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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공생애 예수님 부활예수로 바꾸기>의 줄거리:
예수님의 사람이 있고 예수쟁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이름을 불러도 예수쟁이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듣기와 먹기입니다.
공생애 예수님 부활 예수로 바꾸기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오늘 말씀 중심으로 <공생애 예수님 부활 예수로 바꾸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공생애 예수님 부활 예수로 바꾸기’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목에 대해 설명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홈페이지의 구조상 제목을 길게 쓸 수가 없는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제목이 단축되는데 오늘 제목도 본래라면 “공생애 예수님을 부활 예수님으로 바꾸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서 꼭 님 자를 붙이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홈페이지 구조상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 대해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공생애 예수님이 아닌 부활 예수님입니다. 이는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활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머무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마음과 예수님과의 연합(un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설령 예수님에 대해 박사학위를 받았을지라도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과의 동일시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을 말하니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합과 동일시는 별개의 과정이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생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해야 하는 이유는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일시가 이루어질 때 그다음 과정으로써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언급하는 빈도수가 적어도 궁극적 목적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부활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함께할 때는 하늘과 땅을 향해 가장 온전한 선민다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선민다움의 완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민다움의 완전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다소 조심스럽습니다마는 마음이 부활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면 하늘과 땅을 향해 가장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본문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으로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결론을 위한 전제로써 부활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서 그 방법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부활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만남에는 증거가 생기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식사도 하게 된다면 마음에 느낌이 생기고 교감이 오고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되셨습니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없다면 공생애 예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생애의 예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선민다움의 마음가짐을 갖고 이 세상을 향해서도 선민다움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러한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공생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란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공생애 예수님은 부활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만 합니다. 아직도 공생애 예수님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병 고치시던 예수님, 능력을 행하시던 예수님을 붙잡고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살펴보면 참 이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라고 하였습니다. 엠마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11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 중에 어느 곳이 엠마오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이십오 리를 왕복으로 계산하여 예루살렘에서 6km 떨어진 지역을 엠마오로 추측합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하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앞서 여자들이 무덤에 왔다가 천사들을 만나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을 보고 열한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보고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이 보고를 함께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아니었지만 열한 제자에 준하는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열렬한 추종자라는 제자들이 손과 발에 못 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지닌 채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고가 반복되었고 아무리 부활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고작 사흘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복잡한 거리도 아니었고 한적한 길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 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지닌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기적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로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가리어졌다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눈이 고정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삼 년 동안이나 쫓아다녔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눈앞에 서계시고 대화까지 하면서도 의식으로는 인지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눈이 가리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두 제자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공생애 예수님께 고정된 상태였기에 부활 예수님을 향할 수 없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희한한 기적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이란 누가가 계속해서 강조해 온 별세를 염두에 둘 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별세로 번역된 엑소도스(ἔξοδος)는 탈출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이 출애굽이었다면 예수님의 별세는 출세상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부활하심을 통해 세상을 빠져나오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제자의 관점이 세상에 묶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이라고 하였고 이어서 21절을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서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재현할 사람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고정되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제자들의 시선이 세상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별세 즉 세상 바깥으로 나가시기 위한 출세상의 사건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대면하였던 예수님은 이미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처럼 두 제자의 마음이 예수님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기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누가는 이제까지 별세와 있음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강조해왔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부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 예수님은 별세하신 상태이기에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있는 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제자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셨음을 언급하며 자신들은 그러한 예수님이 나라를 독립시키고 다윗 왕국을 재현하셔서 태평성대를 이루실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공생애 예수님에게 묶여있는 상태에서만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이 알았던 것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이었기에,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공생애 예수님께 묶여있었던 이유는 있음과 좋음을 느끼던 대상이 여전히 세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갖게 하는 소원의 대상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세상 바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는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못 박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 한, 마음을 드릴 대상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장님이 천만 불짜리 수출 계약이 갑자기 취소되어서 사업상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온 마음과 신경이 쏠리게 됩니다. 회사를 살려달라고 기도도 해보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가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배우자에게 몰입되는 동안에는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고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좋음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고, 배우자가 너무나 싫어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마음으로 배우자를 느끼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마음으로 배우자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회사든 배우자든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한 마음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세상 바깥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한다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과 소원이 세상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눈이 가려진 상태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말씀의 결론을 앞두고 지금까지 강조하면서 모든 말씀의 행간에 집어넣었던 있음이라는 단어, 좋음이라는 단어, 소원이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붙박이로 있지않는 한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선이 세상에 고정되어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소원하고자 한다면 부활 예수님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있음과 좋음의 느낌과 소원이 예수님이 계신 세상 바깥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활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두 제자에게 공생애 예수님은 이제 없어진 존재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다 끝났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경계 바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나고자 하시며 연합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마음을 드려서 연합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끝나신 공생애 예수님이 아닌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제자처럼 마음이 세상 안에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세상의 있음을 먼저 느끼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세상에서 이루고자하는 소원이 있다면 마음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과 연합은 불가능합니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대화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길거리의 나그네처럼 여기고 말았습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26절 이하를 보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27절을 보면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였고 32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버림당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에 대해 가리키거나 예언하거나 포함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이야기 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식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표현되는 과정이 29~31절에 걸쳐 나타납니다.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이미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실 때에 예수님인 것을 알았는데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십니다. 떡을 떼어주셨다는 것은 바로 며칠 전에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킵니다.
