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Vivaldi 비발디 / 이탈리아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베네치아 출생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8∼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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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베네치아 출생.
산 마르코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었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703년에 사제가 되었으나 지병 때문에 미사를 진행할 수 없었으므로 베네치아에 있는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보육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다.
| 피에타와의 관계는 단속적이었으나 죽기 전인 4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시 유럽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그곳의 여성오케스트라를 위해 많은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여 상연하였다. 이 작품들 가운데 오늘날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트리오소나타집 작품1, 1705]이며 그 뒤 [바이올린소나타집 작품2, 1709], 출세작이 되었던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 작품3, 1711]을 비롯하여 1713년까지 기악곡만 작곡하였다.
13년 4월 피에타의 악장이 퇴직함에 따라 종교음악의 작곡도 시작하였는데, 이때 유명한 [글로리아]를 비롯하여 미사곡·시편·모테트 등이 탄생되었다. 오라토리오 [적장 홀로페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디트]는 14년에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1710년대에 그는 오페라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13년에 초연된 [별궁의 오토대제]로 명성을 얻어 산탄젤로극장의 작곡가 겸 흥행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4년 사육제(겨울) 시즌은 그의 오페라 [광기를 가장한 오라토리오]로 개막되었으며, 17년까지 다시 2편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1716∼17년에는 모이제극장을 위해 3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18년 이후 그의 활동은 각지로 넓어져갔다. 그해 4월에 만토바에서 오페라 [이집트전장의 아르미다]를 상연한 것을 시초로, 20년까지는 만토바에서 오페라를 상연하였고 그뒤에는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23년과 24년의 사육제에서 [테르모돈강의 헤라클레스, 1723]를 비롯하여 3편의 오페라가 로마에서 상연되었다. 알토가수 안나 지로와의 관계도 이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24∼47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오페라가수였는데, 비발디는 사제의 신분으로 그녀와 그 자매인 파울리네를 늘 곁에 두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1726∼28년 비발디는 다시 베네치아의 산탄젤로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악곡도 많이 출판하였다. 1725년에는 [사계, 四季]를 포함한 협주곡집 [화성법과 인벤션의 시도 작품 8]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고, 27년에는 협주곡집 [라체트라 작품 9]를 출판하여 황제 카를 6세에게 헌정하였으며, 28년 무렵에는 [바다의 태풍]을 포함하는 [플루트협주곡집 작품10], 29년에는 [협주곡집 작품11·12]가 출판되었다.
29∼33년에 비발디는 프라하를 비롯하여 각지로 여행하며 오페라상연을 하였는데, 33∼35년에는 산탄젤로극장과 산살루트의 그리마니극장을 위해서도 몇 곡의 오페라를 썼다. 베네치아에서의 오페라 활동은 이 무렵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에는 베로나·안코나·레조·페라라에서 크게 흥행하였다.
38년에는 암스테르담의 왕립극장 백년제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명예와 성공을 얻은 반면에 성직자답지 않은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페라라에서는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베네치아에서의 평판도 떨어졌기 때문인지 40년 갑자기 고향을 떠나 다음해 7월 여행지 빈에서 객사하였다. 약 770곡의 작품 가운데 오페라는 46곡, 소나타가 약 90곡이며, 그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500여곡의 협주곡이 있다.
리토르넬로형식을 주된 구성 원리로 하는 협주곡 편성의 대부분(약 350곡)은 독주협주곡이며, 그 가운데 약 230곡은 바이올린협주곡이다. 약 60곡 되는 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오페라의 서곡에 가깝고 전고전파(前古典派) 교향곡의 선구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J.S. 바흐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Antonio Vivaldi (1678∼1741)
독주 협주곡의 선구자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쳐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15세 때 삭발(?)하고 성직자가 된 그는 25세 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9월 그는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다. 그곳은 일종의 고아원으로서 특히 음악 교육에 중점을 둔 곳이었다. 비발디는 실기 지도는 물론이고 원생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나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유는 주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그는 미사곡, 모테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도 많이 썼다. 또한 오페라에도 손을 대는 등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초인적으로 창작활동을 해 나갔다. 그의 속필은 특히 유명해서 전문 사보(악보를 베끼는 작업)들의 사보속도보다도 더 발리 풀 스코어(오케스트라나 합창악보)를 써제끼곤 했다.
