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 가옥에는 곡물을 비롯해 채소나 씨앗을
보관하는 '곳간'이 있었다. 서민들 집에는 약간의 곡
식과 다음 농사 때 파종할 씨앗 정도를 보관하는 것
이 고작이었지만, 부자들은 많은 곡식과 계절마다 나
는 푸성귀나 작물로 곳간이 넉넉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많은 소출을 거두어 곳간을 헐
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려는 말씀(루
카12.,16-21)을 포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하다.
보릿고개로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곤경에 처하면
올바른 부자들은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을 구하곤
했다.
나는 부자는 아니지만 나만의 '곳간'을 가지고 있다.
십여 년 전부터 피정 봉사나 특강을 통해 생기는 부
수입을 전부 그곳에 넣어 두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고 있다.
지난해 자선 주일을 지내며 그 이름을 '자캐오 곳
간'이라 부르기로 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기쁨
에 넘쳐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
겠노라 노래했던 자캐오의 마음을 닮고 싶어서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 그것도 필요한 만큼 쓰
고 나서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은 자선이 아니다. 자선
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닮고자 하는 노력이며 내
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다.
하지만 원죄의 결과로 생겨난 탐욕이 언제나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돈 보고 침 뱉는 놈 없다'고 사
제인 나도 마찬가지다.
낚시가 유일한 취미인데 요즘은 물가가 많이 올라 한
번 출조하는 데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교회에서 받
는 돈으로는 한달에 한 번 출조하기도 버겁다. 게다가
정년퇴직해 백수가 된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기울여도 아
직은 '직장인'인 내가 내는 것이 속 편하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올라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내 아이
성적이라더니 마산교구 사제들 생활비도 십일 년째 같
은 자리에 있다.
사정이 이러니 슬그머니 돈 욕심이 생겨나고 주머니
에서 찬 바람이 불 때면 어깨너머로 자캐오곳간을 기웃
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농심'을 떠올리며 마
음을 다잡는다. 농부들은 춘궁기 때 굶어 죽는 한이 있
어도 파종할 볍씨는 절때 먹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낚시를 못가는 한이 있어도, 백수 친구와 김치
한 쪽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더라도 '자캐오곳간'은 절대
손대지 않으리라.
이름만 그럴듯한 자캐오 곳간에 들어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누
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마음으로 마굿간에
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고 싶다.
윤행도 신부.(마산교구 경화동성당 주임)
가톨릭 다이제스트 통합지(2022.1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