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허브 외 4편
곽미숙
살포시 쓰다듬으면
귀찮다는 듯 살짝 물러나지만,
이 향기 어쩔 건데
너는 간지러워 재채기했다지만,
두 눈 닫고 사르르 녹아드는
이 몸 어쩔 건데
꽃도 아닌 것이
꽃잎처럼 연약한 것이
칸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바람만 불어도
만져봐
만져봐 재잘거리지
손으로 살짝 스치기만 해도
까르르 웃고
온몸 비틀며 재잘거리는 네가
아주 오래전 그 아이 같아서
어쩌면, 수억 년 전
내가 너였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야
내 몸이 이리 흠뻑 젖을 리 없지
너만 자꾸 보일 리 없지
정기 검진 하러 가
산다는 게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아 미끄러운 얼음 위 조심조심 가다가도 잠깐 딴생각하면 미끄러지기도 하고, 서로 빨리 가려다 부딪치기도 하고, 재수 없으면 개구멍에 빠지기도 하지
어느 날, 발아래 시퍼런 물이 보이더라고 조금만 늦었으면 물귀신에게 잡혀갈 뻔했지 그때만 해도 아직 다리에 힘이 있을 때라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지
열 살 땐가 숙제로 올챙이 잡는데 물귀신이 내 다리를 확 잡아당겼어 그땐 바로 딸려 들어갔지 꽤 깊은 웅덩이였나 봐 아래로 쑥 내려가는데 한참을 내려가더라고,
올라왔다 내려갔다 두 번 했으려나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어 물 속에서 끌려 내려갈 때 느낌이 지금도 생생한데
쑤욱, 내려가는 순간 황홀하다고 해야 할까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렇게 편안하더라고 죽은 사람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걸 보면 그곳이 그리 사나운 곳은 아닐지도 몰라
단단하던 얼음이 살얼음 되고 다리가 떨리면 그땐 조용히 따라가야겠지만, 그때까지 물귀신 이제 그만 만나려고
오늘 기차 타고 정기 검진하러 가
안 하는 게 아니라
제사 준비하던 할머니가 한말씀하신다
요새 젊은것들은 그냥 놔둬도 알아서 잘 하더만, 그때는 와 그랬는지 몰러 한창 힘 좋을 때 한 방에 두면 지상 없이 해서 아들 몸 상한다꼬 날을 정해 합방시켰제 합방하는 날은 초저녁에 일찌감치 방으로 들라 보냈어 오랜만에 남편 보이 좋기는 하데 그란데 다음날 문 열고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어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얼굴도 못 들었제
옆에서 동태전 굽던 동서가 거든다
행님요 집에서만 단속하마 뭐 하는교 아들이 기생집에 가서 기를 다 뺏기는 것도 모르고 잘난 남편 뺏기는 거도 서러분데 종일 죽을둥 살둥 일만 했잖은교 요즘 젊은것들은 한방에 둬도 너무 안 해서 탈이더만 우리사 그래사도 일곱여덟은 보통인데 요새는 팽팽 노는 것들이 둘도 겨우 낳잖은교 그 힘 아껴서 어디다 쓸 낀고 몰러
말에 고물 묻을까 손녀가 덥석 받아서
할매요, 아낄 힘이 어디 있능교 영혼까지 탈탈 털어도 집 사기도 힘드니더
백 살 먹은 벽이 말하길
내 이름은 새마을금고야 명찰 속에 동그라미가 굴렁쇠로 굴러다녀 무슨 동그라미가 이리 많은지 다리가 다 휘청거려 한창땐, 삼백육십다섯 장의 명찰을 단 적도 있어 모두 화장실로 갔지만, 예쁜 여인이 매달 찾아오던 호시절도 있었지 생각난 김에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내게서 아직 흙냄새도 가시기 전 이야기야
이 방에 호랑이 시어머니와 순둥이 며느리가 살았어 사랑채와 안채로 남녀가 헤어져 자던 때야 시아버지 출타 하시는 날, 마루에 앉아 나물 다듬는 색시를 신랑이 툭 치고 지나갔어 색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시어머니 몰래 사랑방에 가더라고 눈치 빠른 호랑이 시어머니가 가만 있었겠어 눈에 불이 뚝뚝 떨어졌지 그날 밤 젖은 낙엽으로 내게 찰싹 붙어서 자는 새댁 때문에 어린 나도 흠뻑 젖었어 그래도 아기는 쉬지 않고 태어나더라고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늘어나던 동그라미가 멈추자 또 다른 이름의 동그라미가 아귀처럼 시간을 잡아먹고 있지 사람들은 잡아 먹히는 줄도 모르고 굴렁쇠 돌리기 바빠 똑똑한 휴대폰 때문에 명찰이 사라질 위기라며
AI!, 괜찮겠어?
음치 팔아요
음치 사세요
이 제품은 복사품이 불가능한 희귀품입니다
한 번만 들어도 잊지 못하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뚝배기가 깨지기도 하고 음이 절뚝거리며 돌아다녀도 걱정하지 마세요 해치진 않아요
찰거머리 같은 애인이 있나요? 악덕 채권업자를 만났나요
음치 한번 사용해 보세요 효과가 바로 있을 거예요
음치에도 서열이 있어요 귀여운 음치, 지독한 음치, 독을 깨는 음치
곽가 다섯 남매가 노래방에 가면 독 수십 개를 깨요 어지간한 음치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음치도 유전이라 아무 데서나 살 수는 없어요 혹시 결혼 안 하셨나요?
마침 조카가 한 명 있으니 말씀만 하세요 마지막 남은 음치랍니다
핏줄이 증명하는 순수 음치예요
부부 모임에서 가끔 음치가 보이면 남편이 얼른 음치를 덮어요 그렇다고 기 죽을 음치는 아니죠
노래 중간중간 음치가 나 여기 있네 하며 얼굴 내밀면 모두 웃음보가 터져요
음치는 잡초보다 질겨 죽을 때도 같이 가요
외로우신가요? 음치 사세요
외로워질 수 있는 부작용은 있지만, 절대 배반하지 않아요
당선소감
곽미숙
광양 매화마을에서 처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왔습니다.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 뿌리내린 지 어느덧 오 년. 처음 녀석을 데려오던 날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해마다 거름 주고 때 맞춰 물도 주며 정성을 다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무는 좀처럼 몸을 키우지 않습니다. 우리 집 토질이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제 타고난 성정이 그러한 것인지, 오 년이 지난 지금도 녀석은 겨우 어른 무릎 높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도 해마다 제 안의 힘을 모아 마당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 내밀어 봄을 알립니다. 비록 쑥쑥 자라 큰 그늘을 만들지 못해도 오래 내 곁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느지막이 발을 들인 문학의 길에서 귀한 소식 들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애지의 가족으로 기꺼이 맞아주신 반경환 선생님, 심사위원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주춤거리는 제 걸음에도 용기가 생겼습니다. 시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내로 인도해 주신 이진흥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의 울창한 숲을 보여주며 눈을 뜨게 해 주신 장옥관 선생님 감사합니다. 함께 공부하며 격려해 주신 문우님 고맙습니다. 큰 그늘을 만들 순 없어도, 남은 시간 꾸준히 피고 지는 나무가 되겠습니다. 느리지만 깊게 뿌리내리는 매화의 마음으로, 시의 숲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약력 : 2015년 문장 여름호 수필등단
이메일주소 : misook121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