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의 고향] 16. 페샤와르 ④ 페샤와르의 올드 바자르, 핍팔 만디
오래된 시장 핍팔 만디서 부처님 설법했던 보리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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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샤와르 올드 바자르(구 시장) 중 하나인 핍팔 만디(핍팔라 시장) 중심부의 핍팔라 나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도 이 나무가 언급된다. 석가모니불이 이 나무아래 앉아 설법하며 현겁에 출세하는 천불(千佛)은 모두 여기에 앉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
카니시카 왕의 700척 높이의 장엄하고도 화려하였던 대탑도, 협(파르슈바) 존자가 맑은 바람(淸風)을 일으켰고 세친 논사가 ‘구사론’을 지어 지극한 공덕을 이었던 그의 승원도, 부처님이 사용하였던 두말 들이 큰 발우도 오늘의 페샤와르와는 무관하다. 페샤와르 박물관 1층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완벽한 도상(圖像)의 불상 또한 오늘의 페샤와르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크고 작은 저 많은 불상과 불두는 아득한 시간 저 너머 존재하였던 것들이다. 그 때 저것들은 탁티바히나 사흐리 바흐롤의 감실에서, 스투파 기단에서 회랑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읊조림은 물론 숨소리조차 들었을 것이다.
시장 속 핍팔라 나무가 곧 보리수
나무 중심으로 상점들이 들어서
원형 골목 형성해 둥치는 안보여
폐샤와르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의
서북변경지대 종착역이자 카불을
거쳐 헬레니즘·타클라마칸 너머
동방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발역
2천년 전에도 동서물산의 집산지
시장은 욕망이 뒤끓는 천변만화
인간 모든 양태 표출되는 삶 현장
일찍이 간다라에는 1000여 곳의 승가람이 있었고, 이곳 푸루샤푸르는 무착과 세친, 협 존자와 여의, 법구 등 수많은 논사들의 고향이었다지만, ‘대비바사론’에서는 여전히 간다라 제대논사(諸大論師)들의 견해가 인용되고 있지만, 오늘날 페샤와르 현실에서 불교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페샤와르는 한 때 힌두의 세계이기도 하였고, 시크교의 세계이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무슬림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지배하는 듯 한 이념과 그에 따른 외형상의 차별일 뿐, 페샤와르의 현실 자체는 옛날의 그 때와 다름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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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 카트리 앞에서 내려다 본 세티 스트리트. |
페샤와르는 이미 말한 대로 그랜드 트렁크 로드(Grand Trunk Road: ‘GT로드’로 약칭)로 일컬어지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긴 도로의 서북변경지대의 종착역이자 잘란다라와 카불을 거쳐 헬레니즘의 세계와 타클라마칸 사막 저편 너머 동방세계로 나아가는 시발역이기도 하였다.
벵골 만의 치타공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이르는 이 길은 17세기 쉐르 샤 수리(Sher Shah Suri: 1540∼1545 재위)에 의해 확장되었지만, 이는 이미 마우리야 왕조 시대 북방 즉 캄보자(카슈미르 푼치일대)와 간다라(16대국 중 하나)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의 ‘웃타라 파타(Uttara patha: 北路로 한역)’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북방으로의 길은 동쪽 갠지스 강 하구 탐라립티카(오늘날 탐루크)에서 수도 파탈리푸트라(파트나)를 거쳐 푸루샤푸르에 이르는 2600㎞의 대로였다. 사르바스티(사위성)의 수닷타(Sudatta) 장자가 500대의 수레에 물품을 싣고서 라자그라하(왕사성)로 장사하러 간 것도, 탁실라의 푹쿠사티 왕이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과 교유한 것도 이 길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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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티 하우스. |
페샤와르는 2000년 전에도 장사꾼(카라반)의 도시였고, 동서 물산의 집산지였다. 시장은 욕망이 뒤끓는 천변만화(千變萬化), 인간의 모든 양태가 표출되는 인간 삶의 현장이다. 페샤와르의 옛 지명 푸루샤푸르는 ‘인간의 도시’라는 뜻이다. 인간은 모든 것이다. 천변만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슬픔과 기쁨, 축복과 저주의 만상이 담겨있다. ‘리그베다’(Ⅹ. 90. 1-2)에서 푸루샤의 노래(puruṣasukta)는 이같이 시작한다.
푸루샤는 천개의 머리와
천개의 눈과 천개의 발을 가졌도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대지를 감싸고 서 있었나니
그러고도 아직 열 손가락의 너비가 남아 있었네.
