장군의 무고로다.[紫電淸霜王將軍之武庫]” 한 데서 온 말이다.
♣ 자전무고[紫電武庫]당(唐) 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솟아오르는 교룡 같고 날아오르는 봉황과 같나니 그 글은 맹 학사(孟學士)와 같은 문장의 대가에 비길 만하고, 자줏빛 번개 같고 차가운 서릿발과 같나니 그 절조는 장군 왕승변(王僧辯)의 삼엄한 무기고에 비길 만하다.[騰蛟起鳳 孟學士之訶宗 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라는 말이 나온다.
♣ 자정[紫淸]천상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 자주즙용[資舟楫用]서경(書經) 상서(商書) 열명상(說命上)에 “큰 물을 건너게 되면 너를 큰 배로 쓰겠고 큰 가뭄이 들면 너를 써서 장마비를 내리게 하리라.”는 대목에서 인용된 것으로, 천자를 보좌하는 대신에 비유하여 쓰는 말이다.
♣ 자주지보[子州支父]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요 임금이 자주지보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니, 자주지보가 ‘나를 천자(天子)로 삼으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마침 우울병이 있어서 지금 막 그것을 치료하려 합니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없습니다.’ 하고 사양했다.” 하였다.
♣ 자죽[慈竹]대나무 이름으로, 의죽(義竹)ㆍ자효죽(慈孝竹)ㆍ자모죽(子母竹)이라고도 한다. 사계절 죽순이 나오고 새대와 묵은대가 빽빽하게 어우러져 노소(老少)가 서로 의지한 것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자중지란[自中之亂]자기 안에서의 어지러움. 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 제 편끼리 하는 다툼
♣ 자지[紫芝]사호(四皓)가 상산(商山)에 숨어 있을 때에, “빛나는 붉은 지초는 가히 요기할 만하도다[燁燁紫芝 可以療飢].”라는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 자지[紫芝]자지는 탁행(卓行)으로 뛰어난 당 나라 사람 원덕수(元德秀)의 자이다.
♣ 자지[刺紙]지금의 명함(名啣)과 같음.
♣ 자지가[紫芝歌]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진(秦)의 난을 피하여 남전산(藍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한 고조(漢高祖)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고 이 자지가(紫芝歌)를 불렀다고 한다. ‘채지조(採芝操)’라고도 한다. 그 가사에 “막막한 상락(商洛) 땅에 깊은 골짜기 완만하니, 밝고 환한 자지(紫芝)로 주림을 달랠 만하도다. 황제(黃帝)와 신농씨(神農氏)의 시대 아득하니, 내 장차 어디로 돌아갈거나. 사마(駟馬)가 끄는 높은 수레는 그 근심 매우 크나니, 부귀를 누리며 남을 두려워하느니 차라리 빈천하더라도 세상을 깔보며 살리라.” 하였다.
♣ 자지곡[紫芝曲]옛날 노래의 이름이다. 진(秦) 나라 말엽에 상산사호(商山四皓)인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이 세상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물러나 은거(隱居)하다가, 한 고조가 초빙하자 사호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빛나고 빛난 영지여, 주림을 면할 수 있네. 당우 세상 가버렸으니, 나는 어디로 간단말가.[曄曄靈芝 可以療飢 唐虞往矣 吾當安歸]"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 자지미[紫芝眉]미목이 청수하고 아름다움. 방관(房琯)이 원덕수(元德秀)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이르기를, “저 보랏빛 영지같이 청수한 미목(眉目)을 대하면 그때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에 관한 마음이 싹 가시게 만든다네.” 하였다고 함. 《唐書 元德秀傳》
♣ 자지엽엽[紫芝曄曄]하 황공(夏黃公) 등 네 사람이 진(秦)나라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숨어살면서 노래를 짓기를, “빛나는 붉은 지초(芝草)는 요기할 만하도다[燁燁紫芝可以療飢].” 하였는데, 그들을 곧 상산사호(商山四晧)라 부른다.
♣ 자지전[柘枝顚]자지무(柘枝舞)라는 춤을 말하는데, 송(宋)의 구준(寇準)이 이 춤을 무척 좋아했으므로 회객(會客)들도 으레 이 춤을 추되, 하루가 다 지나야 그치곤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 자지전이라 일컬었다. 《夢溪筆談 卷五》
♣ 자진[子晉]왕자교(王子喬). 주 영왕(周靈王) 태자 진(晋)이 신선의 도를 닦아서 후산(緱山)에 피리[笙]를 불며 학을 타고 갔다 한다.
♣ 자진[子眞]자진(子眞)은 한 나라 매복(梅福)의 자. 왕망(王莽)이 정권을 제멋대로 하자, 하루 아침에 처자도 가정도 버리고 구강(九江)으로 떠나 오시문졸(吳市門卒)이라고 변성명을 하고 지내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함. 《漢書 卷六十七》
♣ 자진곡[子眞谷]정자진(鄭子眞)의 곡구(谷口). 자진은 정박(鄭朴)의 자이고, 곡구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명이다. 정자진이 곡구에 살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암석 아래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았는데, 이름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法言 問神》
♣ 자진곡구[子眞谷口]정자진은 한(漢) 나라 때의 은사로서 평생을 곡구에서 농사를 손수 지으며 은거하였다. 《漢書 卷七十二》
♣ 자진귀[子晉歸]자진(子晉)은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데 그는 생(笙)을 잘 불어 봉명곡(鳳鳴曲)을 지었다. 그 후 신선을 따라 숭고산(嵩高山)으로 들어가 소식이 없었다. 30년 후 환량(桓良)이란 사람이 만났더니 “우리 집에 가서 ‘7월 7일 후씨산(緱氏山) 꼭대기에서 내가 기다리겠다’고 전하라.” 하였다. 그날이 되자 과연 학(鶴)을 타고 나타났다 한다. 《列仙傳》
♣ 자진농옥겸소사[子晉弄玉兼簫史]모두 신선이 되어 날아간 사람인데, 자진은 생황을 잘 불었고, 농옥과 소사는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 자천[慈天]불교에서 말하는 제천(諸天)의 하나이다.
♣ 자천소오인[自薦笑吾人]전국 시대 때 진(秦) 나라가 조(趙) 나라를 침입하자, 조 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초(楚) 나라와 합종(合縱)을 맺기 위해 가면서 식객(食客)들 가운데 재주가 뛰어난 자 20명을 뽑아 데리고 가려 했는데, 19명을 뽑고 한 명은 뽑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모수(毛遂)가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니, 평원군이 “현사(賢士)가 이 세상에 처하는 것은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끝이 드러나지 않으면 남들이 재주를 알 수가 없다.” 하자, 모수가 “저로 하여금 일찌감치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왔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평원군이 모수를 뽑아서 데리고 가자 나머지 19명이 모두 모수를 비웃었다. 평원군이 초왕을 만나서 합종의 이해(利害)에 대해 말하였으나 한나절이 다 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모수가 칼을 빼들고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눈을 부릅뜬 채 초왕에게 칼을 겨누어서 합종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니, 평원군이 “조 나라를 구정(九鼎)이나 대려(大呂)보다도 중하게 만들었다.” 하였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 자철[磁鐵]자석과 쇠 두 가지를 말함이다.
♣ 자첨[子瞻]자첨은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소식(蘇軾)의 자. 소식은 일찍이 예부랑(禮部郞)을 지냈었다.
♣ 자첨반룡구[子瞻蟠龍句]소식(蘇軾)이 반룡사(蟠龍寺)에 가서 자면서 읊은 고금체(古今體)시. ‘이십칠일 양평(陽平)을 출발, 사곡(斜谷)에 이르러 남산(南山)반룡사에서 자다.’ 하는 시제(詩題)인데 20구(句)로 되어 있음. 《蘇東坡詩集 卷四》
♣ 자청[紫淸]신선이 사는 천상 세계를 말한다.
♣ 자초지종[自初至終]처음부터 끝까지의 동안이나 일.
♣ 자추[咨諏]두루 묻고 의논해야 하는 사신의 일을 말한다. 사신을 전송하는 노래인 시경(詩經)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달리고 또 달리며 두루 묻고 의논하네.[載馳載驅 周爰咨諏]”라는 말이 있다.
♣ 자추사[子推事]자추는 춘추(春秋) 때 진(晉) 나라 개자추(介子推)를 말한다. 그는 일찍이 진 문공(晉文公)에게 허벅지살을 베어 봉양할 정도로 충성을 다했었다. 그 뒤 문 공이 위(位)에 오른 다음 문공을 수행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녹(祿)을 받았으나 그에게는 녹상(祿賞)이 없었으므로 면산(綿山)에 숨어버렸다. 문공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산에 불을 놓아 그를 오게 했으나 끝내 타죽고 말았다. 후에 그가 죽은 날을 한식일(寒食日)이라 하여 불을 지피지 않고 그의 덕을 추모하였다. 《左傳 喜公二十四年》
♣ 자춘지우[子春之憂]증자(曾子)의 제자 악정자춘(樂正子春)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다쳤는데, 상처가 다 나은 뒤에도 불효했다는 근심 속에서 몇 달 동안이나 바깥 출입을 삼갔던 고사가 있다. 《大戴禮 曾子大孝》
♣ 자취[紫翠]자줏빛과 푸른빛. 전(轉)하여 산의 경치를 형용한 말이다.
♣ 자치삼알[雌雉三戛]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가 징검다리 위의 산꿩을 보고는 제때를 얻어서 흥겹게 놀고 있다고 탄식을 하자, 자로가 잡으려 하니 세 번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戛而作]”는 구절이 있다.
♣ 자친[慈親]살아 계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컬음.
♣ 자타갱[紫駝羹]밤색 털을 지닌 낙타의 고기로 끊인 국. 이 고기가 대단히 맛이 좋다고 한다.
♣ 자타봉[紫駝峯]낙타의 등살. 진미라 한다.
♣ 자패궁[紫貝宮]초사(楚辭) 구가(九歌) 하백(河伯)에 “물고기 비늘 집 용의 저택이요, 붉은 조개 누각 붉은 궁궐이로다.[魚鱗屋兮龍堂 紫貝闕兮朱宮]”라는 표현이 있다.
♣ 자패궐[紫貝闕]자색 조개로 꾸민 문.
♣ 자평[子平]옛날 성명학(星命學)에 정통했다는 서자평(徐子平).
♣ 자포자기[自暴自棄]스스로에게 난폭하게 하고(스스로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버림.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포기하고 돌보지 않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고 자신이나 일을 되는 대로 방치하는 태도
♣ 자포자기[自暴自棄]절망 상태에 빠져서,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여 돌아보지 아니함. 맹자는, “예의(禮義)가 아닌 말만을 하는 것을 자포(自暴)라 하고, 내 몸이 인의(仁義)를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자기(自棄)라 한다.” 하였다.
♣ 자포파[紫袍把]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현종(玄宗)이 침향정(沈香亭)에서 양귀비(楊貴妃)와 모란꽃을 완상하다가 이백(李白)을 불러들여 새 악장(樂章)을 짓게 하면서, 짐승 무늬의 비단 도포[錦袍]를 상으로 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악장이 완성되자 현종은 장난삼아 그 비단 도포를 주지 않으므로 이백이 이를 빼앗으려고 하니, 현종이 웃으면서 그대로 주었다는 고사(故事)가 있다.
♣ 자피[子皮]자피는 치이자피(鴟夷子皮)를 말하는데 춘추(春秋) 시대 범려(范蠡)를 이름. 범려가 월왕(越王)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를 멸한 후 서시(西施)를 데리고 오호(五湖)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변성명을 하고 치이자피로 자호하면서 세상에 숨었음. 《史記 越世家》
♣ 자하[紫霞]선경(仙境)에 떠돈다는 자줏빗의 운기(雲氣)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신선을 뜻한다.
♣ 자하[子夏]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공문 십철의 한 사람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됨. 공문 중에서 후세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제자로, 공자가 산정(刪定)한 시경(詩經), 역경(易經), 춘추(春秋)를 전했다고 함.
♣ 자하[紫霞]지치빛 운하(雲霞). 발그레한 빛깔의 술을 말한다.
♣ 자하거[紫河車]도가(道家)에서 장생약(長生藥)으로 꼽는 선액(仙液)이다.
♣ 자하거[紫霞車]신선이 타는 수레.
♣ 자하곡[紫霞曲]고려 때에 채홍철(蔡洪哲)이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중화당(中和堂)을 짓고 늙은 친구들을 모아 놀면서 자하곡(紫霞曲)을 불렀다. 집이 자하동(紫霞洞)에 있기 때문이다.
♣ 자하낭[紫荷囊]육조(六朝) 시대에 상서(尙書)의 어깨 위에 부착한 자주색 주머니를 말하는데, 이는 곧 붓을 꽂아 놓고 항상 임금의 고문(顧問)에 대비했던 것이라 한다.
♣ 자하동[紫霞洞]중국의 장산(長山) 양모동(楊謨洞)에 있는 골짜기로 신선이 살고 있다 한다.
♣ 자하배[紫霞盃]옛날 항만도(項曼都)라는 사람이 선인(仙人)에게 한 번 얻어 마시고는 몇 개월 동안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하는 술 이름으로, 맛좋은 미주(美酒)를 뜻하는데, 보통 유하주(流霞酒)로 많이 쓴다. 《抱朴子 惑》
♣ 자하배[紫霞杯]한 번 마시면 몇 달 동안 배가 고픈 줄을 알지 못한다는 신선의 술 이름이다. 《論衡 道虛》
♣ 자하비[子夏悲]아들의 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공자의 제자 자하는 아들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여 실명(失明)까지 하였다.
♣ 자하상[紫霞觴]하상(霞觴)과 같은 말로 선인(仙人)이 마시는 잔을 이른다.
♣ 자하선인[紫霞仙人]고려 때 채홍철(蔡洪哲)이 송악산(崧岳山) 아래 자하동(紫霞洞)에 중화당(中和堂)을 짓고 국가의 원로들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베풀었고, 스스로 자하동곡(紫霞洞曲)을 지어 부르면서 자하선인이 와서 헌수(獻壽)하는 의미를 붙였던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四》
♣ 자하성[紫霞城]주왕산(周王山)에 있는 산성으로 일명 주방산성(周房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의 왕자인 김주원(金周元)이 고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쌓은 성이라고 한다.
♣ 자하성[紫霞城]주왕산(周王山)에 있는 산성으로, 전설에 의하면 주왕(周王)이 고려군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 자하장[紫霞漿]하장(霞漿). 곧 선약(仙藥)의 이름. 습유기(拾遺記)에 “구름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이 있는데, 이것을 하장이라 한다.” 하였다.
♣ 자하준[紫霞尊]신선이 마신다는 유하주(流霞酒) 술잔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선에게 이끌려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술을 한 잔씩 얻어 마실 때마다 몇 개월씩 배가 고프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論衡 道虛》
♣ 자학[字學]글자의 근원ㆍ원리ㆍ음(音)ㆍ뜻 등을 연구하는 학문.
♣ 자합[子合]주희(朱熹)의 문인인 왕우(王遇)의 자.
♣ 자항[慈航]불교에서 쓰는 용어로, 부처와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대중을 제도하여 생사의 고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마치 배로 사람들을 태워 물을 건너게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 자허[子虛]가공의 인물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는 자허와 망시공(亡是公)과 오유선생(烏有先生) 세 사람의 문답으로 되었는데, “헛 것[子虛]이 이런 것이 없다[亡是公]. 어디 있었으냐[烏有].”라는 뜻이다.
♣ 자허보경[紫虛寶經]도교(道敎)의 경전(經典).
♣ 자허부[子虛賦]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작품으로, 제후의 수렵에 관한 일을 서술하며 풍간(諷諫)의 뜻을 담았다.
♣ 자허오유[子虛烏有]한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와 오유선생(烏有先生)과 무시공(亡是公) 세 사람을 빙자해서 말을 했는데, 자허는 빈 말이라는 뜻이고 오유 선생은 무엇이 있느냐는 뜻이고 무시공은 이 사람이 없다는 뜻임. 후세 사람들이 허무한 일을 말할 때는 흔히 자허ㆍ오유라 하였다.
♣ 자허자[子虛子]실제로 없는 공상적(空想的)인 인물로 쓰는 것이다.
♣ 자형[子荊]자형(子荊)은 진(晉) 나라 손초(孫楚)의 자(字)로, 석포(石苞)의 휘하에서 군사(軍事)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두보(杜甫)의 시에 “記室得何遜 韜鈐延子荊”이라는 구절이 있다.
♣ 자형수[紫荊樹]형제들끼리 서로 우애함을 이름. 옛날 전진(田眞)이란 사람의 형제 세 사람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나니, 당전(堂前)에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이 남았으므로, 세 사람이 이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갖기로 합의를 하고, 다음날 그 나무를 자르려고 가보니, 나무가 마치 불에 탄 것처럼 말라 있었다. 그러자 전진이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나무가 본디 한 그루인데 장차 쪼갠다는 말을 듣고 이 때문에 말라 버린 것이니, 우리는 나무만도 못하다.” 하고, 다시 그 나무를 베지 않기로 하니 나무가 그 즉시 잎이 무성해졌다. 형제들이 거기에 감동하여 다시 재산을 합해서 삶으로써 마침내 효우(孝友)의 가문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續齊諧記 紫荊樹》
♣ 자형절[紫荊折]자형의 아픔은, 전씨(田氏) 형제 세 사람이 재산을 분배하면서 뜰에 서 있는 자형(紫荊) 한 그루까지도 삼등분(三等分)하려 하자 나무가 말라죽는 것을 보고는 크게 깨달아 다시 형제의 우애를 되찾았다는 고사이다.
♣ 자형화[紫荊花]자형화(紫荊花)는 곧 상체화(常棣花)인데, 꽃이 서로 뭉쳐 피므로 형제에게 비유된다. 남조(南朝) 양(梁) 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전진(田眞) 삼 형제가 각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뜰에 심어놓은 자형화(紫荊花)를 갈라서 나누어 가지려 하니 자형화가 곧 시들었다. 삼 형제가 이에 뉘우치고 다시 재산을 합하니, 자형화가 다시 무성하게 자랐다 한다. 《績齊諧記 紫荊樹》
♣ 자호[紫狐]들에 사는 여우를 말한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구설(舊說)에 들여우를 자호(紫狐)라고 하였는데, 한밤중에 꼬리를 쳐서 불을 일으킨다.” 하였다.
♣ 자호필[紫毫筆]신하들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치 않은 것을 기롱한 시의 제목. 풍유(諷諭)에 보임.
♣ 자화경[子華輕]좋은 갖옷을 입고 간다는 뜻. 자화(子華)는 공자의 제자 공서적(公西赤)의 자(字).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는 “공서적이 제(齊) 나라에 갈 적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한 말이 있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 자화자찬[自畵自讚]자기가 그린 그림에 자기가 찬(讚)을 쓰는 일. 찬(讚)이란 그림에 써 넣는 시나 글로서 주로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찬은 본래 스승, 선배, 동문 등 다른 사람이 써주는 것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칭찬을 하거나 추켜 올리는 것을 가리킴.
♣ 자황[紫皇]도교의 전설 속에 나오는 최고의 신선 이름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도부(道部) 도(道)에 “비요경(祕要經)에 ‘태청(太淸)의 아홉 궁(宮)에는 모두 요속(僚屬)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자를 천황(天皇), 또는 자황이라 부른다.’하였다.” 한다.
♣ 자황[訾黃]용의 날개에 말의 몸을 지녔다는 옛날 신마(神馬)의 이름.
♣ 자황[雌黃]유황과 비소의 혼합물. 노란색의 채료(彩料)로서 옛날에 이를 시문(詩文)의 첨삭(添削)에 썼으므로, 전하여 시문을 짓고 첨삭하는 뜻으로 쓰인다.
♣ 자황[雌黃]자황은 계관석(鷄冠石)이라고도 부르는 일종의 광물이며, 이를 재료로 여러 가지 안료(顔料)를 만들었다. 《漢舊儀》
♣ 자황론[雌黃論]옛날 누른 종이에 글을 쓰고 잘못된 글이 있으면 자황을 칠하여 지우고 다시 그 위에 썼으므로 전하여 자구(字句)의 첨삭(添削)에 비유한 말이다.
♣ 자황어[雌黃語]조정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며 비평하는 말을 뜻한다.
♣ 자황포[柘黃袍]수 문제(隋文帝)가 처음 입었다는 적황색의 황제 복장이다.
♣ 자회감[蔗回甘]진 나라 고개지(顧愷之)가 사탕수수를 씹을 때 항상 꼬리에서부터 씹으면서 “차츰 가경(佳境)으로 들어간다.” 하였음. 고(苦)로부터 차츰 낙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
♣ 자효[慈孝]자효는 모자(母子)를 가리킨다.
♣ 자후[子厚]정재물(鄭載物)의 호(號)이다.
♣ 자후우[子厚愚]자후는 당 나라 때의 문인인 유종원(柳宗元)의 자이다. 유종원이 칠석날에 걸교문(乞巧文)을 지으면서 “나는 교(巧)보다 우(愚)를 취하겠다.” 하였다.
♣ 자휘[字彙]자전(字典)ㆍ사전(辭典)과 같은 것임. 명(明) 나라 매응조(梅膺祚)가 편찬했음.
♣ 자휴[恣睢]자득하는 모양. 여유있고 방자하다.
♣ 작[斫]베다. 자르다.
♣ 작가라[雀可羅]찾아오는 빈객이 없어 문 앞이 한적하다는 뜻이다. 작라는 ‘새그물’이라는 뜻인데, 사기(史記) 급정전(汲鄭傳)에 “책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자 찾아오는 손님으로 문 앞이 꽉 메우더니 폐관(廢官)되자 문 밖이 한적하여 새그물을 칠 수 있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작교선[鵲橋仙]사패(詞牌)의 이름인데, 맨 처음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다.
♣ 작기일고[作氣一鼓]춘추 시대에 노(魯) 나라가 제(齊) 나라와 전쟁을 할 적에 노 나라의 용사(勇士) 조말(曹沫)이 장공(莊公)에게 제 나라 북을 세 번 쳐서 용기가 다할 때를 기다려 응전(應戰)하기를 권유하여 말하기를, “전쟁이란 용기로 하는 것이라, 한 번 북을 치면 군사들의 용기가 나고 두 번 쳤을 때는 용기가 줄어들고, 세 번 쳤을 때는 용기가 다하는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莊公 十年》
♣ 작두장[斫頭將]삼국 시대 때의 장수인 엄안(嚴顔)을 가리킨다. 엄안이 강주(江州)를 지키다가 장비(張飛)에게 생포되었는데, 장비가 항복하라고 하자, 엄안이 “머리 잘린 장수만 있을 뿐이지 항복하는 장수는 없다.” 하였다. 《三國志 卷36 蜀書 張飛傳》
♣ 작두지장[斫頭之將]삼국 시대 때의 장수인 엄안(嚴顔)을 가리키는데, 엄안이 강주(江州)를 지키다가 장비(張飛)에게 생포되었는데, 장비가 항복하라고 하자, 엄안이 “머리 잘린 장수만 있을 뿐, 항복하는 장수는 없다.” 하였다. 《三國志 卷36 蜀書 張飛傳》
♣ 작라설문[雀羅設門]한(漢) 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자 손님이 문에 가득하더니, 파직되자 문 밖에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만큼 손이 끊어져 한산했다 한다.
♣ 작라투[雀羅投]빈객이 찾아오지 않음을 이름. 한(漢) 나라 때 책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적에는 빈객이 항상 문 앞에 그득했는데,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문 밖에 새그물을 칠 만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작맹[雀盲]밤눈이 어두운 것, 즉 야맹증을 말한다.
♣ 작문[作文]이두(吏讀)로 ‘딜문’ 또는 ‘질문’이라 읽는데, 이 경우는 판적(版籍), 즉 양안(量案), 호적(戶籍) 등 토지, 인민(人民)에 관한 것을 등기한 장부를 뜻한다.
♣ 작미[鵲尾]향로(香爐)의 일종이다.
♣ 작변[雀弁]주대(周代)의 관(冠)인데, 주작(朱雀)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작사도방[作舍道傍]길가에 집을 짓노라니 오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서 주인의 마음이 흔들려 쉽게 집을 지을 수 없었다함을 이름.
♣ 작서걸반유마힐[作書乞飯維摩詰]불교(佛敎)의 유마힐경(維摩詰經)에, “유마힐 거사(居士)에게 향적세계(香積世界)에서 밥을 보내 왔다.”는 말이 있다.
♣ 작서공모자[雀鼠共茅茨]강포(强暴)한 자들이 초가에 사는 백성들을 착취하며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쥐와 참새 떼는 시경(詩經) 소남(召南) 행로(行露)에서 나온 말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송사(訟事)까지 벌이며 고달프게 하는 포악한 세력을 말한다.
♣ 작설[綽楔]정표(旌表)를 일컫는 말임. 오정방(吳鼎芳) 시에 “煌煌樹綽楔"의 구가 있음.
♣ 작소[鵲巢]당(唐) 나라 때에 어느 중이 산 위 높은 소나무 위에 깃들여 사는데, 사람들이 그를 새둥주리 선사[鳥窠禪師]라 일렀다. 다시 까치가 그 옆에 깃들이니, 사람들이 “까치집 화상[鵲巢和尙].”이라 일렀다. 《傳燈錄》
♣ 작소[鵲巢]작소는 시경 소남(召南)의 편명이다. 본디 까치가 지어놓은 집에 비둘기가 들어가 산다는 뜻으로 부인의 정숙한 덕을 찬미한 것이다.
♣ 작수[勺水]조계종의 한 잔 물이라는 뜻의 ‘조계 일작수(曹溪一勺水)’를 줄인 말이다.
♣ 작수삼전비[勺水三錢費]항중산(項仲山)이라는 사람이 위수(渭水)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삼 전(三錢)의 돈을 던져 값을 치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62 引 三輔決錄》
♣ 작시선피진공구[作詩先被晉公求]백낙천이 배도(裴度 晋公)에 말[馬]을 요구하였더니 배도는 시를 지어 보내기를, “그대가 만일 준마를 요구할 마음이 있다면, 나는 도리어 미인에 뜻이 있네[君若有心求逸足 我還留意在名妹].”라 하여 말과 기생을 바꾸기를 요구하였다.
♣ 작시초지부[作詩招之罘]한유(韓愈)가 일찍이 하양령(河陽令)으로 있을 적에 양지부(揚之罘)라는 선비가 한유에게 찾아와서 공부를 하였는데, 뒤에 그가 돌아가게 됨을 애석하게 여겨 ‘양지부를 부르다[招揚之罘]’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맨 끝에 “ ……시를 지어서 지부를 부르노니 조석으로 목마르게 그대만 기다리리[作詩招之罘 晨夕抱饑渴]”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五》
♣ 작심삼일[作心三日]마음을 작정한 지 사흘도 못 간다는 뜻으로, 일시적 분발(奮發)로 결심이 굳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
♣ 작씨[柞氏]작씨는 주관(周官)의 이름으로 초목을 다스리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 작악[作噩]고갑자(古甲子)에서 작악(作噩)은 유(酉)를 말한다.
♣ 작약[芍藥]약초의 이름인데, 옛사람이 서로 작별할 때 쓰였다고 한다. 비아(埤雅) 작약(芍藥)에 “우형(牛亨)이 ‘작별할 때 작약을 꺾어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 동자(董子)가 ‘작약은 일명(一名)에 가리(可離)라고도 하므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였다.
♣ 작약[汋約]유순한 모양. 아첨하다. 유약하다. 수척하다.
♣ 작약가[芍藥歌]비아(埤雅) 작약(芍藥)에 “세상에서 ‘모란(牧丹)은 꽃 중의 왕이요, 작약은 꽃 중의 정승이다.’한다.” 하였다.
♣ 작약지증[勺藥之贈]남녀간에 향기로운 함박꽃을 보내어 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 작요지[鵲繞枝]나그네가 의탁할 곳이 없음을 비유한 말. 위 무제(魏武帝)의 단가행(短歌行)에 “달 밝고 별은 드문데, 오작이 남으로 날아와, 나무를 세 번 돌아라, 어느 가지에 의탁할꼬[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匝 何枝可依].” 한 데서 온 말이다.
♣ 작용[作俑]좋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그것이 전례가 되게 함을 말함. 옛날 나무를 깎아 허수아비[木偶]를 만들어서 부장(副葬)하던 일은 결국 후세의 사람으로 직접 순장(殉葬)케 하는 습속을 열어주는 셈이 되었다. 맹자(孟子) 양 혜왕 상(梁惠王上)에, “처음 용(俑)을 만든 자는 그 후손이 없을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 그 폐단을 지적한 말이 보인다.
♣ 작유이개화[柞楢已改火]가을철이 지났다는 뜻이다. 개화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각자 다른 나무로 불을 피워서 나누어주는 의식을 말하는데, 가을이 오면 떡갈나무와 참나무로 불을 피운다. 《禮記 月令》
♣ 작작[作作]빛이 눈부시게 나는 모양
♣ 작전[作錢]상사의 공문에 의해 환곡을 돈으로 받는 일.
♣ 작주안[斫奏案]주안은 상주문(上奏文)을 올려놓는 궤(几)를 이른다. 삼국 시대(三國時代) 오(吳)의 손권(孫權)이 조조(曹操)를 맞이하자는 제장(諸將)의 의논을 듣고 칼을 뽑아 앞에 놓여 있는 주안을 찍으면서 말하기를, “여러 장리(將吏)들 중에 감히 다시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주안과 같이 될 것이다.”고 하여, 절대로 한적(漢賊)인 조조를 맞이할 수 없다는 뜻을 결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周瑜傳 注》
♣ 작주즙[作舟楫]배 돛대 만들어 큰 내를 건넌다는 말은 서경(書經) 열명 상"만약 큰 냇물을 건너게 된다면 그대를 배와 돛대로 삼겠소.” 한 데서 온 말로, 역시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에 비유한 말이다.
♣ 작지[鵲旨]여산(礪山)에 있는 지명이다.
♣ 작지가[斫地歌]두보의 단가행(短歌行)에 “王郞酒酣拔劍斫地歌莫哀"가 있음. 착지가(斫地歌)는 땅을 치고 노래한다는 말.
♣ 작철[嚼鐵]쇠는 말의 재갈에 달려 있는 쇳조각을 말한다. 말탄 자가 이것으로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므로 곧 유능한 무장(武將)을 가리킨 것이다.
♣ 작철[作輟]하다 말다 함.
♣ 작치진참우[作畤秦僣尤]제후국인 진(秦) 나라가 하늘에 제사한 것은 극히 참람한 짓이라는 뜻. 치는 그친다는 뜻으로 신령이 의지함을 의미하여 천지(天地)ㆍ오제(五帝)의 제지(祭地)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천자만이 제사지낸다. 진 양공(秦襄公)은 주 평왕(周平王)을 도와 공이 있자 마침내 얼룩말과 누른소와 숫염소를 사용하여 상제(上帝)를 서치(西畤)에서 제사하였다. 《史記 卷五 秦本紀》
♣ 작함환[雀含環]용작(龍雀)이 그려진 환도(環刀). 중국에 오래 전해지던 이름난 칼로서 대하용작(大夏龍雀) 또는 용작대환(龍雀大環)이라 불렀으며 여러 가지 신비스런 기능을 발휘했다 한다. 《晉書 赫連勃勃載記》
♣ 잔도[棧道]산골짜기나 절벽 같은 데에 널빤지를 사다리처럼 걸쳐서 만든 길로, 아주 험한 길을 뜻한다.
♣ 잔방[殘芳]시들고 남은 꽃.
♣ 잔배냉적[殘杯冷炙]먹다 남은 술과 다 식은 고기 구이로, 치욕을 당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 잔수[潺水]두치강(豆耻江)의 일명.
♣ 잔원[潺湲]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 급하고 깨끗한 물의 흐름.
♣ 잔저사[盞底蛇]응침(應郴)이 주부(主簿) 두선(杜宣)을 술자리에 초청했는데, 두(杜)가 보니 술잔 속에 뱀이 있는지라, 마시지 못하고 돌아가 병이 났다. 뒤에 바로 그 자리에 술자리를 다시 베풀고 보니, 뱀은 활[弩] 그림자였으므로 두의 병이 나았다. 풍속통(風俗通) 진(晋) 악광(樂廣)과 그의 친객 간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晋書 樂廣傳》
♣ 잔촉[殘燭]다 타고 얼마 남지 않은 촛불. 밤이 깊어진 것을 뜻함.
♣ 잔화[殘花]늦은 봄날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꽃을 말한다.
♣ 잔회기위어[殘膾棄爲魚]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물고기로 회(膾)를 하여 먹다가 오(吳) 나라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남은 것을 강에 버렸더니 모두 고기가 되었다 한다.
♣ 잠[箴]경계하는 글.
♣ 잠갑배[蘸甲杯]술잔을 손으로 잡을 적에 손톱이 술에 적셔지는 것을 말한 것으로, 즉 철철 넘치는 술잔을 의미한다.
♣ 잠내[簪柰]이는 왕후의 죽음을 뜻한다. 한 성제(漢成帝) 때에 삼오(三吳)의 여자가 흰 꽃[白花]을 꽂아서 바라보매 마치 흰 능금꽃[素柰]과 같았는데, 이에 대하여 전하는 말에 “천공(天公) 직녀(織女)가 죽어서 그렇게 옷을 입은 것이다.”고 하더니, 이때에 두 황후(杜皇后)가 붕어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잠로[湛盧]칼이름.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보검(寶劍)이었다고 한다.
♣ 잠룡[潛龍]주역(周易) 건괘(乾卦)에,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 것이다.[潛龍勿用]” 한 데서 온 말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때를 만나지 못해 불우한 처지에 있는 것을 말한다.
♣ 잠룡[潛龍]쓰이지 못하고 숨어 있음을 말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초구잠룡물용(初九潛龍勿用) 주(注)에 “초양(初陽)이 아래에 있어 쓰이지 못하므로 그 상이 잠룡과 같다.” 하였다.
♣ 잠리[簪履]비녀와 가죽신. 즉 높은 벼슬아치들의 예복(禮服) 차림을 뜻하는데, 비녀란 곧 관(冠)에 꽂는 것이다.
♣ 잠마[蠶馬]고신씨(高辛氏) 때 어떤 사람이 이웃 나라에 납치되어 가고 그가 타던 말만 남아 있자 그의 아내가 “우리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내 딸을 시집보내겠다.” 하니, 그 말이 벌떡 일어나 나갔다가 수일 만에 주인을 찾아 태워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말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트집을 부리므로 남편이 그 사실을 물으니, 부인이 남편을 찾기 위해 맹세한 사실을 말하자 그는 당장 말을 쏘아 죽여서 가죽을 벗겨 뜰에 널어놓았는데, 그의 딸이 그 옆을 지나자 말가죽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 처녀를 싸가지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래서 그 처녀가 누에로 화(化)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原化傳拾遺》
♣ 잠모[岑牟]군대의 고각사(鼓角士)들이 쓰는 모자.
♣ 잠미시[蠶尾詩]청(淸) 나라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잠미집(蠶尾集)의 시를 말한다. 잠미집 10권, 속집 2권, 후집 2권이 있다.
♣ 잠부론[潛夫論]후한(後漢) 왕부(王符)가 지은 책 이름이다. 난세(亂世)를 만나 세속과 영합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 살면서 당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분개한 심정을 총 35편(篇)으로 나누어 펼친 고론(高論)이다.
♣ 잠삼[岑參]잠삼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두보(杜甫)와 함께 문장에 능하였다.
♣ 잠삼면[蠶三眠]누에는 본디 네 잠을 자고나서는 섶에 올라가 집을 짓는 것이므로, 세 잠을 잤다는 것은 곧 반 평생이 이미 지났음을 비유한 말이다.
♣ 잠삼욕[蠶三浴]누에가 멱감는다는 것은 누에의 종자를 처음 고를 때 소금물이나 들나물 꽃의 즙에 담궈 생명력이 강한 것만 골라내는 일종의 종자 고르는 방식이다.
♣ 잠실[蠶室]중죄인(重罪人)에게 궁형(宮刑)을 행하는 장소.
♣ 잠실음형[蠶室淫刑]남자는 거세(去勢)를 하고 여인은 음부를 봉함하는 형벌.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밀실에 불을 계속 지펴 높은 온도를 유지시키는 방이 잠실(蠶室)인데, 궁형(宮刑)에 처한 자는 그 잠실에 있게 하였음. 《漢書 武帝紀》
♣ 잠어[蠶魚]어부(魚鳧) 잠종(蠶從). 모두 촉 나라 선대 왕들의 이름이다.
♣ 잠옹[潛翁]이명준(李命俊)의 호가 잠와(潛窩)이다.
♣ 잠와기[潛窩記]잠와는 이명준의 당호(堂號)로, 이에 대해서 계곡이 지어 준 기문(記文)이 계곡집(谿谷集) 8권에 보인다.
♣ 잠잠[湛湛]중후한 모양, 물이 깊고 가득찬 모양, 물이 잠잠한 모양, 맑고 깨끗한 모양, 깊은 모양, 이슬이 많이 내린 모양, 물이 사납게 흐르는 소리
♣ 잠잠[岑岑]머리가 아픈 모양,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모양
♣ 잠잠[涔涔]비가 많이 오는 모양, 땀과 눈물이 많이 흐르는 모양, 괴롭고 피곤한 모양, 날씨가 흐리고 어두운 모양
♣ 잠저[潛邸]임금이 등극(登極)하기 이전 저택을 말함.
♣ 잠참[岑參]당(唐) 나라 시인. 고적(高適)과 함께 시로 유명하여 고잠(高岑)이라 칭해짐.
♣ 잠채필[簪彩筆]사관(史官)이나 시종신(侍從臣)으로 활약하는 것을 말한다. 예문관 검열이나 승정원 주서 등 사관을 잠필지신(簪筆之臣)이라고 한다.
♣ 잠총[蠶叢]옛날 촉왕(蜀王)의 선조를 말한다. 그가 처음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가르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뒤에 촉 나라의 별칭이 되었다. 촉왕(蜀王) 본기(本紀)에 “촉왕의 선조가 이름이 잠총이었는데 후세에 촉 나라의 국호가 되었다.” 하였다.
♣ 잠총국[蠶叢國]잠총은 옛날 촉왕(蜀王)의 선조 이름. 그가 처음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가르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뒤에 촉 나라의 별칭이 되었다. 촉왕본기(蜀王本紀)에 “촉왕의 선조가 잠총이었는데, 후세에 촉 나라의 국호가 되었다.” 하였다.
♣ 잠필[簪筆]붓을 머리에 꽂는다는 뜻으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나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의 별칭이다.
♣ 잠호[簪蒿]가난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에 “두림(杜林)이 외효(隗囂)의 땅에 있으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아 쑥대로 비녀하고 풀로 자리를 깔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그의 녹을 먹지 않았다.” 하였다.
♣ 잠홀[簪笏]잠은 잠필(簪筆)로 관에 꽂은 붓을 말하고, 홀은 조회 때에 신하가 가지는 수판(手板)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내용을 거기에 기록하여 잊어버릴 것을 대비하는 용도로 쓰인다. 곧 벼슬살이를 하는 것을 뜻한다.
♣ 잡가[雜家]각 학파의 사상을 종합한 여씨춘추(呂氏春秋)류의 사상가들)
♣ 잡역미[雜役米]조선조 후기 국가에서 정식으로 받는 대동미(大同米) 이외에, 각 고을의 용도에 쓰기 위해 별도로 거두던 쌀. 각 고을의 용도는 원래 각양 각색의 징수와 토색(討索)으로 충당이 되었는데 뒤에는 이것을 묶어서 쌀로 대납(代納)을 한 것으로서 수량은 1결(結)에 4말 내지 6-7말이었다. 그러나 이 잡역미를 계기로 각종 토색이 완전히 일소되었던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 잡영선비[雜營繕費]자질구레한 물건을 고치는 데 필요한 비용.
♣ 잡유[雜糅]뒤섞여 있다.
♣ 잡주징변[雜奏徵變]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등 오음(五音) 가운데 치와 변치(變徵)를 말한다.
♣ 잡찬[雜纂]당 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책으로 여러 가지 사물(事物)에 관한 사항을 내용별로 분류 기록한 것인데, 살풍경(殺風景)ㆍ불여불해(不如不解)ㆍ악불구(惡不久)ㆍ의상(意想)ㆍ왕굴(枉屈)ㆍ무견식(無見識)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음. 그 뒤 송 나라 왕질(王銍)은 노비상(奴婢相)ㆍ불상칭(不相稱)ㆍ부제사(不濟事) 등의 항목으로 속잡찬(續雜纂)을 지었고, 소식(蘇軾)은 재속잡찬(再績雜纂)을, 명 나라 황윤교(黃允交)는 삼속잡찬(三續雜纂)을 지었음.
♣ 잡현[雜縣]잡현은 해조(海鳥)로, 원거(爰居)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해조(海鳥)가 노(魯) 나라 교외에 내려앉자, 구소(九韶)의 음악과 태뢰(太牢)의 음식으로 대접하였는데, 새가 그만 현기증을 일으키고 근심과 슬픔에 잠겨[眩視憂悲] 삼 일 만에 죽었다.” 하였다.
♣ 잡화포[雜花鋪]잡화경(雜華經)은 화엄경(華嚴經)의 이칭인데 온갖 행실이 교잡(交雜)한 것을 잡화라 이름.
♣ 장[障]군중에서나 사신이 타는 수레다.
♣ 장[章]임금에게 올리는 글
♣ 장가[長歌]군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삼국 시대 오(吳) 나라의 장군 유찬(留贊)이 적군 앞에서 먼저 머리를 풀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 군사들이 따라 부르게 한 뒤 진격하여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는 ‘장가입진(長歌入陣)’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吳書 孫峻傳 注》
♣ 장간리[長干里]장간리는 상인과 원주민이 혼거(混居)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진(晉) 나라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 주(註)에 “건업(建業) 남쪽 5리 지점에 산언덕이 있고, 그 사이의 평지에 이민(吏民)이 혼거하는데, 이곳을 장간(長干)이라고 하니, 이른바 대장간(大長干)과 소장간(小長干)의 마을이 이어져 있다.” 하였고, 이곳 상인의 처를 소재로 하여 그곳의 풍속을 절묘하게 묘사한 이백(李白)의 장간행(長干行)이 또 유명하다. 《李太白集 卷3》
♣ 장감[張堪]보리 이삭이 두 갈래가 생기는 것을 풍년의 조짐이라 하는데, 후한(後漢) 때 장감(張堪)이 어양태수(漁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뽕나무엔 붙은 가지가 없고 보리 이삭은 두 갈래가 생기었네 장군이 고을을 다스리니 즐거움을 감당치 못하겠네[桑無附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張堪傳》
♣ 장강[莊姜]춘추 때 위 장공(衛莊公)의 비(妃)인데, 어질고 덕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 장강루[長康淚]장강은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의 자(字). 그는 일찍이 환온(桓溫)의 대사마 참군(大司馬參軍)이 되었었는데, 환온이 죽자 슬피 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곡한 모습을 표현하라 하자 “울음소리는 벼락이 산을 깨치는 듯하였고, 눈물은 하수를 쏟아 바다에 넣는 듯했다.” 하였다. 《晉書 顧愷之傳》
♣ 장강어[葬江魚]초 회왕(楚懷王) 때의 충신 굴원은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쫓겨나자, 울분과 시름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고, 오자서(伍子胥)는 춘추 시대초 나라 사람으로 오(吳) 나라에 망명하여 오왕(吳王)을 위해 월(越) 나라를 급히 치라고 극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태재 비(太宰嚭)의 참소에 의해 자결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죽음에 임하여 유언하기를 “내 눈을 뽑아서 오 나라동문(東門) 위에 걸어놓아라. 월 나라가 쳐들어와 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리라.” 하고 죽었는데, 오왕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그의 시체를 말가죽 부대에 담아 강물에 띄워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六》
♣ 장강치절[長康癡絶]세상살이가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장강(長康)은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의 자(字)로, 당시에 재절(才絶), 화절(畫絶), 치절(癡絶)의 3절로 일컬어졌다. 《晉書 卷92》
♣ 장개빈[張介賓]명(明)나라 사람. 경악전서(景岳全書) 썼음. 호는 경악(景岳)임. 《會稽縣志》
♣ 장객[掌客]주 나라 때 빈객에 관한 일들을 맡은 관명(官名)이다.
♣ 장거[章擧]문어의 유임.
♣ 장건[張騫]한 무제(漢武帝) 때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과 동맹을 촉진할 목적으로 사신으로 떠나 서역(西域)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서(東西) 교역의 길을 열었다.
♣ 장건구목숙[張騫求苜蓿]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말먹이인 거여목[苜蓿]의 씨앗을 가지고 온 고사가 있다. 《史記 大宛列傳》
♣ 장건궁절역[張騫窮絶域]한 나라 때 장건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간 것을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 장건궁한[張騫窮漢]장건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은 것을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 장건범해정[張騫泛海情]한 무제(漢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 장건정후수사월[張騫正候隨楂月]사명(使命)을 받들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천하(天河)와 바다가 서로 통하는 곳이 있다.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부사(浮槎)가 왕래하는데, 어떤 이가 그 배를 타고 떠나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그 사람을 장건(張騫)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원숭이 울음 세 번 들으면 눈물이 주르르, 사명 받들고 헛되이 팔월의 배 따라가네.[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槎]”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7 秋興八首》
♣ 장검동[張黔同]장순손(張順孫)이 시기심이 많고 탐오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폄하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
♣ 장경[長慶]당(唐) 나라 장경(長慶) 연간에 서로 어울려 시를 지었던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시풍(詩風)을 말한다.
♣ 장경[長卿]장경(長卿)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이다. 그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한 무제(漢武帝)가 읽어보고는 자기와 같은 시대에 있지 않음을 탄식하다가, 동시대의 사마상여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수소문해서 불러온 뒤 총애를 쏟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司馬相如傳》
♣ 장경[長庚]장경은 저녁 무렵에 보이는 태백성(太白星)의 별칭인데, 태백성은 살벌(殺伐)을 맡은 별이라 하여 불길한 것을 뜻한다.
♣ 장경[長卿]장경은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부(辭賦)를 잘 지어 문장가로 유명한데,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다. 경제(景帝) 때 무기상시(武騎常侍) 벼슬을 지내다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무제(武帝) 때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다가 또 병으로 그만두었다. 자허(子虛), 상림(上林) 등의 부를 지어 무제의 사냥 즐김을 간하였다. 양효왕(梁孝王)의 객(客)으로 들어가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장기(莊忌) 등 당대의 저명한 유세가들과 수년을 보냈으며, 양효왕이 죽은 뒤에 고향인 촉군(蜀郡) 성도(成都)로 돌아가 살면서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史記 卷一百一十七 司馬相如傳》
♣ 장경[長鯨]장경은 한없이 탐욕을 부리는 악인(惡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 장경[長庚]장경은 혜성(彗星)의 일종으로, 병란(兵亂)을 주관하는 별이다.
♣ 장경[長庚]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 이백(李白)의 어머니가 꿈에 금성 곧 태백성을 보고 그를 낳았기 때문에 그의 자를 태백(太白)이라 했다 함.
♣ 장경[長鯨]큰 고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큰 적(賊)을 뜻하는 말로, 왜적을 가리킨다. 사통(史通) 서사(敍事)에 “역신(逆臣)을 논할 때는 문정(問鼎)이라 부르고, 큰 도적을 일컬을 때는 장경(長鯨)으로 지목한다.”는 말이 있다.
♣ 장경공[長庚公]금성(金星)의 딴 이름. 원래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장경성, 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계명성(啓明星)이라 하는데, 또 흔히 태백성이라고도 한다. 이백(李白)의 어머니가 꿈에 장경성을 보고 그를 낳아 이름을 태백(太白)이라 했다 하며, 흔히 시에서는 달과 짝하여 읊기도 한다.
♣ 장경구[長卿口]장경은 한 경제(漢景帝) 때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 그는 말은 어눌하였으나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史記 卷五十七 司馬相如傳》
♣ 장경로[長卿壚]장경(長卿)은 바로 사마상여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임공령(臨邛令)으로 있던 친구 왕길(王吉)을 찾아갔다가 그의 주선으로 임공의 부호인 탁왕손(卓王孫)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마침 음률을 좋아하는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이 막 청춘과부로 집에 와 있던 터라, 사마상여가 거문고를 한 곡조 타서 은근히 탁문군의 마음을 돋운 결과, 탁문군은 과연 사마상여에게 반하여 밤중에 도주해서 사마상여에게로 갔다. 그리하여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데리고 성도(成都)로 돌아와서 사는데, 워낙 가난하여 살길이 막연하자, 목로집을 차려 탁문군에게는 술을 팔게 하고 사마상여 자신은 시중(市中)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七》
♣ 장경성[長庚星]태백성(太白星). 태백성은 곧 금성(金星)인데, 해를 뒤따라 가면서 해가 진뒤에 서쪽 밤 하늘에 보이는 이 별을 장경성(長庚星)이라 부른다.
♣ 장경순[張景順]당 현종(唐玄宗) 때의 목장 관리인 이름이다. 장열(張說)의 농우감목송덕비(隴右監牧頌德碑) 서문에 “개원(開元) 원년에는 목마(牧馬)가 24만 필이었는데, 13년에는 무려 43만 필로 늘어났다. 이에 황제가 장경순을 돌아보며 ‘말이 이처럼 번성하다니 모두가 그대의 힘이다.’라고 하자, 장경순이 ‘황제의 힘이요, 중(仲 왕모중(王毛仲))의 지휘에 의한 것일 뿐, 소신이 힘을 쓴 것은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 장경악[張景岳]명(明)의 장개빈(張介賓). 경악전서(景岳全書) 썼음. 경악(景岳)은 장개빈의 호임. 《會稽縣志》
♣ 장경오훼[長勁烏喙]인물됨이 좁고 의심이 많아서, 성취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 나면 협력자나 동지에게 등을 돌릴 인상을 일컫는 고사성어.
♣ 장경윤[張京尹]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장창(張敞)을 이름이니, 평양(平陽) 사람으로 자는 자고(子高)이다. 벼슬에 있을 때마다 치적이 많았으며 일찍이 그의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린 일이 있었다. 《漢書 卷七十六 張敞傳》
♣ 장경제주[長卿題柱]장경은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 사마상여가 일찍이 꼭 출세하겠다는 각오로, 촉(蜀)에서 서(西)로 갈 때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면서 교주(橋柱)에다 “높은 수레와 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고는 내가 이 다리를 다시 지나지 않으리라.”고 쓰고 갔다는 고사이다.
♣ 장경체[長慶體]당(唐) 나라 시인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문체를 말한다. 그들이 절친한 친구로서, 당 목종(唐穆宗) 장경(長慶) 연간에 각각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과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출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장계[張繼]장계는 당 나라 시인.
♣ 장계응[張季鷹]계응은 진(晉) 나라 장한(張翰)의 자(字)이다. 제왕 경(齊王冏)에게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불현듯 고향의 고채(菰菜)와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晉書 卷92》
♣ 장계제약유[張溪題弱柳]장정견(張正見)의 시에 “맑은 시내 천 길이나 험한데 삼양에 섬약한 버들이 드리웠네.[千仞淸溪險 三陽弱柳垂]" 하였다.
