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닷의 3차 변론
[욥 25장]
[내용개요]
본장은 그 내용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과 권능을 찬양하는 부분(1-3절)과 인간의 의롭지 못함과 나약성을 말하는 대목(4-6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으로 빌닷은 이처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내세워 욥의 이론을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강 해]
본장은 욥기 가운데서 가장 짧은 장으로서 불과 6절밖에 안 됩니다. 본장은 수아 사람 빌닷의 세번째 변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닷은 악한 자들의 형통을 주장한 욥의 반론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상대적으로 인간의 비천함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욥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1) 세번째 변론에 나서는 빌닷
본장은 빌닷의 세번째 변론으로 친구들의 모든 변론들 중 마지막에 속합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지금까지 욥의 말을 듣고 욥의 견해를 반박하지는 않지만 나약한 인간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빌닷의 주장은 친구인 욥의 고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진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장의 빌닷의 논리가 욥을 비판하는 데 사용된 것은 올바르지 않지만 그의 주장은 진리임에는 분명합니다.
a. 권능이 하나님께 속함(시62:11)
b.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음(대상16:27)
2) 권능의 하나님
빌닷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주권과 권위의 근원이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권능은 독립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어느 누구도 이러한 권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다(참조, 신32:39)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 주듯 이 하나님께서는 유일무이하신 분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구원 역사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은 그 어떤 희망이나 구원의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a. 큰 권능으로 구속하심(느1:10)
b. 주의 오른손의 권능(출15:6)
3) 위엄의 하나님
하나님은 위엄이 있는 분으로 모든 피조물은 그 앞에서 굴복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공통점은 정확한 신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맹목적이고 광적인 신앙에 휩쓸리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일수록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더욱 올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촉하심으로 우리에 대하여 모르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분은 머리털이 몇 개 인지까지 계수하시며 마음의 계획과 생각까지 세밀하게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숨기거나 감춰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섬기고 그 앞에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a. 존귀와 권위를 입으심(시104:1)
b.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미5:4)
2. 화평케 하신 하나님
1) 화평을 베푸심
빌닷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푸시느니라'의 원래 뜻은 수행하다 혹은 준비되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미래형인 동시에 조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간구하기만 하면 언제나 영원히 은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추어진 심령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면 화평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a.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심(엡2:16)
b.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목(고후5:18)
2)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권능과 위엄만을 소유하신 엄한 분이 아니라 인류에게 평화를 제공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참조, 엡2:14). 또한 예수께서는 친히 평화의 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가 영원한 평화 조약을 맺게 하셨습니다(참조, 요일4:9-10)
· 화평 하는 자의 복(마5:9)
3) 화평케 해야 될 성도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로 자기의 몸을 드려 희생의 제물이 되심같이 화목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분쟁과 분열이 생겨져서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화목한 가정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물이 되어야 하며 화목한 교회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a.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함(욥22:21)
b. 벗어 버려야 할 옛사람(엡4:22)
3. 하나님 앞의 인생
1) 의롭지 못한 인생
빌닷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불결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의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들은 불의밖에 드러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행위로써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터놓으셨습니다. 부녀에게서 난 자들인 인간은 모두 깨끗하지 못하지만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a.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욥9:2)
b. 행위로 의에 이르지 못함(롬3:19-20)
2) 의로운 인생이 없음
빌닷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어둡고 부족함을 설명하며 여기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가를 추론해 내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인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유전적인 타락성으로 인해 한 사람도 죄악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새로워져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죄악 중에 출생함(시51:5)
b.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3) 벌레와 구더기 같은 인생
인간의 부패성과 유약성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벌레나 구더기 외에도 진토(참조, 시103:14),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참조, 시62:9), 풀과 안개라 고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이렇게 연약한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겸손히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a. 티끌과 같은 존재(창18:27)
b. 신속히 날아감(시90:10)
결론
본시편에는 빌닷의 세번째 변론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빌닷의 말은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를 욥에게 적용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도 힘써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2절. 권능. 원어 <lv'm;:마솰>은 '지배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뜻을 지니며 보통 하나님이 소유하신 주권을 가리킴. 베푸시느니라. 원어 <hc;[;:아사>는 '행하다, 수행하다, 준비하다, 만들다, 이루다, 성취하다'등의 뜻을 지님. 부녀에게서 난 자. 세상의 모든 사람을 뜻. 이들은 죽게 되고 이 세상 가운데서 사는 동안에도 죄로 인하여 고통과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
[신학주제]
빌닷의 세번째 변론. 본장이 간략한 진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본장을 편집상의 오류로 보는 시각들이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는 첫째, 1,2차 대화 주기와 비교해서 욥의 세번째 변론이 그 어느 때보다 긴 것으로 미루어 빌닷의 변론도 길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둘째, 본장에 이어진 욥의 답변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찬양하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순수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권능과 위엄'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다음 장에서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잘못된 것이다.
[영적교훈]
본문에 나타난 빌닷의 논리를 종합해 보면, 그는 불순한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성을 변론하는 시도가 쓸모 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욥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간의 무가치함과 대비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를 변론한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욥의 무죄성 발언을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빌닷의 변론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결코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성도들은 우리 자신이 이처럼 약하고 쓸모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위엄이 있는 분으로 모든 피조물을 그 앞에 굴복하고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주님의 시선 글쓴이: 카페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