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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9] ‘왕관의 첫째 보석’ 인도, 제국의 손길이 그곳에 뻗치다
입력 2022.03.22 00:00
1600년 12월 31일은 인도에겐 통한의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동인도에 대한 15년짜리 무역 독점권을 ‘동인도와 무역하는 런던 상인들의 회사’에 부여했습니다. 대영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영국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최고의 보물인 인도를 손에 얻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동인도회사’가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독점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상품을 몰수해 국왕과 동인도회사가 반반씩 나눠갖기로 했습니다. 이 무역독점은 1813년까지 계속됐습니다.
4번째 편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영국 여왕의 왕관에는 105.6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습니다. 코이누르(Koh-i-Noor,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이 인도산 다이아몬드는 대영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는 동시에 수백년간 외세의 식민지로 살아야했던 인도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Coronation portrait of Elizabeth II with Philip, 1953
◇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실 동양에 대한 호기심, 더 나아가 개척에 가장 먼저 나선 선구자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영국보다 100년이나 앞서 동양에 진출했습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 루트를 연 이후 포르투갈은 무역과 정복을 위해 아시아에 적극 진출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 최초의 상관을 설치했습니다. 이어 말라카(1511)와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1515) 등에 요새를 구축하는 등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소팔라와 일본의 나가사키 사이에 40개 이상의 요새와 거류지를 구축했습니다. 이런 거점을 바탕으로 동양의 향료를 유럽에 팔아 ‘떼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기본적으로 국력이 센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인구가 150만명 안팎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으니까요.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추격을 허용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동인도회사 설립은 영국보다 2년 늦었지만(1602년) 본격적인 동양 진출은 오히려 영국을 앞섰습니다. 질과 양에서도 우세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미 1598년에 22척 이상의 상선을 동양으로 보냈습니다. 이 배들은 동양의 향료를 가득싣고 귀국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발족 당시 자본금이 54만 파운드로 영국 동인도회사(3만 파운드)를 압도했습니다. 1610년까지 출항한 배는 네덜란드가 60척, 영국은 17척이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자바와 수마트라, 몰루카 제도 등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이곳에 먼저 진출해있던 포르투갈로부터 항구와 거류지 등을 잇따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인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포르투갈이 세력을 그나마 유지한 곳은 중국의 마카오와 인도네시아의 순다 제도 정도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이후 브라질 쪽으로 눈을 돌렸고, 브라질은 포르투갈 최대의 식민지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모습.
영국도 네덜란드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은 몰루카 제도의 향료 거래에 끼고 싶었지만 다른 세력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네덜란드의 완력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두 나라는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1613년 런던, 1615년 헤이그에서 협상을 했고, 이어 1619년에는 타협안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자바의 후추는 반반씩 나누고, 반다 제도와 암보이나, 몰루카 제도 등의 정향과 육두구는 네덜란드가 3분의 2, 영국이 3분의 1을 갖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623년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 네덜란드가 재판없이 영국인 10명, 일본인 9명, 포르투갈 1명 등을 공개 처형했습니다. 영국은 분노했지만 당시엔 동남아 지역에서 네덜란드를 보복을 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동남아의 향료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했고, 영국은 자바와 몰루카 등에서 손을 떼게 됐습니다. 17세기엔 향료가 당시 유럽의 최대의 수익 상품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요. 동남아에서 물러난 영국이 그 대안으로 인도에 눈을 돌려 온 힘을 쏟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영제국의 가장 큰 기둥이 될 줄 말이죠.
◇ 드레이크와 무적함대
포르투갈을 무척 부러워했던 영국은 해외 개척(또는 국가 공인 해적질)의 최대 후원자이자 벤처 투자가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먼바다 너머’에 대한 탐험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1577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여왕의 명에 따라 해외 원정에 나섰습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게만 알려져 있던 ‘그곳’을 찾아 나선 드레이크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태평양을 건너 마침내 향료의 본고장 동남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향료의 섬들’로 알려진 ‘몰루카 제도’에서 리넨과 금·은을 주고 향료를 대량으로 구입, 귀국했는데요. 드레이크의 탐험에 돈을 댔던 투자자들은 무려 5000%나 되는 수익을 거뒀다고 합니다. 이 소식에 영국인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상상이 가네요.