♣ 장고[張皐]신라 때의 명장인 장보고(張保皐)를 이름. 장보고는 흥덕왕(興德王) 때 당(唐) 나라에 들어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을 지내고 본국에 돌아와, 당 나라의 해적(海賊)들을 소탕하기 위해 1만 명의 군사를 얻어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어 해적을 소탕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었다.
♣ 장고[掌故]전례(典例)를 맡은 벼슬아치.
♣ 장곡구망[臧穀俱亡]장(藏)과 곡(穀) 두 사람이 함께 양(羊)을 치다가 모두 양을 잃었는데, 장은 책을 끼고 글을 읽었고, 곡은 쌍륙(雙六)을 치며 놀았으니, 두 사람의 소업(所業)은 같지 않았으나 양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다.
♣ 장곡망양[臧穀亡羊]장자(莊子) 병무(騈拇)에 “장(臧)과 곡(穀)이 함께 염소를 치다가 모두 염소를 잃었다. 장에게 묻기를 ‘무슨 일을 하다가 염소를 잃었느냐’ 하자 ‘글을 읽었다’ 하고, 곡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하자 ‘장기를 두고 놀았다’ 하였다. 두 사람이 한 일은 같지 않았지만 염소를 잃기는 마찬가지다.” 하였다.
♣ 장곡숙현[臧穀孰賢]장(臧)은 노예이고 곡(穀)은 어린아이이다. 장자(莊子) 변무(騈拇)의, 노예와 어린아이가 염소를 먹이는데 노예는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고 어린아이는 장기를 두며 놀다가 두 사람이 다 그 염소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하는 일은 다르더라도 중요한 것을 잃은 점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곧 인생의 성패 영욕은 결국 허무하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 장공[章貢]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장수(章水)와 공수(貢水)로, 이 물줄기가 합쳐서 감강(贛江)을 이룬다.
♣ 장공[長公]장공은 송(宋)의 소식(蘇軾)을 말하는데, 소식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절강(浙江) 이서의 항주(杭州)ㆍ호주(湖州) 등 명승지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것임.
♣ 장공[長公]한(漢) 나라 한연수(韓延壽)의 자(字)이다. 회양(淮陽)ㆍ영주(潁州)ㆍ동군(東郡) 등의 태수를 역임하는 동안 예의를 숭상하고 옛날 방식의 교화(敎化)를 펼쳐 천하 제일의 치행(治行)으로 일컬어졌다. 《漢書 卷76》
♣ 장공곡[張公谷]낙양(洛陽)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그곳에서는 좋은 배가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문선(文選) 제16권 한거부(閑居賦)에, “장공(張公)의 대곡(大谷)의 배, 양후(陽侯)의 조비(鳥椑)의 감, 주 문왕(周文王)의 약지(弱枝)의 대추, 방릉(房陵)의 주중(朱仲)의 오얏이 심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에 대한 유량(劉良)의 주(注)에, “낙양에 장공이 있어 대곡에 살았다. 그 집에는 하리(夏梨)가 있는데, 천하에 오직 이 한 나무만이 있다.” 하였다.
♣ 장공맹[張公盲]장공은 당(唐) 나라의 문장 장적(張籍). 그는 늘그막에 눈이 어두웠는데, 그의 친구 이모(李某)가 절동 절도사(浙東節度使)로 나가자, 한유(韓愈)를 시켜 대신 편지한 글에 “그대는 사람을 취할 적에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를 따지고 봉사인가 봉사가 아닌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지금 천하에는 모두 마음이 봉사인데, 나는 눈만 봉사일 뿐 마음은 봉사가 아니어서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 안다.” 하였다. 《韓昌黎集 第十六 代張籍與李浙東書》
♣ 장공사순[張公思蓴]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니 고향이 몹시 그리워짐을 말함. 진(晉)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던 사실이 있었음. 《晉書 文苑 張翰傳》
♣ 장공승사[張公乘槎]한(漢) 나라의 장건(張騫)이란 사람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서 직녀를 만났는데, 직녀가 돌 하나를 주워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엄군평(嚴君平)이라는 사람에게 보였더니, 그 돌은 직녀의 베틀 괴던 돌이라 하였다 한다.
♣ 장공역사[莊公櫟社]장공은 장자(莊子)를 가리키고, 역사는 신사(神社)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장석(匠石)이 제(齊) 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에 이르러서 토신묘(土神廟)에 있는 참나무를 보았는데, 그 그늘은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하였다.
♣ 장공예[張公藝]당(唐) 나라 사람인데, 그의 집은 구세(九世) 동안의 친족(親族)이 한 집에 동거(同居)하였으므로, 당 고종(唐高宗)이 일찍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그 많은 친족이 한 집에 살면서 서로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장공예가 ꡐ인(忍)ꡑ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 장공인자[張公忍字]당(唐)의 장공예(張公藝)는 구세(九世)가 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태산에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그 방법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는 대답 대신 참을 인(忍) 자 백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함. 《唐書 卷一百九十五》
♣ 장공자[張公子]장건(張騫). 한(漢) 성고(成固) 사람. 월지국(月氐國)으로 사신 가다가 흉노에게 잡혔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왔음. 《史記 卷一百十一 衛將軍驃騎列傳》
♣ 장공조술[張公操術]장공은 후한 때의 장군 장환(張奐)을 가리키고, 조술(操術)은 곧 자신을 바르게 잘 지키는 방술을 뜻함. 장환이 일찍이 안정속국 도위(安定屬國都尉)로 있으면서 남흉노(南匈奴)ㆍ동강(東羌) 등의 오랑캐들을 위엄과 은혜로 잘 다스린 결과, 그들이 장환의 은덕에 감격하여 강(羌)의 두목은 말 20필을 장환에게 바쳐 왔고, 선령(先零)의 추장은 또 금기(金器) 16매(枚)를 바쳐 왔다. 그러자 장환이 여러 강(羌)들의 앞에다 주부(主簿)를 불러 놓고 말하기를 “가령 말이 양처럼 많아도 마구에 들일 수 없고, 황금이 좁쌀처럼 많아도 내가 차지할 수 없다.” 하고는 모두 되돌려 주게 하니, 위화(威化)가 크게 행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七》
♣ 장공조이비[長空鳥已飛]사람의 일생이 마치 새가 언뜻 공중을 지나가듯 빠름을 비유한 말인데, 죽음을 뜻한다. 장협(張協)의 시에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새가 언뜻 눈앞을 지남과 같네[人生瀛海內 忽如鳥過目].” 하였다.
♣ 장과[莊窠]장원(莊園)이나 논밭을 말한다.
♣ 장곽영[場藿詠]심성이 고결한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그대의 흰 망아지가 내 밭의 콩싹을 먹었다 하고, 오늘밤 다 가도록 붙잡아 매어두어, 바로 그분이 내 집의 귀빈이 되게 하였으면.[皎皎白駒 食我場藿 縶之維之 以永今夕 所謂伊人 於焉嘉客]”이라는 구절이 있고, 그 말미에 “당신의 목소리 금옥처럼 여기시어, 멀리 떠나려는 마음 갖지를 마오시라.[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는 구절이 있다.
♣ 장교비희차비노[長蛟贔屭佽飛怒]춘추 시대 초(楚) 나라 검사(劍士) 차비(佽飛)가 강을 건널 때 두 마리의 교룡이 배를 습격해 오자, 보검을 빼어 들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교룡의 머리를 베었던 고사이다. 《淮南子 道應訓》
♣ 장구령[장九齡]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재상이며 뛰어난 문장이었음. 자는 자수(子壽). 저서에는 곡강집(曲江集)이 있음.
♣ 장구사운시[長句四韻詩]7자를 1구로 하여 8구로 1편을 이루고, 제 2ㆍ4ㆍ6ㆍ8구의 말미에 운자(韻字)를 쓴 시체(詩體), 칠언율시(七言律詩)의 한 변격(變格).
♣ 장구학[章句學]학문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겸사. 장(章)과 구(句)의 해석에만 치우쳐 전체의 대의(大義)에는 통하지 않는 학문을 말한다.
♣ 장국[長鞠]오랫동안 고생하다.
♣ 장군경병[將軍競病]민첩한 재질을 발휘하여 멋진 시를 순식간에 지어내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의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북위(北魏) 군대를 대파하고 개선한 뒤 열린 연회에서, 운자(韻字)를 서로 나누어 연구(聯句)로 시를 지을 적에, 마지막 남은 운자인 ‘경(競)’과 ‘병(病)’ 두 글자를 가지고 한번 지어보겠다고 자청하면서, “떠날 때는 아녀자들 슬퍼했는데, 돌아오니 풍악 소리 다투어 울리누나. 길손이여 어디 한번 그대에게 물어보세, 나의 공이 곽거병과 비교해서 어떠한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자, 황제 이하 조신(朝臣)들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 ‘장군경병(將軍競病)’의 고사가 전한다. 《南史 曹景宗傳》
♣ 장군경병[將軍競病]상대방의 훌륭한 시문(詩文)에 놀라움을 표현한 말이다. 양(梁) 나라 때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전쟁에 이기고 개선했을 적에 무제(武帝)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시험했는데, 가장 험운(險韻)인 경병(競病) 두 글자만 남았을 때 최후로 들어온 조경종이 즉시 붓을 들어 쓰기를 “떠날 적엔 아녀자가 슬퍼하더니 돌아오매 피리 북소리 다투어 울리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묻노니 어찌하면 곽거병과 같아볼까 [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曹景宗傳》
♣ 장군로불용[將軍老不用]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서 조정에서 버림받은 몸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62세의 나이로 출정(出征)을 자원하였을 때, 너무 늙었다고 여겨 광무제(光武帝)가 허락하지 않자, 말 위에 뛰어 올라타 주위를 돌아보며 용맹을 과시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 장군막하연[將軍幕下蓮]막부(幕府)를 아름답게 일러 연화지(蓮花池)라 하였다. 《南史》
♣ 장군석[將軍石]한 나라 때 장군 이광(李廣)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을 당시 사냥을 나갔다가 우거진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알고 활을 쏘아 명중시켜 화살촉이 끝까지 다 박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九 李廣傳》
♣ 장귀[將歸]금곡(琴曲)의 이름. 공자(孔子)가 조(趙) 나라의 초빙을 받고 가는 도중에 조 나라의 현인 두명독(竇鳴犢)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쓰이지 못할 줄을 알고 고향인 추향(陬鄕)으로 돌아가서 그를 슬퍼하여 지은 금조(琴操)라 한다. 《史記 孔子世家》
♣ 장근[長勤]오랜 고생. 허덕임.
♣ 장금수[腸錦繡]시와 글을 잘함. “비단 창자에 수 놓은 배[錦膓繡肚].”
♣ 장급사[張給事]장급사는 곧 장현소(張玄素)를 말한다. 당 태종(唐太宗) 때 장현소가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태종이 낙양궁(洛陽宮)을 수축하려는 데 대해 현소가 상서(上書)하여 극간하자 태종이 그 일을 즉각 중지하였다. 《唐書 卷一百三》
♣ 장기론[張機論]의서(醫書)를 이름.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의 장기(張機)는 자가 중경(仲景)이었는데, 자기 일가들이 당시 상한병(傷寒病)으로 많이 죽어갔기 때문에 의학을 전공하여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세상에 내놓았음. 《四庫提要 卷一百三》
♣ 장길[長吉]장길은 당(唐)의 문장 이하(李賀)의 자. 그는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하루는 낮에 한 붉은 비단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상제(上帝)가 백옥루(白玉樓)를 짓고 자네를 불러 기문(記文)을 지으려 한다 하였는데, 꿈을 깬 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唐書 卷二百二 李賀傳》
♣ 장길문장[長吉文章]장길은 당(唐) 나라 시인(詩人) 이하(李賀)의 자이다. 그는 종실(宗室)인 정왕(鄭王)의 후예로 시가(詩歌)를 짓는 솜씨가 매우 민첩하고 문체(文體)가 독특하여 장길체(長吉體)를 창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악부사(樂府詞)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舊唐書 卷一百三十七 李賀列傳》
♣ 장길통미[長吉通眉]장길은 당 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자인데 두 눈썹이 맞닿았음. 《唐書李賀傳》
♣ 장낙[長樂]장락은 한(漢) 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처했던 궁전 이름이다.
♣ 장남헌[張南軒]송(宋) 나라 사람. 이름은 식(栻), 자는 경부(敬夫), 남헌은 호이다. 이학(理學)에 전심하였으며 주자와 교류하였음. 저서에는 남헌역설(南軒易說)ㆍ남헌집(南軒集) 등이 있음. 《宋史ㆍ宋元學案》
♣ 장년삼노[長年三老]주사(舟師), 뱃사공을 가리키는데, 혹은 사공을 장년, 노젓는 사람을 삼로라 하기도 한다.
♣ 장녹미인연일제[張祿微仁戀一綈]남에게 조그마한 은혜를 입고 그에 보답한 것을 말한다. 장녹(張祿)은 전국 시대 진(秦) 나라 정승 범수(范睢)의 가명이다. 범수가 처음에 위(魏) 나라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 수가(須賈)를 섬겼는데, 범수가 수가로부터 어떤 일로 오해를 받아 그로 인해 매를 맞아 갈빗대가 부러지고 이가 부러져 거의 죽게 되었다. 범수는 곧바로 몰래 도망하여 성명을 장녹(張祿)으로 고치고 진 나라에 들어가 정승이 되었는데, 수가는 범수가 죽은 줄로만 알았었다. 뒤에 진군(秦君)이 위 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수가는 사신의 자격으로 진 나라에 갔는데, 범수가 그 소문을 듣고 일부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미행하여 수가의 사관(使館)으로 찾아가니, 수가가 범수를 보고 깜짝 반기며 범수의 옷차림을 보고 추울 거라 생각하여 제포(綈袍) 한 벌을 내주었다. 그러자 범수는 그곳을 나와 상부(相府)로 들어가서 정승의 의용(儀容)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수가는 범수가 진의 정승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아채고 범수의 앞으로 나가 사죄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그대의 죄가 세 가지나 되지만 살려주는 것은 나에게 제포 한 벌을 주는 데에 친구의 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史記 卷七十九 范睢傳》
♣ 장니[障泥]장니는 말[馬]의 배를 덮어 흙이 튀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도구이다.
♣ 장다농[張茶農]장다농은 청 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장심(張深). 자는 숙연(叔淵)이고 별호는 낭객(浪客)임.
♣ 장단아미금곡춘[腸斷蛾眉金谷春]아미(蛾眉)는 미인을 말한다. 진(晋)나라의 큰 부호(富豪)인 석숭(石崇)이 금곡(金谷)에 별장을 짓고 기첩(妓妾) 녹주(綠珠)를 데리고 향락(享樂)하였다. 조왕(趙王) 윤(倫)이 반역(叛逆)하여 정권을 잡자 사람을 보내어 녹주를 달라고 청하였으나, 석숭이 거절하므로 석숭을 잡아가니 녹주가 누(樓)에서 떨어져 죽었다.
♣ 장대[章臺]대(臺)이름. 이문록(異聞錄)에, “韓翃將妓柳氏歸置都下 三歲不迓寄以詩曰 章臺柳章臺柳 昔日靑靑今在否”라고 보임.
♣ 장대[章臺]장대는 한(漢)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 이름이다.
♣ 장대궁[章臺宮]진(秦) 나라 함양(咸陽)에 있던 궁전 이름이다.
♣ 장도가측[葬陶家側]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서도 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 한 소원.
♣ 장동객[墻東客]시정(市井)에 파묻혀 숨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후한(後漢) 왕군공(王君公)이 역(易)에 정통하여 낭관(郞官)이 되었다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부러 관비(官婢)와 사통(私通)하여 면직된 뒤, 짐짓 미친 척하면서 소를 파는 거간꾼이 되어 저잣거리에 숨어 살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피세장동왕군공(避世墻東王君公)’이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逢萌》
♣ 장동복[牆東伏]은거하다. 담장 동쪽이란 곧 성(城)의 담장 동쪽을 가리킨 것으로, 송(宋) 나라 말기의 학자 육문규(陸文圭)가 송 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성 동쪽에 은거하였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일러 ‘장동 선생(墻東先生)’이라 칭한 데서 온 말이다.
♣ 장동피세[墻東避世]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정(市井)에서 은자(隱者)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왕군공(王君公)이 난리 통에도 시내를 떠나지 않고 소를 매매하는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숨어살자, 사람들이 “避世牆東王君公”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逸民傳 逢萌》
♣ 장두백전[杖頭百錢]진(晉) 나라 때 완수(阮脩)가 외출할 때면 언제나 지팡이 끝에다 백 전씩을 걸고 나가서 주점(酒店)에 이르러 혼자 즐기며 마셨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장두유사공방신[杖頭唯事孔方神]지팡이에 돈을 걸고 다닌다는 뜻으로, 술값을 말한다. 공방신은 전신(錢神)으로, 돈을 해학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완수(阮脩)가 항상 지팡이 끝에다가 돈 백전(百錢)을 걸고 걸어다니다가 술집이 보이면 그 돈으로 혼자서 술을 마셔 취하였다. 《晉書 卷49 阮脩列傳》
♣ 장두전[杖頭錢]장두백전(杖頭百錢)의 준말로, 지팡이에 걸린 돈이란 뜻으로, 술값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완수(阮脩)가 항상 지팡이 끝에다가 돈 백전(百錢)을 걸고 다니다가 술집이 보이면 그 돈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취하였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阮脩》
♣ 장두체[藏頭體]일부러 주어(主語)를 생략하고 짓는 문체를 말한다.
♣ 장득아손유로분[長得兒孫有老盆]두보(杜甫)의 시(詩)에, “전가(田家)의 오래된 와분(瓦盆)을 웃지 말라. 술을 담기 시작한 뒤 아손(兒孫)들을 길러 냈네[莫笑田家老瓦盆 自從盛酒長兒孫].”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도기(陶器)로 된 술동이가 손자를 길러 내도록 오래 되었다는 뜻이 여기서는 아마 시경(詩經)에 나온, “딸을 낳았을 때에 기와를 희롱한다[弄瓦].”는 것을 인용한 듯하다.
♣ 장락[長樂]한(漢)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처하던 궁전 이름이다. 한 혜제(漢惠帝) 때부터 이후로는 항상 모후(母后)를 장락궁(長樂宮)에 모시었다.
♣ 장락궁[長樂宮]한(漢) 나라 때 항상 모후(母后)를 장락궁에 모시었으므로, 전하여 모후가 거처하는 궁전을 말한다.
♣ 장락현[將樂縣]현 이름.
♣ 장량[張良]한(漢) 나라의 개국공신으로, 그의 선대(先代)는 한(韓) 나라의 다섯 왕에 걸쳐 재상이 되었다. 한 나라가 망한 뒤에 장량은 가재(家財)를 털어 복수를 꾀하다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마침내 진 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이제 세 치 혀로 제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으니, 포의(布衣)의 선비로서는 극치라 나의 분수에 족하다. 원컨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한다.” 하고는, 신선이 되고자 벽곡(辟穀)을 하였다 한다. 《漢書 張陳王周傳》
♣ 장려향[瘴癘鄕]기후가 좋지 않아 장기(瘴氣)가 많은 고장이라는 뜻. 여기는 안남국(安南國)을 말한다.
♣ 장려화[張麗華]남조(南朝) 진 후주(陳後主)의 비(妃). 임금의 총애를 입어 임금의 무릎에 늘 안겨 정사를 결단했으며, 국정(國政)을 문란하게 하였다. 수군(隋軍)이 입성(入城)하자 후주(後主)와 함께 숨었다가 수군에게 참살되었다.
♣ 장로[張老]장로(張老)는 중국 어느 필기소설(筆記小說)에 나오는 선인(仙人)인데 처음에는 홀아비로 채소를 심어 팔고 있었다. 하루는 중매하는 노파를 보고, “건너 마을 아무 집 처녀에게 중매를 하여 주오.” 하니, 노파가 놀래며 “그 집 귀한 딸을 왜 채소장수하는 가난한 늙은이에게 주겠소.” 하고 거절하니, 장로는 “한번 말이나 해 보시오.”라고 굳이 간청하였다. 노파가 그 집에 가서, “우스운 일이 있습니다. 채소 장수하는 장로가 댁의 딸에게 중매하여 달라합니다.” 하였다. 주인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그러면 내일이라도 황금(黃金) 얼마를 예물로 가져 오라.” 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늙은이가 황금이 없을 줄 알고 거절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다음날 장로는 황금을 요구하는 수량대로 가져 왔다. 주인도 어이가 없고 그 처녀도 그리로 시집가기를 원하므로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장로는 장가든 지 며칠 뒤에 처를 우차(牛車)에다 싣고 어딘지 가버렸다. 몇 해 후에 그 집 종 곤륜노(崑崙奴)가 왕옥산(王屋山) 천단(天壇) 남쪽에서 만났는데, 장로는 신선(神仙)이요, 그의 아내도 신선이 되어 인간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장뢰약계[張耒藥戒]장뇌의 약계. 장뇌는 송(宋) 나라 회음(淮陰) 사람으로 자는 문잠(文潛). 약계의 내용은 대략 복약(服藥)을 경계한 것이나 본 의미는 치국 수신(治國修身)의 요법(要法)을 이른 것임.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도 실려 있음.
♣ 장료[張遼]삼국 시대 위(魏) 나라 장수로 문제(文帝; 曹丕) 때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짐. 《三國志 張遼傳》
♣ 장루[粧樓]곱게 단장한 누각으로, 부인의 거실을 뜻한다.
♣ 장륙[藏六]거북의 이칭(異稱)이다. 거북이 머리, 꼬리, 네 발 등 여섯 부분을 거북껍질 속에 숨기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며, 전하여 선비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시골에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 장륙[丈六]장륙은 한 길 여섯 자, 곧 16척.
♣ 장륙귀[藏六龜]4족(足)과 머리, 꼬리를 숨기는 거북이처럼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6식(識)을 단속하는 불교의 수행자를 뜻하는데, 보통 속세를 떠나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雜阿合經 43》
♣ 장륙신[丈六身]불상(佛像)을 이름. 보통 사람의 키가 8척이므로, 부처를 존경하는 뜻에서 보통 사람의 키의 배가 되는 1장 6척으로 불상을 주조한 데서 온 말이다.
♣ 장릉[長陵]파주(坡州) 교하(交河)에 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으로, 뒤에 인조(仁祖)의 능 역시 이곳에 자리하였다. 인열왕후는 한준겸의 딸이다.
♣ 장릉[長陵]한 고조(漢高祖)의 무덤을 말한다.
♣ 장리[長離]남방(南方)의 주조(朱鳥). 봉황새.
♣ 장리[長吏]현성(縣城)의 높은 관리.
♣ 장리[將離]작약의 별명임. 고금주(古今注)에 “將離相別 贈之以芍藥"이라 하였음.
♣ 장림[張林]당(唐) 나라 때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낸 장열(張說)을 가리킨다. 뒤에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은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조정의 크다는 술작(術作)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비문(碑文)에 더욱 뛰어났다 한다. 《唐書 卷一百二十五》
♣ 장림륵일비[張林勒一碑]장 한림은 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로 일찍이 한림학사를 지낸 장열(張說)을 가리키는데, 장열은 특히 비문(碑文)을 짓는 데에 뛰어났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唐書 卷一百二十五》
♣ 장맥분흥[張脈憤興]사람이 격분하거나 흥분하면 혈맥의 펼쳐 움직임은 강한 모습을 띄게 되지만, 그 속은 마르게 됨을 말한다.
♣ 장면[墻面]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ㆍ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선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은 앞이 막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말인데, 학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말을 인용한다.
♣ 장명등[長明燈]부처 앞에 있는 등불로, 꺼지지 않고 언제나 타오르기 때문에 장명등(長明燈)이라 한다.
♣ 장명루[長命縷]오월 오일 단오절에 액을 쫓고 장수를 비는 뜻으로 팔에 감던 오색실. 명실[命縷]
♣ 장명분옥[長鳴噴玉]말의 웅맹(雄猛)한 기세를 뜻하는 말이다. 주옥은 말이 입으로 뿜어내는 침을 가리킨다.
♣ 장몽[掌夢]꿈풀이를 맡은 관리이다.
♣ 장묘식[場苗食]친구가 찾아온 것을 반갑게 여겨 한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한 흰 망아지가 내 채마밭 곡식 먹었다 핑계 대고 발과 가슴을 얽어 놓고서 이 아침을 길게 늘이어 귀한 우리 이 손님을 더 놀다 가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 한 데서 온 말이다.
♣ 장무선[張茂先]이름은 화(華). 진 혜제(晉惠帝) 때 탁지 상서(度支尙書)를 지냈고, 광무후(廣武侯)에 봉해짐. 박학(博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초료부(鷦鷯賦)를 지었음.
♣ 장문부[長門賦]악부(樂府) 가곡 이름. 한(漢)의 무제(武帝) 때 진황후(陳皇后)가 제의 노여움을 사 장문궁(長門宮)에서 별거하게 되었는데, 이때 황후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문장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황금 1백 근을 내리면서 자기의 억울한 심사를 문장으로 표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상여가 쓴 것이 바로 이 장문부이다. 황후는 그 일로 하여 다시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樂府解題》
♣ 장문창[張文昌]문창은 당(唐) 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자(字)이다. 두보(杜甫)의 시집을 불태워 그 가루를 마신 일화가 유명한데, 특히 고체시(古體詩)와 악부(樂府)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장물[長物]장물(長物)은 두 개 이상의 여유 있는 물건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공(王恭)이 숙부인 왕침(王忱)의 요청을 받고 단 하나밖에 없는 돗자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침이 미안하게 생각하자, “숙부께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저는 원래 장물(長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가 유명하다.《世說新語 德行》 소식(蘇軾)의 시에 “장물을 쌓아 두는 것은 천진한 본심을 해치는 일, 늙어 시골에 돌아갈 건 오직 이 한 몸뚱이뿐.[平生長物擾天眞 老去歸田只此身]”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5 送竹 與謝秀才》
♣ 장미로[薔薇露]장미꽃으로 만든 향수. 유종원(柳宗元)이, 한유(韓愈)가 보내온 시를 읽으려면서 우선 장미꽃 향수로 손을 씻고나서 펴보았다고 한다. 《雲仙雜記》
♣ 장미산[薔薇山]충주(忠州) 서쪽 28리 지점에 있는 산.
♣ 장박망[張博望]한 무제(漢武帝) 때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황제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배를 타고[乘槎]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그를 선사객(仙槎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장발[壯髮]이마에까지 내려와서 머리털이 난 것으로 제왕의 기상을 갖춘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원제(元帝)가 장발이라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두건으로 감추었던 고사가 있다. 《輟耕錄 巾幘考》
♣ 장보[章甫]공자(孔子)가 썼다는 갓 이름.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송(宋) 나라 어떤 사람이 장보관을 팔기 위해 월(越) 나라에 갔으나 월 나라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갓을 쓰지 않았던 까닭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였다.
♣ 장보관[章甫冠]상(商) 나라 때 쓰던 모자로, 흔히 선비들이 쓰는 관을 일컫는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송(宋) 나라 사람 중에 장보관을 사 가지고 월(越) 나라로 팔러 간 사람이 있었는데, 월 나라 사람들은 모두 단발(斷髮)을 하고 문신(文身)을 새겼으므로 소용이 없었다.” 하였다.
♣ 장본[獐本]술그릇의 하나로 모양이 도고(鼗鼓)와 같이 생겼는데 배[腹]에 입이 있다.
♣ 장봉[藏鋒]날카로운 칼끝을 감추다.
♣ 장봉의마[莊蓬倚麻]쑥대가 삼 속에서 자라면 자연히 곧아진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 속에서 자라면 자연히 곧아지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똑같이 검어진다.”고 하였다.
♣ 장부[醬瓿]쓸모없는 저서(著書)는 장독이나 덮는다는 말로, 곧 서투르게 지은 시문(詩文)을 버린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 찬(贊)에 “후파(侯芭)가 늘 웅에게 태을법언(太乙法言)을 배웠다. 유흠(劉欽)이 그것을 보고 웅에게 ‘부질없이 괴로울 뿐이다.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장독이나 덮으려 할 것이다.’ 했다.”는 말이 있다.
♣ 장부계[壯夫戒]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오자(吾子)에, “동자들 잔재주 부리는 짓을 장부(壯夫)라면 하지 않는다.” 하였음.
♣ 장부일언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장부의 한 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 장비[將非]장불(將不)ㆍ장무(將無) 등과 같은 용법으로 ‘혹시[거의, 어쩌면, 아무래도]~아닌 듯 하다’의 뜻.
♣ 장비뇌만[腸肥腦滿]시상(詩想)이 한창 활발한 젊은 때를 말함.
♣ 장빈[漳濱]와병(臥病)을 뜻하는 시어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유정(劉楨)이 “내가 고질병에 한번 걸려들어, 맑은 장수 물가에 몸을 숨겼노라.[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표현을 쓴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文選 卷23 贈五官中郞將》
♣ 장빈봉수제[漳濱逢水帝]장빈은 장수(漳水)의 물가로, 병들어 누워 있는 곳을 말한다. 수제(水帝)는 물의 신인 전욱(顓頊)인데, 그의 아들 둘이 죽어서 역귀(疫鬼)가 되어, 하나는 강수(江水)에 살면서 학귀(虐鬼)가 되었고, 하나는 약수(若水)에 살면서 망량귀(魍魎鬼)가 되었다고 한다.
♣ 장빈시[漳濱詩]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누워 있는 병자(病者)의 심회를 읊은시를 말한다.
♣ 장빈질[漳濱疾]장수는 중국 복건성(福建省)에서 발원하는 강이름인데,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유정(劉楨)이 한때 병이 들어 그곳에 물러가 살았다고 한다. 그의 증오관중랑장시(贈五官中郞將詩)에 “나는야 해가 묵은 고질에 걸려, 장수 가에 물러가 살았었다네[余嬰沈痼疾 竄身淸濱].” 하였다. 《文選 卷二十三 贈答》
♣ 장사[長沙]무장현(茂長縣)의 고호이다.
♣ 장사[張槎]사신이 탄 배를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장건(張騫)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 장사[長史]장사는 진(晉) 나라 때 대장군 왕돈(王敦)의 주부(主簿)를 지냈던 하충(何充)을 가리킨다. ☞ 유담경양(劉惔傾釀)
♣ 장사[長沙]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쫓겨난 가생(賈生) 즉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賈誼)가 장사(長沙)에 좌천되어 갔으므로 귀양살이를 장사라 한다.
♣ 장사기불평[壯士氣不平]두보(杜甫)의 시에 “장사들은 피눈물로 서로들 쳐다보고, 충신은 울분에 마음 편치 못했어라.[壯士血相視 忠臣氣不平]”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八哀詩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 장사비습[長沙卑濕]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던 고사에 연유하여, 유배되거나 좌천된 지역을 뜻하게 되었다.
♣ 장사일세천[長沙一歲遷]장사는 한 나라 때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제자 백가를 통달하여 20여 세 때 박사(博士)로 있으면서 문제(文帝)가 조령(詔令)을 내려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마다 다른 노선생들이 엄두도 못내는 것을 빠짐없이 대답하자, 문제가 그 재주를 인정하여 1년 사이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까지 승진하였다. 《史記 卷八十四 賈誼傳》
♣ 장사재자적상류[長沙才子吊湘纍]한(漢) 나라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였던 가의(賈誼)가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 상수(湘水)를 건널 때 백여 년 전 멱라(汨羅)에 빠져 죽은 굴원을 애도하면서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은 것을 말한다.
♣ 장사태식[長沙太息]한 문제(漢文帝) 때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던 가의(賈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불길한 새라고 여겨지던 올빼미가 방 안에 날아든 것을 보고 비탄에 잠겨 지은 그의 ‘복조부(鵩鳥賦)’가 유명하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장사투가의[長沙投賈誼]한(漢) 나라 때 가의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어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던 것을 가리킨다.
♣ 장산[章山]경산(慶山)의 고호(古號)이다.
♣ 장삼영[張三影]송(宋)의 장선(張先)을 말함. 그가 읊은 시구 중에, ‘영(影)’ 자가 든 시구 셋이 걸작이라 하여 사람들이 그를 삼영(三影)이라고 지목하였음. 《通山淸話》
♣ 장삼이사[張三李四]장씨(張氏) 의 삼남(三男) 와 이씨(李氏) 의 사남(四男) 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을 가리킴
♣ 장상[將相]고려 시대 장군(將軍) 이하 별장(別將) 이상의 군관(軍官)을 일컫던 이름. 중랑장(中郞將), 낭장(郎將)이 포함되었다.
♣ 장상[張相]당(唐)의 장열(張說)을 말한다. 일찍이 요숭(姚崇)과의 혐의가 있어 상주 자사(相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 장상군[長桑君]전국(戰國) 시대에 신인(神人)인 장상군이 편작(扁鵲)에게 약(藥)을 주면서 “이 약을 이슬에 타서 30일 동안 복용하면 귀물(鬼物)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므로 편작이 그의 말대로 그 약을 복용한 결과, 과연 눈이 매우 밝아져서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까지 환히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五, 扁鵲 倉公傳》
♣ 장상동심[將相同心]한 고조(漢高祖)가 죽자 여씨(呂氏)가 왕이 되려 하므로 육가(陸賈)가 승상(丞相) 진평(陳平)에게 “장상이 조화가 되어야 하오.” 하니, 진평이 그의 말대로 태위(太尉) 주발(周勃) 등과 여씨의 세력을 제거한 것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七 酈生陸賈列傳》
♣ 장상사[長相思]악부(樂府)의 편명인데, 이 곡은 길이 서로 생각하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다. 36자 또는 1백 자 또는 103자로 되어 있음. 《詞律 卷二》
♣ 장상인[張相印]개원(開元) 11년에 장열(張說)이 상주(上奏)하여 정사당(政事堂)을 고쳐 중서문하(中書門下)라 불렀고, 정사당의 인(印)도 중서문하의 인으로 고쳤는데, 이는 중서문하의 관인(官印)을 가리킨 말이다.
♣ 장상인[張相印]장상(張相)은 전국 때 진(秦) 장의(張儀)인데, 그가 소진(蘇秦)의 합종(合從)을 깨뜨린 연횡(連衡)의 공으로 상(相)이 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 서수(犀首)가 입상(入相)하여 인(印)을 찼다.
♣ 장상주[掌上珠]손에 쥔 구슬이라는 뜻으로, 전하여 사랑하는 자식을 가리킨 말이다.
♣ 장생[鵬鷃]대붕(大鵬)과 척안(斥鷃). 대붕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새, 척안은 메추라기와 같은 작은 새로서, 각각 대소(大小)를 나타낸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첫머리에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 장생[莊生]장생은 장자(莊子), 장주(莊周)이다.
♣ 장생곤[莊生鯤]장생은 전국 시대 장주(莊周)를 가리킨다. 그가 지은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에 곤어라고 하는 큰 고기가 있는데,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다시 붕새[鵬]로 화하여 9만 리 창공을 난다.” 하여 우언(寓言)으로 뜻이 높은 자신을 비유하였다.
♣ 장생기오인간세[莊生寄傲人間世]장생은 장주(莊周)를 이르는데, 그가 그의 저서인 장자(莊子)에서 우언(寓言)과 황당무계한 말들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장생식미[張生識微]장생은 진(晉) 나라 때의 장한(張翰)을 가리킴. 장한은 일찍이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이 되었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남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蓴羹]과 농어회[鱸魚膾]를 생각하여 말하기를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밖에서 벼슬하면서 명예와 작위를 구하겠는가.” 하고, 즉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二》
♣ 장생월음[莊生越吟]고향을 그리워함을 뜻한다. 장생(莊生)은 월(越) 나라 장석(莊舃)을 가리키는데, 장석이 초(楚) 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이 들었을 때, 초왕(楚王)이 사람을 시켜 그가 고향을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게 한 결과, 그는 병중에도 과연 고향을 생각하여 월 나라 노래를 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陳軫傳》
♣ 장생자감위저산[莊生自甘爲樗散]볼품 없고 쓸모 없는 물건이 생명이 길다는 장주(莊周)의 논리.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들이 가죽나무라고 하는 큰 나무가 있는데, 그 몸통이 울퉁불퉁 옹이가 많아 목재로 쓰기에 맞지 않고 가지들도 오글오글하여 쓸모가 없으므로 길가에 있어도 장인(匠人)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오⋯⋯" 하자, 장자가 답하기를, “⋯⋯그 나무를 무하유(無何有)의 고장 광막한 들판에다 심어두고 그 곁에서 거닐고 그 밑에서 눕고 하면 도끼에 의하여 중도에 잘려지지도 않을 것이며 해치는 물건도 없을 것 아닌가⋯⋯" 하였음. 《莊子 逍遙遊》
♣ 장생자시희지리[莊生自是喜支離]장생(莊生)은 장자(莊子)이다. 지리소(支離疏)는 꼽추와 같은 불구자로서 세상에서 치지도외 되어 해를 받지 않고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자를 말한다. 《莊子 人間世》
♣ 장생전[長生殿]당나라 때에 장생전에 공신의 화상을 그렸다.
♣ 장생제물론[莊生齊物論]장생(莊生)은 춘추 시대 송(宋) 나라 장주(莊周)를 말하고, 제물론은 장주의 저서인 남화경(南華經) 제2편(第二篇)의 이름이다.
♣ 장생춘[莊生椿]장생은 곧 장주(莊周)를 이르는데, 그의 저서인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 시대에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어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장수를 비유한 말이다.
♣ 장생해수[張生解綬]진(晉) 나라 장한(張翰)을 말한다. 동조연(東曹掾)으로 벼슬살이를 하던 중,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오중(吳中)의 순채(蓴菜)와 농어회가 생각나서 곧바로 인끈을 풀고 고향으로 돌아간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 장생허주[莊生虛舟]장자(莊子) 산목(山木) 편에, “방주(方舟)를 하여 하(河)를 건널 적에 빈 배가 와서 이쪽 배를 부딪치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성내지 아니하니, 사람이 능히 허기(虛己) 하여 세상에 노닌다면, 그 누가 해치려고 하겠느냐?”라고 하였음.
♣ 장서[葬書]장지(葬地)에 관한 책으로, 곽박(郭璞)의 저(著)이다.
♣ 장서선[掌書仙]문재(文才)가 있는 기녀(妓女)를 비유한 말. 상원은 선녀(仙女)인 상원부인(上元夫人)을 가리키고, 문서 맡은 신선이란, 옛날 장안(長安)의 한 기녀가 문필(文筆)이 관중(關中)의 제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문서 맡은 신선[掌書仙]’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인데, 임생(任生)은 그에게 시를 지어 부치기를 “옥황전 위에서 문서를 맡던 신선이, 한번 세속 마음에 물들어 구천을 내려왔네[玉皇殿上掌書仙 一染塵心下九天]”라고 했다 한다.
♣ 장석[丈席]스승의 강석(講席)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스승과 제자 자리 사이에 한 길의 여지를 둔다.[席間函丈]" 하였다.
♣ 장석[匠石]장(匠)은 장인(匠人)을 말하며, 석(石)은 옛날 유명한 장인의 이름이므로 합하여 훌륭한 장인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영(郢) 땅 사람이 백토가루를 코 끝에 매미 날개처럼 얇게 바르고는 장석을 시켜 깎아내게 하였더니, 장석은 자귀를 돌리어 바람을 일으켜서 코를 상하지 않게 백토를 모두 깎아냈다.” 하였다.
♣ 장석[匠石]초(楚)나라의 유명한 목공(木工)
♣ 장석병[莊舃病]전국 시대 월(越) 나라 사람으로 초(楚) 나라에 가서 벼슬하다가 병이 나서는 고국 생각을 하였다 한다.
♣ 장석사향련[莊舃思鄕戀]장석(莊舃)은 월(越) 나라 사람으로 초(楚) 나라에 와서 현달하였다. 초왕(楚王)이 “장석은 월 나라 사람인데, 지금도 월 나라를 그리워하는가?”하니, 중사(中使)가 아뢰기를, “대개 사람이 병이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장석이 월 나라를 그리워한다면 월 나라의 소리로 신음할 것이고, 월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초 나라의 소리로 신음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초왕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니, 장석이 과연 월 나라의 소리로 신음하였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 장석음[莊舃吟]고향을 생각하고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슬픈 노래를 말한다. 전국 시대 때 월(越) 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 나라에서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를 누리게 되었으나,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 나라의 노래를 불러서 고향을 그리는 정을 부쳤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 장성[長城]사물(事物)의 가장 의뢰할 수 있는 것을 이름. 송(宋) 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자처하였음.
♣ 장성[長星]혜성(彗星)의 일종으로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해를 중심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운행하는 별로, 예로부터 병란(兵亂)을 예고하는 요성(妖星)이라 하여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종류에 따라 패(孛)ㆍ혜(彗)ㆍ참창(欃槍)ㆍ치우기(蚩尤旗)ㆍ순시(旬始)ㆍ왕시(枉矢) 등으로 나뉘었다. 《漢書 文帝紀 注ㆍ說苑 辨物》
♣ 장성계운[長星繼隕]소열(昭烈)이 죽은 뒤에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를 도와 중원(中原)을 수복(收復)하려고 위(魏) 나라를 치다가 오장원(五丈原)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50여 세로 죽었는데, 그 때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얼마 후에 촉한(蜀漢)은 망하고 말았다.
♣ 장성괴[長城壞]국가의 동량(棟樑)인 인물이 사망했음을 말한다. 송(宋) 나라 명장 단도제(檀道濟)는 죄 없이 형을 받게 되자, 노기가 충천하여 “마침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였다. 《南史 檀道濟傳》
♣ 장성만리[長城萬里]송나라 명장(名將) 단도제(檀道濟)가 참소로 죽임을 당하면서, “너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구나.” 하였다.
♣ 장성태백[長星太白]장성은 살별이고 태백성은 샛별인데, 모두 병란(兵亂)을 상징하는 별이다.
♣ 장소[張昭]삼국 시대(三國時代) 오(吳) 나라 사람으로 손권(孫權)의 밑에서 보오장군(輔吳將軍) 등을 지냈는데, 일찍이 손권이 자기의 간언(諫言)을 들어주지 않는 데에 분심을 품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자, 손권 또한 그가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그의 문(門)을 흙으로 막았더니, 그는 또 그 안에다 흙더미를 더 쌓았다는 고사가 있다. 즉 그의 성격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웠음을 의미한 듯하다.
♣ 장소[張所]송(宋) 나라 사람. 고종(高宗) 때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의 간사함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강주(江州)로 귀양갔다. 그 뒤 승상 이강(李綱)의 천거로 하북초무사(河北招撫使)가 되자, 장소는 사방의 호걸들을 모아 상실한 국토 수복의 계획을 하였으나, 이강이 승상에서 파직되자 그도 파면되어 영남(嶺南)에 안치,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음.
♣ 장소[莊騷]장자(莊子)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 장소[長嘯]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일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孫登)을 만나 신기(神氣)를 수양하는 방법 등을 물었으나 손등이 모두 응답하지 않자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며 물러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阮籍傳》
♣ 장송탁여라[長松托女蘿]형제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잔치하는 것을 비유한 말. 소나무에 여라(女蘿)가 타고 오른다는 것은 곧 형제 친척이 서로 의지함을 비유한 것으로, 형제 친척이 모여 잔치한 것을 노래한 시경(詩經) 소아(小雅) 기변(頍弁)에 “우뚝한 관이여 그것이 무엇인고 네 술이 이미 맛 좋고 네 안주가 아름다우니 어찌 다른 사람이리오 형제이고 다른 사람 아니로다 조와 여라가 송백에 타고 오르도다[有頍者弁 實維伊何 爾酒旣旨 爾殽旣嘉 豈伊異人 兄弟匪他 蔦與女蘿 施于松柏]” 한 데서 온 말이다.
♣ 장송풍일[長松風日]소식이 일찍이 여산 백학관(白鶴觀)에서 노닐 때 관 안의 사람들은 다 문을 걸고 잠을 자는데 바둑 두는 소리가 고송 유수(古松流水)의 사이에서 들려오므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五老峯前 白鶴遺址 長松蔭庭 風日淸美"라 하였음.
♣ 장수[張䇓]원(元)의 도강(導江)사람. 왕백(王柏)에게서 배우고 종유자가 매우 많아 도강 선생(導江先生)이라고 불렀다. 그의 저서는 논리가 정확하고 전거가 분명했으며 논의가 종횡무진하여 오징(吳澄)은 그를 일러,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축(尸祝)이라고 하였음. 《元史 卷一百八十九》
♣ 장수[莊叟]장수는 곧 장자(莊子)를 가리킨 말로, 장자의 저서에는 특히 인간의 생사(生死)에 관한 말이 많이 하였다.
♣ 장수[漳水]장수는 물 이름으로, 삼국(三國) 시대 유정(劉楨)이 고질이 있어 이곳에 가서 요양을 했다 한다.
♣ 장수[藏脩]조용한 곳에서 포부를 감추고, 공부를 닦는다는 말인데 예기(禮記)에서 나온 말이다.
♣ 장수거지어[莊叟詎知魚]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에서 고기가 노는 것을 보다가 말하기를, “피라미[鯈魚]가 조용히 나와 노니 이것은 고기의 낙(樂)이로다.” 하니,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가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낙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는,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고기의 낙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어찌 아는가.” 하였다. 장자(莊子)
♣ 장수동[張瘦銅]수동은 장훈(張塤)의 호인데 청 나라 오현(吳縣) 사람으로 자는 상언(商言)임. 건륭 때 진사로 벼슬은 내각중서(內閣中書)임. 저술로는 죽엽암집(竹葉庵集)이 있음.
♣ 장수마[莊叟馬]장자(莊子)에, “나의 엉덩이는 수레바퀴로 변화하고 나의 정신[神]은 말[馬]로 변화한다.” 하였다.
♣ 장수선무 다전선고[長袖善舞多錢善賈]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
♣ 장수선무[長袖善舞]긴 소매는 춤을 잘 춘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하다.
♣ 장수양[張睢陽]당(唐) 나라 때 장순(張巡)을 가리킨다. 장순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면서 안녹산(安祿山)의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장수유[莊叟柳]장수는 곧 장주(莊周)를 말하는데,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이 혹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 장수유식[藏修游息]장수는 항상 게을리함이 없이 학문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하고, 유식은 정과(正課) 이외의 휴식 시간에도 항상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禮記 樂記》
♣ 장수충비[莊叟蟲臂]장수는 곧 장주(莊周)를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자래(子來)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자려(子犁)가 문병가서 자래에게 말하기를 ‘조화옹(造化翁)은 자네를 또 무엇으로 만들려는고? 자네를 장차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가, 아니면 벌레의 팔로 만들려는가?’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만물의 타고난 형체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모두 제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 장순[張巡]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 張巡》
♣ 장순원[張順院]중종때 장순손(張順孫)이 판서(判書)의 지위에 있으면서 광주(廣州)에 외람되이 원을 짓고 ‘신원(新院)’이라 이름하였는데, 지나는 행인마다 장순손의 위인을 비루하게 여겨 신원을 그의 이름에 빗대서 장순원이라고 기롱해 부른 말이다.
♣ 장신[臟神]오장신(五臟神)을 말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심(心), 폐(肺), 간(肝), 신(腎), 비(脾)의 오장을 각각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장신초[長信草]한 성제(漢成帝)의 궁녀 반첩여(班婕妤)가 조비연(趙飛燕) 자매에게 미움을 받아 장신궁(長信宮)에 물러가 있던 고사를 읊은 시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長信宮中草 年年愁處生 時侵珠履跡 不使玉階行”
♣ 장실[丈室]유마경(維摩經)에 있는 말인데, 유마거사(維摩居士)가 거처하는 방이 사방(四方)으로 한발[一丈]이므로, 그 방을 방장(方丈), 또는 장실(丈室)이라 한다. 뒤에 고승(高僧)의 거처하는 방을 그렇게 부른다.
♣ 장실망언시법문[丈室忘言是法門]유마 거사가 대승 보살들 앞에서 시현(示現)한 중도(中道)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말한다. 유마경(維摩經)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無有文字語言 是眞不二法門也”라 하였다.
♣ 장실봉산[藏室蓬山]모두 장서실을 가리킴. 후한 때 장서실인 동관(東觀)을 가리켜 노씨장실(老氏藏室)ㆍ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인데, 즉 노씨장실은 옛날 노자(老子)가 장실주하사(藏室柱下史)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가봉래산은 곧 봉래산의 선부(仙府)에는 유경 비록(幽經祕錄)이 다 쟁여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後漢書 卷二十三》
♣ 장심[漳潯]유정의 시에 “내가 고질병에 모질게 걸려들어, 맑은 장수 물가에 숨어서 살았노라.[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구절이 있는데, 문인의 병을 일컬을 때 흔히 ‘공간병(公幹病)’이 거론된다.
♣ 장심문[將心問]달마조사(達摩祖師)가 소실산(少室山)에 있을 때에 혜가(惠可)가 와서, “마음이 불안하니 편안케 하여 주소서.” 하고 물은즉, 달마(達摩)는,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를 안심시켜주마.[將心來與汝安]”하였다.
♣ 장씨지족[張氏知足]장량(張良)이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유후(留侯)로 봉해졌으나, 만년에 즐겨 신선 벽곡(辟穀)의 술을 배웠다.
♣ 장악[莊嶽]춘추 시대 제(齊) 나라 수도(首都)의 이름으로, 전하여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번화한 곳을 이름.
♣ 장안교환[長安巧宦]벼슬살이의 처세에 교묘하여 잘 승진되는 것이다.
♣ 장안미[長安米]당(唐)의 백거이(白居易)가 약관 시절에 고황(顧況)이라는 이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더니 그는 백거이의 성명을 한참 보더니만 하는 말이, “장안에는 쌀이 귀해서 살기가 매우 쉽지 않을 것이네.[長安米貴 居大不易]" 하였음. 《全唐詩話》
♣ 장안미[長安米]장안은 당 나라 때의 서울로, 우리나라의 한양을 뜻한다. 곧 한양에서 벼슬살이만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 장안살불오[莊雁還宜殺不嗚]장안은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나오는 기러기. 장자가 친구의 집을 찾으니 친구는 기뻐하여 종에게 기르는 기러기를 잡아 대접하라 하였다. 종은 ‘하나는 잘 울고 하나는 잘 울지 못하는데, 어떤 놈을 잡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 장안십일니[長安十日泥]한번 비가 오기만 하면 열흘 동안 진흙탕이 되는 서울 거리를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4 狂歌行贈四兄》
♣ 장안와설인[長安臥雪人]후한(後漢)의 원안(袁安)을 말한다. 원안이 곤궁했을 때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 한 길이나 쌓였었는데, 남들은 다 허기진 창자를 메우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였으나 원안은 홀로 그 눈속에 반듯이 누워 일어나지 않았음. 《後漢書 卷七十五》
♣ 장안총죽[長安叢竹]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처음 벼슬길에 올라 장안(長安)에 우거할 때 그 집에 있는 대숲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폐한 채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잘 손질한 다음 양죽기(養竹記)란 글을 지어 대나무를 현인에 비유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養竹記》
♣ 장안추우니막막[長安秋雨泥漠漠]두보(杜甫)의 시에 “장안의 가을비에 열흘이나 질퍽질퍽, 새벽 닭 울 때에 우리들 말 안장 얹었지요.[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4 狂歌行贈四兄》
♣ 장야[長夜]영원히 깜깜한 땅속 무덤을 뜻한다.
