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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돌려달라 (2)
●.대마도를 반환하라 (1)<2019.8.2 대마도 여행후기로 쓴 글>
인묵
6월 19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빼앗긴 땅 대마도를 되찾자는 취지의 대마도의 날입니다. 지난 2005년 지방의회인 마산시의회에서 제정하여 20회를 맞는 날입니다.
일본엔 다께시마의날이 있지만 우리에겐 대마도의날이 있습니다.
과거 이승만대통령은 건국후 3일째 되는 1948년 8월 18일 첫기자회견에서 중대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對馬島;쯔시마)를 반환해줄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상,하두개의 섬으로 되어있는 한일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350년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것이다.”
그리고 1949년 년말 기자회견에서는 “대마도 반환은 우리의 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은 350년전에 대마도를 침입하여 왔고 당시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웠다.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은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선언했기에 이 대마도도 되돌려주어야 한다.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수 없을 것이다”라고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게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가 60여회에 이르며 그는 대마도 반환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여론도 이러한 주장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중국 거주 동포들의 지원시위는 이대통령에게 많은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마도 탈환’의 대명제를 아예 포기하고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신념이 굳어가는 현실에 처해있다.
2005년 2월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매년 2월 22일)이 제정되는 것을 본 마산시
의회에서 대마도의 날(6월19일)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정부(노무현대통령)는 외교 마찰을 우려해
취소할것을 요구하나 마산(지금의 창원시)시의회는 이를 거부,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6월 19일은 세종(1419년)때 이종무장군이 대마도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항한 뜻깊은 날이다.
당시 한국의 대마도의날 제정을 지켜본 일본의 여론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
영토분쟁(센카쿠 열도와 쿠릴열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들은 또다른 영토분쟁이 발생할까봐 항상노심초사하고 있던중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한국의 소리에 거의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래서 앞질러 ‘다께시마를 반환하라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한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의 소리가 작아진 반면 일본은 독도반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마도는 일본 최단거리로서는 138km 떨어져 있고 부산에서는 50km 떨어진 부산에서 육안으로도 볼수있는 아주 가까운 섬이다. 나가사키현 소속의 이섬은 인구 28,000명 밖에 되지 않지만 일본에서 3번째로 큰섬이다. 총면적 708제곱km로 울릉도 10배의 크기이다.
역사적으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는 뗄래야 뗄수없는 밀접한 사이다. 아니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해서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겐 문제가 많다. 과거 조선의 500년이 명,청나라의 속국과 다름없었으며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0년을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땅이다. 이런 실효지배 사실을 무시하고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현재 우리가 실효지배 하고있는 독도는 어떻게 되나. 독도가 걸린다. 여기에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고민이 있는것이다.
대마도엔 천년이상된 신사만 29개사가 있는데 한결같이 한국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국보급 한국의 보물을 간직한 곳들이다. 슈센지(修善寺)에는 1905년 맺어진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창하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되어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수 없다”고 버티다가 순직한 최익현열사의 순국비가 있다.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 또한 이곳에 있다.
그리고 고종의 유일한 딸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일본으로 유학와서 인질같은 삶을 살다가 대마도 번주였던 소(宗) 다케유키와 정략결혼하여 대마도에서 살다가 이혼한후 한국으로 귀국, 이방자여사의 극진한 뒷바라지를 받았으나 결국 1989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금곡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조울증,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임진왜란때 대마도주 였던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전쟁발발 일년전 조총3자루를 가지고 동래부로 찾아들어 “곧 도요도미가 이 조총으로 조선을 침략할것이니 미리 대비 잘하시라”고 귀뜸을 하고 떠났으나 결국 이 조총은 동래부의 창고속에서 난이 끝날 때까지 잠자고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임란당시 소요시토시는 침입군들의 길잡이가 되어 부산으로 쳐들어 온다. 도요도미의 오른팔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사위였기에 어쩔수가 없었을까 아니면 누구보다 조선의 형세 및 상황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대마도가 요즘 한국인 관광객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년간 26만명 한국방문객이 대마도를 방문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정부는 이 외지고 산간벽촌인 이 섬을 너무 등한시 하고있다. 오로지 북섬에 한반도를 탐색하는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있을 뿐이다. 우선 너무 먼 도서지역이다. 도쿄에서 1,000KM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내국인 관광객이라고는 찾기가 힘들다. 형편이 이렇게도 편향된 대마도에서 한때 ‘한국인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한국인을 거절하는 요식업체, 숙박업체가 늘어나던 때가 있었다. 발단은 한국인은 화장실을 너무 험하게 쓴다는 것이다. 사용후 화장지를 물에 내리지 않고 쓰레기 통에 버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매너가 너무 없다는 얘기다. 한국 깍아내리기에 좋은 소재를 만난 몇몇일본의 TV에서는 화장실의 이사정을 실황중계까지 하는걸 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벌어진후 오래되지 않아 그들은 한국인 관광객 없이는 밥을 먹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차츰 ‘한국인 금지’의 팻말이 하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전 또다시 대마도에서 ‘한국인출입금지’의 팻말이 나붙은 곳이 생겨났다. 대마도에 있는 千年古社 와타쯔미(和多都美 )神社의 경내에서 한국인들의 추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담배 피우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침을 내뱉는 사람들, 근엄한 경내에서 아주까리 동백꽃이 어쩌고 하면서 노래하며 춤추는 여인, 이런 추태가 촬영되어 일본 SNS와 TV에 까지 방영되니 이 무슨 창피인가.