역설적인 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도 영국의 동인도 개척에 적잖은 공을 세웠다는 점입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는데요. 이때 영국이 노획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배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화물들이 영국의 동양 진출에 요긴하게 사용됐다고 합니다.
1592년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인 월터 롤리 경 등이 포획한 포르투갈의 무장 상선 또한 보물단지였습니다. 이 배는 당시 영국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대형 선박이었는데 그 안에서 각종 보석, 향료와 함께 인도·중국·일본과의 무역에 대한 정보가 담긴 ‘소중한’ 책자가 발견됐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해외 진출을 원하는 런던 상인들의 욕구는 화산처럼 폭발했습니다. 그들은 모임을 갖고 투자금을 모으는 한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해외 원정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호소했습니다. 1599년 1차 해외 개척 청원에 실패한 런던 상인들은 결국 그해 말 여왕에게서 동인도 무역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 3대 공장
영국 동인도회사가 1차 항해단을 출발시킨 것은 무역독점권을 획득한지 2개월 만인 1601년 2월이었습니다. 4척으로 구성된 항해단은 4개월 항해 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수마트라와 자바 등에서 향료를 사들인 뒤 귀국했는데 항해는 성공했지만 비즈니스는 변변찮은 수준이었습니다. 후추가 빨리 팔리지 않아 출자자들도 현물 배당을 받았다고 합니다. 2차 항해단은 1604년 3월에 출발했는데, 이번에는 자바섬과 몰루카 제도 등에서 사들인 향료 판매가 성공해 투자자들이 출자금 이외에 95%의 수익을 챙겼다고 합니다.
Ships in Bombay Harbour, c. 1731
영국이 인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1608년이었습니다. 3차 항해단의 헥터호가 그해 8월 24일 인도 동쪽 뭄바이(옛 봄베이) 위쪽에 있는 수라트 앞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 배의 선장 호킨스는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도착해 자한기르 황제를 알현하고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친서를 봉정했습니다. 이후 17세기 내내 영국은 프로투갈의 방해를 뚫고 인도의 곳곳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610년대에 인도의 고아와 수라트 지역에서 영국의 인도 진입을 무력으로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613년 동인도회사는 수라트에 첫 상관을 설치했습니다. 인근 지역 상관까지 통괄하면서 최초의 프레지던시(프레지던트가 있는 곳)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휩쓸고, 무굴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인 마라타족이 잇따라 침입하면서 수라트 상관은 쇠퇴하게 됩니다.
수라트에 이어 3곳의 무역 중심지가 융성하게 됩니다. 영국인들은 요새화된 상관이 있고 프레지덴시로 성장한 이곳을 ‘공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첫째 공장은 인도 남동 해안의 코로만델 해안에 세워진 ‘성 조지’ 요새였습니다. 동인도회사가 1630년에 획득한 부지 위에 건설된 이 요새는 나중에 첸나이(옛 마드라스)로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는 인도 서부의 중심도시 뭄바이 입니다. 이 곳은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정략 결혼으로 얻은 곳입니다. 찰스 2세는 1661년 포르투갈 알폰소 6세의 딸 캐서린과 정략결혼을 했는데요. 이때 포르투갈이 캐서린의 지참금 명목으로 뭄바이를 찰스 2세에게 선물했습니다. 찰스 2세는 1668년 동인도회사로부터 5만 파운드의 융자와 매년 5파운드의 지대를 받는 조건으로 뭄바이를 동인도 회사에 양도합니다. 이후 뭄바이는 쇠퇴한 수라트의 바통을 이어 받아 1687년 프레지던시로 승격하게 됩니다.