♣ 장야유천이운주[長夜幽泉已隕珠]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뜻함. 구슬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른 것으로, 부현(傅玄)의 단가행(短歌行)에 “전에는 그대가 나를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더니 무슨 뜻으로 하루아침에 나를 도랑에 버리는가[昔君視我 如掌中珠 何意一朝 棄我溝渠]”하였다.
♣ 장야지음[長夜之飮]날이 새어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논 채 계속하는 주연(酒宴)을 말한다.
♣ 장양[長楊]궁전(宮殿)의 이름, 본래 진(秦) 나라의 옛 궁전인데, 한(漢) 나라에서 수리하여 행행(行幸)할 때 사용하는 장소로 삼았다.
♣ 장양궁[長楊宮]장양궁은 본래 진(秦) 나라의 옛 궁궐이었는데, 한(漢) 나라가 중수(重修)하여 사용하였으며, 한 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이 궁에서 수렵을 많이 하였다. 한 나라 때 양웅(揚雄)은 일찍이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 장양궁의 사웅관(射熊館)에 가서 장양부(長楊賦)를 지어 임금을 풍간(諷諫)한 일이 있다.
♣ 장양부[長楊賦]성제(成帝)가 원연(元延) 2년 가을 백성들을 동원시켜 남산(南山)ㆍ포(褒)ㆍ사(斜)등 계곡과 홍농(弘農)ㆍ한중(漢中)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그물로 짐승을 사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로잡은 곰ㆍ멧돼지ㆍ표범ㆍ여우ㆍ사슴 등 각종 짐승을 행궁(行宮)인 장양궁의 석웅관(射熊館)에 운반하여 그것들을 울타리 안에 몰아넣고 호인(胡人)으로 하여금 맨손으로 때려잡도록 한 뒤에 그 광경을 구경하며 즐겼다. 양웅(揚雄)이 성제를 따라 석웅관에 왔다가 돌아가서 묵객경(墨客卿)과 한림주인(翰林主人)이란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문답체로 만들어진 글로, 천자를 풍간한 것이다. 《漢書 卷八十七下 揚雄傳》
♣ 장양헌부옹[長楊獻賦翁]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양부(長楊賦)라는 부를 지었다.
♣ 장어민[藏於民]인정(仁政)을 하는 임금은 재물을 국고(國庫)에 저장하여 두는 것보다 백성이 잘 사는 그것이 곧 나라의 재물을 백성에게 저장하여 둠이 된다는 것이다.
♣ 장열[張說]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장가이며 정치가.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연국공(燕國公)이 봉해졌음. 당시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과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 칭해졌으며, 조정의 큰 편찬 사업이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음. 저서에는 장열공집(張說公集)이 있음. 《新ㆍ舊唐書 張說傳》
♣ 장영[長纓]적을 사로잡아 묶는 긴 밧줄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남월왕(南越王)을 입조(入朝)하게 하기 위해 남월로 사신을 보낼 적에 종군(終軍)이 자청하기를 “바라건대 긴 끈을 주옵소서. 제가 반드시 남월왕을 묶어 궐하에 끌어오겠습니다.” 하였다. 《漢書 卷六十四 終軍傳》
♣ 장영불사공하대[莊靈不死公何代]제 경공이 우산(牛山)에서 놀다가 제 나라를 바라보며 “아름답도다 이 나라여, 울창한 태산(泰山)은 예부터 죽음이 없는데 나만 죽어서 여기를 떠나겠구나.” 하자, 곁에 있던 안자(晏子)가 비웃으며 “장공(莊公)ㆍ영공(靈公)이 죽지 않았다면 임금께서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인(不仁)입니다.” 하였다.
♣ 장영사계노추두[長纓思繫老酋頭]한(漢)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하면서 “긴 밧줄 하나만 주시면 남월왕을 꽁꽁 묶어 대궐 아래에 바치겠다.[願受長纓 必羈南越王而致之闕下]”고 장담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 終軍傳》
♣ 장영지[長纓志]장영은 긴 노끈이라는 뜻으로, 한(漢) 나라 때 종군(終軍)이 왕에게 자청하기를 “원컨대 저에게 긴 노끈을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제가 남월왕(南越王)의 목을 묶어서 대궐 아래 바치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자원하여 입대(入隊)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漢書 卷六十四 終軍傳》
♣ 장오[檣烏]배[船]를 말한다. 까마귀가 물길을 잘 안다 하여 배 돛대에 그려 붙이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 장오[檣烏]후풍(候風)의 용도로 쓰이는 새의 깃으로 만든 까마귀. 이것을 돛대 위에 장치하였으므로, 장오라 한다.
♣ 장옥[場屋]과거 시험장을 말한다.
♣ 장옹[莊翁]장옹은 장주(莊周)를 이른 말이다.
♣ 장왕[長往]멀리 가서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은사(隱士)들의 은거를 의미한다.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장왕했던 유인을 탄식한다.[或歎幽人長往]" 하였다.
♣ 장왕[張王]북망행을 지은 진(晉) 나라 장협(張協)과 당(唐) 나라 왕건(王建)을 말한다.
♣ 장외[墻外]담장 밖.
♣ 장요미[長腰米]몸통이 좁으면서 긴 쌀로, 질이 좋은 쌀을 가리킨다.
♣ 장요손사자[張曜孫四姊]장요손은 청 나라 양호(陽湖) 사람. 자는 중원(仲遠). 호는 부생(復生). 원문의 ‘四姊’는 ‘三姊’의 오(誤)인데, 녹괴서옥시고(綠槐書屋詩稿)가 있음. 서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육조체(六朝體)를 잘 썼음.
♣ 장용대[壯勇隊]함경도에서 공사천 중의 인원을 선발하여 변방 수비에 보낸 자들에게 이 명칭을 붙여 토병(土兵)들과 구분하였다.
♣ 장우[張禹]한(漢) 나라 성제(成帝) 때에 당시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하였는데 장우(張禹)는 감히 곧은 말을 못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였다. 주운(朱雲)이 그를 탄핵하다가 난간까지 꺾은 일이 있다.
♣ 장욱[張旭]당대의 서예가. 자는 백고(伯高)로 초서(草書)가 교묘했는데, 술을 좋아하여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장전(張顚)’이라고 불렸다. 《唐書 卷二百二》
♣ 장욱필[張旭筆]당 나라 때 장욱이 초서에 매우 뛰어나, 문종(文宗) 때에 이백(李白)의 가시(歌詩), 배민(裵旻)의 검무(劍舞)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는데, 당시에 장욱을 초성(草聖)이라고까지 하였으므로 이름이다. 《唐書 卷二百二 張旭傳》
♣ 장원백[壯元柏]성균관(成均館) 서쪽 뜰에 있던 잣나무. 과거(科擧)를 앞둔 어느날 세종(世宗)의 꿈에 한 마리의 용(龍)이 그 나무에 사려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끝에 궁노(宮奴)를 시켜 그 곳에 가보게 하였더니 어느 선비가 전대를 베개 삼아 잣나무 가지에다 발을 걸친 채 자고 있었는데 그 후 과거를 치르고 방(榜)을 부를 때 장원(壯元)을 한 최항(崔恒)의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었으므로 그때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불렀다.
♣ 장원수[張元帥]장만(張晩)을 가리킨다.
♣ 장원정[長源亭]고려 문종(文宗) 10년(1056)에 창건한 이궁(離宮). 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유정동(柳井洞) 영좌산(領座山) 남록(南麓)에 유지(遺址)가 있음. 고려 역대의 왕이 자주 그곳에 유행(遊幸)하였다.
♣ 장원홍[壯元紅]자말리(紫茉莉)의 이명(異名).
♣ 장월[杖鉞]큰 도끼를 짚음, 또는 큰 도끼를 가짐. 곧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것을 뜻하는 말.
♣ 장월회황도[杖鉞恢皇圖]황도(皇圖)는 제왕(帝王)이 통치하는 판도(版圖)이니, 곧 장군이 부월(鈇鉞)을 잡고 싸움터에 나가 국토를 넓힌 것을 말한다.
♣ 장위례[杖尉禮]매 때린 수고에 대해 위로하는 예. 공형(公兄) 즉 호장(戶長), 이방(吏房) 등이 수령에게 장(杖)을 맞으면 그 본청(本廳)에서 수령에게 대향(大饗)을 올렸는데 이를 장위례라 하였다.
♣ 장위위[張衛尉]한 고조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조우(趙禹)와 함께 율령을 제정했던 장탕(張湯)을 가리킨 듯하다. 위위(衛尉)는 진(秦) 나라 때 궁중의 수비를 담당하는 벼슬 이름인데, 한 나라 때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바꿨다가 도로 환원하였다. 장탕은 나중에 정위(廷衛)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옥사를 엄하게 다스리고 국가에서 염철(鹽鐵)을 전매하도록 건의하여 장사꾼의 이익 독점을 제한하는 등, 법을 올바르게 집행하였으나 결국 주매신(朱買臣) 등에게 몰려 자살하고 말았다.
♣ 장유[長孺]장유는 한(漢) 나라 때의 직신 급암(汲黯)의 자임. 한 무제(漢武帝) 때의 하내(河內)에 화재가 나서 천여 가호가 불탔으므로, 급암에게 그 곳을 시찰하도록 하였는데, 급암이 그 곳을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이번 길에 신(臣)이 하남(河南)을 지나다 보니, 빈민(貧民)들이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만여 가호가 혹은 부자(父子) 간에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신이 편의에 따라 부절(符節)을 가지고 하남의 관곡(官穀)을 풀어서 빈민들을 진구했으니, 조칙을 꾸민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무제가 그를 어질게 여겨 용서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
♣ 장유[長孺]한(漢)의 급암(汲黯). 장유는 그의 자(字)임. 성품이 우직 호협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황제도 그를 대하기 꺼려할 정도로 바른말을 잘했기 때문에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무제(武帝)는 그를 일러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하였음. 《漢書 卷五》
♣ 장유강엄만천해[長孺剛嚴曼倩諧]장유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신(直臣) 급암(汲黯)의 자인데, 그는 특히 성품이 강직하고 엄정하여 직간을 잘하기로 명성이 높았고, 만천(曼倩)은 역시 한 무제의 신하인 동방삭(東方朔)의 자인데, 그는 특히 해학과 풍자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史記 卷一百八, 一百二十六》
♣ 장유박회양[長孺薄淮陽]장유는 한(漢) 나라 때의 직신(直臣) 급암(汲黯)의 자인데, 임금이 급암에게 회양태수(淮陽太守)를 임명하자, 급암이 회양에 가기를 싫어하여 내직(內職)을 요청하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회양을 박하게 여기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
♣ 장유유서[長幼有序]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지켜야 할 순서가 있다
♣ 장유입한광대양[長孺入漢光大梁]장유(長孺)는 한(漢)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의 자(字)이다. 한 나라 경제(景帝)가 동모제(同母弟)인 양 효왕을 미워하자, 한안국이 사신으로 들어가서 경제의 마음을 풀어 주고 우애의 정을 돈독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8》
♣ 장유타여[長孺墮輿]장유(長孺)는 한(漢) 나라 한안국(韓安國)의 자(字)이다. 그가 승상의 일을 행하다가 수레에서 떨어져 절뚝거렸다는 기사가 사기(史記) 권108에 기록되어 있다.
♣ 장유후[章留後]장은 장구(章仇)인 복성(複姓)의 약칭이요, 유후는 절도사(節度使)의 별칭이니, 이는 장구겸경(章仇兼瓊)을 지칭한 것이다. 그는 영천(潁川) 사람으로 검남 절도사(劍南節度使)를 지냈다.
♣ 장육[丈六]일장 육척(一丈六尺)이 되는 불상을 말한다.
♣ 장윤[張允]오대(五代) 후한(後漢)의 진주(鎭州) 사람. 젊어서는 장문례(張文禮)의 참군(參軍)이 되었고 뒤에 당에 투항,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을 지냄. 《舊五代史 張允傳》
♣ 장읍평원군[長揖平原君]전국 시대제(齊) 나라의 고사. 노중련(魯仲連)이 조(趙) 나라에 가 노닐 적에 조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그에게 높은 관작을 봉해주려고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던 사실을 가리킨다. 《戰國策 趙策》
♣ 장응[張鷹]갈바람이 일자 고향의 순채국ㆍ농어회가 생각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오(吳)로 돌아왔던 진(晉)의 장한(張翰). 자가 계응(季鷹)임. 《晉書 卷92》
♣ 장의[張儀]장의(張儀)는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 유명한 변사(辯士)로서 6국을 유세(遊說)하여 진(秦) 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 6국을 순방, 유세(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橫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함.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함.
♣ 장이[張弛]팽팽하게 캥기는 것과 늦추는 것. 성함과 쇠함. 물이 밀렸다 나갔다 함.
♣ 장인[長人]우대(禹代)의 방풍씨(防風氏)라고 한다. 우왕(禹王)이 제후(諸侯)들과 회견(會見)할 때, 방풍이 늦게 도착한 죄로 봉우산(封隅山)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국어(國語)에 땅을 파는데 뼈가 나와 수레에 실으니, 한수레 가득한지라 혹자(或者)가 공자에게 물으니. “이것은 옛날 봉우산을 지키던 방풍씨의 뼈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 장인사길연희효[丈人師吉演羲爻]주역(周易) 사괘(師卦)의 괘사(卦辭)에 “군사를 쓰는 도는 곧고 발라야 되니, 장인(丈人; 점잖은 장수)이라면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다.
♣ 장인유옹불수기[丈人有甕不須機]장인은 노인을 지칭한 말. 자공(子貢)이 진(晉) 나라로 돌아가다가 한음(漢陰)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물동이를 안고 우물로 들어가 물은 퍼다가 밭이랑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힘은 매우 많이 들고 공효는 작아 보이므로, 자공이 그 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이랑의 물을 댈 수가 있습니다.” 하니, 그 노인은 버럭 성을 냈다가 곧 웃으면서,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꾀를 부리게 되고 꾀를 부리게 되면 반드시 꾀를 내는 마음이 생기어 순박한 천성을 잃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쓰지 않는다고 거절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장인포옹[丈人抱瓮]자공(子貢)이 한수(漢水)의 남쪽을 지나가다 보니, 때마침 어떤 노인이 밭이랑을 일구기 위하여 우물을 판 다음, 그곳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안고 나와서 밭에 물을 대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노력에 비하여 공효는 매우 보잘것없는 것을 말한다. 《莊子 天地》
♣ 장인항[丈人行]본디 존장자(尊長者)를 일컫는 말인데, 송(宋) 나라 때 당경(唐庚)의 이월견매시(二月見梅詩)에 의하면 “지금 이미 장인항이 되었는데 어찌 연소배와 춘풍을 다투려 하리오[只今已是丈人行 肯與年少爭春風]”하였다.
♣ 장자거[長者車]한(漢) 나라 진평(陳平)이 젊을 때에 가난하게 살았는데, 부인(富人) 장부(張負)가 그를 범상치 않게 보고 그를 따라가 본즉, 오막살이에 떨어진 자리로 문을 달았으나, 문밖에 장자(長者)들이 찾아 왔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장부는 진평에게 손녀를 아내 삼아 주었다.
♣ 장자방[張子房]자방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한(漢) 나라를 세우게 한 장량(張良)의 자(字). 한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초연히 물러나 신선(神仙)의 술(術)을 즐기며 공명(功名)을 완전히 보전하여 천명으로 죽었음. 《史記ㆍ漢書 張良傳》
♣ 장자아[長者兒]마원이 말하기를, “내가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므로 국사에 죽는 몸이 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이제는 소원대로 되게 되었다. 다만 장자가(長者家) 아이들이 혹 좌우에 있거나 혹 종사(從事)가 되었을 때에 그것을 다루기 어렵다.” 하였다. 장자아(長者兒)는 권세 있는 집 자제를 가리킨 것이다.
♣ 장작[張鷟]당(唐) 나라 장작(張鷟)이 글을 잘 지으니 원반천(員半千)이 그의 글을 “청동전(靑銅錢) 같아서 가려내고 추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칭찬하니, 그때 사람들이 장작을 청전학사라고 불렀다.
♣ 장작관[將作官]토목과 건축에 관한 사항을 관장했던 선공감(繕工監)의 관원을 말한다.
♣ 장작청전[張鷟靑錢]시험을 볼 때마다 모두 합격했음을 비유한 말. 당 고종(唐高宗) 때 장작이 시험을 볼 때마다 반드시 합격하였는데, 청동전(靑銅錢)은 만 번을 골라 뽑아도 규격이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당시 사람들이 장작의 문장을 청동전에 비유하여 그를 청전학사(靑錢學士)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六十一》
♣ 장장[將將]대장(大將)의 대장이란 뜻으로, 즉 대장을 잘 부릴 수 있는 재능을 이른 말이다.
♣ 장장[丈丈]예전에, 손윗사람이나 존장(尊長)을 이르던 말
♣ 장장하일[長長夏日]기나긴 여름 날.
♣ 장재[長齋]불가(佛家)에서 일생 동안 율행(律行)을 정진하며 낮 한 때만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음식을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장재[長齋]불가(佛家)에서 한낮이 넘도록 굶는 것을 재(齋)라 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장재(長齋)라고 함. 《般舟三昩經》
♣ 장재명[張載銘]서진(西晉)의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갔다가 험준한 산세를 보고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세조(世祖)가 이를 보고서 감탄한 나머지 비석에 새겨서 그곳에 세우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文選 卷56 劍閣銘》
♣ 장저걸닉[長沮桀溺]공자(孔子)와 동 시대에 살았던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들로서,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자로(子路)에게 자기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면서 계속 농사일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 장저업[長沮業]장저는 춘추시대의 은자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의 “장저와 걸익(桀溺)이 나란히 짝을 지어 밭갈이를 하였다.”에서 나온 것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 장적[張籍]장적은 당(唐) 나라 때의 문장가인데, 한유(韓愈)가 일찍이 장적을 대신하여 이 중승(李中丞)에게 준 편지에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이 깜깜하지만[盲心], 적(籍)의 경우는 스스로 유독 눈만 깜깜하다고[盲目]할 뿐이요, 그 마음은 시비(是非)를 능히 분별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장전[張顚]당(唐) 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의 별호. 초서(草書)를 아주 잘 썼는데 술이 한껏 취하면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남들이 전장(顚張)이라 했다 한다. 《唐書 卷二百二》
♣ 장전[帳殿]왕이 궁궐을 나와 잠시 휴식할 때 휘장을 둘러쳐 만든 행궁(行宮)이다.
♣ 장전[杖錢]장전은 곧 장두백전(杖頭百錢)의 준말로, 진(晉) 나라 때 완수(阮脩)가 외출할 때면 언제나 지팡이 끝에다 백 전씩을 걸고 나가서 주점(酒店)에 이르러 혼자 즐기며 마셨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장전[張顚]전(顚)은 미치광이란 뜻으로, 당 나라 때 서가인 장욱(張旭)의 이칭(異稱)이다. 장욱은 술을 매우 즐겨 항상 대취(大醉)되어 미친 듯이 떠들어대며 광주(狂走)하다가 곧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쓰면 신기한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 장전[章殿]한당(漢唐) 시절의 궁전 이름.
♣ 장전선[張錢選]당(唐) 나라 장작(張鷟)이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했을 때, 원외랑(員外郞) 원반천(員半千)이 여러 차례나 공경(公卿)의 면전에서 “그의 문장은 마치 청동전(靑銅錢)과 같아서 한 편의 글마다 찬란한 색채를 발휘하니 만번을 뽑아도 만번 다 뽑힐 것[萬選萬中]이다.”라고 칭찬했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張鷟傳》
♣ 장전익[章全益]당(唐) 나라 때 장전익(章全益)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그의 형 전계(全啓)에게서 양육되었으므로, 그의 형이 죽자 참최(斬衰)를 입어서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장 효자라고 칭했었다.
♣ 장절공[壯節公]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을 말함. 장절은 그의 시호이다.
♣ 장절염황백안희[仗節炎荒白鴈稀]염해(炎海)는 몹시 더운 남쪽 지방으로, 여기서는 일본(日本)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고 한다.
♣ 장점[粧點]부녀의 단장에서 근본된 말인데, 모든 수식(修飾)에 대한 용어로 발전되었음.
♣ 장접[莊蝶]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장주인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깨어나니 바로 장주였다. 이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莊子 齊物論》
♣ 장정[長亭]노정(路程)을 표시하는 정(亭)이 있는데 5리에 있는 것을 단정(短亭), 10리에 있는 것을 장정(長亭)이라 한다.
♣ 장정[長亭]역참(驛站)을 말한다. 행인의 휴식과 전별을 하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진(秦)ㆍ한(漢) 시대에 10리마다 설치했던 정자로서 길가의 정자를 가리킨다. 5리마다 설치한 것은 단정(短亭)이라 한다.
♣ 장정위[張廷尉]장 정위는 한 문제(漢文帝) 때 정위로 있었던 장석지(張釋之)를 말함. 장석지는 정위로 있으면서 법을 엄히 지키고 죄인을 공평하게 다스리어, 당시에 “장석지가 정위가 된 후로는 천하에 원통한 백성이 없게 되었다.”는 칭송을 받기까지 하였다. 한번은 처사(處士) 왕생(王生)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공경대부가 다 모인 자리에서 장석지에게, 내 대님이 풀렸으니 대님을 매달라고 하자, 석지가 꿇어앉아 그의 대님을 매어주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왕생에게, 왜 장 정위를 조정에서 그렇게 모욕하느냐고 하니, 왕생이 말하기를 “나는 늙고 천한 몸으로 본디 장 정위에게 도움을 줄 것이 없는데, 정위는 지금 천하 명신(天下名臣)이므로 내가 짐짓 나의 대님을 매게[結幭] 하여 그의 인품을 더욱 중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五十》
♣ 장조[張趙]한(漢) 나라 때 다 같이 경조윤(京兆尹)으로 명망이 높았던 장창(張敞)과 조광한(趙廣漢)을 합칭한 말이다.
♣ 장조염승명[莊助厭承明]장조는 한(漢) 나라 엄조(嚴助)를 가리키고, 승명려(承明廬)는 한 나라 때 시종신이 숙직하던 거소의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엄조에게 회계 태수(會稽太守)를 제수하면서 내린 조서 가운데 “그대가 승명려에 있는 것을 지겹게 여기고 시종신의 일을 고단하게 여기면서 고향을 그리워하기에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바이다.[君厭承明之廬 勞侍從之事 懷古土 出爲郡吏]”라는 구절이 있다. 《漢書 卷64上 嚴助傳》
♣ 장족[張족]당 예종(唐睿宗) 때 학사(學士)가 되어 문장에 이름이 있자, 신라(新羅)ㆍ일본(日本)에서 오는 사신(使臣)들이 그의 문장을 구입해 갔다. 호는 부휴자(浮休子) 혹은 청전 학사(靑錢學士)라 하였다. 《唐書 卷一百六十一》
♣ 장족[長足]빠른 걸음. 진보나 발전 속도가 매우 빠름을 비유.
♣ 장족자율사[將哫訾栗斯]아첨하면서 우물거리며, 무서워 떨다.
♣ 장주[掌珠]손 위의 구슬. 남의 자녀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 장주[長洲]장원(莊苑)의 이름으로, 합려(闔廬)가 사냥하면서 놀던 곳이다.
♣ 장주[藏舟]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거물을 못에 감춰 두면 누구나 다 견고하다 하겠다. 그러나 힘 있는 자가 밤중에 짊어져 가는데,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한다.”고 한 데서 인용된 말.
♣ 장주[莊周]춘추 시대 송(宋) 나라의 사상가이자 도학자(道學者). 만물일원론(萬物一元論)을 주창, 인생은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함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 인생은 모두 천명(天命)이라는 숙명설(宿命說)을 주장하였음.
♣ 장주[長洲]황해도 장연(長淵)을 가리킨다.
♣ 장주류생주[莊周柳生肘]버들[柳]은 곧 종기를 뜻하는데, 장자(莊子) 지락(至樂)의 “버들이 왼팔에 났다.[柳生其左肘]" 한 주에 “유(柳)는 유(瘤)와 같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 장주지몽[莊周之夢]장주라는 사람이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실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고사. 호접지몽(胡蝶之夢)
♣ 장중울[張仲蔚]장중울(張仲蔚)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같은 고을의 위경경(魏景卿)과 함께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박학다식하여 천문(天文)에 정통하고 시부(詩賦)에 능했다 한다. 그런데 늘 빈한하게 사는 그 집에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쑥대가 우거졌으므로 “중울봉호(仲蔚蓬蒿)”라는 몽구(蒙求)의 표제가 전해 온다. 《高士傳 中 張仲蔚》
♣ 장중주[掌中珠]손에 쥔 구슬이란 뜻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비유한 말이다.
♣ 장지[張芝]한(漢) 나라 사람. 장(張)은 비백(飛白),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 장지[張摯]한(漢) 나라 장석지(張釋之)의 아들로, 대부(大夫) 벼슬에 이르러 면직된 뒤, 강직한 성품을 굽히지 않은 채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史記 卷102》 후대에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사람의 대명사로 그의 자(字) 장공(長公)이 자주 쓰인다.
♣ 장지국[張持國]지국은 장유(張維)의 자이다.
♣ 장지화[張志和]산수화(山水畵) 잘 그리는 화가. 당(唐)의 장지화(張志和)의 어릴적 이름은 귀령(龜齡)이었는데, 나이 16세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숙종(肅宗)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지화(志和)라는 이름을 왕에게서 받았고,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안진경(顔眞卿)과 친했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隱逸》ㆍ《畵史》
♣ 장진[藏眞]당 나라 승(僧)인데 초성(草聖)으로 유명하였으며 호는 회소(懷素)임.
♣ 장진응참양졸구[張陣應慚養卒口]장진은 장이(張耳)ㆍ진여(陳餘)를 가리키며 양졸(養卒)은 나무와 밥의 천역(賤役)을 맡은 시양졸(廝養卒). 진(秦) 나라 말기 군사를 일으켜 조왕(趙王)을 세웠던 장이ㆍ진여가 연(燕) 나라에 조왕이 잡혀가자 걱정하니, 시양졸 하나가 나서서 연 나라 장군을 만나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 장진응참양졸구[張陳應慙養卒口]진(秦)나라 말기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왕(趙王)이 연왕(燕王)에게 잡히니, 그의 신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사람을 여러 번 보내어 조왕을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연왕이 듣지 않았다. 말 기르는 종이 몰래 연왕에게 가서 구변(口辯)으로 달래어 조왕을 모시고 돌아왔다.
♣ 장진주[將進酒]당나라 이하(李賀)는 이름 높은 시인(詩人)인데 장진주(將進酒)란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다.
♣ 장창[張敞]장창은 경조윤(京兆尹)과 기주 자사(冀州刺使)로 있으면서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여 도적을 소탕하고 청명한 정치를 행하였다.
♣ 장창[臧倉]전국 시대 노(魯) 나라 사람이다. 맹자(孟子)가 노 나라 평공(平公)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장창이 가로막아서 만나 보지 못하였다. 후대에는 어진이를 해치는 소인배를 지칭하게 되었다. 《孟子 梁惠王下》
♣ 장창무치[張蒼無齒]장창은 진(秦) 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공을 세우고 문제(文帝) 때는 15년 동안 승상을 지낸 인물로, 백여 세가 넘게 살았는데 노년에 이가 없어 젖을 먹고 살았다 한다. 《漢書 卷四十二 張蒼傳》
♣ 장창치[張蒼齒]한(漢) 나라 때 장창(張蒼)은 치아가 없어서 오직 젖[乳]만 마시면서 백여 세를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二》
♣ 장채[章蔡]장채는 북송 시대의 소인(小人) 재상으로 일컬어지는 장돈(章惇)ㆍ채경(蔡京)을 합칭한 말이다.
♣ 장초[萇楚]시경(詩經)에 있는 노래인데 집없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 장초[萇楚]약초의 이름으로 맛이 매우 쓰다고 한다.
♣ 장초[萇楚]일명 양도(羊桃)라고 하는 풀의 이름. 어려서는 곧게 자라다가 조금 크면 가지가 휘어져서 덩굴처럼 엉긴다고 함. 시경 회풍(檜風)에, “진펄에 있는 장초, 휘늘어진 그 가지[隰有萇楚 猗儺其枝]”하였음.
♣ 장초[章草]초서의 별체. 후한 장제(章帝) 때 두조(杜操)가 이를 잘 썼고, 장제가 그를 칭찬한 데서 유래함.
♣ 장초[章草]초서의 한 가지. 한 원제(漢元帝) 때에 사유(史游)가 급취장(急就章)의 체에서 만든 것임. 일설에는 후한(後漢)의 장제(章帝)가 만든 서체라고도 한다.
♣ 장추[長楸]서울의 대로(大路)를 말한다. 옛날 도성의 큰길 거리에 가래나무[楸]를 길게 심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장추[長楸]큰 가래나무. 조식(曹植)의 명도편(名都篇)에, “동교 길에서 닭싸움하고, 장추 사이에서 말 달리네.[鬪鷄東郊道 走馬長楸間]" 하였음.
♣ 장추[長秋]한(漢) 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했던 장추궁(長秋宮)으로, 뒤에 와서는 황후의 궁전 혹은 황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장추곡[將雛曲]어린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을 내용으로 한 옛 악곡(樂曲) 봉장추(鳳將雛)를 말한다.
♣ 장추궁[長秋宮]황후가 거처하는 궁전. 전하여 황후의 별칭으로 쓰인다. 《後漢書 明德馬皇后紀》
♣ 장춘[莊椿]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축수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 장춘오[藏春塢]송(宋) 나라 때 조약(刁約)의 실명(室名). 조약이 일찍이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돌아와 윤주(潤州)에다 실(室)을 세우고 이를 ‘장춘오’라 이름하였다. 소식(蘇軾)의 시에 “장춘오 안에 꾀꼬리와 꽃이 들레고.[藏春塢裏鶯花鬧]"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의 시에는 “장춘이 어디에 있느뇨. 수많은 송림 무성도 하리.[藏春在何處 鬱鬱萬松林]" 하였다.
♣ 장타유[張打油]저속한 시(詩)를 뜻함.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당(唐) 나라 장타유(張打油)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했다 함.
♣ 장탕[張湯]장탕은 전한(前漢) 때 법관으로서 아주 혹리(酷吏)였다. 무제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서 율령(律令)을 만드는 데 참여했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서는 법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뒤에 주매신(朱買臣)등의 무함을 받고 자살하기에 이르렀음. 《漢書 卷五十九》☞ 서옥(鼠獄)
♣ 장탕[張湯]한 나라 때 공신 세족(功臣世族)으로 자손으로 선제(宣帝)ㆍ원제(元帝)이후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를 지낸 사람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 장탕교무문[張湯巧舞文]한 무제(漢武帝) 때에 혹리(酷吏) 장탕(張湯)이 법문(法文)을 교묘히 환롱(幻弄 舞文)하여 가혹하게 다스렸다.
♣ 장탕옥[張湯獄]장탕은 한(漢) 나라 때의 옥관(獄官)이다. 그가 어렸을 적에 집을 보다가 쥐에게 고기를 도둑맞은 일이 있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서는 쥐 굴을 파헤쳐 쥐를 잡고 먹다 남은 고기도 꺼내어 뜰에다 감옥의 모양을 갖추어 놓고 핵문(劾文)을 지어 쥐를 신문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 글을 보니 노련한 옥리(獄吏)보다 나았으므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漢書 卷五十九》
♣ 장탕우거반[張湯牛車返]장탕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옥관(獄官)으로 법 집행이 혹심(酷深)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뒤에 탄핵을 받고 자살하여 그의 형제들이 후장(厚葬)을 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탕은 천자의 대신으로서 나쁜 말을 듣고 죽었는데, 어찌 후장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곽(椁)도 없이 관(棺)만 갖추어 우거(牛車)에 실어서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九》
♣ 장평[長平]성 이름으로 전국 시대 진(秦) 나라 백기(白起)가 조(趙) 나라 조괄(趙括)의 군사를 대파하고 항졸(降卒) 40여만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史記 趙世家》
♣ 장평[長平]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관(張平關)에서, 전쟁에 패하고 항복해온 조(趙)의 40만 대군을 속임수를 써서 한꺼번에 갱살(坑殺)하였음. 《史記 白起傳》
♣ 장평갱[長平坑]장평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읍명(邑名)인데,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여기서 조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항복한 조 나라의 수많은 군졸을 여기에 생매장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秦紀》
♣ 장평자[張平子]장형(張衡)의 자(字). 벼슬하다가 돌아와서 귀전부(歸田賦)를 지었다.
♣ 장평자[張平子]후한(後漢) 시절의 장형(張衡). 평자(平子)는 그의 자임. 자기 심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유명한 사현부(思玄賦)를 지었음. 《後漢書 卷五十九》
♣ 장포[漳浦]옛날 삼국 때 위(魏)의 유정(劉楨)은 병이 있어 늘 장포에 누워 있었으므로 앓고 있는 시골을 가리키게 되었다.
♣ 장포[張酺]자는 맹후(孟侯).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으며 상서(尙書)에 밝았다. 《後漢書 卷七十五》
♣ 장포자리거[漳浦子離居]병으로 말미를 청해 시골에서 쓸쓸히 지낸 것을 말한다. 한말(漢末)에 유정(劉楨)이 조비(曹丕)에게 보낸 시 가운데 “余嬰沈痼疾 竄身淸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告休漳浦”라는 숙어가 파생되었다. 《文選 贈五官中郞將》
♣ 장풍[長風]웅대한 뜻을 펴는 것을 비유한 말. 장풍은 멀리 부는 웅대한 바람을 말하는데, 남조 송(南朝宋) 때 종각이 어렸을 적에 그의 숙부(叔父)가 장래의 포부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 나가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뒤에 그는 과연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임읍국(林邑國)을 정벌하여 이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다. 《宋書 卷七十六》
♣ 장풍파랑[長風破浪]남조 송(南朝宋) 종각(宗慤)이 소년 시절에 “내 소원은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 보는 것이다.[願乘長風萬里浪]”라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있다. 《宋書 宗慤傳》
♣ 장하[丈下]장실(丈室) 밑이라는 말인데, 유마경(維摩經 )에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거처하는 방이 사방 10척이므로 방장실(方丈室)이라는 문자를 인용하였다.
♣ 장하아[帳下兒]장하아란 병졸(兵卒)을 가리킨 다.
♣ 장한[張翰]장한은 진(晉) 나라 오군(吳郡) 사람으로, 자는 계응(季鷹)인데 문장가이다. 제(齊) 나라에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는데, 가을 바람이 불자 오군의 고채(菰菜)ㆍ순채(蓴菜) 국과 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서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고 한다. 진서(晉書) 장한전(張翰傳)에 “연리(掾吏)가 되었을 때 가을철을 만나 그의 고향 고채(菰菜)와 순갱(蓴羹)ㆍ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 그만 벼슬을 버리고 오군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 장한강동행[張翰江東行]동진(東晉) 때 오군(吳郡)의 장한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으로 있다가,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인 오군의 순채국[蓴羹]과 농어회[鱸膾]가 생각나서 “인생이란 가난하게 살아도 뜻에 맞는 것이 좋지, 어찌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밖에 몸을 얽매일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는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곧장 돌아와버렸다. 강동(江東)은 곧 오군을 가리킨 말이다. 《晉書 文苑傳 張翰》
♣ 장한귀강동[張翰歸江東]장한(張翰)은 진(晉) 나라 사람인데, 벼슬하는 중에 나라의 정치해 가는 꼴이 멀지않아서 난리가 날 것 같으므로, 고향인 강동으로 갈 생각이 많았었는데, 마침 가을이 되어서 고향의 농어회와 순채의 아름다운 맛을 생각하고 그만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한다.
♣ 장한귀심만일범[張翰歸心滿一帆]진(晋) 나라 사람. 자 계응(季鷹). 그가 낙양(洛陽)에 들어와 제왕형(齊王冏)의 동조연(東曹椽)으로 벼슬하다가 가을 바람이 불자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나물ㆍ농어회 생각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장한귀흥[張翰歸興]고향을 그리는 말이다. 장한은 진(晉) 나라 오군(吳郡) 사람으로 자는 계응(季鷹), 호는 강동보병(江東步兵)이다. 제왕(齊王) 경(冏)이 그를 불러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椽)을 삼았는데, 하루는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문득 오중(吳中)의 순채(蓴菜)와 노어(鱸魚)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제 마음에 맞는 대로 살아야지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 천리 밖에 나와서 명작(名爵)에 얽매이겠느냐?" 하고서 바로 고향에 돌아갔다는 고사이다. 《晉書 卷九十二 張翰傳》
♣ 장한범고회순풍[張翰帆高會順風]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장한은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 나물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당장 벼슬을 버리고 떠났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장한사[張翰事]진(晋)의 장한(張翰)은 오군(吳郡)사람이었다. 그의 별호가 강동 보병(江東步兵)이었는데, 어느 날 하순(賀循)을 따라 낙양(洛陽)에 와서 벼슬하고 지내다가 갈바람이 일자 자기 고향의 순채국, 농어회가 생각나서 관직을 버리고 오군으로 돌아갔었음. 《晉書 卷九十二》
♣ 장한흥[張翰興]진(晉) 나라 장한이 벼슬살이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유쾌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다.” 하고, 벼슬을 버린 채 곧바로 고향에 돌아갔던 고사가 있다. 《晉書 文苑 張翰傳》
♣ 장함석[丈函席]지팡이를 용납하는 자리로, 후에 스승을 함장이라 일컬었으니 강석(講席)이라는 뜻과 같다.
♣ 장해[章亥]대장(大章)과 수해(豎亥)로, 모두 전설 속에 나오는 걸음을 잘 걸었던 사람들이다.
♣ 장해[藏海]대장경의 분량이 많음과 뜻이 깊고 넓음을 형용하기 위해 장경의 바다[藏海]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 장현소[張玄素]당 태종(唐太宗) 때 장현소가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태종이 낙양궁(洛陽宮)을 수축하려는 데 대해 현소가 상서(上書)하여 극간하자 태종이 그 일을 즉각 중지하였다. 《唐書 卷一百三》
♣ 장협가[長鋏歌]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노래이다. 제(齊) 나라 사람 풍훤(馮諼)이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으로 있을 때 장검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보다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노래를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다. 《戰國策 齊策 4》
♣ 장협가[長鋏歌]전국 시대 제(齊) 나라 사람 풍훤(馮諼)이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으로 있을 적에 칼자루를 치면서 불우한 처지를 호소했다는 노래이다. 《史記 孟嘗君列傳》
♣ 장협비가[長鋏悲歌]장검을 치며 슬프게 노래부른다는 것은 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 가운데 한 사람인 풍환(馮驩)이, 처음 맹상군을 찾아갔을 때 대접이 변변치 않자 장검을 치며 밥상에 고기가 없고 밖에 나다닐 때 수레가 없다는 뜻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八十二 孟嘗君傳》
♣ 장협운관[長鋏雲冠]굴원(屈原)처럼 시름겹다는 뜻. 초사(楚辭) 구장 석송(九章 惜誦)에 “허리에 장협을 길게 차고 머리에 절운관을 높이 썼네[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 하였다.
♣ 장협탄[長鋏彈]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인 풍환 (馮驩)이, 풋나물만 먹이고 고기를 주지 않는 맹상군의 박대에 불평을 품고, 긴 칼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음식에 고기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하였다. 《史記 孟嘗君傳》
♣ 장협풍환[長鋏馮驩]장협은 긴 칼을 이른 말인데,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 풍환(豐驩)이 맹상군의 대우가 나쁜 데에 불만을 품고 “장협아,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가 없구나.”라고 노래하자, 맹상군이 고기 대접을 해 주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戰國策 齊策》
♣ 장협화풍환[長鋏和馮驩]객(客)을 잘 대접하는 주인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인 풍환(馮驩)이 대접에 불만을 품고는 장협(長鋏 장검)에 기탁하여 노래를 부르며 뜻을 표현하자, 맹상군이 몇 번이나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戰國策 齊策》
♣ 장형[張衡]후한 안제(安帝) 때의 시인. 자는 평자(平子). 그는 부(賦)에 능했음. 자기 심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유명한 사현부(思玄賦)를 지었으며, 벼슬하다가 돌아와서 귀전부(歸田賦)를 지었음. 특히 이도부(二都賦)는 10년을 걸쳐 지은 것으로 매우 유명함. 《後漢書 卷五十九》
♣ 장호[張鎬]당 숙종(唐肅宗) 때 재상(宰相)으로 환관(宦官)에게 굽히지 않다가 파직당하였으나 대종(代宗) 때 다시 기용되었다. 자는 종주(縱周)이다. 《唐書 卷一百三十九》
♣ 장호[張祜]장호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는 승길(承吉)인데 궁사(宮詞)에 능하여 유명하였다. 《新唐書 張祜傳》
♣ 장호호[張好好]당(唐) 나라 때 명기(名妓)의 이름. 가창(歌唱)에 매우 뛰어났고 당시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이 그에게 시를 지어 보낸 일도 있다.
♣ 장홍[長紅]장홍은 옛 풍속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지방관에게 그 지방의 부로들이 꽃가지에 채색을 걸어서 주는 것을 이르는데, 소식(蘇軾)의 파서주왕남경시(罷徐州往南京詩)에 “부로들은 왜 스스로 찾아오는고 나에게 준 꽃가지는 장홍이 간들거리네[父老何自來 花枝裊長紅]”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八》
♣ 장화[張華]장화는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으며 박학다식하여 참위(讖緯)ㆍ방기(方技)의 책에 이르기까지 상람(詳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박물지(博物志)는 바로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저서이다. 《晉書 卷36》
♣ 장화구검[張華求劍]장화는 진(晉)의 시중(侍中)을 지낸 현사. 그가 한번은 북두성 사이에 이상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천문을 잘 아는 뇌환(雷煥)에게 물었더니, 보검(寶劍)의 정기(精氣)가 뻗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풍성(豐城) 땅에서 명검인 용천(龍泉)ㆍ태아(太阿) 두 개를 얻었다 한다. 《晉書 卷三十六 張華傳》
♣ 장화록[藏花錄]명부 이름. 취홍원(聚紅院)에 선입된 흥청을 패[隊]를 나누어 이름을 쓰고, 그 이름 밑에 생년, 본적, 소속된 날짜 등을 기록하고서 그 책을 장화록이라 하였다.
♣ 장화일[藏火日]불을 금지하는 날로 즉 한식일(寒食日). 육홰(陸翽)의 업중기(鄴中記)에 “병주(幷州) 풍속은 개자추(介子推)가 불에 타 죽었으므로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3일 동안 불때기를 금한다.” 하였다.
♣ 장활태[杖滑苔]지팡이가 이끼에 미끄러지다.
♣ 장횡거[張橫渠]장횡거는 북송의 철학자 장재(張載)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함.
♣ 장효여석치[長筊與石甾]하수가 터진 것을 막느라고 나무를 다 잘랐으므로 땔감이 모자랐고 드디어는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베어 물막이로 썼는데, 이 공사가 쉬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천자가 직접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백마를 잡아 물귀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史記 河渠書》
♣ 장효자[章孝子]당(唐) 나라 때 장전익(章全益)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 전계(全啓)에게 양육되었는데, 형이 죽은 뒤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그 은혜를 갚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장효자(章孝子)라 불렀다.
♣ 장효표[章孝標]당 나라 사람으로 시에 능하였음.
♣ 장후[張侯]춘추 시대 진(晉)의 대부(大夫) 해장(解張). 《左傳 成公 二年》
♣ 장후경[蔣詡逕]한(漢) 나라 장후(蔣詡)가 왕망(王莽) 정권 때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둔한 뒤, 집안의 대나무 밭 아래에 세 개의 오솔길을 내고는 오직 친구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과만 종유(從遊)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蒙求 上 蔣詡三逕》
♣ 장후경존내이중[蔣詡逕存來二仲]은거해 사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중(二仲)은 한(漢) 나라의 양중(羊仲)과 구중(裘仲)이다. 한 나라 때 장후의 집에 세 개의 사잇길이 있었는데, 오직 양중과 구중만이 그를 따라 노닐었다고 한다. 《初學記 卷18》
♣ 장후만리사[張侯萬里槎]한(漢) 나라 장건이 뗏목을 타고 은하(銀河)에 올랐다. 실은 멀리 천산(天山) 길을 뚫어 서역에 가는 것을 말한다.
♣ 장후삼경[蔣詡三逕]번잡한 도시 속에 숨어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장후가 집 안에 세 갈래 오솔길을 만들어 놓고 오직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과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 재[纔]겨우. 막.
♣ 재[宰]고기를 썰어 나누어주는 사람.
♣ 재[齋]불가(佛家)에서 한낮이 넘도록 굶는 것을 재(齋)라 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장재(長齋)라고 함. 《般舟三昩經》
♣ 재가출가[在家出家]집에 있어도 욕심이 없이 청정(淸淨)하면 집을 떠나 중이 된 것이나 같다는 말. 《廬山蓮社雜錄》
♣ 재거[在莒]과거 곤경에 처했던 때를 일컫는 말이다. 제 환공(齊桓公)이 난리를 피해 거(莒) 땅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왕이 되고 나서 축하연(祝賀宴)을 벌였을 때, 포숙아(鮑叔牙)가 술잔을 바치면서 “우리 임금께서 조국을 떠나 거 땅에 계셨을 때를 잊어버리지 않으시면 좋겠다.[祝吾君無忘其出而在莒也]”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新序 雜事》
♣ 재거[齋居]죄수에 대한 최종 처리를 앞두고 임금이 경건한 마음으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따로 앉아 있는 것.
♣ 재과[纔過]겨우 지나다.
♣ 재관[材官]무관(武官)을 말한다.
♣ 재관[宰官]재관은 불교의 용어로서 관세음보살이 현세(現世)한 33신(身) 즉, 삼십삼관음상(三十三觀音像)의 하나로 정치를 관장하는 것이다. 《法華經 普門品》
♣ 재관[宰官]재상의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 재관록[材館錄]송(宋) 나라 때 우윤문(虞允文)이 당시의 인재들을 3등으로 구분하여 견문(見聞)에 따라 기록해 놓았던 명부(名簿)를 가리킨다.
♣ 재귀무형요계망[載鬼無形要戒妄]재귀(載鬼)는 즉 귀신을 수레에 싣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규괘(睽卦)에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실었다.[載鬼一車]" 하였는데, 그 전(傳)에 “귀는 본시 무형(無形)의 물건인데 수레에 가득 실린 것을 보았다면 이는 무(無)를 유(有)로 삼는 것이니 망(妄)의 극이다.” 하였다.
♣ 재금[裁錦]고을 정사를 뜻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30년 조(條)의 “아름다운 당신의 비단을 이제 막 배우는 사람에게 내주어 재단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大官)과 대읍(大邑)으로 말하면, 비단보다도 훨씬 중요한데 말할 게 있겠는가.”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재금[裁錦]시상(詩想)이 막히는 일이 없이 자유자재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시인 이하(李賀)가 매일 아침 동료들과 함께 나가 노닐 적에 종에게 다 해진 비단 배낭[錦囊]을 등에 메고 따라오게 하면서 시제(詩題)를 기다리지도 않고 시상이 떠오르는 대로 써서 그 배낭 속에 넣었다가 뒤에 다시 꺼내어 시를 완성했다는 이른바 ‘시재금낭(詩裁錦囊)’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文藝傳》
♣ 재기칠정제[在璣七政齊]순(舜)이 선기옥형이란 천문(天文)기계를 만들어서 칠정(七政; 日月五星)을 관측하였다 한다.
♣ 재난[才難]논어(論語) 태백(泰伯)의 “인재는 얻기 어려우니 어찌 그렇지 않은가.”에서 나온 것으로, 훌륭한 인재는 얻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 재난고소탄[才難古所歎]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인재 얻기 어렵다는 말이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재대난용[材大難用]재목이 너무 크면 쓰이기 곤란하다. 즉, 재주 있는 사람이 쓰이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 재덕겸비[才德兼備]재주와 덕행을 겸하여(아울러) 갖춤. 문무겸비(文武兼備)
♣ 재덕부재험[在德不在險]나라의 견고함이 산하(山河)의 미(美)와 성지(城池)의 험함에 있지 않고, 임금이 백성에게 덕으로 다스림에 있다는 말. 전국 때 위무후(魏武侯)가 서하에 배를 띄워 내려가면서 오기(吳起)를 돌아보며 말하되, “아름답다, 산하(山河)의 굳음이여, 이는 위 나라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가 말하되, “덕에 있고, 험함에 있지 않으니이다.” 하였다.
♣ 재덕불재험[在德不在險]전국 때 위 문후(魏文侯)가 제 나라의 산하(山河)가 견고함을 자랑한데 대하여 오기(吳起)가 경계한 말이다. 나라를 지킴이 임금의 덕에 있는 것이지 산하가 험하여 지리적으로 좋은 형세에 있지 않다는 말.
♣ 재도[纔到]겨우 도달하다.
♣ 재목[梓木]가래나무. 재질이 훌륭한 낙엽수. 가래나무는 옛날 뽕나무와 함께 울타리 밑에 심어 자손에게 물려주었던 고사에서 기인하여, 고향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 되었다. 《詩經 小雅 小弁 註》
♣ 재박위적[材朴委積]아직 쓸만한 재목이(재능)이 쌓여 있다.
♣ 재방[齋房]재계(齋戒)하는 조용하고 정결한 거실(居室)을 말하는데, 명(明) 나라 왕총(王寵)의 시 ‘송전태상원억사제현릉(送錢太常元抑祠祭顯陵)’에 “齋房産金芝 玉醴出金井”이라는 구절이 있다.
♣ 재방[齋房]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에 감천궁(甘泉宮) 안에 아홉 줄기에 잎이 서로 연한[九莖連葉] 지초가 났으므로, 이를 상서로 여겨 지은 노래로서 일명 지방가(芝房歌)라고도 한다
♣ 재배경복[栽培傾覆]예기(禮記)에, “심어진 자는 북돋아 주고 기울어진 자는 엎어 버린다[栽者培之 傾者覆之].”라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고 스스로 망하는 자는 망친다는 뜻이다.
♣ 재배두소릉[再拜杜少陵]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서천(西川 촉땅)에 있으면서 두견을 두고 지은 시에, “두견에게 두 번 절한다.” 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두견이 옛날 임금의 혼이 화(化)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 재배시[再拜詩]재배시는 두보(杜甫)의 두견시(杜鵑詩)에, “나는 보면 언제나 두 번 절한다, 옛날 임금의 넋을 소중히 여겨서[我見常再拜 重是古帝魂].”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임.
♣ 재배자규조[再拜子規鳥]자규(子規; 杜鵑)는 옛날 촉(蜀) 나라 임금 망제(望帝)의 혼이 화(化)한 것이라 하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두견에게 절한다.”는 구절이 있다.
♣ 재복[在腹]그 가운데에 있다.