그의 작품은 현을 위한 협주곡만도 400곡을 넘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마다 특색이 별로 없다는 흠을 남기기는 했지만, 뒷날 비인 고전파의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 의해 확립된 독주협주곡의 선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공로가 있다. 그렇지만, 오페라 흥행에 손을 대고 여가수 안나 지로와의 염문을 뿌리는 등 사제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좀 의문이다. 그 때문에 빈축을 사고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객사해 그곳의 빈민 묘지에 묻혔다. 바이올린의 연주에도 초인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던 그는 자만심이 강했고 낭비벽이 심해 갖가지 일화를 많이 남겼다.
생일이 둘인 허약한 칠삭둥이
비발디의 생일은 1678년 3월 4일, 혹은 같은 해 5월 6일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세상에 인생 출발을 두 번 했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들어본 적이 없는 즉, 어느 쪽이 진짜인지 좀더 상세히 살펴볼까? 후자인 5월 6일이 그의 생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그 날이 바로 그가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직접 낳은 어머니의 말은 조금 다르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출생의 위기를 넘기고 이제는 정상처럼 자라리라 확신이 서게 되었을 무렵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실토했다고 한다.
"그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1678년 3월 4일이었지요. 아마 점심때이었을 거예요. 갑자기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큰 지진이 저희가 살던 베네치아를 뒤흔들었어요. 그때 저는 안토니오를 가진지 일곱 달밖에 안되었는데, 집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큰 배를 감싸쥘 겨를도 없이 벽에 가서 쾅 부딪혔어요. 순간 저는 정신을 잃었지요. 깨어나서 들으니, 그때의 충격으로 안토니오가 태어났다지뭐예요? 칠삭둥이가 살면 얼마나 살까 싶어 세례도 미루다 백일이 되어 용케 목숨이 붙어 있기에 그래 5월 6일에야 세례를 받은 거랍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전자인 3월 4일이 비발디의 진짜 생일인 셈이다.
어쨌든 비발디는 15세 되던 해 삭발(?)하고 올레오 수도원에 입문했다. 그러나 칠삭둥이로 태어난 이래 줄곧 시름시름 앓으면서 간신히 자란 몸으로 정상적인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수도사 생활을 해나가기란 아무래도 무리였나보다.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 그만은 특별히 집에서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 덕에 소년 비발디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바이올린 지도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뒷날 그가 매일같이 작곡을 비롯한 갖가지 격무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한 친구가 충고를 했다. "몸도 돌봐야지. 제발 건강 생각 좀 하라구." 그러자 비발디는 가볍게 되받아서 말했다. "그런 소리 말게. 난 어릴 때부터 건강이 신통치 않아 얼마나 많은 덕을 보았다구...!"
'붉은 머리 사제'의 갖가지 기행
비발디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기는 했지만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드물게 머리색이 붉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25세 때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된 후로도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여전히 곱지가 않았다. 물론 그의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붉은 머리도 한 몫을 한 것이다.
"비발디는 스페인 투우장에 내보내면 힘들게 붉은 헝겊을 휘두를 필요 없이 머리털만 들이대면 소하고 좋은 대결이 되겠다."
"붉은 색 머리는 악마의 머리이지 사제에게 어울리는 머리는 절대로 아냐."
온갖 비웃음과 극언을 참다못해 비발디도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나뭇잎이 붉어지면 오, 아름다운 단풍이여! 하고 감탄하면서 머리털이 좀 붉기로 그렇게까지 헐뜯을 건 뭐냐 그 말이야."
성직자가 된 후에도 비발디는 하느님보다는 바이올린을 더 열심히 섬겼다(?). 미사전례를 걸핏하면 빼먹어 동료들이 한참 찾아다니다 보면 성당 으슥한 구석에서 약음기를 끼고 바이올린을 열심히 켜고 있는 그를 발견하는 일도 비일비재였으니까. 자연히 그는 사이비 사제로 사람들 눈에 비칠 수밖에 없었고, 그의 그러한 행실은 주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교는 대노해서 당장 그를 불렀다. "그대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 하느님은 그대가 하는 짓을 다 알고 계시니, 하느님은 높은 곳에서..." "잠깐만, 주교님, 저는..."