한국(馬韓)을 마주보고 있다고 對馬島(쯔시마)로 이름을 지었다는 대마도(일설에는 말을 키우는 섬이라고 해서), 대마도인들은 자기들의 사투리인줄 알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말이 너무 많다. 친구, 총각, 바지, 지게, 일본, 빨리빨리,,,, 등등. 이런 말들은 그들도 예사로 쓰며 다 알아듣는다.
이조초 까지만 해도 한.일양국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며 양쪽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줄타기를 하던 돌립국이었지만 일본막부가 1600년대초 침입을 하였다. 이에 대마도 주민들은 끝까지 항쟁을 하였으나 결국 패하게 되어 결국 막부의 지배를 받게되나 당시 일본의 막부는 대마도까지 지원해줄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해적질을 하기시작한 왜구들이 조선과 일본 본토를 수시로 침략한다. 조선정부는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영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의 반에 가까운 량을 그들에게 공여하고 태종은 부산포, 제포와 왜관을 무역항으로 열어준다.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고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 그들은 1436년 대마도를 조선의 한고을로 편입시켜 줄것을 간청하는바 대마도를 경상도로 예속시키고 島主를 태수로 봉한다. 만약 이때 조선에서 섬 관리자라도 상주 시켰었더라면 오늘날 ‘대마도는 조선이 지배했던 영토’였다 라는 주장에 더힘이 실릴수 있었을텐데,,, 애석한 일이다..
조선초 일본을 통신사로 다녀온 신숙주일행은 그당시 일본인들은 ‘대마도를 자기나라가 아닌 외국으로 보았고 그 주민들은 半조선인으로 알고있었다’ 라고 전하고 있다. 오로지 먹고살기위해 조선으로 스스로 굴러들어온 보물(대마도)을 제대로 관리를 못해 일본에게 빼앗겨 버린 대마도가 아쉽고 당시의 조선 집권자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일본정부는 쯔시마(대마도)를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9년 정식 자기들 영토로 편입하게 된다. 오키나와(류쿠국)는 1879년에 일본영토로 편입, 혹카이도(원래지명은 에조지)역시 1869년에 일본으로 합병되었다 . 일본은 그들 고유의 영토인 혼슈, 큐슈와 시코쿠 이외 3개의 섬을 메이지유신 이후에 병합하게 된다. 名君 한명이 태어나면 국토 또한 이렇게 넓어지는 법인가 보다.
일본이 대마도를 자기땅으로 병합하여 실효지배를 한지 150여년, 이젠 대마도는 일본땅으로 굳어져 가고있다. 150년이라는 실효지배의 높은 벽을 실감케 한다.
‘ 대마도를 한국이 차지할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이 알라스카를 싼값에 사들였듯이(당시 720만불) 우리도 대마도를 사들이는 방법을 지금부터 연구해봄이 어떨까
. 대마도의 날을 맞아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ㅡㅡㅡ
●.대마도를 반화하라 (1)
(2019년 8.19일 작성 게재)
인묵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국민이 꼭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 '#대마도(#對馬島)'
(부속섬포함 708.5km*)
대마도'가 한국 영토이며 한국이 반환 받는데 국제법상 문제될 것 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인 '구기'가 제작한 '조선팔도총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져있고 '대마도'가 경상도 에 속한 것으로 그려져있습니다.