♣ 재부백만전[載符百萬錢]재부는 여산(廬山)에서 살았던 재부산인(載符山人)을 가리킨다. 당(唐)의 우적(于頔)은 양양 절도사(襄陽節度使)로 있었는데, 재부산인이 “산을 사서 은둔하겠으니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선뜻 백만 금을 내어 주었다. 《雲溪友議》
♣ 재부재[才不才]재부재는 곧 재주의 우열(優劣)을 말한 것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안연의 아버지가 공자에게 공자의 수레를 팔아 안연의 외곽(外槨)을 장만하자고 청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재주가 있고 없고 간에 또한 각각 자기 자식을 말하는 것이다. 내 자식 이(鯉)가 죽었을 때도 관(棺)만 있었고 곽(槨)은 없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 재비유극어자서[宰嚭有隙於子胥]태재비는 오(吳) 나라의 간신 백비(伯嚭), 오자서는 초 나라의 망신(亡臣)으로 오 나라의 충성된 장수. 태재비가 오(吳)ㆍ월(越) 싸움에서 월왕구천(句踐)에게 매수되어 강화를 도왔고, 오자서와 사이가 나빠 그를 참소해 죽여 오 나라가 끝내 망하였다.
♣ 재사[齋舍]성균관이나 서원 등에서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던 건물을 말한다.
♣ 재사[載師]주(周) 나라 때 토지(土地)를 맡은 벼슬이자 주례(周禮) 편명, 지관.
♣ 재상과두흑[宰相夸頭黑]머리가 아직 검은 젊은 시절에 일국의 재상이 되면 그 인품을 알 만하다는 뜻임.
♣ 재생백[哉生魄]재생백은 음력 16일을 뜻한다.
♣ 재숙[齋宿]재계하고 하룻밤을 지내는 것.
♣ 재순[載純]조선 말에 궁내부 대신을 지내고, 1902년 전권대사로 유럽을 순방한 바 있는 이재순을 말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재아[宰我]가급적 낮잠을 자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한 고사가 있다. 《論語 公冶長》
♣ 재아도차[宰我徒嗟]공자의 제자 재여(宰予)이다.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는 꾸중을 받았다. 《論語 公冶長》
♣ 재여[宰予]공자의 제자.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 “재여가 낮잠 자거늘, 공자가,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분토(糞土)의 담장은 쇠손질할 수 없다.’고 했다[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杇也].” 하였음.
♣ 재여간의형[在輿看倚衡]어느 일에도 학문이 있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자장(子張)이 행함을 물으니 공자가 ‘서 있으면 그 앞에 참예함을 보고 수레에 있으면 그 수레 앞의 잡고 타는 나무에 기댐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 연후에 행할 수 있다.” 하였다.
♣ 재여장[宰予墻]재여(宰予)는 공자의 제자인데, 여기서는 학봉 자신을 말한다.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가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할 수가 없다.” 하면서 꾸짖었다. 《論語 公冶長》
♣ 재오색사[裁五色絲]임금의 과실을 규간(規諫)하는 간관이었음을 뜻한다. 고대에 곤의(袞衣)를 오색 실로 기워서 신하가 임금을 규간하는 문사(文辭)에 비유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 재윤[再閏]재윤은 5년 동안에 윤월(閏月)이 두 번 드는 것을 말한다.
♣ 재윤하시괘[再閏何時掛]눈이 어두워서 점서(占筮)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5년에 다시 윤달이 듦으로, 다시 손가락 사이에 산가지를 끼워서 건다.[五歲再閠 故再扐而後掛]"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재자[才子]재자는 재주있는 남자로 재사(才士)와 같은 말이다.
♣ 재자가인[才子佳人]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재주 있고 아름다운 남녀
♣ 재자기황곡[才子騎黃鵠]주 영왕(周靈王)의 왕자(王子). 완탁(阮卓)의 황곡원별시(黃鵠遠別詩)에 “왕자가 생황 불다가 갑자기 서로 만나다[王子吹笙忽相逢]" 하였다.
♣ 재제문소[在齊聞韶]소는 순 임금의 음악. 공자가 제 나라에서 소를 듣는 석달 동안 고기 맛을 몰라하며 말하되, “음악이 이에 이를 줄을 몰랐노라.” 하였다. 서경(書經)에, “순(舜)이 소(韶)의 음악을 아뢰니, 봉황새가 와서 노닐었다.” 하였다.
♣ 재조[在藻]인간답게 사는 풍족한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어조(魚藻)의 “마름풀 사이 물속에서 유유히 노는 물고기[魚在在藻]”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재조은[再造恩]망하게 된 국가를 구해준 은혜.
♣ 재종조부[再從祖父]할아버지의 사촌 형제.
♣ 재주[齋廚]재주는 사찰(寺刹)이나 도관(道觀)의 취사장(炊事場)을 말한다.
♣ 재주내[載酒來]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술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집이 가난해 마시지를 못했는데, 호사자(好事者)가 술과 안주를 싸들고 와서[載酒肴] 종유(從游)하며 배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揚雄傳贊》
♣ 재주생근세막이[梓柱生根勢莫移]한 원제(漢元帝) 때 왕씨(王氏)의 세력이 번창하므로 유향(劉向)이 이를 걱정하여 상소하기를 “재주가 가지가 성하듯 그 세력이 굳어졌다.”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漢書 卷三十六 楚元王傳》
♣ 재주참군방독옹[載酒慙君訪禿翁]변변찮은 늙은이에게 배우겠다고 찾아온 것이 부끄럽다는 겸사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집이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도 못 먹고 있었는데, 배우려는 자들이 술과 안주를 싣고 찾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下》
♣ 재죽이생손[裁竹已生孫]대나무 뿌리에서 다시 옆으로 뻗어나온 작은 대나무를 죽손(竹孫)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자손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참고로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야자수는 자식을 낳고 대나무는 손자 보았도다.[檳榔生子竹生孫]”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43 庚辰歲人日作 時聞黃河已復北流 老臣舊數論此 今斯言乃驗》
♣ 재진[在陳]공자가 진에 있으면서 말씀하시되 “내 무리의 애들이 광간하여 번쩍하게 무늬를 이루나 마를 줄을 모르는도다.[子在陳曰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的以裁之]”하였다.《論語 公冶長》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여 이름을 날리고도 문인들이 아직 미숙함을 걱정하여 돌아가 시서ㆍ예악을 정리, 술작할 뜻을 가지고 한 말.
♣ 재진절립[在陳絶粒]공자(孔子)가 진(陳)ㆍ채(蔡)에서 양식이 떨어져 군색함을 당했던 일을 말한다. 《論語 衛靈公》
♣ 재진지액[在陳之厄]아주 빈핍하여 양식이 떨어진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孔子)가 진채(陳蔡)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져 액운을 겪었기 때문에 이름이다. 《論語 衛靈公》
♣ 재최복[齋衰服]굵은 삼베로 짓고 단을 꿰맨 상복을 입고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는다. 입는 기간은 만 2년, 즉 24개월이다. 주로 어머니의 상(喪)에 아들, 며느리, 딸이 입는다.
♣ 재향지변간욕봉[再向池邊看浴鳳]두 번 한림(翰林)으로 재직했음을 뜻한다.
♣ 쟁산[崢山]높은 산.
♣ 쟁석[爭席]옛날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여관에서 노자(老子)를 만나뵈자, 노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눈을 치뜨고 내리뜨고 부릅뜨며 거만하니, 누가 너와 함께 있으려 하겠느냐. 참으로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하므로, 양자거가 본래의 모습을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에게 대단히 공경을 하던 동숙자(同宿者)들이 그제야 그와 좋은 좌석을 서로 다툴 정도로 친해졌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 쟁석[爭席]옛날에 중국과 외국에 사신이 왕래할 때에 흔히 좌석의 높고 낮은 문제로 다툰 일이 있었다.
♣ 쟁석인[爭席人]물아(物我) 사이에 어떤 간격이나 어려움이 전혀 없이 서로 친숙함으로써 서로 좋은 좌석을 빼앗을 정도가 됨을 뜻한다. 《莊子 寓言》
♣ 쟁신론[爭臣論]쟁신론은 한유(韓愈)가 지은 글 이름인데, 내용은 대략, 당시 간의대부(諫議大夫) 양성(陽城)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번연히 알고도 간(諫)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 글을 지어 기롱했던 것이다. 《韓昌黎集 卷十四 爭臣論》
♣ 쟁야수사노성의[爭也須思魯聖儀]논어(論語) 팔일(八佾)에 “군자(君子)가 다투는 일이 없지만, 활쏘기에서는 재주를 다툰다. 읍(揖)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리고 맞추지 못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서 벌주를 마시니, 그 다투는 것이 군자다.” 하였다.
♣ 쟁어자유[爭魚者濡]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을 면치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 쟁여일탑면[爭如一榻眠]천하가 평정되지 않음을 말한 것. 송(宋)의 태조(太祖)가 천하 통일을 이루기 이전에 눈바람을 무릅쓰고 밤에 조보(趙普)를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내가 누운 한 자리 이외에는 모두가 타인의 집들이기 때문이다.” 하였음. 《邵氏聞見錄》
♣ 쟁영[崢嶸]매우 깊고 먼 모양.
♣ 쟁쟁[錚錚]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는 화살 소리의 의성어.
♣ 쟁전[爭田]쟁전은 밭을 서로 쟁탈함이니 곧 소소한 일임을 뜻함이다.
♣ 저[滁]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저주(滁州). 왕우칭이 효장왕후(孝章皇后)의 장례식 절차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데, 이것이 태종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왕우칭은 저주 지주로 폄적되었다
♣ 저간누안읍[猪肝累安邑]후한(後漢) 민중숙(閔仲叔)이 안읍(安邑)에 우거(遇居)할 적에, 늙고 병이 든 데다 집이 가난해서 고기를 사 먹지 못하고 오직 돼지 간 한 조각만을 매일 구입하곤 하였는데, 정육점 주인이 잘 팔려고 하지 않자 이를 안 안읍의 현령이 주선해서 매일 사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아들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민중숙이 “내가 어찌 먹는 것 때문에 안읍에 폐를 끼칠 수 있겠는가.[豈以口腹累安邑耶]”하고는 그 고을을 떠났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周燮黃憲等傳序》
♣ 저개[佇介]원저(元佇)와 현개경(玄介卿). 모두 거북 또는 귀갑(龜甲)을 지칭하는 말로, 장수(長壽)를 뜻한다.
♣ 저공[狙公]옛날 원숭이 기르기를 좋아했다는 사람 이름으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로 특히 유명하다. 저공이 여러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싫어하므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간사한 꾀로 남을 농락하거나, 남의 간사한 꾀에 농락당하는 것을 비유한다. 《莊子 齊物論》
♣ 저공삼사[狙公三四]옛날 송(宋) 나라의 원숭이 키우는 사람[狙公]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는데,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니 모두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齊物論》
♣ 저광희[儲光羲]당 현종 때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저서에 정론(正論) 등이 있음.
♣ 저구[雎鳩]시전(詩傳)에 저구(雎鳩)의 암수가 정답게 물가에서 노는 것을 부부가 화합해서 지내는 데 비유하였는데, 그것을 문왕(文王)과 그의 왕비인 태사(太姒)에게 끌어대서 해석하여 그 문왕이 가정에서 왕비와 화합한 것으로 온 천하를 모두 화합하였다고 찬양한 것이다.
♣ 저구[雎鳩]저구는 물오리의 일종으로 처음 생겨날 때부터 정해진 짝이 있어 헤어지지 않는다고 함. 《詩經 國風 關雎》
♣ 저궁[渚宮]춘추 시대 때 세운 초(楚) 나라의 별궁(別宮).
♣ 저닉[沮溺]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은 공자와 동 시대의 은자(隱者)들이다. 《論語 微子》
♣ 저도[楮島]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 저자도(楮子島)를 말한다. 날이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하였는데, 처음에는 종2품의 관원이 제사를 지내다가 7차에 이르렀을 때에는 정2품의 관원이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東國輿地備攷 卷2 漢城府》
♣ 저라녀[苧羅女]저라산의 계집이란 저라산에서 땔나무를 팔던 미인 서시(西施)를 말함.
♣ 저라산[苧羅山]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 월(越)의 구천(句踐)이 그 산 아래에서 나무꾼의 딸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서시(西施)였음. 《吳越春秋 句踐陰謀外傳》
♣ 저력[樗櫟]저력은 가죽나무와 참나무로서 모두 재목감으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목수가 그들을 베지 않음으로써 명대로 오래 살 수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가죽나무는 밑둥만 크고 옹이가 많아서 승묵(繩墨)에 맞지 않고, 가지가 작고 굽어서 규구(規矩)에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길거리에 서 있어도 장인(匠人)이 돌아보지도 않는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저력부재[樗櫟不材]저(樗)와 역(櫟)은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대목이 베어가지 않아 그대로 오래도록 안전하게 살 수 있다. 《莊子 逍遙遊ㆍ人間世》
♣ 저령[猪苓]약용인데 천초(賤草)임.
♣ 저뢰부재수여기[樗賴不才壽與期]저(樗)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베어가지 않으므로 제 수명을 다한다는 말이다.《莊子 逍遙遊ㆍ人間世》 즉 사람도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남으로부터 시기를 받아 반드시 피해를 입게 되고, 재주는 적어도 덕이 있는 사람은 그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다.
♣ 저룡제자[猪龍猘子]안녹산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도 하나의 용이기는 하지만 돼지 용이어서 미련하고 사납기만 했다는 말이다.
♣ 저립[貯立]우두커니 서다.
♣ 저부[褚裒]자(字)는 계야(季野)이니, 진(晉)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젊어서부터 고상(高尙)한 운치가 있어, 환이(桓彝)의 말에 “계야는 가슴속에 춘추(春秋)의 의리가 있다.” 하였다. 《晉書 卷九十三 褚裒傳》
♣ 저부[褚裒]진(晉) 나라 사람으로, 간귀(簡貴)한 풍도가 있었다. 환이(桓彝)는 그는 뱃속에 춘추(春秋)가 들어 있다 하였고, 사안(謝安)은 그는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사시(四時)의 기후가 갖춰져 있다고 하였다.
♣ 저생피리리양추[褚生皮裏裏陽秋]진(晋) 나라 저부(褚裒), 자는 계야(季野)다. 그가 입으로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으나 맘속으로는 시비(是非)가 분명했다. 환이(桓彝)가 그를 보고 평하여, “계야(季野)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으나, 가죽 속에 양추(陽秋)가 있군.” 하였다. 양추는 곧 봄과 가을로 봄에는 상을 주고 가을에는 벌을 주니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말이다.
♣ 저서원자궁수득[著書元自窮愁得]곤궁하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비로소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평원군우경전찬(平原君虞卿傳贊)에 “우경(虞卿)이 궁수(窮愁)하지 않았다면 글을 지어 후세에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 저서희[狙芧喜]치할(癡黠)은 어리석음과 교활함을 말하는데, 옛날 송(宋) 나라 저공(狙公)이 여러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성을 내므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눈앞에 당장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똑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간사한 꾀로 남을 농락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列子 黃帝》
♣ 저수[沮水]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 이름. 칠수(漆水)와 함께 위수(渭水)에 합쳐지는데 두 강물이 모두 검은 빛을 띠어 흔히 칠저(漆沮)라고 부른다. 《水經 沔水注》
♣ 저수[瀦水]예성강(禮成江)의 일명.
♣ 저수하심[低首下心]머리를 낮게 하고 마음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는 뜻으로, 남에게 머리 숙여 복종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저앙[低昻]위아래로 달리다.
♣ 저양귀웅[雎陽鬼雄]당 현종(唐玄宗) 때 장순(張巡)이 수양(雎陽)에서 안녹산(安祿山)의 반적(叛賊)을 맞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끝까지 버티며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87 忠義傳 張巡傳》
♣ 저왕지관생[滁王之館甥]저왕은 저양왕(滁陽王)에 추봉(追封)된 곽자흥(郭子興)을 가리킨다. 곽자흥이 원 나라 말기에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원수(元帥)가 되었는데, 태조는 그의 휘하에 들어가 십부장(十夫長)으로 있었으며, 마공(馬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明史 卷一 本紀一太祖一》
♣ 저위[儲位]저위의 저(儲)는 부(副)의 뜻이니, 저군(儲君)이란 말은 태자(太子)를 칭한 것인데, 임금의 다음이 되는 까닭임.
♣ 저익[沮溺]장저(長沮)ㆍ걸익(桀溺). 춘추 시대의 은자(隱者)로 둘이서 같이 밭을 갈고 있었다. 이때 공자는 초(楚) 나라에서 채(蔡) 나라로 오는 참이었는데,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였으나, 세상을 다스리려 하는 공자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후대에는 세상을 피해 사는 은자(隱者)를 지칭하게 되었다.
♣ 저익우[沮溺耦]저익은 춘추 시대의 은자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 그들이 나란히 밭을 갈고있을 때 공자(孔子)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들에게 나루터를 물었음. 《論語 微子》
♣ 저자도[楮子島]저자도는 바로 도성의 동쪽, 삼전도(三田渡)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한종유가 일찍이 여기에 별장(別莊)을 두었었다.
♣ 저작비서[著作祕書]남조 송(南朝宋) 때 인재 등용의 부실함을 풍자한 민요(民謠)에 “수레에 올라 떨어지지만 않으면 저작을 삼고, 몸이 얼마나 컸는가만 보아 비서로 삼는다[上車不落爲著作 體中何如作秘書].” 한 데서 온 말로, 즉 대소 관원들의 무능함을 풍자한 말이다.
♣ 저작옥[抵鵲玉]곤륜산(崑崙山)에서는 구슬이 흔하여 그곳 사람들은 이 구슬을 까치에게 던져 준다 한다. 《籃鐵論》
♣ 저잠덕어도우[著潛德於盜牛]왕렬(王烈)의 자가 언방(彦方)인데 관녕과 동시의 사람이다. 그는 시골에 있으면서 덕으로 사람을 감화시켜서 소를 도둑질한 자의 죄를 용서하고 베 한 필을 주었는데, 그 뒤에 어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칼을 잃고서 조금 뒤에 깨닫고 다시 가본즉 한 사람이 칼을 지키고 주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곧 전일에 소를 도둑질한 자였다.
♣ 저쟁서[狙爭芧]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성을 냈다가,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니 모두 심복하며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실려 있다.
♣ 저저[低低]남몰래, 목소리가 매우 낮은 모양
♣ 저주[瀦洲]강 가운데 높은 곳을 가리킨다.
♣ 저창유경빈[低唱有輕顰]시상(詩想)에 몰두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그대는 또 보지 못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을. 어깨는 산처럼 치켜들고 눈썹 잔뜩 찌푸린 채, 멋진 시구 생각하며 신음하는 저 모습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 저창천짐[低唱淺斟]유유자적하게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겨울철에 따뜻한 방 안에 들어앉아, 나지막한 가기(歌妓)의 음악 소리를 듣고 이름난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신다는 고사이다. 《綠窓新話 卷2 湘江近事》
♣ 저초팔백곡[貯椒八百斛]당 나라 재상(宰相) 원재(元載)가 죽음을 당한 뒤, 가산(家産)을 몰수하니 후추(胡椒)가 8백 섬[斛]이요, 다른 재물도 그렇게 많았다.
♣ 저촉[羝觸]주역(周易) 대장괘(大壯卦) 상륙효(上六爻)에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 물러날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어 이로운 바가 없다.” 하였다.
♣ 저탄[猪灘]강원도 고성(固城)에 있는 내.
♣ 저탄[猪灘]저탄은 평양 대동강(大同江)의 별칭이다.
♣ 저토[罝ꟙ]그물을 쳐서 토끼를 잡는 일로서, 비천(鄙賤)한 일을 비유한 말이다.
♣ 저토식현호[罝ꟙ識賢豪]주 문왕(周文王)의 덕이 온 나라 안에 미침으로써 비록 토끼를 잡는 천인도 문왕의 덕에 감화되어 조심스럽게 토끼 그물을 친다는 뜻에서, 시경(詩經) 주남(周南) 토저(ꟙ罝)에 “조심조심 토끼 그물을, 아홉 거리 한길에 치네.[肅肅ꟙ罝 施于中逵]" 한 데서 온 말이다.
♣ 저포[樗蒲]노름ㆍ도박을 말함. 옛날에 저(樗)ㆍ포(蒲)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 저포[樗蒲]저포는 백제 때 유희의 한 가지로 주사위 같은 것을 나무로 만들어 던져서 승부를 다투는 것.
♣ 저해[葅醢]저(葅)는 김치요, 해(醢)는 젓갈이다.
♣ 저호[紵縞]모시와 명주.
♣ 저회[低佪]머뭇거리다.
♣ 저회보이갈의[佇懷寶以褐衣]훌륭한 재주를 간직하고 빈천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 저회점하교[低徊漸下喬]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쩡쩡 나무를 찍는데, 새가 앵앵 울더니 깊은 골짜기서 날아와 높은 나무에 올라앉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데서 온 말로, 친구를 그리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 저힐[沮頡]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신하 저송(沮誦)과 창힐(蒼頡). 이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음.
♣ 적갑산[赤甲山]사천(四川) 봉절현(奉節縣)에 있는 산 이름이다.
♣ 적갑천거[赤甲遷居]딴 곳으로 이사한 것을 비유한 말. 적갑은 산명인데, 두보(杜甫)가 적갑산으로 거주를 옮기고 지은 시에 “적갑산에 집 잡아 옮겨 삶이 새로우니, 무산과 초수의 봄을 두 번 보도다.[卜居赤甲遷居新 兩見巫山楚水春]" 한 데서 온 말이다. 《杜詩批解 卷二十》
♣ 적거[謫居]귀양살이.
♣ 적거[赤車]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 적거진수연[適去儘隨緣]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마침 그때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자가 나올 인연이 도래했기 때문이요, 마침 이때에 이 세상을 마치게 된 것도 그렇게 될 인연 때문이니 부자로서는 마땅히 이에 순응해야 했을 것이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라는 말이 나온다.
♣ 적겸모[狄兼모]적겸모는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족증손(族曾孫)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과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지낸 강직한 인물이다. 치사(致仕)한 뒤에 백거이(白居易)의 그 유명한 구로회(九老會)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때 적겸모와 노정(盧貞)만이 나이 70세가 안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白樂天詩集 卷20 七老會詩》
♣ 적경[赤瓊]곶감을 말함.
♣ 적경[籍耕]적전(籍田)은 임금이 친히 농사를 지어 종묘에 제사지낼 쌀을 수확하고 백성에게 농사를 권하는 것인데, 임금이 몸소 따비로 세 번 밀어서 갈아 보는 것이다.
♣ 적고전장문[吊古戰場文]옛 전쟁터를 조상하는 글. 당(唐) 나라 문인 이화(李華)가 지은 것으로 내용은 옛날의 전쟁터에서 전쟁의 참상(慘狀)을 생각하고, 전쟁은 백성의 생활을 파탄에 몰아 넣는다는 것을 강조하여 위정자(爲政者)를 반성케 하고, 전사자의 혼령을 위로한 글임.
♣ 적공[狄公]적공은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임. 그의 부모가 하양(河陽)에 살고 있었는데,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흰구름 한 덩이가 떠가는 것을 보고 옆사람에게 “우리 부모가 저 아래에 살고 계신다.” 하고 한동안 슬프게 바라보다가 그 구름이 가버린 뒤에 자리를 떠났다고 함. 《新唐書 卷一百一十五 狄仁傑傳》
♣ 적공[狄公]적공은 송(宋)의 적청(狄靑)을 말한 것으로 소순(蘇洵)의 상한추필서(上韓樞密書)에, “지난번 적공(狄公)이 추부(樞府)에 있을 때는 그가 너그럽고 온후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사졸(士卒)들과도 가까이 지내 그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고 하였는데…….” 하였음.
♣ 적공비[翟公扉]적공(翟公)은 서한(西漢) 때 사람으로, 정위(廷尉) 벼슬을 할 때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파직당하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문간이 한산하기만 하였는데, 다시 복직됨에 빈객들이 찾아가려 하자, 그 문에 큰 글씨로 써서 내걸기를[大署其門曰]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 하고 일체 거절하였다 한다. 《史記 汲鄭列傳 論》
♣ 적공빈부[翟公貧富]적공은 춘추 시대(春秋時代) 사람. 그가 귀할 때는 친구가 많았으나 천할 때는 친구가 없었다 한다. 《史記 汲鄭傳》
♣ 적공지문가라작[翟公之門可羅雀]한(漢)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 손님을 좋아하여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더니, 정위에서 파면되고 나자 오는 손님이 없어서 문전에 참새만이 모여들어 새그물을 칠 만하였다.
♣ 적공파관빈객절[翟公罷官賓客絶]서한(西漢) 때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적에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더니, 벼슬을 그만둔 뒤에는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대문 밖이 한산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汲鄭列傳論》
♣ 적공한구객[翟公恨舊客]한(漢) 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 빈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왔는데, 그 관직을 그만두자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정위의 임명을 받자 빈객들이 또 몰려들었는데, 이에 적공이 분개하여 그 집 대문 앞에 “一死一生乃知交情 一貧一富乃知交態 一貴一賤交情乃見”이라고 써서 붙였다 한다. 《史記 汲鄭傳贊》
♣ 적구루[幘溝婁]고구려 때 현도군(玄ꟙ郡)에 설치한 성. 지금의 함경북도에 있음.
♣ 적궤[弔詭]적궤는 매우 괴이한 일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구(丘)나 네가 다 꿈이다. 내가 너더러 꿈이라 하는 것도 또한 꿈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적궤(弔詭)라 한다.” 하였다.
♣ 적규[赤虯]신선이 몰고 다닌다는 붉은 용.
♣ 적금대[吊金臺]천하의 현사(賢士)를 위해서 천금(千金)을 들여 황금대(黃金臺)를 세웠던 연 소왕(燕昭王)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슬퍼하는 말이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燕昭延郭隗 遂築黃金臺”라는 구절과 “攬涕黃金臺 呼天哭昭王”이라는 구절이 있다.
♣ 적대[的對]적절한 대.
♣ 적덕앙고문[積德仰高門]선조의 음덕(陰德)에 힘입어 앞으로 자손 중에 크게 출세할 자가 나올 집이라는 뜻이다. 한(漢) 나라 우공(于公)이 “옥사를 다스리면서 음덕을 많이 쌓았으니 필시 크게 될 자손이 나올 것이다. 문을 조금 크게 만들어 고관의 수레가 통과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과연 아들 정국(定國)이 뒤에 승상이 된 고사가 있다. 《漢書 于定國傳》
♣ 적로[狄盧]백거이의 구로회(九老會) 가운데 맨 끝의 적겸모(狄兼謨)와 노정(盧貞)을 합칭한 말이다.
♣ 적로[赤로]붉은 태양이 작열하는 흑수(黑水)
♣ 적로[磧鹵]염분(鹽分)이 섞인 사막을 이름.
♣ 적룡[赤龍]신선은 적용(赤龍)을 탄다.
♣ 적리[赤吏]노루의 별칭임.
♣ 적막[適莫]적(適)은 어느 사물에 열중하는 것을 말하고, 막(莫)은 그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말함.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적하지도 않고 막하지도 않아서 의리를 따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 적만부[敵萬夫]육기(陸機)의 오도부(吳都賦)에 “죽림의 밖과 속은 마치 십만 장부의 갑옷과 칼날 같네.[竹林外裏兮 十萬丈夫甲刃]"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적묘[籍畝]적전(籍田)으로, 왕이 농사하여 제사의 자성(粢盛)을 바치는 밭인데 그 부근 거민을 시켜 농사짓게 한다. 《大典會通 戶典》
♣ 적문[翟門]벼슬을 그만둔 적공(翟公)의 문이라는 뜻이다. 한대(漢代) 적공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다가, 파직된 뒤로는 그 집의 문 앞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한산해졌는데 적공이 다시 정위로 복귀함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몰려오자 적공이 대문에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친구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친구의 태도를 알고, 한 번 천하고 한 번 귀해짐에 친구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 적문라가설[翟門羅可設]문호가 쇠락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제120권 급정열전(汲鄭列傳)에, “처음에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적에는 문정에 빈객이 그득하였는데, 관직을 잃음에 미쳐서는 문정이 쓸쓸하여 새 그물을 펼 만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복직되자 빈객들이 찾아오려고 하니, 적공이 대문에다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데에서 교제하는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해지고 한 번 부자되는 데에서 교제하는 태도를 알겠으며,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지는 데에서 교제하는 정이 드러난다.’고 크게 써 붙였다.” 하였다.
♣ 적문잠[翟門箴]세력이 있으면 빌붙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염량 세태(炎涼世態)를 가리키는 말이다.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다가 관직을 그만두자 대문 앞에 새 잡는 그물을 칠 정도가 되었는데, 다시 정위로 복귀함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몰려오자 적공이 대문에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친구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친구의 태도를 알고, 한 번 천하고 한 번 귀해짐에 친구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 적반하장[賊反荷杖]도적이 도리어 뭉둥이를 듦. 죄를 범한 사람이 도리어 성을 냄.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라고 시비나 트집을 거는 것을 뜻함.
♣ 적백낭[赤白囊]위급한 사태를 조정에 보고하기 위하여 급히 올려보내는 변방의 행낭(行囊)을 말한다.
♣ 적백환[赤白丸]한 성제(漢成帝) 때에 장안(長安)의 소년들이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여 적(赤)ㆍ백(白)ㆍ흑(黑) 삼색(三色)의 탄환(彈丸)을 만들어 놓고 서로 더듬어서 적환(赤丸)을 취한 자는 무리(武吏)를 죽이고, 백환(白丸)을 취한 자는 문리(文吏)를 죽이고, 흑환(黑丸)을 취한 자는 장사(葬事)를 주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九十》
♣ 적벽[赤壁]적벽은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와 오(吳)의 주유(周瑜)가 교전했던 곳으로 중국 호북(湖北) 기어현(奇魚縣)의 동북쪽 장강(長江)가에 있는 절벽이고, 송 나라 소식(蘇軾)이 원풍(元豐) 5년(1082)7월 16일 밤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그 유명한 적벽부를 지었다.
♣ 적벽대전[赤壁大戰]일찍이 조조와 주유가 적벽(赤壁)에서 대전(大戰)이 붙었을 때, 조조는 북쪽 언덕에 있었고 주유는 남쪽 언덕에 있었는데, 주유의 진영에서 배에다 섶[薪]을 가득 싣고 가서 조조 진영의 배를 불지를 적에 때마침 동남풍이 급히 불어와 조조의 배를 모조리 불태움으로써 조조가 크게 패했던 고사가 있다.
♣ 적벽몽중유[赤壁夢中遊]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나오는 이야기.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 때 큰 학이 한 마리 날아와 뱃전을 스치고 지나갔었는데, 그날 밤 꿈에 한 도사가 찾아와 읍을 하며 인사하기에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으며, 이윽고 소동파가 정체를 알아차리고 어젯밤의 그 학이 아니냐고 하니 도사가 돌아보며 웃었다 한다.
♣ 적벽유[赤壁遊]송(宋) 나라 때 문장가 소식(蘇軾)이 적벽에서 노닌 것을 말한다.
♣ 적복부[赤伏符]참문(讖文)을 말한다. 광무제(光武帝)가 먼저 장안(長安)에 있을 때 동사생(同舍生) 강화(彊華)가 관중(關中)으로부터 적복부를 받들고 왔는데 거기에 “유수(劉秀)가 군사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토벌하니, 사이(四夷)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용(龍)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2백 28년째 되는 해에 화덕(火德)으로 임금이 되리라.” 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後漢書 光武紀》
♣ 적불[翟茀]부인이 타는 수레인데 꿩 깃으로 문을 꾸몄다 한다. 《詩經 衛風 碩人》
♣ 적불[翟紼]적불은 귀부인이 타는 수레에 가리개로 쓰기 위해 꿩깃으로 만든 물건이다.
♣ 적불[赤紱]적불은 대부가 차는 붉은 인끈을 말한다.
♣ 적사한장건적[跡似漢張騫跡]탐험가적 정신으로 중국에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며 사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리라는 뜻이다. 장건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신으로 서역(西域)의 길을 개척하여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史記 卷111》
♣ 적상산[赤裳山]전라도 무주(茂朱)에 있는 산 이름.
♣ 적상환긍저약롱[狄相還肯貯藥籠]당로자(當路者)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음. 당(唐)의 정원준(貞元濬)이 당시 재상인 적인걸(狄仁傑)에게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 섬기는 일이 마치 부잣집에서 많은 물건들을 골고루 쌓아두고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꺼내서 쓰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므로 맛있는 반찬을 위해서는 고기포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며, 질병에 대비하려면 인삼ㆍ백출 등 약재도 필요할 터인데⋯⋯이 소인이 문하(門下)에 들어가 일개 약석(藥石) 노릇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인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대야말로 우리 약상자 속에 꼭 있어야 할 물건으로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세.” 하였음. 《唐書 貞元濬傳》
♣ 적석[赤舃]적석은 옛날 천자와 제후가 신던 붉은 색의 신발로 시경(詩經) 빈풍(豳風) 낭발(狼跋)에 “公孫碩膚 赤舃几几”라 하였고, 시경 대아(大雅) 한혁(韓奕)에 “王錫韓侯 玄袞赤舃”이라 하였다.
♣ 적석[赤舃]한 명제(漢明帝) 때 상서랑(尙書郞)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에 올라올 적마다 물오리를 타고 오곤 하였는데, 그 오리를 잡고 보니 상서랑 재직시에 하사받았던 신발이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王喬傳》
♣ 적석하표준[赤石霞標峻]진(晉) 나라 때의 문장가인 손작(孫綽)의 유천태산(遊天台山) 부에 “적성산엔 놀이 일어나 표지를 세웠다.[赤城霞起而建標]" 한 데서 온 말이다.
♣ 적선[謫仙]인간 세상에 귀양온 신선이란 뜻으로 시인(詩人) 이백(李白)을 말함. 당서(唐書) 이백전(李白傳)에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의 글을 보고 감탄하며 ‘그대는 인간 세상에 귀양온 신선이오.’ 하고 현종(玄宗)에게 말하니 현종이 금란전(金鑾殿)에서 만나보았다.” 하였다.
♣ 적선[謫仙]적선은 천상(天上)에서 죄를 얻어 일시 인간에 내려온 신선을 말하는데,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당 현종 때 이백(李白)이 장안(長安)에 이르러 하지장을 찾아보았을 적에 하지장이 이백의 글을 보고 감탄하기를 “그대는 적선인(謫仙人)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적선인[謫仙人]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귀양온 사람. 당(唐) 나라 하지장이 일찍이 이백을 추어올려 적선인(謫仙人)이라 불렀다.
♣ 적선지가[積善之家]“선을 쌓아온 집에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란 주역(周易)의 말이 있다.
♣ 적선천상인[謫仙天上人]하늘에서 유배당해 땅으로 내려온 신선이라는 뜻으로, 하지장(賀知章)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탄복하여 붙여준 이름인데, 여기서는 기암의 부친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높여 부른 말이다.
♣ 적성[赤城]단양(丹陽)에 있는 성 이름이다.
♣ 적성[赤城]도교(道敎)의 전설 속에 나오는 삼십육 동천(三十六洞天)의 하나로, 가야산(伽倻山)의 선경(仙境)을 비유한 말이다.
♣ 적성[赤城]순창의 옛 이름이다.
♣ 적성[赤城]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천태산(天台山)의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고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다. 문선(文選)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하였다.
♣ 적성산[赤城山]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는 산 이름인데, 흙이 온통 놀[霞]빛처럼 붉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적성표[赤城標]적성(赤城)은 중국 천태산(天台山) 북쪽 6리 지점에서 천태산의 남문(南門) 역할을 하는 산 이름으로,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일으켜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이백(李白)이 받아 시 ‘천태효망(天台曉望)’에서 “산문엔 적성의 노을이 표지로 내걸리고, 누대엔 창주(滄洲)의 달빛이 여전히 머물렀네.[門標赤城霞 樓棲滄島月]”라고 노래하였다. 《李太白集 卷20》
♣ 적성하[赤城霞]적성은 신선이 산다는 산인데, 땅은 붉은색이고 형태는 구름과 놀이 일어 성첩(城堞)과 같다 한다. 즉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 적성하[赤城霞]적성은 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에 있는 산 이름인데 흙 색깔이 놀[霞]과 같이 붉으므로 일컬어진 말이다. 《讀史方輿紀要 浙江 天台山》
♣ 적성하색[赤城霞色]적성산은 중국 절강(浙江)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흙빛깔이 노을빛처럼 붉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선(文選) 권11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의 “노을이 피어나는 적성산에 표지를 세우고[赤城霞起而建標]”에서 나온 것으로, 변방의 풍경을 뜻한다.
♣ 적소[積蘇]땔나무를 쌓은 것으로 보잘것없는 사물을 비유함.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그 궁궐과 정자가 흙덩이를 쌓고 땔나무를 쌓음과 같다.[其宮榭若累塊積蘇]"하였음. 목재로 지은 높은 누각을 형용하는 말이다.
♣ 적소성다[積小成多]적은 것도 모으면 많아진다는 뜻. 티끌 모아 태산.
♣ 적송[赤松]적송자. 신농시(神農時)의 우사. 수옥(水玉)을 입었다 함.
♣ 적송반[赤松飯]신선이 먹는 붉은 소나무의 솔씨를 말한다.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옛날 악전(偓佺)이란 사람은 약을 캐는 사람이었는데 솔씨를 즐겨 먹었더니 몸에 털이 나고 날아다녔으며, 그에게서 솔씨를 얻어먹은 사람들도 모두 3백 살을 살았다.” 하였다.
♣ 적송유[赤松遊]적송자는 신선인데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인간 일을 버리고 적송자를 좇아 놀고자 한다.” 하였다. 《漢書 張良傳》
♣ 적송자[赤松子]상고 시대의 신선 이름으로, 여러 서책에 나오는 사적(事蹟)이 서로 다르다. 적송자(赤誦子), 적자여(赤子輿)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장량(張良)이 ‘이제 세 치의 혀로써 제왕의 스승이 되어 만호(萬戶)를 봉받고 지위가 열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영광이 극에 이르렀다. 나는 이에 만족할 뿐이고, 다만 원하는 바는 인간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는 것이다.’하였다.” 하였다.
♣ 적수공권[赤手空拳]손에 힘을 주어 보지만, 주먹에 아무 힘이 없다. 맨손과 맨주먹, 즉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 적수성연[積水成淵]물을 모아서 연못을 이룬다
♣ 적수주[赤水珠]적수현주(赤水玄珠)라는 책을 말한다. 이 책은 명 나라 손일규(孫一奎)가 지었는데 모두 30권이며, 한(寒)ㆍ열(熱)ㆍ허(虛)ㆍ실(實)ㆍ표(表)ㆍ리(裏)ㆍ기(氣)ㆍ혈(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적수현주(赤水玄珠)라고 한 것은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놀다가 현주를 잃었다.”는 장자(莊子)의 말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四庫提要 子 醫家類》
♣ 적수주[赤水珠]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고 무심(無心)을 뜻하는 상망(象罔)이 찾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실려 있다.
♣ 적시강담구[迹是江潭舊]조정에서 방축(放逐)되었다는 말이다. 초(楚) 나라 굴원이 일단 쫓겨난 다음에 강담에서 노닐고 택반에서 읊조렸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는 초사(楚辭) 어부(漁父)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 적신[積薪]나무를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먼저 벼슬한 사람보다 중용되어 먼저 벼슬한 사람은 항상 미관 말직에 있음을 한탄한 것인데, 한(漢) 나라 때 급암(汲黯)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폐하께서 뭇 신하들을 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쌓는 것과 같아서 나중에 벼슬한 자가 윗자리에 있게 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汲黯傳》
♣ 적신중[積薪中]벼슬하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람을 쓰는데 먼저 벼슬한 사람보다 뒤에 벼슬한 사람을 높여서 쓰니 급암(汲黯)이, “폐하의 사람 쓰는 것은 장작을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온 자가 위에 올라갑니다.” 하였다.
♣ 적신탄[積薪歎]장작을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 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전임자(前任者)보다 중용되고, 전임자는 항상 미관말직에 있게 되어 중용되지 못함을 한탄하는 일을 말한다. 《史記 汲黯傳》
♣ 적안[赤岸]적안은 전설상의 지명으로, 매승(枚乘)이 지은 ‘칠발(七發)’에 “적안을 뛰어넘어 부상을 청소한다.[凌赤岸篲扶桑]”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적안의 물은 은하와 통하고, 그림 속의 구름 기운 용을 따르네.[赤岸水與銀河通 中有雲氣隨飛龍]”라는 구절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9 戱題王宰 山水圖歌》
♣ 적야랑[太白飄然謫夜郞]이백(李白)이 역적(逆賊) 영왕(永王) 인(璘)의 부하로 있었으므로, 인이 패한 뒤에 야랑(夜郞)으로 귀양갔다.
♣ 적여구산[積如丘山]산과 같이 많이 쌓임.
♣ 적연부동[寂然不動]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생각도 없이 함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일단 감응하면 천하의 모든 일에 두루 통한다.[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는 말이 있다.
♣ 적외민[籍外民]호적에 누락된 백성. 곧 조세를 내지 않는 백성을 말한다.
♣ 적우침주[積羽沈舟]새털 같은 가벼운 물건도 많이 쌓이면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뭇사람의 참소가 대단히 무서움을 의미한 것이다.
♣ 적위[赤尉]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된 관리를 뜻하는 말이다. 참고로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조정에도 못 가는 법관이라고 속상해하지 마오, 부윤 쫓아다니는 적위보단 낫지 않소.[勿嫌法官未登朝 猶勝赤尉長趨尹]”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4 贈崔立之評事》
♣ 적인걸[狄仁傑]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丹)의 침략군을 물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
♣ 적일비홍[迹一飛鴻]소식(蘇軾)의 “떠도는 우리 인생 무엇과 같다 할까, 눈 쌓인 갯벌에 내려앉는 기러기와 흡사하네.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겨 놓고, 날아가면 또다시 동쪽 서쪽 따지리요.[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3 和子由澠池懷舊》
♣ 적잉함[籍仍咸]완적과 완함. 진(晉) 나라 때 죽림 칠현(竹林七賢) 중 두 사람인데 숙질(叔姪) 간이다.
♣ 적자[摘髭]아주 쉽게 과거 급제한 것을 비유한 말. 한유(韓愈)가 최립지(崔立之)에게 부친 시에 “해마다 과거 급제를 따내되 턱 밑의 수염을 뽑듯 하누나[連年收科第 若摘頷底髭]”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五》
♣ 적자[赤子]적자는 온순한 백성을 가리킨 말이다.
♣ 적자생존[適者生存]주변 환경에 알맞은 것이 살아 남음. 생존 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도태되어 사라짐
♣ 적자용사[赤子龍蛇]무지한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한유(韓愈)가 운조복절도관찰등사(鄆曹濮節度觀察等使) 마공(馬公)을 칭송한 운주계당시서(鄆州谿堂詩序)에 “공(公)이 고을에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백성들이 교화가 되지 못하여 무(武)로 다스리면 분개하여 원망을 품고, 은혜로 다스리면 방자해지므로 한편으로는 적자(赤子)로 취급하고, 한편으로는 용사(龍蛇)로 취급하여 오랜 세월 동안 노심 초사를 거듭하고 나서 교화가 크게 행해진 다음에는 백성들이 모두 공을 친부모처럼 떠받들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補遺》
♣ 적재적소[適材適所]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씀.
♣ 적적[浟浟]이익을 탐내는 모양.
♣ 적적[滴滴]물방울이 계속하여 떨어지는 모양, 흘러 움직이는 모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윤이 나고 아름다운 모양
♣ 적적[寂寂]외롭고 쓸쓸한 모양
♣ 적전[赤箭]수자해좃의 어린 뿌리. 한방(漢方)에서 강장제로 사용한다.
♣ 적전[籍田]적전(籍田)은 임금이 친히 농사를 지어 종묘에 제사지낼 쌀을 수확하고 백성에게 농사를 권하는 것인데, 임금이 몸소 따비로 세 번 밀어서 갈아 보는 것이다.
♣ 적전청지[赤箭靑芝]적전은 지초(芝草)의 유로 영약인데 줄기가 화살대처럼 생기고 적색임. 청지도 영약임.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赤箭靑芝牛溲馬勃敗鼓之皮 俱收竝蓄 待用無遺者 醫師之良也"라 하였음.
♣ 적제[狄鞮]적제는 통역(通譯)이라는 뜻이다. 상고 때 서쪽 외국의 통역을 맡은 통역관의 칭호. 곧 외국을 뜻함.
♣ 적제자[赤帝子]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말한다. 적제는 남방(南方)의 신(神)인데 한(漢)은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하여 적색(赤色)을 숭상하였으므로 말한다. 유방이 술이 취하여 밤에 택중(澤中)을 지나다가 칼을 뽑아 뱀을 베었는데 뒤에 온 사람이 그곳에 이르니 노구(老嫗)가 울면서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이 되어 길에 나왔다가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베어졌다.”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
♣ 적제적룡[赤帝赤龍]더위를 말한다. 적색(赤色)은 여름의 색깔이므로 여름을 맡은 신을 적제라 하며, 적룡(赤龍)은 적색의 용으로서 불[火]을 뜻한다.
♣ 적조[寂照]불교에서 참[眞]된 이(理)의 본체가 적[寂]이라 하고 그 참의 쓰임[用]을 조(照)라 한다.
♣ 적지[赤墀]황제가 거처하는 궁전의 섬돌 바닥은 붉은칠을 한다 하여 대궐을 뜻한다.
♣ 적진성산[積塵成山]티끌 모아 태산.
♣ 적천신[積千薪]사기(史記) 급암열전(汲黯列傳)에 한(漢) 나라 급암(汲黯)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후배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늦게 쌓는 장작이 위에 올라감을 비유로 들어 한 무제(漢武帝)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던 고사가 전한다. 소식(蘇軾)의 시 송정육표제(送程六表弟)에 “청삼이여 말단 관직 싫어하질랑 마오, 백발의 이 몸 위에도 장작이 천 층 쌓였으니.[靑衫莫厭百僚底 白髮上有千薪積]”라는 표현이 있다.
♣ 적초어[赤梢魚]문어를 말함
♣ 적취헌[積翠軒]정자 이름. 동래 객관(客館) 뒤에 있었다.
♣ 적치[赤幟]사수(泗水)의 정장(亭長)으로 있던 유방(劉邦)이 붉은 깃발을 들고일어나 후에 한(漢)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한(漢)은 적색(赤色)을 숭상했기 때문에 붉은 깃발을 썼다.
♣ 적토성산[積土成山]흙이 쌓여 산을 이룸. 작은 것을 힘써 모아서 큰 것을 이룸을 뜻하는 말이다.
♣ 적토청룡[赤兎靑龍]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관우(關羽)가 사용했던 말과 칼이다.
♣ 적표[赤豹]붉은 털에 검은 무늬가 있는 표범.
♣ 적하편[擿瑕編]왕발(王勃)은 당 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안(子安). 어릴 때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9세에 안사고(顔師古)가 주(注)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적하편을 지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다. 《新唐書 王勃傳》
♣ 적홀일상[積笏一床]당 현종(唐玄宗) 때 최신경(崔神慶)의 가문에서 무려 80여 인의 고관(高官)이 나왔으므로, 집안에서 잔치를 벌일 때에는 상 위에 쌓아 놓은 홀들이 수북했다.[一榻置笏重疊于其上]는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77 崔義玄傳》
♣ 적환[謫宦]관리(官吏)가 죄에 걸려 폄척(貶斥)받아서 좌천(左遷)되는 것을 말한다.
♣ 적환공[赤환公]붉은 빛의 잉어를 말함. 옛날에 선인(仙人) 금고(琴高)가 붉은 잉어를 타고 탕수(碭水)로 들어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소식(蘇軾)의 개선수옥정시(開先漱玉亭詩)에 “원컨대 금고생을 따라서 적완공을 타보고 싶네[願隨琴高生 脚踏赤환公]”하였다. 《蘇東坡集 卷二十三》
♣ 전[轉]도리어.
♣ 전[蹍]밟다.
♣ 전[荃]향초(香草) 이름인데,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임이란 말을 전(荃)이라고 대신 썼다.
♣ 전각[剪刻]재단하고 조각하는 것을 말한다
♣ 전감[傳柑]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을 때 지은 시 ‘상원시음루상(上元侍飮樓上)’에 “猶有傳柑遺細君”의 구절이 있는데, 자주(自注)에 “누상(樓上)에서 황제를 모시고 술을 마실 때면 귀척(貴戚)들이 다투어 근신(近臣)에게 황감(黃柑)을 주곤 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전감(傳柑)이라 하였다.”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36》
♣ 전감의혈기시호[戰酣蟻穴幾時好]몽환(夢幻)과 같은 세속의 권력을 서로들 차지하려고 아귀 다툼을 벌이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개미 구멍 속의 이른바 대괴안국(大槐安國) 속에 들어가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다가 꿈에서 깨었다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 전감절[傳柑節]상원(上元) 즉 정월 15일을 이름. 고사(故事)에 상원일 밤에 근신(近臣)들이 임금을 모시고 술을 마시면 귀척(貴戚)들이 다투어 황감(黃柑)을 근신들에게 전해 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전갱[籛鏗]전갱은 요(堯) 임금 때 사람으로 팽성(彭城)에 봉하였기 때문에 팽조(彭祖)라고도 하는데, 7백 67살이 되었어도 노쇠하지 않았다 한다. 《列仙傳》
♣ 전거[氈車]담요로 포장을 친 호인(胡人)의 수레를 말한다.
♣ 전거[轉車]불법(佛法)을 말한 것. 먼저 부처나 뒤에 부처나 그 발자취가 굴러가는 수레와 같다는 데에서 나온 말임. 《沈約 千佛讚》
♣ 전거[專車]수레를 혼자 타고 다님을 말한다. 진서(晉書) 화교전(和嶠傳)에 “교가 중서령(中書令)에 승진되자 임금이 매우 예우(禮遇)하였다. 그때 순욱(荀勖)이 감령(監令)이 되었는데, 교는 순욱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그와 수레를 함께 탈 적마다 호기를 부려 수레를 독차지하고 앉으므로, 임금이 감령으로 하여금 다른 수레를 타도록 하였다.” 한다.
♣ 전거[前車]후인이 경계해야 할 지나간 일들. 순자(荀子) 성상(成相)에, “앞 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그것을 모른다면 깨달을 때는 언제일 것인가.” 하였음.
♣ 전거가감[前車可鑑]전인(前人)의 실패를 보고 후인(後人)은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전거지감[前車之鑑]앞 수레를 거울로 삼음. 지난날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대비함
♣ 전거후공[前倨後恭]이전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편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 것을 비유한 고사성어.
♣ 전겸모[典兼謨]상서(尙書)의 요전(堯典),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등을 가리키는바, 상서(尙書)를 가리킨다.