비발디가 성난 주교의 말을 가로막으며 한 말이... "저는 하느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주교는 정말 화가 나서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냐는 듯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무슨 불결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느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이란 말인가?" "네, 그것은 바이올린 E선을 제7포지션으로 눌렀을 때의 '라'음입니다."
'붉은 머리 사제'에게 붙어 다니는 일화 가운데는 미사를 올리는 도중에도 영감이 떠오르면 숨어서 푸가를 작곡했다는 그럴듯한 얘기가 있는데, 비발디는 이렇게 해명을 하기도 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허약해 선 채로 미사를 올려야 하는 직무를 끝까지 수행하기 어려워 잠시 쉬기 위해 자리를 떴을 따름이다."
어쨌든 성직자로서 그의 근무 태도는 과히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작곡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기도책과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가 쓴 악보 첫머리에 LDBMDA ('축복 받은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여 아멘'이란 뜻)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곡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의 신앙심이 결코 얄팍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그의 이중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먼저 베네치아의 당시 분위기를 잠시 살펴보자. 그 무렵의 베네치아는 세계 제일의 무역 항구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거친 뱃사공들과 음악가를 꿈꾸는 할일 없는 몽상가들이 우글거렸으니 성 관계가 문란할 수밖에. 거리에는 사생아며 고아들이 넘쳤고 갓난아기를 교회 문 앞에 버리는 일쯤은 예사고... 오죽했으면 베네치아를 찾은 양식 있는 외국 인사들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인, 특히 베네치아 사람들은 생애의 절반은 종교에서 말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하느님의 용서를 비는 데 바치고 있다!" 따라서 언뜻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는 비발디도 특별한 베네치아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올 법도하다.
알토 가수 안나 비발디 평지로와의 염문
비발디는 나이 45세 무렵부터 알토 가수 안나 지로와의 관계가 범상치 않게 깊어졌다. 지로는 프랑스에서 이민 온 가발제조공의 딸로 비발디에게 성악을 배운 제자였다. 비발디가 노래 실력도 대단치 않은 그녀를 자기 오페라에 자주 등장시켰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여러 사람들의 입네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안나의 동생 파올리나가 비발디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그들 자매와 비발디는 아예 한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더욱 흥미 있는 가십거리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고, 마침내 교회에서 들고 일어나 그의 오페라는 상연을 금지시키는 한편 고아원을 위한 음악까지도 다른 작곡가에게 넘기도록 엄명을 내렸다. 또, 안나를 비발디의 정부로 단정한 사람들은 연일 아우성을 쳤다.
"명색이 사제라는 자가 불륜의 관계를 맺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이 도시에서 쫓아내라!" 견디다 못한 비발디는 결국 안나를 데리고 오스트리아의 비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의 스캔들은 이미 그곳에까지 퍼져 있었고, 한 친구가 그를 보고 빈정거렸다. "어설픈 사랑을 하다 고향에서 쫓겨났다면서?" 그러나 자만심 강하고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비발디가 그런 비웃음을 순순히 받아넘길 리 없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쫓겨나다니? 난 단지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을 따름이라구!"
비발디 평
비발디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으며, 사실 작곡가로서 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더욱 유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발디 자신은 작곡가로서 더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만큼 당시 베네치아에서 활약하던 극작가 골도니의 비발디 평에 대해서는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골도니의 평인즉 이러했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
골도니는 원래 법률을 공부하다가 희곡을 쓰는 일로 전향한 사람이었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골도니 평으로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영점이다!!"
비발디는 워낙 작품을 많이 썼으므로 사실 비슷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이 여러 곡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의 대들보라 할 독일의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7세 연상인 이탈리아의 작곡가 비발디를 몹시 존경해 그의 현악합주곡 중 몇 곡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하기까지 했다. 비발디가 <화성의 영감>이라는 곡명으로 발표한 작품 3의 전12곡 가운데 6곡을 골라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도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2백 여 년이나 지난 뒤에 태어난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비발디 평은 바하와는 퍽 대조적이었다. 그는 곡마다, 심지어는 한 악절 중에서도 몇 소절마다 박자를 바꿀 정도로 변화를 추구하는 작곡가였다. 그 때문인지 비발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스트라빈스키가 '똑같은 곡을 100곡이나 쓴 사람'이 아니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 | 출처: 자연과 도시 - cafe.daum.;net/sound708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