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새밭의 비타민
김상분
겨울이 오면 주방 싱크대 옆으로 작은 남새밭이 만들어진다. 감기를 달고 사는 영감님을 위해 겨우내 총백탕을 끓이다 보니 대파를 자주 사게 된다. 김장도 끝나고 동지가 지나면 좀 한가해져서 심심한 김에 시장에 나가 대파를 두어 단 사 온다. 푸른 잎은 뭉텅 잘라내어 국거리나 양념으로 담아두고 하얀 총백 부분은 약용으로 총백탕을 만들고 뿌리 부분은 화분에 심는다. 싱크대 옆에 미리 준비해 둔 화분에 통통한 뿌리들을 단단히 심고 물 한 대접 따라 주면, 완성이다. 이제는 새싹이 밀고 나오는 연두색 움파를 보며 아침 인사도 나누며 설거지하면서도 눈길을 준다. 물도 조금씩 살펴서 주어야 한다. 뭉텅 잘려서 심어진 파 뿌리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닌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분을 알맞게 맞추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옛날 한겨울에 푸른 채소가 어디 있었으랴. 비타민이란 말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그때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 선조 어르신들은 삼동의 한가운데서도 이미 봄을 키워낼 줄 알고 있었음에 놀라울 뿐이다. 문명의 발달로 오늘날처럼 사시사철 풍성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꿈조차 꿀 수 없었기에 나름의 지혜를 키웠으리. 요즘 세상에는 현대식 마트나 재래시장이나 엄동설한에도 온갖 채소가 가득하다. 한여름에나 맛볼 수 있는 딸기가 매대를 붉게 물들인 옆으로는 캘리포니아 오렌지며 황금빛 열대과일들이 가득히 쌓여 있다. 다만 로컬 후드의 개념이나 후드 마일리지를 견주어보며 좋은 식자재의 조건을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눈 내리는 겨울날 향기로운 딸기를 생산해 내기 위해 비싼 기름으로 온실을 여름처럼 덥혀야 하는 재배 농가의 걱정도 만만치 않다. 장바구니에 비타민 가득한 채소와 과일을 옮겨 담던 손이 멈칫거려지는 이율배반 속에서 잠시 고뇌한다. 차라리 나의 소박한 남새밭을 사랑하게 되는 까닭으로 위로를 삼는다. 한겨울 파 뿌리에서 올라오는 움파의 에너지를 어느 영양가 좋은 식재료에 비견할까. 매콤하게 톡 쏘면서도 달큰한 이 맛이야말로 식구들을 위해 정성 들여 키우는 색다른 비타민이다.
파는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하며 여러 가지로 좋은 효능이 있어 웬만한 우리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향신제이다. 맵고도 아릿한 알리신이라는 성분은 날로 먹기에는 좀 맵지만 조리해서 섭취할 때는 달콤하게 그 맛이 변한다. 우리 몸에서 염증으로 인한 열은 내리게 하고 기침이나 가래를 없애준다는 한방의 이론이기도 하다. 감기나 고뿔에 효험이 특별하여 약용으로도 오랫동안 쓰였으니 바로 총백탕이다. 총백은 파의 뿌리와 줄기 사이의 흰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생강 대추 계피와 배를 넣고 시간 여를 끓이면 된다. 이때 총백의 알리신 성분은 열에 약하므로 맨 나중에 넣고 반 시간 정도만 달이는 것이 좋다. 한동안 복용하면 독한 양약이나 어설픈 종합비타민보다는 감기 몸살을 거뜬히 이겨낼수 있는 훌륭한 치료제와 예방약이 된다.
옛날 어르신들이 그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무엇이며 비타민 C라는 성분이 사과보다 다섯 배나 많고 칼슘이 풍부해서 관절 건강에 좋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과학이 발달하여 가능하게 된 가지가지의 실험을 통한 영양소 분석보다 월등하게 명확한 것은 몸소 겪어 얻는 체험과 스스로 닦아 얻은 지혜로 가능했을 것이다.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면역성을 높이고 콜레스테롤의 체내 흡수도 막아주며 노폐물을 배출시켜 비만까지 막아준다니 더 무엇을 바랄까. 시중에 판매되는 수많은 영양제와 치료제며 건강보조식품들이 무색할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만병의 근원이라는 위장을 따뜻하게 해주는 일등공산이니 수천 년 동안 광활한 중국은 물론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까닭이다. 움파 몇 뿌리 기르다가 어느새 대파 예찬론자가 된 듯하여 민망하다.
엊그제 심은 내 작은 남새밭에는 벌써 한치두치 비타민 움파가 밀고 올라온다. 며칠 후 한 뼘 넘게 자라면 통통한 줄기로 골라서 산적에 넣을 요량이다. 고기도 길쭉하게 썰어 잘근잘근 다져서 양념하여 놓고 알배기배추 고갱이는 살짝 데쳐서 세 가지 재료를 고치에 꼬인다. 도라지에 다시마도 나란히 꼬여서 노릇노릇 녹두전이나 부쳐야겠다. 지난해 담아 둔 향기로운 매실주도 벗해주리.
'움파산적 드시고 기운 내소서'
한보름 먼저 심어놓은 또 다른 화분에서도 움파가 넌출 댄다. 두 번째 끊어먹은 뿌리에서는 어느새 꽃 대궁이 솟아오르며 봄소식을 알려준다. 맑은 간장국 냄비에 무를 송송 채 썰어 넣고 끓이다가 연둣빛 움파를 넣고 계란을 풀어 얹으면 반주 후 속풀이도 안성맞춤으로 좋으리라. 겨울을 나는 춘곤의 나른함도 이겨낼 수 있겠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현관에다 멋지게 입춘첩이라도 걸어볼까.
한지를 마름하며 거실을 서성이는 할아버지 손끝에 강력한 비타민이 샘솟으려나.
첫댓글 월간 한국수필
2025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