♣ 전겸익[錢謙益]청(淸) 나라 정치가이자 시인.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 우산종백(虞山宗伯)으로 시에 능하였고,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벼슬이 이르렀다. 열조시집(列朝詩集)을 만들었는데, 고종(高宗) 때에 와서 비방(誹謗)의 내용이 많다 하여 책판[版]을 불태워버리고 간행을 금했다가 청 나라 말기에 와서야 다시 간행되었음. 저서에는 초학집(初學集)ㆍ유학집(有學集)ㆍ목재집(牧齋集)이 있고, 집록(輯錄)으로는 열조시집(列朝詩集)이 있음. 《淸史 錢謙益傳》
♣ 전경[錢卿]전곤(錢昆)을 이른다.
♣ 전경곤루의[鱣鯨困螻蟻]한(漢) 나라 가의(賈誼)의 굴원을 조상하는 부[弔屈原賦] 끝 구에, “강과 바다에 비낀 전어와 고래가 개미에게 욕을 본다.”는 구절이 있다.
♣ 전경인루의[鱣鯨因螻蟻]하찮은 일로 곤욕을 치르는 데 비유한 말이다.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강호의 고래가 진실로 개미에게 제재를 당한다.[橫江湖之鱣鯨兮 固將制於螻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전계[前溪]악부(樂府)의 이름으로, 전계곡(前溪曲) 또는 전계가(前溪歌)라고 함.
♣ 전계[展季]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킨다. 유하(柳下)는 전금(展禽)의 읍(邑)이고, 계(季)는 그의 자(字)이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있게 되었다 한다.
♣ 전계삼출[展季三黜]노(魯)의 대부(大夫) 유하혜(柳下惠)가 사사(士師)로서 세 번씩이나 물리침을 당하고서도 노 나라를 떠나지 않았음. 그는 자(字)가 계(季)이고 이름은 획(獲)이다. 《荀子 成相》
♣ 전곡[戩ꜘ]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편에, “너로 하여금 그지없이 선하게 하리라.[俾爾戩ꜘ]”라는 말이 있는데, 전(戩)은 진(盡)이요, 곡(ꜘ)은 미(美)의 뜻이라 한다.
♣ 전곤[錢昆]그가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때 누가 “어느 고을을 마음에 두느냐?"고 묻자 “게[蟹]만 있고 통판(通判)이 없는 고을이면 되겠노라.” 대답했다 한다. 《歸田錄》
♣ 전곤[轉坤]위급한 국면을 만회하고 새로이 개혁 정치를 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하늘과 땅을 되돌려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다는 ‘선건전곤(旋乾轉坤)’의 준말이다.
♣ 전공[全功]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공(事功)을 말한다.
♣ 전공두보낭[全空杜甫囊]술 사 마실 돈도 없이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뜻.
♣ 전공소혁혁[田公笑嚇嚇]농가어(農家語)에 의하면, 섣달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가문 해에는 반드시 눈이 많이 오는 것이므로,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섣달에 눈 오는 것을 보면, 농부가 껄걸 웃는다.[臘月見三白 田公笑嚇嚇]" 한 데서 온 말이다.
♣ 전관호색[轉關護索]전관과 호색은 모두 악보(樂譜) 비파곡(琵琶曲)의 이름이다.
♣ 전괄[箭筈]화살의 머리로서 활줄이 닿는 곳을 말한다.
♣ 전괄거상[箭筈車箱]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를 말하는데,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六》
♣ 전광석화[電光石火]번갯불의 섬광과 부싯돌이 부딪쳐 튀는 불똥. 매우 빠름을 뜻함. 즉, 아주 빠른 동작이나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말.
♣ 전구[氈裘]북방의 유목민들이 입는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 전구[氈裘]전구는 털로 짜서 만든 갖옷인데 서북 지방의 오랑캐들이 입으므로 서강(西羗)이나 흉노의 추장을 가리킨다.
♣ 전국책[戰國策]전국책은 나라별로 나눠 편찬한 고대 사료 총집이다. 이 책은 결코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아마 전국 혹은 진한시기 사람이 각국의 사료를 이리저리 수집하여 편찬해 만든 것일 것이다. 서한시기에 유향이 이를 정리해 나라에 따라 순서을 매기고 33편으로 편집한 후 전국책(戰國策)이라 이름지었다. 전국책은 주로 전국시대의 지모가 뛰어난 신하와 책략가들이 변설한 말을 기술했는데, 그 중에는 생생하게 사건을 서술하고 인물을 형용해낸 문장이 적지 않다.
♣ 전국책[戰國策]중국 전한 시대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서적 33권. 서주(西周)ㆍ동주(東周)ㆍ진(秦)ㆍ제(齊)ㆍ초(楚)ㆍ조(趙)ㆍ위(魏)ㆍ한(韓)ㆍ연(燕)ㆍ송(宋)ㆍ위(衛)ㆍ중산(中山)의 12책으로 이루어졌다. 서주ㆍ동주란 효왕(孝王) 이후ㆍ분열한 두 주(周)를 말하는 것으로서 춘추 이전의 주를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ㆍ위ㆍ한 3국이 진(晋)을 분열한 데서 시작하여 제와 연과의 싸움, 유협ㆍ자객의 일, 소진, 장의 등의 합종(合從) 연횡(連橫)의 설을 기술하고 연의 멸망에서 끝난다. 기록된 것은 사기(史記)의 기재와 합치되는 바가 많다. 사기는 전국책(戰國策)을 중요한 사료로 삼았음은 사마천 자신도 언급한 바 있는데 지금의 전국책은 또 사기의 글에 따라서 개정한 데가 있다고 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분류에서는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에 속해 있는데 책 중의 종횡가의 의론과 실제의 사실과는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한(漢)의 고유(高誘)의 주는 잔결(殘缺)이나마 존재한 것을 송의 요굉(姚宏)이 교정 속주한 것이 현재 전해지고 있고 청의 황비열(黃丕烈)의 전국책찰기(戰國策札記)는 고유의 주와 속주(續注)를 구별한 것이다.
♣ 전국칠웅[戰國七雄]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 7대 강국을 뜻하는 고사성어.
♣ 전귀[全歸]몸을 조금도 훼상(毁傷)함이 없이 그대로 죽는 것을 이름.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은 삼(參)이고 자가 자여(子輿)인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었으니, 자식이 온전히 돌아가야만 효(孝)라 할 수 있는 것이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祭義》
♣ 전귀락[全歸樂]인생은 누구나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었으므로, 자식의 의당 한 걸음 걷는 일도 매우 조심하여 부모의 유체(遺體)를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온전하게 죽어야만이 효자라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祭義》
♣ 전귀행지면[全歸幸知免]부모의 유체(遺體)를 조금도 훼상(毁傷)시키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여 죽는 것을 이른 말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났을 때 제자들을 불러 이르기를, “이불을 걷고 내 손발을 보아라. …… 지금에야 내가 몸 훼상됨을 면한 줄 알겠다[啓予足 啓予手 而今而後吾知免夫].” 하였다. 《論語 泰伯》
♣ 전금[田禽]’밭의 새’는 주역(周易) 사괘(師卦)의 “새가 밭에 와서 곡식을 먹으면 잡아도 된다.”고 한 그 ‘밭의 새’이다.
♣ 전금[展禽]자는 계(季), 시호는 혜(惠)인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킨다. 유하혜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어진 대부로, 이름은 획(獲)인데, 유하(柳下)에 살았으므로 유하혜라고 불렀다.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 下)에 “유하혜는 성자(聖者)의 온화한 면을 지닌 사람이다.” 하였다.
♣ 전금출[展禽黜]전금은 춘추 시대 노(盧) 나라 유하혜(柳下惠)의 이름. 유하혜가 사사(士師)가 되었다가 세 번 쫓겨나자, 혹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곳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면 어디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으며, 도를 굽혀 임금을 섬기려면 왜 굳이 조국을 떠날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微子》
♣ 전기[專氣]여자와의 관계가 없는 순수한 양기(陽氣)를 이른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잘 보유해야만 도를 얻어 소년ㆍ소녀와 같이 된다고 한다.
♣ 전기[錢起]전기는 당(唐) 나라 사람, 자는 중문(仲文). 시에 뛰어났음.
♣ 전낙지[錢樂泄]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나라 때 사람. 혼천의(渾天儀)를 만듬.
♣ 전다육[顚茶陸]육우(陸羽)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홍점(鴻漸). 차를 매우 즐겨 다경(茶經) 3편을 지었으며, 차를 파는 자들은 그를 높여 다신(茶神)이라 하였다.
♣ 전다정[煎茶井]한송정 구역에 차샘[茶泉]ㆍ돌부엌ㆍ돌절구가 있으니, 곧 술랑(述郞) 등 국선(國仙)의 무리가 놀던 곳이다.
♣ 전단[旃檀]인도(印度)에서 나는 향나무 이름. 조각도 하고, 뿌리와 함께 가루를 만들어 향으로 쓴다.
♣ 전단수[栴檀樹]인도에서 나는 향목(香木)으로 향기가 아주 강렬하다.
♣ 전당[鱣堂]강당(講堂)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진(楊震)이 강의를 하던 강당 앞에 새가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 전당[錢塘]고을 이름.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음.
♣ 전당[錢塘]전당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절강을 말하는데, 이곳에 조수가 밤낮으로 두 차례씩 들어 주민들이 막심한 폐해를 겪어오다가 삼국(三國) 시대에 화신(華信)이 흙이나 돌 1곡(斛)을 날라오는 자에게는 1천 전을 주겠다고 상금을 내걸고 열 달 사이에 둑을 완축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전당이라 부르는 것은 돈을 내걸고 수축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讀史方輿紀要 浙江》
♣ 전당대소[錢塘待蘇]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전당호(錢塘湖)를 수축하여 관개 사업을 한 것을 말한다. 보통 소공제(蘇公隄) 혹은 소제(蘇隄)라고 한다. 《宋史 河渠志 7》
♣ 전당려구[錢塘麗句]연꽃으로 유명한 전당호(錢塘湖)와 관련하여 시인들이 지은 아름다운 시구를 말한다. 참고로 백낙천(白樂天)은 전당호가 있는 항주(杭州)의 자사(刺史)를 지냈고, 소동파(蘇東坡) 역시 이곳의 통판(通判)을 지냈는데, 그들의 시집을 보면 전당호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 전당소[錢唐蘇]전당(錢唐)은 항주(杭州)로서,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나갔던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宋史 卷338》
♣ 전당조락[錢塘潮落]원(元) 나라가 남송(南宋)을 쳐서 멸할 때에 전당강(錢塘江)에 매일 오던 조수(潮水)가 그때에는 이르지 않았다 한다.
♣ 전당팔월조[錢塘八月潮]전당은 절강(浙江)의 하류. 조수가 밤과 낮 두 번씩 드는데, 그 파도가 하늘에 치솟고 굉음이 지축을 울린다.
♣ 전대[專對]사신이 되어 자유자재로 응대(應待)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의 학문을 말한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시경(詩經) 3백 편을 외도 정사를 맡길 때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사방에 사신으로 보낼 때 독단(獨斷)하여 응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안다 하더라도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論語 子路》
♣ 전대미문[前代未聞]앞 시대에 아직 들어 본 일이 없는 일. 곧, 어떤 일의 시초.
♣ 전대중사호[專對重使乎]전대는 사신이 외국에 나가 독자적으로 임기응변하며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백옥(蘧伯玉)의 사신이 전대를 잘 하자 공자(孔子)가 훌륭한 사신[子曰 使乎使乎]이라고 두 번이나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論語 憲問》
♣ 전대해위[專對奚爲]전대는 나라의 전권대표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해위(奚爲)는 쓸모 없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子路에 공자가 이르기를 “시(詩) 3백 편을 외우고도 사방에 사명을 받들어 행함에 능히 나라를 대표[專對]하지 못하면 또한 무엇에 쓰겠느냐.[亦奚以爲]"고 한 것을 인용한 것임.
♣ 전도[躔度]별이 하늘에서 운행하는 도수(度數)를 말한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에 “28수(宿)의 전도가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하였다.
♣ 전도양양[前途洋洋]앞길이 바다와 같음. 장래가 매우 밝음.
♣ 전도요원[前道遼遠]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멂.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멂.
♣ 전도유랑[前度劉郞]당(唐) 유우석(劉禹錫)이 귀양갔다 와서 거듭 현도관(玄都觀)에 놀면서, “복숭아 심은 도사(道士)는 지금 어디 갔는고. 전에 왔던 유랑(劉郞) 지금 또 왔네.”란 시를 지었다.
♣ 전동정[轉動政]정기적으로 승진ㆍ출척시키는 도목정(都目政)에 반하여 무시로 관직을 제수하는 정사.
♣ 전두[纏頭]기생들에게 상품(賞品)으로 주는 비단을 말한다.
♣ 전두[纏頭]노래나 춤을 추는 예인(藝人)들에게 주는 재물로, 행하(行下)를 말한다.
♣ 전두문[田竇門]전씨와 두씨(竇氏)는 모두 한(漢) 나라 때 왕실의 외척이었던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과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다가 끝내 두영은 전분의 참소에 의해 잡혀 죽었고, 전분 또한 두영의 원귀(寃鬼)에 의해 곧 죽었다. 《史記 卷一百七》
♣ 전둔력조양장군[前屯歷弔楊將軍]명 나라 요동 총병관(遼東摠兵官) 양조(楊照)를 가리킨다. 양조는 자가 명원(明遠)이며, 충성스럽고 용감하였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오랑캐와 싸우다가 죽었다. 그의 패루(牌樓)가 전둔위(前屯衛)에 있다. 《明史 卷60 楊照列傳》
♣ 전등[傳燈]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을, 등불이 등불에 광명(光明)을 전하는 데 비유하여 전등(傳燈)이라 한다.
♣ 전랑[錢郞]당 나라 시인 전기(錢起)를 이름인데 자는 중문(仲文)이요 오흥(吳興) 사람이다.
♣ 전랑[錢郞]일반적으로 당 나라 때 십재자(十才子)의 일원인 전기(錢起)와 낭사원(郎士元)의 합칭으로 인용되는데, 고공낭중(考功郎中)벼슬을 지내고 물러났던 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 전려[傳臚]과거(科擧)에 우등(優等)으로 급제한 것을 가리킨다.
♣ 전려[氈廬]북쪽에 있는 흉노들은 추위를 막기 위하여 털로 휘장을 만들어 사용하므로 붙여진 이름.
♣ 전로[電露]금강경(金剛經)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 이슬방울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如露亦如電]”는 말이 나온다.
♣ 전룡[錢龍]큰 뱀을 말하는데, 용(龍)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 전륵[鈿勒]자개를 박아서 만든 의자.
♣ 전모[典謨]전은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며, 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 등의 편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용이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논하였다. 일반의 경전(經傳)을 말하기도 한다.
♣ 전모급명고[典謨及命誥]서경(書經)을 읽어보면 정치하는 방법이 빈틈없이 나왔다는 뜻. 전은 요전ㆍ순전을 말하고, 모(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 등을 말하고, 명(命)은 열명(說命)을 말하고, 고(誥)는 중훼지고(仲虺之誥)ㆍ탕고(湯誥) 등을 말한다.
♣ 전목재[錢牧齋]목재는 청(淸) 나라 학자 전겸익(錢謙益)의 호이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으로 청 나라 당대에 크게 이름을 날렸고, 초학집(初學集)ㆍ유학집(有學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전무후무[前無後無]그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음.
♣ 전문감풍생[田文感馮生]전문(田文)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정승이었던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이다. 천하의 현사(賢士)를 초청하여 식객(食客)이 3천 인을 넘었는데, 실권(失權)을 하자 그들 모두가 그 곁을 떠나갔다. 뒤에 다시 복권(復權)이 되었을 때 맹상군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에 침을 뱉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풍환(馮驩)이 “부귀해지면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고 빈천해지면 친구도 적어지는 것은 사리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고 하면서 시장 거리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 맹상군이 감복을 하여 선비를 잘 대접했다고 한다. 《史記 卷75》
♣ 전문루적[田文淚滴]전문(田文)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이다. 제 나라 옹문에 살았던 옹문자주(雍門子周)는 본디 금곡(琴曲)에 뛰어나서 그가 거문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데, 그가 일찍이 맹상군 앞에서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소재로 하여 거문고를 한 곡조 타니, 맹상군이 슬퍼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善說》
♣ 전문체련[田文涕漣]전문(田文)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성명. 옹문주(雍門周)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서 부귀 공명의 무상함을 슬피 노래하자, 맹상군이 비상(悲傷)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善說》
♣ 전반향[篆盤香]향(香)을 전자(篆字)처럼 만들어서 12시 백각(百刻)으로 하여 일주야(一晝夜)를 태운다.
♣ 전발[翦髮]개원전신기(開元傳信記)에 “귀비가 항상 말로써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자 임금이 노하여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짐차에 태워 사가(私家)로 내보냈다. 귀비가 머리털을 베어 역사에게 주며 ‘다른 진귀한 물건은 다 임금이 주신 바이니 드릴 만한 것이 못되고, 이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바이니 첩(妾)의 연모하는 뜻을 드릴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머리털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바로 역사를 시켜 다시 돌아오게 했다.” 하였다.
♣ 전벽[錢癖]금전에 대한 욕심이 강함을 말한다.
♣ 전복거후거계[前覆車後車戒]앞에 뒤집어 진 수레는 뒷 수레의 경계가 됨. 전인(前人)의 실패를 보고 후인(後人)은 경계 삼아야 함을 비유
♣ 전봉[轉蓬]다북쑥을 굴린다[轉蓬]는 말은 바람에 나부끼는 다북쑥을 의미한 것이다.
♣ 전부[銓部]전부는 전조(銓曹), 즉 이조(吏曹)의 별칭이다.
♣ 전부습호[傳不習乎]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 중 한 가지. 배웠던 것에 대해 몸에 익도록 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 전부정승[戰不正勝]싸움에는 이길 것을 정하지 아니한다. 이 말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26년 조(條)에, “出師 不正反 戰不正勝”이라 보임.
♣ 전비[田費]한(漢) 나라가 일어난 후로 역학(易學)의 시조로 일컬어진 전하(田何)와 그의 학문을 수전(數傳) 후에 이어받은 비직(費直)을 합칭한 말이다. 《漢書 卷八十八》
♣ 전사[篆沙]모래 위의 전자(篆字). 모래 위를 밟고 다녀서 난 발자국이 마치 전자 모양으로 된 형태를 말한 듯하다.
♣ 전사[傳舍]역관(驛館)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합관요(蓋寬饒)가 당시의 귀족인 허백(許伯)의 새 집 지은 낙성식(落成式)에 가서 새 집을 쳐다보며, “부귀(富貴)는 무상(無常)하여 문득 사람을 바꾸는 것이니, 비유컨대, 전사(傳舍)와 같아서 사람을 많이 겪을 것이다.” 하였다.
♣ 전사[塡詞]전사는 한시(漢詩)의 한 체(體)로서 성운(聲韻)의 평측(平仄)에 적당한 자구(字句)를 세워서 짓는 시이다.
♣ 전사계포[田舍季布]전답 사이에 있는 농사지을 때 거처하는 집. 스스로 팔려 온 자를 사들인 주가(朱家)는 그가 계포(季布)인 것을 마음으로 의식하고 그를 그대로 전사에다 두게 하고는 그 길로 낙양(洛陽)으로 가 여음후등공(汝陰侯滕公)을 찾아 몇 날을 묵은 다음 여음후를 통해 고조(高祖)에게 간하게 하여 결국 계포를 무사하게 만들었음. 《史記 卷100》
♣ 전삼후삼[前三後三]선가(禪家)에 전삼삼ㆍ후삼삼이란 화두가 있다.
♣ 전상[典常]언제나 지켜야 할 법도 또는 도리(道理).’전상을 붙든다.’ 함은 지도자로서의 모범이 됨을 말한다.
♣ 전상[田常]춘추시대 제(齊)의 사람. 자기 임금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뒤에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음. 《史記 魯世家》
♣ 전생[錢生]중당(中唐) 시인 전기(錢起). 대력(大歷) 10재자(才子)의 하나. 그가 과거할 때, “상수의 영이 비파를 탐[湘靈鼓瑟].”이란 시제(試題)에 지은 시 끝귀에, “곡이 끝나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강위에 두어 봉이 푸르르다[曲終人不見 江上叛峯靑].” 하였는데, 전기가 소시에 길을 가다가 역정(驛亭)에서 자는데, 이 글귀를 외우는 이가 있으므로 문을 열어본 즉 사람은 없었으니 아마 귀신의 글귀였다. 그 뒤에 과거 볼 때에 이 시제(試題)에 글을 짓다가 끝 귀에 이 글귀를 써넣어서 합격하였으므로 신(神)이 도와준 귀라 한다.
♣ 전생[田生]호가 두전생(杜田生)인 한(漢) 나라의 역학자 전하(田何)를 가리킨다. 동무(東武)의 손우(孫虞)에게 주역을 배워 동무의 왕동(王同), 낙양(雒陽)의 주왕손(周王孫)ㆍ정관(丁寬), 제(齊)의 복생(服生) 등 4인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 전생소[田生笑]전생(田生)은 전국 시대 위(魏) 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을 가리킨다. 전자방이, 국가를 위해 수고하던 말이 늙고 쇠하자 길가에 내다 파는 것을 보고는, 불인(不仁)한 일이라 하고 자기가 돈을 내어 속(贖)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淮南子 人間訓. 韓詩外傳》
♣ 전서[篆書]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누는데 대전은 주나라 선왕 때에 만들어져 전국(戰國)시대에 유행한 것이다. 돌에 새긴 석고문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둥글면서도 힘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이사로 하여금 복잡하게 발전하던 글자들을 통일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글자체라 한다. 소전은 각이 지고 굵고 가늠이 변하지 않는다.
♣ 전석[前席]임금이 신하의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고 앞으로 나와 앉는 것을 말한다. 진 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와 앉았다는 고사와, 한 문제(漢文帝)가 선실(宣室)에서 가의(賈誼)와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이야기에 심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前席] 경청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商君列傳ㆍ漢書 賈誼傳》
♣ 전선[鈿蟬]부녀자들의 양쪽 뺨에 붙이는 매미 모양의 금화(金花)를 가리킨다.
♣ 전성[全城]전의(全義)의 옛 이름이다.
♣ 전성[專城]지방 장관을 이른다. 그 권력이 성(城) 하나를 전제할 만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한 성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 등을 일컫는다.
♣ 전성[前星]황태자(皇太子) 혹은 왕세자(王世子)의 별칭. 심성(心星)을 군왕의 상징으로 삼는 데 대하여 심성의 앞에 자리한 별을 태자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황전(皇傳)에 “가운데 별은 천왕(天王)이요, 그 앞의 별은 태자며 뒤의 별은 서자(庶子)이다.” 하였다.
♣ 전성경[磚成鏡]옛날 양선사(讓禪師)가 마조(馬祖) 앞에서 벽돌을 갈고 있으므로, 마조가 무엇을 만들려느냐고 묻자, 양선사가 거울을 만들고자 한다고 하므로, 마조가 이르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니, 양선사가 대답하기를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坐禪)하는 것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전성백[專城伯]하나의 성읍(城邑)을 전담하는 어른이라는 말로, 지방 장관의 별칭이다.
♣ 전성영양[專城榮養]전성(專城)은 지방장관을 일컫는 말로서, 여기서는 수령으로 나가 어버이를 극진히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전성지양[專城之養]고을 수령이 되어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전성지양(專城之養)이라 하여 매우 영화롭게 여겼다.
♣ 전소[顚素]전소는 당 나라 중 회소(懷素)를 이름인데 초서가 신경(神境)에 들었음. 이백(李白)의 초서가(草書歌)에 보임.
♣ 전수[前修]주자집주(朱子集註)에, “謂前代脩德之人”이라 하였음.
♣ 전수지[錢受之]수지는 전겸익(錢謙益)의 자(字).
♣ 전시주교[剸兕誅蛟]한(漢) 나라 왕포(王褒)가 지은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물속에서 교룡을 끊어 버리는 칼날이요, 땅 위에선 코뿔소를 잘라 버리는 칼이로다.[水斷蛟龍 陸剸犀革]”라는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47》
♣ 전신[前身]불교(佛敎)의 윤회설(輪回說)에, 사람이 죽어서 다시 후세에 태어난다 하는데, 전생(前生)은 전신(前身)이요, 후생(後生)은 후신(後身)이라 한다.
♣ 전신[傳神]붓과 먹으로 사람의 상모(狀貌)를 그려서 능히 그 정신을 얻는다는 말임.
♣ 전신도시담[全身都是膽]조자룡(趙子龍)이 적은 군사를 가지고 조조(曹操)의 대군(大軍)을 만나 싸워서 격파하였다. 유현덕(劉玄德)이 익일에, 그의 싸우던 곳을 둘러보고, “자룡은 온 몸이 모두 담(膽)이로다.” 하였다.
♣ 전신론[錢神論]전신론은 문장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때 은사인 노부(魯褒)가 시속이 돈을 탐하는 것을 슬프게 여겨, 성명(姓名)을 숨기고 전신론을 지어서 시속을 풍자했다고 한다. 《晉書 隱逸傳》
♣ 전심[荃心]전(荃)은 향풀인데 당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였는바, 전심은 곧 초 나라 왕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이소경에 “전은 나의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 노여워하네.” 하였다.
♣ 전악[典樂]옛날 음악(音樂)을 맡은 벼슬 이름. 《書經 舜典》
♣ 전앙[錢秧]모내기 할 때 순전히 돈으로 품삯을 치르는 것을 돈모[錢秧]라고 하였음.
♣ 전어[前魚]용양군(龍陽君)이 고기를 낚으며 울었다. 초왕(楚王)이 까닭을 물으매 대답하되, “신(臣)이 처음 고기를 얻었을 땐 몹시 기쁘더니, 뒤에 더욱 큰 것을 많이 잡으니 전에 잡았던 것을 버릴 생각이 나옵니다. 지금 해미에 미인이 심히 많사온데 신이 총행(寵幸)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오는 자가 많사오니, 신도 또한 전에 얻은 고기 같사오리이다.” 하였다.
♣ 전여유대영[傳與劉代嬴]영씨는 진 시황(秦始皇)의 성(姓)이므로 진 나라를, 유씨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으로 한 나라를 가리킨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본래 진 나라의 학정(虐政)을 피해 들어간 사람들이 사는 선경(仙境)인데, 진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선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한다. 《陶靖節集 卷六 桃花源記》
♣ 전여천공[牋與天公]송(宋) 나라 때 육유(陸游)의 독사유감시(讀史有感詩)에 “머리 숙이어 세상 일에 나가고 싶지 않고 전문 지어 하늘에 올리고 싶지도 않네 오직 술이나 실컷 마시고 취해 죽어서 수많은 산 깊은 곳에서 솔바람소리나 들어야지[不肯低頭就世事 亦不作牋與天公 惟須痛飮以醉死 亂山深處聽松風]” 한 데서 온 말이다. 《劍南詩藁 卷四十三》
♣ 전연[篆煙]향연(香煙)이 전자(篆字)형으로 만들어진 것을 이름. 명 나라 송렴(宋濂)의 시에 “塵暗玉階綦跡斷 香飄金屋篆煙淸"이라 하였음.
♣ 전예련삼첩[戰藝連三捷]예전에 과거를 보는데 초시(初試)ㆍ회시(會試)ㆍ정시(庭試) 세 번에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다.
♣ 전오[典午]사마(司馬)의 벼슬. 전(典)은 사(司), 오(午)는 마(馬)임. 촉지(蜀志) 초주전(譙周傳)에, “典午忽兮 月酉沒兮 典午者 謂司馬也 月酉者 謂八月也”라고 하였음.
♣ 전오[典午]전(典)이라는 말은 맡았다는 말이요, 오(午)라는 것은 말(馬)이니, 이것은 사마씨(司馬氏)의 사마(司馬)와 같은 말이다. 앞뒤의 전오[前後典午]라 함은 한나라 때의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과, 송나라에서 통감(通鑑)을 편찬한 사마광(司馬光)을 말함이다.
♣ 전오이상기[典午已相欺]전은 사(司)의 뜻이고 오는 마(馬)의 뜻으로, 곧 사마씨(司馬氏)인 진(晉) 나라를 가리킨다. 서로 속였다는 것은 곧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가 서로 왕위를 찬탈한 것을 말한다.
♣ 전왕[錢王]오대(五代) 때 오월(吳越)왕 전씨(錢氏). 시조 전유(錢鏐), 그 손자 숙(叔) 송(宋)에 항복하기까지 3세(世), 5주(主) 84년간(895~978) 왕이라 일컬었다.
♣ 전요경[錢堯卿]송(宋) 나라 사람. 자는 희재(熙載).
♣ 전우[全牛]이 글귀의 뜻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푸줏간의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되, ‘처음 신(臣)이 소를 분해할 적에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 밖에 없었는데 3년 후에는 온 마리 소가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하였다.”는 것에 보임.
♣ 전욱[顓頊]고대 제왕의 이름.
♣ 전욱[顓頊]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신(冬神)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 전욱[顚旭]전욱은 당 나라 명필 장욱(張旭)을 이름인데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하면 혹은 머리를 먹물에 적시어 휘둘러 초서를 썼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장전(張顚)이라 호하였음.
♣ 전원장무[田園將蕪]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됨.
♣ 전원장무하일귀[田園將蕪何日歸]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첫구.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거칠어 가려니 어찌 안 돌아가리[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 전유[羶腴]노린내 나는 살진 고기, 즉 세속의 부귀 영화를 가리킨다.
♣ 전유업[傳遺業]당 나라 소존(蕭存)이 죽은 뒤에 아들이 없고 두 딸만이 있었는데, 한유(韓愈)가 그의 옛집을 지나다가, “중랑이 딸이 있어 능히 업을 전한다.[中郞有女能傳業]”시를 지었다. 중랑(中郞)이란 한(漢)나라 채옹(蔡邕)의 벼슬로 딸 채문희(蔡文姬)가 아버지의 문학(文學)을 전하였다.
♣ 전의[全義]당 헌종(唐憲宗) 때 남조정왕(南詔靖王) 몽권이성(蒙勸利晟)의 연호.
♣ 전의[田衣]승려가 입는 가사(袈裟)의 별명이다. 그 옷의 도안(圖案)이 마치 종횡으로 펼쳐진 밭고랑처럼 네모진 모양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곽진경은 아마도 승려 출신으로서, 무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진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전의곡강유[典衣曲江遊]주연(酒宴)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퇴근하면 봄 옷을 전당 잡히고, 날마다 강변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 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라는 구절이 있다.
♣ 전인미답[前人未踏]이제까지의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함. 이제까지의 세상 사람이 아무도 해보지 못함.
♣ 전자[剪字]종이를 오려서 자형(字形)을 만드는 것을 이름.
♣ 전잠[田蠶]농사짓고 누에치는 일.
♣ 전장[顚張]당(唐) 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의 별호. 초서(草書)를 아주 잘 썼는데 술이 한껏 취하면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남들이 전장(顚張)이라 했다 한다. 《唐書 卷二百二》
♣ 전장[專場]필적(匹敵)할 사람이 없는 기막힌 솜씨를 소유한 것을 말한다.
♣ 전장탈모[顚張脫帽]당 나라 장욱(張旭)이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그는 술을 좋아하여 취한 뒤에 붓을 휘둘렀다. 그의 행동이 광태(狂態)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미친 장전(張顚)이라 불렀으며,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는 장욱에 대하여, “왕공들 앞에 모자를 벗어 머리를 드러내고, 붓을 휘둘러 종이에 떨어짐이 구름이나 연기 같다[脫帽露頂王公前 揮毫落紙如雲煙].” 하였다.
♣ 전저[前箸]한왕(漢王)이 밥을 먹고 있는데 장량(張良)이 밖에서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다가 밥상의 젓가락[箸]을 빌려 들고서 계책을 헤아렸다.
♣ 전저[專諸]전저는 춘추 시대 오(吳) 나라 용사. 오 나라 공자 광(公子光)이 오왕 요(吳王僚)를 죽이려고 할 적에 전저는 공자 광을 위해 구운 고기[炙魚]의 뱃속에 칼을 숨겨가지고 오왕 앞에 나아가 대번에 오왕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오왕의 측근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史記 卷八十六 刺客傳》
♣ 전저획[前筯畫]식상(食床)에 놓인 젓가락을 가지고 수[籌]를 놓아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에 “신(臣)은 밥상 앞에 놓인 젓가락을 빌려가지고 수를 놓아보겠습니다.” 하였다.
♣ 전전[戰戰]두려워서 떠는 모양
♣ 전전[塡塡]만족한 모양, 규율이 바르고 훌륭한 모양, 거마의 수가 많은 모양, 우뢰가 울리는 모양, 북소리가 연달아 나는 모양, 독실한 모양
♣ 전전[巓巓]오로지 한결같은 모양, 근심하는 모양, 어리석은 모양
♣ 전전[滇滇]왕성한 모양
♣ 전전[塡塡]우뢰 치는 소리.
♣ 전전[戔戔]적은 모양, 수가 많은 모양
♣ 전전[傳箭]전전(傳箭)은 전시(戰時)에 전령(傳令)할 때에 쏘는 화살이다.
♣ 전전[殿前]중국에서 군사들의 명부를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일 등을 관장한 관서의 이름이다.
♣ 전전[剪剪]지혜가 부족한 모양, 말솜씨가 능숙한 모양, 아첨하는 모양, 바람이 으스스 추운 모양, 마음을 한가지로 하는 모양, 가지런한 모양
♣ 전전[悛悛]진중하여 말이 적은 모양
♣ 전전긍긍[戰戰兢兢]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戰戰) 몸을 움츠리고 조심하는 모습(兢兢). 어떤 일에 임하여 두려워서 조심한다는 뜻
♣ 전전반측[輾轉反側]옆으로 눕고 뒹굴고 뒤집고 다시 옆으로 누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서 몸을 이리 저리 뒤척임
♣ 전정만리[前程萬里]나아기 젊어 장래가 유망함.
♣ 전정후채[前丁後蔡]전정후채는 곧 송(宋) 나라 때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 서로 전후하여 맨처음 건주산(建州産) 용단다(龍團茶)를 개발해서 진상하였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 전제[筌蹄]고기를 잡는 통발[筌]과 토끼를 잡는 올무[蹄]는 목적을 위한 방편(方便)이며, 통발과 올무는 결국 고기와 토끼는 아니듯이, 언설(言說)은 진리를 말할 것이로되 끝내 진리가 아니므로 진리를 구하려면 언설을 잊어야 한다.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이나 고기를 얻고는 통발을 잊어야 하고, 올무는 토끼를 잡는 것이나 토끼를 얻고는 올무는 잊어야 하며, 말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나 뜻을 얻고는 말을 잊어야 한다.” 하였다.
♣ 전제[筌蹄]효용이 없어져 쓸모 없게 된 물건을 말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 되고, 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게 마련이다.[得魚而忘筌 得兎而忘蹄]”라는 말이 있다.
♣ 전조[銓曹]이조(吏曹)나 병조(兵曹)처럼 인사 행정을 담당한 부서를 말하는데, 이조에서는 문관(文官), 병조에서는 무관(武官)의 전형(銓衡)을 맡았음.
♣ 전조[錢趙]전은 오대(五代) 시대 오월국왕(吳越國王)인 전유(錢鏐)를 말하고, 조는 송 태조(宋太祖)인 조광윤(趙光胤)을 가리킨다.
♣ 전주[前籌]한(漢)나라 장량(張良)이 한왕(漢王)께 뵈오니 그가 막 식사 중이라, 양(良)이 밥상의 저를 빌어 조건을 세어가면서 계책을 아뢰었다.
♣ 전중[殿中]전중감찰(殿中監察)의 준말이다.
♣ 전중[殿中]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약칭. 전정(殿庭)에서 천자(天子)의 호종(扈從)을 맡음.
♣ 전중낙간[殿中落簡]조선 시대에 논의할만한 조정의 일로서 그 사실을 아는 감찰(監察)이 그 내용을 종이에 써서 옷소매에 간직하였다가 모임이 있을 때 대청(臺廳)에 떨어뜨려서, 다른 대간들이 그 내용을 보고 쓸 만하면 대론(臺論)으로 채택하여 논계하고 불가하면 인통(印筒)에 봉치(封置)하게 한 제도. 전중(殿中)은 감찰의 별칭.
♣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고려 때 어사대(御史臺)의 정6품 벼슬로, 조선의 감찰(監察)에 해당한다.
♣ 전지[塡池]끝내 출세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 삼국(三國) 시대 오(吳) 나라 주유(周瑜)의 상소문에서, 유비(劉備)는 용(龍)의 자질이라 결코 지중(池中)에 오래 묻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吳志》
♣ 전지[餞遲]두보(杜甫)의 시에 “바삐 서둘러 긴 여정(旅程)에 벌써 오르시는데, 전별 자리 미적대다 만나 뵙지도 못했네요.[蒼惶已就長途往 邂逅無端出餞遲]”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5 送鄭十八虔貶台州司戶》
♣ 전진[前塵]불교 용어로, 망심(妄心)의 앞에 나타나는 일체 세간의 모든 사물[六塵]을 말한다.
♣ 전차복철[前車覆轍]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뜻의 고사성어.
♣ 전차복후차계[前車覆後車戒]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그것을 보고 교훈을 삼는다. 앞 사람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 전철[前轍]앞에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 전인(前人)의 실패나 잘못을 비유
♣ 전철유유가[前哲有遺歌]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자가 숨어살며 그의 산에서 사는 즐거움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전청[轉淸]다음. 다음으로 굴러가다. 멈추지 않고 변화해 더 나아진다는 뜻임.
♣ 전청[田靑]전청은 논우렁임.
♣ 전체생원[傳遞生員]할 일 없이 각 고을에 몰려다니며 수령들을 위협해서 민폐를 끼치는 양반들을 일컬음. ☞ 부생원(桴生員)
♣ 전추[前騶]옛날 관리들이 길을 갈 때 그 앞에 서서 크게 외쳐대며 앞길을 인도하는 하인을 말한다.
♣ 전파[餞罷]전별을 마치다.
♣ 전포지라[轉胞之懶]문선(文選) 혜강여산거원절교서(嵇康與山巨源絶交書)에 “언제나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 있다가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서야 일어나 소변을 본다.” 한 데서 온 말로, 게으름을 피운다는 뜻이다.
♣ 전품[田品]사냥해서 수확한 것들을 등급별로 나누어 적절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손괘(巽卦) 육사효(六四爻)에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니, 사냥해서 잡은 것들을 세 등급으로 나눔이로다.[悔亡 田穫三品]”라고 하였는데, 삼품(三品)에 대해서 주자(朱子)는 제사 음식용, 빈객 대접용, 주방 비축용이라고 해설하였다.
♣ 전해[塡海]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 그 원혼이 정위(精衛)라는 새가 되었는데, 늘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가 바다에 넣어 동해를 몽땅 메우려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羽族部 精衛》
♣ 전해석난편[塡海石難鞭]진 시황(秦始皇)이 해 뜨는 곳을 보기 위해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신인(神人)이 돌을 채찍질하여 몰아서 바다로 내려보냈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을 경우 신인이 마구 채찍질을 하면 돌들이 모두 피를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서, 여기서는 곧 공을 이루기 어려움을 뜻한 말이다.
♣ 전형[錢兄]진(晋) 나라 노포(魯褒)가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비양하여 전신론(錢神論)을 지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돈을 형님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 전혜[荃蕙]전혜는 향초(香草)의 이름.
♣ 전혜화모[荃蕙化茅]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난초와 지초는 변하여 향기를 잃고, 전초와 혜초는 바뀌어 띠풀이 되었네. 어찌하여 옛날엔 향기롭던 이 풀들이 지금은 어찌 이처럼 쑥덤불이 되었는가.[蘭芷變而不芳兮 荃蕙化而爲茅 何昔日之芳草兮 今直爲此蕭艾也]”라는 표현이 있다.
♣ 전호후랑[前虎後狼]전호후랑이란 ‘전문거호 후문진랑(前門据虎 後門進狼)’의 줄임말로,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는 말로, 하나의 재난을 피하자 또 다른 재난이 나타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전홍[纏紅]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혼을 주관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붉은 밧줄을 가지고 다니면서 부부의 인연이 닿는 사람들의 발목을 꽁꽁 묶어 놓는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續玄怪錄 卷4》
♣ 전화위복[轉禍爲福]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 화를 바꾸어 복으로 한다. 궂은 일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잘 처리하여 좋은 일이 되게 하는 것.
♣ 전환[剪鬟]전환은 머리털을 자른다는 뜻으로, 진(晉) 나라 때 도간(陶侃)이 현리(縣吏)로 있을 때 그의 친구 범규(范逵)가 찾아왔는데, 본디 집이 가난한데다가 갑자기라서 대접할 것이 없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술과 안주를 사다 주어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晉書 卷六十六 陶侃傳》
♣ 전횡[田橫]진(秦) 나라 사람으로 본래 제(齊)의 왕족이었다. 뒤에 한신(韓信)이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파멸(破滅)시키자, 전횡은 자립하여 왕이 되고 항우(項羽)를 섬겼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를 멸망시키자 전횡은 그의 무리 5백 명을 데리고 해도(海島)로 도망하였다. 고조는 사람을 보내어 부르기를 “전횡아 오라. 높은 자에게는 왕을, 낮은 자에게는 후(侯)를 주겠으며, 만일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전멸시키겠다.” 하였다. 전횡은 두 객(客)과 함께 낙양(洛陽) 30리 밖에까지 와서 자살하니, 그의 객도 따라 죽었으며 해도에 있던 5백 명도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자살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을 슬퍼하여 이 섬을 오호도(嗚呼島)라 불렀다 한다.
♣ 전횡도[田橫島]한 고조(漢高祖) 때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부하 5백 명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간 후에 한 고조가 불렀으나 신하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자, 부하 5백 명도 모두 따라 죽었던 바, 한 고조가 섬 이름을 전횡도라 했다 함.
♣ 전횡사[田橫士]전횡을 따라 생사를 함께 한 의사들. 전횡은 전국시대 제(齊) 나라 왕의 후예로 진말(秦末)에 제 나라 재상으로 있던 중,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하자 제 나라 왕으로 자칭하고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 5백 인을 거느리고 섬으로 도망갔다. 유방(劉邦)이 천자가 되어 사자를 보내 항복할 것을 회유하자, 전횡은 서울 낙양(洛陽)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漢)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이 부끄러워 자살하였는데, 섬 안에 남아 있던 그의 무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자살하였다. 그들이 살았던 섬이 우리 나라 서해의 어딘가에 있었다고 전해 온다. 《史記 卷九十四 田儋傳》
♣ 전후육만년[前後六萬年]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의하면, 천지가 순환 변천하여 원시(原始) 상태로 복귀하는 일기(一期)를 일원(一元)으로 삼고, 일원을 십이만 구천육백 년으로 추산하였으므로, 여기서 ‘앞으로 육만 년, 뒤로 육만 년’이라 한 것은 곧 그 일원의 성수(成數)인 십이만 년을 중간으로 나누어서 소옹의 재세(在世) 시기를 일컬은 말이다. 소옹의 자는 요부(堯夫)이다.
♣ 전후전오[前後典午]부자(父子) 양대(兩代)에 걸쳐 사기(史記)를 완성했던 사마담(司馬談)과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키는데, 두 부자는 벼슬이 모두 태사령(太史令)이었다.
♣ 전휘[前徽]전인(前人)의 아름다움. 곧 성현의 심법(心法)과 도학을 말함.
♣ 절葼[절葼]종풀은 남색 염료로 쓰는 풀이다. 당(唐) 나라 두생(杜生)은 점을 잘 쳤는데 한번은 종을 잃은 자가 와서 묻자 “이 길로 가다가 사자(使者)를 만날 것이니 그에게 채찍을 달라고 하면 찾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 사람은 가다가 과연 사자를 만나 사실을 말하고 채찍을 청하자 사자는 “나는 채찍이 없으면 말을 몰 수 없으니 대신 종풀을 꺾어 오라.” 하였다. 그는 종풀을 꺾기 위해 종풀이 있는 곳을 가 보니 그곳에 도망한 종이 숨어 있었다. 《新唐書 卷二百四 杜生傳》
♣ 절[節]깃발과 같은 것. 임금의 사명(使命)을 띠고 나가는 사람을 절(節)을 가지고 있다. 지방에 안렴사(按廉使)를 내 보낼 때는 임금이 절(節)을 준다.
♣ 절각[折角]뿔을 부러뜨린다는 말로, 기세를 누르거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듬.
♣ 절각건[折角巾]후한(後漢)의 곽태(郭泰)는 자가 임종(林宗)으로 학문이 대단하고 제자가 수천 명에 달했는데, 언젠가 비를 만나 그가 쓴 두건 한 쪽 귀가 꺾여 있었다. 그를 본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모두 그렇게 한 쪽 귀를 접어서 쓰면서 그 두건을 일러 임종건(林宗巾)이라고 하였음. 《後漢書 卷八十六 郭泰傳》
♣ 절각담경[折角談經]한 원제(漢元帝) 때 총신(寵臣) 오록충종(五鹿充宗)이 양구(梁九)의 역(易)을 배워 종횡무진 변설을 늘어놓는데도 감히 맞서서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주운(朱雲)이 천거를 받고 들어가 웅변을 토하면서 반박을 하자, 당시 유자(儒者)들이 “오록의 긴 뿔을 주운이 꺾어 버렸다.[五鹿嶽嶽 朱雲折其角]”고 하였다. 《漢書 朱雲傳》
♣ 절강조수[浙江潮水]절강(浙江)에 조수(潮水)가 특별히 맹렬한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자서의 분기(憤氣)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
♣ 절계극선[折桂郄詵]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말한다. 극선이 누차 옹주 자사(雍州刺史)로 전직되었는데 진 무제(晉武帝)가 동당(東堂)에 모여 그를 송별하면서 묻기를 “경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극선이 대답하기를 “신은 현량과 대책(賢良科對策)에서 천하의 제1위를 차지하였으니, 이는 계림(桂林)의 한 가지이고 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晉書 郄詵傳》
♣ 절고개여석[節苦介如石]절개는 돌보다 굳다는 뜻이다.
♣ 절고진락[折槁振落]고목을 자르고, 낙엽을 움직이게 한다. 매우 쉬운 일.
♣ 절굉[折肱]고어(古語)에 “세 번 자신의 팔뚝을 부러뜨려 봐야 좋은 의원이 된다.[三折肱而爲良醫]”는 말이 있는데, 이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조예가 깊어짐을 뜻한다. 성어(成語)로는 삼절굉(三折肱)이라 한다.
♣ 절교서[絶交書]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 절구[絶句]한시 근체시(近軆詩)의 하나. 기(起)ㆍ승(承)ㆍ전(轉)ㆍ결(結)의 네 구로 되어 있음.
♣ 절구의맹씨[竊屨疑孟氏]맹자(孟子)가 등(滕) 나라에 가서 상궁(上宮)에 묵고 있을 적에, 관인(館人)이 들창 위에 신들 두었다가 잃어버리고는 맹자의 종자(從者)가 훔쳐간 것으로 의심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下》
♣ 절극[折屐]매우 기뻐한다는 뜻. 진(晉) 나라 재상(宰相) 사안(謝安)이 그의 조카 현(玄)을 보내어 진병(秦兵)을 막게 하였는데, 현(玄)이 8천 명의 군사로써 진 나라 백만 대병을 쳐부수었다. 보고하는 글이 이를 때에 사안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손이 소식을 물으니 사안을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도적을 이미 쳐부수었군.” 하고, 바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손을 보내고 문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무신의 이[齒]가 문턱에 걸려서 부러지는 줄도 몰랐으니 그것은 매우 기뻤기 때문이었다. ☞ 희절극(喜折屐)
♣ 절극침철[折戟沈鐵]두목(杜牧) 적벽시(赤壁詩)에 “꺾인 창 모래에 잠겼어도 쇠는 썩지 않아 그것을 가지고 전조의 일을 아누나[折戟沈沙鐵未消 自將磨洗認前朝]" 하였음.
♣ 절동[浙東]절동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절강 동부지역이다. 소식(蘇軾)이 절강 가흥현(嘉興縣)에 있는 보본선원(報本禪院)에 들러 그 절의 중 문 장로(文長老)를 만나 지은 “내년에는 약을 캐러 천태산에 갈 예정이라. 또한 다시 시를 써서 온 절동 퍼뜨리고파[明年採藥天台去 更欲題詩滿浙東]"라고 한 시가 있다. 《蘇東坡詩集 卷八 秀州報本禪院鄕僧文長老方丈》
♣ 절등류편[截鐙留鞭]유사(遺事)에 “요원숭(姚元崇)이 형주목(荊州牧)으로 있은 지 3년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흐느끼며 말머리를 둘러싸고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등자를 끊고 채찍까지 붙잡았다. 신목(新牧)이 이를 상주(上奏)하자, 조서를 내려 미행(美行)을 칭찬하고 금(金) 1천 냥을 하사했다.” 하였다.
♣ 절람[折欖]서한 성제(西漢成帝) 때 직신(直臣) 괴리영(槐里令) 주운(朱雲)이 성제 앞에서 칼을 청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니 성제가 누구냐고 묻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고 하였다. 이에 성제가 크게 성내며 말하기를 “면전에서 나의 스승에게 욕을 하니 죽어야 마땅하다.” 하면서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아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漢書 卷六十七》
♣ 절람[竊藍]절람은 청색(靑色)을 이른 말로, 호(鳸)라는 새가 여름에는 흑색이 되고, 가을에는 청색이 되고, 겨울에는 황색이 되곤 하므로, 계절에 따라 이 새를 절람ㆍ절현(竊玄)ㆍ절황(竊黃) 등으로 부른 데서 온 말이다.
♣ 절로노호[折蘆老胡]선종(禪宗) 동토(東土)의 초조(初祖) 달마(達摩). 천축(天竺) 향지왕(香至王)의 셋째아들인 그가 양(梁) 대통(大通) 원년(527)에 인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광주(廣州)에 상륙할 때까지 갈대를 꺾어 그것을 타고 왔다 한다.
♣ 절류곡[折柳曲]고대의 악부 가운데 하나인 절양류곡(折楊柳曲)으로, 버들가지를 꺾으면서 이별하는 아쉬운 정을 노래한 것이다.
♣ 절류번포[折柳樊圃]시경(詩經) 제풍(齊風) 동방미명(東方未明)에 있는 시로서 즉 “버들을 꺾어서 포전의 울을 막아 놓으면 미친 사람도 달리 본다[折柳樊圃 狂夫瞿瞿].”는 것을 이름.
♣ 절류번포이구구지광[折柳樊圃而瞿瞿之狂]시경(詩經)에, “버들가지를 꺾어 꽂아 울타리를 만들어 놓아도 미친 사람이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허둥거린다.”는 구절에서와 같이, 미친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상적인 사람이 아침ㆍ저녁의 분명한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뜻이다.
♣ 절륜[絶倫]같은 무리(동료)들 보다 훨씬 뛰어남
♣ 절리[節離]끊어져 떨어지다.
♣ 절립부[絶粒夫]곡기(穀氣)를 끊고 신선술을 익히는 사람들을 말한다.
♣ 절마[折麻]삼은 신마(神麻)라는 향초(香草)로서 은사(隱士)에게 꺾어주는 뜻을 부친 것인데,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에 “구슬꽃 소마를 꺾어서 장차 은자에게 주련다[折疏麻兮瑤華 將以遺兮離居].” 한 데서 온 말이다.
