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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불복종 / 월든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의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을 직면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 있을지를 살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것을 몸소 체험한 다음에 나의 다음번 여행때 그 고상함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를 써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주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한다.
누군가가 걸었던, 소위 검증된 길을. 그렇게 우리는 평균치를 두텁게 하는데 생각을 보탠다. 숨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실천은 용기 있는 자들의 전유물 이었다.
월든에서의 사상은 자연에 기초한다. 자연에 근거를 둔다는 것은 화합과 조화를 기본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 귀착하는 것을 최선의 합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실천한다. 스승의 땅을 조금 빌려 스스로 월든 숲속으로 들어간다.
2년여 생활을 하며 그 기간을 집필과 생각의 기저를 튼튼히 한다. 즉, 바램을 실천하고 실천을 통하여 사상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먼저 그 용기에 큰 찬사와 함께 부러움이 인다.
세상엔 하고 싶어만 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것들을 해 나가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크고 작은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동기는 용기 일 것이고 또한 용기를 뒷받침하는 사고의 유연성 이었을 것이다.
환경은, 사상들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세월의 물리적 변화에 앞서기도 한다.
표면적 변화와 달라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기를 유발하는 용기 일 것이다.
총칼 들고 전쟁터로 뛰어 나가는 용기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용기도 같은, 아니 어쩌면 조금 더 큰 용기일 수도 있다.
월든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사색과 반성을 허락한다. 사색이 사색을 유발시키고, 반성이 반성을 유발 시키는 경우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관계의 정립은 또 다른 관계를 연쇄적으로 발생 시킨다. 그와 유대를 지니는 모든 관계의 상대편은 항상 우주였다.
그(나) 스스로가 우주의 아주 작은 미미한 조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나)와 우주와의 바람직한 관계가 성립된다.
월든숲은 작은 우주다.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수 많은 우주들 중 다소 자그마한 우주.
만일 종교가 인간의 작품이 아니고 신의 작품이라면, 신은 인간보다 손재주나 말재주가 훨씬 뒤떨어지는 것 일게다.
2000년전 열매 따먹고 땅 파먹고 살던 시기의 종말론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가 힘들다.
종교가 아니면,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이야 말로 우주라는 유일신의 독생자일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멸망시키기도 또한 죽음에서 구하기도 할 것이다.
자연에 근거함은 우주를 근거함 이고, 우주를 근거함은 시효가 발생하지 않는다.
국가가 이성적 원칙으로 다스려 진다면, 가난과 비참함은 수치의 대상이다.
이성적 원칙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부와 명예가 수치의 대상이다. [공자]
나는 남의 강요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숨 쉬고 살고 싶다.
시민 불복종은 자연주의이다 지독한 자연주의다.
자연속에서 무슨 성문(成文)의 법률이 존재할 것이며, 제도와 규율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곳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고 각 개체들의 이해와 양보로 완성되는 곳이 아닌가?
"가장 훌륭한 정치란 어떤 정치인지요?"
"가장 훌륭한 정치란, 누가 다스리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정치이다." 贞观政要 中.
야만인들의 강인함과 문명인의 지성을 겸비하기란 불가능한 일일까?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한 나머지 지혜가 명하는 바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신뢰할 만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삶의 어떤 문제들을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해결한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이 만나는 지점, 정확히 말해 현재라는 순간에 발을 딛고 서서, 발끝으로 그 선을 따라 걷고 싶었다.
옷을 마련할 때 우리는 진정한 실용성보다는 새것을 좋아하는 마음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관심에 지배될 때가 더 많다.
문명인은 경험이 더 많고 더 현명한 미개인일 뿐이다.
나는 겸손을 떨며 악마의 대리인이 되지는 않을 작정이다. 진실을 제대로 대변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 눈에는 오늘날의 영국이 엄청난 짐을 가지고 여행 중인 노신사처럼 보인다.
오랜 살림살이로 축적된 잡동사니들, 즉 큰 여행 가방, 작은 여행 가방, 원통 상자, 보따리 따위인데 그는 그것을 태워 버릴 용기가 없다.
적어도 처음 세 가지는 버리길! 오늘날 건장한 사람도 침대를 등에 지고 걷는다면 힘에 부칠 것이다. 병든 사람은 침대를 버리고 달려가라.
전 재산이 든 보따리를 지고 비틀거리는 이민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보따리는 그의 목덜미에서 자라난 어마어마한 혹처럼 보였다.
