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본 문: 베드로전서1:8-9
설교일: 2024. 4. 7(주일 낮 예배) - 부활절 둘째 주일
우리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도 다 죽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불변의 진리는 “예수님 믿는 사람은 다 예수님처럼 부활한다.” 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지요 !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1) 그러면 우리는 정말 이 고백대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몸의 부활과 영생’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는 문제를 나와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종이 가까운 분을 위해 기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90을 넘게 사셨고 이제 너무 노약해서 곧 하늘나라 가실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죽는 것을 생각 안합니다.
사실 곧 하늘나라 가실 것 같은 분에게는 기도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 이제 사랑하는 자녀롤 부르실 때가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디 육신도 고통이 없게 하시고, 마음도 평안하게 하시고,
자녀들 후손들에게 남길 신앙적인 유언도 빠짐없이 할 수 있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시고,
하나님 받아 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그렇게 기도하고 표정을 살펴 보면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닙니다.
임종이 가까운 사람도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 살아있는 기간이 좀 다를 뿐이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 십자가는 두 가지 죽음을 상징합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2) 또 하나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 곧 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죽으심과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는 두 가지 부활을 상징합니다.
1)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2) 또 하나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혹시 이런 비교 해 보셨나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과 우리가 부활해서 사는 시간
그리고 그 삶의 질, 곧 그 삶의 수준을 비교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100년을 살고, 부활해서는 천년 만년 산다고 하면
백대 천, 또는 백대 만으로 비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해서 사는 시간은 천년 만년이 아닙니다.
영원한 시간, 영생입니다. 100년이란 세월과 절대로 비교가 안됩니다.
또 그 삶의 질, 삶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삶은 야곱의 고백처럼 험난한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해서 사는 삶은 복락, 최고의 영화로운 삶입니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은
정말 정말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지난 부활 주일에 우리는 부활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부활신앙은 부활의 과거적 사건 곧 2,000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이고,
2) 부활신앙은 부활의 현재적 사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서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현재적 사실을 믿는 것이고,
3) 부활신앙은 부활의 미래적 사건 곧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산다는 미래적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우리 다함께 오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니”에서
여기서 “너희가” 이 너희가 누군지 알아야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너희는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엄청난 박해를 피해 지금의 터키 지방으로 흩어져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혹독한 핍박을 피하여 지하에 도시를 이루고 살기도 하고,
갑바도기아 산 속 바위 굴 속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언제 붙잡혀서 사자의 밥이 되고, 그 끔찍한 화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지하에서 굴속에서 숨어사니 항상 먹을 것도 부족합니다.
매일 서로 조금씩 나누어 먹고, 나누어 입으면서도 그들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너희는” 바로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은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혹독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그토록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보통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큰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기쁨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이고,
이 기쁨이 없으면 믿어도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이가 오랫동안 고시 공부를 하다가 합격통지를 받을 때의 기쁨도 생각해 보십시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기쁨은 그런 기쁨과 비교가 안되는 기쁨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이 기쁨은 최고의 기쁨, 최상급의 기쁨입니다.
베드로서를 쓴 베드로에게는 정말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유대관원들과 로마 군병들이 베드로를 잡아가지고 때리고 능욕하고
쇠사슬에 매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했어도 사도행전 5장 4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앞을 떠나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능욕을 받도록 하시다니 ~~ 너무너무 기쁘다~~
그렇게 기뻐하면서 공회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말로 표현이 안되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누리는 하늘의 기쁨, 천국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하여 토마스 아켐포스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기쁨이 내 마음에 임하면 마른 땅 같은 마음이 살아나고,
그 속에 경건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속에서 선한 열매가 맺히고,
죄의 부정한 것들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과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게 되고, 새로운 소리를 듣게 되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상상할 수 없었던 주님과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거, 이 기쁨의 원천,
이 기쁨이 솟아나는 세 가지 샘물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사랑의 샘입니다.
오늘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도다 ’
이 광야같은 세상, 사막같은 세상에서의 기쁨은 사랑에서 솟아납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따라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사랑하면 기쁨이 따라옵니다.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도 복된 일인데, 보지 못하고도 믿고 사랑하니 얼마나 복되겠습니다.
이 복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샘입니다.
8절의 중반을 보십시오
“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러분 ! 믿을 때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는 말은 기뻐합니까?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 기뻐합니다.
기뻐합니다 - 예수님을 믿습니다 / 똑 같은 말입니다.
셋째는 구원의 샘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부터 오는 기쁨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기쁨
기쁨은 이렇게 구원의 샘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
그렇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인생의 마지막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구원이 바로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지금은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도 미완성의 구원입니다
미완성의 구원도 기쁨이 있는데, 완성된 구원에서 오는 기쁨은 어떠 하겠습니까?
이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인지 아세요?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서기에도 부족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친한 친구처럼 대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전혀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고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오늘을 살고, 즐겁게 내일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 가는 그 곳이
아무리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급히 떠나려고 하지 않고,
다만 하늘 아버지가 부르실 때까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 때를 조용히 그리고 기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우리는 야곱의 고백처럼 험난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넘치는 세 개의 샘을 꼭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샘입니다.
둘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샘입니다.
셋째, 그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이 구원받는 구원의 샘입니다.
이 샘에서 말할 수 없는
그리고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넘치는 기쁨의 샘물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풍성하게 솟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