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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이사야 43:1~7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와도 같은 감동적이고 힘을 주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문에 보면 맨 처음 시작하기를 ‘웨 아타’ 곧 ‘그러나 이제 여호와가 말하노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는 말을 하는 까닭은 이사야 42장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매우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자기의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종답지 않게 행하였고 하나님의 증인된 사명도 저버렸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친밀하게 대해주었으나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보여주었으나 보려 하지 않았고 많은 것을 들려주었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도둑맞고 탈취를 당하고 노략을 당하였으나 구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보호자인 하나님을 향하여 배반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탈자에게 넘겨 맹렬한 전쟁의 화마에 잡혀 불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께 돌아올 마음을 품지 아니한다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셨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라는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죽고 산 자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으나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슬픔 중에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충하여 처참한 상황 속에 처한 자기 백성을 향하여 다시금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고자 합니다. 이 메시지는 바벨론에 떨어져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갈 유다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일 뿐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돌아올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부르심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신 그의 깊고 영원한 사랑을 다시금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네 가지의 행동을 보여주시며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 택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창조하다는 이 단어는 ‘빠라’입니다. 이 단어는 완전한 창조행위를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완전히 새롭게 존재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이 완전히 없는 가운데 만드신 민족과 같습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백세에 낳게 하는 기적을 통하여 창조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또 다른 이른 이스라엘을 두고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었다’는 히브리어 단어 ‘야차’ 역시 만들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만들어진 것을 구체적인 형태와 형질로 빚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신정 국가로 빚어가신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막을 주시고 제사장을 주시고 율법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가는 형태를 조성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속하다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위험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저 애굽의 왕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실 때 권능의 팔을 내밀어 열 가지 재앙을 행하면서 그들을 건져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은 원문대로 한다면, ‘너의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후에 그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불러주셨고 야곱에게도 얍복강가에서 네 이름을 이제부터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이름을 붙여 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의 백성들이 있지만 특별히 그의 이름을 자기의 친아들처럼 불러주셨으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이처럼 네 가지의 행동 속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버릴 수 없고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대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결코 버릴 수 없고 그들을 여전히 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가 깊고도 끈질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그 풍성하고도 중첩적인 사랑의 행동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아셨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체적으로 조성하셨고 우리를 주님의 존귀하신 피 값으로 영원히 죄와 사망과 영벌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과 딸로 낳으시고 우리를 부모가 이름을 붙여 불러주었듯이, 친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1절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감동적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환난이 있고 시련이 있을지라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1절 중간절에서 따뜻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이트카 아니”라는 이 히브리 문장은 마치 우리 교회 이름 “함께가는교회”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너와 함께 가리라”
“이트가 아니!”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도, 강을 건널 때에도 그렇게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물이 그들을 침몰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불 가운데 지날 때에도 타지 아니하고 불꽃 가운데 들어갈지라도 불꽃이 사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폭양과 모래로 가득한 열사의 사막을 사십년 동안 지났는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늘이 되어주심으로 한 사람도 목이 말라 죽거나 햇살에 지쳐 죽은 자가 없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늘이 되어 주시고 밤에 불 기둥으로 따뜻하게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으나 살았고 다니엘도 사자굴에 떨어졌으나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이는 세 친구의 풀무불에 주님께서 함께해주셨으며 사자의 입을 천사를 보내어 막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지금도 우리가 홍수와 같은 시련과 불 같은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그 능력의 팔로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은 주의 택한 백성인 야곱과 이스라엘을 향하여 연이어 말씀하십니다.3절과 4절에서 대속물을 주실 만큼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3,4절을 읽겠습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이심이라 내가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을 택하신 거룩하신 분이요 그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극히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기서 말씀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이스라엘 대신에 애굽이나 구스와 스바 곧 리비아나 에티오피아와 같은 이방 민족을 이스라엘 대신으로 내줄지언정 이스라엘은 내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저 아프리카 북부까지 침공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황폐화하지 않고 넘어간 것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할 때에 본래 멸망시키기도 알렉산더 대왕이 작정했던 유다의 백성들을 살려주고 이집트로 공격 대상을 돌린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주의 백성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인 우리가 너무나 귀하기에 천만금을 내주고, 온 세상을 내줄지언정 우리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4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눈물 나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보배롭게’ 즉 지극히 값비싸게(히, 야카르) 보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존귀하게’ 곧 원어적으로 보면 ‘무겁게(히, 카바드), 영광스럽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뜨겁게 조건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씀 히브리어 ‘아하브티이카’는 단어는 남녀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가서에서 말씀한 바, 죽음같이 강한 사랑으로서 온 가산을 다 주고도 사랑과 바꾸지 않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잃느니 차라리 다른 것을 내어줄지언정 절대로 우리는 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야곱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잠시 징계했고 잠시 죄 때문에 징계하여 온 세상에 흩어보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자기에게로 불러 모으십니다. 5절로부터 6절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세상 끝에서라도 언제든지 다시 불러오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찾아내어 친히 모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 팔방, 그 땅끝에서라도 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여 그의 품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 자들 중에 바로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무한하신 사랑하심 때문에 우리가 버려지지 않고 이렇게 그 품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고자 합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가 세 번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창조하다(빠라), 짓다(야차르), 만들다(아사)”, 이 세 동사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한한 애정과 성실한 수고와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빚으시고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어오셨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빠라;는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창조의 행위, ’야차르‘는 우리를 보이는 바 외적인 형체와 내적인 모습인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조성 행위, 그리고 ’아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지혜와 재능과 성격과 모든 삶의 방식들을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 친히 모범으로 보여주시어 양육하시는 부모의 친절한 교육적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 존재는 완전히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친히 만드시고 우리의 삶을 지도해오신 하나님이신 고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위대한 사랑과 능력과 수고로 빚으셨거늘 우리가 잠시 잘못을 저지르고 곁길로 나아갔다고 해서 우리를 영원히 포기하겠습니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 11:8 말씀에 이르기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젆기 불붙듯 하도다”(호세아 11:8)
그렇습니다. 아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우리를 놓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하고 어리석게 행하고 설령 배반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우리를 이름으로도 아시기고 부르시는 아버지시기에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물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이요 불 같은 시련 가운데도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멀리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친히 붙잡아 자기에게로 이끌어오실 것이니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후서 2:13)고 말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언을 굳게 믿읍시다. 이 영원하고 끈질기고 포기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힘을 얻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일어나 이 세상 순례의 길을 힘차게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