그가 안타까웠던 까닭은 그 짐이 그의 전 재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덫을 끌고 다녀야 한다면, 가벼운 것을 골라 급소가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아예 덫에 발을 집어넣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리라.
각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나 엄니, 혹은 이웃의 길을 따르는 게 아니라 매우 신중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 추구하기를 바란다.
젊은이는 건축가가 될 수도 있고 농부나 선원이 될 수도 있으니, 그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일을 못하도록 방해만 하지 말자.
선원이나 도망 노예가 언제나 북극성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아주 정확한 어떤 지표가 있어야만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그 지표는 평생의 길잡이가 생기는 셈이다. 예측 가능한 시간 이내에 항구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당한 항로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부패한 선이 풍기는 악취만큼 고약한 냄새는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뒤에는 자신의 신발 끈이나 묶으라. 잠깐 쉬었다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라.
현자가 답했다. 모든 나무는 적절한 열매와 정해진 철이 있어, 그 철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생기가 넘치며 꽃을 피우지만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든다.
삼나무는 열매도 제철도 없으니 언제나 번성한다. 자유로운 이들, 즉 종교에서 독립한 이들의 특징이다. 그러니 그대의 마음을 덧없는 것에 쏟지 말라. 칼리프 백성이 멸망한 뒤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통과하며 계속 흐를 것이다.
그대의 손에 많은 것이 있다면 대추나무처럼 관대하게 베풀라. 손에 베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삼나무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
속세를 한 걸음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에나 올림포스 산이 있다.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 시와 예술 및 가장 아름답고 기억할 만한 인간의 행동은 그런 시간에 시작된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경쾌하고 활기차게 사고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영원히 지속되는 아침이다.
시계가 몇 시를 알리든,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다. 내가 깨어 있고 내 속에 새벽이 있다면 그때가 바로 아침이다.
우리의 삶은 사소한 일로 허비된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자!
원칙을 알면 됐지 무수한 사례와 응용에 왜 신경을 쓴단 말인가?
철학자에게 소위 뉴스란 잡담거리에 불과하며 그것을 편집하고 읽는 사람들은 차를 홀짝이는 노파들이다.
뉴스가 뭐기에! 결코 낡지 않는 것을 아는 편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하루라는 시간을 자연처럼 의도한 그대로 살아 보자. 호두 껍데기와 모기의 날개가 철로에 떨어진다고 매번 탈선하지는 말자.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든지 거르든지 요란을 떨지 말고 차분히 하자.
손님이 오가거나 종이 울리거나 아이들이 울어도 그대로 두자. 즉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로 마음먹자.
젊은 날의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 몇 단어라도 고대 언어를 배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언어는 거리의 천박함에서 벗어나, 끊임 없는 암시와 자극을 줄 것이다.
농부가 어쩌다 들은 라틴 어 몇 마디를 기억하고 암송하더라도 헛된 일은 아니다.
고전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고전은 붕괴되지 않는 유일한 신탁이다.
그 안에는 델포이와 도도나의 신탁도 결코 제시하지 못할, 가장 현대적인 의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자는 말은 자연이 오래되었으니 자연 연구를 그만두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참된 책을 참된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훈련이며, 독자에게는 이 시대의 풍조가 높이 평가하는 그 어떤 훈련보다 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것과 같은 훈련, 즉 거의 평생토록 독서를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
작가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책을 쓰는데 독자도 마찬가지 태도로 책을 읽어야 한다.
연설가가 때로 토해 내는 열변이 제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해도, 가장 고귀한 문어(文語)는 대개 덧없는 구어(口語)보다 훨씬 멀고 높은 곳에 있다.
별들이 자리한 창공이 구름보다 높이 있듯이 말이다. 그곳에는 별이 있고, 별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 적힌 말은 우리의 일상 대화나 가벼운 숨결처럼 증발하지 않는다. 토론회에서 달변이라 불리는 것을 서재에서 살펴보면 대개 미사여구일 뿐이다.
연설가는 그 순간의 감흥에 젖어 눈앞에 보이는 군중, 즉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작가는 좀 더 차분한 생활이 있어야 글을 쓰며 연설가에게 영감이 될 사건이나 군중이 있다면 주의가 산만해질 것이다.
작가는 지적이고 건전한 인류, 즉 시대에 상관없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단체 행동은 우리의 제도에 깃든 정신과도 일치한다. 귀족 대신 보통 사람이 사는 고귀한 마을을 세우자.