♣ 절매[折梅]남조(南朝) 송(宋) 나라 육개(陸凱)가 범엽(范曄)과 서로 친분이 두터워 강남에 있을 때 장안(長安)에 있는 범엽에게 매화 한 가지를 꺾어 부치면서 시 한 수를 동봉하였는데, 그 시에 “매화를 꺾다가 역사(驛使)를 만나 농두(隴頭)에 있는 그대에게 부치노니, 강남에는 아무 것도 없어 애오라지 한 가지 봄을 보낸다오.” 하였다.
♣ 절면[折綿]모진 추위를 말한다. 강추위에는 솜옷이 얼어붙어 부딪치면 꺾어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 절모[節모]임금이 특히 칙사나 장군에게 내리는 쇠꼬리털로 장식한 깃대를 말한다.
♣ 절모령낙새운변[節旄零落塞雲邊]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을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으며, 나중에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이 그려졌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절방[截肪]엇 벤 비계인데 아름다운 백옥(白玉)은 절방과 같다 한다.
♣ 절방초[折芳椒]초(椒)는 향목(香木). 향목을 꺾어서 스스로 장식한다는 말이다.
♣ 절비옹[折臂翁]신풍(新豊)에 출정함을 기피하려고 스스로 어깨를 부러뜨린 늙은이가 있었음.
♣ 절서영묘호[節序迎猫虎]음력 12월을 가리킴.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고 범은 멧돼지를 잡아먹으므로, 옛날에 고양이와 범을 농사(農事)에 유익한 신물(神物)이라 하여 12월에 그들을 맞이하여 제사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郊特牲》
♣ 절성[節性]절성은 성을 절제한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소고(召誥)에는 “은(殷) 나라 관리들을 복종시켜 우리 주(周) 나라 관리들과 친근하게 하면, 그들의 성을 절제하게 되어 그들이 날로 발전할 것이다.[節性惟日其邁]" 하였고, 왕제(王制)에는 “사도가 육례를 닦아서 백성들의 성을 절제한다.[司徒修六禮 以節民性]" 하였다.
♣ 절세가인[絶世佳人]세상에서 제일 빼어난 미인. 매우 뛰어난 미인
♣ 절속초불족[竊續貂不足]재능 없는 사람이 높은 관작을 차지함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조왕 윤(趙王倫)의 당(黨)이 모두 경상(卿相)이 되어 노졸(奴卒)들까지 모두 작위를 탔으므로, 시중(侍中)ㆍ중상시(中常侍) 등이 쓰는 관(冠)의 장식에 쓰이는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의 꼬리로 대신 장식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절약[竊藥]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얻어다 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집에 둔 것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달아나 월정(月精)이 되었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 절약선[竊藥仙]유궁후(有窮后) 예(羿)의 처 항아(姮娥)가 남편이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어온 선약(仙藥)을 훔쳐먹고 신선이 되어 월궁(月宮)으로 달아났다.
♣ 절약항아[竊藥姮娥]달의 별칭. 후한서(後漢書) 천문지(天文志)에 “유궁후 예(有窮后羿)의 아내가 예의 불사약(不死藥)을 훔쳐먹고 월궁(月宮)으로 도망쳐서 항아가 되었다.” 하였다.
♣ 절양[折楊]절양은 옛날의 속악(俗樂)으로서 소인에 비유한다.
♣ 절양류[折楊柳]고악부(古樂府)의 이름.
♣ 절양류가[折楊柳歌]절양류(折楊柳)는 악부의 이름으로, 원 내용은, 고향을 떠날 때에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이별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 절양황화[折楊皇華]지금의 민요와 같은 가곡(歌曲)을 이름.
♣ 절역난빙소식진[絶域難憑消息眞]한 무제(漢武帝) 때 절신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무려 19년 동안이나 살다 돌아왔는데, 한 소제(漢昭帝)가 즉위한 후에는 한 나라가 흉노와 화친을 맺고 소무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흉노가 소무는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그 후 한 나라 사신이 다시 흉노에 이르자, 앞서 소무를 따라 흉노에 사신으로 갔던 상혜(常惠)가 은밀히 한사(漢使)를 만나보고 소무의 현황을 자세히 일러주면서 한사로 하여금, 선우(單于)에게 “우리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를 얻어 그 발에 묶여 있는 편지를 보니 소무 등이 아무 늪[澤] 주위에 살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하라고 하였다. 한사가 크게 기뻐하여 상혜의 말대로 이야기하면서 선우를 책망하니, 선우가 몹시 놀란 빛을 띠고 한사에게 사과하였다 한다. 《漢書 卷五十四》
♣ 절영[絶纓]갓의 끈을 끊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너그러운 덕(德)을 베푸는 것을 비유하는 뜻의 고사성어.
♣ 절요[折腰]옛날 도연명(陶淵明)이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있다가 상관(上官)으로 순찰하러온 독우에게 절하기 싫어서, “내가 어찌 닷말 쌀의 녹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랴.” 하고 곧 벼슬을 내던지고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다.
♣ 절요[節要]퇴계가 주자의 서찰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발췌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약.
♣ 절요부귀거[折腰賦歸去]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은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었는데,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내자, 아전은 마땅히 정장하고 뵈어야 한다 하였다. 도잠은 탄식하면서 “나는 쌀 다섯 말의 녹봉(祿俸) 때문에 허리를 굽힐[折腰] 수는 없다.”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거래부(歸去來賦)를 읊고 떠나갔다.
♣ 절요수[折腰羞]관찰사 등 상관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딱한 처지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현령(縣令)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을 수는 없다.[不能爲五斗米折腰]”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은 고사가 있다. 《宋書 卷93 陶潛傳》
♣ 절우사맹[節友社盟]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그의 시 도산잡영(陶山雜泳)에서, 화단을 만들어 매죽송국(梅竹松菊)을 심고 이름을 ‘절우사’라 했다 하였으며, 또 “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徑)에도 매화가 빠졌으니 이소(離騷)만의 흠전(欠典)이 아니다.” 하였는데, 매화를 매우 사랑하였다.
♣ 절운관[切雲冠]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나왔는데, 당시의 높은 관(冠)이다.
♣ 절월[節鉞]임금이 장수를 떠나 보낼 때 권위의 상징으로 내리는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말한다. 장군의 진영에 꽂는 깃대와 도끼로, 전임권(專任權)을 상징한다.
♣ 절인[切人]충직한 사람
♣ 절장보단[絶長輔短]긴 것을 잘라 짧은 것에 보강한다. 곧, 장점으로 단점을 보충함을 일컬음.
♣ 절전[折箭]힘을 한 군데로 합하여 서로 협력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절절[截截]구변이 좋은 모양, 성한 모양
♣ 절절[切切]매우 정중한 모양, 근신하는 모양, 소리가 가늘게 계속되는 모양, 간절히 생각하는 모양
♣ 절절[晢晢]밝은 모양
♣ 절절[折折]밝은 모양
♣ 절조[折俎]잔치하고 음식 먹는 것을 말한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6년에 “왕이 사회(士會)를 불러 ‘왕의 향례(饗禮)에는 통째로 드리고, 연례(宴禮)에는 끊어서 도마에 담는다.’ 했다.”는 말이 있다.
♣ 절족[折足]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침. 발이 꺾인다는 것은 주역(周易) 鼎卦의 “솥의 발이 부러져 공의 음식을 엎어버린 것이다.[鼎折覆公餗]"에서 인용한 것임.
♣ 절지[折枝]한(漢) 나라 때의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님을 보낼 적에는 반드시 패교(霸橋)까지 배웅해 가서 버들가지를 꺾어 송별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절진교두류[折盡橋頭柳]옛날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을 배웅할 때는 반드시 파교(灞橋)까지 가서 다리 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주어 송별(送別)을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절진향서지[折盡向西枝]관서(關西) 지방 쪽으로 떠나는 길손을 전송하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을 나누는 바람에 가지가 모두 꺾였다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도성 문 가까이 송별을 많이 하는지라, 긴 가지 모두 꺾여 봄바람이 줄었도다.[爲近都門多送別 長條折盡減春風]”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白樂天詩集 卷19 靑門柳》
♣ 절차[切磋]절(切)은 끊는 것이며, 차(磋)는 가는 것이니, 각(角) 같은 물건을 가지고 기구를 만들려면 먼저 끊은 뒤에 다시 갈아야 한다. 이것을 공부하고 덕을 닦는 데 비유하고 또 좋은 친구들이 서로 학문을 도우는 데 비유한다.
♣ 절차탁마[切磋琢磨]끊고 갈고 쪼고 다듬음. 뼈나 상아ㆍ옥ㆍ돌 등을 가공하는 과정으로 덕행이나 인품을 닦거나 학문⋅기예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과정을 비유.
♣ 절찬의[蕝纂儀]절찬은 띠를 묶어서 위치를 표한 다음 조회하는 의식을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손숙통전(叔孫通傳)에 “제자 1백여 명과 절찬을 만들어 야외에서 연습했다.” 하였다.
♣ 절체절명[絶體絶命]몸이 끊어지고(죽고) 목숨이 끊어짐.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게 된 막다른 처지
♣ 절충[折衝]절충(折衝)은 전쟁하는 것이다.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로,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 절충준조[折衝樽俎]술자리에서 외국 사신과 담소하면서 자국(自國)의 주장을 관철시켜 국위를 떨칠 만한 인재를 가리킨다.
♣ 절취[竊吹]제 선왕(齊宣王)이 피리를 좋아하여 피리 부는 사람 3백 명을 함께 연주하게 하고 모두 후한 녹봉을 주었는데, 이 때 남곽처사(南郭處士)는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그 사이에 끼어 피리를 부는 체하고 녹봉을 받았던 데서 온 말로, 재능 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높은 지위를 차지함을 비유한 말이다.
♣ 절치부심[切齒腐心]몹시 분하여 이를 갈고 속을 썩임. 몹시 원통하고 분한 정도가 매우 심한 모양. 몹시 노함
♣ 절필[絶筆]절필(絶筆)은 붓을 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으로 공자는 춘추(春秋)를 기록할 적에 노(魯) 나라 애공(哀公) 14년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서술하고 그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 절함[折檻]난간을 부러뜨린다는 말로, 간곡하게 충간(忠諫)하는 뜻의 고사성어.
♣ 절항서[浙杭書]홍대용(洪大容)이 영조(英祖) 41년에 사신가는 숙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절강ㆍ항주의 선비인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 등을 사귀고 왔는데, 그 후에도 계속 서신 왕래가 있었다.《湛軒書 外集 杭傳尺牘》 엄부자(嚴夫子)ㆍ육효렴(陸孝廉)ㆍ반향조(潘香祖)는 이들을 말한다.
♣ 절해[節該]이두(吏讀)의 하나로 졋해라 읽는데 문서의 전체 요지(要旨), 핵심적인 내용을 가리킨다.
♣ 절해취[折骸炊]좌전(左傳)에, 송(宋)나라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성중(城中)에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때어 밥을 지었다 한 말이 있다.
♣ 절혹논감고[節或論甘苦]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아니하면 싫어하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혐의가 조금 있다고 은근히 풍자한 말이다.
♣ 절효[節孝]송(宋) 나라의 효자 서적(徐積)의 시호(諡號)이다.
♣ 점[霑]젖다. 적시다.
♣ 점[苫]짚자리.
♣ 점각건[墊角巾]풍류 있는 모습을 형용한 말. 후한 때 고사(高士)인 곽태(郭太)가 일찍이 비를 맞아 두건의 일각(一角)이 꺾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두건의 일각을 꺾어서 임종건(林宗巾; 임종은 곽태의 자)이라고까지 하였다.
♣ 점강순[點絳脣]사조(詞調) 또는 곡패(曲牌) 이름.
♣ 점거[簟車]제후(諸侯)의 노거(路車)인데 방장석(方丈席)으로 수레의 뒤를 가린다.
♣ 점검[點檢]조광윤이 즉위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직함이다. 이보다 앞서 주(周) 나라 세종(世宗)이 사방에서 올라온 문서를 점검하던 중 문서 주머니 안에 ‘점검이 천자가 된다.[點檢作天子]’는 글이 쓰여진 나뭇조각을 발견하고는 이상하게 여겨 당시 점검으로 있던 장영덕(張永德)을 해임하고 대신 조광윤을 점검으로 삼았다. 《宋史 卷1 太祖本紀》
♣ 점괴[苫塊]점은 거적자리이고 괴는 흙덩이 베개인데 고인이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거적자리에 앉고 흙덩이를 베었다. 《風俗通 衍禮》
♣ 점금표월[點金標月]묵은 것을 바꾸어 새롭게 만드는 것을 이름.
♣ 점다[點茶]물을 끓인 다음에 차를 넣는 것
♣ 점대[漸臺]대(臺) 이름. 한(漢) 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서쪽에 있었는데, 송(宋)의 소식(蘇軾)이 쓴 복어행(鰒魚行)에, “점대에 사람 없고 긴 활만 쏘던 시절, 처음에는 사람들이 복어 먹을 줄 몰랐다네.[漸臺人散長弓射 初噉鰒魚人未識]……”하였음.
♣ 점대[漸臺]점대는 한(漢) 나라 때 건장궁(建章宮)의 태액지(太液池) 가운데 건립했던 대명(臺名)인데, 높이가 20여 길이나 되었다 한다
♣ 점대수일[漸臺水溢]점대(漸臺)는 연못 가운데에 있는 대(臺)이다. 제(齊) 나라 임금의 비(妃)인 위희(衛姬)가 점대에서 노는데, 마침 물이 크게 닥쳐서 위험하므로 제나라 임금이 사람을 시켜서 곧 나오라고 부르니, 위희는 말하기를, “임금이 나를 부르는 표적인 부절(符節)을 보내지 않았으니, 여자의 몸으로 남의 남자와 말만 듣고 갈 수 없다.” 하고 나오지 아니하고 물에서 죽었다.
♣ 점두[點頭]육조(六朝) 시대에 도생법사(道生法師)가 호구산(虎丘山)에서 돌들을 모아 놓고 설법(說法)을 하니 돌들이 머리를 끄덕였다는 고사가 있다.
♣ 점두[點頭]진대(晉代)의 고승 축도생(竺道生)이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다가 ‘개유불성(皆有佛性)’의 도리를 설파하자 바윗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道生法師》
♣ 점두석[點頭石]남북조(南北朝) 때에, 생공(生公)이 호구산(虎丘山)에서 경(經)을 강(講)했으나 믿는 자가 없었으므로, 이에 돌을 모아놓고 신도(信徒)를 삼아 지극한 이치를 이야기하니, 돌들이 다 머리를 끄덕였다.” 한다.
♣ 점마[點馬]말을 점고(點考)하는 일.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 구목(廏牧)에 “제도(諸道)의 점마관(點馬官)은 문관(文官)으로 차임(差任)한다.” 하였다.
♣ 점마행관[點馬行官]목장의 말들을 점검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된 관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 점무중연[跕霧中鳶]점(跕)자는 떨어진다는 뜻임.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아래는 물이 채이고 위에는 안개가 끼어 독기가 서렸으며 우러러보니, 나는 솔개가 툭툭 물 위에 떨어진다[下潦上霧 毒氣重蒸 仰視飛鳶跕跕墮水中].” 하였음.
♣ 점선[黏蟬]한(漢) 나라 때 설치한 현명(縣名)으로 평양 서남쪽에 있다. 《漢書 地理志 下》
♣ 점액[點額]이마에 상처를 입음. 물고기가 용문에 오르려다 바위에 부딪쳐 이마에 상처를 입고 떠내려간다는 뜻으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 점액[點額]잉어들이 용이 되기 위하여 용문(龍門)에 모여드는데, 뛰어오르는 잉어는 용이 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이마에 점(點)이 찍혀 물러 나온다.
♣ 점액용문[點額龍門]중국 황하(黃河) 상류의 절벽으로 된 곳에 용문(龍門)이라 부르는 데가 있는데, 그 아래 모여든 고기가 위로 올라가면 용(龍)이 되지만 올라가지 못하면 이마를 찧어 상처만 입고 되돌아온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과거(科擧)에 낙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水經 河水 註ㆍ埤雅》
♣ 점어상[鮎魚上]메기는 비늘이 없어 잘 올라가지 못하는 고기이다. 자기도 벼슬이 올라가지 못함을 말함이다.
♣ 점어연죽[鮎魚緣竹]고난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한다는 말. 이아(爾雅)에 “메기가 비늘도 없이 미끄럽지만 대나무에 오르는 재능이 있어, 물이 내리흐르는 곳이 있으면 훌쩍 뛰어서 대나무잎을 입에 물고서 계속 뛰어 대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하였는데,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의 아내 조씨(刁氏)가 이 말을 인용하여 그의 남편에게 “당신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은 메기가 대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 점우규[漸于逵]주역(周易) 점괘(漸卦) 상구효사(上九爻辭)에 “기러기가 차츰 육(陸)으로 나오니 [鴻漸于陸]”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전(傳)에 의하면, 육(陸)은 규(逵)의 뜻으로서 즉 아무런 막힘이 없는 허공의 운로(雲路)를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 점유[霑濡]물에 흠뻑 젖다.
♣ 점의[霑衣]옷을 적시다.
♣ 점이소자[點離騷字]이소는 곧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을 말하고, 점을 찍는다는 것은 곧 이소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맞는 글자마다 옆에 점을 찍어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 점입가경[漸入佳境]가면 갈수록 경치가 아름다워짐. 일이 점점 더 재미있는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점점[佔佔]귓속말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모양, 옷자락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양
♣ 점점[漸漸]서서히 나아가는 모양, 보리 이삭이 빼어난 모양
♣ 점정최룡[點睛催龍]양 무제(梁武帝)가 절을 꾸미려고 화공(畫工)인 장승요(張僧繇)에게 단청(丹靑)을 하게 하였는데, 네 마리 용 중에서 눈동자의 점을 찍은 두 마리는 곧바로 날아가 버리고 눈동자를 찍지 않은 두 마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화룡점정(畫龍點睛)’의 고사가 전한다. 《歷代名畫記 張僧繇》
♣ 점조여[占旐旟]시경(詩經) 소아(小雅) 무양(無羊)에 “소와 양 치는 사람이 꿈을 꾸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이고,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였도다, 태인이 이것을 점쳐 보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인 것은 올해 풍년이 들 조짐이요,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인 것은 집안이 번성할 조짐이라 하도다.[牧人乃夢 衆維魚矣 旐維旟矣 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豐年 旐維旟矣 室家湊湊]" 한 데서 온 말이다.
♣ 점주[點籌]위후(韋后)가 무삼사(武三思)를 궁중에 끌어드려 어상(御牀)에 올라가 위후(韋后)와 함께 쌍륙(雙陸; 도박의 일종)을 하면 중종은 옆에서 산(算)을 헤아려[點籌] 주었다.
♣ 점필[佔畢]조선 성종(成宗) 때의 유종(儒宗)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말한다.
♣ 점필재[佔畢齋]조선조 성종(成宗)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김종직(金宗直)의 호.
♣ 점해[漸海]정교(政敎)가 널리 전파됨을 말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동으로 바다에 젖어들다.[東漸于海]" 하였다.
♣ 점화[點化]종래의 것을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전(轉)하여 전인(前人)의 시문(詩文)의 격식을 본따 더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어 시문을 짓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 점획과파[點畫戈波]습자(習字)하는 기본법. 즉 점찍고, 건너긋고, 삐치고, 파임하는 것이다.
♣ 접리[接䍦]접리는 두건(頭巾)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때 산간(山簡)이 술이 곤드레가 되어 접리를 거꾸로 썼다는 고사가 있다.
♣ 접리[接䍦]접리는 두건(頭巾)의 이름인데, 진(晋) 나라 때 산간(山簡)이 풍류가 있고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를 나가느뇨 고양지까지 가는구나 석양엔 거꾸로 실려 돌아와서 잔뜩 취해 아무 것도 모른다네 때로는 말을 타기도 하는데 백접리를 거꾸로 쓰고서 채찍 들고 갈강을 향해 가니 어찌 그리도 병주아와 같은고[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時時能騎馬 倒著白接䍦 擧鞭向葛疆 何如幷州兒]” 한 데서 온 말이다.
♣ 접몽환장주[蝶夢還莊周]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장주인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깨어나니 바로 장주였다. 이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莊子 齊物論》
♣ 접석[接淅]부리나케 떠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제(齊) 나라를 떠날 적에 바쁘게 떠나느라 밥을 지으려고 쌀을 담가 두었다가 그냥 건져 가지고 떠났던[接淅而行] 고사가 있다. 《孟子 萬章下》
♣ 접암배향[蜨菴配享]게을러 낮잠 자기에 알맞음을 말한 것이다. 접암(蜨菴)은 암자 이름으로 접(蜨)은 접(蝶)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장주(莊周)가 꿈에 호접(胡蝶)으로 화했다는 고사를 들어 붙인 이름이다. 후당(後唐)의 이우(李愚)는 밤낮 없이 공직에 매달려 매우 바빴다. 그는 사람에게 “내가 이다지도 바빠 한번도 꿈나라에 가보지 못하니, 낙양(洛陽)에다가 수죽(水竹)을 사서 접암(蝶菴)을 짓고는 모든 일 버리고 여기에서 살려는데, 이 암자에는 마땅히 장주를 시조로 모시고 신선인 진박(陳搏)을 배향시키겠다.” 하였다. 《淸異錄》
♣ 접여[接輿]춘추 때 초(楚) 나라 사람 육통(陸通). 접여는 자(字)이다. 난세를 만나 미친 체하니 사람들이 초광(楚狂)이라 일컬었다.
♣ 접여광가[接輿狂歌]춘추 시대 초 나라의 미치광이인 접여가 공자(孔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는고, …… [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微子》
♣ 접역[鰈域]가자미가 나는 바다 연안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이아(爾雅) 의소(義疏)에, “동방에 비목어(比木魚)가 있는데, 두 마리가 나란히 가지 않으면 앞으로 가지 못한다.” 하였다.
♣ 접자빈궁[艓子貧窮]접자(艓子)는 작은 배를 가리킨 말로, 두보(杜甫)의 최능행(最能行)에 “부호들은 돈이 있어 큰 배를 타고 다니고, 빈궁한 자는 작은 배를 부리어 생활을 하네.[富豪有錢駕大舸 貧窮取給行艓子]"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十五》
♣ 접접[渫渫]물결이 이어져 있는 모양
♣ 접접[沾沾]걷모양을 갖춤, 경박한 모양, 바람이 부는 모양
♣ 접해[鰈海]이아(爾雅)에, “동방에는 비목어(比目魚)가 있다.” 하였으므로 동해를 접해라 칭함.
♣ 접해[鰈海]접해는 조선(朝鮮)의 근해(近海)를 이른 말로, 전하여 조선을 가리킨다.
♣ 접화[蝶化]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녔다. 장자(莊子)
♣ 정[征]부세(賦稅).
♣ 정[鼎]솥[鼎]이 발이 셋이므로 삼공(三公)에 비유한다.
♣ 정[定]정(靜)과 통하므로 선정(禪定)에 빌어 쓰임. 삼매(三昧)의 역어(譯語)인데, 온갖 생각을 끊고 정신이 통일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 선(禪)을 수행하여 법(法)을 관찰하고 적정삼매(寂靜三昧), 곧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또한 청정(淸淨)한 마음을 가리킨다.
♣ 정[井]정은 남방 주작(南方朱雀) 7성의 하나. 《協紀辨方書義例五》
♣ 정[鄭]정은 춘추 시대 정(鄭) 나라에 음탕한 음악이 유행한 데서 즉 음탕한 음악을 이른 말이다.
♣ 정[鯖]정은 어(魚)와 육(肉)이 합쳐진 열구자(悅口子)를 말한다.
♣ 정가식객[鄭家食客]인색하던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에게 풍성한 음식 대접을 받던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일컫던 말이다.
♣ 정각[凈角]전통극에서 성격이 강렬하거나 거친 남자배역.
♣ 정간[井幹]한 무제(漢 武帝)가 장안(長安)에 지은 누각. 정자(井字) 모양으로 나무를 쌓아 올려지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정감문[鄭監門]정감문(鄭監門)은 북송(北宋) 시대 감안상문(監安上門)으로 있었던 정협(鄭俠)을 가리킴. 정협은 평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백성들에게 큰 병폐가 됨을 극언했었는데, 뒤에 오랫동안 가뭄이 듦으로써 유민(流民)들이 살 곳을 잃어 도로에 가득하게 되자, 이때에 백성의 참상(慘狀)을 자세히 그려서 유민도(流民圖)를 신종(神宗)께 올리니, 신종이 이 그림을 보고는 당장 구언(求言)의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신법을 혁파함으로써 며칠 뒤에 바로 큰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二十一》
♣ 정강[靖康]정강은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인데, 정강 2년에 금군(金軍)이 남하하여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상황(上皇)인 휘종(徽宗)과 흠종이 모두 사로잡힌 일이 있었다.
♣ 정강지변[靖康之變]북송(北宋) 정강 2년에 금군(金軍)에 의해 송도(宋都)의 변경(汴京)이 함락되었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잡혀간 사변을 말한다.
♣ 정강화[靖康禍]북송(北宋) 정강 2년에 금(金) 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철종(哲宗) 두 황제와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으로, 이로써 북송이 망하였다.
♣ 정거[定居]집에 가서 좌정함을 뜻함.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미(采薇)에 “어찌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한 달에 세 번은 이겨야지[豈敢定居 一月三捷]”하였다.
♣ 정거궁[淨居宮]승가람마(僧伽覽摩)의 준말. 승원(僧園) 또는 정사(精舍)로 번역되는데, 사원(寺院)의 이칭(異稱)이다.
♣ 정건[鄭虔]당대(唐代)의 산수(山水) 명화가. 미관 말직의 신분으로 두보(杜甫)와 우정을 나눈 사이로서, 당 현종(唐玄宗)으로부터 시(詩), 서(書), 화(畫) 삼절(三絶)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 정건삼절[鄭虔三絶]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난 자질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정건(鄭虔)이 시를 써서 그림과 함께 현종(玄宗)에게 바치니, 현종이 그 끝에다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고 대서특필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202 鄭虔傳》
♣ 정경[正卿]아경(亞卿)과 상대되는 말로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정식 장관이나 이와 동등한 관직을 가리킨다.
♣ 정경[井陘]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태항산(太行山)의 지맥(支脈)인데, 사면은 높고 중앙은 낮아 마치 우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곧 험난한 산길을 뜻한다.
♣ 정계[停啓]아뢰는 것을 멈춤. 특히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 등이 전부터 논계(論啓)하여 오던 일을 정지하는 것. 전에 이미 아뢴 것을 ‘전계(前啓)’라 하고 새로 아뢴 것을 ‘신계(新啓)’라 하며, ‘전계(前啓)’를 계속하여 다시 아뢰는 것을 ‘연계(連啓)’라 하고 전계를 전부이건 일부이건 멈추는 것을 ‘정계(停啓)’라 한다.
♣ 정계[㫌棨]정기(旌旗)와 계극을 말함. 두보가 적명부(狄明府)에 부친 시 중에, “汝曹又宜裂土食 身使門戶多旌棨”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는, “杜田引唐制節度使就第賜旌節 三品以上門立戟”이라고 하였음.
♣ 정계[丁鷄]진읍(鎭邑)에서 일상의 영위(營爲)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적(籍)에 실려 있는 장정의 숫자를 헤아려 물품을 징수하는 세목(稅目)의 일종. 닭을 징수하는 것을 정계(丁鷄), 물고기를 징수하는 것을 정어(丁魚), 술을 징수하는 것을 정주(丁酒)라 하였다.
♣ 정계[淨界]청정한 세계. 곧 초야의 은거생활을 뜻한다.
♣ 정계금지[淨界金地]불사(佛寺)가 자리한 정결한 지역에는 대지가 온통 황금으로 되어 있다는 설화로, 송고승전(宋高僧傳) 감통(感通) 당오대산죽림사법조전(唐五台山竹林寺法照傳)에 “現其五台諸寺 盡是金地”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 정고몽[丁固夢]정고(丁固)의 꿈에 소나무가 배[腹] 위에 났다. 해몽(解夢)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송(松)은 십팔공(十八公)이니, 십팔년 후에 공(公)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정고옥[鄭古玉]고옥은 중종~선조 때의 학자인 정작(鄭碏)의 호. 그는 술을 즐겨 주선(酒仙)이라 불려졌고, 시와 글씨에도 능했음.
♣ 정곡[鄭谷]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이 은둔해 살았던 곡구(谷口)를 말한다. 정자진은 수도묵수(修道墨守)하면서 권세가인 대장군 왕봉(王鳳)의 예빙(禮聘)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곡구자진(谷口子眞)으로 일컬어졌다. 《漢書 卷72ㆍ高士傳 中》
♣ 정곡공신[正哭功臣]중종 때 이 곤(李坤)이 자신에게 공이 있음을 울며 호소하여 공신에 참여되었다 하여 그 사람을 가리켜 한 말.
♣ 정공[鄭公]당 태종의 신하 위징(魏徵)인데, 그의 봉호(封號)가 정국공(鄭國公)이다. 그는 직간(直諫)으로 유명하였다.
♣ 정공[鄭公]선정(善政)을 베푸는 지방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제(北齊)의 정술조(鄭述祖)가 그 아비의 뒤를 이어 지방에서 훌륭한 정사를 펼치자, 사람들이 “그 대정공에 그 소정공이로다. 세월은 오십 년 흘렀어도 풍교는 어찌나 똑같은지.[大鄭公 小鄭公 相去五十載 風敎猶尙同]”라고 노래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정공이 군수(郡守)의 별칭으로 되었다. 《北齊書 卷29 鄭述祖列傳》
♣ 정공[正供]정공은 정식으로 조정에 바치는 공물이라는 뜻이다.
♣ 정공경개[程公傾盖]가어(家語)에 “공자가 정자(程子)와 길에서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말씀하였다[孔子遇程子於途 傾蓋而語].” 하였다.
♣ 정공논점십[鄭公論漸十]정공은 당(唐) 나라 위징(魏徵)이 정국공(鄭國公)에 봉하여졌으므로, 그를 지칭한 것이다. 그는 열 가지 조짐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을 열거하여 당 태종(唐太宗)에게 상소하였다. 십점지소(十漸之疏). 《唐書 卷七十七》
♣ 정공수채범저망[鄭公遂採范雎亡]위(魏)의 범저(范雎)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중상으로 위 나라 공자(公子) 위제(魏齊)에게 매를 맞고 거짓 죽어 나와, 뒤에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변성명을 하고 진(秦) 나라로 망명할 수가 있었음. 《史記 卷79》
♣ 정공향[鄭公鄕]한나라 말년의 유명한 학자인 정현(鄭玄)이 있었는데, 그 때에 황건적(黃巾賊)의 난리가 나서 온 세상이 들끓었는데, 그 황건적들이 정현이 사는 마을 앞에 와서 이 마을은 정공(鄭公)이 사는 마을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 정공향[鄭公鄕]후한 때 공융(孔融)이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이 사는 마을을 특별히 ‘정공향’이라 명명한 데서 온 말인데, 정현의 집에는 계집종들도 시경(詩經)을 잘 알아서 보통 대화할 때에 시경의 구절을 척척 인용하였다 한다.
♣ 정과정[鄭苽亭]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가 죄 없이 참소로 동래(東萊)에 귀양가서 임금을 그리워하여 거문고를 타고 슬피 노래한 곡조. 《高麗史 樂志》
♣ 정과정곡[鄭瓜亭曲]고려 의종 때에 정서(鄭叙)가 동래(東萊)로 귀양가 있으면서 임금을 생각하여 비파를 탔는데, 그 곡조를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한다. 과정(瓜亭)은 정서의 호(號)다.
♣ 정관[貞觀]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이다.
♣ 정관정요[貞觀政要]당 나라 오긍(吳兢)이 저술한 것인데, 당시의 법제 정령(政令)과 사적을 기록하였다.
♣ 정관지치[貞觀之治]정관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당 태종은 영주(英主)로서 이 정관 연간에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 등의 현상(賢相)과 위징(魏徵) 등 직신(直臣), 이정(李靖)ㆍ이적(李勣) 등의 명장(名將)을 등용하여 천하가 태평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정관혐[整冠嫌]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바루지 않는다는 것으로, 괜한 의심을 받을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 정구[庭衢]정구는 소요(逍遙)하는 뜨락과 길거리를 말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晉) 나라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訟) 첫머리에 “대인 선생이 있었으니, 그는 천지개벽 이래의 시간을 하루아침으로 삼고, 천만년을 순간으로 여겼으며, 해와 달을 창문과 빗장으로 삼고, 광활한 천지를 뜨락과 길거리로 여겼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 정국[鄭國]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진 당(唐) 나라의 유명한 직신(直臣) 위징(魏徵).
♣ 정군산하중소혈[定軍山下中宵血]제갈공명(諸葛孔明)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위(魏) 나라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여 정군산(定軍山)에 묻힌 것을 말한다. 《三國志 卷35 蜀志 諸葛亮傳》
♣ 정군평[鄭君平]군평(君平)은 정두경(鄭斗卿)의 자(字)이다.
♣ 정규지묵[庭珪之墨]이정규(李庭珪)가 만든 먹은 천하의 진품(珍品)이었다.
♣ 정금남[鄭錦南]금남은 정충신(鄭忠信)의 봉호(封號)이다.
♣ 정기[鼎器]단약(丹藥)을 굽는 솥.
♣ 정기[正氣]바른 기운. 일종의 심술(心術).
♣ 정기[鼎器]여기서 말한 솥그릇은 사람의 몸을 말한 것이요 약물(藥物)은 몸에 있는 진양(眞陽)의 기운을 말한 것이다.
♣ 정기의[正其誼]동중서(董仲舒)의 말에, ‘군자는 그 의(誼; 義)를 바루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아니하며,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헤아리지 아니한다.” 한 말이 있다.
♣ 정남[正南]공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몸을 공경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였다.
♣ 정남의이[征南薏苡]정남은 한 광무제(漢光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남쪽의 교지(交趾)를 정벌하였던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원이 교지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으로 쓰기 위해 많은 양의 율무를 수레로 실어왔는데,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진주를 실어왔다고 비방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정내[鼎鼐]솥과 가마솥, 재상
♣ 정내암[鄭萊菴]조선조 중기의 문신 정인홍(鄭仁弘)의 자가 내암(萊菴)이다.
♣ 정년[停年]인재를 가리지 않고 다만 관직에 있는 햇수와 공적(功績)에 따라 그 자격을 인정하여 승진 등용하는 제도를 이르는데, 이 제도는 맨 처음 위(魏) 나라 최량(崔亮)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다. 《魏書 崔亮傳》
♣ 정년격[停年格]정년격은 후위(後魏)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 최량이 처음 건의하여 만든 제도로서, 즉 인재의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재직(在職) 연한에 따라 자격을 인정하여 승진 등용(昇進登用)하던 제도이다.
♣ 정뇌경[鄭雷卿]조선조 인조(仁祖) 때의 문신(文臣). 자는 진백(震伯)이며 호는 운계(雲溪).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 갈 때 수행하였으며 청 나라에 귀화한 정명수(鄭命壽)ㆍ김돌(金突)이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세폐(歲幣)를 가로채므로 그 죄상을 고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청 나라에서 잡혀 죽었다.
♣ 정능[靖陵]중종(中宗)의 능. 정릉은 처음에 원당(元堂)에 있는 희릉(禧陵)에다가 합장(合葬)하였다가, 명종 17년(1562)에 광주(廣州)의 선릉(宣陵) 곁으로 천릉(遷陵)하였다.
♣ 정단매용라[正旦賣慵懶]옛날 정월 초하룻날에 게으픔을 판다는 풍속이 있었다.
♣ 정당[政堂]지방 관아.
♣ 정대[鞓帶]무늬를 수놓은 붉은 가죽띠.
♣ 정대경[鄭大卿]대경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의 자이다.
♣ 정덕기[鄭德基]덕기는 정유성(鄭維城)의 자(字)이다.
♣ 정덕여[鄭德餘]덕여는 정백창(鄭百昌)의 자(字)이다.
♣ 정도호가[丁都護歌]악부(樂府)의 노래 이름. 송 고조(宋高祖)의 딸의 남편 서규(徐逵)가 노궤(魯軌)에게 피살되자 고조가 도호인 정우(丁旴)에게 장사지내 주도록 하였는데, 서규의 처가 울부짖으며 찾아와 장례에 관한 일을 물어 볼 때마다 정도호를 애달프게 불렀던 고사로서 그 소리가 애절하였으므로 후대의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함. 《昌谷集註》
♣ 정동[征東]고려 신종 5년 12월에 경주(慶州)에서 적도 패좌(孛佐) 등이 난을 일으키자 김척후(金陟侯)ㆍ최광의(崔匡義)ㆍ강순(康純) 등 세 대장군을 나눠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高麗史 世家 卷二十一》
♣ 정동명[鄭東溟]동명은 조선조(朝鮮朝)인 현종(顯宗) 때의 문신(文臣)이며 학자였던 정두경(鄭斗卿)의 호이다.
♣ 정동성[征東省]중국 원(元) 나라가 우리나라 개경(開京)에 두었던 관아.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 하여 원 나라 관리를 내주(來駐)시키고 고려의 내정(內政)을 감시하였음.
♣ 정두[飣餖]정두는 안주나 과일을 포개 놓은 것.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에 “或如臨食案肴核紛飣餖"라 하였다.
♣ 정락[井絡]정락(井絡)은 일반적으로 장안(長安)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촉(蜀)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 정람[精藍]정사 가람(精舍伽藍)의 준말로 불교의 사원(寺院)을 말한다.
♣ 정려[鼎呂]구정(九鼎)과 대려(大呂), 구정은 우(禹) 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주조한 9개의 솥이고, 대려는 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설치한 종(鍾)인데, 모두가 천하의 보기(寶器)로 일컬어진 것이다.
♣ 정려[精廬]정사(精舍), 즉 사원(寺院)을 말한다.
♣ 정력[定力]정력(定力)은 선(禪)을 굳게 지키어 속된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 힘.
♣ 정령사공융[精靈似孔融]이른 나이에 문채(文彩)를 발하는 재사(才士)라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10세 되던 해에 이응(李膺)을 찾아가 기발한 문답으로 좌중을 압도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00》
♣ 정령욕화갈파운[精靈欲化葛陂雲]대나무 그림을 묘사한 것이다. 후한(後漢) 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에게서 신선술을 배운 뒤 죽장(竹杖)을 타고 집으로 날아와 갈파(葛陂) 호수 속에 죽장을 던지니, 그 정령이 청룡(靑龍)으로 화하여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神仙傳 壺公》
♣ 정령위[丁令威]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허산(靈虛山)에서 도술을 배워 학(鶴)이 되어 천년 만에 요동으로 돌아왔다 함. 수신후기(搜神後記)에, “丁令威 本遼東人 學道于靈虛山 後化鶴歸遼 集城門華表柱 時有少年 擧弓欲射之 鶴乃飛 徘徊空中而言曰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冡纍纍 遂高上沖天”이라고 보임.
♣ 정령위[丁令威]한(漢)의 요동 사람으로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학이 되었다 한다.
♣ 정록[鋌鹿]사슴이 죽음에 임박하면 아늑한 곳을 가릴 겨를이 없어 험난한 곳을 허겁지겁 달려간다는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文公 十七》
♣ 정룡투[鄭龍鬪]춘추 시대 정(鄭) 나라에 큰 홍수가 졌는데 용들이 나와 시문(時門)의 밖 유수(洧水)의 못에서 서로 싸웠다 한다. 《春秋左傳 昭公 十九年》
♣ 정림[亭林]정림은 청 나라 초기의 고증학자인 고염무(顧炎武)의 호이다.
♣ 정림일민[亭林逸民]정림은 고염무(顧炎武)의 호. 자는 영인(寧人). 일민은 덕행과 학문이 있으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고 파묻혀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고염무가 명(明)이 망하자 절의를 지켜 청 나라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한 말이다.
♣ 정립신인[鼎立神人]제주도(濟州島)에는 맨처음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두 아우와 함께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는 성주(星主)란 호칭을 주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고, 나라 이름을 탐라(耽羅)라 했다고 한다.
♣ 정마[征馬]먼 길을 가는 말.
♣ 정명[淨名]불가의 용어이다. 또는 경(經)의 이름임.
♣ 정명[貞明]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의 “일월의 도는 바르고 밝은 것이다.”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의 거룩한 덕을 뜻한다.
♣ 정묘[丁卯]만당(晩唐) 때의 시인 허혼(許渾)을 지칭한 말. 그가 단양(丹陽)의 정묘교(丁卯橋) 곁 정묘장(丁卯莊)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며, 그의 시집을 정묘집(丁卯集)이라 한다.
♣ 정묘교[丁卯橋]정묘교는 다리 이름으로, 당(唐) 나라 때 시인 허혼(許渾)이 이 다리 곁에 별장을 짓고 살았었으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시인 묵객이 사는 곳을 비유한 것이다.
♣ 정무[定武]정무본(定武本) 난정(蘭亭)을 말함. 당(唐) 나라 석본난정(石本蘭亭)으로는 정무본을 제일 아름답게 여김.
♣ 정무신룡[定武神龍]난정첩(蘭亭帖)의 정무본과 신룡본을 말함.
♣ 정문[程門]정이(程頤)가 사는 집의 문으로, 송사(宋史) 제428권 양시전(楊時傳)에, “양시가 어느날 정이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와 유작(游酢)이 곁에 시립한 채 가지 않고 있었다.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 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 하였다.
♣ 정문세효[鄭門世孝]정성근(鄭誠謹)의 아들 주신(舟臣)과 매신(梅臣)을 일컫음. 이들 삼부자는 모두 효성스러웠는데 매신은 벼슬살이에 있어서도 청렴결백하였다.
♣ 정문일침[頂門一鍼(針)]정수리에 한 대의 침을 놓음.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따끔한 한 마디의 충고. 약점을 찔러 따끔하게 훈계함.
♣ 정문입설[程門立雪]유초(遊酢)와 양시(楊時) 두 사람이 눈오는 밤에 스승인 정이천(程伊川)을 모시고 서 있었다는 고사. 제자가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 정미방[赬尾魴]시경(詩經)에 “방어는 꼬리가 붉다.”는 말이 있는데 해설하는 자의 말에, “방어는 피곤하면 꼬리가 붉는 것인데 은나라 백성이 포악한 정치에 피곤함을 비유한 것이라.” 한다.
♣ 정미벽서[丁未壁書]을사사화(乙巳士禍) 2년 뒤인 명종 2년(1547)에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은 뻔한 일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라는 내용의 글이 양재역 벽 위에 붙어 있는 것을 정언각(鄭彦慤)이 위에 고하면서 다시 사림(士林)에 화를 끼친 사건이다. 을사사화 당시 대윤(大尹)을 숙청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대윤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층인 자신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유림들에게 뒤집어 씌워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사사(賜死)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되는 등 많은 유림들이 화를 당했음.
♣ 정반자[鄭半刺]반자는 통판(通判), 즉 판관(判官)의 별칭이다.
♣ 정배대영[停杯對影]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시에 “꽃나무 아래 한 병 술 들고 아무도 없이 혼자 잔질한다오. 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니 그림자 대하여 삼인이 되었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하였다.
♣ 정백[鄭白]전국 시대 정국(鄭國)이 쌓은 정국거(鄭國渠)와 한 무제(漢武帝) 때 백공(白公)이 쌓은 백거(白渠), 즉 수로 관개 사업을 말한다.
♣ 정백[鄭伯]정백(鄭伯)은 춘추 시대 정 장공(鄭莊公)을 가리키는데, 노 희공(魯僖公) 5년 8월, 위(衛) 나라의 수지(首止)에서 제후(諸侯)들이 회동했을 적에 유독 정백만이 맹약(盟約)에 불참하고 도피하여 돌아갔으며, 노 선공(魯宣公) 11년에 있었던 여(厲) 땅의 전쟁에서도 유독 정백만이 불참해 도피하여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 정백[亭伯]정백은 후한(後漢) 최인(崔駰)의 자(字)로, 당시 실권자였던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에게 밉게 보여 요동(遼東) 장잠현(長岑縣)으로 쫓겨났다. 《後漢書 崔駰列傳》
♣ 정백[庭柏]조주백수자(趙州柏樹子)를 말함.
♣ 정백심산지[貞白尋山誌]도홍경(陶弘景)은 양(梁) 나라 말릉인(秣陵人)인데, 자는 통명(通明)임. 어려서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얻어 보고 문득 양생(養生)의 뜻이 있었음. 책 1만여 권을 읽고 금기(琴棋)를 잘 하였으며, 초예(草隸)에도 익숙하였다.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였는데, 음양ㆍ오행(五行)ㆍ산천ㆍ지리ㆍ방도(方圖)ㆍ산물(産物)ㆍ의술ㆍ본초(本草)에 더욱 밝았으며,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을 지었음. 시(諡)는 정백 선생(貞白先生)임. 또 청 나라 정유요(丁惟曜)도 자가 정백(貞白)인데 심양산수지(瀋陽山水志)를 지었음.
♣ 정법사[政法師]송운 유정(松雲惟政)으로, 사명당을 가리킨다.
♣ 정변기[正奇]정(正)과 기(奇)는 병법의 술어로, 적진과 대치하여 교전하는 등의 상법(常法)을 정이라 하고, 매복, 엄습 등의 변법(變法)을 기라 한다. 《孫子 勢》
♣ 정병소장송[井甁笑張竦]정병은 우물가에 매달린 두레박이란 뜻으로 즉 법도 있는 선비를 상징한 말이다. 양웅(揚雄)이 주잠(酒箴)을 지어 주객(酒客)이 법도 있는 선비를 힐난하는 내용으로 물건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마치 두레박[甁]과 같다. 우물[井] 꼭대기에 걸려 있어 항상 위태롭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들어오지 않으며 외로이 새끼줄에만 매달려 있으니, 술부대[鴟夷]만 못하다. 술부대는 하루종일 술이 담겨 있고 항상 공가(公家)의 쓰임을 받으니 이렇게 따지면 술이 뭐가 나쁜가.”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한(漢) 나라 때 장송(張竦)과 진준(陳遵)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장송은 아주 근신하며 법도가 있는 선비였고, 진준은 이와 반대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빈객들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며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므로, 진준이 양웅의 주잠을 보고 스스로 우물의 두레박과 술부대를 들어 친구인 장송과 자신에게 비유한 고사이다. 《漢書 卷九十二 陳遵傳》
♣ 정복시[貞復時]봄이 가까웠다는 뜻. 정은 내괘(內卦)를 가리키는데, 지뢰복(地雷復)의 내괘의 초효(初爻)가 양(陽)이므로 양이 처음 생김을 말한다. 《易經 地雷復》
♣ 정봉[征蓬]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님을 뜻한다.
♣ 정봉[丁奉]삼국 시대 오 나라 안풍(安豊) 사람으로, 손량(孫亮)을 섬겼는데, 위 나라와 싸우면서 단병(短兵)으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三國志 卷五十五》
♣ 정부[正夫]이형상(李亨祥)의 자(字), 호는 다계산인(茶溪散人).
♣ 정빈[汀蘋]물가[汀洲]의 빈화(蘋花)가 시인(詩人)의 읊음에 자주 나온다.
♣ 정사[政事]정사란 관리의 출척(黜陟)ㆍ천전(遷轉) 등에 관한 사령(辭令), 요즈음의 인사행정에 해당하는 말이다.
♣ 정사농[鄭司農]정사농은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모두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던 정중(鄭衆) 또는 정현(鄭玄)을 지칭하는 말이다.
♣ 정산서원[鼎山書院]정산서원은 이황(李滉)과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 정상간[井上看]자여(子輿)란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비틀거리며 우물가에 가서 자기 몸을 비쳐 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大宗師》
♣ 정상색조잔[井上索螬殘]쓸데없는 청렴을 이름.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진중자(陳仲子)가 오릉(於陵)에 살면서 자기 형이 준 것도 의리가 아닌 녹(祿)이라 하여 먹지 않고 3일이나 굶다가, 귀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엉금엉금 기어 우물가로 가서 굼벵이가 먹다 남은 오얏 하나를 먹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下》
♣ 정색[精色]밝은 색, 귤의 외색(外色). 내백(內白)은 껍질 속이 희다.
♣ 정서군막[征西軍幕]묘청(妙淸) 토평(討平).
♣ 정서다좌리[征西多佐吏]정서장군이었던 유량(庾亮)을 가리키는데, 유량의 막하(幕下)에는 특히 은호(殷浩) 등 재능 있는 좌리(佐吏)가 많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晉書 卷七十三》
♣ 정서이견[情恕理遣]잘못이 있으면 온정으로 참고 이치에 비추어 용서함.
♣ 정설[井渫]우물이 이미 준설(浚渫)됨.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함의 비유. 설(渫)은 더럽고 흐린 것을 쳐버려 깨끗이 함이다. 주역(周易) 정괘(井卦)에 “깨끗한 우물 물 먹지 않으니 마음 슬프다[井渫不食 爲我心惻].” 하였다.
♣ 정설불식[井泄不食]주역(周易) 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우물을 깨끗이 쳤는데도 먹지를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 임금이 밝아서 길어다 먹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으리라.[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라는 말이 있다.
♣ 정섭[鄭燮]청 나라 사람. 호는 판교(板橋). 대를 잘 그리고 서법에 능하며 시를 잘하여 삼절(三絶)이란 칭호를 받았다.
♣ 정성[政聲]정성(正聲)과 같음.
♣ 정성[政成]지방관원의 임기가 차는 것이다.
♣ 정소투북[程蘇投北]송 철종(宋哲宗) 때에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의 모함을 받아, 정이(程頣)는 부주(涪州)로 귀양가고 소식(蘇軾)은 경주(瓊州)로 폄척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宋元學案 卷十五, 卷九十九》
♣ 정속구가귀계일[正屬謳歌歸啓日]중국 황제가 새로 즉위하게 된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의 “우(禹) 임금이 신하 익(益)을 자신의 후계자로 하늘에 천거하고 7년 뒤에 죽자, 익이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우 임금의 아들인 계(啓)를 피하여 기산(箕山) 북쪽으로 가 있었는데, ……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자들이 익에 대한 노래는 부르지 않고 계만을 찬양하여 노래 부르면서 ‘우리 임금님의 아들이시다.’고 하였다.[謳歌者不謳歌益 而謳歌啓曰吾君之子]”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정송조[貞松調]금곡(琴曲)의 이름. 명초(明初)의 학자 오희(烏熙)가 거문고에도 정통하여 일찍이 절부(節婦)의 일을 보고 매우 탄모(歎慕)하여 정송조(貞松調)를 지었다 한다.
♣ 정수[靜修]정수는 원(元) 나라 때의 고사(高士)인 유인(劉因)의 호임. 유인은 뛰어난 재기(才器)로서 일찍이 이학(理學)에 전념하였고 시(詩)에도 뛰어났는데, 끝내 자식이 없이 죽었다. 《元史 卷一百七十一》
♣ 정수홀위혈[井水忽爲血]신라 말기에 이런 재변이 있었다.
♣ 정승[定僧]선정(禪定)에 들어간 승려.