앞서 본 22장의 19~20절을 보면 최후에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단순히 특별한 음식을 통해 성찬예식을 마련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떡과 포도주는 우리의 밥과 국이나 찌개같이 평범한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이 한국에서 태어나셨다면 밥을 퍼주시며 내 살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국을 퍼주시면서 내 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일상의 식사처럼 생활화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식의 진짜 의미입니다. 성찬식은 그저 예배당에 모여서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그날을 기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찬예식을 제정해 주신 본래 의도를 따르자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먹으면 성찬식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제정해주신 예수님의 취지를 따르자면 혼자 있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동일시하여 밥 먹듯이 먹으면 이것이 바로 성찬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성찬식과 동일하게 떡을 떼어주셨고 이들은 비로소 성찬식의 말씀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게 됩니다. 성찬식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밥을 먹듯이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가 없으셨다면 두 제자가 각자 떡을 먹도록 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떡을 떼어주시며 성찬의 의미를 재현하심으로써 두 제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들이 나그네로 여겼던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31절을 보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 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저 보이지 않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제자의 마음과 연합하시고자 하셨던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공생애 예수님은 버림당하시고 모진 수난을 겪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먹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공생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먹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듣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듣게 된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들음은 구약으로부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계된 구절들을 말씀해 주실 때 두 제자의 마음은 뜨거워지게 됩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모른 채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부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즉 공생애 예수님이 버림당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몸이 아닌 마음으로 부활 예수님과 만남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누가는 이 기이한 현장에서 들음의 의미를 포착했습니다. 두 제자가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던 것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일지라도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이 전해질 때 듣는 이의 마음에서는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을 바라게 되었다면, 공생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과 연합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말씀을 듣고 먹음으로써 비로소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먹는 것은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밥으로 먹으면 우리의 마음은 부활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연합할 수 있게 됩니다.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의 대상으로 믿으며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삶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소원을 가지고 나가서 일하고, 가정을 돌보며, 사회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완전체가 된 모습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선민의 완전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식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의식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있음의 느낌에 대해 죽고, 세상의 좋음의 느낌에 대해 죽고, 세상에 관한 소원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있음과 좋음의 느낌과 소원은 끝나야만 합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의식으로 먹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마음이 부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좋음의 대상이심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격의 기본바탕이 될 때 선민으로 완전체의 삶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바탕 위에서 진행되는 삶의 현장마다 하나님의 뜻은 임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필요한 능력과 지혜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 있음과 좋음과 소원함을 유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필요와 뜻에 따라 마음껏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듣고 먹을 때에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엊그제 십자가복음방송을 처음 듣게 되신 세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중 한 분께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설교가 너무 많아서 어디에서부터 들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쫓기는 마음을 갖지 마시고 오늘 방송을 들으시고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시즌1부터 들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숲속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십자가로 이루어진 숲을 산책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고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선민다움의 완전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들음이 없이 십자가 죽음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 아침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와 먹음을 통해서 연합해야 하는 예수님은 공생애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예수님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공생애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여 있음과 좋음과 소원이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인격의 기본바탕을 이룰 때에 공생애 예수님을 대신하여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공생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생애 예수님의 죽음을 듣고 먹음을 통해 부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질 때에 공생애 예수님의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전하고 듣고 먹음에 착오가 없게 해주심으로써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시고 하늘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선민다움의 완전체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로 옮겨가신 공생애 예수님의 빈자리를 내가 대신 메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