필요하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강에 다리 하나를 덜 놓고, 대신 우리를 둘러싼 무지라는 더 캄캄한 심연 위에 무지개다리 하나라도 놓자.
어떤 방법이나 훈련도 늘 깨어 있으려는 태도를 대체하지 못한다.
당신은 단순히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관찰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자신의 운명을 읽고 앞에 놓인 것을 바라보며 미래 속으로 꾸준히 걸어가라.
나는 푸리 족 인디언처럼 살았다.
“단 한 단어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나타내며, 어제를 뜻할 때는 뒤쪽을 가리키고 내일을 뜻할 때는 앞을, 현재 지나가는 날을 뜻할 때는 머리 위를 가리켜 그 차이를 표현한다.”
진실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동기를 찾아야 한다. 자연의 하루는 아주 평온하여 사람의 나태함을 전혀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말한다. “거기 있으니 분명 외롭겠군. 특히 비나 눈이 내리면 낮이나 밤이나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싶을 거야.”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전체가 우주에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네.
저 별에 사는 사람들 중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저 별의 폭은 우리가 만든 기계로는 가늠할 수 없지 않나. 내가 왜 외로움을 느껴야 하나? 우리의 지구도 은하수에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고 외롭게 만드는 공간은 어떤 종류의 공간인가?
나는 두 사람이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도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네. 우리는 무엇과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 할까?
수많은 사람들 가까이는 분명 아닐 거야. 기차역이나 우체국, 술집, 마을 회관, 학교, 식료품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닐걸세.
버드나무가 물가에 가까이 서서 물을 향해 뿌리를 뻗듯이 우리도 생명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원천과 가까이 살고 싶을걸세.
본성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바로 그곳에 지하 저장고를 팔 거야.”
죽은 사람이 깨어나거나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면 시간과 장소는 하찮은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런 일은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일어날 것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해 준다.
우리는 핵심을 벗어난 일시적인 상황만을 기회로 삼는다. 우리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만물과 가장 가까운 곳에는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의 옆에서는 원대한 법칙들이 끊임없이 실행되고 있다.
천지의 오묘한 힘이 미치는 영향이 그 얼마나 광대하고 심오한가!
우리는 그 힘을 포착하고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 힘을 듣고자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만물의 본질과 같아서 만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공자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한다. “덕은 버림받은 고아처럼 남겨지지 않는다. 반드시 이웃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색을 통해 우리는 건전한 의미에서 제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의식적인 정신 활동을 통해 우리는 행위와 그 결과에 초연할 수 있다.
좋건 나쁘건 모든 일은 급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가 버린다. 우리는 자연에 온전히 몰입된 상태가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편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우리는 금세 지루하고 산만해진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참 좋다. 고독만큼 붙임성 있는 벗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대개 방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고독하다. 생각하거나 일할 때면 사람은 늘 혼자다.
북새통 같은 케임브리지의 대학 기숙사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사막에 있는 수도승만큼이나 혼자 고독하기도 하다.
농부는 밭을 갈거나 나무를 베며 온종일을 들과 숲에서 혼자 일하더라도 거기 몰두해 있다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회 계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평생 초라하고 무지하게 살아간다. 그중에는 늘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다 아는 척하지는 않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은 거무스름하고 진흙투성이일지 몰라도 월든 호수만큼이나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인 것이다.
손으로 하는 노동은 제아무리 지루하게 진행되더라도 최악의 태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육체노동에는 영원불멸의 교훈이 담겨 있으디.
왜 씨앗으로 쓸 콩만 걱정하고 새로운 세대의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나 자연에 깃든 어떤 너그러움을 인식하며 순수하고 이타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익한 일이다.
특히 알지 못하는 이유로 마음이 괴로울 때, 우리의 뻣뻣한 관절을 풀어 주며 몸을 탄력 있고 유연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인간은 눈을 감고 한 바퀴만 돌아도 이 세상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깨어날 때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길을 잃고 나서야, 세상을 잃고 나서야, 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호수 자체는 변함이 없다. 어린 시절 나의 눈이 바라보았던 그 물 그대로이다. 모든 변화는 내 속에서 일어났다.