♣ 정승[政丞]의정(議政)의 대신(大臣),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영의정(領議政)을 삼정승(三政丞)이라고 한다.
♣ 정승시[政丞試]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차례로 보이는 윤차 제술임.
♣ 정시[正始]시경(詩經)의 주남(周南)ㆍ소남(召南) 등의 아악(雅樂)을 뜻함. 시경(詩經) 대서(大序)에 “주남ㆍ소남은 시초를 바르게 하는 도리이며, 왕화의 기초이다[正始之道 王化之基]”하였다.
♣ 정시[正始]인륜의 시초인 부부의 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뜻. 시경(詩經) 대서(大序) 소(疏)에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은 시초를 바르게 하는 대도(大道)이고 왕업(王業)을 이룩하는 기본이다.”고 하였다.
♣ 정시시체[正始詩體]정시는 위 제왕(魏齊王)의 연호. 그 당시 사대부들이 청담(淸談)을 숭상하였는데, 그 후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이라 불리는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등이 그 풍조를 더욱 발전시켜 형성한 표일(飄逸) 청원(淸遠)한 시체.
♣ 정시음[正始音]정시풍(正始風)과 같은 말로서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성행했던 청담풍(淸談風)의 문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의 시체(詩體)를 말함.
♣ 정시지음[正始之音]정시는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제왕 방(齊王芳)의 연호로, 그 이후 위진(魏晉) 시대를 풍미했던 청담(淸談) 일색의 시풍(詩風)을 말한다.
♣ 정신[挺身]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다, 곧 어려운 사정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그 곤란에 대처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정신[呈身]식면은 얼굴을 서로 아는 사이를 말하고, 정신은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천거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손변(孫抃)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평소 얼굴도 모르는 당개(唐介) 등을 천거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자, 혹자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대뜸 천거하는 것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은 정신어사(呈身御史)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지금 어찌 식면대관(識面臺官)을 구해서 되겠는가.”고 하였다.
♣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만 집중하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다.
♣ 정실[庭實]뜨락을 채우는 예물.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 예물이나 공물을 가지고 가 대궐의 중정(中庭)에 진열한다는 뜻이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4년 조(條)에 “庭實旅百"이라 하였음.
♣ 정실[鼎實]식료를 솥에 넣어 음식을 만든다는 뜻으로 나라에 큰일을 하는 인재에 비유함. 은 고종(殷高宗)이 신하 부열(傅說)에게 “내가 만약 술을 만들면 네가 누룩이 되고, 만약 국을 만들면 염매(鹽梅)가 되라.”고 했는데, 여기서 인용되었다. 《書經 說命中》
♣ 정안[征鞍]나그네의 안장.
♣ 정약건[鄭若鍵]약건은 정약용의 집안 아우가 되는 사람이다.
♣ 정양[定襄]정양군은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오늘날의 내몽고(內蒙古) 음산(陰山) 이남에 설치한 행정구역임.
♣ 정양[正陽]정양은 당 나라 종리권(鍾離權)의 호. 공동산(崆峒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그가 16조의 선술(仙術)에 관한 비결을 지었다 함.
♣ 정양[旌陽]정양은 진(晉) 나라 허손(許遜)으로서 온 가족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어느 날 길가에서 한 소년을 보고는 이무기의 정(精)이라고 하며 곧 황우(黃牛)로 변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는 자신이 흑우(黑牛)로 변해 그 황우를 쫓으면서 문인에게 칼로 베어 죽이도록 하였다 한다. 소식(蘇軾)의 신녀묘(神女廟)라는 시에 “정양이 이무기를 베어 죽였다.[旌陽斬長蛇]”라 하였다.
♣ 정양사[正陽寺]금강산에 있는 절 이름이다. 표훈사(表訓寺) 북쪽 산의 정맥(正脈) 고지대에 위치하여 시계(視界)가 확 트여서 금강산의 제봉(諸峯)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 정어중[鄭漁仲]어중은 송(宋) 나라 학자인 정초(鄭樵)의 자(字). 협제산(夾際山)에 살았으므로 협제 선생(夾際先生)이라 칭하며, 고증학에 밝아 통지(通志) 2백 권을 지었음. 《宋史 鄭樵傳》
♣ 정언눌[鄭彦訥]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
♣ 정업[淨業]정업호(淨業湖)를 말함. 오난설의 기유도(記遊圖) 제15의 정업연인(淨業緣因)에 보면 “余與法時帆定交 自積水潭觀荷始 淨業湖花事尤盛 每着綠簑 冒雨而出"이라 하였음.
♣ 정역[淨域]불교 용어로 번뇌의 속박을 떠나서 아주 깨끗한 세상을 가리킨다. 정토(淨土)라고도 한다.
♣ 정역[鄭驛]한(漢) 나라 정당시(鄭當時)가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장안(長安) 근교(近郊)에 역(驛)을 설치하여 빈객을 청하였다 한다.
♣ 정오무심당복사[鄭五無心唐僕射]정오는 당 소종(唐昭宗) 때 시인이며 재상이었던 정계(鄭綮)를 말함. 그는 본디 해학적인 시를 많이 써서 매양 조정의 실정(失政)을 풍자했는데, 한번은 소종이 그의 시를 듣고는 그가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가 여기어 그에게 예부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제수하자, 정계는 스스로 자신을 재상의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탄식하기를 “내가 재상이 된다면 천하 사람이 웃을 것이다.” 하고, 또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국사를 알 만하다.” 하고 굳이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마지못해 정무를 보다가 겨우 3개월 만에 끝내 사직하고 말았다. 《唐書 卷二百八十三》
♣ 정와[井蛙]우물 안 개구리의 뜻으로 역시 견문이 좁아 세상 형편을 모름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제24권 마원전(馬援傳)에, “하직하고 돌아감을 인해서 효(囂)에게 말하기를, ‘자양(子陽)은 우물 안 개구리일 뿐으로, 스스로 망녕되이 자존(自尊)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말하자면 뜻과 식견이 편협해서 우물 속의 개구리와 같다는 것이다.” 하였다.
♣ 정완[訂頑]장횡거(張橫渠)가 지은 서명(西銘)의 본명.
♣ 정완유[鄭緩儒]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정(鄭) 나라 사람 완(緩)이 구씨(裘氏) 땅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더니 3년 뒤에 유자(儒者)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정요[政要]정관정요(貞觀政要)의 약칭으로 당 나라 오긍(吳兢)이 저술한 것인데, 당시의 법제 정령(政令)과 사적을 기록하였다.
♣ 정우곡[鄭愚谷]우곡은 정이오(鄭以吾)의 호.
♣ 정운[鄭運]정운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우다가 부산포(釜山浦) 해전(海戰)에서 선봉으로 싸우던 중 전사하였다.
♣ 정운[停雲]친구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정운시(停雲詩)에 “정운은 뭉게뭉게 떠오르고 시우는 자욱이 내리도다[停雲藹藹 時雨濛濛]”하였고 그 서(序)’에 “정운(停雲)은 친우를 생각해서 지은 시이다.”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詩) 몽이백(夢李白)에 “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이라 하였다.
♣ 정운[停雲]친한 벗을 생각한 시(詩)를 일컫는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가운데 친우(親友)를 생각하며 지은 정운시(停雲詩) 4수가 있는데 그 시에 “머물러 있는 뭉게구름 때맞춘 보슬비 먼 곳 친구 생각하며 서성댄다.[藹藹停雲 濠濠時雨 良明悠邈 搔首延佇]”하였고,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구를 생각하는 시이다.”라고 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정겨운 벗을 그리워할 때 인용된다.
♣ 정운시[停雲詩]도연명(陶淵明)의 정운시(停雲詩)에 “靄靄停雲 濛濛時雨”라는 구절이 있는데, 자서(自序)에서 “이는 친우(親友)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하였다.
♣ 정원[貞元]당(唐) 덕종(德宗) 연호.
♣ 정원군[定遠君]인조(仁祖)의 아버지. 선조(宣祖) 13년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7년 뒤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 때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올랐고, 광해군 11년에 죽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대원군(大院君)에 추존되었다가, 인조 5년에 조정 신하들의 많은 논란 끝에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되었다. 《仁祖實錄ㆍ璿源系譜》
♣ 정원류불식[貞元流不息]천도(天道)가 유행함을 말함.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정은 겨울에 해당 하고 원은 봄에 해당함. 《周易 乾卦》
♣ 정원수조[正元受祖]정원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고, 수조(受祖)는 임금 자리를 종묘(宗廟)에서 선위받는다는 뜻으로, 정월 초하룻날에 요(堯) 임금이 그만둔 천자(天子)의 자리를 순(舜) 임금이 종묘에서 선위받았던 일을 이른 말이다. 《書經 舜典》
♣ 정원투필[定遠投筆]정원은 한 나라 반초(班超)의 봉호(封號)이다. 반초가 집이 가난하여 관청에서 글씨를 쓰면서 먹고살았는데, 어느 날 글씨를 쓰다가 붓을 내던지면서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더라도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이 이역 땅에서 공을 세운 것을 본받아 봉후(封侯)가 되어야지, 어찌 이 따위 짓을 일삼으랴.” 하였다. 《後漢書 卷47 班超傳》
♣ 정원후[定遠侯]정원후는 바로 후한 때의 명장 반초(班超)의 봉호인데, 반초는 일찍이 서역(西域)에 정벌을 나가 장군장사(將軍長史)ㆍ서역도호(西域都護) 등의 관직에 3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서역의 50여 나라들을 위무 안집(慰撫安集)하여 모두 한 나라에 귀순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화를 항상 주장하였다. 《後漢書 卷四十七》
♣ 정위[庭闈]부모가 거처하는 방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부모를 가리킨다.
♣ 정위[精衛]새 이름. 서조(誓鳥), 원금(寃禽), 지조(志鳥)라고도 하며, 민간에서는 제녀작(帝女雀)이라 부른다. 염제(炎帝)의 막내 딸 여와(如娃)가 동해에서 놀다가 빠져 죽어 변했다는 신화 속의 새 이름이다.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서 복수를 하려고 늘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 빠뜨려 바다를 메우려 한다고 한다. 《山海經》
♣ 정위[鄭衛]시경(詩經)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을 말함.
♣ 정위다음분[鄭衛多淫奔]정(鄭) 나라와 위(衛) 나라는 풍기가 문란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시경(詩經)의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은 음분의 시가 많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정ㆍ위의 음악은 난세(亂世)의 음악이다.” 하였다.
♣ 정위전해[精衛塡海]전하는 바로는 염제(炎帝)에게 여와(女娃)라는 딸아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여와가 동해에 놀러갔다가 풍랑과 파도에 휩쓸려 큰 바다로 밀려가 익사하고 말았다. 여와는 죽은 후 그녀의 혼은 정위(精衛)라는 한 마리 새로 변했다. 그녀는 동해의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큰 바다를 평평하게 메우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일 서산에서 돌이나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파도가 용솟음치는 큰 바다에 던져 넣었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녀를 ‘뜻있는 새[志鳥]’, ‘맹세한 새[誓鳥]’, ‘억울한 새[寃鳥]’ 등으로 불렀고, 그녀가 본래 염제의 딸이었기 때문에 또한 ‘제왕의 딸 새[帝女雀]’”이라고도 했다. 여와의 비참한 운명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죽음으로써 복수하려는 그녀의 불요불굴의 굳센 의지는 사람들을 탄복하고 감동하게 만든다. 이 신화는 산해경(山海經) 북해경(北海經)에 보인다.
♣ 정위조[精衛鳥]옛날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은 뒤 새로 화하였는데 이 새를 정위조라 한다. 이 새가 항상 서산(西山)에 가서 돌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웠다는 고사가 있다. 《山海經ㆍ太平御覽》 사람의 무모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정위화학[丁威化鶴]한(漢) 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난 뒤에 학으로 변한 것을 말한다.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된 후 천 년이 지난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 정유격[程遊擊]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 나라 장수이다.
♣ 정유길[鄭惟吉]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 정유상곡생표상[庭有桑穀生表祥]덕을 닦아 요망한 물건을 없앴다는 뜻. 중종은 은(殷) 나라 태무(太戊)이며, 상곡(桑穀)은 요괴스런 뽕나무. 은 나라 서울인 박(亳) 땅에 이상한 뽕나무 두 그루가 뜰에 났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이 되자 두 움큼이나 자랐다. 태무는 어진 신하 이척(伊陟)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니, 이 나무는 곧 말라죽었으며, 은 나라는 다시 정치가 잘 되어 중흥(中興)하게 되었다 한다. 《史記 殷本紀》
♣ 정읍[井邑]정읍사(井邑詞)의 준말로 무고(舞鼓)에 맞추어 부르던 삼국 시대 속악(俗樂)의 창사(唱詞)이다.
♣ 정이[鼎彝]솥과 같은 기물(器物)로 왕가(王家)의 종묘(宗廟)ㆍ사당(祠堂)에 상시 비치해 두는 의물(儀物)이니, 골동을 말한다. 옛날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의 사적을 여기에 새겼었다.
♣ 정이[鄭丈]정추만 지운(鄭秋巒之雲)의 자이다.
♣ 정인득해록[鄭人得駭鹿]열자(列子)에, “정나라 사람이 들에서 사슴을 잡아 죽여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파초 잎으로 덮어두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가서 보니 사슴 덮은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 버렸는데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 정인표[鄭仁表]당(唐) 나라 정인표(鄭仁表)가 “하늘의 상서(祥瑞)로는 오색 구름이 있고 사람의 상서로는 정인표가 있다.” 하며 자신의 문장을 과시했다 한다. 《唐書 卷一百八十二 鄭仁表傳》
♣ 정인홍[鄭仁弘]조선조 광해군 때 상신(相臣). 호는 내암(萊庵). 광해군 4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폐비(廢妃)의 논(論)을 일으키고 포학(暴虐)한 일이 많았음. 문집으로는 내암집(萊庵集)이 있음.
♣ 정일[精一]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나라를 전하면서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 정일두[鄭一蠹]일두는 조선조 학자 정여창(鄭汝昌)의 호. 자는 백욱(伯勗).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저서에는 용학주소(庸學註疏)ㆍ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등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그의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했고,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일부 전할 뿐이다.
♣ 정일방구[正日放鳩]한단(邯鄲)의 백성이 정월 초하룻날 조간자(趙簡子)에게 비둘기를 선물로 바치니, 조간자는 그 비둘기를 날려보내면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였다. 《列子 說符》
♣ 정일변미위[虞精一辨微危]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 정자[程子]낙양(洛陽) 사람.
♣ 정자[靜者]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학설에 통달하여 청정(淸靜)의 도를 깊이 터득하여 세상에 초연한 사람으로, 보통 은사(隱士)나 승려를 가리킨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심분(審分)에 “도를 얻은 자는 반드시 고요하게 되고, 고요하게 되면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得道者必靜 靜者無知]”라는 말이 있다.
♣ 정자[正字]정자는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정9품 벼슬이다.
♣ 정자산[鄭子産]춘추시대 정(鄭) 나라의 공손교(公孫僑)이다. 간공(簡公)ㆍ정공(定公)ㆍ헌공(獻公)ㆍ성공(聲公) 등 네 조정에 계속 재상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패권다툼을 벌이는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에 처한 정 나라를 무사하게 보전하였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자산이 외교문서를 잘 작성했다고 공자가 말한 내용이 있다.
♣ 정자용[鄭子容]자용은 정홍명(鄭弘溟)의 자(字)이다.
♣ 정자원[鄭紫元]자원(紫元)은 정두원(鄭斗源)의 자(字)이다.
♣ 정자정[鄭子精]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자이다.
♣ 정자중[鄭子中]정유일(鄭惟一)임. 호는 문봉(文峯)이고 퇴계 문인이다.
♣ 정자진[鄭子眞]한(漢) 나라 때의 은사(隱士) 정박(鄭樸)이다. 그는 도(道)를 닦고 입다물고 앉아서, 성제(成帝) 때에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맞이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곡구(谷口)의 산 밑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자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 하였음. 《漢書 高士傳》
♣ 정장[靚粧]무릇 그림이란 것은 흰 바탕을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채색이 흰 것을 얻어야 비로소 빛이 난다. 자서(字書)에 의하면, “하얗게 분칠하고 까맣게 눈썹을 그리는 것을 정(靚)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퇴지의 이른바, “분이 희고 머리구비가 푸르다.”는 것이 바로 정장(靚粧)이다.
♣ 정장[亭鄣]변방의 요새(要塞)에 설치하여 사람의 출입을 검사하는 관문.
♣ 정저잠양칠일회[井底潛陽七日回]일(日)은 월(月)과 같은 뜻으로, 7개월 만에 음양(陰陽)이 서로 교체됨을 이름. 이를테면 괘(卦)로써 월(月)에 배합시킬 경우, 오월(五月; 구괘(姤卦)에 해당함)부터 양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다 없어졌다가, 그 후 7개월 만인 십일월(十一月; 복괘(復卦)에 해당함)에 이르러 양이 다시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周易 復卦》
♣ 정저지와[井底之蛙]우물 안 개구리란 뜻으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시야(視野)가 좁은 것을 말한다.
♣ 정전[筳篿]정전은 점치는 대조각을 말한다.
♣ 정전[鄭箋]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란 사람이 많은 경전(經傳)을 주석하였는데, 그 주석을 정전이라 한다.
♣ 정전백[庭前栢]어느 중이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묻되, “어떤 것이 조사(祖師; 達摩)가 서방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 하였다. 이것을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의 화두(話頭)라 한다. 이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오랫동안 연구하면 자연히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을 참으로 깨닫게 되어 돈오(頓悟)하게 된다 한다.
♣ 정절[旌節]높은 무관(武官)은 깃발과 절(節)을 들고 출입한다.
♣ 정절[旌節]당 나라 때 천자가 절도사(節度使)에게 지방행정의 전권을 부여하는 뜻으로 주는 두 종류의 깃발로 왕의 명을 받고 나온 사자를 뜻한다.
♣ 정절[靖節]진(晉)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사시(私諡). 그는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으며 시주(詩酒)로 한가하게 여생을 보냈다. 《晉書 陶潛傳》
♣ 정절동고소[靖節東臯嘯]도연명(陶淵明)의 시호.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 “동편 언덕에 올라 멋대로 휘바람 분다.[登東皐而舒嘯]”
♣ 정절망산도[靖節望山圖]정절망산도는 시호가 정절인 동진(東晉)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남산(南山)을 관망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을 말함. 도잠이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적에 독우(督郵)가 그곳에 이르자,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보아야 한다고 하므로, 도잠이 탄식하기를 “내가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그런 향리 소인(鄕里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는, 당장 인끈을 풀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종신토록 은거하였다.
♣ 정절삼경[靖節三徑]정절은 도잠의 시호이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徑)은 묵었지만 송국(松菊)은 여전하구나.”라고 하였는데, 삼경은 세 곳의 오솔길이다.
♣ 정절족복공속[鼎折足覆公餗]일국의 대신이 어진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 정무를 잘 수행하는 자기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소인배와 가까이 지내면 국가를 망치고 자신에게도 죄가 돌아온다는 비유. 《易經 卷5 鼎》
♣ 정절집[靖節集]도연명의 문집. 도연명의 시호가 정절이므로 ‘정절집’이라 함
♣ 정절책자[靖節責子]정절은 동진(東晉) 때의 고사 도잠(陶潛)의 시호. 도잠이 불초한 다섯 아들을 나무란 시에 “두 귀밑은 이미 백발이 되었고 몸뚱이도 건강하지 못한데, 다섯 사내아이가 있기는 하나 모두가 지필을 좋아하지 않네 …… 천운이 진실로 이러하다면 오직 술이나 마셔야지[白髮被兩鬢 肌膚不復實 雖有五男兒 總不好紙筆 …… 天運苟如此 且進杯中物].”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三 責子》
♣ 정정[整整]단정히 갖추어진 모양
♣ 정정[丁丁]도기로 나무를 찍는 소리, 바둑을 두는 소리, 말뚝을 박는 소리, 비파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빗방울 듣는 소리, 패옥의 쟁그랑거리는 소리
♣ 정정[渟渟]물이 가득 차 있는 모양
♣ 정정[挺挺]바른 모양, 곧은 모양
♣ 정정[正正]바른 모양, 정돈된 모양, 세력이 왕성한 모양
♣ 정정[涏涏]반질반질한 모양, 기름기가 조르르 흐르는 모양
♣ 정정[晶晶]반짝반짝 빛나는 모양
♣ 정정[婷婷]아름답고 예쁜 모양, 꽃이 흔들리지 않는 모양
♣ 정정[怔怔]움직이지 않고 바라보는 모양, 하염없이
♣ 정정[井井]일이나 행동에 절도가 있는 모양, 정결 고요한 모양
♣ 정정[停停]초목의 성장이 중지된 모양, 아직 발동하지 않고 정지 상태인 모양, 높은 모양, 아름답고 좋은 모양
♣ 정정[定鼎]하우씨(夏禹氏)가 구정(九鼎)을 지어 부어 구주(九州)를 상징하였는데, 상(商)을 거쳐 주(周)에 이르도록 모두 전국(傳國)하는 중기(重器)로 삼았다. 좌전(左傳)에, “성왕(成王)이 정정(定鼎)하다.” 하였으니, 정정이란 건도(建都)란 말과 같다.
♣ 정정[棖棖]현악기의 소리, 회초리로 사람을 꾸짖는다고 하는 지옥에서 온 사자
♣ 정정벌목성[丁丁伐木聲]친구들과 모여서 잔치를 벌이면서 깊은 정과 우의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 찍는 소리 정정하거늘, 새 울음소리 앵앵하도다.[伐木丁丁 鳥鳴嚶嚶]”하였다.
♣ 정정연[丁丁然]바둑돌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
♣ 정조하[朝霞]아침 안개. 아침의 정기.
♣ 정조합[精粗合]정(精)은 알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려운 심오은미한 이치이고, 조(粗)는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일을 말함. 합한다는 말은 성인의 도는 어려운 곳도 있고 쉬운 곳도 있지만 그 소이연의 이치만은 하나로 관통된다는 것임. 《論語 子張》
♣ 정종[鼎鍾]국가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면 종(鍾)과 정(鼎)에 새겨서 영원히 전한다.
♣ 정종명[鼎鐘銘]솥과 종. 옛적에 훌륭한 공적이 있으면 그 사실을 솥과 종 등에 새겨 기렸다.
♣ 정주[程朱]정자(程子)와 주자(朱子).
♣ 정주[定州]함남 정평(定平)의 옛 이름.
♣ 정주자[定州瓷]정주는 곧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정현(定縣)을 말하는데 송대(宋代)에 이 고을 사람들이 만든 자기가 아주 유명하여 세상에서 정요(定窯)라고 일컫기까지 하였다.
♣ 정중동[靜中動]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나타나는 심상으로서 시적 기교 중 일종의 역설이다.
♣ 정중인[定中]선정(禪定)에 듦. 불교(佛敎)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진리(眞理)를 직관(直觀)하는 것을 말한다.
♣ 정중지와[井中之蛙]우물 안 개구리. 견문이 좁고 세상 형편을 모름.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구애하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여름 한 철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과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배운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 정중천[井中天]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면 극히 일부분만 보이듯이, 깊은 골짜기에 살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 정중폭죽[庭中爆竹]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문 뒤에다 복숭아나무를 꽂아서 사귀(邠鬼)를 물리치고 뜰에는 폭죽(爆竹)을 터뜨려서 사귀를 쫓는다.
♣ 정중훤[靜中喧]훤(喧)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고요한 가운데 시끄럽다.
♣ 정지상[鄭知常]고려 인종(仁宗) 때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그는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받아 산재기(山齋記)를 지었음. 인종 13년에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되어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음. 저서에는 정사간집(鄭司諫集)이 있음.
♣ 정진[征塵]여기서는 곧 사신(使臣) 행차가 달려가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말함.
♣ 정진리[鼎津鯉]서신(書信)을 뜻한다. 고악부(古樂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님이 먼 데서 찾아와,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편지가 나왔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 한 데서 온 말이다.
♣ 정찬협이주위[程竄峽而舟危]송 철종(宋哲宗) 때, 정이가 부주(涪州)로 귀양가는 도중에 강을 건너다가 중류에서 배가 거의 뒤집힐 뻔했는데, 이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르짖으며 통곡하였으나, 정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元學案 卷十六》
♣ 정참잠경개[停驂暫傾蓋]공자(孔子)가 길을 가다가 정자(程子)를 만나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이고서 이야기하였다.
♣ 정채[丁蔡]정채는 송(宋) 나라의 정위(丁謂)와 채양(蔡襄) 두 사람을 합칭한 말인데, 복건성(福建省)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용단차(龍團茶)를 전후에 걸쳐 이 두 사람이 제조하였다.
♣ 정채[淨債]청정채(淸淨債)의 준말로, 남에게 시를 지어 주어 보답해야 할 빚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이번 유람 기념하는 새 시 짓지 않는다면, 산속의 청정한 빚 지게 될까 두렵도다.[不將新句紀玆游 恐負山中淸淨債]”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9 與胡祠部 游法華山》
♣ 정책국로 문생천자[政策國老門生天子]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국로(國老; 국가의 어른)와, 자기들이 만들어낸 천자라는 뜻의 정책국로문생천자(政策國老門生天子) 고사성어.
♣ 정천산[定天山]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화살 세 개로 적장 세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군이 패하여 천산(天山)을 평정하였다.
♣ 정첨윤[鄭詹尹]굴원(屈原)이 복거부(卜居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처신할 여러 가지 길을 태복(점장이) 정첨윤(鄭詹尹)에게 물었다.
♣ 정총[鄭摠]여말 선초(麗末鮮初)의 문신(文臣). 호는 복재(復齋), 시호는 문민(文愍).
♣ 정충[精忠]정충은 순결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리킨다.
♣ 정충신[鄭忠信]봉호는 금남(錦南).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본관은 나주(羅州), 윤(綸)의 아들로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석주(錫柱) 때부터 병영(兵營)의 서리를 지낸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지모가 뛰어나고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여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갑자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이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로서 적과 싸우는 등 전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에 제향,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정칙[正則]올바른 법이라는 뜻으로 굴원의 본명이다.
♣ 정침[頂鍼]정문침(頂門鍼)이라고도 하는데, 침구법(鍼灸法)에서 뇌문(腦門)으로부터 내려가는 침을 말한 것. 이로써 행사의 긴요성을 비유했음.
♣ 정태복[鄭太卜]초(楚) 나라 굴원이 불우하기만 한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찾아갔다는 점관(占官) 정첨윤(鄭瞻尹)을 가리킨다. 《離騷經 卷24 卜居》
♣ 정토[淨土]부처나 보살(菩薩)이 산다는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 정통[正統]정통은 명 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영종은 9세에 즉위하였다.
♣ 정파[正葩]시경(詩經)의 시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시경의 시야말로 바르면서도 아름답다.[詩正而葩]”라는 말이 있다.
♣ 정팽제언[鼎烹齊偃]제언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제(齊) 나라 주보언(主父偃)을 말함. 주보언은 처음에 종횡술(縱橫術)을 배우다가 나중에 주역(周易)ㆍ춘추(春秋) 등을 배운 학자로서 무제 때에 한 번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한 해에 네 번 승천하여 중대부(中大夫)가 되고 이어 국사를 전횡한 것이 많았다. 그러자 혹자가 전횡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니, 주보언이 대답하기를 “장부가 살아서 오정식(五鼎食)을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오정에 삶아져 죽을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주보언은 끝내 죄를 얻어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史記 卷一百十二》
♣ 정평[正平]정평은 후한 말 고사(高士)로 이름난 미형(禰衡)의 자이다.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천거하였으나 천성이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자, 조조는 그를 형주 자사(荊州刺使) 유표에게 보내버렸고 유표는 또 강하 태수(江夏太守)황조(黃祖)에게 보냈는데, 결국 황조에게 죽고 말았다. 《後漢書 卷八十下 禰衡傳》
♣ 정포[鄭圃]옛날 열자(列子)가 살던 곳으로, 곧 현자(賢者)가 사는 곳을 말한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열자가 정포에 40년 동안이나 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 정포객[鄭圃客]정포의 나그네는 춘추시대 열자(列子)가 정 나라의 들밭에서 40년 동안 은거하였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 정포은[鄭圃隱]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이다. 정몽주는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우왕(禑王) 1년에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금지시켜 줄 것을 교섭하였는데, 그때 사신다운 풍채가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매우 존경하였다고 한다.
♣ 정풍파[定風波]신라 옥적(玉笛)이 ‘만파식곡(萬波息曲)’이었는데, 이 적을 불면 외국의 군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오며 장마가 개고, 바람은 진정되고 물결이 잔잔해지므로[風定波平],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불렀다.
♣ 정향가[丁香歌]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 감정을 나타내는 노래. 이상은(李商隱) 대증시(代贈詩)에, “파초 잎은 피질 못하고 정향은 맺혀 있어, 봄바람을 함께 향해 제각기 수심이로세[芭蕉不展丁香結 同向春風各自愁]”하였음.
♣ 정현[鄭玄]동한(東漢) 시대의 대학자. 경전(經傳)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일대를 풍미했으며, 삼경(三經)을 비롯하여 의례(儀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상서대전(尙書大傳) 등 많은 경전의 주서(註書)를 남기고, 그 밖에도 천문(天文)ㆍ예설(禮說)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음. 《後漢書 卷六十五》
♣ 정현곡[鄭玄谷]현곡은 정백창(鄭百昌)의 호이다.
♣ 정현침[鄭玄針]후한(後漢) 때 경학가(經學家)인 하휴(何休)가 일찍이 좌씨고황(左氏膏肓)을 저술한 데에 대하여 정현(鄭玄)이 침고황(針膏肓)을 지은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三十五》
♣ 정협[鄭俠]송 나라 복청(福淸)사람인데 신종(神宗) 때 사방을 떠돌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고 화공을 시켜 유민도(流民圖)를 그려 신종에게 바치자, 신종이 그것을 보고 책궁조(責躬詔)를 내리고 방전(方田)ㆍ보갑(保甲)ㆍ청묘(靑苗)등 신법(新法)을 혁파하였다.
♣ 정협유민도[鄭俠流民圖]정협은 송 나라 복청(福淸) 사람으로 자는 개부(介夫)인데, 그가 목격한 유랑민의 처절한 상황을 화공을 시켜 그림으로 그려 신종(神宗)에게 올리자, 신종은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는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왕안석(王安石)에 의해 실시된 방전(方田)ㆍ보갑(保甲)ㆍ청묘(靑苗)등 신법(新法)을 혁파하였다.
♣ 정형[井陘]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지명으로 관문이 있어 진한(秦漢) 시대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 패공(漢沛公)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은 일찍이 장이(張耳)와 함께 이곳에서 조(趙) 나라의 진여(陳餘)와 대전했었는데, 진여는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의 지구전을 반대하고 맞아 싸우다가 한신의 꾀에 빠져 패망하였다. 《漢書 韓信傳》
♣ 정혜사[定慧寺]충남 회덕현(懷德縣) 동쪽 3리에 있는 사찰.
♣ 정혜해당[定惠海棠]송(宋) 나라 소동파가 황주(黃州)로 귀양가서 정혜원(定惠院)이란 절에 있을 때 절 동쪽에 해당화 한 그루가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세에 비겨 탄식하여 시를 지었다. 《古文眞寶 前集 定惠院海棠》
♣ 정호[鼎湖]지명. 옛날 황제(黃帝)가 이곳에서 솥을 주조하다가 솥이 다 이뤄지자, 용을 타고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전(轉)하여 붕어한 제왕을 뜻한다.
♣ 정호궁검[鼎胡弓劒]황제(黃帝)가 정호에서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활과 칼을 떨어뜨렸다 한다.
♣ 정호궁장[鼎湖弓藏]임금의 죽음을 뜻한다. 순(舜)임금은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하였고, 황제(黃帝)는 정호(鼎湖)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龍)의 수염을 타고 승천(昇天)하였는데, 이때 황제의 활만 공중에서 내려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 정호신[鄭虎臣]정호신은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가사도(賈似道)에 의해 해(害)를 당하였는데, 덕우(德祐) 초기에 가사도가 탄핵을 받고 순주(循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정호신이 그를 살해하였다. 《宋史 卷四百七十四》
♣ 정호용[鼎湖龍]정호는 하남성(河南省) 문향현(閿鄕縣)의 남쪽 형산(荊山) 아래 있는 지명.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이 형산 아래서 솥을 주조했는데 솥이 완성되자 용(龍)이 내려와 황제를 맞으므로, 황제가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封禪書》
♣ 정호용거[鼎湖龍去]황제가 사망했다는 뜻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 형산(荊山)의 밑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수염을 드리운 용이 황제를 맞이하였으며, 황제가 신하와 후궁 70여 명과 함께 용을 타고 올라갔다. 나머지 신하들은 올라타지 못하고 용의 수염을 붙잡자 그 수염이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도 함께 땅에 떨어졌다. 황제가 하늘로 올라간 뒤에 백성들이 용 수염과 활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 때문에 그 곳을 정호(鼎湖), 그 활을 오호(烏號)라 불렀다. 《史記 卷 28 封禪書》
♣ 정호음[鄭湖陰]호음은 성종~선조 때 시문으로 유명한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 정호화금슬[靜好和琴瑟]화락하면서도 정도에 지나치지 않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여왈계명(女曰鷄鳴)에, “자리에 있는 금과 슬도, 모두 다 고요하고 아름답도다.[琴瑟在御 莫不靜好]”하였다.
♣ 정홍[鄭弘]후한서(後漢書) 정홍전(鄭弘傳)에 “정홍이 회음 태수(淮陰太守)가 되어 순행할 때 사슴 두 마리가 수레 옆에 바짝 붙어서 떠나지 않기에 주부(主簿) 황국(黃國)에게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 물었다. 황국이 절하고 축하하면서 ‘옛날 삼공(三公)이 타는 수레에는 사슴을 그림으로 새겼다 하니 아마 명부(明府)도 재상(宰相)이 될 징조인 듯합니다.’ 했는데, 정홍은 과연 나중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하였다.
♣ 정홍단[征鴻斷]정홍은 멀리 날아가는 큰 기러기를 뜻한다. 고향의 소식이 두절되었다는 것이다.
♣ 정화[菁華]정화(精華)와 같은 말로 젊은 영기(英氣)를 말함. 훌륭한 재덕(才德)을 지닌 사람. 사물 중의 가장 뛰어나고 화미한 부분을 말한다.
♣ 정회[貞悔]주역(周易) 괘(卦)에 대하여 일컫는 말로 내괘(內卦)를 정(貞), 외괘(外卦)를 회(悔)라고 함.
♣ 제[濟]성(成).
♣ 제[禔]양녕대군. 왕족은 성을 안 썼다.
♣ 제[帝]제곡(帝嚳). 고대 제왕(帝王)의 이름. 황제(黃帝)의 증손으로서 호를 고신씨(高辛氏)라 함. 박(亳)에 도읍하였음.
♣ 제각형[蹄角瑩]진(晉) 나라 왕군부(王君夫)는 사랑하는 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발굽과 뿔을 늘 반들반들하게 하였다 한다.
♣ 제갈공[諸葛公]제갈공은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을 말한다. 제갈량은 군중(軍中)에서도 항상 윤건(綸巾)을 쓰고 도복(道服)을 입은 채로 군사(軍事)를 지휘하였다.
♣ 제갈공명[諸葛孔明]공명은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자(字), 후한(後漢) 말엽 천하가 어지러워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자, 제갈량은 양양(襄陽)의 융중(隆中)에 은둔해 있었는데, 한(漢)의 황족(皇族)인 유비(劉備)는 초려(草廬)로 세 번이나 찾아가[三顧]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유비의 깊은 성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촉한을 세우고는 반란을 일으킨 남만(南蠻)의 맹획(孟獲)을 일곱 차례나 생포하여[七縱七摛] 남만을 평정한 다음,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출사표를 올리고는 위(魏)의 조비(曹丕)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목우(木牛)ㆍ유마(流馬)를 만드니 매우 신기한 기계였다. 싸울 때에는 언제나 윤건(綸巾)을 쓰고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진두에서 지휘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중에서 세상을 떠나니 무후(武侯)라 시호했으며, 익주(益州)의 금관성(錦官城) 등 여러 곳에 사당이 있다.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資治通鑑 魏紀》
♣ 제갈량[諸葛亮]자(字)는 공명(孔明)으로 삼국 시대 촉(蜀) 나라의 재상.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 삼국의 정립(鼎立)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위(魏) 나라를 정벌하다가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었다. 그가 지은 전후(前後)의 두 출사표(出師表)는 충절이 담긴 명문으로 유명하다.
♣ 제갈허치구[諸葛許馳驅]은둔 생활을 청산하고 나라 위해 일하기로 마음을 굳힘.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우를 받고 선제(先帝)를 위하여 구치(驅馳)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함.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 제거[帝車]제거는 지남차(指南車)를 말함인데,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정벌할 적에 만든 것이다.
♣ 제건십습[緹巾十襲]자격도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 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옥(玉)과 비슷하면서도 옥이 아닌 연석(燕石)을 발견하고는 이를 진짜 옥으로 여긴 나머지 주황색 수건으로 열 겹이나 싸서[緹巾十襲] 보관하며 애지중지하다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8 應劭列傳 註》
♣ 제결[鶗鴂]제결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 제결명[鵜鴂鳴]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제격이 먼저 울어 백초를 향기롭지 못하게 할까 두렵다[恐鵜鴂之先鳴兮 使夫百草爲之不芳].”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의하면, 제격은 곧 춘분일(春分日)에 우는 두견새의 별칭으로, 이 새가 춘분 전에 울면 백초의 꽃이 모두 꺾여 떨어져서 향기롭지 못하다 하여, 이것으로 소인의 참소가 먼저 들어가 충직한 선비가 죄를 입게 되는 데에 비유하였다.
♣ 제결일성성이류[鶗鴂一聲星已流]가을이 되었다는 뜻이다. 두견새가 울면 가을이 오는데, 7월에는 화성이 흐른다.
♣ 제경전[制鯨鱣]경전(鯨鱣) 즉 큰 고기같은 바다의 침략자를 막았다는 말이다.
♣ 제고[題糕]당(唐) 나라 때 시인 유몽득(劉夢得)이 일찍이 중구일(重九日)에 시를 지으면서 고(糕) 자를 쓰려고 하였으나, 오경(五經) 가운데 이 글자가 없기 때문에 끝내 쓰지 않고 말았는데, 이에 대하여 송(宋) 나라 때 송기(宋祁)가 지은 식찬유영시(食饌有詠詩)에 “유랑이 감히 고 자를 쓰지 못하였으니, 한 세상의 시호란 말을 헛되이 저버렸구나[劉郞不敢題糕字 虛負詩中一世豪]” 한 데서 온 말이다.
♣ 제과[制科]경문(經文)으로 과제(科題)를 내어 선거하는 과거로서, 처음에는 천자가 친히 참관하였는데, 후에 와서 모든 유사(有司)들에게 위임하게 되었음.
♣ 제교[帝郊]천제의 교외. 하늘가.
♣ 제교객[題橋客]다리에 쓴 손님은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성도기(成都紀)에 “사마상여가 장안(長安)을 가는 길에 고향 촉군(蜀郡)을 지나다가 승선교(升仙橋) 기둥에 ‘사마의 수레를 타지 못하면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不乘駟馬車 不復過此橋]’ 하는 글을 써 붙였다.” 하였다.
♣ 제구[제舊]후추를 빻아 가루로 만드는 확.
♣ 제궐승청리[帝闕承聽履]제궐은 명(明) 황제의 궁궐을 말하는데, 황제가 우대하는 신하에게는 신을 신고 올라옴을 허락하였다.
♣ 제금[題襟]제금은 당(唐) 나라 때 온정균(溫庭筠)ㆍ단성식(段成式)ㆍ여지고(余知古) 등이 서로 창화(唱和)한 시(詩)를 수집하여 만든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이라는 서명(書名)의 준말로, 절친한 친구 사이를 뜻하는 말이다.
♣ 제금[製錦]좌전(左傳) 양공(襄公) 31년 조(條)에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를 시켜 읍(邑)을 다스리려 하니 자산(子産)이 ‘子有美錦 不使人學製焉……其爲美錦 不亦多乎’라고 했다.” 하였음.
♣ 제금[製錦]현재(賢才)가 수령으로 나가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정(鄭) 나라 대부 자피(子皮)가 윤하(尹何)에게 대읍(大邑)을 맡기려 하자, 자산(子産)이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그대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을 경우, 옷 짓기를 배우는 사람에게 옷을 지으라고 맡기지 않을 것이다. 큰 고을은 많은 사람이 몸을 의지하는 곳인데, 배우는 사람에게 시험삼아 다스리게 한단 말인가.”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 제금[題襟]흉금을 털어놓고 시를 짓는 것을 말한 것으로, 당(唐) 나라 온정균(溫庭筠)ㆍ단성식(段成式)ㆍ여지고(余知古)가 서로 시를 주고받은 제금집(題襟集)이 있다. 《唐書 藝文志》
♣ 제금록[題衿錄]당(唐) 나라 때에 온정균(溫庭筠)ㆍ단성식(段成式)ㆍ여지고(余知古) 등이 서로 창화(唱和)한 시들을 수록해 놓은 한상제급집(漢上題衿集)을 가리킨 듯하다.
♣ 제금유자[題襟遊子]제금은 시를 지어 흉금을 말하는 것으로 당(唐)의 온정균(溫庭筠)ㆍ단성식(段成式)ㆍ여지고(余知古)를 가리킨다.
♣ 제기[齊己]당(唐)의 승려(僧侶). 그는 승려이면서 서한(書翰)에 마음을 쓰고, 또 시 읊기를 좋아하여 강릉(江陵) 용흥사(龍興寺)에 있으면서 정곡(鄭谷)과 많이 창수(唱酬)를 하였으며 차[茶]에 대하여도 일가견이 있었음. 《學林新編》
♣ 제남생[濟南生]명 나라 이반룡(李攀龍)을 가리킨다. 이반룡이 산동성(山東省) 제남군(濟南郡) 역성현(歷城縣) 출신이기 때문이다.
♣ 제남생[濟南生]제남(濟南) 출신의 명유(名儒) 복생(伏生)을 가리킨다. 한 문제(漢文帝) 때 상서(尙書)를 강의할 사람이 없자, 진(秦) 나라 때 박사(博士)를 역임한 뒤 제(齊), 노(魯) 사이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복생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당시 나이 90여 세의 노인이라서 여행을 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에게 배우고 오도록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8 儒林傳 伏生》
♣ 제남생[濟南生]제남은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땅이름. 한 문제(漢文帝) 때 진시황(秦始皇)이 불태워 없애버린 경전을 복원할 당시 제남에 사는 복생(伏生)이 90여 세의 나이로 상서(尙書)를 구술(口述)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는데, 그의 생전에 그 지방의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에게 상서(尙書)의 학문을 전수하였다. 《漢書 卷八十八 儒林傳》
♣ 제녀[齊女]매미의 별칭이다. 제(齊) 나라 왕후가 억울하게 죽은 뒤에 매미로 변해서 궁정 앞의 나무에 올라 애달프게 울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하여, 후비(后妃)나 궁녀(宮女)의 비원(悲怨)을 뜻하는 시어가 되었다. 《古今注 問答釋義》
♣ 제노[齊奴]제노는 석숭(石崇)의 별명이다.
♣ 제니[薺苨]냉이와 도라지.
♣ 제대운경[齊臺隕傾]제 나라 과부가 자식도 없이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었는데, 어미의 재산을 욕심낸 시누이가 과부에게 시집을 가라고 하였다. 과부가 응하지 않자, 이에 어미를 죽이고 그 죄를 과부에게 덮어씌웠는데 과부의 원한이 하늘에 맺혀 제 경공(齊景公)의 누대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 제도[帝都]천자가 있는 곳. 즉 서울을 말함.
♣ 제동야어[齊東野語]스스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잘 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 야어는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말을 이르고, 제동(齊東)은 제 나라 동쪽의 벽촌(僻村)을 가리킨 것으로, 제 나라 동쪽 벽촌 사람들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이른 말이다.
♣ 제량권애민[齊梁勸愛民]맹자(孟子)가 일찍이 양 혜왕(梁惠王)과 제 선왕(齊宣王)에게 이 마음을 확충시켜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설득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제량빙[齊梁聘]그 나라 흥망 성쇠와는 하등의 직접 관련이 없는 객경(客卿)의 입장. 맹자(孟子)는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 제 선왕(齊宣王)의 초빙을 받아 일정한 책임이 없는 객경 입장에서 제 나라 위 나라를 왕래하였음. 《孟子 梁惠王ㆍ公孫丑》
♣ 제량조[齊梁調]중국 남북조 시대 제(齊)ㆍ양(梁) 양조(兩朝) 사이에 유행했던 시체(詩體)로서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가 더욱 발달하였음.
♣ 제량체[齊梁體]남북조(南北朝) 시대 제(齊)ㆍ양(梁)양조(兩朝) 사이에 행해졌던 시체(詩體)의 하나
♣ 제력어하유[帝力於何有]태평(太平)을 노래한 것이다. 요(堯) 임금 때에 정사가 잘 되어 천하가 태평하자, 한 노인이 땅을 치며 노래하기를, “해 뜨면 나가서 밭을 갈고, 해 지면 들어와 쉬며,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고사는데, 임금의 힘이 나에게 미친 것이 어디 있느뇨.”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제로도문진[齊魯徒問津]공자가 천하에 도를 펴 보고자 돌아다니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에게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본 것을 말한다. 《論語 微子》
♣ 제릉[齊陵]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으로, 개풍군(開豐郡) 상도면(上道面)에 있다.
♣ 제목[除目]관원의 인사이동 명단.
♣ 제무[齊巫]제 나라의 여악(女樂)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제나라에서 여악을 노 나라에 보내줌으로써 공자는 그만 떠나가 버렸다.” 하였다.
♣ 제문막주우[齊門莫奏竽]누구도 그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없을 만큼 군신 상하가 즐기며 흥청대고만 있음. 소진(蘇秦)이 제 선왕(齊宣王)에게 유세하기를, “임치(臨淄)가 매우 부실(富實)하여 백성들 모두가 피리 불고 비파 타고……" 하였음. 《戰國策 齊策》
♣ 제물[齊物]옳고 그름, 저쪽과 이쪽, 남과 나, 단명과 장수가 서로 구별이 없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의 도가(道家)인 장주(莊周)는 저서인 장자(莊子) 가운데 제물론(齊物論)에서는 세상의 시비 진위(是非眞爲)에 대한 물론(物論)들을 평등한 견지에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 제물론[齊物論]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의 제일 첫머리에 있는 글이니, 만물은 평등하다는 뜻이다.
♣ 제물리[齊物理]물리(物理)를 다 같게 본다는 것은 곧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이론을 가리킨 것이다.
♣ 제물소요[齊物逍遙]장자(莊子)의 처음 두 편(篇) 이름. 세속적 대소(大小) 물아(物我)를 초월한 달관을 말한다.
♣ 제물아[齊物我]생사(生死), 수요(壽夭), 시비(是非), 득실(得失), 물아(物我), 유무(有無) 등 우주간의 일체 상대적인 관점을 타파하고 평등하게 보려는 도가(道家)의 제물(齊物) 사상을 언급한 것인데,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달인은 장자를 가리킨다.
♣ 제범[帝範]제범은 바로 당 태종이 지어서 태자(太子)에게 내린 책인데, 군체(君體)ㆍ구현(求賢)ㆍ심관(審官)ㆍ납간(納諫)ㆍ거참(去讒) 등 제왕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12조목으로 기록되었다.
♣ 제복이운망[題鵩而云亡]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폄척되어 나가 있을 적에 복조(鵩鳥)가 거처하는 집에 날아들자, 이 불상조(不祥鳥)가 자기 거소에 날아든 것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불길한 조짐으로 여기고 스스로 복조부를 지어 자신을 애도했는데, 그후 과연 그가 그곳에서 죽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제봉[題鳳]봉(鳳)자를 파자(破字)하면 범조(凡鳥)가 되므로 사람을 우롱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혜강(嵇康)과 여안(呂安)이 서로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한번은 여안이 혜강의 집을 방문하니, 혜강은 없고 그의 형 혜희(嵇喜)가 나와서 그를 맞이하자, 여안은 들어가지 않고서 혜희를 우롱하는 뜻으로 문 위에다 봉(鳳) 자를 써놓고 갔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함을 의미한 것이다.
♣ 제봉가세[霽峯家世]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때 두 아들 인후(因厚)와 종후(從厚)도 참전하여 인후는 함께 죽고 종후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왔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 제봉자[題鳳字]손이 찾아왔다가 들어오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는 뜻.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생각이 날 적마다 천 리 먼 길을 찾아왔다. 어느 날 여안이 왔는데 마침 혜강은 집에 없고 혜강의 형인 혜희(嵇喜)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그러자 여안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다가 봉(鳳) 자를 써 놓고 갔다. 혜희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좋아하였는데, 봉 자를 써 놓은 것은 ‘평범한 새[凡鳥]’란 뜻이었다.” 하였다. 이 고사는 흔히 친구를 방문하였다가 만나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쓰인다.
♣ 제분[除糞]불가(佛家)의 말에, “처음에 석가(釋迦)가 화엄경(華嚴經)을 설하니 중생(衆生)들이 놀라기에 부득이 다시 소승경(小乘經)을 설하고, 뒤에 다시 방등경(方等經)을 설하며, 최후에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여 성불(成佛)하게 하였다. 이것을 비유하면 아들이 처음에 집을 버리고 도망하여 걸인이 되어 돌아다녔다. 이것은 중생이 미혹하여 고해(苦海)에 돌고 도는데 비유하였다. 부모는 사람을 시켜 그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니, 아들은 부잣집의 화려한 것을 보고 놀라 도망치려 하였다. 부모는 다시 수단을 써서 집안에서 거름이나 치고[除糞] 품삯을 받게 하여 아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다시 집안에 출입하기를 익숙히 하고 다시 차차 보물이 있는 데를 알게 하고 최후에 열쇠를 모두 주어 살림살이를 맡겼다. 거름치는 것은 소승경을 배울 때요, 최후에 법화경은 살림을 모두 맡긴 것이다.” 하였다.
♣ 제삼번객[第三番客]소식(蘇軾)의 월시(月詩)에 “이에 적선인이 있어 술을 들어 세째 손이 되노라.[爰有謫仙人 擧酒爲三客]”라 하였는데, 이백(李白)과 같은 천재 시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 제삼인[第三人]한(漢) 나라 고제(高帝)가 자기의 공신(功臣) 삼걸(三傑)에 한신(韓信)을 장량(張良), 소하(蕭何)에 뒤에 두어 셋째로 쳤다.
♣ 제상[堤上]박제상(朴堤上)이다. 제상을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金堤上)이라 하였는데, 박씨나 혹은 김씨의 성을 붙인 것은 후대에 붙인 것이고 본래는 제상(堤上)이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원년에 왜와 강화하기 위하여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는데, 박제상이 이를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갔다.
♣ 제상충혼[堤上忠魂]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 왕의 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억류되어 있다가 피살당한 일을 말한다.
