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전문화유산울림의 제16차 대전문화유산답사>
2018년 “대덕구의 고려시대 문화유산” 후기
□ 일 시 : 2018년 2월 10일 09:00-13:00
□ 코 스 : 옛충남도청-고흥류씨정려-쌍청당-법동고려시대건물지-용화사석불입상-점심 -충남도청
□ 참가자 : 안여종, 김긍원, 이창남, 이정애, 송종숙, 구영주, 조수빈, 허혜경 총 8명
1. 고흥류씨 정려각 및 비(高興柳氏 旌閭閣.碑)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답사 일행은 고려시대 문화답사 대덕구편의 첫 번째 장소로 고흥류씨 정려각과 비를 찾았다.
입구에 있는 정려공원이라고 적혀있는 큰 바위암각이 눈에 띄었다. 고흥류씨 정려각은 효종4년인 1653년에 열녀로써 정려를 내렸고, 정려비는 1665년(현종 6년)에 동춘 송준길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써서 세웠다는 점이 다른 곳들과 다른 특이점이라 할 만하다. 우리 지역에는 동춘 선생과 우암 선생이 함께 비문을 짓고 글을 쓴 흔적이 많은데, 우암 선생이 글을 짓고 동춘 선생이 글을 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정려비처럼 동춘 선생이 글을 짓고 우암 선생이 글을 쓴 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려비가 동춘.우암 선생의 집안 어른의 정려비라서 항렬을 따져 동춘 선생이 한 항렬 위 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게 아니겠냐고 안여종 대표님이 생각을 말씀해주셨다. 안여종 대표님께서는 전체적인 해설을 해주셨고 이번 답사에서는 김긍원 선생님께서 한자실력과 평소 해박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큰 활약을 해주셨다.
김긍원 선생님께서 정려비 비문을 읽어주셨는데 전면에는 “열부 고려진사 송극기의 처 고흥 유씨의 려”라고 적여 있었으며,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류씨부인(1371~1452)은 류준의 딸로서 진사 송극기의 부인이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었고 이때 네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친정부모가 재가시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어린 아들을 업고 개경에서부터 500리 길을 걸어 이곳 회덕의 시가에 내려왔다. 류씨부인은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아들 쌍청당 송유(1389~1446)를 잘 보살펴 훌륭히 키워 효종 4년인 1653년에 열녀로써 정려되었고, 현종 4년인 1665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2. 쌍청당(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우리 일행의 두번째 코스는 쌍청당이었다.
▲정려의 길 지도
대덕구에는 대덕구의 전통과 자연을 품고 있는 스토리가 흐르는 녹색길이 있다. 동춘당 생애길, 산디마을 산신제길, 읍내동의 덕을 품은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바로 스토리가 흐르는 정려의 길이다.
정려의 길은 동춘당, 쌍청당, 효심공원을 연결하는 길에 붙인 이름으로써, 이번 답사 두 번째 코스로 방문한 쌍청당이 정려의 길 중간에 위치한다.
쌍청당으로 가는 입구에는 쌍청당이라는 글자가 세겨진 세로로 긴 바위 암각이 세워져 있고 골목으로 더 진입하니 바로 문 앞에 쌍청당과 쌍청당기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쌍청당 안내문에는 “쌍청당은 조선 전기의 학자인 쌍청당 송유(1389~1446) 선생이 지은 별당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인 ‘쌍청(雙淸)’을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세종 14년(1432)에 지은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지만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쌍청당기는 은진송씨의 중시조 쌍청당 송유와 그의 별당에 대한 기록으로서 이 글은 1445년 동시대에 회덕에 살았던 취금헌 박팽년 선생이 지은 것인데, 선생이 남긴 몇 안되는 역사적인 기록물로서, 쌍청당과 취금헌 두 선생이 추구한 청풍명월의 선비적 삶과 이상이 투영된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쌍청당기 안내문에는 선생이 쓰신 쌍청당기 원문과 해설이 적혀있고 그 유래와 의미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쌍청당에는 후손이 살고 있어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다. 바로 문 앞 정면에는 원일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후손들이 지내는 생활공간이 보였다. 원일당을 측면에서 봤을 때 복도로 보이는 곳의 위쪽에 보(가로)와 보아지(보를 양옆에서 받치는 부분)라고 불리는 부분이 너무 멋있어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원일당 뒤편에는 안채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누마루가 너무 멋있었다. 그 우측에는 멋있는 우물이 있었고, 우물을 지나서 들어가자 우측에 봉무정(鳳舞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었다. 봉황이 춤추는 정자라는 뜻의 봉무정은 보문산의 다른 이름인 봉무산에서 따온 듯하다.
봉무정을 지나쳐 더 들어가니 유형문화재 제2호라고 적힌 비석과 쌍청당송선생유적비가 세워져 있었고, 저 계단 위 높은 곳에 쌍청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곳이 지대가 높아 쌍청당에서 고을이 잘 내려다 보였을 것 같다.