나의 수호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날마다 멀고 넓은 곳으로 낚시와 사냥을 나가라.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그리고 개울가든 난롯가든 두려워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젊은 날에 그대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동이 트기 전에 근심을 벗고 자유롭게 일어나 모험을 찾아 나서라. 한낮에는 여러 다른 호숫가를 찾아가고 밤에는 그 어디든 집으로 삼아라.
이보다 더 넓은 들판은 없고, 여기에서 즐기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놀이는 없다. 그대의 본성에 따라 저 사초와 고사리처럼 야생을 즐겨라.
천둥이 울리면 그대로 받아들여라. 천둥이 농부의 작물을 해치겠다고 위협한들 어쩌랴?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수레와 오두막으로 피하더라도 그대는 구름 밑을 피난처로 삼아라.
밥벌이를 의무로 삼지 말고 즐거움으로 삼아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지 말라. 사람들은 진취성과 신념이 부족해 현재에 안주하며 물건을 사고팔며 농노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먼 곳에서 집에 돌아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날마다 모험과 위험을 겪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새로운 경험과 인식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호숫가에 사는 동안 한두 번쯤, 굶어 죽을듯한 사냥개처럼 묘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어떤 종류의 고기라도 찾아내서 먹으려고 숲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런 고기를 한 입 먹더라도 전혀 야만적인 행위가 아닐 것 같았다. 야생적인 광경에도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속에는 더 높은 삶, 이른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또 다른 본능이 존재한다.
나는 두 본능을 모두 존중한다. 나는 선량함 못지않게 야성을 사랑한다.
동년배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육류나 차, 커피 등을 오랫동안 먹지 않았다. 그런 음식이 악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내 상상력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류에 대한 거부감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본능이다.
소박한 식사를 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비록 완벽히 그렇게 살지는 못했지만, 내 상상력을 만족시킬 만큼은 되었다.
내가 매일의 삶에서 거두는 진정한 수확은 아침이나 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처럼 만질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것은 손에 잡힌 약간의 별 먼지이며, 내가 움켜진 무지개 조각이다.
나는 언제나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 취하려고 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는 물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마시는 유일한 음료라고 믿는다.
음악조차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다. 이왕 취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자신이 숨 쉬는 공기에 취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장시간 지속되는 거친 노동을 반대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큼 거칠게 먹고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식욕과 아무 상관없이 먹은 음식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증자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먹는 음식의 참맛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폭식하지 않지만,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폭식하게 된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때의 식탐이 사람을 더럽힌다.
문제는 음식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감각적인 맛에 대한 탐닉이다.
우리의 인생은 놀라울 만큼 도덕적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순간의 휴전도 없다. 선이야말로 결코 실패하지 않을 투자다.
세상 곳곳에 울려 퍼지는 하프 선율 속에 우리를 전율시키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렇게 선을 고집하는 태도다.
젊은이는 결국 그 선율에 무관심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무관심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가장 민감한 사람의 편에 선다.
산들바람 속에는 반드시 어떤 질책이 실려 오므로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지겨운 소음들도 멀리 떨어져서 들으면 우리의 천박한 생활을 당당하고 감미롭게 풍자하는 음악처럼 들린다.
성욕, 생식력은 우리가 문란할 때는 헛되이 쓰인다. 우리를 불순하게 만든다. 우리가 절제할 때는 활력과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을 꽃피운다. 천재성, 영웅적 자질, 신성함 등은 순결이라는 꽃이 맺은 열매다. 순결이라는 수로가 열리면 인간은 즉시 신에게 흘러간다.
인도의 법전 제정자는 어떤 것도 사소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먹는 법과 마시는 법, 함께 사는 법, 대소변 누는 법 등을 가르치며 천한 것을 드높였고, 거짓으로 이런 것을 사소하게 취급하며 발뺌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육체라는 신전의 건축가이다. 이 신전은 각자가 숭배하는 신을 위해 순전히 나름의 양식에 따라 지어야 한다.
동물들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장소에 잠자리만 마련하고, 제 몸으로 그것을 덥힌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널찍한 방에 공기를 가두고, 체온을 빼앗기는 대신 그 공기를 데워 침대로 삼는다.
적당한 간격으로 어김없이 웃음의 예포가 터졌는데, 좀 전에 했던 말 때문이기도 했고 앞으로 나올 농담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묽은 귀리죽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인생에 대한 ‘최신’이론을 수없이 만들어 냈다.
철학이 요구하는 명석한 두뇌에 유쾌함이라는 이점을 결합한 이론들이었다.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숲 속에서도 나는 결코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곤 했다.
