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정점과 수필
수필은 결국 내 삶을 이야기하는 장르다. 살아오면서 어느 때가 화양연화였는지 어느 때가 정점이었는지 수필을 쓰면서 생각해 보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소재 발굴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고교시절이 혹은 대학 입학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왠지 개운치가 않다. 어떤 시점을 특정하고 나면 또 다른 어떤 특정 시점이 떠오르며 환유되기 때문이다. 신혼 때일 수도 있고,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을 때일 수도 있고, 내 집 마련을 했을 때일 수도 있다.
기자 백남경 인제대 미래교육원 글쓰기교실 강사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더 아름답고 덜 아름답고가, 따로 있을 수 있을까? 그때그때가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행복한 것이다. 결국 지금 현재가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송준점 수필가의 '인생의 정점'을 함께 감상해 보자.
…칠불사 경내를 천천히 거닐다 계단 아래 줄지은 기왓장들을 만난다. 기왓장마다 적힌 글귀들에 하나둘 천천히 눈을 맞추다 발길이 묶인다. 낯익은 문장,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와 같은 글귀를 이 깊은 산사에서 보게 되니, 그 울림에 그리움이 뼛속까지 젖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다. 엄마, 내 인생의 정점은 언제쯤 올까? 어떤 이가 2년 후면 인생의 정점이 온다고 했는데, 그 2년이 다 지나가는데도 내 생활 환경은 아직도 그 자리야. 인생의 정점이 별기 아이다. 마음이 동요 없이 편안하면 그기 정점이다. 정점인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그때가 바로 정점이지.
어머니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너거 여섯 남매도 나름 잘 살고, 다른 뭣보다 이제 빚이 10원도 없는 지금이 정점이지 싶다. 빚이 없다는 거는 쫓기지 않는다는 거다. 자식들 키운다고 힘든 줄 몰랐던 그때가 정점이었는지도 모르지. 젊었을 땐 그런 거 생각할 새도 없었다. 그 삐딱 길을 지나고 온 지금이 평지처럼 편안하니 정점이다 싶지.
얼굴에는 주름이 지리산 산줄기처럼 깊게 패었고, 다리는 연골이 다 닳아 혼자서는 걷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란다. 나는 왜 언제나 인생의 저점(低點)에 머물러 있다고만 생각했을까. 엄마,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더 건강하고 더 젊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넌 아직 인생의 절반도 안 살았는데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라. 열심히 살다 보면 정점이 오겠지만, 지금 별 걱정 없으면 그기 정점이다. 걱정하지 마라….
이 글은 송준점 작가가 여든여덟의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며 수필로 구성한 것이다. 그 이듬해 그녀의 모친은 별세했다. 살아생전 모친은 배움이 짧아 원망의 대상으로 외할아버지를 탓하며, 외할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일본 여행을 비롯해 팔도를 유람하셨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한량으로 사시느라 장녀인 어머니를 초등학교도 보내지 않으셨다니 원망하실 만도 했다. 어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열여덟에 시집왔는데, 시집온 지 몇 해 지나지 않아서부터 22년간 병치레를 했다. 아버지 병시중에 여섯 남매 건사하느라 험준한 고개를, 열두 고개를 넘으셨던 일생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노모는 살아생전 빚이 10원도 없어 마음의 짐이 없고 쫓기지 않은 그때가 정점이라고 딸에게 말했다. 얼굴에는 온통 주름뿐이고 연골이 닳아서 발걸음을 내딛지도 못하는 여든여덟의 나이였다. 혹은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던 자식 낳아 키우던 그때도 정점일 수 있었겠다고 노모는 부연했다. 요컨대, 각자의 나이가 얼마이든 바로 지금이 화양연화임을 노모의 말을 통해, 이 글을 통해 다시 실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 겁을 지나왔어도 옛날이 아니며, 만세를 거쳤어도 늘 지금이란 뜻이다. 이는 지난 4월 에세이스트 경남지회 봄 문학기행 때 방문한 해인사 일주문에서 본 글귀이다. 인생의 정점이 언제일까를 놓고 생각할 때, 선현들의 지혜가 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지나온 과거도 소중하지만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과거도 그때는 현재였다. 미래도 현재처럼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것이다. 살아있다면 그 모든 순간순간이 화양연화인 것이다. 해서 그 모든 순간순간이 가장 좋은 수필 소재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인생의 정점과 수필,
"살아오면서 어느 때가 화양연화였는지 어느 때가 정점이었는지 수필을 쓰면서 생각해 보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백남경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