셋째는 1990년 인도 북동쪽 벵골 지역 후글리 강 기슭에 세운 수타누티에 요새입니다. 이 요새는 나중에 다른 두 촌락과 합쳐져 콜카타라고 불리는데, 1699년 콜카타 상관은 프레지던시로 격상됩니다. 원래 벵골 지역은 무굴제국의 영향력이 커서 외국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가 뿌리를 내린 뒤 빠르게 성장했고, 특히 면포와 명주, 쪽, 초석 등 특산품이 많아 곧 인도무역의 최대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 후발주자 프랑스
프랑스는 아시아 무역에 뒤늦게 뛰어들었습니다. 루이 14세 때인 1664년 콜베르가 자본금 60만 파운드짜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1666년 수라트에 상관을 세운 뒤, 인도 동부 해안에 있는 마술리파탐(1669), 퐁디셰리(1673), 샹데르나고르(1674) 등에 상관을 세웠습니다. 특히 퐁디셰리는 현지인 4만명을 모아 면직물 공업을 발전시키는 등 인도 내 최대 프랑스 영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곳은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지금도 프랑스 색채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프랑스가 빠르게 여러 상관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당시 인도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영국을 싫어해 경쟁자인 프랑스에 특혜를 준 점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한때 자금난으로 수라트, 마술리파탐 등의 상관을 포기했다가 1720년대 들어 다시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아시아 무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인도와의 무역이 중심이었습니다. 무역량은 1720년대 영국의 절반 정도였는데, 1740년대 초에 이르면 영국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은 불가피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플라시 전투(1757년 6월)
1700년대 중반까지 동인도회사는 주로 무역에만 올인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바로 1757년 6월 발생한 플라시 전투입니다.
당시 전 세계는 7년 전쟁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유럽에서는 포메라니아 전쟁이, 북미에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인도에선 영국이 벵골의 호족과 프랑스 연합 세력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플라시 전투의 클라이브
벵골의 태수 시라지-웃-다울라는 영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영국 거류지에 잘 초대하지 않고, 영국이 프랑스만큼 훌륭한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와 손을 잡은 시라지-웃-다울라는 1756년 6월 전격적으로 콜카타를 공략해 영국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가 승리의 기분을 다 느끼기도 전에 영국이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 첸나이에서 동인도회사의 부대가 출병을 했습니다. 포트 세인트 데이비드의 부지사인 로버트 클라이브가 병력 2400여명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고, 어렵지 않게 콜카타를 수복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여세를 몰아 시라지-웃-다울라를 압박했습니다. 최후의 전투는 이듬해인 1757년 6월 콜카타 북쪽 80마일 지점에 있는 플라시에서 벌어졌습니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은 3000명, 태수쪽 병력은 5만명에 달했습니다. 엄청난 전투가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아주 시시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시라지-웃-다울라는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했습니다. 전사자도 영국이 7명, 태수측이 16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시라지-웃-다울라는 포로가 된 뒤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군의 승리는 태수쪽 부대의 내부 분열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안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클라이브는 태수쪽 군대의 부장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매수했고,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자 태수쪽 군인들이 갑자기 퇴각하면서 전투는 그대로 종결되고 말았습니다.
클라이브는 이런 상대쪽 상황을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764년 본국에 있는 동인도회사 이사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이 풍요롭고 번성하는 왕국을 유럽인 20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병력으로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사치스럽고 무지하며 겁이 많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군대보다는 배반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누가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인가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경쟁도 이 전쟁으로 판가름이 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 3차례 맞붙었는데, 마지막 싸움이 바로 7년 전쟁 때였습니다. 벵골 태수를 굴복시킨 동인도회사는 1760년 왕디와슈 전투에서 라리 백작의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듬해인 1761년에는 프랑스의 최대 거점인 퐁디셰리 함락에 성공합니다. 퐁디셰리의 함락은 인도에서 프랑스 식민지의 종언을 뜻했습니다. 한편으론 영국의 인도 진출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 벵골의 지배자
플라시 전투의 영웅 클라이브는 잠시 귀국했다가 1758년 벵골 지사로 인도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제 껍데기만 남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 알람 2세를 만나 ‘알라하바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동인도회사가 벵골과 인근의 비하르·오리사 등 지역에 대한 징세권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징세권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해당 지역의 실질적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역회사였던 동인도회사가 이제 벵골의 지배자가 됐습니다. 동시에 “17세기 이래 회사의 존재를 지배해 온 상업 원칙이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세금을 걷는 것이 직물 거래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지가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입 덕분에 유럽인들이 지휘하고 인도인들로 병력을 구성하는 한편, 고국에서 직접 파견한 육군 연대로 보완하는 ‘제국의 군대’ 형태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한때는 해적이었고, 그 다음 상인이었던 영국인들은 이제 해외에서 수백만 사람들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