집주인은 저녁 무렵이면 마당에서 소 한 마리의 젖을 짜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괜찮다면 그보다 오랜 시간 동안 손님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손님 접대의 의무를 자주 수행했고, 소 떼 전체의 젖을 짤 수도 있을 만큼 오래도록 손님을 기다렸으나 마을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우리 인간이 묻는 질문에 답하지도 않는다.
모든 호수가 얕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호수가 깊고 맑아 하나의 상징이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맙다. 인간이 무한을 믿는 한, 바닥이 없다고 여겨지는 호수들이 존재할 것이다.
소나기가 내린 뒤에 물웅덩이를 살펴보면 움푹 팬 땅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
상상력은 조금만 틈을 주면 자연보다 더 깊이 잠수하고 더 높이 날아오른다.
하루는 1년의 축소판이다. 밤은 겨울이고 아침과 저녁은 봄과 가을이며, 정오는 여름이다.
보슬비가 한 번만 내려도 풀은 몇 배나 더 푸르러진다. 훌륭한 생각이 밀려들면 우리의 장래도 더 밝아진다.
우리가 언제나 현재를 산다면 그리고 이슬이 살짝만 내려도 그 영향력을 우리에게 선용한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봄은 이미 왔는데 우리는 겨울 속에서 늑장을 부린다. 기분 좋은 봄날 아침, 모든 인간의 죄는 용서받는다.
쭈글쭈글한 얼굴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새싹이 돋아나, 새파랗게 어린 식물처럼 싱싱한 모습으로 새로운 해의 삶을 시작해 보려는 기운이 엿보인다.
언제나 봄이었고 평온한 미풍이 따스하게 불어와 씨 없이 태어난 꽃들을 달래 주었다.
우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과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에서 어떤 생명이 자유롭게 풀을 뜯는 광경을 목격해야 한다.
그대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 개의 지역이 보이리라.
그곳을 여행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의 전문가가 되어라.
자신이 꿈꿔 온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평소에 예상치 못했던 성공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것들을 뒤로 하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한층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면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낡은 법칙들이 확장되고, 좀 더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 한층 숭고한 존재 법칙을 허용 받아 그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소박하게 살아갈수록 우주의 법칙도 그만큼 단순해질 것이며,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며 약함도 약함이 아닐 것이다.
공중에 성채를 지었더라도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그 성채가 있어야 할 자리다. 그러니 그 밑에 토대를 세우자.
미래나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앞에 선을 긋지 말고 느슨한 태도로, 앞에 펼쳐진 윤곽을 희미하고 흐릿하게 남겨 두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언어에 담긴 증발하기 쉬운 진실은 뒤에 남은 표현의 결점을 끝없이 폭로해야 한다.
의무감으로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자신의 삶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당당히 받아들이며 살아내도록 하자. 삶을 회피하거나 삶을 욕하지 말자. 삶은 우리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트집을 찾을 것이다. 가난하면 가난한 그대로 삶을 사랑하라.
저무는 해는 부자의 저택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노인들을 돌보는 양로원의 창에도 밝은 빛을 비춘다.
이른 봄이면 양로원 문 앞에서도 눈이 녹는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그런 곳에서도 궁전에서 사는 듯이 만족스럽게 지내며 유쾌한 생각을 즐긴다.
새날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만 밝아 온다. 밝아 올 새날이 아직 남아 있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 책은 월든 (Walden)과 시민불복종 (Civil Disobedience) 등 두 편을 엮은 책이다.
1845년 소로는 스승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끼 한 자루만 들고 월든 호수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2년 간 혼자 그곳에서 생활을 하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월든”이다.
중요한 19세기 정전(正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자연 회귀를 바라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이다.
시민불복종”은 국가, 법, 정부, 권력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할 경우 그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할 시민의 권리와 행위를 의미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국가의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한 영향력을 만들어 냈다.
이후 많은 사상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17년 7월 12일에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45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소로의 삶은 대부분 콩코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콩코드는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갖춘 곳으로, 랠프 월도 에머슨을 중심으로한 초월주의자들의 근거지였다.
소로를 비롯해 너새니얼 호손, 마거릿 플러, 엘리자베스 피바디, 브론슨 올컷, 윌리엄 엘러리 채닝 등이 이 무리에 속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인 물질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해 개인의 영적 상태에 집중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초월주의자’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