이미 있었던 것과 앞으로 있을
이 모든 것이 푸루샤로다.
그는 불사의 세계를 지배하는
제사와 음식을 취하여 날로 증대하도다.
여기서 푸루샤는 물론 불사(不死)의 절대자이겠지만, 술의 신 소마(soma)가 도취의 술이 추상된 것이듯이 인간의 신 푸루샤 또한 만상의 인간이 추상된 것이다. 인간현실의 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시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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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샤와르 대표적 상징인 커닝햄 시계탑. |
올드 페샤와르는 수많은 바자르(시장)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2000년 전 부처님 발우를 모신 승가람이었다는 고르 카트리는 시장 끝머리 낮은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굴제국 시대 그곳이 카라반 사라이로 바뀐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거상(巨商) 호상(豪商)을 꿈꾸는 동과 서 세계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에게는 안전한 숙소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사라이(salai, selai; 범어 s´a-la-, 舍羅, 舍離, 福舍로 한역), 불전에서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짓는 것은 도로·교량·원림·연못 등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복업의 하나로 찬탄되었다.
바자르 중앙광장에서 고르 카트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이 세티 스트리트(Sethi street)란다. ‘세티(seṭṭhi)’, 그것은 바로 수닷타와 같은 거상을 일컫는 말이 아니든가? 동아시아 역경승들은 이를 ‘장자(長者)’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수닷타는 대장자(mahāseṭṭhi)였다. 그는 항상 고독한 자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급고독(給孤獨, Anāthapiṇḍika)이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 친구(동업자)인 라자그라하의 장자 집에 갔다가 불타께서 출현하였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초대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정사를 조성하였다. 그것이 불교 최초의 사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 기원정사(Jetavana)이다.
세티 스트리트가 물론 수닷타와 같은 불교의 외호자를 기리는 명칭은 아니었고, 페샤와르에서 가장 오래된 거상 중의 하나인 세티 가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무굴시대 지어진 세티 하우스가 카이버팍툰콰 관광협회에서 발간한 안내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어 찾아가 보았다. 그들은 차르시대 러시아와도, 중국혁명시대 상하이와도 통상하였다고 한다. 세티 하우스는 눈이 닿는 곳마다 그냥 둔 곳이 없었다. 무엇으로든, 어떤 형식으로든 장식하였다. 거주용이 아니라 감상용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하 3층까지 내려간 것은 무더운 여름을 나기 위한 용도란다. 술탄의 작은 궁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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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통의 한 식당 사람들. |
무굴시대 이래 페샤와르 시장(바자르)은 16개의 문과 이를 잇는 벽으로 구획되었다. 이로 인해 페샤와르는 ‘벽으로 둘러쳐진 도시(Walled city)’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중반이후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5개의 문만이 남았단다. 관광 안내서를 따라 바자르 투어에 나섰다.
페샤와르 박물관을 나와 우측(동쪽)으로 조금 내려와 고가다리를 통해 철길을 넘으면 바로 만나게 되는 시장, 카이버 바자르이다. 페샤와르에 도착하여 처음 찾아갔던 로즈호텔이 있는 사거리이다. 인근에 카이버 패스 쪽에서 오는 버스 터미널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온갖 장식에 알록달록 색칠한 트럭형의 대형버스가 혼잡함에 아랑곳이 없이 길을 누빈다. 모든 시장을 다 헤맬 수는 없고, 중앙광장을 목적지로 삼아 좌측 카불리 게이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록 낡았고 먼지와 어지러운 간판, 전선이 뒤엉켜 눈길도 제대로 가지 않았지만, 목 조각이 장식된 무굴풍의 테라스를 달고 있는 목조건물이 이어졌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호화스러움이 쉽게 상상되었다. 안내서에 적힌 대로 치과병원과 변호사 사무실이 자주 눈에 띈다. 변방에 온 이들을 위한 것(?)인가?
일정구간 고깃간이 있었고, 고기를 토막 내거나 그것을 구워 파는 음식점도 이어졌다. 번듯한 식당도 있고, 샛길 모퉁이 작은 화로에 연신 부채질하며 꼬치를 굽기도 하였다. 냄새에 기가 막혀 쪼그려 앉은 이들 사이에 함께 쪼그려 앉아 뭔지 모르지만 꼬치 하나와 짜파티 한 장 시켰다. 간이었다. 염소 간이었다. 다들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우리도 웃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테러’ ‘폭탄’ ‘살해’ ‘위험’ 같은 단어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놀이마당이나 축제장인 듯 착각되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 것이다. 꼬치 굽는 이도, 같이 쪼그려 앉아 꼬치를 먹는 이도 근엄한 수염에 어울리지 않게 흥겹게 웃고 있었다.
