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8: 1 여호와의 말씀 - 슥 8: 2 여호와의 질투
제 8 장 : 진리의 성읍과 성산
1. 예루살렘의 회복 ( 8: 1-8 )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장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소망의 약속들이 제시되어 있다.
스미스(Ralph L. Smith) 같은 학자는 이것을 가리켜 열 가지의 약속들(Decalogue of Promises)이라고 불렀다.
슥 8: 1 여호와의 말씀 -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본 장에 약속된 축복이 사람의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다는 의미에서, 첫 머리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고 선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별들의 무리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으며,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왕을 의미한다(Bavinck).
물론 하나님으로서 왕이라는 뜻이다.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노래는 당시 유대교와 비 유대계 철학의 일정한 관념들을 써서 나사렛 예수의 존엄성과 중요성을 알맞게 선포한다.
* 요 1: 1-5, 9-12, 14, 16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노래는 창세기 1장에 비추어 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세상이 존재하게 만드셨다.
이 권능 있는 말씀을 힘입어 세상이 존재하게 되고 세상에 빛과 생명이 있게 되었고, 바로 이 권능 있는 말씀이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이 되어 세상 한 가운데 나타나셨다(요 1: 1-4, 14).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발전시켜 놓은 사상과 이 노래를 관련시켜 보면, 그 뜻을 더 잘 알 수 있다.
창조 이전에 존재했고 창조의 수단이었다(지혜 9: 1-2).
오랫동안 이 세상, 특히 이스라엘과 아주 긴장되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 지혜(요 1: 5, 9-12)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등장했다(요 1: 14).
그렇지만 '지혜'에 대해 말하지 않고 '말씀'에 대해 말함으로써 당시 철학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신적인 세계 이성을 가리키는 개념(곧 헬라 말 '로고스')을 일부러 뽑아 썼다.
이 세계 이성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온 누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비유대 세계에 대해서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노래에서 이끌어 쓰고 또 여러 상징과 개념을 빌어쓴 당시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사변과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된 '말씀'(지혜)이 피조물이 아니라 - 최초이자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 하나님 자신이다.
* 요 1: 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20: 28 -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일 5: 20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그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실제로 정말로 사람 , 곧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1:14)는 점을 강조한다.
슥 8: 2 여호와의 질투 -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과 교제(교통)하시기를 원하신다.
2]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 시온
원래는 "여부스족"의 본거지로서, 뒤에 다윗 왕이 점령한 여부스 요새의 본 이름인데 "예루살렘"의 한 부분으로 그 뒤로는 "다윗 성"을 가리킨 말이다.
* 삼하 5: 6-9 –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그 후에 "성전"이 건축된 산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예루살렘 전 도시를 의미하는 시어(詩語)로 사용되었다.
* 사 40: 9 -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 욜 2; 23 -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신약에서는 예배 공동체나 하나님의 현존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 히 12: 22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 계 14: 1 -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질투
"질투"한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나'이니, 시기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뜨거운 관심을 가리킨다(Calvin).
* 출 20: 4-5 –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출 34: 14 -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 신 4: 24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 신 6: 15 -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 신 32: 16, 21 –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3]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분노함으로 질투"한다고 함은, 이스라엘의 적에 대하여 분노하시며 질투함이다.
자기의 백성 관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죄는 미워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마귀의 질투는 죄를 사랑하면서 사람은 미워하는 심리이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Pusey).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하시며 그를 위해 크게 분노하심으로 질투하셨다. 시온, 곧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택하신 성이었다.
그가 시온을 위해 질투하시는 것은 그 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 성이 지금 황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는 범죄한 시온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황폐케 한 이방 나라들 때문일 것이다.
시온의 회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