또한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스페인, 영국 등 서구 근대 세력들의 해양 영토 약탈 시기인 임진년과 식민지 시기에 연이어 한국 의 불행한 소용돌이를 이용해서 '대마도'를 슬그머니 도둑질한 후 1871년에 일방적으로 '이스하라현'으로 그 후 1876년에는 '나가사키현'에 편입후 아예 자기들 영토 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신라 때 '이사부' 장군이 점령 접수 했고,일본 메이지(明治)때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 에서도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일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왜 이렇듯 독도 시비를 멈추지 않고 있을 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거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작전인 것입니다.
'대마도'가 한국영토라는 사실이 거론되는 것이 두려운 일본은 이것 을 막기 위해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죠.
'對馬島本是我國之地'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 라고 '세종대왕'이 선언한 것을 실록에서 기록하고있는 글귀이며 '대마도' 란 지명은 마한(馬韓)과 마주보는 땅 이라 하여 우리 선조는 '대마도' 라 명명하였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선 조정(한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본에 '대마도'를 넘겨준 일이 없습니다.
도둑질한 '대마도'를 두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그들 후손 자신에게도 세뇌(洗腦)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세뇌 작전과 특히 조작된 일제 식민사관에 젖어 지금까지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고 살았던 것이죠.
미치고 팔딱뛰고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 8월 18일,
"역사의 진실은 어쩔 수 없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천명 했습니다. 6.25직전까지 3년여 동안 60여 차례나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역사학회, 고고학회등으로 하여금 '대마도'에 관하여 왜곡된 논문들을 발표케 하면서 변명했습니다.
쓰시마의 역사적위치(1949), 대마문제(1951) 논문 등 이 그 예입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미,소가 대립하자, 일본은 "이때다"하고 미국에 읍소 로비를 했고,1951년, 미국은 한국을 배제한 채 일본과 같이 전후(戰後)처리 협정인 '샌프란시스코 협정'을 이렇게 체결해 버렸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도서는 한국에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이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미국은 '독도'와 '대마도'에 대해 영토 속국을 명백히 하지 않고 빼버린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이에 불복하고 우선 평화선 선포를 통해 우선 '독도' 라도 어족(魚族)보호 명분을 들어 '독도' 를 실효 지배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이승만'대통령은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여기에서 "specifically renounce"귀절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는 외교문서로서는 최고로 강력한 의사표시 였습니다.
'대마도' 반환 문제는 남북통일과 마찬가지로 우리 7,000만 민족의 숙원입니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는 문제에 있어 국제관례 의 관점에서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86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小笠原) 군도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 영토로서 인정받고 반환 받았던 이러한 국제적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마도' 반환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할 것 입니다.
그때 일본이 내놓은 지도 ‘삼국 접양 지도'하야시 시헤이' (林子平)제작, 프랑스어판이 그 근거입니다.
미국이 '오가사와라' 군도가 일본 영토임이 맞다고 판단 하게 한 그 지도에 '오가사와라'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었 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영토인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 군도가 이 지도에 일본 영토 라고 표기 되어 있었기에 미국은 아무소리 못 하고 이 미국 영토를 일본에 반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분명히 한국 영토로 표기 되어 있는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최근에 이에 준하는 증거가 또 발굴되었습니다.
지리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태리인 'J.H.Kernot'씨가 1790년에 작성한 "일본과 한국"이라 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뿐만 아니고 '대마도'도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는 사실이 발굴(견)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이 지도에는 '대마도'가 'STRAIT OF COREA'로 표시 되어 있고 특히 '독도'와 '울릉도','대마도'의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지도 바탕 색깔을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으로 나타내 이들 섬이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에서 해적질하며 살고 있는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 경상도에 예속시켰습니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이 글귀는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있는 글귀 입니다.
이렇게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민족의 한쪽 다리 인 것입 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 '대마도'를 자기들 멋대로 자기영토로 편입 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잘라간 그 한쪽발 (嶺南之趾)을 되찾아 야 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이 부각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독도' 시비를 계속하며 분칠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마도'는 명백한 한국영토입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49km,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9km 입니다.
이 '대마도'에는 고대로부터 한국인이 건너가 살았습니다.
일본의 속셈이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라고 '세종대왕' 이 선언한 이 확실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는 독도 시비에 말려 들고 '대마도'를 일본 땅 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선 젯밥에 눈이 멀어 나 몰라라 하고 있고, 입만 살아 잡 소리나 하는 잘난 역사 학자들만 믿지 말고 우리들이라도 이 글을 여러 밴드에 퍼 날라 여론을 형성 하고, '독도'를 떠나서 '대마도' 반환 운동의 초석이 되었 으면 합니다.
우리가 못하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전 국민 모두가 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널리 알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