카불리 게이트가 나왔다. 카불로 나가는 문이다. 물론 저쪽 반대편 고르 카트리 너머에는 라호리 게이트가 있다. 카불리 게이트를 지나면 큇사 카와니(Qissa Khawani) 바자르이다. 이야기꾼(storyteller)의 시장이라는 뜻이란다. 천변만화의 시장에 어찌 이야기가 없을 것인가? 그들이 갔던 곳의 이야기, 그들이 온 곳의 이야기. 그들이 보았고 만났던 사람, 들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시장은 품목별로 다시 구획되어 있었다. 항아리나 접시와 같은 구리나 놋쇠 제품 시장, 질그릇 시장, 숄이나 옷감시장, 신발시장, 여성용품, 심지어 열대어와 새를 파는 시장이 별도로 있었다. 미로 같이 좁은 골목 양편으로 금은보석 가게가 즐비한 안다르 샤흐 바자르, 대낮임에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전등을 켜놓고 있었다.
그 골목 통에 실내의 벽면과 기둥과 천정을 온통 기하학적 문양으로 식물의 덩쿨을 어지러울 만큼 화려하게 그려놓은 마하바드칸 모스크가 있었다. 타일이 아니라 채색한 것이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섬세하고 화려하다. 샤자한과 아우랑제브 시대의 이슬람 전통 디자인 양식이란다.
큇사 콰와니 바자르와 안다르 샤흐 바자르가 끝나는 곳에 쵸크 야드가르, 기억의 광장이라는 이름의 중앙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1965년 인도 파키스탄 전쟁영웅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북쪽 야채가게를 지나자 페샤와르를 대표하는 명물인 커닝햄(20세기 초 이 지역 주지사) 시계탑이 나타났고, 주변의 가죽시장과 2009년 파키스탄 최악의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났던 어린이와 여성을 위한 시장인 미나 바자르, 계속 이어진 길이 세티 스트리트, 그리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 고르 카트리, 카라반사라이가 있다.
쵸크 야드가르 광장 뒷골목, 그곳에는 마치 골동품 화폐상으로 착각할 만큼 온갖 종류의 화폐를 쌓아놓은 환전상이 늘어져 있었고, 거기서 각종 장식용품을 파는 반자라 바자르를 지나 곡물시장인 핍팔 만디(Peepul, Pipal Mandi)에 들어섰다. 핍팔 만디, ‘핍팔라 수가 있는 시장’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핍팔라 수는 부처님께서 그 아래서 성도하였던 바로 그 나무, 보리수이다. 관광안내서에 이곳은 불타가 핍팔라 나무 아래서 설법하였다고 전해내려 오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호두와 아몬드, 땅콩과 같은 견과류를 쌓아놓고 파는 가게들을 지나는데 불쑥 큰 나무가 그나마 좁은 시장골목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아! 페샤와르 시장 한 가운데 핍팔라, 아니 보리수라니!
그런데 잎은 무성하여 하늘을 가렸지만 나무 둥치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중심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원형의 골목을 형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안내인 겸 통역을 자청하여 따라온 시장청년을 통해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에 언제부터 핍팔라 나무가 서 있었냐고? 모른다고 했다. 다시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 때부터 있었을까? 140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 그 때 푸루샤푸르의 이 나무에 대해 이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 밖 동남쪽 8∼9리에 높이 100여 척이 되는 핍팔라 수가 있다. 가지와 잎은 무성하여 그늘이 져있다. 과거의 네 부처님(과거7불 중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이 그 아래 앉았던 곳으로, 지금도 네 부처님의 좌상이 있다. 현겁(賢劫) 중에 출세할 996분의 부처는 모두 여기에 앉게 될 것으로 부처님의 가피가 서린 곳이다. 석가여래께서 남쪽을 향해 이 나무 밑에서 앉아 아난다에게 말하였다. “내가 열반에 들고 400년이 지난 후 카니시카라고 하는 일세에 뛰어난 왕이 출현하여 여기서 멀지 않은 남쪽에 스투파를 세우면 나의 다수의 골육사리가 여기에 모이게 될 것이다.”
페샤와르의 올드 바자르 핍팔 만디에서 2000년 전의 불교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문헌상에, 박물관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때는 시장이 아니었겠지만. 부처가 출현하는 곳이 사바의 세속, 저자가 아니었던가? 그나저나 폭탄테러도 사바의 한 모습이던가? 이 유구한 도시에 평화가 깃들기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