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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 명장면] 11. 근대 인도불교의 부흥 기독교 힌두교에 대한 반감이 부흥운동 촉발 # 불법의 모천회귀
이것은 지난날 아쇼카왕이 스리랑카에 뿌린 전법의 씨앗이 23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한 역사적인 일이다. 그 후 인도 안에서도 벵골지역의 승려들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으며, 암베드카르(Ambedkar)의 신불교 운동에 이르러서는 ‘집단 개종운동’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기독교 교육받은 다르마팔라 정체성 반성 불법전파 <사진설명: 지난 2002년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가 태어날 당시 콜롬보는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민족 종교인 불교는 오히려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어린 시절 기독교 선교학교에서의 교육은 다르마팔라에게 불교도로서 자기 정체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근대 인도불교 부흥운동을 결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결심은 그 해 5월 스리랑카 대각회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같은 해 7월 네 명의 스리랑카 비구가 부다가야에 파견되고 인도에서 대각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발상지에서 불교부흥운동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10월에는 전 세계 불교계에 부다가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다르마팔라는 부다가야에서 국제불교회의를 개최했으며, 스리랑카, 중국, 일본, 치타공 등지에서 비구들이 참석했다.
암베드카르의 성장배경에는 힌두교, 특히 카스트제도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이 점은 군인이었던 부친이 카스트제도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카비르(Kabir) 중심의 박티(bhakti)종교 신봉자였다는 점에서도 이미 그 싹을 볼 수 있다. 부친의 반(反)카스트적인 종교성향과 불가촉천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훗날 그의 사회적 활동과 나아가 힌두교교를 버리고 불교를 택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후 켈루스카르는 암베드카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유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기존의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하층민의 지위향상이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당시 간디와 갈등을 겪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간디는 카스트제도 안에서 하층민의 지위향상을 주장한 반면에 암베드카르는 카스트제도 자체를 부정했다.
이 선언은 당시 인도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각회 등 당시 인도의 소수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큰 지지와 성원을 받았는가 하면, 또한 정치, 종교계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간디는 종교란 집이나 외투처럼 바뀌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로 암베드카르의 입장을 비난했다.
나시크에서 힌두교와의 결별 선언 이후 바로 불교로 개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시크 선언 후에도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특정 종교가 아니라 하층민의 지위향상이었으며, 그것은 주로 정치활동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19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인도독립과 함께 네루정부의 초대법무장관을 지냈다. 1948년 그가 초안한 헌법이 이듬해 거의 원안대로 확정됨으로써 그는 인도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1949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1회 세계불교도 회의 이후 여러 불교 모임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였으며, 1951년에는 인도 불교도 모임을 결성하여 보다 조직적인 불교운동을 펼쳤다. 1956년에 집필을 마친 〈붓다와 그의 다르마〉(The Buddha and His Dharma)는 불교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신불교도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1956년 12월 5일 입적하기까지 그는 공식적으로 7주 동안의 불교도였지만, 근대인도 부흥운동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획기적이었다. 그로 인하여 불교로 개종한 힌두교인만도 75만 명이 넘었다.
“불교개종만이 하층민 인권보장”천명…75만명 따라
그래도 살아있는 불교의 명맥이 감지되는 곳은 대각회 사원들이다. 불자가 아닌 배낭여행자들에게도 대각회 사원들은 싸고 인심 후한 숙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도만이 아니라, ‘만민의 선(善)을 위하여, 만민의 행복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던 다르마팔라의 인류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부흥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활동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최근 뭄바이 시내 한복판에 암베드카르의 동상이 세워지고, 산치의 마하스투파를 본뜬 대형 신불교사원이 조성되었다. 신불교도의 가정에는 으레 부처님의 사진과 나란히 암베드카르의 사진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불교 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에게 있어서 개종은 불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감화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사회적인 신분을 벗어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신불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힌두 카스트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으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거룡/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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