♣ 제생문자구[諸生問字俱]양웅이 고문(古文)의 기자(奇字)를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유분(劉棻) 등이 찾아와서 글자를 배웠던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
♣ 제석[帝釋]본디 도리천(忉利天)의 임금으로 범왕(梵王)과 더불어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인데, 절을 뜻하기도 함.
♣ 제석[除夕]除는 사전에 ‘除 謂去也. 除惡務本’이란 뜻으로 쓰인다고 되어 있다. 제석(除夕)은 일년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밤으로 일년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낡은 것을 몰아내고 새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야(除夜), 또는 ‘덜리는 밤’이라고도 한다.
♣ 제석천[帝釋天]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하나로 석가불이 살고 있다는 도리천(忉利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석가불(釋迦佛)을 지칭한 것이다.
♣ 제성조벽일시강[齊城趙壁一時降]한신이 조(趙) 나라와 제(齊) 나라를 모두 쳐부순 일이 있었다.
♣ 제세안민책[濟世安民策]세상을 도탄에서 건지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계책.
♣ 제세일모[濟世一毛]봉황의 터럭 하나라는 말로, 부조(父祖)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은 걸출한 인물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왕소(王劭)와 남조 제(齊)의 사초종(謝超宗)이 각각 환온(桓溫)과 제 무제(齊武帝)로부터 “봉모(鳳毛)를 확실히 이어받아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容止ㆍ南齊書 卷36 謝超宗列傳》
♣ 제세지재[濟世之才]세상을 구제할 만한 뛰어난 인물.
♣ 제속[齊速]나란히 달리다.
♣ 제수[除授]천거(薦擧)의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시킴.
♣ 제수토곡[齊修土穀]육부(六府)ㆍ삼사(三事)가 잘 다스려짐을 가리키는 말. 육부는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水火金木土穀)의 여섯 가지, 삼사는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의 세가지인데 ‘토곡’은 곧 이 육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水火金木土穀)이 유수(惟修)하며 정ㆍ덕ㆍ이용ㆍ후생(正德利用厚生)이 유화(惟和)하여……"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주(註)에 ‘수극화(水克火)하고 화극금(火克金)하고 목극토(木克土)하여 오곡(五穀)을 내는 것이니, 혹은 서로 견제하고 혹은 서로 도와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면 여섯 가지가 모두 잘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제슬[齊瑟]옛날 제왕(齊王)이 피리를 좋아했는데,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려는 자가 있어 자기가 잘 타는 비파를 가지고 제왕이 사는 대궐 문에 3년을 서 있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제승[除乘]제는 나누는 것이고, 승은 보태는 것으로, 인사(人事)의 소장(消長)과 성쇠(盛衰)를 말한다.
♣ 제실회초동[緹室灰初動]동지(冬至)가 지나 양(陽)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제실은 옛날에 절기(節氣)를 살피던 방이고, 율관(律管)은 고대에 절후를 관측하던 기구로, 대나무나 금속으로 만들며, 모두 12개로 이루어졌다. 밀실에 이 율관을 놓아 두고 갈대를 태운 재를 채운 다음 흰 천을 덮어 두면 절후가 바뀔 적마다 한 개의 율관씩 재가 올라와서 천에 달라붙는다고 한다.
♣ 제악어문[祭鰐魚文]한퇴지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때에 악어(鰐魚)가 해를 끼치므로 제악어문(祭鰐魚文)을 지었다.
♣ 제안[齊安]송나라 때에 황강은 제안군(齊安郡)이었다
♣ 제야[除夜]제야는 섣달 그믐날 밤을 말한다.
♣ 제양[齊揚]나란히 들다
♣ 제양[濟陽]한 광무제(漢光武帝)가 태어난 제양궁(濟陽宮)이 있는 제수(濟水)남쪽에 있는 고을.
♣ 제양주[齊梁主]제 선왕(齊宣王)과 양 혜왕(梁惠王)을 가리킨 것으로 이들은 모두 맹자를 초청하였으나 쓰지 못하였다.
♣ 제어달[祭魚獺]매년 맹춘(孟春)에는 수달[獺]이 잉어를 잡아 진설해 놓고 제 조상에게 제사지낸다는 말이다.
♣ 제어충비[制於蟲臂]‘버마재비[螳蜋]가 두 발을 버티어 수레바퀴를 항거한다’ 하는 속담이 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수레바퀴가 버마재비에게 제어를 받았다는 말이다.
♣ 제여거[齊餘莒]전국 시대 연(燕)의 장수 악의(樂毅)가 제(齊)를 공격하여 제 나라 성(城) 70여 개가 모두 함락되었을 때 오직 즉묵(卽墨)과 거(莒) 두 성만이 남아 있었음. 《史記 燕世家》
♣ 제염[虀鹽]제염은 나물과 소금으로, 소식(素食)을 하는 청빈한 삶을 말한다.
♣ 제염새폐장[虀鹽塞肺腸]부추에다 소금으로 마른 창자 채우다. 천빈(淸貧)한 선비의 생활을 말함.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태학 생활 4년 동안 아침에는 부추에다 저녁에는 소금으로 때웠다.[太學四年朝虀暮鹽]" 하였음.
♣ 제영[緹縈]한(漢) 나라 때 태창령(太倉令) 순우의(淳于意)의 딸 이름. 순우의는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혀 형을 당하게 되자 아들 없다는 것으로 딸들에게 욕했다. 이에 제영(緹縈)이 슬피 울며 아버지를 따라 장안에 가서 자신을 관비로 삼아 부친의 죄를 사해 달라고 임금에게 상서(上書)하여 아버지의 형을 면하게 했던 효녀였다.
♣ 제오[題午]옛날 이안의(李安義)라는 사람이 부자(富者)인 정생(鄭生)을 찾아뵙고 나오면서 그 정생의 문 위에다 크게 오(午) 자를 쓴 데서 온 말인데, 그것은 곧 ‘소가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牛不出頭]’는 뜻으로서 정생의 오만함을 풍자한 것이었다.
♣ 제오교[第五橋]장안 남쪽 위곡(韋曲) 부근의 명승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제오교 동쪽 물에 한을 흘려보내고, 황자파 북쪽 정자 시름이 서렸어라.[第五橋東流恨水 皇陂岸北結愁亭]”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題鄭十八著作丈故居》
♣ 제오낙월[啼烏落月]당 나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시(楓橋夜泊詩)에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이라 하였음.
♣ 제우취[齊竽吹]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관직 생활에 뛰어들었다는 말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모집한 피리의 명인 3백 인 가운데 남곽 처사(南郭處士)가 몰래 끼어 들었다가, 아들 민왕(湣王) 때에 하나하나 독주(獨奏)를 시키자 도망쳤던 고사가 있다.《韓非子 內儲說上》 ☞ 남우(濫竽)
♣ 제운[齊雲]오대(五代) 한보(韓浦) 가 지은 누각.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있다. 구름과 같이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월[霽月]밝은 달[霽月]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약칭인데, 황정견(黃庭堅)이 염계시서(濂溪詩序)를 지으면서 주돈이의 높은 인품과 탁 트인 흉금을 묘사한 말임.
♣ 제월[齊鉞]새로 장수를 임명하여 전쟁터로 보낼 때 왕이 수여하는 부월(斧鉞)을 말한다.
♣ 제월광풍[霽月光風]맑고 서늘한 바람과 비가 그친 뒤의 명정(明淨)한 달이라는 뜻으로, 흉금이 툭 터지고 인품이 고아(高雅)한 것을 가리키는데,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濂溪詩) 서문에 “용릉(舂陵) 땅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매우 고아하여, 그 쇄락한 흉중이 마치 광풍 제월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무숙은 주돈이의 자(字)이다.
♣ 제월광풍[霽月光風]비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사람의 도량이 넓고 시원스러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송사(宋史) 도학열전(道學列傳) 주돈이(周敦頤)에, “인품이 아주 높고 흉회가 쇄락하여 비 갠 뒤의 달과 바람과 같았다.” 하였다.
♣ 제율[齊慄]삼가고 두려워하는 뜻.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장엄히 제율하시니 고수 역시 믿어서 순해졌다[夔夔齊慄瞽亦允若].” 하였다.
♣ 제이월[第二月]불교(佛敎) 용어로서 곁달, 즉 손가락으로 눈을 누르고 달을 보면 본 달 곁에 나타나는 희미한 달을 말한다.
♣ 제자[帝子]상부인(湘夫人). 요임금의 딸. 고대에는 ꡐ자ꡑ가 남녀통영.
♣ 제자[弟子]이원제자(梨園弟子)ㆍ악공(樂工)ㆍ여기(女妓)들. 이원은 당현종(唐玄宗)이 영인(伶人)들을 모아 음악을 교수하던 곳이다.
♣ 제자거[帝子居]제자거(帝子居)는 왕발의 등왕각서에, “제자 장주에 다다르다[臨帝子之長洲].” 하였음.
♣ 제자백가[諸子百家]여러 학자와 많은 학파.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학파를 통틀어 일컫는 말.
♣ 제자주[帝子洲]제자(帝子)는 상제(上帝)의 아들인데. 제주도(濟州島)를 가리키기도 한다. 《高麗史》 지리지(地理志) 권11 탐라(耽羅)에 “고기(古記)에 ‘태초(太初)에는 사람이 없었다가 모흥(毛興)의 굴 속에서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나왔는데, 맏이는 양을라(良乙那), 다음은 고을라(高乙那), 다음은 부을라(夫乙那)이다.’ 했다.” 하였다.
♣ 제잠[蹄涔]우제잠(牛蹄涔)의 준말로, 겨우 소의 발굽이 들어갈 만한 조금 괸 물을 말한다. 《淮南子 俶眞訓》
♣ 제잠[鯷岑]제(鯷)는 고대에 동해(東海) 바다 가운데에 있는 종족의 이름인데, 한서(漢書) 지리지 하(地理志下)에, “회계(會稽)의 바다 바깥에 동제인(東鯷人)이 살고 있는데, 20여 개의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하였다.
♣ 제전[蹄筌]제(蹄)는 토끼를 잡는 기구요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기구이니, 토끼와 물고기를 얻는 것이 목적이므로 토끼와 물고기를 얻은 뒤에는 제(蹄)와 전(筌)은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得兎忘蹄, 得魚忘筌] 장자(莊子)
♣ 제전[帝甸]제전은 황성(皇城)에 가까운 지방을 말한다.
♣ 제제[晢晢]별이 반짝이는 모양
♣ 제제[折折]편안한 모양
♣ 제제[嚌嚌]근심하여 슬퍼하는 소리
♣ 제제[悌悌]손윗사람을 잘 섬김
♣ 제제[嗁嗁]우는 모양
♣ 제제[提提]우아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모양, 편안하여 만족해하는 모양, 명백한 모양
♣ 제제[媞媞]편안한 모양, 아리따운 모양
♣ 제제[泜泜]가지런한 모양
♣ 제조삼년불긍명[齊鳥三年不肯鳴]제 위왕(齊威王)이 임금이 된 지 3년에 음란한 놀이만 하고 정치는 돌보지 아니하였다. 순우곤(淳于髡)이 왕에게 은어(隱語)를 하기를, “큰 새가 한 마리 있는데 3년 동안이나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왕이 답하기를, “3년 동안 날지 않다가 날면 장차 하늘을 찌를 것이며, 3년 동안 울지 않다가 울면 장차 사람을 놀래게 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 정치에 힘을 써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 제주[題柱]제주는 기둥에 글을 쓴다는 뜻인데 한(漢)나라 사마상여가 처음에 벼슬하기 위해 서쪽의 장안(長安)으로 들어갈 때 승선교(昇仙橋)를 지나가다가 다리 기둥에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此橋]"라고 쓴 일을 말한다. 곧 반드시 고관 대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것이다. 《漢書 卷五十七 司馬相如傳》
♣ 제주[齊州]중주(中州) 즉 중국(中國)을 말함.
♣ 제주[齊州]지금의 산둥성(山東省)에 있음
♣ 제주[題柱]출세하기 위해 고향을 버림. 고향이 성도(成都)인 한(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벼슬하기 이전에 서쪽으로 가면서 승선교(昇仙橋)를 지날 때 그 다리 기둥에다 쓰기를, “고거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此橋]" 하였음. 《成都記》
♣ 제주객[題柱客]벼슬길에 나아가 공명과 현달을 구하기로 맹서한 선비를 말한다. 한(漢) 나라 때 성도(成都)의 북쪽에 승선교(升仙橋)란 다리가 있었는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장안(長安)에 들어가서 공명을 구하던 때 이 다리를 지나면서 다리 기둥에 제하기를, “말 네 마리가 끄는 높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오지 않겠다.” 하였다. 《太平御覽 卷73》
♣ 제주구점연[齊州九點煙]제주(齊州)는 중주(中州) 즉 중국으로, 중국의 구주(九州)도 높은 곳에서 바라다 보면 아홉 개의 운무 덩어리[九點煙]로 보인다는 말인데, 당(唐) 나라 이하(李賀)의 시 ‘몽천(夢天)’의 “遙望齊州九點煙”에서 비롯된 것이다.
♣ 제주미응과장절[題柱未應誇壯節]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 성도(成都)의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네 마리 말이 끄는 붉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건너오지 않겠다.”고 써서 공명(功名)에 대한 포부를 밝혔던 고사가 있다. 《藝文類聚 卷63》
♣ 제주절[題柱節]기필코 성공하겠다는 뜻. 한(漢) 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고향인 성도(成都)를 지나다가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높은 수레와 사마를 타지 못하면 다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不乘高車駟馬 不過此橋]"고 쓴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 제주지[題柱志]제주(題柱)는 다리의 기둥에 글씨를 쓰는 것. 전한(前漢)의 문호(文豪)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처음으로 장안(長安)을 갈 적에 촉군(蜀郡)의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면서, 교주(橋柱)에 제(題)하기를 “높은 수레와 사마를 타지 않고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 하였다.
♣ 제주현[帝珠玄]도(道)의 본체.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놀면서 곤륜산(崑崙山) 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다가 금방 돌아오면서 검은 진주를 잃어버렸는데……”하였음. 《莊子 天地》
♣ 제준[祭遵]후한(後漢)의 제준은 유술(儒術)이 있는 자만을 취택했는데, 잔치를 벌이면 반드시 우아한 노래를 읊고 투호놀이를 즐겼다 함.
♣ 제즉서[題鰂誓]오적묵(烏賊墨)이란 오징어 뱃속에 든 먹통을 이르는데, 옛날 중국 강동(江東) 사람들은 흔히 먹물 대신 이 오징어 먹통을 취하여 이것으로 계약서를 작성해 주고 다른 사람과 재물을 거래하였던 바, 해가 지나면 이 먹물이 다 없어져서 빈 종이만 남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제즙염설[虀汁鹽屑]부추즙과 소금가루. 한 유의 송궁문(送窮文)에 “太學四年 朝虀暮盬"이라 하였음.
♣ 제진[帝秦]제진은 진(秦) 나라를 황제로 섬기는 일. 노중련(魯仲連)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변사(辯士)인데 고절(高節)의 선비로서, 위(魏) 나라 신원연(新垣衍)이 “진 나라를 황제로 섬기자.”고 하자, 중련은 “의리상 황제로 섬길 수 없다.” 하였다.
♣ 제천[諸天]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천상계(天上界). 또는 하늘에 있는 신(神)을 말한다.
♣ 제천정[濟川亭]한강 북쪽 언덕에 있었던 정자 이름으로, 중국 사신이 오면 으레 이곳에서 노닐면서 시를 지어 걸었다고 한다.
♣ 제천주[濟川舟]임금을 보좌할 만한 재능을 지닌 사람을 말하는데,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큰 강물을 건널 경우에는 너를 배로 삼겠다.” 하였다.
♣ 제천훈업[濟川勳業]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발탁하고 자기를 도와달라는 뜻으로 부탁하기를 “만약 큰 냇물을 건너게 된다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겠다.”고 한 것에서 인용한 말로, 이항복이 임금을 잘 보좌하여 재상으로서의 공적을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 《書經 商書 說命 上》
♣ 제충[梯衝]운제(雲梯)와 충차(衝車). 모두 성(城)을 공격하는 무기이다.
♣ 제칠정어기형[齊七政於璣衡]서경(書經)에, “순(舜)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이란 천문(天文)의 기계를 만들어서 일월 오성(日月五星; 七面)을 다스렸다.” 하였다.
♣ 제파[帝羓]제파는 임금을 말린 고기. 오대사(五代史) 사이 부록(四夷 附錄)에 “덕광(德光)이 진(晉)을 멸망시킨 뒤에 한 고조(漢高祖)가 태원(太原)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덕광이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난성(欒城)에서 병에 걸려 살호림(殺胡林)에서 죽었다. 이에 거란[契丹]이 그의 위장을 꺼낸 다음 소금으로 채워서 수레에 싣고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진(晉)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제파(帝羓)라 하였다.” 하였음.
♣ 제포[綈袍]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 전국 시대 위(魏) 나라 범수(笵睢)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섬기다가 진(秦) 나라로 도망하여 이름이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재상이 되었다. 그 후 수가가 위 나라 사신으로 진 나라에 갔는데, 범수가 낡은 옷을 입은 누추한 모습으로 찾아가자 수가가 동정하여 제포(綈袍)를 주었다 한다. 《史記 范睢傳》
♣ 제포련고정[綈袍戀故情]정답게 지내던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전국 시대 때 위(魏) 나라 수가(須賈)가 옛 친구인 범수(范睢)에게 따뜻한 솜옷[綈袍]을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范睢蔡澤列傳》
♣ 제포연연[綈袍戀戀]벗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두껍게 짠 비단옷을 주었다는 고사. 우정이 깊음을 일컫는다.
♣ 제폭구민[除暴救民]포악한 탐관오리를 없애고 백성을 구제함
♣ 제하분주[濟河焚舟]적을 공격하러 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넌 후 바로 배를 태워버린다. 필사(必死)의 뜻을 나타내는 말.
♣ 제항[梯杭]사다리와 배. 곧 험한 산을 오를 때 쓰는 기구와 바다를 건널 때 쓰는 장비. 저 멀리 있는 외국에서 황제의 위엄과 덕화를 듣고서 험한 산길은 사다리로 넓은 바다는 배로 와서 조공 바친다는 말이다.
♣ 제해[齊諧]인명(人名)이라고도 하고 서명(書名)이라고도 함.
♣ 제해[齊諧]책 이름인데, 황탄무계한 말이 많이 실렸다 함.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제해(齊諧)란 것은 괴이를 기록한 것이다.” 하였음.
♣ 제향[帝鄕]상제(上帝)가 있는 곳으로 즉 하늘을 이름. 장자(莊子) 천지(天地) 편에, “乘彼白雲 至于帝鄕”이란 말이 보임.
♣ 제향[帝鄕]임금 계신 곳
♣ 제형[提衡]제형(提衡)은 이조 판서의 별칭이다.
♣ 제형[提刑]형조의 관원.
♣ 제형긍견치수오[提衡肯遣錙銖誤]인사행정을 공명정대하게 분명히 행하리라는 말이다. 제형(提衡)은 보통 관리를 선발하고 임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 제형헌서[緹縈獻書]한(漢) 나라 때, 제(齊)의 태창 영(太倉令)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딸 제형이 상서(上書)하기를 “저의 아버지는 관리로 있는 동안 모든 사람으로부터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일컬어진 분인데, 이제 법에 걸려 형벌을 받게 되니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개과천선하려 해도 할 길이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지은 죄의 대가로 제가 관비(官婢)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개과천선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하니, 천자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의 아버지에게 육형(肉刑)을 면해 주었다. 《史記 卷十 孝文帝紀》
♣ 제호[提壺]새 이름으로 사다새를 가리킨다. 그 소리가 마치 술병을 들고 술을 사러 가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 한다.
♣ 제호[醍醐]연유 위에 기름 모양으로 엉긴 맛좋은 액체. 《本草 醍醐》
♣ 제호[醍醐]우락(牛酪) 위에 엉긴 기름 모양의 맛이 아주 좋은 액체를 말한다. 피일휴(皮日休)시에, “고미밥이 다 익고 제호 맛이 연하구나. 고인이 아니고는 먹을 음식 아니로세.[彫胡飯熟제餬軟 不是高人不合嘗]" 하였음.
♣ 제호[醍醐]정제한 우유를 말하나, 여기서는 미주(美酒)를 가리킨다. 당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장귀일절시(將歸一絶詩)에, “다시금 집의 술이 봄 맞아서 익는 것이 가련하니, 한 동이의 제호가 나오기를 기다리네.[更憐家醞迎春熟 一瓮醍醐待我歸]”하였다.
♣ 제호[醍醐]최고급 수준으로 정제하여 가공한 유제(乳製) 식료품. 불가(佛家)에서 정법(正法)을 비유할 때 곧잘 쓰는 용어이다. 열반경(涅槃經)에 “從乳出酪 從酪出生酥 從生酥出熟酥 從熟酥出醍醐 最上 佛亦如是"라 하였음. 불가어에 관정제호(灌頂醍醐)가 있는데 지혜로써 사람에게 수입(輸入)함을 이름.
♣ 제호관정[醍醐灌頂]제호탕(醍醐湯)을 정수리에 부은 것같이 정신이 상쾌하고 깨끗함을 가리키는 말로, 불가(佛家)에서 지혜(智慧)를 사람에게 주입시켜 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정신이 상쾌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동지(同志)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 제호금속[醍醐金粟]제호는 맑은 술인데 우유[酪]라고도 한다. 불가(佛家)에서 최상의 정법(精法)으로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제호라 한다는 말이 열반경(涅槃經)에 보이며, 금속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상(像)을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한다는 말이 선화화보(宣和畫譜)에 보일 뿐이고, 술의 이름이다.
♣ 제호려[提壺蘆]제호(鵜鶘)라는 새, 즉 사다새를 가리킨다. 그 새의 노랫소리가 마치 술병을 들고 마시라고[提壺] 하는 것 같다 하여, 시인들이 주흥(酒興)을 표현할 때 곧잘 쓰게 되었다.
♣ 제호조[提壺鳥]봄철에 잘 우는데, 이는 좋은 시절이 되었으니, 술병 들고 놀러가라고 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제호탕[醍醐湯]옛 청량제(淸凉劑)
♣ 제환구회[齊桓九會]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아홉번 회맹하여 맹주가 되다.
♣ 제황[醍皇]일본의 제60대 천황(天皇)인 제호천황(醍醐天皇)을 가리킨다.
♣ 제회기[際會期]제회는 제우(際遇)와 같은 뜻으로, 임금이 알아줄 시기가 온다는 말.
♣ 조[條]명조(鳴條). 탕이 걸을 친 곳. 지금의 산서안읍.
♣ 조[雕]문신을 새김,
♣ 조[朝]초하루.
♣ 조가[朝歌]은(殷)나라의 도읍. 화남성 기현. 한서(漢書)나 염철론(鹽鐵論)에는 모두 이명(里名), 시자(尸子)나 추양전(鄒陽傳)에는 현명(縣名)으로 되었음.
♣ 조간[趙簡]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김제(金堤)이며, 충렬왕(忠烈王) 5년(1279)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고, 이듬해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한 시부(詩賦) 시험에서 또 수석을 차지하였다.
♣ 조간행[釣竿行]한(漢) 나라 때 요가(饒歌)의 이름으로, 원사(元詞)는 즉 성황(聖皇)의 덕이 요순(堯舜)과 같고 또 강태공(姜太公)의 보좌가 있어 대공(大功)을 세우고 태평성대를 이룬 것을 주제로 한 노래이다
♣ 조감[藻鑑]품조(品藻)ㆍ감별한다는 뜻으로, 조경(藻鏡)과 같은 말이다. 즉 선비 뽑는 데 명찰(明察)함을 이름.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안목을 말한다.
♣ 조갑추련옥녹로[照匣秋蓮玉轆轤]칼자루에 녹로, 즉 차륜(車輪) 형태의 옥 장식을 가한 녹로검(轆轤劍)이라는 보검을 말한다.
♣ 조강[祖江]개풍군(開豐郡) 덕수(德水) 남쪽, 통진(通津) 동쪽 15리.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하는 곳의 나루. 《輿地勝覽》
♣ 조강연월한가천[鳥江煙月漢家天]항우가 도망하여 오강(烏江)에 이르자 강동(江東)으로 건너가지 않고 목을 찔러 자살하니 한(漢)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 조강지처[糟糠之妻]조강은 지게미와 쌀겨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말함. 쌀겨나 술지게미와 같은 거친 식사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려운 시절을 같아 살아온 아내를 이르는 말.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견뎌온 아내.
♣ 조개[皁蓋]검정 비단으로 만든 수레 위에 치는 일산(日傘). 지방 관원의 행차를 말한 것. 후한서(後漢書) 여복지(輿服志)에, “중이천석(中二千石)ㆍ이천석(二千石)은 모두 검정색 일산에다 붉은 두 표기 차림을 한다.” 하였음.
♣ 조개[皂盖]관원들이 쓰는 검은 색의 일산(日傘)이다.
♣ 조객[趙客]전국 시대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 모수(毛遂)를 가리킨다. 《史記 平原君傳》
♣ 조갱[調羹]조갱은 국을 끓일 때 조미료 역할을 한다는 말로,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어 정승을 삼고 나서 “내가 술을 만들면 그대가 누룩이 되고, 내가 국을 끓이면 그대가 소금과 식초 역할을 하라.[若作酒醴 爾惟麴蘗 若作和羹 爾惟鹽梅]”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書經 說命下》
♣ 조거[釣車]낚싯줄을 감아 당기는 도구.
♣ 조경[鼂卿]일본인 안배중마려(安倍仲麻呂)의 중국 이름이다. 일본의 사신으로 중국에 왔다가 중국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50년 동안이나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이백(李白)의 시 ‘곡조경형(哭晁卿衡)’이 전한다. 《李太白詩集 卷24》
♣ 조계[曹溪]불교 선종(禪宗)의 한 파인 조계종을 말함이다.
♣ 조계[朝啓]아침에 대궐에 들어가 일을 아뢰던 것.
♣ 조계[曹溪]중국 광동성 곡강현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진수(溱水)로 흘러들어가는 물 이름. 당(唐)나라 때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킨 곳임. 후대에는 흔히 절 주위에 흐르는 시냇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 조계[曹溪]중국(中國)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물 이름이다. 전등록(傳燈錄)에 “양(梁) 나라의 중 지락(智樂)이 배를 타고 조계의 입구에 이르자 향취가 진동하므로, 그 물을 맛보고 ‘이 강(江) 상류에 승지(勝地)가 있다.’ 하고, 터를 닦아 절을 세우고 보림사(寶林寺)라 명명하였다[梁天監元年有僧智藥泛舶至韶州曹溪水口 聞其香嘗其味曰 此水上流有勝地 遂開山立名寶林]’. 그리고 이어 ‘앞으로 170년 뒤에 훌륭한 법사가 여기서 설법할 것이다.’ 하였다.” 한다.
♣ 조계단압[操鷄摶鴨]태봉(泰封) 말년에 당상(唐商) 왕창근(王昌瑾)이 궁예(弓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새겨 있었다는 도참문(圖讖文) 중의 일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먼저 계림을 정복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 조계일작수[曹溪一勺水]조계의 한 잔 물.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祖)인 당(唐) 나라 혜능(慧能)이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종의 이른바 남종(南宗)을 창시하였으므로, 선불교 수련의 궁극적 경지를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표현인데, 보통은 조계 일적(曹溪一滴)으로 많이 쓴다.
♣ 조계학[曹溪學]중국 남방에 조계산(曹溪山)이 있는데,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惠能)대사가 거기서 제자를 가르쳤다.
♣ 조고[吊古]옛일에 감동되어 슬퍼함을 말한다.
♣ 조고[趙高]진(秦) 나라의 환관(宦官). 진시황이 죽자 승상(丞相) 이사와 짜고 조서를 고쳐서 부소(扶蘇)를 죽이고 차자 호해(胡亥)를 이세 황제(二世皇帝)로 세우고 승상(丞相)이 되어 이사(李斯)를 무고하여 죽이고, 이세를 속여 조정의 정사를 그르쳐 드디어 진나라를 망하게 했다. 그가 임금을 속인 유명한 한 예(例)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指鹿爲馬].” 한 것이다.
♣ 조고[操觚]집간(執簡)과 같음.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或操觚以率爾”라 하였고 그 주에, ‘고(觚)는 방목(方木)인데 옛사람이 사용하여 글을 썼다.’ 하였음.
♣ 조곤[釣鯤]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動鈴) 혹은 조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 조공[曹公]조비(曹丕; 魏文帝)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뒤에, 오(吳)나라를 삼키려고 출병하였다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하늘이 이 강을 가지고 남북을 한계하였도다.” 하고 돌아왔다 한다. 대개 조조를 조공(曹公)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 부자(父子)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
♣ 조과[鳥窠]당(唐) 나라 때에 어느 중이 산 위 높은 소나무 위에 깃들여 사는데, 사람들이 그를 새둥주리 선사[鳥窠禪師]라 일렀다. 다시 까치가 그 옆에 깃들이니, 사람들이 “까치집 화상[鵲巢和尙].”이라 일렀다. 《傳燈錄》
♣ 조과선사[鳥窠禪師]당(唐) 나라 고승(高僧) 도림선사(道林禪師)를 말한다. 그의 성은 오씨(吳氏), 이름은 원경(元卿)으로, 진정산(秦亭山)에 들어가 큰 일산처럼 생긴 소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데 까치가 그 옆에 둥지를 짓고 깃드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과선사라 불렀다. 《傳燈錄 卷四, 淵鑑類函 卷三百十七》
♣ 조과입실[操戈入室]후한(後漢) 때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ㆍ좌씨고황(左氏膏肓)ㆍ곡량폐질(穀梁廢疾)을 지었는데 정현(鄭玄)이 그에 반박하는 설을 짓자, 하휴가 보고서 탄식하기를 “강성(康成)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잡고서 나를 친단 말이냐.” 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三十五 鄭玄傳》
♣ 조관[照管]밝게 살핌.
♣ 조관[條貫]조리(條理)와 같음.
♣ 조괄[趙括]전국(戰國) 시대 조(趙) 나라 장군 조사(趙奢)의 아들. 병법(兵法)을 배워 조금 알고는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늘 자부하였으므로 자기 아버지로부터, 조 나라 군대를 망칠 사람은 틀림없이 괄(括)일 것이라는 경계를 받았다. 그 후 염파(廉頗)를 대신하여 장군이 되어서는 자기 멋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에게 크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史記 卷八十一》
♣ 조교교장[曹交較長]조교는 조(曹) 나라 임금의 아우로 맹자(孟子)와 동시대 사람. 그는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요순(堯舜)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신장이 십척이고 탕(湯)은 구척이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나는 신장은 구척 사촌이나 되면서 하는 것이라곤 곡식 먹는 일 뿐이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였음. 《孟子 告子下》
♣ 조구[糟丘]술 찌꺼기를 쌓아 놓은 것이 언덕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술로 채운 연못[酒池]을 만들자 소처럼 엎드려 마시는 자가 3천 인이었으며, 그 지게미를 쌓아 놓은 언덕[糟丘]이 10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韓詩外傳 卷4》
♣ 조구[糟丘]술지게미로 쌓은 작은 언덕이란 뜻. 신서(新序)의 절사(節士)편에 “걸왕이 술로 연못을 만들었는데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였고, 쌓아놓은 술지게미는 칠 리 밖에서도 보였다(桀爲酒池 足以運舟 糟丘足以望七里)”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 조구만숭[早韭晩菘]주옹(周顒)이 산중에 있을 때에 임금이 묻기를, “산중에서 무슨 맛난 것을 먹는가.” 하니, 그는, “첫봄에 부추와 늦가을에 배추가 맛이 좋습니다.” 하였다.
♣ 조구임협[曹丘任俠]의기(義氣)를 중히 여겨 약한 자를 도와주는[任俠好義] 사람으로 유명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조구생(曹丘生)이 계포(季布)의 임협(任俠)을 가는 곳마다 찬양하여 계포의 이름이 더욱 떨쳐지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0 季布欒布列傳》
♣ 조굴문[弔屈文]초나라 회왕(懷王)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참소를 만나 귀양가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충신 굴원(屈原)을 조상한 부(賦).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지었음.
♣ 조궁[朝宮]조회 받는 궁이다.
♣ 조균[調均]음률을 조화하다.
♣ 조균[朝菌]조균은 아침 나절에만 사는 버섯으로서 태양만 보면 죽으므로 매우 단명함을 비유한 말이고, 대년(大年)은 매우 장수함을 말한다. 《莊子 逍遙遊》
♣ 조금지유의[操琴知有意]공자(孔子)가 지었다는 금곡(琴曲)인 의란조(猗蘭操)를 말한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찾아 다녔지만 제후들은 아무도 등용해주지 않았는데, 위(衛) 나라에서 노(魯) 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산골짜기에 향기로운 난초가 외로이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난초는 임금의 향초(香草)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외로이 잡초들 옆에 있으니, 이는 마치 현자(賢者)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비부(鄙夫)와 짝이 되는 것과 같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를 멈추고 거문고를 타 스스로 슬퍼하니, 이것이 바로 이 곡조라 한다. 《古今樂錄》
♣ 조기지분고[祖己之奔告]문왕(文王)이 서백(西伯) 시절에 여국(黎國)을 정벌하여 이기자 조기(祖己)의 후손인 조이(祖伊)가 은 나라 국운이 다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두려워서 주(紂)에게로 달려와 그 사실을 고하고 정신을 차릴 것을 말하였음. 《書經 西伯戡黎》
♣ 조나[朝那]한(漢) 나라 때 설치한 성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평량현(平涼縣) 서북쪽에 있는데, 흉노(匈奴)가 자주 침입해 온 지역이다.
♣ 조나주[趙羅州]조박(趙璞)이 나주 목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조낭[皁囊]임금에게 글을 올릴 때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봉서를 넣는 검은 비단 주머니이다.
♣ 조낭유저[皁囊有貯]본디 비밀스런 일을 임금에게 아뢸 때는 검은 보자기에 싸서 밀봉하여 올리는 것인데, 후한(後漢) 말에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임금이 채옹(蔡邕)에게 조칙하기를, “경술(經術)을 갖춰 진술하여 검은 보자기에 봉하여 올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
♣ 조노[造怒]화를 내다.
♣ 조대[漕臺]양곡의 조운(漕運)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해운 판관(海運判官)을 말한다.
♣ 조대[糟臺]이백의 양양가에서 한수를 두고 읊기를 “이 강물이 술로 변한다면 누룩으로 보루를 만들고 찌꺼기로 대를 쌓으리라[此江若變作春酒 壘麴便築糟糟邱臺]"라 하였다.
♣ 조대[措大]조대는 청빈한 선비를 뜻한다.
♣ 조대년[趙大年]대년은 송(宋) 나라 조영양(趙令穰)의 자. 훌륭한 재주와 고상한 행실이 있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宋史 卷三十八》
♣ 조도[釣徒]낚시꾼. 당서(唐書) 장지화전(張志和傳)에 “지화는 한 은사로서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 하고 현진자(玄眞子)라는 글을 지었는데, 낚시꾼 노릇은 해도 낚시에 미끼를 달지 않고 고기잡이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하였다.
♣ 조도[祖道]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위하여 도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술대접을 하면서 전송하는 것을 말한다.
♣ 조도[鳥道]새들만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험준한 산길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시에 “서쪽으로 태백성(太白星)을 바라보니 조도가 있다.” 하였다.
♣ 조도[調度]헤아려 보다.
♣ 조도소요[操刀所要]일을 순리에 따라 처리함을 말함.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문혜군이 그가 칼질을 잘하는 것을 감탄하자, 백정이 말하기를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 없는 칼로 틈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넉넉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다.” 하였음.
♣ 조도수처회회[操刀隨處恢恢]기예(技藝)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백정이 소를 잡을 때,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새가 있는 뼈마디 사이에 집어넣음에, 칼 놀리는 공간이 넉넉하여 여유가 있었다.[彼節者有間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心有餘地矣]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가 있다. 《莊子 養生主》
♣ 조도연[祖道筵]조도제(祖道祭)와 같다.
♣ 조도제[祖道祭]먼 길 떠날 때에 행로신(行路神)에게 제사지내는 일. 옛적에 황제의 아들 누조(累祖)가 여행길에서 죽었으므로 후인이 행로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 조동[晁董]조동은 한(漢) 나라의 조조(晁錯)와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조조는 문제(文帝)가 직접 책문(策問)으로 과거 시험을 보일 때에 수백 명 중에서 장원을 하여 곧장 중대부(中大父)로 발탁되었으며 동중서는 무제(武帝)의 책문 시험에서 유명한 ‘천인 삼책(天人三策)’을 논하여 강도상(江都相)으로 발탁되었다. 《漢書 卷4, 卷6》
♣ 조두[俎豆]노자(老子)의 제자인 경상초(庚桑楚)가 노자에게서 도를 배우고 외루(畏壘)라는 곳에 가서 사는데, 그가 있은 지 3년에 외루가 크게 풍년이 들자, 외루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에 가깝다고 여겨 임금으로 받들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 사실을 들은 경상초가 남쪽을 향해 앉아서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외루 사람들이 나를 현인으로 높이어 임금으로 삼고자 하니, 이는 곧 내가 바로 표적(標的)의 인간이 된 것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庚桑楚》
♣ 조두[刁斗]놋쇠로 만든 한 말 들이 솥 같은 기구인데, 군중(軍中)에서 낮에는 여기에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이것을 두드려 경계(警誡)하는 데에 썼다고 한다. 일설(一說)에는 소령(小鈴)을 말한다.
♣ 조등[曹騰]조조(曹操)의 아버지인 숭(嵩)의 양부(養父). 원래 황문 종관(黃門從官)으로서 30여 년에 걸쳐 네 황제를 모시면서 대과 없이 지냈으므로 뒤에 공로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지고 그가 죽자 숭(嵩)이 양자로 그 뒤를 이었음. 《後漢書 宦者列傳》
♣ 조래[徂徠]산이름.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의 소나무[徂徠之松]" 하였다.
♣ 조래가식[徂徠嘉植]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산의 소나무와 신보산의 잣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재고 맞추어서, 커다란 재목 만드니 웅장한 궁궐이 완성되네.[徂徠之松 新甫之柏 是斷是度 是尋是尺 松桷有舃 路寢孔碩]”라는 말이 나온다.
♣ 조래상기[朝來爽氣]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진(晉) 나라의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서산의 아침 기운이 매우 삽상하다.[西山朝來 致有爽氣]”는 똑같은 말을 한 고사가 있다.
♣ 조량전[照凉殿]임금이 판각(版閣)에서 화산대(火山臺) 불놀이를 구경할 때 임시로 만들어 놓는 관망대(觀望臺)를 말한다.
♣ 조령모개[朝令暮改]아침에 내린 명령과 법령이 저녁에 다시 바뀜. 상부에서 내린 법령이 일관성 없이 자주 바뀜. 또는 법령을 자꾸 바꿔서 종잡을 수 없음을 비유. 자주 변함을 이름
♣ 조로연천헌[鳥路連天巘]새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는 높고 험한 산봉우리를 말한다.
♣ 조롱괘벽사[雕籠掛碧紗]당(唐) 나라 때 왕파(王播)가 빈궁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적에 중들이 그를 꺼리어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종을 치곤 하므로, 왕파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시 한 수를 써 놓고 그곳을 떠났는데, 뒤에 그 지방장관이 되어 다시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이전에 자신이 써 놓았던 시를 푸른 깁에 싸서 잘 보호하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조롱수[朝隴首]일명 백린가(白麟歌)라고도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원수(元狩) 원년 10월에 옹(雍) 땅에 행행하여 백린(白麟)을 얻고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 조룡[雕龍]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추석(騶奭)을 가리킨다. 추연(騶衍)은 하늘에 관해서 이야기를 잘 했고, 추석은 추연의 학문을 받아들여 마치 용 무늬처럼 꾸미기를 잘 했으므로, 당시에 “하늘을 얘기하는 추연이요, 용 무늬처럼 꾸미는 추석이로세.[談天衍 雕龍奭]”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史記 孟子荀卿列傳》
♣ 조룡[祖龍]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 조(祖)는 시(始)의 뜻이요 용은 임금의 상징이니, 시황(始皇)의 은어(隱語)이다. 사기(史記)에 “금년에 시황이 죽었다[今年祖龍死].” 하였다.
♣ 조룡[雕龍]조룡은 용의 문채를 아로새겼다는 말로 좋은 문장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최인전(崔駰傳)에 “대대로 조룡을 전해 왔다.” 했는데, 그 주(注)에 “추석(鄒奭)이 추연(鄒衍)의 글을 수식한 것이 용의 문채를 아로새긴 것 같다.”고 한 말이 있다.
♣ 조룡공[釣龍功]용을 낚았다는 것은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에서 낙화암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 나라 병선(兵船)이 뒤엎어지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소정방은 이것을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의 짓이라 하여 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에서 백마(白馬)를 미끼로 그 용을 잡았다 한다. 그리하여 강 이름이 백마강이 되고 용을 낚았다는 바위는 조룡대(釣龍臺)라 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조룡문[祖龍門]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의 별칭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동해에 바위를 세워 두고 …… 이를 진 나라 동문으로 삼았다.[立石東海 …… 以爲秦東門]”는 기록이 있다.
♣ 조룡편석[祖龍鞭石]진시황(秦始皇) 동해(東海)에 해 뜨는 것을 보려고 돌로 바다에 다리를 놓으려 하자, 귀신이 돌을 채찍질하여 바다로 몰아 넣으니 돌에 피가 흘렀다 한다.
♣ 조류[曺劉]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위(魏)의 조식(曺植)과 유정(劉楨)을 이름. 《文心雕龍 比興》
♣ 조류[曹劉]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과 유정(劉楨).
♣ 조리[螬李].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청렴한 선비가 아니리오. 오능(於陵) 땅에 있을 때 3일 동안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굼벵이가 반이나 먹은 우물 위의 오얏을 기어가서 주워 먹으니 세 번 삼킨 후에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물건이 보였다.”는 말이 있다.
♣ 조림[祖林]선림(禪林)과 같은 뜻으로, 선도(禪徒)들이 많이 모여서 수도하는 것을 수풀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조마[曹馬]한 헌제(漢獻帝)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위(魏)의 조조(曹操)ㆍ조비(曹丕)와 다시 위를 찬탈한 진(晉)의 사마소(司馬昭)ㆍ사마염(司馬炎)을 가리킨다.
♣ 조만[操縵]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음색 조정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현을 자유로이 조정할 수 없다.[不學操縵 不能安弦]” 한 데서 온 말이다.
♣ 조만[曺瞞]조조(曺操). 삼국지(三國志) 권1의 주에 인용한 조만전(曺瞞傳)에 “태조는 일명 길리라고 하였으며 어렸을 때의 자는 아만이었다.[太祖 一名吉利 小子阿瞞]”라고 하였다.
♣ 조말[曺沫]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 장공(莊公)이 제(齊)와 싸워 지고는 가(柯)에서 맹약을 할 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 환공(齊桓公)을 위협하면서 의분에 북받치는 말을 하자 환공은 그 동안 노 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그 자리에서 다 되돌려 주었다고 함. 《史記 刺客列傳》
♣ 조말척검[曹沫尺劍]조말(曹沫)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장군으로, 제(齊) 나라와 싸워 세 번이나 패했으나, 제 환공(齊桓公)과 노 장공(魯莊公)이 회맹(會盟)을 할 적에 비수를 들고 가서 제 환공을 위협한 결과, 빼앗겼던 땅을 모두 되찾았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86 曹沫傳》
♣ 조매[調梅]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만일 국맛을 맞춘다면 너는 소금이요 매실이니라[若作和羹 爾惟鹽梅].” 하였는데, 짠 소금과 신 매실(梅實)이 국의 조미료이므로 정승의 업의 뜻으로 쓰여진다.
♣ 조매계[曹梅溪]매계는 조위(曹偉)의 호. 조위는 조선조 성조 때의 문신. 글씨와 시문에 능했음. 저서에는 매계집 《梅溪集》이 전해짐.
♣ 조맹[趙孟]조맹은 진(晉) 나라의 경(卿)이다.
♣ 조맹견[趙孟堅]송 나라 말기의 은사(隱士). 호는 이재(彝齋). 그는 송 나라 말기에 한림 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고, 서화와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지절(志節)이 높기로 유명하였다.
♣ 조명시리[朝名市利]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여야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조모관녕[皁帽管寧]삼국 시대 위(魏)의 명사 관녕(管寧)이 항상 검은 모자를 쓰고, 80세가 넘도록 50여 년 동안을 항상 목탑(木榻)에만 꿇어앉았었으므로, 그 목탑 위의 무릎 닿은 곳이 모두 구멍이 뚫리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十一》
♣ 조모벌묵수[操矛伐墨守]식견이 뛰어난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권35 정현전(鄭玄傳)에 “임성(任城) 하휴(何休)가 공양(公羊)의 학문을 좋아하여 마침내 공양묵수(公羊墨守)ㆍ좌씨고황(左氏膏肓)ㆍ곡량폐질(ꜘ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이 발묵수(發墨守)ㆍ침고황(鍼膏肓)ㆍ기폐질(起廢疾)을 지었다. 하유가 그 글을 보고 감탄하기를 ‘강성(康成)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잡고서 나를 친단 말인가.’ 하였다.” 하였음.
♣ 조문기관[詔文記官]수향리(首鄕吏)를 일컫는 말이다.
♣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조문민[趙文敏]문민은 원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시호.
♣ 조문석사[朝聞夕死]도(道)를 알면 곧 죽어도 유감이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하였다.
♣ 조문왕[操文王]조조(曹操)는 후한(後漢) 말기의 역신이었으나 당시에 그를 주문왕(周文王)에 비유했던 일을 가리킨 말이다.
♣ 조박[糟粕]조박은 술찌꺼기라는 뜻으로, 전하여 고인(古人)이 남긴 글을 가리키는데, 즉 고인의 진면(眞面)은 추구하지 않고 껍데기만 익힘을 이를 때 쓰인다. 조박은 또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일컫기도 한다. 춘추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당(堂) 위에서 글을 읽고 있자, 윤편(輪扁)이 당 아래서 일을 하다 말고 환공에게 묻기를 “공(公)의 읽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므로 환공이 말하기를 “성인의 말이다.” 하였다.”성인이 살아 있습니까?" 하자 “이미 죽었다.” 하니 “그렇다면 공이 읽고 있는 것은 바로 옛사람의 찌꺼기군요.”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道》
♣ 조박무여미[糟粕無餘味]제 환공(齊桓公)이 대청에서 독서를 하자, 바퀴 만드는 사람이 “책이란 이미 죽은 성인이 남겨 놓은 술지게미[聖人之糟粕]와 같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淮南子 道應訓》
♣ 조방[曺芳]조방은 삼국시대 위(魏) 나라 명제(明帝; 曺叡)의 양자가 되어 그 뒤를 이었는데, 재위 15년만에 사마사에게 폐위되어 제왕(齊王)이 되었다.《三國志 卷四》 조방은 조조의 증손이고 조비의 손자인 셈이다.
♣ 조방의마임구치[早防意馬任驅馳]뜻이 제멋대로 달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마(意馬)는 즉 뜻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치 달리는 말과 같다는 말이다. 참동계(參同契) 주(註)에 “의마(意馬)가 사방으로 달린다.” 하였다.
♣ 조범[鳥凡]범조는 ‘새 봉[鳳]’자를 파자(破字)한 모양이다. ☞ 범조(凡鳥)
♣ 조법[助法]조법은 은(殷)의 조세법으로서 70묘(畝)를 경작하는 농민이 7묘의 공전(公田)경작을 돕는다는 뜻으로, 10분의 1을 조세로 바치는 제도임. 《孟子 滕文公上》
♣ 조벽[趙璧]춘추 전국 시대에 최고의 보옥(寶玉)으로 일컬어졌던 화씨벽(和氏璧)을 가리키는데, 그 빛이 희다.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 나라로부터 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조벽완[趙璧完]조(趙) 나라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진정(奏廷)에 갔다가 진왕이 빼앗으려 하므로 꾀를 내어 무사히 구슬을 가지고 돌아왔다.
♣ 조변석개[朝變夕改]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또 고침. 일을 자주 뜯어고침
♣ 조보[趙普]송(宋) 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데, 태조가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그의 부처(夫妻)와 대작(對酌)까지 하였다.
♣ 조보[造父]말의 관상을 잘 보는 동시에 말을 잘 모는 사람을 가리킨다. 조보는 주 목왕(周穆王) 밑에서 말을 몰았던 사람으로 주목왕에게 하루에 천 리를 치달리는 팔준마(八駿馬)를 바쳤다고 한다.
♣ 조북비가[趙北悲歌]조북(趙北)은 도시 연조(燕趙) 지역을 가리킨 말인데, 연조 지역에는 우국지사들이 많았으므로, 예부터 연조에는 감개비가(感慨悲歌)하는 선비가 많다고 일컬어진 데서 온 말이다.
♣ 조불급석[朝不及夕]형세가 급박하여 아침에 저녁 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함을 일컫는다.
♣ 조불려석[朝不慮夕]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한다. 당장 눈 앞의 일이나 결정할 뿐이지 앞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 조불모석[朝不謀夕]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한다. 당장 눈 앞의 일이나 결정할 뿐이지 앞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 조불안석[坐不安席]마음에 불안이나 근심 등이 있어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함
♣ 조불후목[雕不朽木]버린 사람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거늘 공자가 ‘썩은 나무에는 새길 수 없다’ 했다.” 하였다.
♣ 조비연[趙飛燕]전한(前漢) 때 성제(成帝)의 황후(皇后). 그는 몸이 가볍고 가무(歌舞)를 잘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제비[飛燕]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귀풍송원곡(歸風送遠曲)을 손수 지어서 노래하고 춤춘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귀풍송원이란 회오리바람을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 조사[漕司]부세(賦稅)의 독촉 징수와 출납(出納)ㆍ상공(上供) 등의 일을 관장한 기관임.
♣ 조사[造思]생각을 하다.
♣ 조사[祖師]조사는 불가의 말로 원래 석가(釋迦)를 칭했는데, 선종(禪宗)의 창시자(創始者) 달마(達摩)를 가리킨다.
♣ 조사림[祖師林]불교의 한 종파(宗派)를 창시한 선종(禪宗)의 달마(達摩)가 거처하던 숲을 가리킨다.
♣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선불교(禪佛敎)에서 쓰는 화두(話頭)의 하나로서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것인데, 즉 불법(佛法)의 근본 대의가 무엇이냐고 하는 것임.
♣ 조사선[祖師禪]선종(禪宗)의 용어로, 조사(祖師)들이 대대로 서로 전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법(禪法)을 말한다.
♣ 조사선거산[趙奢先據山]조사는 전국 시대 때 조(趙) 나라의 장수이다. 진(秦) 나라가 한(韓)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에서 조사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사(軍士) 허력(許歷)이 조사에게 간하기를, “먼저 북산(北山)에 올라가서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오는 자는 패할 것입니다.” 하자, 조사가 그의 말에 따라서 즉시 1만 명의 군사를 산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진 나라 군사가 뒤늦게 이르러서 북산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조사가 군사를 풀어서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었다. 《史記 卷八十一 廉頗藺相如列傳》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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