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8. 기관지명도 발행인도 새체제로
1 그 다음 달 8월 1일부로 김영휘 신임 협회장이 임명되었던 것이고, 그 해가 다 가기 전 12월 20일 성화의 역사를 잇는 월간 ‘통일세계’는 인가를 얻어 발행되었고 그 발행인은 협회장인 김영휘 씨 이름으로 되었고, 통일세계 제작은 그해 8월 1일 발령 난 출판부장 장영창 씨(편집장)와 출판부 과장으로 간 최윤기 씨에 의하여 되었다.
2 만 3년 동안 장영창 씨가 출판부장으로 중임을 맡아 수고해왔었는데, 1973년 8월 10일 출판부의 폐쇄로 통일세계 제작을 다시 내가 떠맡게 되었다. 1981년 11월 1일부 발령으로 내가 편사실장(編史室長)이 되기까지 한 9년 남짓 무사히 통일세계도 맡아 제작해왔다.
3 10년간, 처음엔 편집장 일을 장영창 씨와 최윤기 씨가 해오다가 한때 문권용 씨에게로 넘어갔었고, 거기서 다시 최윤기 씨에게로 넘어왔다가 1979년 7월 호부터 현재까지 김선곤 과장이 맡아 수고하고 있다.
4 통일세계의 실무 주역은 얼마 동안의 단절 기간을 계산에 넣더라도 단연 최윤기 현 문화부장이고, 또 그 육성에 공이 크다고 안 할 수가 없다. 문화부 출판 과장 출신으로 간부급에 오른 사람으로는 전협회 출판부장 장영창 씨를 비롯, 국제승공연합 홍보국장 황인태 씨, 현 주간 종교 편집국장 이경재 씨, 현 협회 문화부장 최윤기 씨 등 제제 다사가 떠오르면서 그런대로 내가 관장해온 문화부의 발전적인 내용의 표시체인 것만 같아 마음든든하기 이를 데 없다.
5 내가 한 일의 하나는 유일한 지방 개척 전도의 기화라고도 할 수 있는 1957년 여름 사상 최초의 일제(一齊)지방 대도시 개척 전도 시 전남 목포시에 이기완(李奇完) 모친과 함께 40일간 나갔던 일이다.
6 조희관(曺喜灌) 선생이라는 국문학자 한 분을 접촉하였었다. 그런데 이 분은 전반적으로 긍정하면서 신념이 솟아오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는데 우리가 올라온 후 몇 달 지나 숙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7 다른 분들에게도 말씀은 널리 전했으나 하나도 결실을 보지 못하였었다. 이때에 나는 바로 교정이 끝난 원리해설(原理解說)의 가쇄지(假刷紙)를 가지고 가서 전도하였었다.
8 문선명 선생님이 쓰신 원리원본과 또 그 강해하신 내용을 토대로, 체계화하는 집필 작업은 유효원(劉孝元) 전 협회장에 의하여 원고가 1956년 만 1년 걸려 탈고되었다.
9 당시만 해도 유효원 씨에게, 다른 몇 분 간부들과 함께 사용한 공동 침실 외에 전용 침실이나 협회장실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또 협회사무를 성화청년회에서 대행하고 있던 때였던만큼 협회 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무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고 있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