쌍청당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규모로서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긍원 선생님께서는 한옥의 몇 칸집인지 세는 방법으로 기둥을 중심으로 전면 몇칸 측면 몇칸으로 세는 거라고 말씀해주셨고, 기와에도 암기와 수기와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셨다. 또, 조선시대에는 민가에 단청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곳에 단청이 칠해져 있는 이유는 세종 초에 궁궐, 향교, 사찰 외에 민가에는 단청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 곳은 금지령을 내리기 전에 지어진 집이어서 가능했다고 설명해주시면서 현재 국내에 현존하는 단청이 있는 유일한 민가라고 강조하셨다. 이 점이 쌍청당이 중요한 문화유적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3. 법동 고려시대 건물지
유적은 선비마을 1단지 아파트와 한마음아파트와 인접하여 북동쪽에 위치하며, 우측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1995-1996년 총 3차에 걸쳐 발굴조사된 법동건물지는 고려시대 건물지 7기, 배수로 시설 1기, 우물 1기, 수혈유구 1기,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친 담장시설 2기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을 감안했을 때, 건물지는 11-12세기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선비마을 1단지 아파트와 주변 도로의 개설로 유적의 일부가 주거용지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최병현, 김근완, 류기정, 허세연, 전일용, 2002, 12-217쪽>
* 자료 출처 : 대전문화유적분포지도
일행과 고려시대 건물지를 찾아가보니 현재는 그 일대가 응봉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다만, 우리가 추정한 그 곳에 이런 담장이 남아 있었는데 이 곳으로부터 몇 십 미터 좌측에 남양홍씨 집터라는 안내판과 그 담장이 남아있었는데 이곳이 남양홍씨 집터의 우측 끝 담장인지 고려시대 건물지의 마지막 남은 흔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우연히 찾은 남양홍씨 집터는 조선 중기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태백오현 중 한사람)이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은 공로로 현 집터를 하사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 집터는 약 1천평에 이르고 99칸 대가였다고 한다. 현재는 이렇게 담장만 남아있었는데 우리나라 전통한옥 담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헐리지 않고 이렇게나마 남겨지게 된 것 같다.
4. 용화사석불입상(龍華寺石佛立像)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계족산 봉황정 중턱에 위치한 용화사에 도착했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니 좌측에 용화사 사찰창건유래 안내판이 있었다. 용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 회덕현불우조(懷德縣佛宇條)에 계족산 동북쪽에 있다고 언급한 봉주사가 이 용화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대웅전 좌측에 우리가 보려고 하는 용화사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용화사석불입상의 조성시기에 대해 통일신라시대, 후백제 이후, 고려시대 초 까지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 것 같으나 우리는 고려시대 초일 수도 있는 이 석불을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정했다.
석불의 총 높이는 2.5m, 불상 높이는 1.49m로 연꽃잎 모양의 광배에 석불이 부조되어 있다.
석불입상 머리의 육계는 뾰족한 편이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며 눈, 코, 입은 작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불의(佛衣)는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는데 가슴에서 U자형을 이루면서 양쪽 어깨에 걸치고 있다. 불의는 신체의 볼륨감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는 등 10세기 전후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광배는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고 당초 무늬를 아름답게 새겨 넣었다.
용화사석불입상은 2010년도에 문화재 보수. 정비사업을 했다. 지지를 위해 석불 하단에 붙여 놓은 흉물스러운 시멘트덩어리를 제거하고, 이전에 세 동강이 난 석불을 접합할 때 사용한 수지의 변색된 부분을 제거하는 등, 훼손되었거나 훼손을 가속화시키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복원의 측면에서 땅속에 묻혀진 석불을 온전히 들어올렸다.
또한, 소박하고 고졸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석불에 대좌가 너무 화려하면 자칫 문화재의 아우라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대좌의 설계는 불필요한 장식적 요소는 최대한 자제하고, 대부분의 정밀 세공은 모두 기계가 아닌 검증된 장인의 손으로 직접 정 작업을 하였으며, 대좌의 양식 또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남원의 만복사지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을 참고하여, 최대한 사라진 대좌에 가깝도록 고증하여 복원하는 등 약 3개월에 걸쳐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용화사석불입상을 끝으로 고려시대문화답사 1차 대덕구편의 답사를 마쳤다.
아직은 좀 쌀쌀한 날씨였지만 소규모로 진행하면서 코스가 많지 않아서 여유로운 답사였고, 1년만에 재개된 대전문화유산답사여서 더욱 의미있는 답사였다. 3월 2차 답사인 유성구 편이 더욱 기대가 된다.
*글쓴이 : 2018.2.11 허혜경
첫댓글 멋진 답사기와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좋습니다. 허간사님 오랜만에 공부 좀 하셨습니다. ㅎㅎ
매월 멋진 답사 준비하도록 노력하고, 후기도 정리 잘 해서 의미있는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네요.
알차고 즐거운 답사였습니다.
안내 해주신 안대표님과 살뜰이 챙기시는 허간사님 감사합니다. 특히 김선생님이 비문과 석불에 대하여 풀어서 설명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